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대 강의
녹취자 : 김민선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강의안 45쪽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죄 죽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시간에 설명을 했습니다. 새 강의안이 아니라 옛날 강의안 45쪽입니다. 죄는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으로 인간의 마음 안에서 성향으로 나타나는데 이게 하나님께 대해 가지고 있는 적의입니다. 하나님을 적으로 간주하는 의지입니다. 구체적으로 반감과 대적으로 나타나고 맹렬함과 미친 기운과 등등…설명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는 것은 죄 자체는 생물이 아니기 때문에 개. 사람, 돼지 같은 생물이 죽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죽임을 당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죽인다’라고 하는 말은 죄의 생명력을 심히 약화시켜서 죄의 영향을 우리에게 끼치지 못하도록 약화시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죽임이라고 합니다. mortification이라는 게 mortify에서 온 것입니다. mortify는 mort. 죽음이죠? 그래서 ‘mortal’ 이라고 하면 ‘필멸의’, ‘immortal’은 ‘불멸의’ 이렇게 됩니다. 다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mors’가 라틴어로 죽음입니다. mors, mortis, mortel, 모르티? 이런 식으로 격변화가 되면서 mortify라는 영어단어가 나온 것입니다. ‘put to death’ 죽음을 두다 이렇게 되는 거죠?
이렇게 죄를 죽이는 주체는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죄를 죽이십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혼자 그 죄를 죽이지 않으시고 믿음과 순종으로 참여하는 신자의 마음을 통해서 죄를 죽이십니다. 그래서 아까 마지막으로 발표한 형제가 강론을 들으면서 이런 자기 자신이 너무 싫다는 고백을 했는데 항상 싫어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좋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니까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태까지 살았던 삶이 아니라 다른 삶을 살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살고 싶은 다른 삶을 못살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가, factor가 무엇인가? ??(19:42)만 들어가도 마지막에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우리를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죄를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선한 생각을 가져도 선한 생각이 실제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삶으로 결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를 죽일 때 결국은 제일 먼저 죄가 어떤 건지 알아야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말씀의 빛 없이는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친구들끼리 서로 오해하거나 혹은 서로 잘 모르다가도 한나절 엠티에 가서 한참 이야기하고 버스타고 오면서 장시간 이야기하다보면 ‘내가 이 사람에 대해서 잘못 생각했었구나. 내가 오해였구나. 내게 들리는 많은 풍문들은 사실이 아니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사람을 신뢰하게 됩니다. 혹은 그것이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의 마음을 대화를 통해 알게 되면서 그 사람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사랑할 가능성이 있게 됩니다. 똑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transfer. 전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우리들이 잘 깨닫고 그 말씀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을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해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그 분의 마음을 이해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말씀의 은혜를 받지 않고는 시편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그 기도는 가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얻어내는 과정이 아니라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가고 그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합치시켜서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리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의미의 기도입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지 않으면 절대로 기도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은혜를 받고 은혜 받은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일단 하나님의 말씀이 빛을 비추면 자기 안에 있는 죄가 무엇인지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안에 죄를 발견하게 되면 그 죄는 특정한 죄지만 돈을 훔쳤다든지, 거짓말을 했다든지, 누구에게 폭행을 했다든지, 성적인 잘못을 했다든지 이런 개별적인 죄지만 밑을 계속 내려가서 추정을 해보면 마지막에 그 많은 죄들은 하나의 큰 뿌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게 뭐냐면 죄입니다. 죄. 그 죄는 설명을 해야 되겠습니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a라는 사물을 봅니다. 볼 때 좋습니다. 사랑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a라는 걸 좋아하게 됐는데 그래서 이 사람이 볼 때에는 a가 제일 중요하고 1순위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b, c 이렇게 등등 뭐 또 순서가 있습니다. 이걸 쳐다보는데 이건 뭐 쪼금 사랑을 합니다. 이건 더 쪼금 사랑하고. 그래서 이렇게 좋아하게 되는 게 순위가 정해져있습니다. 그런데 이거는 어느 기준이 있는 게 아니라 자기를 기준으로 보고 이렇게 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것을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놓고 본다면 이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게 맞는가 ? 문제가 다시 제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상과 지상의 것이라고 본다면 여기에 있는 사람과 그 다음에 사물들 많은 것들은 이게 어떻게 질서가 되어있고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은 천상으로 이렇게 회귀가 되는 것입니다. 이거를 부인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냐면 여기에서 이 지상은 천상의 반영이라고 보고 이 지상의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보고 그러면 하나님 안에 어떤 의도와 질서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게 이 전체를 보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거를 이 사람의 관점 α (알파)가 아니라 만약에 하나님의 관점이라고 하는 β(베타)라고 칩시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은 여기서 모든 사물들을 정하실 또 다른 질서가 있습니다. 이렇게 질서가 있는데 이 질서에서 이 사람은 지금 자신이 여기에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고 이 모든 것들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죄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우주의 중심이신데 자기가 중심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죄입니다. 이렇게 하니까 이 사람은 이렇게 판단을 내렸는데 하나님은 이렇게 뒤집으시는데, 하나님의 판단은 다르다 이 얘기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서 자기가 무엇이 중요한가를 자신이 정하고 그것으로써 삶의 질서를 채웁니다. 그럼 어떤 결과가 오냐면 하나님이 여기에 계셔서 이렇게 하나님이 질서를 정하시고 여기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그 다음에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이런 질서들을 만들어 놓으신 것을 깨고 그 다음에 여기에 있는 내가 하나님이 중심이신데 자기가 여기에 있는 것처럼 이걸 다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질서b와 이 질서a는 이런 식으로 충돌을 하게 됩니다. 충돌한 것만큼 하나님께 반역을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죄를 더 쌓아가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가 더 쌓여갑니다. 하나님이 그래 돌아오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깨우치시겠지만 끝까지 듣지 않는다면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데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일 경우에 얼마나 웃깁니까? 