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21:13)
녹취자 : 조원정
지난 사흘 저녁에 걸쳐서 우리는 묵은 땅 힘없이 나약하게 된 이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새롭게 영광을 회복하는 일에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이 같은 능력이 묵은 땅을 기경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다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어떻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그 같은 능력을 받을 수 있는가? 그 같은 능력이 어떻게 우리 가운데 나타날 수 있는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여러분과 함께 오늘 저녁에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본문의 배경을 좀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복음서에는 본문과 유사한 성전 청결 장면이 복음서마다 모두 한 번씩 모두 네 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부터 요한복음까지 다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 기사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에 따라서 신약학자들이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본문을 살펴보면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예수님의 성전 숙정 작업이 두 번 있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이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올라간 거고 나머지 세복음서의 기록은 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주간 주일날 올라가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마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오늘 본문이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 숙정이 있은 날은 일요일입니다. 시간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오전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생각을 해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로다 찬송하면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님의 입성을 많은 무리들이 환영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무리들이 마음을 다해서 종려나무를 꺾어다가 깔고 옷을 벗어 난리를 쳤는지 본문 10절은 온 성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찾아보면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장면은 한 번도 안 나옵니다. 우셨다는 장면은 몇 번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 많은 무리들에게 마지막 환송을 받으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입성하고 있을 때에 환영에 인파에 막 싸였으니까 예수님도 불쾌하지는 않으시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온통 분위기가 고조되고 제자들도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니까 덩달아 흥분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에 들어서자마자 이 인파속에 둘러싸이면서 입성하던 환영의 분위기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변합니다. 그토록 환영하던 인파들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온화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이변을 맞은 것처럼 마치 분노와 흥분에 가득 찬 모습으로 변하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사람들을 내어 쫒고 상과 의자를 뒤엎습니다. 오늘 이 예수님의 진노하시는 모습을 가르쳐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분, 의로운 분노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해 버리고 지나갈 수 없는 교회와 그리스도와 생명과 관련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시각이 그리스도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시각이 인간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준 겁니다.
우리는 이토록 분노의 몸짓으로 성전을 뒤 집어 엎으신 일에 대해서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렇죠? 예수님이 왜 그러셨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도 없을 겁니다. 뭘 생각 하냐면 아 싸다 싸 하며 예수님께서 잘하셨다며 당연하다 나라도 그렇게 했겠다 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문 속에서 성전을 숙정하시는 격렬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만나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성경을 읽으실 때 이 두 가지를 유념해야지만 성경에서 우리들에게 주고자 하는 귀중한 주옥과 같은 메시지를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을 읽을 때 너무 깊이 그 속에 빠져 들어가면 안 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 너무 깊이 빠져 들어가면 안 되고 그 성경의 바깥에서 성경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이해가 안 가실 겁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는 4장 두 장에 걸쳐서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도망갔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호렙산에 타지 않는 불꽃으로 나타나십니다.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너 애굽에 있는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 가라 모세는 무슨 농담을 그렇게 끔찍하게 하십니까? 가라. 못합니다. 안 갈래? 못갑니다. 계속 줄다리기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 훌륭해요? 안 훌륭합니까? 솔직히 말해서 어떤 의미에서 우린 발끝도 못 쫒아갑니다. 요즘 만 명만 목회해도 어깨를 피고 다니는 세상인데 이 사람은 몇 명 목회 했습니까? 여자하고 주일학교는 치지도 않고 남전도회만 60만 명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20년만 목회하면 딱지가 딱 붙습니다. 원로목사님 추대합니다. 원로목사가 두 번 되고도 남을 40년 동안을 목회합니다. 어느 정도 까지 자기네 교회 광야교회에서 순교했습니다. 이 정도로 충성되고 훌륭한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볼 수가 있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을 입은 뭔가 틀린 사람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출애굽기 3장 4장을 들여다보면 모세는 어쩌면 그렇게 겸손할까 하나님이 가라 그래도 못 갑니다 죽어도 못갑니다. 가라 싫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보면 그건 성경을 완전히 뒤집어 본 겁니다. 출애굽기 3장과 4장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게 뭐냐 하면 모세가 얼마나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 앞에 완악하고 거만한 인간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떻게 그와 같이 완악하고 지 멋대로 구는 모세를 들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위해서 사용하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첫 번째입니다. 딱 볼 때 아 다윗 그 사람하고 빠져 들어가는데 사무엘하 10장 까지는 괜찮은데 11장부터는 어떻게 됩니까? 간음하고 살인하고 온갖 더러운 거 다 나옵니다. 그때도 간음정도만 했으니 다행이지 이렇게 나갈 겁니까? 살인, 수많은 사람, 누구처럼 수천명 죽인 사람이 아니니까 한명 죽였으니 다윗이 얼마나 경건한 사람입니까? 이렇게 나갈 겁니까? 