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예수님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이심을 얻었느니라. (히 5:7)
녹취자: 김혜진
성경 본문은 히브리서 5장 7절입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5장 7절입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헌신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 하려고 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했습니다. 히브리서 5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대제사장임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제사장들이 사람가운데 취함 받은 그 대제사장들이 사람들을 위해서 중보의 짐을 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거룩한 하나님과 죄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만나게 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가운데서 취함 받은 이 대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지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들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므로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땅히 무식하고 미혹 받을 수밖에 없는 연약하고 어리석은 백성들까지도 다 용납을 해 주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를 그가 비록 제사를 들어주는 대제사장이었지마는, 그러나 연약함에 있어서는 그 백성들과 다름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대제사장의 직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귀하고 직무는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누구도 제사장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사람이 없었으며, 그 누구도 제사장의 섬김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직분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아니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봉사였습니다. 그러나 이 제사장들의 제사는, 불을 태워서 드리는 제사는 항상 임시적인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을 열어주었지만, 그 제사가 그치면 사람들은 다시 범죄 했고, 범죄 하면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은 다시 차단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죄와 하나님 앞에 형벌 받아 마땅한 모든 불의로부터 영원한 사하심을 받게 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복장으로 아무리 거룩한 모습으로 제사를 드려도, 그들의 제사는 잠시였습니다. 그러나 인간들도 생각지 못했을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이러한 모습을 불쌍히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애통하며 나아가 제사를 드리고, 그리하므로 죄의 용서를 얻고 주님과 교제의 길을 열지만 그러나 제사가 끝나면 돌아서서 범죄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못하고 고통 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을 위해서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이 모든 임시적인 제사들을 파하시고,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거룩한 제단 앞에 제물로 드림으로서, 단번에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받게 하시기 위하여, 그 분이 오셨던 것입니다. 그의 몸은 십자가에 드려졌고, 흘리신 보혈의 공로와 능력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그 샘에서 죄악을 씻었고, 예수의 거룩한 피로 속죄를 얻었습니다마는, 아직도 그 피와 속죄치 않은 십자가의 위대한 능력은 다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피와 그 물이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여 이처럼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보혈과 그 위대한 피의 능력은 땅 끝까지 이르러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표가 되고 있습니다. 사망을 위협하며 그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영혼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구원하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생명의 놀라운 능력을 불어넣어주는 역할들을 이 십자가의 거룩한 보혈의 능력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대제사장으로서 자기의 몸을 십자가의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린 이 본문은, 자신의 몸을 대속 제물로 바침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새롭고 산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한마디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의 몸을 찢으시고 피 흘리시므로 영원한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렸고, 우리는 그의 보혈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왔고, 또 하나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니, 너희를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낸 것은 주의 아름답고 기이한 덕을 선전하기 위해서 우리를 불러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자기의 몸을 깨뜨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들은 또한 이 세상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므로 서만, 이 세상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아니한다면, 세상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안하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 분의 깨뜨려진 옥채로 말미암아 휘장은 찢어졌고, 그의 뿌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새롭고 산 길이 보좌 앞으로 나게 되었습니다. 학벌이나 가문이나 명예나 외모나 모든 것 필요 없이, 오직 맨발로 그 앞에 나아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핏 길을 따라 걸어가 보좌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할 때에 지울 수 없는 것은, 주님은 우리들처럼 이렇게 이 세상에서 이렇게 희희낙락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웃으면서 사는 것을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를 읽으면서 지을 수 없는 인상은 주님의 생활은 우울하셨습니다. 주님의 생애는 항상 고민하는 생애였습니다. 주님은 비관주의자가 아니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생애는 어찌 진지한지, 우리들이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골몰한 생애였습니다. 거룩한 하나님과 그 분을 떠나 불순종한 어리석은 백성 사이에서 그 분이 하실 수 있는 이 모든 진지한 생애의 표현은 기도하시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한없이 신앙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영광스러운 그분의 기도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에 이 짧은 본문 속에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므로,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하나님 앞에 세워주고 싶은 것입니다.
