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가르친 후(1)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4-1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지난 몇 주 동안 주님은 우리에게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버리고, 외식을 버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그 유명한 주기도문을 기도의 모본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후에 기도에 관한 교훈이 모두 끝났을 때 오늘 우리가 읽은 용서에 관한 교훈이 등장합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의 가장 완벽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교훈들이 마가복음에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고, 누가복음에는 그 중에 어떤 내용들이 확장된 채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상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하신 내용이 성경의 기록자들에 따라 편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II. 용서를 가르치심
A. 잘못을 용서하라
그러면 무엇 때문에 마태는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마친 후 그 끝에 예수님의 또 다른 가르침인 용서를 배치하였을까요? 물론 예수님은 마태복음에 배열된 것처럼 주기도문을 마친 직후에 용서에 관한 교훈을 주셨을 수도 있고, 순서는 다른 교훈을 마태가 배치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무엇 때문에 기도에 관한 긴 가르침이 끝난 직후에 용서에 관한 교훈이 자리를 잡았을까요? 이것은 예수님에게나 혹은 마태에게나 두 분 모두에게 용서와 기도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용서를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첫째는 ‘잘못을 용서하라’ 입니다. 14절에 보면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였는데 이 ‘잘못’이라는 희랍어 단어가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가 아니라 많이 있다는 뜻이고, 이것은 연약함과 실수로 인해 우리에게 준 피해뿐만 아니라 또한 의도된 범죄를 가리킵니다. “용서하라”라고 되어 있는 이 번역의 희랍어 원어는 ‘아페테’입니다. 이것은 ‘용서하라’ 혹은 ‘빚을 탕감하라’ 혹은 ‘허락하라, 내버려 두라’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명령형 동사입니다. 이러한 용서는 자기가 손해를 본 것과 관련된 범과인 경우에 하나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하거나 의도적으로 악을 행해서 나의 물질이나 몸, 혹은 명예에 손상을 입게 되었을 때 피해를 입은 나는 그 피해를 본 범위 안에서 일정한 정도의 용서 권한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만약 피해를 입은 사람이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 더해지고 용서해 주면 그 사람의 벌이 경감되는 그러한 뜻까지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본문이 바로 욥기 42장 8절 상반절에 나온 내용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욥 42:8上)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욥일 수도 있고, 혹은 번제일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욥에게 잘못한 친구들, 그 사람들이 욥에게로 가서 용서를 빌고 욥이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용서해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하나님도 그들을 용서해 주실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인간의 범죄에 대한 용서가 공동체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 마태복음 18장 18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교훈이 그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범죄와 과실은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누군가 개인에게 피해를 준 것이어야 하고, 자신이 피해를 본 그 범위 안에서만 자신의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교훈을 통해서 가르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너희들 사회에서 잘못하고 과실을 행하고 혹은 의도를 가지고 악을 행하여 남을 해치는 일이 없을 수 없으나 그것으로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완전한 파멸에 이르도록 내버려두지 말라. 오히려 그들을 그들에게 용서를 빌고 또 그들을 용서함으로써 용서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에 맺힌 것을 가지고 살지는 말아라. 왜냐하면 그것이 너희의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기도에 관한 긴 교훈 끝에 용서의 가르침을 두신 이유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것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서로를 용서하도록 가르치십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지체들끼리 허물과 잘못을 용서해 주고 서로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15절에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특히 14절에서는 그 한 아버지를 하늘 아버지로 묘사함으로써 유대인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영광의 개념을 사용합니다. 마태복음은 원래 의도된 독자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상기시키기에 하늘 아버지보다 훌륭한 표현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가슴에 착착 붙는 언어로 그들이 알고 있는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그 위대하신 하늘 아버지가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말씀하심으로 이들도 용서할 마음을 갖게 하시기 위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 혹은 악을 행한 사람에 대해서는 자신이 일정한 범위 안에서 그를 용서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어떻게 보면 용서 받아야 할 사람을 위한 혜택인 것 같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용서해 주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 때로는 매우 악하게 우리에게 행하여 우리에게 커다란 고통을 준 사람을 용서한다고 칩시다. 그를 마음 깊은 곳에서 그를 향해 품었던 피 묻은 칼을 내려놓고, 그를 예수의 사랑으로 진심으로 용서해 줄 때 그 혜택을 처음 받는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 우리 자신입니다. 그를 마음속에서 풀어주고 용서해 줄 때 우리는 오랫동안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것 같은 해방을 경험합니다. 