그렇게 성경을 읽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반대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너무 바깥에만 있으면 안 됩니다.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합니다. 이해가 안 될 겁니다. 창세기 22장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는 유명한 장면이 나옵니다. 너는 내가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내가 사랑하는 내 독자 이삭을 내게 번제로 바쳐라 그 다음에는 이튿날 아침 아브라함이 일찍 일어나서 가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간단한 겁니다. 바쳐라. 아브라함이 고민했다는 이야기도 없고 갔다 이걸 놓고 어떤 분은 아브라함은 하나도 고민 안했답니다. 하나님이 바쳐라 하니까 Yes sir 하고 그 다음에 갔다는 겁니다. 이거 보십시오. 아브라함도 사람입니다. 백 살에 낳은 자기 자식을 내일 아침 3일 후면 각을 떠서 불에 태워 바쳐야 되는 데 고민을 안했다면 아브라함이 천국에서 웃습니다. 가서 물어 보십시오. 얘들아 내가 그 밤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보냈는지 아느냐? 그렇게 성경을 봐라 Yes sir하면 창세기 22장을 문턱도 못 두드린 겁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여기서 떠나야 됩니다. 왕십리 기도원, 왕십리 대학부에서 떠나서 약 4000년 전 모래 바람이 부는 블레셋 땅으로 가야 합니다. 장막을 치고 살고 있는 이 아브라함의 곁방으로 가야 한다는 겁니다. 거기에 드러누워서 낼 아침에 내 자식과 떠날 길에 대하여 고민하는 아브라함의 눈물에 대해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걸 위해서 모든 성경 지식을 동원하고 눈을 감고 묵상하는 겁니다. 어떻게? 어떻게 이삭을 아브라함이 갖게 되었으며 왜 하나님이 이삭을 주셨으며 이삭에게 어떤 약속이 깃들여 있으며 그 이삭을 지키기 까지 이스마엘을 잃어버린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 모든 것을 묵상해야 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뭐가 됩니까? 성경의 행간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정말 나에게 이런 것들이 주어진다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그리고 이튿날 아침 일찍 부인과 의논도 없이 이삭을 데리고 떠나는 그 아버지의 심정 아브라함의 위대한 믿음의 결단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깨달을 수가 있는 겁니다.
오늘 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밖에서 보지 말고 창세기 22장처럼 안으로 쑥 들어오라는 겁니다. 이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2000년 전 예루살렘 성전으로 여러분들이 또 같이 올라가야 됩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찾으셨을 때 무슨 엄청난 일이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었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성전으로 들어갔습니까? 무슨 엄청난 일이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습니까? 아무 일도 안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펄펄 뛰고 화내실 만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제처럼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지난 절기처럼 사람들은 성전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작년에 행해지던 일이 올해도 그저 되풀이 되고 있었습니다. 지난달 행해지던 그 의식이 이날도 되풀이 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갈려지는 일이 있었지만은 성전을 중심해서 사는 사람들, 제사장, 서기관 이런 모든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행해지는 일들을 반복해서 성전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에 쓸 동물들을 팔았다고 하지만 이게 뭐 예수님 올라가시던 그날 생긴 겁니까? 아닙니다. 원래 구약에는 자기가 기르던 짐승들을 메고 와서 제사장에게 바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는데 BC 63년에 봄페이에 의해 가지고 온통 뒤집혀 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고 합니다. 그 이전에 바벨론에서는 소위 이야기 하는 삼인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백성들을 옛날 우리 일제시대 때 간도에다 우리나라 사람을 보내는 것처럼 마구 흩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서 맨 처음에는 그렇게 했는데 나중에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짐승을 데리고 가는 것은 좋은 데 이게 그동안 먹어야죠? 또 싸야지! 보통 복잡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예루살렘 가까이 와서 동네에 와서 하나씩 사가지고 올라갑니다. 올라가다 보니까 점점 성전 가까운 곳에서 사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다면 아예 성전에서 편의롭게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매점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공급하기로 하자 이렇게 된 겁니다.
또 예수님이 돈을 바꾸는 무리들 때문에 화를 내셨다고 하는데 화내실 게 뭐 있습니까? 돈 바꾸는 무리들이 왜 그렇게 되었냐면 당시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지방에 로마돈, 헬라돈, 히브리돈 세 개개 같이 쓰여 졌습니다. 로마돈과 헬라돈은 소위 얘기하는 그레샴의 표현에 의하면 악화입니다. 악화가 뭡니까? 이게 백원이라고 칩시다. 옛날에는 백원 그러면 표시 가액하고 똑같은 금속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걸 녹여서 팔든지 아니면 시세대로 달아서 팔든지 명목가치와 실질가치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소위 양화입니다. 헬라돈과 로마돈은 표시는 삼천원 해놓고 실지로 금속 가치는 천원도 안 됩니다. 히브리돈은 일치를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냐하면 명목가치와 실질가치가 일치하지 않는 헬라 화폐와 로마 화폐는 하나님 앞에 흠 없는 제물이 되기에는 불합격한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히브리 돈이 어디 그렇게 많습니까? 그러니까 여기저기서 바꾸니까 얼마나 복잡했겠습니까? 성전 안에 환전소를 만들어 놓고 거기서 바꿔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사실 우리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보면 여러분들이 예수님과 같이 안 들어가고 여러분들이 들어갔더라면 아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 졌구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없습니다. 왜? 어렸을 때 엄마 손잡고 갈 때도 그 일이 행해졌고 작년에 절기 때 올 때도 그렇게 사다가 제사를 드렸고 거기서 돈 바꿔서 헌금을 했고 지난달에도 그렇게 했는데 하필이면 그날따라 여러분들 눈에 이상하게 보였겠습니까? 이것이 무슨 포고령에 의해서 생긴 것 같지 않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논리적인 무리가 없이 이 일들이 행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제물을 팔고 돈을 바꾸면서 엄청난 부당 이득을 제사장들이 착복했다고 하지만 신약 학자 에프에프 부루스 같은 분은 여러 가지 문헌을 살펴보면서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역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누가 압니까? 진심으로 유대종교와 성전의 예식을 원만하게 진행하기 위해서 이들이 취한 조치였는지 누가 아느냐 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환영 인파도 예수님을 밤낮없이 쫒아 다니는 제자들도 성전에서 별다른 일이 하나님의 분노를 살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 생각지도 못했을 겁니다. 오늘 예수님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마치 징그러운 뱀을 보신 것처럼 흥분합니다. 오랜 세월 전통적인 인습에 따라 매매하던 자를 다 내어 쫒으십니다. 커다란 죄악의 현장을 목격하기로 한 것처럼 상과 의자를 뒤 집어 엎으시면서 큰 소리를 치십니다.