먼저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육체에 계실 때에 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먼저 예수님께서 육체에 계셨다고 말합니다. 그 분이 육체 가운데 계셨습니다. 이 얼마나 죄스러운 일입니까? 그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천상의 영광가운데서 모든 천사들의 나팔소리와, 그리고 우렁찬 찬양소리로서 영광을 받으시며 홀로 계셔야했던 그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육체를 입으셨습니다. 추우면 고통스럽고 식사를 못하면 배고픈 이 연약한 육체, 이것을 입은 인간들이 끊임없이 범죄 하는 모습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육체를 입으셨습니다. 죽으면 진토로 흩어져 바람결에 날려버릴 지푸라기와도 같은 육체를 입으셨습니다. 더욱이 그런 육체를 입은 인생들을 그 분이 창조하셨는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육체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자기가 창조하셨던 들풀과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거룩한 영광의 본체이신 그 분이 왜 부끄럽게도 이 낮고 천한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야 했습니까? 천상의 영광을 왜 버리셨습니까? 그 분이 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육체의 옷을 입으셨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오직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오신 것은 죽으시기 위함이었고, 하나님에게는 죽음이 없으니 죽음의 속성을 가진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몸을 대속 제물로 주시기 위해서는, 마땅히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제물들 가운데 아무리 훌륭한 제물도, 살아서 하나님 앞에 드려진 것은 없었습니다. 피 흘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십니까? 완전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난 어리석은 이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영원한 제물로 자기를 드리기 위하여 오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이처럼 하늘의 존귀한 영광을 버리시고 죄인 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하여 오신 그 분을 세상이 어떻게 대접했습니까? 세상이 그 분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하늘에는 아름다운 별들이 빛나고, 양떼들이 보드라운 풀에 얼굴을 비비며 잠이 든 그 때에, 주님은 말구유가에 오셨습니다. 그가 오셨을 때에 세상은 무얼 하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창과 칼을 가지고 아기예수를 죽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생명을 노렸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났습니다. 우리와 같이 여러 가지 문화의 혜택도 누리지 못 하였습니다. 낮고 천한 목수로 사셨습니다. 허드렛일을 하시면서 사셨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한 점 죄도 없으신 그분이 죄 있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겠다고 나아갔을 때, 하늘에서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늘의 음성이 들린 후에 그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메시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어떻게 나왔습니까? 자기의 몸을 그 백성들을 위해서 주시기 위해 죽으실 수 없는 그분이 오셨습니다. 그 분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에 세상이 “할렐루야! 메시야가 오셨도다!” 그 분을 경배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이 모든 것을 버리시고 세례를 받고 이 땅에 등장하셨을 때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십일 동안의 굶주림과 악한 마귀의 충동이었습니다. 하늘의 아름다운 음성은 들렸으나. 그분의 인생은 고난으로 얼룩졌습니다. 광야에서 충동하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면서 사십일 동안 주렸고, 그렇게 주린 그분을 악한 마귀는 돌맹이를 던지며 떡을 만들어 보라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꿈은 오직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이었고, 사망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분을 영접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가 세상에 계셨으매,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는데,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왔는데도 자기 백성은 그 분을 영접치 아니하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 분을 영접치 아니하였습니다. 오직 우리를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육체를 입으신 그분을, 세상은 거절하고 미워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가 도대체 세상을 위해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그분은 이 땅에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오셨습니다. 죄인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가난함과 허기짐과 피곤함에 복종하셔서 사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셨고, 비참한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으며, 가난하고 병든 자를 위해서 먹이시고 치료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도대체 이 세상에서 무엇을 나쁜 일을 하셨단 말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마지막으로 그분을 그토록 사랑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이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을 때에, 그들은 자기의 생명을 죽인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그를 향해 돌을 던졌으며. 우리도 그에게 침 뱉었습니다. 