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할 때
2018.11.7. 교직원예배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5:1-3)
녹취자 : 박나리
시인은 많은 고통을 당하는 중에 “나의 마음을 헤아려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들이 인생에서 문제를 만날 때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계속 갈망하고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원망을 하다 보면, 계속해서 사람에게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인간이 독립심이 없이 의존적이 되고 추해집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복과 기쁨이 계속 사람들에게 달려있는 것 같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럴 때에 “하나님이여 나의 마음을 헤아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저는 옛날 성경을 좋아하는데, “내 심사를 통촉하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왕에게 나아가 성심으로 왕의 호의를 구할 때 ‘제 중심이 그런 생각이 아니라 이런 생각이니 부디 분별력을 가지고 내 마음 속을 꿰뚫어 보아 주옵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런 신앙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사람들이 잘 모르고 내 진심을 오해하거나 혹은 내 기대 같지 않을 때 물론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아시면 충분하다.’라는 신앙이 깔려있습니다. 사람들은 쉼 없이 휘둘리는 인생을 살고, 누가 칭찬하면 교만해지고, 누가 자기를 소홀하게 대하거나 알아주지 않으면 금방 좌절해서 굴러 떨어지는 것 같은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유동적인 삶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알아주시면 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어려움과 환경의 변화가 오면 그것이 변화되어 좋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것이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심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시면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마음이 열납되기를 바란다고 했던 시인의 기도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시지만,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가 보는 앞에서 저울로 우리 마음을 달아보십니다. ‘이것이 너의 마음의 근수이다’라고 달아보십니다. 어떤 사건을 통해서 이것이 너의 마음이라고 무게를 보여주십니다. 그래도 지혜 있는 사람은 그 사건 앞에서 ‘하나님, 나의 마음이 바르지 않습니다.’ 혹은 ‘나의 마음의 분량이 이것밖에 안됩니다.’라고 애통해합니다. 그런 사람은 변화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이 무게를 달아 코앞에 보여주셔서 ‘너의 마음의 근수가 이것밖에 안된다.’라고 보여주시는데도 모릅니다. 끝까지 모릅니다. 기본적으로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알아주시는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인식이 없습니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 나의 마음이 알려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두 번째로 시인이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입니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사람을 부를 때에 큰 소리를 내어 그 사람의 귀에 들리게 하는 동작을 이야기합니다. 히브리어로 ‘카라’라고 합니다. 기도가 안에서 억제할 수 없는 정을 가질 때 사람들은 부르짖게 됩니다. 습관적으로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다 보면 도저히 내 마음에 억제할 수 없는 정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것은 억제할 수 없이 간절함이 쏟아지기 때문에 나오는 부르짖음입니다. 그러니 1년 365일 세월이 흐르는데 한 번도 부르짖을 필요를 못 느낀다면, 기도에 있어서 정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고통스럽다기보다는 자기 영혼의 상태, 잃어버린 영혼과 같이 주님의 마음을 읽을 때, 하나님이 이 현실에 만족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부르짖게 됩니다. 시인은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만 생기면 계속 사람을 붙잡고 말하고 사람을 따라다니며 그 사람의 인정을 받기를 원하며 살아가는 삶은 너무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우리는 서로를 잘 모릅니다. 모르는 가운데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될 때 솟구치는 정으로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온다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면 그분은 기도의 생애를 사셨지만 위기의 순간에 억제할 수 없는 정을 느끼며 부르짖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영성 속에서 산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우리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부르짖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눈물 나게 하는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알아주기를 원하고 주님이 알아주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간절한 소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에게 하나님에 관해서 말을 많이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에 관해서 하나님께 말을 많이 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억제할 수 없는 정을 느끼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시인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면서도 이 기도가 자신의 인생을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치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꼼짝 못하고 들어주셔야 하는 것처럼 오만한 기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왕’이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무엇을 인정하는 것입니까? 내가 지금 시련과 고난을 당하고 억울한 사정이 있어 고통을 받고 있지만 나의 인생,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의 질서를 다스리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왕이십니다. 왕이 모든 나라의 질서를 세우고 거역하는 자들을 정리하고 올바른 자들을 격려하여 바르게 세우는 일을 합니다. 이같이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왕이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인가 안 되는 것 같아도 결국은 왕이신 하나님 손아래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심으로 그분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왕은 절대로 당신의 통치권한을 함부로 사용하지 아니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랑으로 당신의 통치권을 행사하실 것입니다. 악한 자는 반드시 당신의 방식대로 정리하시고 당신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과 그분께 피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은신처가 되실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을 너무 두려워하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길은 하나님의 왕권에 있기 때문에 내가 그분 앞에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전심으로 그분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3절에 보면 시인은 “아침에 주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나이다”라고 합니다. 아침은 시인에게 굉장히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밤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지만, 아침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었고 주님께 부르짖는 시간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심판, 홍해가 갈라진 사건, 그리스도의 부활, 만나가 내린 사건도 모두 아침 혹은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아침을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시작하는 것은 너무 좋은 것입니다. 원래 교직원의 출근시간이 7시 45분이었습니다. 후에 너무 가혹한 조건이 아닌가하여 허물었지만, 그래도 나는 뚜렷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여러분이 절대로 아침에 기도하지 않으니까 7시 40분에 교회 본당 앞에 카드기를 설치했습니다. 찍고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직원들은 일찍 오시기 바랍니다. 아이를 양육하거나 새벽기도에 나오시는 것이 아니라면 일찍 오십시오. 교회당에서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이 건조하면 점심 때 와서 기도하고 밥을 드십시오. 늘 하나님을 찾는 기도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시인은 주님이 아침에 응답하신다고 확신합니다. 그렇게 간절히 부르짖으면 주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실 것입니다. 기도한 후에 평안은 아는 사람은 압니다. 근심과 염려가 가득하고 안 좋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떨칠 수가 없을 때, 마음을 쏟아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평안을 주십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그런 주님의 손을 어린아이처럼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거를 우리 기억에 남게 하려고 현재를 알게 하시는데 미래는 절대 안보여 주십니다. 누구도 내일 일어날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절대 안보여 주십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 알고 나면, 좋은 미래일 경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나쁜 미래일 경우 좌절해서 하나님을 붙들어봐야 소용이 없다고 운명론에 빠질 것입니다. 가려 놓으십니다. 신비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미래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종교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르니까 주님을 꼭 붙잡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확실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주님 없이 확실한 길을 걸어가는 것보다 주님과 함께 모르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달아보십니다. 주님이 달아보실 때에 주님 앞에 무게가 나가는 사람들이 되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