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대 강의
녹취자 : 김민선
제가 좋은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누가 같이 대화를 좀 하자고 사람을 불러냈습니다. 최근에 나에게도 그런게 있었는데 바쁜데 대화할 일이 있다고 누가 불렀습니다. 그런데 거절할 수 있는 처지가 안돼서 만났습니다. 만나자마자 그 사람은 폭포수처럼 자기 얘기를 쏟아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 이제 시간이 됐네. 오늘 대화 참 즐거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돌아오는 내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내가 왜 이 긴 이야기를, 나와 특별한 관련도 없는 자기 이야기를 내가 들어야 되나?’ 그러고 마지막엔 좀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대화가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만약에 그런 경우가 됐다면 다시 만나고 싶겠습니까? 안 만나고 싶지 않겠습니까?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전에 만났는데 자기 이야기도 하지만 내 관심사가 뭔지 눈치를 보면서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이야기를 자꾸 하는 것입니다. 물어보기도 하고, 이야기도 하면서 내 속에서 대화를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야기가 막 나오게 됩니다.
그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할 때도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자기 할 얘기 다 쏟아놓고 끝내고 가는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끌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무슨 마음일까를 헤아리면서 기도하는 그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끌겠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당연히 후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를 드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아까 ‘숙고’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존 오웬 같은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이것이 계속 이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게 뭐냐면 ‘consideration’ 프? ‘application’. 숙고와 그 다음에 적용입니다. 숙고와 적용. 영어의 ‘consideration’은 숙고인데 숙고가 무엇입니까? 그냥 이렇게 think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면 그냥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얘는 사실을 보고 그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더 깊이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숙고입니다. 이게 익을 숙(熟)자입니다. 맞죠? 조회 때 쓰죠. 익을 숙(熟)자입니다. 반숙 할 때 ‘숙’ 입니다. 푹 익도록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考)는 고찰하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뵈레아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과연 그러한가?’ 라고 생각하듯이 깊이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깊게 생각하는 것이 숙고입니다. 숙고와 함께 뭐가 필요하냐면 ‘application’이 필요한데 이것은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면(아마 칠판에 쓰신 consideration을? 가리키신 것 같습니다) 이거는 주관적으로 자기에게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느냐.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울며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비가 쏟아지는데도 그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았다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그 말씀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 의미를 찾아내서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 받은 숙고의 빛을 자기에게 비추어보면서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 될 것 인가, 어떻게 믿어야 될 것인가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게 ‘적용’입니다. 이 두 개가 계속 활발하게 움직일 때 하나님의 말씀은 이 사람 마음속에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아무리 배우고 익혀도 숙고가 없고 application이 없으면 그런가보다 하고 스쳐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 사람을 변화시키진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말씀을 배우고 숙고와 적용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조금 배웠어도 철저히 숙고하고 적용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속에 더 많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럼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생명이에요. 이 생명이 열렬하게 기도할 수 있도록 우릴 만들어줍니다.
(종강, 시험얘기)
오늘, 지난 시간에 했던 교재의 다음 ‘마음의 틀’ 쪽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교재의 39페이지 입니다. 죄의 작용과 은혜의 작용 오늘 이 때까지 다 진도를 나가려고 합니다.
오웬의 인간론에 있어서 중생한 죄의 작용과 은혜의 작용. 중생한 신자는 죄의 작용과 은혜의 작용 사이에서 갈등한다. 신자 안에 있는 죄는 내재하는 법으로 반감과 대적으로 역사한다. 마음의 틀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강조를 늦추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과 세계에 대해 피종적인 존재가 아니다. 지성과 알게 되는 계시와 감각을 통해 접하는 외부 세계와의 접촉 속에 끊임없이 자기에게 보유한 영혼의 반응을 보이는 존재다. 도덕적인 문제로 관련해서 인간의 영혼의 작용은 자신 안에 이미 내재하고 있는 경향성을 따르게 되는데 이것이 마음 안에서 성령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아야한다.
프로뉴마?와 마음의 태. 인간의 영혼의 경향성은 작용하는 마음 안에서 성향으로 나타난다. 이 성향은 사물을 인식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로 행동하는 영혼의 모든 활동에 일관된 영향을 주는데 이것을 가리켜 존 오웬은 마음의 틀이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명백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있어서 프로네시스의 개념을 차용한 설명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프로네시스는 영혼의 기능에 속한다. 자신의 책 영혼에 관하여 『Περι Ψυχης (Peri Psyches)』라는 책에서 이러한 사실을 말했다. 모든 사물은 자신의 고유한 존재와 작용을 유지하는데 그 힘이 곧 영혼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 뿐 아니라 동물, 식물, 무생물 까지도 영혼을 가진 존재다. 그리고 그 영혼은 곧 경향성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인간만의 고유한 것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매우 특별하지만 모든 사물들에게 영혼이 있다고 보았고 심지어 이런 책상이 이런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이 안에 책상만의 영혼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이 형태를 무너지지 않고 유지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결국 오늘날 발달한 물리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했던 영혼이라고 하는 것. 특히 무생물에 있어서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힘 혹은 역학 이라는 개념에 유사한 것입니다. 이 자체가 이 형태를 고집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형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 형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힘보다 더 큰 힘이 여기에 가격이 되면 부서지거나 아니면 가루가 되거나 등등 다른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봤다고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프로네시스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물 속에 있는 그 사물을 그 사물로 존재하게 하는 힘입니다. 이것을 인간에게 적용했을 때에는 이 프로네시스가 어떤 그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에서 작용이 일어나고 그것을 실천하게 하는 하나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성향, 틀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럼 한 번 생각해봅시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잠시 흘러가지 못하도록 막아놓으면 흘러가지 못하고 물이 고이긴 하지만 여전히 그 물 속에는 낮은 곳으로 흘러내려가는 성향이 있습니다. 물이 고이게 할 수 있지만 막아 놓은 것보다 더 많은 양의 물이 넘치게 되면 물은 여지없이 다시 아래로 흐르게 됩니다. 그것을 멈추게 할 수 있지만 멈춰있는 동안에도 물 안에 있는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르고자 하는 그 성향 자체는 바꿔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프로네시스입니다.