채찍으로 때리고 가시관을 씌울 때에, 우리도 거기에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미 주님이 육체를 입으시고 세상에 오실 때에, 세상이 당신을 영접치 아니할 것이며, 이러한 일들이 자기에게 일어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셨고, 이 모든 고난을 홀로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들을 이 말씀 앞에서 두려워 떨게 만들어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가 이토록 치욕 된 대접을 이 세상에 육체와 함께 입고 오심은, 오직 당신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온 생애를 그분은 조금도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오셨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으며, 우리를 위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버리셨습니다. 가난한 자와 함께 가난해 지고, 고통 받는 자와 함께 쓰라림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하나밖에 남지 않은 몸뚱이에 걸쳐진 그 한 옷 한 벌마저도 군병들에게 내어준바 되고, 이제 자기는 벌거벗은 몸으로 오직 하나의 남은 그 육체마저도 깨뜨려 십자가에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인 것입니다.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우리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주께서 우리들을 구속하신 위대한 십자가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이 세상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로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로써 성경은 그분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어떤 삶을 사셨는지 삶의 방식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의 소원을 올렸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생애는 곧 기도의 생애였고, 그의 기도는 그분의 삶을 통해서 진실임을 드러내주시는 이런 생애였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 주님이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생애는 애통의 생애였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피의 생애였고, 그분의 생애는 땀으로 얼룩진 생애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분의 생애는 눈물로 살아가는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십자가에 흐른 거룩한 보혈은, 우리들을 모든 죄에서 구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십자가에 자기의 몸을 쪼개어 피 흘려 죽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그를 보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십자가에서 흘리는 아들의 거룩한 보혈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십자가에 흘리는 우리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을 받으시기 전에, 먼저 그분이 흘리시는 눈물의 기도의 잔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그분의 모습이 기도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할 때에, 무릎을 꿇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주 앞에 몸부림을 치는 기도하는 모습을 제외해 놓고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할 수 없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 입니다.
사랑하는 교회의 중역이 되시는 여러분들이여! 그리고 교회에서 귀한 직분을 맡은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그리고 머리 숙인 사랑하는 청년형제자매들이여!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생을 마칠 때에, 여러분의 후손들은 여러분들 생각할 때에 무엇을 기억하겠습니까? 나의 아버지, 나의 할아버지, 나의 형, 나의 할머니는 기도의 사람이었다고 말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섬기는, 가장 첫 번째 골방의 서원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기도 생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기도 생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왜 예수님의 기도 생활에 대해서 말할 때에, 히브리서 기자가 왜 극단적인 표현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에서 주님이 통곡하셨다고 하는 기사는 여기 한 번만 나옵니다. 누가복음 23장에도 성을 보시며 우셨다고 할 때에 ‘에클라우센’ 엉엉 우셨다고 나오지마는, 여기서는 그 통곡에다가 심한이라는 말이 더 붙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정신을 잃고 고함치면서 뎅굴뎅굴 구르면서 소리 지르는 그러한 통곡으로 주님이 기도 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생애는 늘 기도하는 기도였지만, 오늘 이 히브리서 기자는 그 시각이 철저하게 십자가에로 못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기도를 이야기 할 때에도, 히브리서기자의 머릿속에 있었던 예수님의 기도는, 식사시간에 밥 먹기 전에 하시는 그러한 기도가 아니라, 잡히시던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그 그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도대체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까? 그거 하나는 압니다. 주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지나가게 해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여러분! 그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 가운데 아주 작은 일부분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분은 이미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결심 하셨습니다. 자기의 몸을 대속물로 내어주려 함이라. 그렇게 자기의 생에 대해서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설마 이 땅에서 기도하실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을 하나님! 이거 좀 안 지게 해 주세요, 안 지게 해 주세요. 그러다가 새벽을 맞이했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잠깐 이었습니다. 그분은 다음날 돌아가셨습니다. 무슨 기도를 하셨습니까? 