그리스도인인데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면 하나님이 계신 이 질서를 기뻐하고 이 질서 어느 자리에 자신이 서서 바깥에 있는 파문이 자기 때문에 더 힘차게 질서가 형성되면서 세상으로 흘러가면 거기에 이바지하면서 사는데서 자신의 행복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이 번 학기에 공부했던 천지창조의 목적 그게 이 얘기 입니다. 그림을 그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시고 이렇게 파문을 형성해요. 그러면 여기에 내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여기에 살아 있으므로 이렇게 여기에 이렇게 서서 자기 세계를 구축하면서 파문을 일으키려는 사람들. 이 사람이 교화입니다. 혹은 이 사람을 영적으로 무찌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로 편입이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사람들 때문에 이 파장이 점점 더 확실하고 힘차게 이것들이 질서가 형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천지창조의 목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런 삶을 살게 만드는 본질이 이 사람 안에 있는 죄입니다. 죄가 일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러면 이 b라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데 왜 이 a'라고 하는 사람은 어떻게 이 사람과 다른 삶을 살아갈까, 불편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렇게 이 사람을 살게 만드는 것은 죄 때문이라면 이 사람을 살게 만드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럼 무슨 사랑이냐?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자신의 목적은 없어집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부모님이 여러분들을 키웁니다. 처음에는 엄마도 처녀 적에는 꿈도 많고 생각도 많습니다. 결혼을 합니다. 아이를 낳습니다. 여러분을 낳았습니다. 너무 사랑합니다. 그 다음에 자기 꿈이 없습니다. 그저 이 아기가 잘 되는 것입니다. 몸이 아프면 건강하기를 바라고 자기 자신을 던져서라도 이 아이를 불행에서 건져내고 싶어 하고 그게 사랑이 가져다주는 목표의 합치입니다. 그런 사랑 때문에 이렇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또 다른 파문을 만들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이렇게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이 질서에 있는 거를 기뻐하고 이 기쁨은 모든 만민이 모든 사람과 모든 만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질서를 따라서 존재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환경 얘기도 했었습니다. 우리가 확신하는 게 뭐냐면 이런 식으로 자연환경이 고통을 받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질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해에 1회용 컵을 5000만 명이 250억 개 소비를 해서 이 자연에 고통을 주고, 지금도 아귀 하나를 발견했는데 꽤 큰 걸 잡았습니다. 그런데 배가 이상하게 불러있어서 해부해 보니까 그 속에서 페트병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것을 싫어합니다. 유리에 든 걸 먹자는 주의입니다. 유리는 재활용 됩니다. 거의 99%이상 재활용 됩니다. 저거(플라스틱)는 먹고 나면 분해돼서 없어지는데 600년 걸립니다. 생산은 어마어마하게 해내는데 600년이 넘어야 분해가 됩니다. 이런 일들을 우리는 계속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에서 어긋났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율배반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게 뭐냐면 이렇게 살았던 자기 사랑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렇게 인간마다 다 자기 깃발을 꺾어 듭니다. 깃발을 들고 이거를 자기 세계에 구축해갑니다. 그러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러면 깃발을 이렇게 꺾어 이렇게 엎드려서 회개하면서 이제는 자신의 질서를 구축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대로 내가 살겠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가 되길 원하는 열망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죄 죽임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죄 죽임에 대해서 확실히 핵심 하나를 얘기하자면 마지막으로 죄가 죽는 결정적인 것은 기도를 통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그것이 죄라는 걸 발견하고 그 안에 죄의 깊은 뿌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발견하면 여러분들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예를 들면, 여러분이 여러분 몸을 사랑합니다. 당연히 자기 몸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운동도하고 미용도하고 밥 많이 먹고 싶어도 좀 덜먹고 또는 덜 먹고 싶은데 자기 몸을 생각해서 먹기 싫어도 억지로 먹으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느 날 몸이 좀 이상해서 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주먹만 한 암이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거를 자기의 몸 중의 일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암이라고 발견되고 난 다음에는 내 안에 함께 있지만 그 암은 내 살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암이 있다는 걸 사진으로 보여줬습니다. 복부 아래 주먹만 한 혹이 있었습니다. 그럼 그 순간부터 여기를 만지면서 이건‘ 내 살의 일부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이건 내 살이 아닌 무엇이 내 살 안에 들어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 입니다. 그게 바로 죄와 죄에 대한 사람의 분리입니다. 그래서 먼저 죄에 대한 감정이 찢어지는 일이 먼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감정이 죄와 자신 사이의 일치 되었던 것이 갈라지는 일이 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고등어를 너무 좋아합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 가지고. 그리고 또 무엇을 좋아하냐면 명란젓을 좋아합니다. 명란젓에다가 비벼서 그 고등어를 계속 먹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해야합니다. 빨갛게 이쁘게 된 명란젓에는 아주 치명적인 발암 물질이 들어있습니다. 그 발암 물질이 고등어 탄 것과 만날 때 그게 또 다른 화학작용이 일으키면서 더 강력한 발암 물질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인과 관계를 알았을 리가 있었겠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지는 불행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너무 모르니까. 근데 그거를 평생 먹었습니다. 암에 걸렸겠습니까 안 걸렸겠습니까? 100% 걸렸겠지. 예전에는 환상의 조합처럼 보이던 그 노릇노릇하게 구운 고등어와 따뜻한 밥 위에 올려놓은 명란젓이 환상의 궁합처럼 보였는데 그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는 (그 암에 딱 걸리고 난 다음에는) 그 조합이 최악의 조합으로 느껴지고 그 두 개가 함께 놓여 있는 것을 혐오하고 그거를 좋아하며 살았던 자기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 커다란 가책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죄에 대해서 먼저 그런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구체적으로 마음의 이치성의 인식, 이 죄는 나쁜 것이라는 인식 그 다음에 마음의 감정. 그것에 대한 싫고 미워하는 감정. 당장 그런 게 있다면 도려내고 싶지 않겠습니까? 공존하고 싶겠습니까? 이 속에 있는 게 500g에서 1kg. 1kg에서 2kg. 3k에서 4kg. 늘어가는데 몸의 몸무게가 나간다고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배를 갈라서라도 당장 도려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 감정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지가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작동해서 그 죄를 아주 격렬하게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내 안에 있는 것이 괴롭다는 것을 호소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 죄를 지으며 살아 온 것, 아직도 남아있는 것, 이 죄에 대한 사랑이 아직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가슴아파하며 간절히 기도하게 될 때 그 때에 성령이 함께 역사하시면서 그 죄가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죽으면서 자신은 더 이상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더 이상 너무 역겨운 마음이 들어서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 것이 바로 죄를 죽인 것입니다.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후에 또 타락해서 예전에 하기 싫었던 것을 또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매일 기도 생활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죄에 대한 정당한 감정을 유지해야 합니다. 