여러분 본문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저는 이 본문 속에서 이 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읽고자 합니다. 이 한국교회와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묵상할 때 우리들이 받게 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로 이겁니다. 우리들은 우리 앞에 있게 된 바로 이 거대한 기독교, 치밀한 교회조직, 역사 깊은 종교의 관습들을 대하면서 전혀 문제를 못 느낀다는 것입니다. 마치 격정에 들떠서 예수님의 입성의 길을 환영하긴 했지만 예루살렘 성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못 느낀 순박한 예수님의 백성들처럼 들끓는 환영의 물결 속에서 예수님께 헌신을 맹세하긴 했지만 예수님께서 설명하기 전까지는 왜 예수님이 그토록 유서 깊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분노하시면서 치를 떠시는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제자들이 이 성전에 잘못된 것을 생각지도 못했던 그 처지 속에 우리들의 모습을 읽는다 이 얘깁니다. 그토록 거대한 기독교가 그만치 오래된 전통 속에 이루어진 이 교회가 이토록 많은 교회들이 믿고 있는 일반적인 이 관습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큼 잘못된 것이 없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역사의 암흑 속으로 치달아 내려가는 시대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한국교회에서 이런 의식의 빈곤을 느낍니다. 사람과 전통의 시각에서 보면 이 예루살렘 성전은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행해져 오던 이 성전의 관습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습니다. 논쟁거리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수천년의 언약이 깃든 유서 깊은 예루살렘의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에서 더군다나 하나님의 약속이 깃들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자와 가까워야 할 그 종교 건물이 예수님의 쏟아지는 분노를 감당하는 이 모습을 여러분들이 보셔야 합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이 성전은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의 전당이 아니라 저주의 굴혈이 되어버린 하나님의 성전이 아닌 강도의 굴혈이 되어버린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역사를 보면서도 그렇고 내 개인의 인생에 대해서도 그렇고 교회의 장래에 대해서도 그렇고 상당히 비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비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비관적일수록 오로지 소망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결론에 더 간절하게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와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선다면 제 생각에는 칭찬보다 책망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만약에 우리들과 교회가 예수님에게 책망을 받을 때 두 번째 놀라는 것은 책망 받는 그 중요한 제목들이 우리가 거의 문제로 느끼지도 못하던 것들 때문에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의 심판대 앞에 선 한국교회를 또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그 어떤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당신과 이 시대의 교회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실 건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시대와 그리스도인의 절망적인 특징은 거듭 말씀 드리거니와 영적인 분별력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의 시각을 상실했다는 사실입니다. 작년 이맘때도 예루살렘 성전에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돈을 바꾸고 헌금을 드렸고 제물을 사다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지난달에도 이 성전에서는 그렇게 바꾼 돈으로 헌금을 받았고 그렇게 사온 동물에 기도하고 제사 드려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당도하시기 전 그 아침에도 이 같은 헌금과 제사방식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품지 않은 채 성전을 들락날락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이토록 분노하십니까? 예수님이 이토록 분노하시면서 치를 떠신 적이 성경에 있습니까?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제자의 입맞춤을 당하는 순간에도 잠잠하셨습니다. 모함으로 상형의 선고를 받는 그 순간도 그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저주스런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는 그 순간에도 진노하셨던 예수님이 아니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일이 없는 아침 예루살렘 성전에서 왜 이토록 진노하십니까?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격정 하나님의 열정 하나님의 파토스를 가지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무엇이 자비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신을 환영하는 호산나 찬양의 무리들과 온화한 대화를 나누면서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격정, 하나님의 파토스에 사로잡히게 만들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시각, 하나님께서 교회를 바라보시는 그 심정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시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면 결단코 변화되어 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을 바라보는 그 눈이 교회의 눈, 전통의 눈, 사람들의 생각 이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시각이 생기고 그리스도의 시각이 생기지 않는 한 여러분은 더 깊은 신앙으로 들어가기는 어렵습니다. 믿고 교회 왔다 갔다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자기 자신이 깨어지는 아픔 속에서 성숙의 기쁨을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한국 교회의 교인들이 스타트로 신앙으로 출발해서 어느 지점에 가서는 쭉 줄 서있습니다. 더 이상 못갑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자신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신앙적인 시각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까 하는 이 시각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파토스에 대해서 기도를 많이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사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많이 쓰임 받았던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울 일이 없는데 웃고 기뻐할 일이 없는데 기뻐하고 소망 가질 일이 없는데 소망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조지 휘필드 스코틀랜드의 복음 전도자는 설교할 때마다 얼굴이 온통 눈물 범벅이 되었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사람 눈에는 오늘 저녁 자기의 설교를 듣고 헌금을 내고 돌아갈 교인들로 보인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고 죽어가는 영혼들로 보였던 것입니다. 서는 순간마다 울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파토스입니다.