그럼 인간을 놓고 봅시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의 마음엔 어떤 성향이 흐르고 있겠죠? 이 성향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기도 하고 후천적으로 획득되기도 했겠죠. 선천적으로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무엇인가 빛깔이나 색깔 같은 데에 아주 예민합니다. 그런 성품을 타고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안 쓰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데 선천적으로 빛깔이나 색깔에 대한 감을 아주 예민하게 타고난 사람들은 어린 나이 때부터 자기 옷 색깔이 마음에 안 들면 안 입으려고 하고… 우리 손녀가 있었는데 3살 때부터 자기가 입을 옷과 신발을 스스로 골랐습니다. 할아버지 닮아서 그런 모양입니다. 나는 남들도 이렇게 색깔이 안 맞는 옷을 입고 다니면 폭력을 당하는 느낌입니다. 색깔과 이런 것들이 안 맞는 공간에 있으면 빨리 이동하고 싶습니다. 좋은 공간이라기보다도 이렇게 맞지 않는... 모든 사람이 그러는 건 아니잖아요? 무슨 상관있나 생각을 합니다. 다른 성향을 가졌습니다.
선천적으로도 있지만 후천적으로도 그런 환경 속. 세련된 사람들이 사는 집단에서 자기도 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후천적으로 개발이 됩니다. 자기는 별로인데 엄마가 워낙 세심에 뛰어나면 엄마가 잔소리를 하면서 어릴 때부터 패션을 가르칩니다. 예를 들자면 그렇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다양한 것들이 후천적으로 있으면 그 사람 마음엔 성향이 있는 것입니다. 성향이 되는 것입니다. 성향이 A, B에 의해서 A에 의해 주어지고 B에 의해서 발전되거나 후퇴되면서 어떤 성향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한가지만이 아니라 숨은 성향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말하는 사람은 기회가 되면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을 하고자 하는 성향이 이 안에 있으니까 정직한 엄격을 강요받을 때에는, 두려울 때는 못하나 여건이 허락되면 거짓말을 계속 합니다. 그러면서 흘러갑니다. 색깔을 맞춰서 옷을 입는 사람은 감옥 속에 가서도 아마 그렇게 노력을 할 것입니다. 그게 성향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색깔이나 이런 것은 도덕과 상관이 없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도덕과 상관이 있을 경우에는 어떤 문제가 나오냐면 이 프로네시스가 바람직하게 잘 되어있는 사람은 선한 삶을 사는 것이 덜 힘든데 프로네시스가 잘못된 방향으로 되어있는 사람은 선한 삶을 사는 것이 너무너무 힘들고 어려운 삶이 됩니다.
그러면 결국 인간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어떻게 인간이 참 행복에 이를 수 있겠느냐 그것은 이 도식을 가지고 설명하자면, 신앙으로 설명을 하면 하나님이 우리가 살아가기를 원하는 삶이 이 사람도 그렇게 살고 싶은 프로네시스가 될 때, 그 때 그 사람들 삶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과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의 프로네시스가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매일매일 살아가는 게 하나님 앞에서 너무 좋은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완벽하게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이론으로 만약에 선한 프로네시스라고 한다면 여전히 이 사람이 아무리 프로네시스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인간인 자기가 원하는 것 사이에 합치를 이루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이사람 속엔 죄가 있습니다. 사람에도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죄도 있습니다. 수시로 이런 것들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향의 프로네시스가 생기도록 죄는 계속해서 작동합니다. 이런 것들이 반짝반짝하는 스팟으로, 점처럼 생겨나면서 이것이 이것들을 연결해서 어떤 악한 프로네시스를 형성하려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반짝반짝 생겨나지만 수시로 말씀과 기도로 이것들을 끊어내주면 프로네시스까지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거를 잘 못해서 이렇게 깜박깜박하고 들어오는 어떤 죄에, 이런 것들에 대해서 자기가 순응을 하면서 계속해서 이것들을 죄에 대한 복종으로 연결하는 것은 얼마 안돼서 강력한 프로네시스를 형성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오락을 좋아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극장이 성황을 이룬 것입니다. 비디오가 처음 나왔을 때 극장은 모두 망했다 생각 됐는데 비디오 덕분에 극장에 대해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비디오를 보는데 좀 더 큰 화면, 좀 더 생생한 음성으로 듣는데 TV로 보는 비디오는 극장에서 보는 것과 비교가 안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극장을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나오면 천만명이 봤느니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영화 시장이 1년에 11조원인가 그렇다 합니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가서 그 영화를 봅니다. 오락을 좋아하는 성격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만약에 게임기에 매달렸는데 하고 싶습니다. 반짝하고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한두 번 만지다가 혹은 하고 싶은데 시간낭비라고 하며 끊어버리면 프로네시스가 형성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고 싶다는 욕망을 절제 못하고 확장시켜버리면 실현됩니다. 그냥 게임은 재미없습니다. 돈을 걸고 싶어집니다. ??(39:19). 돈을 거는 가운데 시시해집니다. 그러면 뽀로록? 오락에 빠집니다.
여러 번 순종하면, 여러 번 자기 욕망에 따르면 죄는 가만히 있지 않고 우리 안에 프로네시스를 형성합니다. 프로네시스를 형성 하는 이유는 프로네시스가 형성 되면 아주 작은 유혹으로 그 사람을 죄를 짓게 만들 수 있습니다. 죄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효율적입니다. 성령님의 은혜는 선한 프로네시스가 우리 안에 형성되길 원하십니다. 선한 프로네시스가 많이 형성된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악한 프로네시스가 형성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보다 훨씬 덜 힘듭니다. 예를 들어서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 그거를 나쁘다는 사실을 알고 끊어야 될 때 거의 칼로 가슴을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받으면서 금단 현상을 경험합니다. ‘담배를 끊으면 살인도 한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마약은 그것의 200배라고 합니다. 웬만한 사람은 못 벗어납니다. 요즘은 특별히 치료요법도 많이 밝혀졌지만 자기가 고통을 받으면서 치료를 받아야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알콜중독치료도 마찬가지입니다. 치료과정자체가 굉장히 많은 고통을 동반합니다.