문화라고 하는 게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화의 옷을 입고 다가오면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깊이 물든 문화를 비판 없이 성취할 때에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죄에 대한 경계심을 해체해버리는, 경계심을 약화시켜버리는 요인을 우리에게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빛나는 지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몸은 점점 늙어가고 변해가도 이 정신의 판단은 아주 칼날같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사는 길입니다. 분명하게 살아있으니까. 그렇게 할 때 이 속에서 영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죽이셔서 그래서 그 죄에 대해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에 대해서 죽게 될 때 죄에 대해서 죽는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 죽은 것만큼 은혜에 대해 살아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내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이라고 할 때 그 의미가 바로 저런 것입니다. 죄가 죽은 만큼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살아 역사합니다. 그 살아 역사하는 생명이 지성과 관련될 때에는 무엇인가 집요하게 알고 싶은 탐구심이 생겨납니다. 왜? 생명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빛이면서 지성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점 점 강해지고 그 다음에 이 생명이 없었을 때에는 뭔가를 알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해선 알고 싶은 게 많지만 하나님에 대해선 알고 싶지 않고 조금만 어려워도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이 들고 고통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게임은 그렇게 어려운 건데도 이렇게 두꺼운 메뉴얼을 보고 공부하면서 게임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조금만 어려우면 “아이씨. 누가 이걸 하나님께서” 하면서 던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이 달린 것입니다. 이 생명이 감정에 영향을 줍니다. 이 감정이 이 생명의 영향을 받으면서 아름다운 것을 향해서 정당하게 움직일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동물이든 뭐든 비참한 것을 보면 가엾이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잖아요? 상관하지 않는 사람들 있습니다. 몇 달 전에 한 할아버지가 신경질 내니까 고양이를 잡아다가 던져버렸습니다. 고양이가 날아가는 것을 누가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그 할아버지 결국은 벌금 500만원 물었습니다. 법으로 처벌받았습니다. 아니 고양이가 걸리적거리면 비키라고 얘기하지 자기 화난다고 던져버리면 그 고양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각을 안 합니다. 왜냐하면 정에 생명이 없습니다. 무자비 한 것입니다, 정에 생명이 있으면 그런 것을 보면서 아름다운 것을 보고 기뻐하고 추한 것을 보고 미워하고 그럴 수 있는 마음의 정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이게 의지에 작용할 때 의지에 작용하면 선명한 하나님을 향해 무엇인가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설교 한 편도 끝까지 못 듣습니다. 그게 왜 그렇습니까? 이해력이 떨어져서? 그래도 학력고사 보고 들어왔는데 뭐가 이해력이 떨어지겠습니까. 초등학교 안 나온 사람들도 다 이해하는 말씀인데. 이게 무엇입니까? 생명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끝까지 해내질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 무얼 하고 싶겠습니까? 하고 싶으면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은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죄로 가까이 가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의지에 영향을 줍니다. 예전에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향을 줍니다. 이런 생명이 결국은 죄 죽임과 함께 오는 것입니다. 죄가 죽은 것만큼 생명이 우리 안에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럼 45페이지 속히 나가겠습니다.
죄 죽임의 필요성. 기본적으로 죄 죽임의 필요성은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예전에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닮아서 하나님을 닮은 생각하고 느끼고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그 영혼의 능력입니다. 이것들이 죄로 말미암아서 그 기능을 현저히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합니다. 이 것을 하나님이 구원을 통해서 다시 회복시켜주시고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점점 더 거룩해져 갈 때에 하나님이 주신 그 구원의 은혜 안에서 성화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 성화 되어 가는 정도만큼 하나님의 형상은 다시 빛나도록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형상의 아름다움이 곧 인간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그 것이 바로 신자의 성화입니다. 죄 죽임을 통하지 않고는 이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46페이지로 넘어가서 죄 죽임의 필요성이 뭐냐면 첫째는 죄의 본성과 작용 때문에 죄 죽임이 필요하다. 비록 중생한 신자라도 죄가 항상 있고 역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자의 내재하는 것 이상의 보다 원대한 목표와 계획을 가지고 있다. 신자 안에 있는 죄는 신자 안에 있는 걸로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들고 그 죄를 사랑하게 하고 그 죄를 행하게 하고 그렇게 해서 결국은 신자의 삶 전체가 그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게 하는 것이 죄의 원대한 계획입니다. 그 파장 때문에 죄가 또 퍼지고 퍼진 죄가 널리널리 전파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그 죄에 참여하며 살게 하는 것이 신자 안에 있는 죄의 목표입니다. 그러면 그런 죄의 목표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과 완전하게 대치되는 모순의 상태인 것입니다. 이러한 죄의 목적과 계획은 하나님께서 신자를 구원하신 것에 대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죄를 죽이지 않으면 구원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없다. 내재하는 죄의 융성한 작용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는 회심하는 순간부터 죄를 깨닫고 진지한 열심으로 죄 죽임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니까 죄 죽임이 있는 곳에 영적인 성장,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중생의 본성과 소명 때문에 중생한 신자는 새 본성을 부여받았다. 거룩한 본성이며 하나님 사랑하는 본성이다. 또한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아름다움을 파악하고 그것을 애호하는 본성이다. 신자는 중생과 함께 새로운 본성을 부여받는다. 성령이 그에게 내주하신다. 그래서 그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된다. 신자는 중생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죄를 죽이지 않으면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울 수 없기 때문에 죄 죽임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신자의 내면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지고 그 것이 거룩한 삶을 위한 성향이 되는 것은 내재하는 죄를 죽이는 정도에 비례한다. 죄를 죽이면 은혜는 융성해진다. 은혜가 살아나지 않고서는 죄가 죽지 아니하는 것이니 죄를 죽이는 과정에서 은혜의 살아남을 동반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신자는 구원과 함께 이루어야 할 거룩함이 있기 때문에 죄 죽임을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본받아 거룩해져야한다. 자신 안에 내재하는 죄가 이 거룩함을 방해한다. 죄를 원수처럼 여겨야 한다. 완전 파멸은 불가능할지라도 그거를 목표로 하는 것처럼 죄 죽임을 실천해야한다. 이 의무는 평생에 힘쓸 의무니 중생한 신자에게 있어서 거룩함에 이를 의무가 평생에 계속 될 의무이기 때문이다. 죄 죽음 없다면 거듭난 본성은 고사할 것이며 은혜는 쇠잔 할 것이다. 마음은 정욕의 지배를 받게 되고 유혹을 만나 죄를 산출할 적당한 기회에 이르게 되었을 때 악한 행동을 산출할 것이다. 그러므로 죄 죽임이 없는 삶은 자신을 파멸로 이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52:31을 일으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를 구원하신 예수의 고난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그리스도를 다시 못 박는 삶을 살게 된다. 모든 청교도들은 진정으로 거듭난 신자가 이 세상에서 거룩해지기를 열망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항복이 아니라. 죄 죽임 없이는 누구도 거룩함을 삶 속에서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렇게 죄를 죽이는 자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약속하실까요? 신자가 죄 죽임을 통해 약속받고 있는 영적 생명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인내의 보증, 영적 성장, 평안의 항유.
