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영혼의 안식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산상수훈의 가르침입니다. 6장에 이르러서는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행하는 외식을 주의하도록 경고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외식은 진실한 신앙생활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 외식의 원리를 기도 생활에도 적용해 주셨습니다. 기도는 고단한 우리의 영혼의 안식입니다. 왜냐하면 기도 없이는 우리의 영혼이 참된 쉼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생활은 기독교에서 전하는 참된 영적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책망하기보다는 차분한 어조로 제자들과 거기에 모인 많은 무리들에게 기도에 관한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의 비밀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기도의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기도할 때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유대인들인 이 사람들은 관습을 따라 기도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기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이들을 이미 기도하는 사람들로 보고 기도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II. 기도, 내 영혼의 안식
말씀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지만 기도는 실제로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영혼의 능력을 줍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면 그것이 비록 적극적인 의미에서 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우리 안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마음에 세상에 있는 것들로 가득차서 주님을 모실 공간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에게 기도가 가능하겠습니까?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의 언어이기 때문에 마음에 없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없으니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지어낸 대화인 것입니다.
A. 기도시간을 가지라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오. 우리의 현실은 영적이고 신령한 것들에 대한 관심사가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사에 의해 밀려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기능은 육체의 감각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만지고, 후각으로 느끼고, 입으로 느끼는 모든 감각들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은 출렁거립니다. 그리고 이 육체의 문을 통해 들어온 수많은 감각들은 우리의 마음에 수많은 정보를 실어다 나르고 인상을 가져다줍니다. 이러한 것들은 단지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것만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고유한 상상의 작용을 통하여 이런 것들은 있지도 아니한 또 다른 수많은 상상을 만들어 내서 우리의 오감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 이상의 느낌과 상상을 하게 만듭니다. 이러느라고 우리의 마음은 쉼 없이 부지런히 작용하고 움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영혼의 빈 공간을 마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묵 중에 고요히 하나님을 바랄 수 있는 기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의하면 믿음은 하나님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성경 구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라고 한 이 구절은 바로 광야에서 있었던 한 사건으로부터 도입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게 물린 사건이었습니다. 치명적인 독이 퍼져 죽어가고 있을 때에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지팡이 끝에 달고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나음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응시입니다. 우리는 땅에 살고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 곧 우리의 영혼에 응시는 하늘을 향한 응시인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육체의 감각에 우리의 마음을 방치할 때 그 감각들은 수많은 인상을 불러일으키고 우리의 마음의 상상의 작용을 가져옵니다. 그 중의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더 많이 보고 싶고, 갖고 싶고, 만져보고 싶고, 맛보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의 정신은 이 땅에 단단히 고정되게 됩니다.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기로 되어 있는 우리의 영혼이 이렇게 땅에 우리의 마음이 고정됨으로써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늘을 향해 날아오는, 날아오르는, 마음과 정신의 날갯짓입니다. 그렇게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그 모든 속박들을 끊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죄의 줄이라면 회개하고 끊어야 할 것이고, 집착이라면 집착하는 그것이 헛된 것이고 더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생각에 매어 날아올라야 합니다. 기도에 관한 가르침은 이렇게 듣기만 하지 말고 여러분들이 오늘 저녁서 부터라도 직접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 대부분의 사람은 기도를 어려워합니다. 근데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기도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마음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마음이 기도에 적합하지 않도록 변했으니 기도는 여러분들에게 마음에 없는 종교행위입니다. 그러니 그 기도가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기도가 없이 기독교 신앙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없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다면 여러분들은 끊임없이 머리로 아는 기독교에 대한 지식과 그리고 여러분들이 스스로 살아가는 삶 사이에 괴리를 느낄 뿐입니다. 기도는 이 괴리를 없애주거나 혹은 좁혀줍니다. 그래서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에는 무엇에 의해서도 침범 받지 않고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으며 실제로 기도를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도전을 받고 기도를 실천해 본 어떤 사람들은 불평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단단히 먹고 기도를 하면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안 되는 기도는 여전히 안 되고, 기도를 해도 여전히 응답은 없다고 투덜거립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깨달음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거절하시는 것 같다.’, ‘내가 기도하는데 왠지 내 기도에는 응답이 없는 것같다.’