그런 프로네시스가 형성되고 나면 훨씬 더 쉽게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깜박깜박 은혜를 주시지만 또, 깜박깜박 죄가 유혹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더 강력한 선의 프로네시스가 되기를 원하셔서 우리에게 말씀과 감화 이런 것들이 계속 공급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죄의 프로네시스는 이런 식으로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유리한 점은 뭐냐면 신자 안에 이미 하나님께서 이런 죄의 강력한 것들이 있었는데 이것들을 부숴버리고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서 프로네시스를 이미 형성하셨습니다. 문제는 프로네시스가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강해지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속적인 깨달음과 열렬한 기도, 성령의 역사하심 이런 것들이 계속 우리 안에서 따라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과 담 쌓고 살면 당연히 이것은 약해지고 악한 프로네시스는 우리 안에서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작은 유혹에도 이끌리면서 계속해서 악에 빠지게 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너무 당연한 얘기입니다.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은 컨닝 할 유혹을 느끼질 않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선비인데 선비가 모르면 백지 놓고 나가는거지, 그걸 무슨 책상에다 깨알같이 써놓고, 베껴 쓰고… 구질구질 하지 않습니까? 공부 안하고 보면서 쓰고 남의 것을 훔치고 이러는 데에 있어서 프로네시스가 되어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안하고는 못 베기는 것입니다. 잡지 한 권이 내 사무실로 배달이 왔습니다. 논문집이었습니다. 툭 폈는데 난 이 잡지사에 이 논문을 기고한 적이 없는데 내 논문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직원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두 페이지 읽게 했습니다. 이거 누구 글인 것 같냐고 물어보니까 “목사님 글인데요?..”… 다른 교수 이름으로 ??있었습니다. 내 책의 이름은 논문 전체에 한 두 개 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내 책을 펴놓고 그냥 자기가 다시 풀어서 쓴 것입니다. 부정직의 프로네시스가 잘 형성되신 분이신 것입니다. 정직의 프로네시스가 형성된 분들은 그렇게 안합니다. 안 쓰면 안 쓰고 말지 그렇게 안합니다.
이 프로네시스는 어떻게 형성이 되는 거냐면 매일 매일의 삶이 프로네시스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생각하는 것이 너의 실천을 낳고 매일 반복되는 실천이 너의 인격을 형성하고 내 인격이 결국 실천을 가져온다.’ 그것은 순환관계입니다. 오늘의 삶은 내일의 여러분들에게 오늘날입니다. 오늘 산 것이 내일의 여러분들에게 성품, 본성이 됩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별로 감동이 안 되십니까? 오늘의 생활은 내일의 본성입니다. 불신자들은 이걸 운명이라고도 얘기합니다. 자 그럼 다시 텍스트로 돌아가겠습니다. 39페이지 지나갔습니다. 40페이지 넘어가서 좀 더 보겠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프로네마? 라고 하는데 두 번째 단락을 봅시다.
인간은 누구든지 이런 프로네시스 혹은 프로네마를 가지고 있어서 마음 안에서 발생하는 상상이나 접촉으로 말미암은 인식과 정동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것이 마음의 틀이다.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거나 상상을 통해 건져 올린 인상들이 도덕적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이다. 이걸 더 적극적으로 다룬 작품이 ‘신령한 생각되어진’ 이라는 뜻이에요. 인간 마음의 틀은 죄의 성향의 지배를 받으면 죄스럽게 되고 은혜의 영향을 받으면 은혜로운 틀이 된다. 전자는 자기 사랑과 정욕을 통한 육욕의 만족을 지향하고 후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한 열심을 통한 기쁨을 지향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행복해지기보다 거룩해지기를 원한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마음의 틀을 염두에 둔 언급이다. 이런 마음의 틀이 인간의 지성에 관여하게 되면 악한 생각들에 대한 상념이 가득차고 감정에 관여하면 욕망을 일으키며 의지에 관여하면 욕망에 굴복하기 좋은 이점을 얻게 된다. 이러한 마음의 틀은 결국 그 틀에 적합한 외적인 삶의 행동을 산출하게 된다.
왜 바리새인들이 외식주의자였습니까? 마음이 외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외식주의자인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왜 수업시간에 자꾸 좁니까? 마음이 자니까 조는 것입니다. 수업시간에 왜 열심히 듣습니까? 마음이 깨어있으니까 그런 것 입니다. 마음의 틀이 심리 철학. 인간의 마음 안에서 두,세 개는 만난다. 첫째로 자기 밖의 세계와의 접촉이다. 세계는 둘로 나뉘는데 감각적 물질세계와 지성적 사이의 세계이다. 이 식주체??로서 인간은 자기 밖의 세계와 접촉하는 두 종류의 창문을 갖는다. 신자에게 있어서 성경의 진리는 영적 세계에서 만나는 중요한 통로이며 믿음의 행사를 통해 이 인식은 활발해진다. 무슨 뜻 입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적 세계에 대해서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데 그것을 믿을 때에 그 세계에 대한 지식을 우리들이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이냐 하면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 그 신뢰에서 오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영적인 세계의 지식이 들어오게 됩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이때에 마음은 이러한 인상들을 파악하고 느끼고 인식할 때 일정한 방향으로 작용한다. 이 틀에 대한 설명은 도덕과 관련한다. 마음 안에 죄에 대한 성향이 우세하면 악을 지향하는 쪽으로 프로네마가 형성된다. 이것은 생각에만 영향을 주는 프로네마가 아니라 감정, 의지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총체적인 영향력의 틀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악한 사람은 악한 것에 잘 감동을 받고 악한 것에 감동을 잘 받는 사람은 감동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악을 행해야 적성이 풀립니다. 그때에 그 영혼이 만족을 얻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에 감동을 받고 선한 것이 자기의 실천을 통해 성취 되었을 때 성취 된 그 선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좋아하지만 악한 사람은 반대로 자기의 선을 통해 성취된 그 악을 보면서 기뻐합니다. 이번에 있었던 다문화 가정 폭력 사건이라든지 그런 것들은 너무 끔찍합니다. 우리 중고등학교 다닐 때도 그랬습니다. 폭력하는 애들이 데려다가 동급생들을 옥상에 불려다가 다 빨개벗겨놓고 폭력을 행하고 그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음에 있는 악을 악의 프로네시스가 자신의 실천을 통해서 밖으로 드러날 때 아주 큰 희열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딱 굳어진 사람을 성경에선 악인이라 합니다. 수업하는 첫 시간에 내가 여러분이라면 격투기를 배우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순간을 위해서 한 3명 정도 제압 할 수 있는 죽이기까지 하면 안 되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착하게 살다가 한 번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면 사람을 쓰러트릴 수 있는 힘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그 것이 어떨 때에는 나와 다른 사람들의 안전과 자존감을 지키는 하나의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행사 안하다 죽기를 바라지만 늘 그것을 준비해야합니다.