마음속에 미워하던 사람을 향해 품었던 칼을 내려놓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힘든 일이지만 일단 복수를 포기하고 나면 우리의 마음에 미움이 사라지는 대신 하나님 아버지가 하늘 아버지가 우리를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는지가 커다란 밀물처럼 우리에게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용서를 해 준 우리가 제일 커다란 첫 번째 혜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을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지금은 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하고 악을 행하였으나 그래서 나에게 용서 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지만 나도 내 안에 있는 죄와 연약함 때문에 수시로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을 하고 그 중에 어떤 것은 매우 큰 것인데도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또한 누군가에게 악을 행하고 잘못을 했기 때문에 그에게 용서를 받아야 할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충만한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 고백은 아담과 하와에게 뿐 아니라 그가 낳은 가인, 아벨, 이후에 태어난 셋, 그리고 그 세 사람에 의해 번성할 모든 인류들에게까지 적용될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거나 잘못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누구도 한 사람만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하는 그러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이 인간과 사회를 향한 계획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과 사회가 서로 사랑하며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으로 서로 교통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서로에 대한 잘못과 죄로 인한 피해, 가해, 이것들을 해결하지 않으시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타락한 사회에게 주신 그러한 교통의 방법이 바로 용서였습니다.
이 용서는 모든 인류에게 특히 일반계시를 통해 제시되기도 하였고, 특히 하나님이 선택하신 언약 백성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제시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교통하는 덕이고, 미움은 단절하는 악이 되었습니다. 용서를 통해서 이 미움을 그 사람 안에서 없애시고, 사회 안에서 단절시키고 극복시키심으로써 여전히 이 세상을 사랑의 사회로 만들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용서의 교훈이 구약 시대에는 대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중심으로 강조되었으나 신약에서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강조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죄인들까지도 용서해 주는 신약의 윤리로 우리에게 제시된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은 많은 고통과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나에게 악을 행하고 고통을 준 사람들이 있다고 칩시다. 그런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유일한 위로는 복수를 꿈꾸고 그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이 모든 것을 내려놓아 버리는 것입니다. 내게 악을 행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것을 깊이 깨닫고 무릎을 꿇고 용서하는 사람들에게 마치 왕이 용상에서 저 하찮은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용서를 시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어쩌면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나에게 아주 작은 잘못을 한 사람이 가슴을 찢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나에게 용서를 빈다면 ㅇ나는 언제나 용서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교훈은 그렇게 진심으로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비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용서를 빌지 않는 사람들, 심지어 자기가 나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조차도 용서해 주도록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용서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자연인의 본성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번 미워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던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지는 않아도 한번 미워한 사람을 죽을 때까지 미워하는 놀라운 일관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에 주님은 당신의 사랑을 용서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 모든 사람들은 주님이 주시는 돈이나 권세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얼마나 큰 지를 배웠던 사람들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한다고 하는 것은 피해를 본 사람으로서 유일한 위로, 그를 생각하고 복수를 꿈꾸며 그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을 품으면서 살아가던 그 마지막 위로를 내려놓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 차라리 죽는 것보다도 더 큰 고통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 중 어느 것이 쉬운지 여러분의 마음으로 한번 대답을 해보십시오. 나에게 큰 죄를 지어 원한을 남긴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는 것이 쉽겠습니까? 아니면 끝까지 미워하고 죽어버리는 것이 쉽겠습니까? 원한을 품은 것은 원한이 맺힌 채로 죽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죽음 이상의 고통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죄 가운데 사는 우리 인간의 슬픈 본성의 한 단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를 하고 피해를 주는 것이 피해를 당하는 것이 그칠 수 없는 이 사회를 서로 사랑하는 사회가 되게 하기 위해서 당신의 위대한 용서를 인류를 위해 먼저 행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를 보내어 우리의 죄를 영원히 용서해 달라고 빈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오히려 당신을 대적하고 당신이 보낸 아들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이 인간들의 죄에 의해 피해를 본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화해의 손길을 먼저 인간에게 내미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인간들 속에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신 후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십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용서를 빌지도 않는 인류에게 당신이 용서하는 손길을 내미시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의 피로 용서해 주시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우리가 주님을 찾기도 전에 주님께 먼저 발견된 사람들이고, 우리의 죄에 용서를 빌기도 전에 주님이 용서 받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도록 내어주십니다.