세 가지입니다. 인내의 보증 무슨 뜻이냐면 죄를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 안에 계속 살아있어서 그렇게 은혜를 계속 베푸실 것이라고 하는 보증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 안에서. 그래서 죄를 끊임없이 죽이는 사람은 하나님이 나와 영원히 함께하실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영적 성장입니다. 죄를 죽이면서 영적으로 점점 더 강한 사람, 성장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치원 아이가 아무리 죽기 살기로 덤벼들어도 어른 한 사람이 웃으면서 아이를 툭 치면 그 아이는 어른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게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과 어린아이 상태에 있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그런 영적인 성장이 죄 죽임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철딱서니 없이 그렇게 까불던 중고등학생들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자기 말로는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대학에 가도 똑같이 철딱서니가 없습니다. 중고등학교에서 하던 짓 똑같이 하고 사는 것입니다. 커서 어른이 되어도 똑같습니다. 시집 장가가서 애까지 낳았는데도 역시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고 살아가면 그 사람의 삶이 어떻게 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지금 신앙 안에서 고민하는 문제들을 해결해 가는 것을 연습하지 않으면 놀랍게도 한 10년 후에 풀다가만 숙제장 처럼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앞으로 진전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고등학생 때 고민하던 문제를 똑같이 대학생이 돼서 경험하고 1,2학년 때 경험하던 문제를 나이 35.40살이 되어가도 똑같이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에 무슨 진정한 행복이 있겠습니까?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그 다음 단락 신자가 죄를 죽이는 삶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중생과 함께 그들 안에 주신 은혜는 보존된다. 그들에게 주신 은혜는 죄를 죽이는 삶의 실천을 통해서 보존이 된다. 죄의 역사는 영혼의 힘을 약화시킨다. 죽지 않은 죄의 역사는 영혼을 어둡게 하나 죄 죽임의 실천은 날마다 새로운 생기를 영혼에 불어넣고 밝은 광명을 준다.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죄 죽임의 실천은 하나님께서 신자 안에 주신 거룩한 은혜를 성장하게 한다. 신자 안에 있는 성화의 은혜는 시작과 발전과 퇴보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죄 죽임의 실천에 달려있다. 죄 죽임 자체가 아니라 그 것을 도구로 역사하는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신자는 중생과 함께 심겨진 은혜 안에서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자신 안에 내재하는 죄를 죽이는 신자만이 평안을 누리게 된다. 이 평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누리는 평안이 끊임없이 죄 죽임을 실천하는 신자의 마음은 그리스도께서 거하시기에 가장 좋은 집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그들 안에 함께 계시므로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하나님과의 평화 안에서 온전한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이 하늘 평안은 죄 죽임 없이는 누릴 수 없는 평안이니 성도의 끊임없는 하늘의 위로가 여기서 나온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은 죄 때문에 슬퍼했던 사람입니다. 죄 때문에 슬퍼했던 사람만 하나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까? 죄로 인해서 슬퍼했던 사람만 하나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를 많이 하고 나면 두 가지가 밀려옵니다. 무거운 짐을 덜어냈다고 하는 말 할 수 없는 해방감, 두 번째는 예전에 멀리 계셨던 낯선 하나님이 아주 사랑으로 느껴지는 그런 경험을 우리들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와 열렬함. 기도를 잘 못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시작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간절한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때에는 눈물도 흘리고 죄도 미워하고 불순종한 것도 회개하겠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고 결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한두 번에 그친다면 새로운 삶은 이제 막 하고 싶은 것이고 옛 삶은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습니다. 익숙한 것이 익숙한 대로 살기가 쉽습니까? 새로운 방식대로 살기가 쉽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당연히 전자입니다. 그래서 익숙한 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한두 번 열렬하게 회개 했다고 해서 죄는 용서 받았다는 마음이 들지만 그러나 실제로 자기가 그 죄를 이기며 살기 위해서는 거기에서 기도가 끝나서는 안 됩니다. 거기서 끝나서는 다시 원위치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의 죄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또 다시 죄를 짓는 일은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가능하니까 옛날에 지었던 죄를 지금 또 하나님 앞에 짓고 회개하고 또 짓고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간절한 기도가 의미가 없는 것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간절하게 기도가 시작되고 나면 이제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되게 중요한 것이지 않습니까? 기도를 안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 했습니까? 기도가 안 되기 때문에 안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못하기 때문에 안하는 것입니다. 못하는 채로 내버려두면 계속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그런 병에 많이 걸리는 사람은 없지만 예전에 소아마비라고 있었습니다. 소아마비라는 것은 다리가 어린 나이 시절에 여러 가리 질병을 비롯한 무슨 이유로 한 쪽 다리가 안 자라는 것입니다. 나중이 되어 이렇게라도 걸어 다니는 사람이 있고 아예 목발을 의지하고 살아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어렸을 때 소아마비 걸렸을 때 여기다가 쇠로 만든 가짜 발을 찹니다. 되게 무겁습니다. 그게 발을 계속 아래로 당겨줍니다. 그거 해 본 사람들에 의하면 너무너무 불편하다고 합니다. 그 것을 하고 나면 다리가 완전히 죽지 않는 것입니다. 절뚝절뚝하면서라도 보조 장구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가 걸어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걸 안하면 다리가 오므라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움직이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기 힘듭니다. 숙제는 안 하면 학점이 안 나오지만 기도를 안 했다고 해서 누가 회초리를 때린다든지, 나쁜 놈이라고 한다든지, 등록금을 인상시킨다든지. 기도를 안 한다고 해서 무슨 표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안하면 계속 이게 올라붙어서 점점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 할 수 없는 동안에 우리 안에 은혜는 죽고 죄는 점점 풍성하게 사는 것입니다. 적당한 유혹의 기회를 만납니다. 그러면 저항할 힘이 안 생깁니다. 그럼 죽습니다. 실화인데 어느 교수 한 사람이 세미나를 하다가 코털이 자라서 너무 간질간질해서 코털 3개를 뽑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확히 48시간 후에 죽었습니다. 코털 3개를 딱 걸리적거려서 세미나를 듣다가 탁 뽑았는데 48시간 만에 죽었습니다. 여러분도 코털 뽑아보세요. 48시간 만에 죽나 안 죽나. 대부분의 사람은 안 죽습니다. 병원에 가서 주사 맞고 나면 항상 간호사 분들이 “오늘 샤워하지 마세요.” 라고 얘기합니다. 못 들었습니까? 못 들었으면 그 간호사는 직무 태만입니다. 특히 링거를 맞을 때에는 혈관의 구멍이 큽니다. 오늘 절대 샤워하면 안 된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샤워해도 괜찮습니다. 그 샤워기에 어떤 균이 묻어있을 때 그게 이 몸속에 침투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항력이 거의 제로 가까이 떨어졌을 때 그 때에는 딱 저항력이 떨어진 상태라서 균이 들어가면 균이 피를 사망하게 합니다. 피 속에 있는 것들이 제대로 성분이 발휘되어서 균을 죽이지 못하니까 피의 이동을 타고 온 몸에 균이 퍼지는 것입니다. 그게 패혈증입니다. 특히 여러분 대상포진이라고 연세 드신 분들 걸리시는 병이 있습니다. 그 균이 수두균 입니다. 어렸을 때의 수두균. 수두균이 완전히 안 죽고 저기 골수 속에 남아있다가 어른이 된 다음에 저항력이 바닥이 났을 때 슬그머니 일어나서 다시 번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게 온 몸에 나고 잘못해서 이쪽에 나면 눈이 멀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고 치명적입니다.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은 언제 일어나냐면 저항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이 떨어졌을 때 일어납니다.