라고 하는 이 깨달음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기를 반성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기도만 하고 고쳐지지 않는 나의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자신의 기도가 드리기는 하지만 힘이 없는 기도가 되었는지를 반성하게 합니다. 그래서 기도로 시작해서 삶 전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반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도라는 은혜의 방편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데 하나님 앞에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거절감을 느낀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자신의 무엇인가를 바꾸고 고쳐지기를 원하시는 것이라는 깨달음으로 자기를 데려갑니다. 결국 기도의 문제는 기도에만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삶을 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사람이 항상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찾으며 기도의 교감을 하나님과 나눌 수 있다면 그는 삶 전체가 이미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삶은 기도를 능가할 수 없고, 기도는 삶을 넘어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반성조차도 기도할 시간을 갖지 않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유 불문하고 기도할 시간을 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중 상당 많은 부분은 안 해도 되는 부분이고, 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고, 안 해도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좋아서 하는 일들입니다. 그것을 덜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B. 골방으로 들어가라
두 번째는 ‘골방으로 들어가라.’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네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 기도하라”라고 말입니다. 골방은 집안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공간입니다. 이 골방은 창고도 아니고 사람이 기거하는 거처도 아닙니다. 그러나 얼마든지 창고도 될 수 있고 사람이 거처하는 방도 될 수 있는 방과 창고 중간 정도의 위치에 있는 그러한 방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문학적인 은유입니다. 골방 속에 조용히 들어가 문을 닫으면 누구도 거기 사람이 있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처럼 너희들이 기도할 때 외식하는 자들처럼 남의 평판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기도할 때에 마을 어귀에서 그래서 손을 높이 들고 길거리에서 기도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 선생님은 정말 경건한 분이구나 하는 평판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문학적인 은유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복잡한 일상과 그리고 이 어지러운 시간으로부터 벗어난 하나님 이외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는, 하나님 이외에 관심 있는 것이 없는 그런 별도의 시간과 공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30년 전에 비하면 과학 기술은 엄청나게 발전을 했고, 우리의 삶은 매우 풍요로워졌습니다. 당시 주 5일 근무는 거론도 되지 않던 것이었는데 이제는 드디어 주 5일 근무가 일반화되어 있고, 어떤 특별한 직장에서는 주 4일까지 근무한다고 합니다. 일주일 동안에 근무할 수 있는 총 시간을 법으로 규제하고 52시간 이상씩 더 이상 노동할 수 없도록 이렇게 배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예전보다 마음과 모든 것이 훨씬 편안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노동하고 남는 시간을 우리가 고요히 우리의 마음을 정돈하고, 육체의 원기를 회복하고 이러는데 쓰기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에너지를 들여서 우리의 즐거움을 찾고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발달한 미디어는 눈부시게 오늘날 우리를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면서 켜보는 스마트폰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보통 평범한 사람들이 한 번에 2시간 40분씩 폰을 들여다본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거기에 보내는 것입니까? 더욱이 발달된 영상 문화로 말미암아 우리의 눈길을 끄는 영화와 게임, 그리고 도박, 그 이외에 우리의 마음을 잡아끄는 수많은 영상들이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리고 VR의 발전으로 이제는 예전보다 훨씬 더 입체적으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고 호기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러는 동안에 지식의 양의 총량은 엄청나게 늘어납니다. 예전에는 지식을 공급하는 생산자와 소비하는 소비자들이 나뉘어져 있지만 이제는 그런 공간이 없이 누구나 책을 내려고 하고, 누구나 사람들에게 가르치려 드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좋다, 나쁘다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기술의 발전으로 사회가 진보해 가고, 그러한 발전된 기술을 누리면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그 사회에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기계와 문명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젊은 학자는 두 권의 책을 썼습니다. 한 권의 책 『사피엔스』인데, 인간이 누구이고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종 가운데 가장 치명적으로 위험한 종임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 책은 순식간에 800만부가 전 세계에서 팔렸습니다. 두 번째 책은 『호모데우스』인데 직역을 하자면 ‘인간신’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이제 과학 기술의 폭발적인 발전으로 예전의 인간은 변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인공 지능을 뇌에 심고 인간의 사지백체가 기능하는 것 중에 열등한 것들은 제거하고 발달된 과학 기술의 생산물들을 몸에 끼워 넣어서 그래서 지금 인간보다는 지성적으로나 기능적으로 훨씬 뛰어난 품질의 인간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인류가 출현하여 이 사회를 이끌고 가고 있을 때에 종전의 자연산인 인간 종들이 과연 인간으로 취급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굳이 유발 하라리의 이런 지적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홍수와 같은 정보의 물결 속에 살고 있고, 그리고 그것을 따라 잡고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노동에서 줄인 수많은 시간을 거기에 소비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어느 정도는 이용해야지만 현대에서의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는 티끌만큼의 해결도 주지 못합니다. 인간이 뛰어난 교통수단을 발휘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15분 내지 12분에 도착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시작됐다고 합니다. 그런 튜브 트레인이 만약에 해저에 생겨서 그래서 한국과 서울과 뉴욕 사이를 한 시간에 갈 수 있다고 한들 그렇게 인간이 전철 타듯이 마음을 먹으면 다른 별나라의 세계를 여행하다 돌아올 수 있게끔 변화한다고 하더라도 인생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더 복잡하게 남지 않을까요?