요한복음에 뒷부분에 17장에 가면 주님이 기도하셨던 것이 실려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제사장의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는 하나도 자기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남겨두고 가는 사랑하는 백성들과 제자들을 위한 기도였고, 이 땅에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였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기도가 바로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 겟세마네 찬바람 부는 동산에서 홀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게 만들어 주었던, 그 기도의 제목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의 쓰라린 고난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고, 사랑하는 제자들은 잠자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배신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죽음을 앞에 둔 자기의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두고 가야 하는 사랑하는 제자들과 남겨 둘 수밖에 없는 공동체와, 죄악 된 세상에서 영광 받지 못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인하여 심한 통곡으로 눈물로 기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에게는 이런 기도가 어울리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사랑하는 교회와 두고 가는 공동체와 그래도 죄악 된 세상에서 높임을 받지 못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받지 못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주님은 심히 통곡하셨고, 말할 수 없는 눈물과 몸부림으로 그 밤을 지새웠습니다. 우리들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기도의 제목은 도데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통곡하며 무엇을 인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냐는 사실인 것입니다. 어떻게 신앙의 생활을 하다보면 어떤 때는 큰 은혜를 누리는 적도 있고, 어떤 때는 가슴이 냉냉해 져가지고 예수를 믿는 건지 마는 건지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고백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처음 주를 만났을 때에 그 때에 신앙의 고백은 마음이 뜨거웠다는 것입니다. 뜨거웠다는 것입니다. 그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었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랑이라고 내 가슴이 내 심장이 증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에는, 그 분이 힘없이 십자가를 지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시는 십자가가 땅에 끌리는 소리가 들렸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물같이 쏟아놓고 기도할 때에는, 그 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흐느끼는 눈물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런 첫사랑의 기억들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첫사랑에 붙잡혔을 때에, 우리가 무얼 기도했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상하게도 그 때 우리의 기도는 나를 위하는 기도가 아니라, 교회와 사랑하는 형제들과, 고통 받는 이웃과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한 기도로 이어졌습니다. 나를 위한 기도는 간절하지 않는데, 지옥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매일 같은 이부자리 속에서 잠들어야 하는 사랑하는 남편, 제법 돈을 많이 벌기 때문에 얼굴에는 윤기가 흐르고 금테안경을 쓰고 있지마는, 그러나 갑자기 그의 영혼이 지옥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눈물이 복받쳐 오르곤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어린 영혼들이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교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섬겼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이 같은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을 잃어버렸을 때에, 우리의 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대부분이 육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의로는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지 아니하고, 지금은 많은 영혼들이 불길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지금도 우리들의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고, 모두가 떠나 가버린 외로운 교회당 한 구석에서는,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도 교회의 기도의 제목을 위해서 홀로 통곡하며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주님이 그토록 통곡하지 않고는 기도할 수 없었던 기도의 제목들을 회복해야 될 것입니다. 되찾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그 분이 우셨던 그 기도의 제목으로 울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애통해야 될 것입니다. 주님이 애통해 하시던 그 기도의 제목들이 내게는 왜 가슴 아프게 다가오지 않느냐고 주님 앞에 애통해야 될 것입니다. 기도의 골방을 돌아보아야 되겠습니다, 혹시 골방이 너무 오랫동안 안 들어가서 거미줄이 끼어있고, 바퀴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성도님들은 없습니까? 회개해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보이지 않는 골방이 이렇다면, 여러분들의 삶은 그 모든 직함과 형식에도 불구하고 마귀의 놀음거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미줄은 없고 벌레는 기어 다니지 않아도 웬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깊은 임재 속에 나아가고 있지 못하다면, 뒤를 돌아보십시오. 주님께서 분명히 골방의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문이 열려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이 모든 것들로 인하여 애통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기도의 제목들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깨우고, 우리의 기도의 골방이 눈물을 적시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시기하고 누구에게 이야기 하고 누구의 탓을 말합니까? 우리 모두가 먼저 이 기도의 골방에서 승리의 깃발을 세우는 사람이 되기 전에는 누구도 무엇을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메말라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거룩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도 물같이 녹아내리지 않을 만큼 강합니다. 경미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귀에 들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 앞에 우리의 심령은 초와 같이 녹지 아니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세상에선 끊임없이 상처를 잘 받으면서도, 외치는 주의 말씀 앞에서는 가슴을 찢는 애통한 일들이 그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어찌해야 될 것입니까? 