B. 용서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구원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인생은 예수의 핏방울 끝에 매달려 있는 인생입니다. 그런 용서의 은혜를 한량없이 받았기 때문에 주님은 그 사랑을 안 사람들에게 큰 의무를 지워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너희를 용서한 것처럼 너희도 너희에게 죄를 지은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용서는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용서는 우리가 다시 하나님에게 사랑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용서였습니다. 그러니 용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죄 있는 사람에게 적용되었을 때에 나타나는 사랑의 한 국면이었던 것입니다. 부부가 살아가고, 친구가 함께 살아가고, 그리고 형제가 함께 살아갑니다. 많이 손해를 보는 사람, 많이 희생하는 사람은 그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얼마든지 그 관계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갑질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관계가 너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당한 경우에라도 자기를 희생하고 오히려 용서를 빌고 용서를 함으로써 그 관계를 지속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이 무한한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서 어떠하실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나 당신에게로 돌아와 용서를 빌면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당신의 사랑을 다시 우리에게 베푸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고, 그 사랑은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경향성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희생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용서를 기억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도록 부르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제는 우리가 의인이요,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뽐내지만 그러나 복음의 사실에 비추어보면 이 세상에는 오직 죄인들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용서를 받은 죄인들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직 용서를 받지 않은 죄인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너희는 이제 의로운 자가 되었다. 너희는 왕 같은 자녀다.’ 라고 말씀하실지라도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에게 대해 인식하기를 ‘나는 의인이기 전에 왕 같은 제사장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이기 전에 사실은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옵나이다.’ 이 고백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를 사랑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갈 때에 기도 들으사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을 자랑하고 심지어는 주님께 받은 것 때문에 교만해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는 사람들을 낮추어 보고 주님께 받지 못한 사람들을 보며 그들보다 우월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용서받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이 세상의 가장 쓰레기 같은 죄인들이었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우리된 것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 은혜 때문이고, 우리의 인생은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핏방울 끝에 매달려 있는 인생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허공 중에서 용서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런 명령을 하실 만큼 우리에게 큰 용서를 베푸셨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그 용서의 정신을 따라서 나에게 아픔을 주고 손해를 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긴 세월동안 기도의 담장을 쌓고 하늘의 자원을 공급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원인은 바로 이렇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죄에 있음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잊히지 않은 긴 기도의 교훈 끝에 여기에 용서하라는 계명을 주셨으니 너희가 용서하면 아버지께 용서를 경험할 것이요, 그 용서의 경험은 너희의 기도의 깊이와 열정을 더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지 못할 것이고, 너희 기도는 막힌 채 있을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열렬한 기도가 되게 만들어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에 따르면 용서하지 않고 누군가를 계속 미워하는 것은 성령을 근심시키는 것입니다. 근심시키시는 성령을 어떻게 힘입어 열렬한 기도를 드리며 은혜의 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에베소서 4장 3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0-32) 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근심시켜 드리면서 어떻게 그 분을 힘입어 충천하는 화염과 같은 기도를 올릴 수 있겠으며 이 세상 시련과 환란에 꺼지지 않는 불길처럼 타오르는 기도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분명하게 죄를 지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죄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게으름의 죄이고, 하나는 용서하지 않는 미움의 죄입니다. 