(예화) 뉴 잉글랜드의 대각성의 지도자 요나단 에드워즈 그는 천재에 가까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저는 신학을 하고 미래에 소망이 있다면 한국 교회의 부흥에 기여하는 설교자가 되고 싶은 것이 제 소망인데 그런 면에서 요나단 에드워즈는 이미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먼저 살았던 선배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사람을 닮고 싶습니다. 미칠 정도로 사랑합니다. 이 사람의 이력서를 보면 첫 페이지에서 절망을 합니다. 9살에 유물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요즘 대학생들 보면 9살짜리 에드워즈가 와서 웃을 겁니다. 주사파 웃기지 마라. 9홉 살에 유물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글로써 밝혔습니다. 12세에는 자연 철학에 관한 문제들을 분석 평가하는 논문을 썼습니다. 1716년 그가 13살 되던 해에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를 완벽하게 마스터 한 채 교부들의 고전을 줄줄 읽으면서 예일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합니다. 4년 후에 그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19살에 예일대 교수로 초빙을 받습니다. 그러니 저 같은 사람 어디 명함이나 내밀겠습니까? 너무했습니다. 어떻게 아홉 살에 유물론에 대한 견해를 밝힐 수 있습니까? 지금 60살 먹은 교수들도 헤매가지고 북한과 한국을 왔다 갔다 하는데 아홉 살에 유물론에 대한 견해를 밝혔습니다. 이 사람이 없었으면 미국은 신학적으로 애매모호한 나라가 되었을 겁니다. 이 사람이 기독교 철학 전공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칼빈 주의적인 신앙과 신학을 심는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교회역사에 길이 길이 남을 사람입니다. 천국가면 악수 한번 해야지. 이 사람의 이력서를 보면 참 차갑고 냉철한 지성을 가졌기 때문에 가슴이 싸늘한 사람일거 같은데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별로 신앙의 체험 없이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디모데 전서 1장 15,17절을 읽습니다. 난 그 전기를 읽고 난 후 몇 번이나 읽었는데 그런 일이 안 일어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로다 존귀와 영광과 권세가 오직 하나님께 세세 무궁토록 있어 지이다 아멘. 그 한 구절 때문에 온통 이 사람의 인생이 뒤바뀐 것입니다. 한 삼일 이상 동안은 이 구절을 붙들고 데굴 데굴 굴렀습니다.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하며 뭘 느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느낀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 사람은 항상 어려서부터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영광스러움으로 회복하면서 교회가 사회적인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처절한 열망에 짓눌리는 가슴을 가지고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1729년 메사추세추 노르뎀턴에 있는 교회에 담임 목사로 부임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시각인 예수 외치지 않을 수 없던 설교의 제목은 지옥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타락한 회중들이 위로를 원했고 심방을 원했지만 그에게 맘을 짓누르는 하나님의 열정은 지옥에 관한 설교였습니다. 완악하고 타락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시각과 열정에 사로잡혔을 때 그가 처해 있던 설교는 지옥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리라 심판의 불길을 지금 주님께서 지피고 계시다 그러나 많은 교회가 그 같은 설교와 열성을 비난했고 자기 교회의 교인들조차도 설교를 바꿔 달라고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지옥에 관한 설교를 끊임없이 외쳐댈 때 앞에서 설교를 듣던 청년이 나가서 목메어 자살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감당할 수 없는 비난과 시련이 젊은 목회자 요나단 에드워즈에게 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설교 취소하라. 다시는 이런 것 안 하겠다고 각서를 써라. 죽은 사람에 대해서 책임을 져라. 별의 별 얘기가 다 들어왔습니다. 그때에 그는 자기 입장을 바꾸거나 각서를 쓰거나 자기 설교를 취소하는 대신에 그는 23년이나 정들었던 교회를 미련 없이 떠나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내가 이 세대에서 외치지 못할 바에야 내가 이 강단을 두고 미련 없이 떠나겠노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마 그는 손을 씻으면서 떠나갔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토록 외치기 원하셨던 지옥에 대한 놀라운 설교가 역시 하나님의 시각이었다고 하는 이 증거는 1740년과 41년 그 영광스러운 대각성 운동 속에서 드러났던 것입니다. 이 대각성 운동은 왜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유독 요나단 에드워즈를 들어서 역사에 없을 영광스러운 교회의 장을 열어셨는지 보여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당신이 원하는 엄청난 인파가 아닙니다. 종교적으로 충동으로 헌신을 결심한 하루아침에 헌신된 수많은 무리가 아닙니다. 종교적인 잡상인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이 시대와 교회를 분별하고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이 교회와 나 자신의 심령을 보면서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교회역사는 이런 각성된 소수가 어떻게 그 시대의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의 시각과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는가를 보여줍니다.