기도 안 해, 은혜로 저항하며 살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죄의 입장에서 보면 신나는 게 뭐냐면 인간이 무지합니다. 아무 것도 모릅니다. 저항력이 제로가 되었을 때는 균이 엄청나게 ??하는01:06:34 것입니다. 은혜의 저항력이 떨어졌을 때 죄에 저항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침 죄가 그 사람이 딱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유혹을 합니다. 그렇게 됐을 경우에는 딱 맞아 떨어지면서 죄가 작렬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밖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쏟아져 나온 것은 담기가 매우 힘들어집니다. 친구를 너무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담을 수 있습니다. 마음만 고쳐먹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 미워서 때렸습니다. 죄가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 친구가 폭행죄로 고소했습니다. 경찰에서 수사를 해보더니 진짜 나쁜놈? 이라고 검찰에 넘겼습니다. 검찰이 기소를 했습니다. 법원에서 영장이 왔습니다. 예를 들어 그런 식으로 되면 일이 복잡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기를 내 안에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래도 내 맘대로 걸어 다닐 수 있는데 아기를 내놓고 나면 엄마들이 자기 마음대로 못합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여기서 중요한 게 뭐냐면 그런 은혜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두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기도의 열렬함과 지속성입니다. fervency & continuous. 기도를 열렬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기도가 계속 되어야합니다. 죄에게 있어서는 매우매우 나쁜 환경입니다.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공과와 마지막 종강하는 날에 다루려고 합니다. 오늘 다루려고 하는 것은 ‘fervent’ 기도의 열렬함입니다.
자 그러면 열렬한 기도를 갖는 것은 참 좋은데 또 은혜를 통해서 열렬함을 회복하는데 그 열렬함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첫 번째는 영혼의 싫증입니다. 전혀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어도 열렬한 기도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너무나 소수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기도를 잃은 채 고장 난 영혼 속에 죄가 이루어 놓은 고통의 열매를 부여안고 살아간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기도 속에서 총체적인 싫증에 빠져있다. 싫증은 뭐냐 하면 싫증은 이런 것입니다. 여기 사람이 있는데 여기서 사람. 왜 그러냐면 여기서 아름다운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beauty. 아름다운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사람은 사랑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그러면 여기서 어떻게 돼? 츄??01:10:16. 디포밋diform?..~의 형체가 없는거죠? 그러니까 질서 있는 형체가 깨진 것입니다. 이렇게 추한 것을 ??해서 혐오하게 됩니다. 그러면 인간의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과 이것 사이를 오갑니다. 무엇에 대해서? 어떤 사물에 대해서. 어떤 사물에 대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만큼 사랑하게 되고 더러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만큼 혐오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 이쪽 극단에 가있거나 이쪽 극단에 가있는 쪽은 드물다 이것입니다. 진저리 치도록 싫은 것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죄도 그 정도 아니지 않습니까. 머리로써는 내가 그렇게 싫어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감정적으로는 그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싫어해야한다, 적어도 그렇게 말해야한다. 이렇게 알고 있지만 정말 더럽고 징그럽지는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이게 만약에 하나님을 향한 의무라고 생각해봅시다. 이 의무에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면 사랑이 느껴집니다. 그 의무가 진짜 아름답지 않다고 느껴지면 그 의무를 싫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도 이렇게 양쪽 극단에 속하는 의무가 있습니까? 기도하는 시간 즐겁습니까, 안 즐겁습니까? 기도하는 시간이 더럽다고 얘기하려니까 신앙적으로 그러면 안 될 것 같고, 즐겁다고 얘기하려니까 양심에 찔리니 대답 못하고 가만히 눈치만 봅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대부분의 것들은 이 사이에 있고. 이게 사람이라고 칩시다. 그 사람 만나면 만날수록 예쁩니다. 당연히 열렬히 사랑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결점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보기도 싫겠죠? 그러면 대부분의 것들은 여기와 여기 사이의 대역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싫증이라 하는 것은 딱 중간입니다. 중간에 여기서 혐오하는 것도 아니지만 사랑하는 것도 아닌 그래서 어느 쪽으로도 기울 수 있는. 남녀 관계나 부부관계에서 여기까지 오는 지점을 뭐라 합니까? 권태입니다. 연애를 하는데 권태를 느낍니다. 권태를 느낀 측에서 남자가 먼저 느꼈다 하는 것은 여자가 더 이상 아름다운 걸 안 보여주는 것입니다. 혹은 반대로 진짜 아름다운 것이 많은데 남자가 눈이 어두워져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못 보는 것입니다. 돈에 관심 있는데 이 사람 성품이 아름답습니다. 눈에 안 들어옵니다. 마찬가지로 인식론적인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싫증입니다. 그럼 여긴 어떻게 됩니까? 여기 입장에서 보면, 선의 입장에서 보면 아직까지도 자기 편이 아니고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자기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왜? 여기에서 여기로 온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여기로 갔으니까. 사랑한 적이 있으니까 권태를 느낀다고 말합니다. 지나가는 사람한테 저 사람한테 권태를 느낀다 말은 안 됩니다. 출발 자체가 사랑에서부터 이렇게 이동을 한 것입니다. 그냥 이게 중간이라고는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멀어져갔고 시계추가 이쪽으로 돌아가면 이쪽으로 가기 십상입니다. 저런 상태에 있는 것이 영혼의 싫증입니다. 이렇게 가게 왜 내버려뒀을까?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은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름다움을 너무 많이 봐버린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이 사실은 fact가 아니라 착각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내일 기말고사인데 학생이 오늘 죽어라 게임만하고 공부 안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공부를 하고 내일 기말고사를 잘 보는 것은 선한 것이지만 주관적으로 이 아이 마음속에는 게임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많은 문제는 선과 미 사이의 모순입니다. 선한 것을 아름답게 느끼고 아름다운 것을 선하게 느끼지 못하는 데에서 인간은 많은 불행이 옵니다. 싫증이 있으니까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굳이 만나고 싶지도 않고 만나야 되면 만나지만 그렇게 내키진 않는, 더 좋은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거기로 가는 그런 상태가 영혼의 싫증입니다. 그 싫증이 육체의 게으름과 손잡습니다. 영혼의 싫증이 있으니까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육체의 게으름과 손잡으니까 실제로 기도를 안 하는 것이 편리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실천의 규칙이 없음. 정한 규칙이 없는 기도 생활 때문이다. 기도한다 할지라도 마음에 정해놓은 규칙이 없으면 열렬한 기도생활에서 물러난다. 되면 하고 안 되면 안하는 사람들로 기도를 안 해도 필요성을 지식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상태까지 미끄러진다. 따라서 영혼의 갈급함 같은 것들은 없다. 기도하지 않으며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끊겼는데도 갈급한 줄 모르는 질병적인 상태로까지 들어가고 만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불은 의무라는 화로에 담길 때 지속성을 가질 수 있다. 불을 옛날에는 난방 기구 없었을 때 어머니들이 저녁밥을 하고 나서 큰 쇠로 된 화로에다가 재를 다 푸고 재 속에다가 불씨를 다 묻어놓습니다. 그러면 신기하게 숯 덩어리가 거기서 아주 오래도록 열기를 발합니다. 저녁 먹은 후에 텔레비전도 없었던 시절이니까 난로를 놓고 따뜻한 아랫목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윗목은 불이 안 들어와서 추웠습니다. 거기다가 고구마, 감자 그런 거 놓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다보면 맛있게 먹습니다. 집게로 꺼내서 신문지나 헝겊에 두고 툭툭 털어서 하나씩 먹으면서 긴 겨울밤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게 시골의 밤입니다. 얼마나 정겹습니까? 그러니까 거룩한 불은 의무라는 화로에 담길 때 오래 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즉시 자신과 약속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약속하고, 자신과 약속하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말고 언제, 얼마큼, 어디서 규칙을 딱 정하고 이변이 일어나도 규칙을 지키려하고 못 지켰을 때 그것을 뉘우치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기도의 은혜가 보존됩니다.