프로네마는 생각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말 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봉사를 통해서 이루어졌을 때 그 기쁨을 어떻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너무 기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악인은 그 반대의 일에 기뻐하고 희열을 느끼는 것입니다. 존 오웬이 마음의 틀로 표현하는 프로네마는 ‘frame of heart’라고 표현해요. 틀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무언가를 그 속에 딱 기워 맞추기 위한 것이 틀 입니다. 뻥튀기, 밀가루 반죽을 부으면 똑같은 붕어빵이 나오는 것, 국화빵. 주물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이캐스팅에 찍어냅니다. 하고자하는 것들의 형태를 만들어서 주물을 만들고 거기다가 플라스틱 가루를 집어넣고 프레스로 찍어내는 것이 톡톡 튀어나옵니다. 혹은 물로 녹여서 집어넣으면 나옵니다. 대개 가루로 합니다. 가루를 집어넣고 프레스로 찍으면 나옵니다. 그런 것이 틀 입니다. 똑같이 찍어내는 것. 그럼 마음의 틀이라고 할 때 악한 틀일 경우엔 악을 계속 찍어내는 것입니다. 선한 틀일 경우엔 선을 계속 찍어내는 것입니다. 이 틀로 표현한 프로네마는 여러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오직 육신과 영이다. 여기서 육신은 죄된 육체를 가리키는데 신자 안에 있는 옛 본성을 의미한다. 영은 곧 성령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신자 안에 있는 새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한다. 프로네마가 작용하는 방향으로써 육신과 영은 어거스틴의 심리철학을 생각나게 한다. 그는 하나님의 인간의 사랑을 궁극적으로 둘러보았다.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둘 중 하나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걸 사랑하는 게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족을 누리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은 자기의 만족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에서 자기 사랑으로 수렴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인간은 진리의 밝은 빛에서 멀어질 때 필연적으로 자기의 육체 밖에는 사랑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진리 빛에서 멀어지면 자기의 육체밖에 사랑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필연입니다. 존오웬에게서는 죄의 속임에 떨어질 때 그는 필연적으로 죄의 욕망에 굴복할 수 없다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둘째로는 자기 안의 세계와의 접촉입니다.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마음의 프로네마를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다. 인간에게 독특한 창조적 정신 작용이 있는데 그게 상상입니다. 존오웬이 성화를 하면서 상상의 작용이 자주 언급된다. 이 작용이 일으키는 결과들을 통해 프로네마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징후를 거론하면서 다루었던 내용이 상상의 방향이다. 특정한 죄가 신자의 사고 기능에 깊이 관여할 때 그것은 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징후이다. 실제로 실천하지 않아도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어떤 방향으로 죄가 상상 될 때. 그 상상은 그 사람의 마음에 기쁨을 줍니다. 상상은 더 큰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그 상상은 그에게 사실보다 훨씬 더 과장된 어떤 좋은 것들을 상상하게 만들어서 결국은 그것을 실행하게 합니다.
죄의 활동, 반감과 대적 설명을 했습니다. 반감은 신자의 마음의 생각과 감정의 움직임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싫어하거나 혹은 소극적으로 싫증을 내는 것을 가리킨다. 내재하는 죄가 융성할수록 반감은 더 높은 강도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혐오하고 싫증나게 하는 죄의 활동은 인간에게 주신 생각과 정서가 작용하는 목적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영혼의 기능을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과 관련 하에 설명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성을 주신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발견하게 하기 위함이며 정서의 기능을 주신 것은 사랑 받고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고 의지를 주신 것은 당연히 그에게 순종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혼의 기능들을 반대로 사용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동물은 동물 이하일 수 없지만 인간은 충분히 동물만도 못한 인간이 될 수 있고, 그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혼의 위대성 ??54:42로 한 것입니다. 그런 위대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아주 강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향한 대적이다. 이것은 반감이라는 활동이 의지와 함께 나타나는 것이다. 신자 안에 있는 죄가 의지를 사용해서 적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의지는 행동할 때만 작용하는 게 아니라 마음 안에서도 작용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은 우리의 의지 동의를 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의지가 ‘난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련다.’ 라고 마음을 먹으면 끊어지는 것입니다. 의지가 자꾸 작동하는데도 안 끊어지는 것은 의지가 의지답지 못하고 생각에 그치기 때문이고 그걸 생각하고자 하는 마음의 프로네시스가 워낙 강할 때에는 이것이 안 끊어지고 계속 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게 사랑하다가 실연을 당한 것입니다. 머릿속에서 지우고 그 사람 생각하지도 말아야지 했는데 밤에 잠자리에 누워서 가만히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고 보고 싶습니다. 계속해서 없애려하는데 안됩니다. (세월이 흐르면 다 잊혀지겠죠)
자 그다음에 반감과 대적의 대상. 무엇을 반감하고 대적하는가? 첫째 하나님의 존재와 지휘다. 하나님께 대드는 것입니다. 그게 죄의 성격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이 틀렸다 그러는데 “아닙니다. 하나님이 뭘 모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맞습니다.” 이게 죄의 성격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심. 내재하는 죄는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심에 반감을 품고 대든다. 그 분의 행하심과 필연적인 관계가 성품에서 사랑의 베품이 나타나고 공의에서 심판과 상급이 나타난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 성품에 따라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일들에 대해서 반대하는 마음을 갖고 하나님을 적으로 간주하는 성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죄의 본질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질서다. 내재하는 죄는 하나님의 의해 지정된 질서가 있습니다. (칠판?)여기 이렇게 인간이 있으면 뭘 모릅니다. 여기도 인간이 있고 당연히 하나님도 계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릅니다. 이 일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을 깨닫습니다. 빛이 들어오면서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위에 계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와 인류를 창조하셨고 자기는 이 중에 하나고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질서가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질서가 있고 여기에 있는 자연 모든 만물들을 어떻게 돌보고 가꾸어야될지에 대한 그런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질서를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 마음 안에 있을 때 이 질서대로 사는 게 너무 행복하고 좋습니다. 21살 젊었을 때 내가 불신자로서 살았는데 저는 그때 춤추는 클럽에 (그땐 고급 클럽 같은 것도 없었지만) 댄스홀이나 댄스파티 이런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학교에서 춤 출래? 맞을래? 하면 엎드려서 차라리 빠따를 맞고 말지 싶었습니다. 오히려 노래를 하라 그러면 노래를 너무 좋아했으니까 가곡이나 노래를 내가 부를 수 있습니다 .근데 그게 너무 싫었습니다. 내 마음 안에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살았는데도 내 마음에 그런 프로네시스가 없는 것입니다. 술 마시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그런 일이 없진 않았지만은 아주 희귀했습니다. 그러는 자체가 싫었습니다. 프로네시스가 형성이 되어있는 것이죠? 고등학생 때도 성격이 있는 대화를 좋아했고 지적인 것들을 공급받을 수 있는 그런 모임이 나는 훨씬 좋았습니다.