조지 휘필드 그 역시 교회에 대해서 이같은 시각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1746년 위대한 대각성 운동이 일어날 때 유독 하나님께서 에드워즈와 함께 손잡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아무도 이일을... 어둡고 부패한 그 시대 현실 속에서도 주님의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한없이 늘어가는 현실 속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고통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헌신을 맹세해도 교회 한 구석에는 눈물을 흘리는 그리스도의 심장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 하나님의 시각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각을 구하지 않는 한 여러분들이 쟁기를 들고.....묵은 땅이 무엇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분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 하나님 이 시대를 아무 볼일도 없는 같은 이 시대를 향하여 이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눈을 떠서 이 시대와 교회와 자식들의 심령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릇된 자신의 삶을 보면서 유서 깊은 예루살렘 성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분노에 차서 외치는 예수그리스도의 격정과 그 눈물을 닦게 해 달라고 여러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토록 상상을 뛰어 넘는 엄청난 진노 끝에 예수님이 주신 말씀은 너무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이사야서에서 인용되었는데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이라 그러나 히브리 원문은 이것을 좀 더 다르게 읽습니다. 이렇게 읽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집은 그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기도하는 집이 아닙니다. 기도의 집이라 불리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주어진 기도의 집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하나님이 바라보는 시각이었고 열망이었던 것입니다. 히브리 성경은 이 성전을 단순히 기도하는 집이라 말하지 않고 기도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기도의 집, 기도하는 것이 특징이 되어 버린 집, 그 백성들이 거기 와서 기도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결단코 나의 집이라 말할 수 없는 그 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한 열망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가장 중심적인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교제, 백성들을 위한 피 끓는 기도와 부어주고 있는 중보의 기도와 바로 교회의 특징을 결정짓는 그 집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기도가 없이는 결코 교회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그 집이 바로 그 기도의 집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진노하신 이유가 바로 이 예루살렘 성전이 이와 같은 기도의 집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몇 가지 점에서 상당한 의문점을 우리들에게 불러일으킵니다. 매매하는 것 하고 돈 바꾸는 것 하고 기도하는 것 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이 부분을 읽을 때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을 제가 말씀 드릴테니까 맞으면 맞다고 하십시오. 성전이 이렇게 있는데 와서 발 들여놓을 틈도 없이 동전을 온통 벌려 놓고 강단 가까운 데까지 염소새끼, 양새끼, 소새끼들이 뛰어다니는 성전을 생각할 겁니다. 그렇죠?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게 아닙니다. 지금 뭐하려고 성전에서 돈 바꾸는 겁니까? 헌금 드리려고 바꾸는 겁니다. 동물을 왜 팝니까? 제사지내려고 팝니다. 뭐가 주이고 뭐가 종입니까? 제사와 헌금 드리는 것이 주이고 파는 것이 종입니다. 이 사람들이 정신이 나간 사람들입니까? 유대 종교에 대해서 얼마나 뜨거운 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지 여러분들이 아십니까? 여호와라는 이름이 성경 쓰다가 딱 나오면 붓을 빨고 다시 썼습니다. 심지어는 어느 정도인지 아십니까? 목욕까지 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라는 이름을 일 년에 딱 한번 부릅니다. 전혀 안 불렀습니다. 구약학에서 의문이 뭐냐 하면 네 글자에 대한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서 정설이 없습니다. 여호와도 아닌 게 틀림없다. 야훼도 그럴 것이다. 다 추측입니다. 수많은 논문이 나왔지만 다 추측입니다. 얼마나 안 불렀으면 이름까지 잊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아버지 성함이 뭐냐고 하면 세자를 쭉 붙여서 김누구누구입니다 하면 이건 버릇없는 사람입니다. 김자 박자 등 똑 같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지금도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일 년에 딱 한번 알려줍니다. 네 글자 써놓고 따라해 봐라 “야훼” 아이들이 그럽니다. 밤새도록 통회합니다. 왜? 하나님의 십계명을 어겼다고 해서입니다. 야훼 이름을 일컬었다 이겁니다. 회개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유대 종교에 대해서 철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는 이 성경을 보면서 몇 번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가 보려고 하는 묵상 속에서도 결코 이 매매하는 일과 돈 바꾸는 일이 외관상으로는 적어도 성전에서 행해지는 제사나 기도를 방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왕십리 기도원으로 치자면 저쪽에서는 팔고 여기서는 기도했다 이겁니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벌써 화를 냈을 겁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교훈이 뭔지 아십니까? 첫째는 기도가 교회에서 가장 중시되어져야 할 기능이고 두 번째는 매매하는 일과 돈 바꾸는 일이 교회의 기도의 영성에 심각한 타격을 준다 이겁니다.