세 번째, 마음을 쏟지 않음. 이게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그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물을 쏟는 것처럼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으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그 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열렬한 기도를 하게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기울여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쏟아서 기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중요한 게 무엇이냐면 인간이 마음이 이렇게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할 때 이 기도는 반드시 언어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조용히 묵상한다든지 그런 것은 기도는 아닙니다. 기도는 반드시 언어의 형태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방언 기도는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의 기도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경륜 중에서 중요한 것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바꾸어 놓는 데에 기도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의 의미는 기도를 통해서 기도하는 사람, 자신의 마음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 마음이 변하려면 반드시 사고의 작용이 거기에 뒤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도에 관한 경륜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바뀌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바꾸시는 것이 기도의 목표입니다. 기도를 주신 경륜입니다. 우리가 바뀐다는 것은 마음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바뀌지 않고는 사람이 바뀔 수 없습니다. 그 마음이 바뀐다고 하는 것은 결국 사고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사유. 사유를 필요로 합니다. 사유는 언어 없이는 사유가 될 수 없습니다. 사고 활동은 반드시 언어와 함께 일어납니다. 마음의 변화는 반드시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사고의 활동을 동반하고 사고는 반드시 언어를 동반해야지만 진정한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인간의 마음 깊숙하게 있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습니다. 이거는 사실 자기 속에 묻혀있어서 자신도 잘 사고가 되지 않는 마음인데 기도라는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말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마음으로 내려오지 않고 여기에서 그냥 입으로 시작을 해서 머리에서 시작을 해서 입으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기도가 아닙니다. 염불이나 주문일수는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언어를 조직해낸다 하더라도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기도를 꾸짖으셨던 이유도 그 기도의 내용이 잘못돼서가 아니라 그것이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니라 머리에서 나와서 입으로 나오고 그 기도의 목표가 자기를 높이는 것이어서 예수님께서 인정 안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인간이 마음속으로 깊이 내립니다. 여기서 이 언어를 위로 올리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물이 있습니다. 그럼 당연히 여기까지 흙이 이렇게 되어있고 저 밑에까지 있습니다. 여기에 물이 출렁거립니다. 두레박을 던집니다. 삼각형 삼각형으로 이렇게 이렇게 이었다고 여기에 끈이 달렸습니다. 쓰러트립니다. 쓰러트리면 물이 들어오잖아? 물이 들어오면 물을 위에서 아래로 떨어트립니다. 물속으로 충분히 잠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이 넘칩니다. 그럼 끌어 올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를 하려면 자기 마음속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자기 마음속에서 언어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언어를 만들어내면서 사람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남자 여자가 아무리 서로 마음속으로 좋아해도 좋아한다는 말을 안 하면 그냥 서로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둘 중의 한 사람이 만나서 “나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럴 땐 사건이 됩니다. 그 남자는 그 말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고 여자도 “나도요.” 하면 양쪽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동안에는 사랑이 잠정적이지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순간 자기는 그 말에 책임져야하고 비로소 자기가 진짜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모든 학생들이 보는 운동장에서 프러포즈를 한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그 대신 약속을 지켜야합니다. 언어를 길어오는 것입니다. 왜? 언어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이 언어에 의해서 조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도를 반드시 언어로 하게 하십니다. 그 언어도 주기도문 같은 특별한 경우를 빼놓고는 교회에서 기도문을 만들어주고 그 기도문을 읽게 하는 것 (카톨릭에서 많이 하는 것) 그런 것들은 기도의 기본적인 원리에서 많이 벗어난 것입니다. 왜 틀에 짜인 기도문을 누군가로부터 제공받아야 하냐 이것입니다. 자기의 언어로 조직해내면서 그게 언어가 되면서 내 안에 잠자고 있었던 많은 것들이 깨어나서 올바르게 되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언어를 자꾸 길어 올리면서 마음의 변하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 진심으로 이야기 하다보면 자기 마음 안에 원래 있던 것들이지만 말하는 걸 통해서 마음 안에 변화가 일어나서 하기 싫던 것을 하게 되고 하던 것을 그만두게 된다든지 자기의 태도와 입장이 분명해집니다. 그게 언어의 목적성입니다. 놀라운 것은 뭐냐면 은혜가 충만하면 말이 잘나옵니다. 그런데 은혜에서 멀어지면 기도에서 말이 잘 형성이 안 됩니다. 친구와 이야기 할 때는 입에 침을 튀면서 유창하게 얘기하는데 무릎을 꿇으면 말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게 뭐냐면 은혜의 정서입니다. 사람을 사랑해도 말이 많아집니다. 내가 쓴 연애편지 기록이 노트 한 권 이었습니다. 노트 한 권. 딱 한권 분량.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면 할 말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왜? 언어가 마음속에 솟구치는 경우가 두 번 있는데 사랑이 넘칠 때와 열 받았을 때입니다. 열 받았을 때 언어가 넘칩니다. 누구하고 싸우고 열 받았을 때. 얼마나 많이 언어가 끓어오르는지 밤에 잠을 잘 수 없습니다. 마치 정서가 풍부해져서 힘이 솟을 때 잠이 못자는 경우 있지 않습니까. 젊을 때 너무나 아름다운 시상이 떠올라서 밤새도록 잘 수가 없는 것입니다. 머리가 반짝반짝 떠올라서. 똑같은 일이 열 받았을 때 일어납니다. 언어가 너무 많아서 밤새도록 잠이 안 옵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누구냐면 세상에 열 받는 사람입니다. 할 말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또 한 편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기도할 일이 많습니다.