이 때 그러한 프로네시스가 우리 안에서 어떤 방향으로 형성되냐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살면 프로네시스는 더럽게 형성이 됩니다. 그렇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도 없어집니다. “자 너희 스스로 프로네시스를 개발해서 행복하게 살아라.” 괜찮겠습니까?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새 악에 자꾸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 소비, 쾌락 이런 것에 너무 빠지면 설비하는 삶을 살기가 힘듭니다. 일평생 그걸 짊어지고 살아야합니다. 아름다운 것들 그런 것들에 눈떠야합니다. 한 청년이 장문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섹스홀릭이었습니다. 성 중독에 걸린 청년입니다. 지방에 있는 청년인데 매우 긴 편지를 보내서 여러 차례 나를 괴롭혔습니다. 내가 답장을 몇 번 해줬는데 결론은, 내가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것보다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세계를 자꾸 보면서 그 아름다운 것들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신성을 키우면서 살아갈 때에 인간이라 아주 없어지진 않겠지만 그런 것들에 대한 관심이 덜해지고 극복할 수 있는 정신의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다 필요 없고 오직 그거 하나뿐이라는 식으로 정신을 집중하게 되면 거기에 미친 듯이 함몰해버려서 자신의 인생이 삼켜지게 됩니다. 오락이나 중독 다 마찬가지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참 많습니다. 건전하고 우리의 성형을 선하게 증진시킬 수 있는 품격 높은 전시회도 가고, 여행도 하고, 책도 읽고 어느 동네에 맛있는 것을 먹으며 어느 동네의 어떤 역사가 깃들어져있는지 한 번 여행을 하면서 곱씹어보고 지식을 축적하고 등… 문화생활을 즐겨보십시오. 그 속에서 인간은 남들이 모르는 아름다운 세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 사람이 그런 것들을 자기 속에 잘 소화해서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교만하지 않은 방식으로 녹여내고 대화를 이끌어갈 때 사람들은 그 사람하고 대화하면 왠지 길거리 위에서 쓰레기통 옆에 주저앉아서 떠들다가 갑자기 단정하고 아름다운 건물에 응접실 의자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품격을 느끼게 됩니다. 그게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개는 그런 거 못합니다. 먹으러 다니는 것과 자고 싶을 때 자는 것, 짝짓기 하는 것은 개도합니다. 품격 있는 문화는 오로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건축도 아름다운 세계가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 가서 구시가지를 보다가 라데팡스라는 신시가지를 보면서 며칠 동안 거기만 있고 싶었습니다. 건물 하나하나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건축을 좀 알고 보면 그 건물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어떤 철학을 담고 있는지 보게 됩니다.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몇 시간을 혼자 서서 사진을 찍으며 보고 있으면 마음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을 어떻게 한 병의 소주에 취하는 더러움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프랑스 가서 그 것을 보고나서 프랑스에서 온 사람하고 프랑스 건축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그 사람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 가봤냐”고 하니까 잘 모른답니다. “이런 공원이다. 어떤 철학이 녹아있다.” 말하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길이 있는데 길을 따라서 가라..? 그 건축이 우리에게 묻는 게 뭐냐면 왜 꼭 길이 너를 어디로 데려가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그것도 편견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해체주의 철학들이 건축 속에 녹아있었습니다. 건축만 그런 것도 아니고 정원도, 도시미학, 도시, 건축학뿐만 아니라 아주 작은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걸 보면서 15초의 광고 속에도 ???1:10:43 담겨져있나 보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깊은 세계를 우리들이 보게 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생각해봅시다. 아름다운 것이 많습니다.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하나의 아름다움으로 수렴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유일한 존재인 하나님께부터 나온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존재하는 것과 분리가 안됩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름다울 수 없고 존재하니까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럼 당연히 그 존재가 하나님께 빚졌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도 하나님께로부터 빚진 것입니다. (칠판)여기에 이렇게 창조된 인간부터 시작을 해서 산 혹은 나무 한 가지, 새 한 마리. 곤충 한 마리에 이르기 까지 이것들은 다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존재하게 하는 원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원리가 두 가지 있습니다. ‘선과 미’. 이 두 가지가 존재의 원리입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결국은 하나님이 이것을 선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이것을 아름답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선과 미는 결국 마지막에 다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 자신에게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기에 있는 인간이 행복한 삶이 뭐냐면 이 자연의 세계에 있는 것들을 보면서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 다음에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 영광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기서 시작되지만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상승하고 상승한데서 다시 하강하면서 모든 만물을 보는 것입니다. 그때의 그 모든 선한 것들은 하나님의 선과 연결이 되고 모든 예쁜 것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연결이 됩니다.
(찬양)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그 사랑 알아요
6월 달에 영국으로 집회를 갔습니다. 1008명의 영국 젊은이들이 모였습니다. 나하고 팀켈러 목사님하고 같이 집회를 했습니다. 토크쇼도 했는데 40대 50대도 더러 있었지만 주류는 20대 30대 젊은이들 이었습니다. 강의를 하다가 이 찬송을 했습니다. 어거스틴이 작사한 것입니다. 영국사람들은 설교나 강의를 하다가 노래 부르는 것은 상상도 안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내가 저 찬송을 영어로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막 난리가 났습니다.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치고 발을 구르고…. 사실이지 않습니까? 온 천하 만물은 그림책 같아서 하나님의 선과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그 선과 아름다움을 보며 모든 만물을 보면서 하나님께로 상승하고 하나님을 만나면서 모든 만물에게로 하강을 하면서 정말 아름답구나를 보는 것입니다. 예전엔 우리가 주님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못살았습니다. 하지만 알았으니까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합니까? 알지 않는 것은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알지 않는데 사랑하는 건 미친 짓 즉, 광기입니다. 아는 것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부지런히 공부해야 합니다. 광범위하게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선한 것인가를 보며 죄 때문에 망가진 세상을 파악하고 그것을 돌이켜야겠다고 심오한 결심을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 다음에 죄의 속임과 ?? 실제와 표상인데 (15분만 쉽시다.)