따라서 이러한 과학 기술을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거기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거기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복해야 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거기에 몰입해서 자기가 누구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물으시는 여유조차 없이 주체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말씀 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암시교도나 이런 사람들처럼 과학기술을 죄악시하고 원시로 돌아가는 생활을 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학 기술과 폭발적으로 진화하는 이 사회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나의 독자적인 견해로 이러한 사회의 현실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고 주체성이 있게끔 떨어질 것들은 떨어지고 가까이 할 것들은 가까이 하면서 자기를 자신이 스스로를 주체성 있게 돌보고 그리고 자기 자신이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을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을 가지고 이 과학 기술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지 오늘날 강물처럼 쓸려 내려가는 이 엄청난 문화의 물결에 순응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빛 감각 때문에 해충이 등이 있는 그 빛을 따라서 날아들다가는 전기에 부딪혀서 놀래서는 도망갔지만 5m도 날아가기 전에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시 불을 향해 돌진해서 그 불빛 앞에서 전기에 감전돼 죽어가는 곤충처럼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골방으로 들어가도록 그것도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라고 충고하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정말 우리에게 이렇게 이 세상에서 붙은 욕심들을 털어내고 그리고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밀려오는 이 기술 사회의 문명이 주는 혼란함 때문에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살았던 날들을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땅에 살고 있으나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를 따라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 없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주님과 고요히 만나는 은혜의 시간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기도가 없는 신앙생활은 없다.” 그만큼 기도를 통해서 진리의 빛을 발견하게 되고,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으나 살 힘이 없을 때에 우리는 그 기도를 통해서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기도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을 갖는 깊이만큼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오바마는 “용기란 자기 연민에 대한 무한한 격려입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나는 나 스스로 자기를 위로할 필요가 없고, 나 스스로 나를 불쌍히 여길 필요도 없고, 다른 인간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을 이유도 없는 인간이다.’라는 충만한 의식이 용기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나를 불쌍하게 여겨 깊은 연민에 빠져든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유익을 줄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려준들 그 사람들이 내 인생을 다시 살아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나는 내 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도 난 상관없다.’ 이런 사람이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온 죄는 가장 큰 관심사가 그 사람 안에 있는 기도의 세계를 허물어뜨리는 것입니다. 신자 안에 들어와서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하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의 순발력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은혜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기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는 강물을 따라 흘러가듯이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삶의 상황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는 즉각적으로 기도로 반응합니다. 그래서 시련이 와도 그 시련 속에 담겨진 의미를 하나님 앞에 물으며 상황의 나쁨보다 자기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선함을 지지합니다. 기도 속에서 이런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즐겁고 기쁜 일이 생기고 만사가 내 맘대로 되는 것 같은 때를 만납니다. 그때도 그는 기도합니다.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사람은 바로 기도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죄가 들어와서 제일 먼저 허물어뜨리는 것이 바로 이런 것들을 허물어뜨리는 것입니다. 기도를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기도를 못하겠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상황이 벌어지면 고민을 많이 하고 가슴은 두근거리지만 즉각적으로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기도는 하는데 열렬함을 잃어버리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기도도 하고 기도 시간도 있는데 예전처럼 마음을 쏟아놓으며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열렬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했으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용납되었다는 마음, 그리고 이 간절한 기도에 주님이 귀를 기울이신다는 믿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이제 기도라고 하는 그 기도 생활이라고 하는 형식 자체를 결국은 포기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는 마음속에 내가 이렇게 많이 기도하는데도 하나님은 나에게 응답이 없고, 하나님은 나를 차별대우 하시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기도의 형식 자체를 내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치열한 전쟁터에 이제 갑옷도 벗겨지고 방패도 버리고 투구도 벗어버리고 칼조차 내버려둔 채 맨 몸으로 던져진 사람입니다. 가벼운 상처 하나에도 치명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상황에 자기를 던져버린 것입니다.