왜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마른 땅과 같아서 거룩한 십자가의 사랑 안에 살아가면서도,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거룩한 십자가의 공로를 인하여 감격해 하지 못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땅에 썩어질 것들을 위해서, 땀 흘리며 수고한 모든 것들이 주는 대가는 사망밖에 없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한 줌의 지푸라기보다 못한 인생입니다. 하물며 그 지푸라기만도 못한 그 인생이 붙잡고 있는 그것들이 어떤 것들이겠습니까? 성령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모든 육체는 불이요 그 육체의 아름다움은 불의 꽃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 꽃과 같고 이 불과 같은 것들의 사랑이 우리들로 하여금 주님의 통곡하시는 기도의 제목들을 다시 회복할 수 없게 만든다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한없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저를 향해 하나님께서 심한 매와 그리고 위로로 치고 싸매셨습니다. 이 짧은 구절은 짧은 구절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그 분이 어떻게 기도하셨는지도 드러내주고, 어떻게 우리는 응답을 못 받는데 그분은 응답을 받으셨는지를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했다! 이상한 말입니다. 우리는 보십시오.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집니다. 통곡할 때도 있습니다. 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과 완전한 일치 가운데 계셨습니다. 교제가 끊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 도다. 이는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시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영적인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은 주님이 마치 큰 죄악을 회개하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통곡하고 부르짖고 눈물을 철철 흘리고 애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우십니까? 왜 그렇게 그분이 우셔야 했습니까? 형제자매들이여!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분이 말할 수 없는 통곡과 넘쳐나는 눈물로 하나님께 탄원하셔야 했던 것은,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죄나 자기를 위한 통곡과 탄원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탄원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강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약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다가오는 핍박에서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셨습니다. 모두 자기를 떠나가도 실망하면서 한 숨 지으신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대적들 앞에서 기가 꺾이신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절망의 늪에 떨어지고, 지옥의 문 앞에 와 있는 사람처럼, 심한 통곡으로 몸부림치며 애처로운 눈물로 겟세마네 동산을 적시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 모든 통곡과 눈물은 모두 우리의 죄악으로 인한 것임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그분이 느끼셨고, 우리는 못 봤지만 그 죄악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셨기에, 주님께서는 그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흘린 눈물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주를 위해 흘린 눈물은 말라 있지 않습니까? 우리를 위한 흐느낌은 많으나 ,하나님을 떠나있는 이 구원받지 못한 비참한 세상과,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는 교회를 위한 통곡들은 그쳐져가고 있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기도를 했으면 했지, 왜 그렇게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기도하시면 되지, 왜 그렇게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역은 이 땅에서 다 끝났습니다.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에서 아직까지도 다 못다 이루었기 때문에 계속하고 있는 사역이 있습니다. 놀라셨습니까? 그것은 기도입니다. 구속의 사역은 완성되었으나. 기도의 사역은 미완성입니다. 지금도 주님이 기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천국에는 눈물이 없습니다. 천국에서 눈물 없이 기도한다고 해서 그 기도가 지상에서는 간절했고 천국에서는 대충하고 계실까요? 우리는 그렇게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의문은 이겁니다. 천국에서는 눈물 없이 할 수 있는 기도가 왜 이 땅에서는 심한 통곡을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깨닫게 되는 사실은 이것입니다. 세상은, 세상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예수그리스도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예수그리스도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그 분께 순종하는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분을 위해 살고자 했을 때에, 세상은 도와주지 않았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원하셨지만, 세상은 그 뜻을 거역하고자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었으나, 세상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생명을 주시기 원하였으나, 세상은 그 생명을 받기 싫어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그분으로 하여금 고통가운데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난 말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는 자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자 원하는 자마다, 이처럼 도와주지 않는 세상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요즈음에 안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왜 이럴까? 울음이 나옵니다. 그리고 기도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일주일 동안도 너무나 죄도 많이 짓고, 비참하게 살았고, 찢기고 상하고 그렇게 됐습니다. 싸매어 주십시오.” 물론, 물론 교회는 그런데 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또 하나님의 위로가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 이런 기도 좀 했으면 어떻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일주일 동안도 지난주에 주신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싸우다 왔나이다. 주님께서 내게 주셨던 좋은 말씀의 무기들과 성령의 검으로 수많은 사단의 권세들을 파하고, 나의 살아있는 삶의 현장에서 주의 영광을 드러내다 왔습니다. 그런데 주님, 일주일 동안 싸웠더니 수류탄도 다 떨어졌고, 엠 씩스틴의 총알도 다 떨어졌고, 그리고 또 뭡니까? 화염방사기의 기름도 다 떨어졌고, 스커드 미사일도 다 썼습니다. 다시 간구 하옵나니 예배 이 시간을 통해서 하늘의 창고를 여시고 무기고에서 이런 것들을 나에게 다시 한 번 달아 주시옵소서! 일주일간도 내가 승리 가운데 싸우고 주님 나라의 깃발을 더 먼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꼽고 돌아오겠나이다. 할렐루야!” 아 이렇게 기도 좀 했으면 얼마나 좋을 텐데, 어느 교회든지 주일날 대 예배에 올라가서 대표기도 하라시면 아 죽을 사람처럼 또 마지막 끝날 때면 가서는 안 될 세상인데 할 수 없이 가는 것처럼, 믿습니까?