좌표가 있습니다. 좌표를 보면서 여기에 이렇게 사람이 서있습니다. 그 좌표가 없을 때에는 사람이 이렇게 서있습니다. 어딘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조난을 당했는데 “여기요 산이 보여요.” “우리나라의 80%가 산인데 어디 있나요?” “잘 모르겠어요. 나무가 많고요. 바위도 있어요.” 이러면 이사람 찾아갈 수 있습니까? 못 찾아갑니다. 그런데 여기에 딱 보니까 이렇게 방향표가 있었습니다. “아 여기요 199번 도로 A'1point에요.” 하면 사람들이 좌표를 보고 이 사람이 여기에 있는 것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이런 존재입니다. 이 사람이 전혀 좌표가 없이 살아갈 수가 있는가? 그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좌표가 없으면 좋은 것도 없고 싫은 것도 없어야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좌표가 없어도 좋은 것도 있고 싫은 것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이 사람 마음대로 좌표를 그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그러져있습니다. 문제가 뭐냐면 이 좌표가 매일 매일 움직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여기에 어떤 것들이 있다고 할 때 이게 이 지점에 있고 저 지점에 있다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마음 자체가 움직이니까 설정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뭐냐면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 기분에 따라서 이것을 계속 끼워나가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팩트입니까? 팩트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이러한 질서들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게 성경입니다. 인간이 a라는 사물을 봅니다. 근데 있는 자리는 여기입니다. 이게 여기 있는 것처럼 인간이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착각을 하기 때문에 성경의 수많은 가르침이 주어지면서 a는 a'가 아니다 라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a에 있는 것을 a'에 있다고 생각하거나 a''에 있는 거라고 착각을 하는 것인가 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레알리타스? 실제인데 이거는 실제가 아니라 펜타스나? 여기서 판타지라는 영어가 나옵니다. 환상이라고도 얘기하지만은 철학과 신학에서 얘기할 때는 표상이라고 합니다. 어떤 모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표가 나타난 것은 있는 그것이 아닐 적이 많은 것입니다. 그럼 결국 뭐냐면 이거는 실제지만 이거는 판타지나 표상입니다. 표상과 실제사이의 격차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 이건데 이것을 못보고 이거를 보는 것입니까?(칠판가리키신 듯) 도대체 왜 그럴까요? 보는 거랑 우리가 얘기할 때 본다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육체의 두 눈으로만 보는 걸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 안에 있는 사고 기능이 고장난 것입니다. 혹은 이 사고기능의 착시현상인 것입니다. 제주도 가서 골프를 치는 사람들은 초심자들의 경우에는 육지에 온 사람이 항상 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공항에서 내려서 차를 타보면 바다표면이 하늘에 있습니다. 높이 올라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면 물이 쏟아져야 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있는데 여기서 차를 타고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면서 바다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다가 바다가 수평선 이렇게 있습니다. 새들도 날아가고 구름도 뜨고 그런데 이것이 착각입니다. 실제는 훨씬 낮은 위치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갈 때 여기서는 이렇게 보이는데 여기서부터 진행을 하면 여기서는 여기 있는 것으로 보이고 여기를 진행하면 여기서부터 보이고 바다 앞에 가면 다 보이는 것입니다. 전부 다 착시인 것입니다. 그럼 똑같이 이렇게 다 들어오면 사람이 이거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거는 착시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이거는 사고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사고는 왜 이걸 이거라고 보겠습니까? 저런 거는 자연적이지만 이런 착시는 왜 일어나겠습니까? 안에 있는 사람의 욕망에서 일어납니다. 죄와 관련돼서 나타나는 착시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욕망이 아니라 거룩함. 즉,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레알리타스를 정확하게 보게 해줍니다. 착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이런 뜻입니다. 인간이 분량을 넘어서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갖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희망을 가지면 모든 사물들이 제자리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좌절과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다, 지저귀며 날아가는 새도 나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해서 이 안에 있는 욕망과 죄가 이 사람의 사고 기능에 영향을 미쳐서 레알리타스가 이건데 a2나 a1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능전체 가리켜서 죄의 속임이 작동하는 원리가 바로 이런 것 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죄의 삯은 사망인데 결국은 죄를 짓게 되면 걸리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보면 옛날 정권에서 잘못한 거 이렇게 놀랍게 자료들이 다 쏟아져 나올지 몰랐습니다. 절대 꽁꽁 묻힐 것 같았는데 농단에 주역들, 심지어는 사법 농단에 참여하지 않고 대법원장에게 반대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불이익을 주기로 결정한 문서가 발견되었습니다. 언론에 공개 되고 명단까지 나왔습니다. 무서운 세상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다음에 중요한 일을 하게 될 경우에는 2018년도 7층 강의실에서 목회와 기도 시간에 태도가 어땠고 답안을 베꼈다는 얘기까지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증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잘 살아야 합니다.