그가 나에게 행한 악이 너무 크게 보이기 때문에 내가 그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은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나에게 행한 악에 비하면 아주 작은 부스러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하찮게 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무도 나의 이 질문에 ‘저요.’ 하고 손 들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마음에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열렬한 기도를 올릴 수 있었던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기도할 때 제일 먼저 우리에게 누군가를 미워했던 것이 우리의 양심에 가책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되지 않을 때에는 제일 먼저 자신의 죄를 돌아보되 특히 누군가를 마음속에 깊이 미워한 죄를 돌아보셔야 합니다. 특별한 근거나 혹은 그래야만 할 마땅한 이유가 없으면서도 누군가에 대한 비난을 쉽게 하고, 그리고 심지어는 악한 뜻을 가지고 그를 비방했던 죄들을 우리들이 쉽게 회개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 최근에 이렇게 누군가를 비방하고 누군가에 대한 미움을 버리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던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러나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우리는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시작이 되어서 그 사랑이 누군가의 마음에 부어지고 그 사람 마음에서 그 사랑은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용서함으로 그들을 뚫고 사랑은 나아갑니다. 우주를 휘돌아 그 사랑은 다시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그것은 설명일 뿐이지 사실은 이 모든 우주 속에 관통하는 교통의 작용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용서의 희생과 고통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우리를 위해 이 죄인들을 용서하기 위해 받았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고통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이 당신의 고통보다도 더 소중했기 때문에 죄인인 우리를 무한히 완전하신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해서 죄 없는 당신은 하나님에게 형벌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우리가 지척거리며 기도 생활에 진전이 없다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마음의 미움을 청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알고, 우리의 마음으로 느끼고, 우리의 의지로 돌이키며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주께서 나를 아무 대가도 없이 예수 때문에 거저 용서해 주셨으니 나도 주님의 희생을 본받아 내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겠습니다.’ 라는 깊은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인생의 날들을 그렇게 헛되게 사람들을 미워하고, 마음에 악을 쌓으며 살았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의 문이 막혔던 것을 깊이 뉘우치고, 오히려 주님께 우리 자신이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용서와 회개 속에 기도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주님은 불멸하는 기도의 교훈을 우리에게 주셨고,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직후에 이웃을 용서하라고 가르치셨으니 이는 얼마나 자주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에 대한 미움이 우리의 기도를 닫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소란스럽게 법석 떨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유난히 나댈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조용히 주님 앞에 자기를 성찰하며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 당하신 희생과 그리고 나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고 있는 나의 이 불의함을 깊이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 때문에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 없이는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님의 사랑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를 마음 깊은 곳에서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떠한 복수도 꿈꾸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주님이 그를 심판하실지라도 오히려 그 사이를 가로막고 제발 그를 용서해 주시도록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으로 당신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아무것도 아까워하시지 아니하시니 그가 고통 가운데 있다면 건져내실 것이요, 궁핍 가운데 있다면 공급할 것이며 기도가 막혀 있다면 하나님은 단번에 그 기도를 열어 당신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잡하고 소란한 일상에서 잠시 여러분들의 정신을 거두십시오.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좀 닫고 조용히 자기를 성찰하며 내가 그 열렬했던 기도의 사람이 왜 이 기도를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무엇이 주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을까 생각 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주님께 미움을 내려놓고 주님의 용서를 빈다면 주님은 갈멜산 엘리야의 장작더미 위에 불을 내리셔서 그 모든 것을 살라버리게 하신 것처럼 여러분들의 기도에 불을 붙여 모든 염려와 근심을 불태우게 할 것이며 여러분들의 닥친 현실을 승리로 이끌어가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 앞에 이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