성령은 이어서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더 깊은 기도의 세계 속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까? 세상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먼저 물어 보십시오. 세상에서 은밀한 즐거움을 즐기고, 그 낙으로 영혼의 위로를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결단코 이런 기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도로 말하고 기도하나, 그것은 모두 영혼 깊은 곳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입술의 소리임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진리의 눈을 여시사, 그 거룩한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어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그 하나님을 어떻게 주님이 생각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 심한 통곡과 간구의 눈물로 소원을 올렸고 그랬는데. 그 기도를 들으셨던 주님에 대해서 말하기를,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기도를 올리셨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그 예수님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계셨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분, 예수님의 기도를 듣고 계시는 하나님은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할 수 있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다가오는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심한 통곡으로 몸부림 치고, 말할 수 없는 통곡으로 주 앞에 눈물을 흘리실 때, 그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단지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죽음에서 끌어올려 주실 수 있는 만군의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바라본 기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미 당신에게 다가오는 십자가. 십자가의 죽음 이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 기도하고 끝났습니다. 정리 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힘을 얻고 그 십자가를 지기로 이미 결심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할 때에 주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의 능력을 보여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주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셨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칼날이 자기를 향해 다가오고 있고, 자기의 피를 목마르게 기다리는 십자가가 당신을 향하여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 죽음 너머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해 줄 수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바라보고 힘차게 일어 서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오늘 아침에 기도를 올리셨던 그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그 하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라 불렀습니까?
11세기에 로마 가톨릭의 어느 대주교가 있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형식적인 기도의 일인자였습니다. 매일 거룩한 옷을 입고 ‘하나님 아버지시여, 아버지시여, 하는데 어느 날 정말 하나님이 나타나셨답니다. “그래 네가 나를 불렀느냐?” 그 사람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왜 안 웃으십니까?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불러도 그분은 그렇게 기도가운데 나타나지실수 있는 분이라고 믿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아침에 올린 그 기도는 누구에게 올리는 기도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시여 라고기도의 기도를 그분의 거룩한 존함을 외울 때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내가 가진 문제가 아무리 어렵고,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가 심히 높을 찌라도, 죽음가운데서도 능히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고 계신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가장 중요한 문제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기도하셨는데 응답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면 그분께 대한 신성모독이 되겠습니다. 주님은 다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기도 응답이 드믑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에 의하면 이래야 됩니다. “집사님, 집사님!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왜?” “내가 글쎄 기도를 했는데 응답을 받았어요!” 그거 놀랄 거 하나도 없습니다. 뭐라고 그래야 됩니까?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다면 뭐라고 그래야 됩니까? “권사님, 권사님! 태어나서 이상한 일을 한 번 경험했어요!” “그게 뭡니까?” “아, 태어나서 역사에도 없는 일을 경험했어요!” “아, 그게 뭡니까?” “기도가 응답이 안됐어요!” 이렇게 말해야지 마땅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기도를 하셨는데 주님은 들어주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기도가 아무리 통곡하며 데굴데굴 구르고, 한 번 기도한 다음에 눈물이 세 컵씩 쏟아져도 하나님이 응답을 하시지 않았다면 어디 가서 간증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실 떼에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주님의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더 알고 싶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기도의 태도에 있어서만 우리의 모범이 아니라, 기도의 응답에 있어서도 우리의 모범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님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더니 주님이 들어주셨느니라. 