죄의 속임이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죄는 끊임없이 인간에게 사실이 아닌 또 다른 것을 보여줘서 품지 말아야 할 희망을 갖게 만들고 품지 말아야 할 즐거움에 대한 소원을 갖게 만들어서 인간이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속입니다. 죄에 의해서 그의 은혜의 세계가 파괴 될 때 까지 끊임없이 속이는 것입니다. 이번에 택시 운전수가 가다가 앞에 가방에 떨어져 있어서 신호대기 하다가 얼른 주워서 갖고 와서 열어보니까 돈이 5800몇십만이 들어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찾아서 차를 사러 가려다가 택시에다가 놓고 내렸는데 택시에서 내리면서 떨어뜨린 모양입니다. 그 사람은 모르고 그냥 간 것입니다. 그것을 택시 운전수가 주웠습니다. 팩트를 얘기하자면 자기 돈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 길거리에 떨어진 돈 만원 주워서 온라인포켓하면 죄입니까? 아닙니까? 점유이탈물횡령죄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물건은 주인이 있습니다. 주인이 가지고 있는 걸을 점유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이탈했습니다. 왜 이탈했습니까? 법적으로 얘기하자면 주인이 잃어버린 것과 여러분들이랑 아무 상관없습니다. 주인이 거기다가 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찾을 수가 없어 점유가 이탈된 상태입니다. 점유이탈은 소유권포기가 아닙니다. 소유권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노트북 할부로 샀으면 소유권은 노트북 판매한 영업소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빌려준 것입니다. 다 갚을 때 까지 여러분 것이 아닙니다. 소유권은 사물 위에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여러분이 가져간 것입니다. 그건 점유이탈물횡령입니다. 그 집에 가서 훔쳐온 것 보다는 죄가 덜 하지만 남의 소유권을 침해한 것입니다. 금액이 클 경우에는 죄가 작지 않습니다. 이 사람(택시운전수)이 가져갔습니다. 자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빨리 경찰서에 갖다줘야하는데… 경찰서에 갖다 주면 주인이 찾으면 10%쯤 그 사람에게 법적으로 주게 되어있습니다. 그럼 한 590만원 벌었을 텐데 3일 동안 갖다놓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CCTV에 추적돼서 조짜됐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입건되었습니다. 아마 기소될지도 모릅니다. 영원히 전과자의 딱지가 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의 것을 가져가면 안 됩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왜 자기 것도 아닌데 가져가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의 것이 아니면 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주인이 없으면 판타스마가 작용한 것입니다. ‘남의 돈’ 이 것은 레알리타쓰입니다. 근데 그걸 놓고 온갖 상상을 하면서 a' a''를 생각한 것입니다. ‘여행을 갈까? 택시를 바꿀까?’. 자기 것이 아니니까 자신에겐 그런 상상을 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범죄가 성립이 된 것입니다. 되게 대소적인 판타지마입니다. 표상입니다. 저 표상이 저 돈이 남의 것이라는 실체를 숨기고 그걸 가져가면 이렇게 부끄러운 결과가 있고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등등을 숨기는 것입니다. P2P투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난 전혀 주식을 안 하는데 이게 뭐냐면 내가 이런 빌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한테 투자해주시면 이 빌딩을 임대를 놓고 이렇게 해서 돈을 불어서 돌려드리겠습니다. 2개월에 18%의 이자를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100센트의 이자를 1년에 주는 것이. 사람들이 이런 건물을 갖고 있습니다. 이걸 담보로 고객님들에게 돈을 빌리겠습니다. 실제로 금고가 있고 돈을 막 버는 것입니다 피투피로. 알고 보니까 쇠에다가 금칠을 했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비트코인을 사고 방탕하게 다 썼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속여서 돈을 뺏어서 쓸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뭡니까? 판타지아에 엄청나게 사로잡혀서 이게 크면 클수록 황당한 일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저런 식으로 바보 같은 사건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판타스마라는 것은 결국은 팩트 레알리타쓰가 아닌 속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에는 항상 저런 판타스마의 기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안합니다. 공부하기 싫어서 다른 생각 하는 것입니다. 장가가는 생각도하고 놀러가는 생각도하고 그런 생각을 합니다. 선생님이 화가 나서 작대기로 한 대 내려쳤습니다. 쫙하고 주삐를? 한 대 맞으면서 정신이 번쩍 나게 됩니다. 죄는 항상 우리를 이렇게 몽롱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판타스마를 양성하게합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는 줏빅?주삣?처럼 등짝을 내리 때려서 정신을 반짝 들여서 ‘지금 공부시간이다. 나는 학생이다. 이건 모두 쓸데없는 생각이야’를 깨닫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케스에 얼음을 넣어서 확 쏟아 붓는 것처럼 정신이 번쩍 나게끔 해줍니다. 말씀의 빛이 반응할 이유는 뭐냐면 이쪽에서 들어오는 말씀의 빛이 차단되면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이 확 드러나면 이게 가짜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럼 누가 더 이상 그거를 가지고 사람들이 뭐를 하겠습니까.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밑에??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두 번째 단락입니다. 죄는 적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사랑을 받으며 거기 내재하고 영향력을 키워간다. 이것은 마음과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는 마음의 악한 성향이 원인이기도하고 그러니까 죄를 계속 품음으로써 마음이 악해지기도 하고 또 마음이 악하기 때문에 죄를 계속 만들어내서 두 개가 순환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운동에 맛을 들이게 되면 운동을 자꾸 하고 싶어지고 운동을 자꾸 하니까 몸이 튼튼해지고 튼튼하니까 더 운동을 하고 싶어지고 순환관계가 일어납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에 한 번 맛을 들이게 되면 왜 그 긴 세월을 공부안하고 살았나 생각이 들면서 공부 안하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측은하게 느껴집니다. 왜 저렇게 살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공부하면 자신이 더욱더 공부할 수 있는 마음이 형성되면서 순환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둘은 순환관계를 이루는데 마치 순종하는 행동과 은혜의 경향성과 같다. 죄의 활동은 객관적인 죄 자체의 ?? 에 ??(1:37:13) 주관적인 의미에서 죄는 항상 인간의 마음과 떨어져 작용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악한 마음의 성향을 가지고 끊임없이 죄의 성향으로 하나님께 반감을 품고 대적했다치자. 그가 죽었을 때 그렇게 역사하던 죄는 어디로 갔는가. 어디로 갔겠습니까? 그 사람이 죽으면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죄도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 주관적으로 죄의 활동은 단지 ??의 활동이 아니라 신자의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때문에 인간의 마음이 인간을 마음으로부터 스스로 속임을 당하는 것이다. 죄가 우리의 사고 기능에 관여하면서 제일 영향을 미치는 곳이 인간의 사고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사고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는 상태에서 인간의 사고의 기능에 마비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유추할 수 없게끔 해주는 것입니다.
d번으로 넘어 갑니다. ‘죄의 강압론.’ 여기서는 무얼 다루냐면 죄가 사고의 기능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이게 착각을 일으킵니다. 말씀의 빛이 없으니까 이렇게 착시를 일으키는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진짜로 선한 삶이 성립되려면 인간의 사고가 바뀌는 것뿐만 아니라 이 사람이 선한 것에 대해서 정을 느끼고 그 다음에 의지를 가지고 실천할 때에 이렇게 해서 선한 삶이 이루어지듯이 마찬가지로 죄는 인간의 사고 기능에만 영향을 주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고 기능을 통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이 것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어주지만 동시에 이 사람의 정서와 의지에 작용해서 이 욕망을 통해서 이 욕망 때문에 본격적인 착시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고 싶으면 꼭 그걸 해도 될 것 같이 자꾸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수많은 생각들이 마지막에 행동을 낳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신앙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면 언젠가는 신앙적인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면 언젠가는 그렇게 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고는 욕망으로 이 욕망은 결국은 의지의 영향을 미치면서 결국은 마지막에 이런 일들을 산출하고 판타스마를 만들어낼 뿐 만 아니라 이 판타스마를 따라서 살아가게끔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 전체를 저런 프로네시스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d번을 보겠습니다.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에 내재하는 죄의 강압은 곧 거칠게 신자를 밀어붙이는 내적인 힘이다. 이건 욕망을 통해 이루어진다. 내재하는 죄를 단지 내재하게 함으로써만 만족하지 않고 실제 삶에 있어서 산출될 때 큰 희열을 맛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희열을 향한 욕망은 증대돼, 이 욕망을 사용하여 죄는 지성에서 용납되고 정서의 후원아래 의지의 동의를 조르며 산출되려고 신자의 내면을 몰아붙인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경험했던 내재하는 죄의 법이다.