(예화) 왕십리 교회는 얼핏 지나다 보니까 단독 건물입니다. 어느 교회가 있었습니다. 교회 설립된 지 8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 역사책을 읽어 봤는데 이름을 내놓으면 알만한 한국의 엄청난 신앙의 거성들과 독립운동의 거장들을 이십여 명이나 배출했습니다. 그 교회가 굉장히 영성이 강한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7.8층짜리 빌딩을 지어놓고 백화점으로 분양해놓고 자기는 윗 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아십니까? 그 교회는 교인들이 헌금 하나도 안 해도 임대료 받아서 선교비하고 교역자들 월급 다 주고도 돈이 남습니다. 그건 좋은데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아십니까? 직장에 있는데 숙직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숙직 근무지를 이탈하면 안 되지만 새벽에 가서 새벽 기도를 좀 드려야 겠다 하며 그 교회가 새벽기도를 몇 시에 드리는지 그 전날 갔습니다. 유서 깊은 그 교회. 새벽 기도를 오려고 하는데 몇 시에 합니까? 수위가 하는 말이 우리 새벽기도 없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드립니다. 아니 기도가 무슨 행사입니까? 한 달에 한 번씩 날 잡아 놓고 드립니까? 돌아오면서 씁쓸한 발걸음을 뛸 수 없었습니다. 왜 많이 기도하면서도 좀 더 깊은 신앙으로 나가지 못하고 고민합니까? 기도해도 왠지 그 기도가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는 현실을 여러분 경험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오늘 여러분 속에 있는 먼저 돈 바꾸는 상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둘러엎으십시오.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매매하는 자들을 먼저 심령 속에서 몰아내십시오. 여러분 삶속에 자리 잡은 탐욕과 심령의 뿌리박은 더러운 것들을 몰아내기 전에는 결단코 묵은 땅을 기경할 수 있는 능력은 경험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잃어버렸다면 여러분의 특징이 단지 기도하는 사람 아니 기도의 사람이 되고 있지 못하다면 유서 깊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회개하라고 고함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속에 있는 온갖 더러운 것들을 몰아내라 주님의 진노의 음성을 들어야 될 것입니다. 너는 만민의 기도하는 사람이라.
여러분 우리 눈앞에 있는 가난한 시대에 초라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보입니까? 영광을 잃어버린 이 시대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까? 지금도 그분이 보내신 성령을 끊임없이 의지합니까? 교회가 가장 중심적인 기능이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정교한 규칙이 성령의 능력주심에 의지하기 보다는 잘 짜여 진 조직과 선교 기구들이 기도대신에 사교중심에 공동체가 되고 있지 않느냐 이 얘깁니다. 일어나십시오. 기경하십시오. 무엇보다도 기경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기도함으로써 이 시대의 교회와 여러분의 심령을 갈아엎으십시오.
그런데 왜 기도가 교회의 이런 중심적인 기능이 되지 못하고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데 교회는 왜 기도하는 일에 대해서 그렇게 약합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일 자체를 교회가 해야 하는 선교, 봉사, 교제, 구제 뭐 성가대 밥하는 것, 시장가서 반찬 사오는 것, 이런 것들하고 똑같은 수준에 있는 한가지 일 정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을 뜯어 고치지 않는 한 묵은 땅에 기경 안 됩니다. 잘 기경이 되어도 악마가 와서 씨를 뿌리고 갑니다. 교회는 이 기도는 교회가 해야 할 안 해도 할 수가 없고 잘해도 좀 더 좋을 그런 많은 일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교회가 봉사를 더 많이 하면 안하는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교회에 모여서 그룹 스터디 하고 교제하면 안하는 것보다는 훨씬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공동에가 기도를 안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초대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심각한 고민과 번민 속에 사로 잡혔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명한 인도를 받았던 기록을 보여줍니다.
(말씀)
사도행전 6장 1절부터입니다.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데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집사를 택한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너희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일곱 사람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들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 집사를 세우는 일은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였는데 실질적으로 집사를 세운 다음에 사도들이 도립하려고 했던 그 일은 말씀이 먼저였습니까? 기도가 먼저였습니까? 순서가 뒤 바뀌어 나온 것을 여러분들이 가슴에 새기십시오. 교회가 세워지고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하다 보니까 사도들에게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집사를 세우기를 결정합니다. 이 결정은 사도들로 하여금 말씀으로 잘 봉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동기였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으로 봉사하는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집사를 세운 뒤에는 사도들이 제일 먼저 전념하려고 했던 것은 기도였습니다. 그 다음에 말씀에 전무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지고 봉사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기능이 복잡해지면서 신자가 늘어나면서 제자들을 사로잡았고 영적인 능력을 위협했던 것은 기도의 시간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결정의 동기는 말씀을 전한 것이었지만 전무하기로 결정한 처음 으뜸의 것은 기도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중시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공동체가 기도하는 대학부 정도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대학부가 되기를 원합니다. 인간적인 방법 가지고 묵은 땅 기경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기도하는 모습을 제외해 놓고는 누구의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대학부 회장 유재선 그러면 그 이름이 뭐 그렇게 유별납니까? 주님은 그 이름을 기억 하시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대학부 회장 기억 하시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유재선 그러면 그래 내가 너를 도저히 잊을 수 없는 특징이 하나 있어. 수없이 나한테 매달려서 대학부를 위해서 기도하던 그 사람이지. 너가 셀 조장이냐? 그걸 예수님이 보자는 게 아닙니다. 아 너 왔나? 그렇게 조원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던 너, 기도하는 일이 아니었다면 나는 너 이름 기억도 못했을 텐데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믿으십니까?