골방은 바로 소란한 것들을 피하여 고요히 하나님 한분만을 의식하는 시간과 장소입니다. 이 골방 속에서 잃어버린 기도의 순발력을 회복하게 되고 그리고 잃어버린 기도의 열렬함을 복구합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에 헌신할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골방은 어디입니까? 그리고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골방에 들어갔지만 뒷문은 모두 놓고 기도는 하고 있지만 바깥마당에서 기도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칭찬할 사람들의 평판에 마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까? 아니면 골방에 들어왔지만 그러나 골방은 여전히 사람이 거기에서 주님을 만나기에는 불결하고 더러운 것들이 가득 있는 그러한 방의 상태입니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가 인격적으로 깊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나 능력이 없는데도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해서 이겨 내기 위해서나 모든 것을 위해서 우리에게는 기도의 골방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아름다운 영상과 부추기는 호기심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졌으니 우리는 눈을 조용히 감습니다. 수많은 소리들이 우리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으니 우리의 귀를 막습니다. 우리의 코를 현란하게 유혹하는 수많은 냄새와 향기들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이 부당한 정동에 혼란스러워졌으니 우리는 그 냄새로부터 돌아서는 것입니다. 보드랍고 좋은 것을 만지기 위해서 그것들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에 정동되어 우리의 마음이 굳어졌으니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보드라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믿고 우리는 세상의 보드라운 촉감으로부터 우리의 손을 거둡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술로 들어와 우리의 혀를 현란하게 만들었던 그 많은 음식이 우리에게 준 정동 때문에 우리의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돈이 있어도 여유가 있어도 잠시 우리는 거친 음식을 택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거친 음식이 좋거나 혹은 소리가 나쁜 것이어서가 아니라 약한 우리의 마음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이 모든 오감을 막아놓고 나면 우리는 마치 어두운 우주 공간 속에 던져진 존재처럼 됩니다. 이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깊은 우주의 수렁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러한 우주 공간에 던져진 것과 같은 상태에서 눈을 들어 입으로 맛볼 수 없고 육신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을 정신으로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찬양)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그래서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깨어나 하나님 한분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가 골방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들어오는 흙탕물과 같은 수많은 헛된 것들, 우리의 욕망의 솟구침에 샘을 막습니다. 그리고는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은혜의 자원을 공급 받으면서 우리가 참으로 사람답게 살고 어떠한 처지에 처하든지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는데 그것을 성경은 사랑, 혹은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 세상이 아무리 요동치고 변해도 고요한 중에 은밀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는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렸던 그 골방에서 다시 주님을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하나님께 기도하라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께 기도하라.’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당연히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지 하나님 아니면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를 올린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보다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드리는 기도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에 온 교회는 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해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사람께 기도했을 리는 없으니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이 단순히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기도의 진수는 그 분께 단지 기도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 그 분의 임재 안에서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충만한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별로 기도하지 않지만 드린 그 기도 중에서도 대부분은 하나님과의 대면이 없이 드려진 통보식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드리는 기도가 기도의 진수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우리가 성려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드리는 기도,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기도는 지루한 기도를 시간을 잊어버린 기도로 만들어 줍니다. 냉랭한 기도가 열렬한 기도로 바뀌게 만들어 주고, 세상에 있는 것들에 매여 있는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 나라의 원대한 비전으로 이동하게끔 만들어 줍니다.