오웬은 법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객관적 규범으로서의 법입니다. 학교 학칙이나 규칙 법 법령 같은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주관적인 성향이에요 아까 얘기했던 프로네시스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관적 성향으로써의 힘은 원인과 결과에 있어서 필연성을 구성하는데 한 가지 방향으로 일관되게 몰아붙이는 내적인 강제력을 지니고 있다. 알코올 중독에 걸려서 술 먹고 싶은 사람은 재밌는 영화하고 좋은 책과 멀리서 온 친구고 다 필요 없습니다. 왜냐면 욕망은 어느 하나에 집중하게끔 만듭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우리를 집중하게 만들고 죄도 우리를 하나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 진리의 말씀 이런 것을 우리를 집중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은혜를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집중하는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그 마음에 역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죄는 악을 집중하게 만들고 자기가 하고 싶은 한 가지 일에 그 이외에 아무 가치도 없는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신앙이 매우 깊어진 것과 죄 속에 깊이 들어간 것이 매우매우 유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면 세상에서의 성공, 번영 아무 관심 없습니다. 오직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까 하나에 집중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어떻게 되든지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똑같이 죄는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욕망 하나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그 이후에 일어나게 될 어떤 일 그 결과 그것이 미치게 될 끔찍한 영향력,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이 잃어버리게 될 것, 심지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심판 받게 될 것 이런 것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자기가 하고 싶은 것 그 하나에 그 것이 전부인 것처럼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속도를 ??(1:44:02) 하는 것입니다. 그 과속 운전이 왜 위험하냐면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천히 걸어가면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마 180도까지는 아니어도 사람이 이렇게 서서 눈으로 이렇게 보게 되면 180도까지 보이진 않지만 이 정도는 보이지 않을까요? 한 130도 정도?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가면 이것보다 약간 좁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100키로를 달립니다. 그럼 이렇게 좁아져요. S1 포뮬러 카를 탔습니다. 340을 밟아버렸습니다. 그리고 4도에서 5도까지밖에 안보입니다. 그럼 저 멀리 사물이 요만한 점처럼 보이고 나머지는 모두 확 지나가는 선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휙 지나가면 카메라 사진에서 줄로 나오는 것처럼 보이고 340키로정도면은 거의 ktx 속도인데 ktx 사고 많이 났던 이유가 시골 노인들이 그거를 돌아가기 싫으니까 철도를 건넜는데 저~~기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걸었습니다. 옛날 새마을 열차생각만 한 것입니다. 그땐 115키로였습니다. 받아버린 것입니다. 아주 콩알만 한 점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죄에 사로 잡혀 있을 때도 똑같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 하나 이외에 나머지 아무 것도 안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사물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며 살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모른다고 그냥 살아가는데 죄는 저렇게 아주 정밀한 구조 속에서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0146:19) 4도 5도밖에 안 보인다고 생각해봅시다. 340키로 정도로 한 번 달려보고 싶겠는데 기네스북에 오른 자동차의 속도가 얼마인줄 아십니끼? 1100키로인가를 사막에서 성공했습니다. 사막에서. 자동차에 단 엔진이 z비행기 엔진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럴 경우에는 1도도 안보이겠죠?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우리들이 살아갈 것인가? 이런 생각을 이와 관련해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자 밑으로 내려가시면요 ‘이 법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옵니다. 그거 다 설명한 것이고 로마서 8장2절 그 아래로 내려가면 이러한 욕망은 앞에서 설명한 프로뉴마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마음 안에 악한 성향이 충분히 형성됐을 때 분출하는 욕망은 가공할 힘을 갖고 지성 안에서 양심을 거스리며 정서와 의지 안에서 강압으로 작용한다. 이 때 신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명백한 양심에도 불구하고 죄를 ??1:47:52도록 조르며 정서와 지성의 동의를 기다리는 의지로부터 총체적 강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결국 죄를 산출하고 나서야 일시적으로 강제력이 해소되는데 이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인간의 더 큰 악한 성향이 강화한 것이다. 그러나 존 오웬은 이런 갈등 속에 있는 신자의 존재를 결코 비관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렇다고 부주의하고 게으를 정도로 낙관적으로 다루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신자 안에 역사하는 죄의 영향은 끝없지만 언약관계를 토대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두 가지 작용의 무한함 때문이다. 그것은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와 은혜의 힘에 대한 무한한 공급이다 이것을 통해서 신자는 오히려 죄 속에서도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죄 죽임이란 무엇인가? 신자에게 있어서 죄 죽임이란 영혼 안에 있는 죄의 경향의 약화이며 마음 안에 있는 죄의 성향의 소멸이다. 죄 죽임은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과 ??1:49:13로서의 죄를 약화시키고 소멸함으로써 그의 고유한 작용을 수행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신자의 영혼 안에 있는 죄의 경향성의 약화는 마음 안에 작용하는 성향을 죽임으로 가늠하다. 죄를 죽인다는 것은 죽여 존재 하지 않게 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향점으로 삼을 순 있지만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죄가 존재하지 않도록 그렇게 파멸할 수는 없다 죄를 죽인다는 것은 성향을 감추거나 방향을 바꾸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자연적인 본능을 개선하므로 삶을 고칠 수 있는데 이것은 죄 죽임을 통해 도달하려는 거룩한 변화가 아니다. 죄를 죽이지 않은 신자도 종종 죄의 유혹을 뿌리치거나 죄악 된 행동을 그칠 때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죄 죽임이 아니다 왜냐하면 간헐적이고 우연적인 실천이기 때문이다. 죄 죽임은 곧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고자하는 인간 마음의 성향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서 정욕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그 힘을 죽이는 것이다. 죄 죽음의 실천은 거룩한 삶을 위한 신자의 필수적 의무이다. 이러한 교리를 입증하는 명백한 성경 구절로서 다음을 제시함으로써 죄죽 임의 교리를 전개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라고 했습니다. 다음 이 시간에는 오늘 다 못나갔기 때문에 이거 마지막 하고 마지막 강의안을 여러분들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함께해주시고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젊은 시절에 더욱 탁월한 열심으로 하나님 의지하며 공부하도록 신앙생활 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