교회가 기도에 충실할 수 없는 이 두 번째 이유는 이 기도가 영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립니까? 기도는 영적인 일인 동시에 영적인 투쟁입니다. 그런데 육신은 이 무리한 영적인 일을 싫어합니다. 왜 육신을 가진 교회와 육신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가 무리한 일입니까? 기도할 때 어떻게 됩니까? 기도하면 여러분 얼마나 힘드는지 아십니까? 아침에 새벽기도하고 일어나면 다리에 기운이 쭉 빠집니다. 그때마다 나는 아벨 크러리를 생각합니다. 찰스 피니를 위해서 열 네시간 기도하던 사람, 세 시간 기도하고도 이렇게 힘든데 아벨 크러리는 열네시간입니다. 어떻게 기도했을까? 기도하다보면 제일 먼저 우리는 무슨 의식을 느낍니까? 누구 앞에 앉아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앉아 있습니다. 뭐가 드러납니까? 우리의 죄가 드러납니다. 가책이 오고 고통이 오고 고민이 됩니다. 고백해야 될 텐데 자존심이 허락 안합니다. 싸움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육신은 성격상 이런 일들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적성에 안 맞는 것입니다. 오히려 손 거둬 부치고 봉사하는 길을 택합니다. 성가대 가운 빨고 밥하고 쓰레질 하는 그 일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은 바운즈 목사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명확히 지적했습니다. 그가 헌신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만으론 그가 하나님께 헌신되었는지는 확인이 안 된다. 다른 동기에서도 그렇게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사랑 없이도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수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그분에게만 헌신되었다고 하는 것은 오직 그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주목해주지 않고 기억해주지 않고 위로해 주지도 않는 밀폐된 골방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자신의 영적인 문제를 위해서 투쟁하느냐 그 투쟁이 얼마나 진지하고 끈질기냐 이것만 그가 하나님께만 헌신된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만이 헌신된 사람인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사람들을 의식하는 사람인지 내가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 체면상 섬기는 것인지 사람들을 가르치는 조장에 직분을 받아서 성취욕에 들떠 이 일을 하는 건지 증명해준다는 이 얘깁니다.
저는 이 기도의 세계를 생각 할 적마다 한없이 넓은 바다를 생각합니다. 저는 그 바다 가장자리에서 나뭇잎 배를 띄우고 있는 이런 가난한 형편임을 고백합니다. 그 바다처럼 하나님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넓은 세계보다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경험하게 되는 곳이 없습니다. 이 광대한 기도의 바다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더 뜨겁게 느낄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배를 몰아서 기도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회오리치는 그 물결 속에서 우리를 붙들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른손을 느끼게 됩니다. 오가는 수많은 바람의 물결이 잔잔해지고 흰 구름이 떠가는 잔잔한 바다 속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사랑의 음성을 들으시는 것입니다. 그분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그분의 신비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이 넓은 기도의 가장자리에서 나뭇잎 배나 띄우고 있는 이 가난한 사람도 기도에 대해서 설교하라고 하면 쉬지 않고 한 달은 설교할 수 있습니다. 30편의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말이 많거늘 하물며 이 기도 세계에 정말로 깊이 깊이 들어간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기도의 세계에 대해서 얼마나 위대한 증거들을 갖고 있겠습니까? 저는 이 짧은 시간에 기도에 대해서 다 말씀 드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묵은 땅에 대해 갈망하고 여러분들의 영광스러움이 기경되기를 원하시는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기도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떻게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사시는지 성경은 말합니다. 육체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할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의 소원을 올렸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받으시기 전에 그의 눈물을 기도를 받으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생애는 십자가의 피를 흘리기 전에 기도의 눈물로 얼룩진 생애였습니다. 광야에 40일 기도가 그에게 얼마나 많은 희생을 요구하였습니까? 바쁜 일거와 수많은 종교적인 논쟁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헐뜯습니다. 비방합니다. 핍박하러 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치료해 달라고 옵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인파속에서도 새벽에 미명과 깊은 밤을 하나님의 것으로 따로 떼어 놓은 예수님의 삶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갯세마네 동산에 올라와 보십시오. 육체의 피로에 못 이겨 잠들고 있는 제자들 곁에서 하루 종일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수많은 설교 속에서 온몸을 소진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음하는 기도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교회 역사가 성령의 역사라면 성령의 역사에 뒤에는 보이지 않는 기도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복음이 전파된 수많은 전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역사도 이 이전에 있었던 이름 모를 사람들의 피눈물 나는 기도에 대해서는 기록에 남기지 않고 있습니다. 선교의 역사를 많이 전해도 이 역사는 선교의 역사만을 전하고 선교의 사실만을 전해도 하나님은 그 권능을 가지고 계셨던 기도의 역사를 마음에 담고 천국에 기록하고 계십니다. 선교의 역사 뒤에는 구원 받은 수많은 무리들과 함께 천국에 설 때 우리는 비로소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들 교회의 역사가 기록하기를 빠트렸던 그 기도의 사람들의 역사가 하나님의 나라에 기록된 것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무릎이 약대다리처럼 굳어지고 뺨에 눈물 흘리던 기도의 뺨이 눈물이 지워지지 않는 교회와 역사를 움직였던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들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역사 속에서 묵은 땅이 기경되고 영광스러움이 회복되기 까지는 특별한 기도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어서 일어나는 엄청난 기도의 운동이 회개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변화가 왔습니다. 묵은 땅이 기경되었습니다. 30년, 40년, 50년, 100년에 걸쳐서 일어날 일이 한주일 두주일 만에 일어났습니다. 한 주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서 밀려들어옵니다. 회개의 얼굴을 묻고 십분을 기도하는 것으로 영혼을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기도하십시오. 기도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시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그 영광스러움을 회복하고 여러분의 대학부가 묵은 땅을 기경하기 원하면 먼저 하나님께 매달리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묵은 땅을 기경하기를 원하면 지금보다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 오래 기도하도록 무릎으로 싸우십시오. 천국에 가는 날까지 그리스도인들은 무릎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영광스러운 개혁 뒤에는 생명을 건 기도가 있었습니다. 피를 토하는 영적인 사람들의 투쟁이 있었습니다. 그 기도를 방해하는 악령의 세력들이 수없이 득시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는 먼저 선교의 역사를 기록하기 전에 얼마나 그 어려운 난관을 무릎의 소수의 사람들이 이겼는가 하는 것을 증거 합니다.