그러면 우리의 고민은 간단합니다. 어떻게? 심하게 통곡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눈물만 흘리면 되는 겁니다. 안되면 안약이라도 넣고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분이 말할 수 없는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는데도 성경은, 그가 간절히 기도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었다고 말하지 않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다시 말씀드려서 주님은 간절한 기도의 모본이 되었지만, 기도만 간절히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이 뜻입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남편이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부인이 남편은 유능하고 돈도 많이 버는 사업가였습니다. 그런데 덜컥 병석에 누웠고, 의사는 와서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기도원으로 사방으로 팔방으로 뛰어다녀 보니까 기도를 하라그랬습니다.. 그래서 금식을 했습니다. 믿으라. 그래서 안 믿어지는데도 믿습니다! 하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믿음과는 상관없이 남편은 죽었습니다. 장례식이 끝났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저는 성경에 있는 말씀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자다가 봉창을 뚫는 소리입니까?” “다른 것은 모르겠는데요, 성경 가운데 딱 하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체험적으로 확인 했습니다.” “그게 뭡니까?” 그 형제자매가 피는 성경구절은 요한복음 14장이었습니다, 그 14장을 그리고 읽었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니, 무엇이든지입니다.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해 영광을 받으시게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누구든지, 누구든지,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구하면 주님이 들어 주시겠다고 그랬고, 믿고 구하면 받은 줄로 믿으라고 그래서 나는 믿었습니다. 정말 믿었습니다. 꼭 믿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제가 남편이 그렇게 죽었는데도 남편이 죽을 준비를 안했겠습니까?” 그랬는데 목사님께서 충격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 자매님, 성경에 뭐라고 쓰여 있던가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을 구하던지 시행하리라’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자매님, 거기서 말하는 너희가 는 자매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너희가 무엇을 구하던지 할 때 그 너희는 자매는 아니다. 당신은 그 너희 속에 안 들어갑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안 들어가다니요?” “뒷부분을 읽어 보시지요!” 자매가 읽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목사님의 말씀은 이것 이었습니다. 성경은 너희가 라는 의미를 넓게 좁게, 좁게 넓게 다양하게 쓰고 있다는 말입니다. 언제는 세상까지 다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언제는 교회만 가리킨다는 말입니다. 언제는 일꾼들만 가리킨다는 말입니다. 언제는 목사님들만 가리킨다는 말입니다. 언제는 또 특정한 사람만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것은 뭐냐 누구든지 그렇게 기도를 들어준다면, 우리가 기도 응답 받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고, 삶의 동기가 주를 경외하는 것에 꽂혀 있는 사람, 이 사람의 기도를 모두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엊그제 우리 안 목사님 말씀하셨습니다. 조지 밀러는 3만 번인가 5만 번의 기도를 응답받았습니다. 심지어 어떤 때는 그랬습니다. “목사님 우유가 없습니다. 아침식사를 어떡하지요?” “컵을 모두 모으시고 수백 명의 고아들을 모으십시오.” “모았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실 것입니다.” “어디서 오기로 되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다 같이 식사기도를 하십시다. 주님, 이 귀한 우유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마쳤을 때에 밖에서 크락숀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유회사에서 우유를 기증하러 왔습니다. 왜 기적과 같은 응답이 그 만 쫓아다닙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그가 간절했기 때문입니까? 우리도 제법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평생을 고아와 하나님과 과부를 위하여 살기를 원했던 진실한 삶의 소원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왜 새벽과 밤에만 기도를 하셨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만물이 잠들어 있는 새벽과 밤에만 기도하셨을까요? 조용하게 기도하기 위해서라면 낮에도 깊은 숲속에 들어가거나 광야로 나아가면 아무도 방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렇다고 해서 새벽에만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은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밤늦게까지 주의 일을 하셨습니다. 과로하면 피곤하시고, 주리면 배고프신 분인데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새벽 어두운 때에 들판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아무 뜻도 없습니다. 왜 새벽에 나갑니까? 아무 뜻도 없습니다. 간단한 겁니다. 낮에는 기도하면서 보낼 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우리가 주의 일을 행하여야 하리라. 그분의 낮의 생애동안에는 각색 병든 자들과 고통 받는 자들과 복음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 곁에 와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병든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양 떼들을 버려두고 어떻게 깊은 산속에 들어가 한적한 기도를 할 여유가 있었겠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시기 위해서, 남이 잠든 새벽과 밤의 시간에 기도로 보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들이 결코 방해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주의 일을 할 때에, 주의 일 때문에 기도가 방해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기도 좀 한다고 그러면 맨 날 방해를 받습니다. 할 일을 못합니다. 뭘 좀 일을 하고 주의 일을 한다고 그러면 ,기도도 안하고 껍데기가 되어서 들락날락하기가 쉽 상입니다. 주님의 생애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바를 귀 기울여 들어야 될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이 모든 부조화 가운데서 건져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제가 오래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왜 이 사람은 대학을 몇 번 떨어져가지고 할 수 없이 신학교를 갔는데, 신학교를 다닌다고 말을 하는데, 매일 당구장에서 다마나 치고 술에 취해 다니기가 일쑤입니다. 