나는 우리의 기도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인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드넓은 바다 위에 떠있는 작은 쪽배와 같습니다. 바다가 평안할 때도 있지만 그래서 작은 배지만 평화로운 항해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파도가 밀려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라는 배는 집채만 한 파도에 매달려 있는 아주 작은 모양의 배입니다. 그 배를 파멸로 이끌기 위해 온 바다가 무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 하나의 파도가 방향을 바꾸기만 해도 우리의 인생은 솟구치는 파도 속에서 물속으로 잠수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 인생의 바다에서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우리 주님을 의지하기로 서약한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새벽에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의로운 오른손이 나를 붙드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수많은 파도를 만나고 그 파도 속에서 요동쳐도 주님의 손이 나를 붙들고 있으며 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생사에 경계를 초월한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자기 연민으로 활용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삶은 비겁한 삶입니다. 나의 인생의 태어난 것은 어차피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선택한 것은 내가 책임질 일이 없지만 그러나 이미 운명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고, 나머지 것들은 모두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해서 거기에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도 아주 깨끗하게 내가 그것을 선택했고, 그것이 나의 잘못이라 어거스틴이 고백한 바와 같이 “메아 꿀파” “나의 죄로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비겁하게 끊임없이 자신의 인생의 현실에 대해서 사람이 핑계를 대고, 상황에 탓을 하고 그리고 육체 이탈한 사람처럼 자신은 자신도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여기에 온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책임지려고 하는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생의 태도를 단호히 배격하고 우리는 이것을 역겨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하루를 진지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고, 그런데 우리 자신은 아무리 진지하게 살아보아야 최선을 다해 보아야 최선의 결과를 뱉지 못합니다. 그게 우리 인생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우리의 인생을 주체성 있게 헤쳐 나가지만 우리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나는 비록 흔들리고 연약한 존재이지만 그러나 나의 인생이 그 분의 손에 붙들려 있고, 그 분은 신실하고 변함이 없는 반석이시니 그 분의 손에 붙들려 있는한 내 인생은 그분의 뜻 안에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동치는 인생의 파도 속에서도, 풍랑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 찬송할 수 있습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긴 인생을 온갖 시련을 헤치고 여기까지 살아왔으니 앞으로 내 인생에 조그마한 인생의 풍랑이 더 일어난들 내 인생이 뭐가 달라지는 것이 있으랴.’ 이것을 믿으며 우리의 삶의 희망을 세상에 살고 있으나 우리 주님께 두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사람의 의식을 바꾸어 놓아서 이런 신령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기도의 은혜밖에는 없습니다. 외로워지기 싫은 사람은 기도하면 안 됩니다. 기도는 주님과의 임재 속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는 많은 외로움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에서 주님의 성품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다루시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은혜의 세계의 비밀들을 터득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기도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드리는 기도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 속에 만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의 달콤함은 쓰레기처럼 사라질 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티끌만큼도 알 수 없는 신령한 세계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기에 가장 잘 준비된 마음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요한 1서 2장에서 사도는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라고 했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사랑의 정동에서 나옵니다. 기도를 고민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어떻게 더 사랑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며 그 고민의 깊이만큼 기도는 더 깊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기도하되 골방에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중요한 사실 하나는 ‘아버지’라는 단어입니다. 그렇게 골방에서 우리의 마음을 쏟으며 주님 앞에 기도할 때에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족 관계에서 불리는 ‘아빠’라고 하는 단어만큼 이 단어를 잘 번역한 단어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빠처럼 무한히 자비하고 세심하시며 그리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오래참고 그리고 자비를 베푸시는 그 어머니 같은 아버지의 사랑이 주님의 임재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우리의 가슴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바로 하나님이 반드시 계시다는 사실과 자기를 찾는 모든 사람들을 선대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잠시 미끄러졌어도, 내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잠시 사라졌어도 주님은 선하고 신실하시며 그 주님은 지금도 나를 붙들고 계시다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분명한 믿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비밀스럽게 나눌 밀회가 없는 연애가 무슨 사랑입니까? 사랑은 끊임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싶어 하고, 그리고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계속해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과 연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애하는 지성은 하나님께로부터 연인과 같은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 마음이 성경을 읽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연애하는 마음은 하나님께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자의 기도의 동기입니다. 그러므로 그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누구든지 기도의 시간을 내어 골방으로 들어가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가까운 장래에 이런 임재를 그에게 보여주시고 아빠와 같은 사랑으로 선대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니 기도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이 특권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연애하는 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밀월을 기도 속에서 나누고, 그 분의 밀월을 성경 속에서 듣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이 세상에서 우리의 영혼은 너무 고단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매우 건조하고 그리고 거칩니다. 우리의 고단한 삶은 하늘로부터 오는 참된 양식이 모자라기 때문이고, 이 하늘로부터 오는 참된 양식은 주님을 만나는 데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고요한 중에 마음의 골방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마음에 두 손을 모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 전 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 유혹, 그리고 이 세상에 문명과 기술이 주는 정신 산란함으로부터 여러분들을 정돈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누구도 이 은혜로운 경건의 삶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은혜의 세계 속에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