(예화) 교회 역사는 찰스 피니를 19세기에 미국을 움직였던 가장 중요한 복음 전도자로 적고 있습니다. 확성기도 없고 매스미디어도 없던 시대에 천하보다 귀한 50만 명의 영혼을 예수그리스도의 품에 안긴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 이후에 하나님께서 들어 쓰신 가장 엄청난 전도자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찰스 피니를 기록합니다. 역사의 수많은 페이지를 찰스 피니의 화려합니다. 그러나 그를 위해 기도하던 아벨 크러리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그는 찰스 피니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헌신한 사람입니다. 하루에 열네 시간 이상 무릎을 꿇고 계속되는 기도로 피니의 전도사역을 헌신했습니다. 그는 한 번도 피니의 전도 집회장에 나간 적이 없습니다. 나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가 외칠 때 그는 골방에서 무릎을 꿇고 열네 시간씩 기도를 했습니다. 열네 시간 기도한 후에 나머지 열 시간은 밥을 먹고 굳어진 다리를 펴기 위해서 침상에 드러누워서 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이처럼 열네 시간 계속되는 이 살인적인 기도로 말미암아 피니의 전도사역이 부흥했습니다. 이처럼 병약한 몸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에 헌신한 아벨 클러리의 기도를 들으셔서 1830년 로체스터시에서 피니가 복음을 외쳤을 때 1년 동안에 10만 명의 잃어버린 영혼들이 회개의 강물처럼 떠밀려서 피 묻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가슴에 안겼던 것입니다. 1613년 아일랜드에서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 일곱 사람들이 영국에서 건너와서 무릎으로 헌신할 때 웨일즈의 유명한 대각성 운동이 부패한 죽음의 아일랜드를 강타했습니다. 병들어서 쇠약한 제임스 글랜던이라고 하는 이름 없는 성도가 하나님의 능력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기도할 때 허약하고 병 많은 몸을 이끌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설교하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이 시대의 가난한 교회와 완악한 아일랜드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외쳤을 때 그 집회를 방해하기 위해서 왔던 열두 명의 악한들이 회개하다가 졸도해서 들것에 실려 나갔습니다. 그리스도인 요한 윌츠가 그의 사위 요한 낙스를 위해서 오 하나님 우리 사위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제게 죽음을 주시옵소서.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기도하면서 삼천 명의 기도의 중보자가 되었습니다. 아내가 묻습니다. 여보 잠은 자야 할 거 아닙니까? 그때에 하나님의 기도의 사람 요한 윌츠는 눈물을 흘리면서 아내에게 말합니다. 여보 미안하오. 그러나 내 품에는 내가 기도해주어야 할 삼천 명의 사람이 있소. 그가 하나님 앞에 기도의 중보자가 되어 졌을 때 요한 낙스를 위해서 그토록 눈물로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더럽고 타락한 카톨릭의 땅 스코틀랜드에 역사적인 장로교가 세워지는 기적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교회사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영광스럽게 한 사람은 운동가가 되기 이전에 먼저 설교자가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설교자가 되기 전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시간 혹은 바쁘기 때문에 세 시간 이상 기도하는 마틴 루터를 들어서 독일과 유럽의 부패한 땅을 개혁의 물결을 일게 하셨습니다. 얼어붙은 땅, 눈 덮인 언덕 숲속에서 폐결핵 3기의 몸을 이끌고 피를 토하며 기도하던 우리의 기도의 샹떼일드 브레이드를 통해서 잉글랜드의 선교의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었습니다. 화형장에 이슬로 사라져가면서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던 보헤미야의 요한 후스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둡던 중세 암흑시대에 새벽별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일주일에 하루를 오직 하나님께 기도로 바쳤던 아둔이라 ....를 보내셔서 암흑과 같은 불교의 땅 도마 600명의 가슴속에 구원의 등불을 밝혀 놓아서 수많은 선교사들의 가슴에 영감을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 속에서 교회가 영광스러움을 되찾기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대학부가 묵은 땅을 기경되기를 원합니까? 메마른 여러분들의 심령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한 번 회복되기를 원합니까? 회개하십시오. 기도하지 못한 삶을 돌이키십시오. 여러분의 심령 속에 하나님과의 진실한 교통을 가로막는 매매하는 것과 돈 바꾸는 더러운 것들을 몰아내십시오. 기도가 여러분 신앙 인격에 특징이 되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무릎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결심할 때 이 시대 교회의 묵은 땅 여러분의 대학부의 그 묵은 땅 여러분의 심령에 그 묵은 땅이 기경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그토록 완악하고 강퍅했던 이 시대가 강철같이 굳은 땅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눈물 흘리는 날이 올 것입니다. 내 집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예수님의 이 분노하는 음성 앞에서 여러분 오늘 어떡하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