예배는 기분 내키면 나옵니다. 소명은커녕 회심도 못한 사람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형제는 말했습니다. “제가 이제 40일 철야기도를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야! 이건 할렐루야다 뭔가 이변이 일어난 겁니다. 저 골초 저 골통 40일을 기도한다니, 야, 하나님께서는 결국은 변화를 시켜주시는구나!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40일 철야기도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정말 기도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 기도를 얼마나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매일 밤 교회에 나왔습니다. 하여튼 8시쯤 교회에 나와서 차도 마시고 찬송도 부르고 친교도 하고 기도도하다가 졸기도 하다 그러다가 5시쯤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한 중간쯤 된 다음에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 그러니까 뭔가 변화가 일어났나. 해서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그럽니까? 자기 일과를 말하는데 재미있습니다. 8시에 교회 와서 기도한다면, 새벽 5시에 가서 7시까지 씻고 8시에 잔답니다. 그래서 5시에 일어난답니다. 5시에 일어나서 다시 씻고 밥 먹고 성경 들고 교회에 가서, 8시에 다시 놀다가 기도하다 졸다가, 또다시 5시에 가서 또 다시 8시에 자고 교회에 나오는 겁니다. 40일 동안 이런 일들을 반복을 했습니다. 40일을 마쳤지만 주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참된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가 아무리 간절하고, 심한 통곡으로 가슴을 쥐어뜯을지라도, 그의 삶이 주를 경외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삶이 아니라면, 그의 외치는 기도 소리는 교회당에 가득할 지라도 심령에는 적막이 깃들고, 그가 외치는 기도소리는 하늘을 찌를 것 같아도, 주의 보좌에는 고요가 깃든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기억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까? 골방에만 묻혀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낮이 있는 동안에 주를 위해서 생명을 걸고 나가 싸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의 볼모지에 복음을 들고 나아가 복음을 외치고, 나의 살아있는 삶의 영역에서 주께서 영광 받으시기 위해서 몸 버려 피 흘려 수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짧아도 힘이 있었습니다. 위대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싸웠던 여호수아가 해를 향하여 명했습니다. 태양아, 거기 서라! 하나님 저 태양을 서게 해 주시옵소서! 멎었습니다. 전능 하신 하나님, 거룩한 하나님, 존귀하신 하나님, 이런 하나님을 30분 동안 부르지 않았어도, 태양아 멎어라! 태양은 스톱했습니다. 이런 기도로 사자의 입에 물린 양 떼들을 건져내기도 했고, 그리고 불의 세력으로부터 구출받기도 했으며, 그리고는 사자들이 으르렁거리는 굴에서도 살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모두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단지 기도의 사람들이 아니라 주를 위해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를 위해 복을 받기를 원하려면, 맨 나중에 나올지라도 주의 종이 되어서 순교하기를 원하려면, 내가 첫 번째가 되어서 나아가리라는 그 사람들의 기도를, 주님께서는 응답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입술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 같아도, 우리의 속사람은 우리에게 송사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들어와 앉은 모든 탐욕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리고 학개 시대의 백성들처럼 여호와의 전을 지을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하며, 자기들은 반듯한 집에 거하는 이 모든 이기적인 탐심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입술로 아무리 주를 위해 살겠다고 해도, 영혼은 너희 기도가 참된 기도가 아니하고 참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런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깊이 기도할 수 없습니까? 저의 지금까지 가장 간절하고 절박한 깊은 고민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누가 아시는 분이 있으면 진심으로 제게 가르쳐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더 깊은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반복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흘리는 그분의 눈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기도가 경박합니까? 그리고 깊이가 없습니까? 그리고 맨박이 전화 통화하는 것처럼 사무적으로 기도하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어떠한 희생을 치루고 라도, 기도의 깊은 세계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런 친밀함을 누리는 것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는데, 여호와의 친밀함이 그 경외하는 사람에게 있으리로다. 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눈을 들어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실 때에 응답해 주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이 교회의 주인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주인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결단합시다. 그리고 주가 오르셨던 그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야 될 것입니다. 그가 통곡하며 기도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우리 자신과 교회와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하여 울부짖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찬바람 부는 갈보리언덕 겟세마네 동산 모퉁이에서 우리들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 흘리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에 성령으로 말미암는 부흥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눈물의 잔들을 여러분들이 채워야 되는 것 입니다. 주께서 이것을 원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셨던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던 주님을 향하여, 하나님이 외면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여러분들이 그렇게 주를 경외하면서 하나님 앞에 탄식하므로 기도할 때에 여러분들의 기도를 외면치 않으실 것입니다. 주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