(찬양)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잊지 마십시오. 기도는 반드시 언어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고의 활동과 관련이 있고 사고의 활동은 우리의 마음을 쇄신시키는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그럼 기도가 안 될 때, 죽어도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하지 마십시오. 책상에 앉아서 편지로 쓰십시오. 내일 기도할 것을 글로 쓰십시오. 그건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지웠다 다시 쓰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 적은 다음에 읽을 때에는 신문 읽듯이 말고 연인편지를 연인 앞에서 읽듯이 천천히 읽어봅니다. 그럼 눈물이 납니다. 자기 글이 자기 마음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기도의 언어가 마음 안에서 잠자고 있었던 하나님의 사랑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도의 문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열렬하게 기도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계속 해야 합니다.
짧은 기도. 짧은 기도는 문제입니다. 성경에 항상 부정적으로 말하는 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지리를 잘 모르는데 시간이 너무 없었습니다. 원주민을 다 죽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셔서 따라가는데 해가 집니다. 그럼 숨을거아냐 그럼 못 찾습니다. ‘태양아 멎어라. 달아 멎어라.’ 이게 변형 된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도 “귀신아 나가라” 하니까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런 흉내도 자주합니다. 귀신이 우습게 보이는지. 그래서 귀신이 뭐라 합니까? “예수도 알고 바울도 내가 아는데 넌 누구냐?” 그러고 올라가서 스게와의 일곱아들들을 껍데기를 벗겨서 망신을 줍니다. 그게 겉모습이 문제가아니라 실제로 자신 안에 어떤 기도의 능력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게 짧은 기도는 부정적인 것만이 아닌데 짧은 기도를 통해서 큰 능력이 나타났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평소에 길게 기도하던 사람들입니다. 평소에는 길게 기도 안하다가 어디서 그런 말만 주워들어서 자기 힘든 일만 있으면 “물러갈지어다.” 물러가긴 뭐가 물러갑니까? 왜 자기 말을 듣겠습니까. 짧은 기도는 하면 안 됩니다. 기도하고 주님께서 응답하시려고 보니까 벌써 가고 없습니다. “하나님 이건 뭡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 이제 그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하거라 말씀하시는데 벌써 없어졌습니다. 기도는 대화인데 자기가 기도하고 하나님께도 말씀할 시간을 드려야합니다. 오래 기도해야 합니다. 오래 기도하는 게 목표는 아닌데 간절한 기도는 항상 시간을 요구합니다.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열렬한 기도생활. 우리를 열렬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열정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고 진짜로 우리룰 열렬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 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열렬함의 기원이십니다. 성령님은 사랑이십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스도를 사랑하라는 말은 나오지만 성령님을 사랑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성령님도 하나님인데 왜 안 나옵니까? 성령님 자신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사랑하라는 말처럼 웃기는 말이 어딨습니까? 사랑할 때 그 사랑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열렬한 기도에 이르는 길이 뭐냐면 첫째, 정직한 기도여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빛이 필요합니다. 수술을 할지, 약을 먹어야 할지 전에 먼저 사진을 찍어야합니다. 엑스레이를 찍고 엑스레이가 안 될 땐 CT. CT가 안되면 MRI 점점 단계를 높여가면서 정확하게 우리 몸의 증상을 찍어내야 합니다. 말씀의 빛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여야 합니다. 아까 설명한 기도의 언어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56페이지입니다. 마음으로부터 기도해야한다. 기도가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마음의 욕구가 충분히 반영된 기도가 있어야 된다. 입술에 나오는 기도가 있는가 하면 마음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도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의 기도 시간이 입술로 채워지고 있다. 이렇게 되면 죄를 즐기는데 있어서 효능을 나타낼 수 없다. 기도는 많이 기도하려고 하기 보다는 머리에 떠오른 기도의 제목을 마음에 잠기게 해야 한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으로 길어 올려진 기도가 되어 내용에 자신의 진액이 피같이 베이게 하여야 한다. 기도가 메마른 상태에서는 잘 안되겠지만 몇 번에 걸쳐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믿고 간절히 매달리면 그 때 비로소 자신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동화되어있던 죄가 객관적으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거기까지 인내하면서 하나님 앞에 인내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 하셨습니까? ‘인자가 올 때에 믿는 자를 몇이나 보겠느냐’ 그 믿음은 기도에 관한 믿음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젊은이들이 되십시오. 그럼 하나님이 정말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01:40:12 눈물이 있는 청년들이 되십시오. 그 다음에 보면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보라 진액을 쏟아 부으며 기도하셨다. 그래서 식음?으로 묘사된다. (밑에 밑에)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지배 아래 있으면 자신의 기도의 언어에 마음을 쏟아 부어 늘 기도하게 된다. 기도가 솟구치고 쏟아져 나오는 과정을 통해 기도가 강력한 힘을 얻게 되면 하늘 보좌로 활처럼 쏘아 올려 진다. 마음을 들여 올리는 펌프질을 통해 내면의 더러운 죄들이 죽기 시작한다. 입술로만 기도 하는 일에 익숙해진 사람은 이미 마음의 펌프 자가 녹이 쓸어버린 사람이다. 그래서 굳어진 마음으로만 드리는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차가운 거절감과 거리감으로 메아리 되어 돌아온다. 처음에는 식음소리가 날정도로 기도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가 안 될 때 포기하는 사람은 힘들 이유가 없다. 왜? 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참는 것은 진정으로 참는 것이 아니다. 참을 수 없을 때부터 참는 것이 진짜 참는 것이다. 기도가 안 되는데도 마음으로부터 기도하려고 애쓸 때 내적인 고통을 경험한다. 인내로 악한 고집에 맞서다보면 탄식이 나오고 가슴은 오그라질 것처럼 조여오며 등에 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자기를 다 버리시기까지 낮아지신 우리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마다 자신의 진액을 쏟아 부으셨다.
