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할 때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 5:1-3)
녹취자: 이미란
첫 번째로 시인은 많은 고통을 당하는 중에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라고 말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갈 때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계속 갈망하게 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원망하다보면 계속해서 사람에게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다 인간은 독립심이 없이 의존적이 되고 추해집니다. 결국 자신의 행복과 기쁨이 계속 사람들에게 달려 있는 것 같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럴 때 시인은 “여호와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전 성경에는 “내 심사를 통촉 하소서” 라고 번역되어있습니다. ‘통촉’은 백성들이 왕에게 나아가 성심으로 왕의 호의를 구할 때 ‘제 중심이 그런 생각이 아니라 이런 생각이니 부디 분별력을 가지고 내 마음속을 꿰뚫어 보아 주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나의 진심을 잘 모르고 오해하거나 혹은 나의 기대와 같지 않을 때 물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아시면 충분하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 때문에 쉼 없이 휘둘리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누가 좀 칭찬하면 붕 떠서 교만해지고 누가 좀 자기를 소홀이 대하거나 알아주지 않으면 금방 좌절해서 굴러 떨어지는 것 같은 것을 느끼며 살게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일컫기에는 너무 요동치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알아주시면 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대체로 어려움이 오고 환경의 변화가 오면, 그 어려움과 환경을 바라보며 변화돼서 자기의 상황이 좋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시면 괜찮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이 나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마음에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마음이 열납되기를 바라는 시인의 기도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시지만 때로는 저울로 무게를 다는 것처럼 우리 마음을 달아보시기도 합니다. 어떤 사건을 통해서 ‘이것이 네 마음이다.’라고 알게 하십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그러한 사건을 통해서 ‘아! 하나님, 나의 마음이 바르지 않습니다.’ 혹은 ‘나의 마음의 분량이 이것 밖에 안 됩니다.’ 라고 애통해 합니다. 이렇게 깨닫는 사람은 변화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저울로 우리 마음을 달아서 코앞에 보여주면서 ‘네 마음의 근수가 이것밖에 안 된다.’라고 하셔도 끝까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내 마음을 알아주시는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인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님 앞에 나의 마음이 알려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시인은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부르짖다.’라는 것은 사람을 부를 때 큰 소리를 내어 그 사람 귀에 들리게 하는 동작입니다. 기도할 때에 억제할 수 없는 마음이 생겨나면 사람들은 부르짖게 됩니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부르짖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다보면 억제할 수 없는 마음이 생겨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억누를 수 없을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마음을 억제할 수 없이 간절할 때 부르짖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한 번도 부르짖을 필요를 못 느꼈다면, 기도에 대한 내 마음이 모자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너무 고통스러울 때 내가 고통 받기보다도 자신의 영혼의 상태나 잃어버린 영혼이나 또 다른 무엇이 하나님이 나의 이 현실에 만족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칠 때 고통스럽고 부르짖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사람을 붙들고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말을 만들고,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그 사람의 인정을 받기를 원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너무 피곤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우리는 서로를 잘 모르는 가운데도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관계에서 옵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될 때, 어떤 솟구치는 마음으로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온다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면 그분은 기도의 생애를 사셨지만 위기의 순간에 억제할 수 없는 마음을 느끼면서 부르짖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정말 우리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부르짖지 않을 정도의 눈물 나게 하는 간절한 소원을 주님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마음, 주님이 알아주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간절한 소원이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또한 사람에게 하나님에 관해서 말을 많이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람에 관해서 하나님께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더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언가 억제할 수 없는 마음을 느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시인은 그것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라고 그렇게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면서도 이 기도가 자신의 인생을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꿈쩍 못하고 들어 주셔야 하는 것같이 오만한 기도의 자세는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며 ‘왕’을 먼저 말합니다. 그 말이 인정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시련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억울한 사정이 있어서 고통을 받고 있지만, 나의 인생과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의 질서를 다스리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모든 나라의 질서를 세우고 거역하는 자들을 정리하고 올바른 자들을 격려하여 바르게 세우는 그런 일들을 왕이 하듯이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뭔가 좀 안된다고 하여도 왕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심으로 그분을 의지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왕은 자신의 그 통치 권한을 아무렇게나 함부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랑으로 당신의 통치권을 행사하실 것입니다. 악한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당신의 방식대로 정리하시고 당신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과 그분께 피하려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은신처가 되실 것입니다. 사람을 너무 두려워하고 그렇게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길은 하나님의 왕권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분 앞에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전심으로 그분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3절을 보면, “아침에 주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라고 합니다. 시인에게 아침은 굉장히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아침은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었고, 소돔과 고모라성의 심판, 홍해가 갈라진 것, 그리스도의 부활, 만나가 내린 사건 모두 아침이나 새벽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을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시작하는 것은 너무 좋습니다.
원래 교직원 출근 시간이 7시 45분이었습니다. 너무 가혹한 조건이 아니냐 해서 그 규칙을 바꾸었지만, 그때 저는 뚜렷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라도 안하면 절대로 아침에 기도하지 않으니 7시 40분에 본당 앞에 카드기를 설치했었습니다. 카드라도 찍고 기도하러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자기가 기도시간이 충분한 사람들이나 일찍 와야겠지만 아이를 양육하거나 새벽기도 나오는 사람들은 상관없지만, 그럴 용기가 없는 사람은 일찍 와서 교회당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건조하면 점심때라도 잠깐 기도하고 밥 먹으러 가고 말입니다. 늘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 기도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시인은 주님은 아침에 응답하시고 그렇게 간절히 부르짖으면 주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기도하고 난 다음에 찾아오는 평안은 아는 사람만 압니다. 근심과 염려가 가득할 때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평안을 주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손을 어린아이처럼 꼭 붙들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거는 우리가 기억에 남게 하셨고 현재는 알게 하셨는데 미래는 절대 안 보여주십니다. 우리 중 누구도 내일 일어날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절대 안보여주십니다. 좋은 미래면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고 나쁜 미래면 하나님을 붙들어 봐야 소용이 없다는 운명론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것입니다. 바로 주님 없이 확실한 길을 걸어가는 것 보다는 주님과 함께 모르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아십니다. 주님을 바라보실 때에, 주님 앞에 무게가 나가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