c. 온전한 믿음. 어떤 믿음입니까? 내 마음에 양심이 나를 가책하고 율법이 나를 정죄하고 송사가 내 마음에 있어도 그 중간에, 두 번째 단락에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자녀다. 그리고 나는 결국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를 받은 사람이다. 불순종하고 죄를 지었으나 내가 회개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나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야합니다. 이런 믿음을 갖지 못하도록 엄청나게 많은 사단의 방해와 양심의 송사가 있습니다. 그 것들을 모두 헤치고 지나가야 합니다. 왜? 죄 가운데 빠져서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헤치고 나가야합니다.
d. 간절한 기도. (세 번째줄) 참된 열렬함 안에는 언제나 간절함이 있고 간절함은 열렬함을 부른다.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한다. 나와 먼 관계에 있는 사람은 기도할 때도 눈물을 쏟고 심령의 아픔과 연약함이 전해진다.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아프며 그 고통을 내 것처럼 여기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된다. 그런데 죄가 그러한 간절함을 죽인다. 죄가 간절함을 죽입니다. 거꾸로 간절한 기도는 죄를 죽이는 길에 이르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Never! Never give up!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 앞에 ‘여기를 지나가고야 말리라.’ 하고 매달려야 합니다. 보통 기도가 잘 안되면 더 많이. 더 많이 안 되면 철야. 철야해서 안 되면 금식. 그렇게 하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모든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죄를 이기면서 살 수 있는 하나님의 힘이 주어집니다. 그 뒤에는 왜 열렬함이 필요한가에 대한 것인데 61페이지로 넘어가면
열렬함과 마음의 쇄신. 우리가 지난번에 프로네마, 마음의 틀에 대해 공부했죠? 여기서 이렇게 나옵니다. 이렇게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가 죄를 죽인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령님께서는 열렬한 기도를 통해 죄를 죽인다. 죄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죄가 융성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준다. 열렬한 기도의 실천이 죄를 죽일 뿐 아니라 죄가 융성하지 못하도록 돕는 효과를 가져올까. 이게 마음의 틀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말씀은 마음의 지배적인 성향, 내면에 자리 잡은 습관 혹은 지향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 사람이 기도에서 미끄러질 때 보라.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다가 열렬함은 남아있는데 기도의 시간이 짧아집니다. 그다음에 시간이 지나면서 열렬함도 사라집니다. 기도의 시간에 형식은 남지만 시간이라는 실천의 형식까지 무너져버립니다.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안하게 됩니다. 이것이 물러나는 순서입니다. 열렬함은 있는데 시간이 짧아집니다. 시간은 있는데 열렬하지 않습니다. 그다음에 나중에 그 시간까지도 지킬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왜? 기도하기가 힘드니까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뒤로 물러가서 원점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 일반적으로 기도의 은혜가 역사하고 있을 때 간절한 기도가 쏟아져 나올 때는 시간이 없어서 기도를 못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시간이 없어서 기도하지 못한다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전체적인 사실은 아니다. 지지난주에 영적인 침체에 빠진 청년 30명을 모아놓고 한 달 동안 회복 세미나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이 얘기합니다. 자기는 기도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매일 새벽3시에 퇴근했다고 합니다. 그럼 거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거는 이해는 되지만 사실은 아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데리고 있었던 양 돌보던 청년 얘기를 했습니다. 벌써 35년 전 일인데 무역회사를 다니는 자매였고 무역회사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직원도 아니고 말단 직원이었는데 진짜 새벽에 나가서. 내가 교회에 살았기 때문에 돌아와서 퇴근길에 기도하고 자기 집에 돌아갔는데 기도하러 오는 시간이 빠르면 9시 반 늦으면 11시 반 이었습니다. 그러고 갑니다. 그래서 내가 물었습니다. 기도할 시간이 나냐. 너무 성령 충만하다. 어떻게 하냐 물어보니까 자긴 도저히 기도할 시간이 안 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니까 매일 화장실에 3번가서 15분씩 기도한다고 합니다. 어느 회사도 화장실 간걸로 뭐라 하진 않잖아. 뭐 속이 안 좋아서 갔나보다 생각하지. 들어가서 자기 순원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중보기도를 했다. 그 얘기를 했는데 얘가 엄청 감동을 받았습니다. 전철을 타고 딱 한 시간 가야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너무 많은데 전철을 붙잡고 기도하기 시작하는데 마음이 뜨거워진다 하는 것입니다. 이게 충분히 된다는 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결국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마음이 없는거구나. 전철에 매달리고서 기도하고 가니까 직장에 딱 도착하면 마음이 평정한 상태가 되어서 업무에 집중하고 또 그 다음날 갈 때 간절히 기도하고 한 시간 이상씩 기도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핑계입니다. 핑계. 인간은 하기 싫은 건 안하고 하기 좋은 건 어떻게든 합니다. 62페이지 마지막 밑에서 3번째 단락
신자의 마음의 틀이 죄에 의해 무너지고 나면 이것은 현이 풀어진 바이올린과 같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뭐래요 줄이 안 맞았는데 무슨 소리가 거기서 나겠습니까? 제 아무리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연주가라해도 현이 풀어지는 바이올린을 가지고 연주할 수 없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01:48:46과 같이 기도의 바다를 헤엄쳐 온 신자라 할지라도 기도의 세계에서 영원한 전사는 없다. 은혜 안에서 형성된 마음의 틀이 무너지고 나면 기도의 사람이어도 예전의 그 기도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하고 열렬하게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무너진 마음의 틀이 다시 회복이 된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해주셔서, 은혜를 내려주셔서 저희들이 마지막까지 이 공부를 잘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다음 주 기말고사를 위해 저희들이 잘 준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답안을 쓰고 우리 자신이 성장하게 하옵소서. 실제로 기도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