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예수님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녹취자: 이경순
히브리서는 신약의 레위기서라고 불리 울 정도로 구약의 제사의 예법에 관한 풍부한 그림들이 담겨있습니다. 그 모든 구약의 제사에 관한 그림들 가운데 절정을 이룬 것은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제사장으로 자신을 드리시는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특별히 이 히브리서가 로마로부터 커다란 핍박을 앞두고 있는 성도들에게 씌어졌다고 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고난을 받고 핍박을 앞에 둔 성도들이 위로를 얻을 영혼의 안식이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서 어떤 생애를 살았는지를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올릴 때에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자신을 죽음에서 능히 건져내실 하나님 이셨던 것입니다. 성도의 가장 커다란 의무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지상생애를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단연코 여러분들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목회를 위한 모든 힘과 위대한 능력이 목회자가 얼마나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는가에 달렸다고 말입니다. 나는 오늘 이 위대한 본문을 여러분들에게 해석하고 또 적용하기 전에 먼저 왜 그렇게 우리의 신학과 목회에 있어서 성육신하신 예수그리스도가 중요하신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구원의 역사의 절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에 대해서 신약성경은 크게 세 가지로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에 관해서 말로만 들었지만 예수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그의 모든 말과 인격 그의 모든 행동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세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되었고 창조된 모든 세계는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을 힘입어 기동하고 존재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이러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존성을 탁월하게 보여줍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구원 얻은 사람들이 한 그리스도 몸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리고 이 몸에 부어지는 영적인 모든 능력과 힘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성도들이 올리는 기도와 모든 헌신들은 하나님께 직접 올려지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하나님아버지께 올려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그리스도의 이 사람의 몸을 입고오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마치 프리즘과 같습니다. 빛깔도 모양도 없는 햇빛이 프리즘에 비치고 나면 일곱 가지 찬란한 빛깔로 분광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성품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찬란한 빛깔들로 나타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무지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이 어떤 분 이신지를 보여주시면서 동시에 인간들에게 하나님이신 그분이 참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섬기셨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순종을 배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는 모르는 것이 없으신 분이었지만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는 당신 스스로가 모르는 것이 있기를 선택하심으로서 거룩한 인성을 신성아래 감춰진 겸손함으로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당신도 배워 가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통하여 죄 가운데 있는 우리 연약한 백성들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는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당신자신이 우리를 위해 죽어 화목제물이 되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바로 이일을 위해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존 오웬 목사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영광보다 다른 것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목회에 성공할 꿈을 꾸지 말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성공할 꿈을 꾸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깊은 밤까지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깊이 묵상하며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더 많이 알기를 원하는 사모하는 마음을 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위대한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던 사도바울의 생애의 비전이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로마도 보아야 한다는 위대한 선교의 비전도 그의 비전이었지만 그것은 모두 부차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비전은 그리스도였습니다. 옥중에 갇혀서 사형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죄수의 몸으로서도 그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사모하였던 것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엣것을 향하여 푯대를 향하여 쫒아가기를 원하였던 그의 마음에 강력한 점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이것이 바로 그가 뒤엣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가야 했던 인생의 가장 중요한 비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목회라고 합니다만 영원한 것 아닙니다. 떠나면 그만입니다. 이 교회에서 목회하다가 떠나서 다른 교회에 가면 그 교회하고는 이제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일평생 삼십년 사십년씩 한 교회에서 충성했다고 할지라도 은퇴하고 떠나면 그만이고 그리고 더욱이 죽으면 영원히 헤어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다시 만날 일이 없습니다. 부부가 애지중지하고 서로 볼 부비고 살지만 그것도 살았을 때 부부지 하늘나라 가면 거기서 다시 가정을 꾸리고 부부생활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도 이 땅에 있을 때 자식이지 죽고 나면 이제 다시 천국에서 식구들끼리 만나서 다시 가정을 이루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두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고 소중한 사역이지만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는 그 하늘나라에서도 여러분들이 영원히 만날 분이 바로 그분입니다. 이제 한 몇 년이면 은퇴를 앞둔 선배목사님을 통화를 했는데 목사님 요새 뭐하고 계십니까? 성경 속에서 그리스도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제 은퇴하고 하늘나라 가까울 때가 되었는데 하늘나라 가서 내가 예수님보고 선생님은 누구세요 그러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목회의 거룩한 샘물이 목회자 자신과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는 신앙생활을 우리 목회자들이 잘해야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경은 그가 육체에 계셨을 때 사셨던 삶이 어떤 양식의 삶이었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많은 주석가들은 이 히브리서 오장 7절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일생의 기도생활을 염두에 둔 것이기는 하지만 보다 더 직접적으로는 잡하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서 올리신 그 기도를 겨냥하고 있다고 주석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그리스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졸음을 이기지 못해 퍼질러 자는 제자들과 떨어져서 홀로 겟세마네 동산에 엎드려 기도하실 때 그분의 기도가 어떤 기도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실 때 땀이 핏방울이 되었도다. 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땀을 너무 많이 흘려 뚝뚝 떨어지기 때문에 마치 그 땀이 떨어지는 피가 떨어지는 것 같다고 해석을 하는데 아닙니다. 이것은 온 힘을 다하여 자신의 체력의 진액을 쏟아 부어 기도할 때 이 땀속에 피가 섞여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의학에서 발한증이라고 합니다. 어려분은 경험 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금식을 신학교 다닐 때에는 매 방학 때마다 한 주간씩 금식을 했습니다. 금식을 일주일 한 다음에 소변을 볼라치면 항상 붉은 피가 섞여 나옵니다. 그리고 금식이 끝나고 음식을 먹으면 그 피가 사라집니다. 이런 원리에 의해서 자기가 뭔가 온힘을 쏟고 체력을 진하도록 기도하면 그 땀안에 피가 배어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셨던 그 기도가 얼마나 자기의 진액과 고혈을 짜서 하나님 앞에 바치는 아주 간절한 기도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첫날 여러분들에게 목사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목회자라고 하는 것이 이 시대에 애매한 그림이 되어버렸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영국 청교도들의 고백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했습니다. 우리 목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 뿌리고 죽어간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다 순교한 사도들의 후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은 사도행전에서 이제 사도들을 뽑는 장면이 나오고 6장에서 집사들을 선택하는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집사들을 선택하면서 사도들이 무슨 반성을 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괴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이 일을 행할 집사들을 세우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공괴라고 번역된 부분은 디아코네임 트라페자이스라는 희랍어를 번역한 겁니다. 트라페자이스라는 것은 히브리말로 식탁을 의미하는 것이고 디아코네임이라는 것은 밥을 먹을 때 옆에서 노예들이 거들어 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요즘말로 말하면 식탁 봉사가 바로 디아코네임 트라페자이스입니다. 이 몫은 사실은 노예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사도들이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는 것은 초대교회의 중요한 교회의 사명이었고 실제로 돌보지 않으면 그들은 의지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큰 예배당을 지으면서 교회를 운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자체를 유지하는 비용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십시일반으로 거두어들인 많은 연보들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교회의 일이었습니다. 그 일에 사도들이 깊이 관여하였던 것 같습니다, 결과는 항상 좋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헬라 파 과부들과 히브리파 과부들 사이에 원망이 생기고 차별대우를 받는다는 불만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이 일을 주관하는 것은 우리사도들의 일이 그들은 무엇과 무엇 하는 일에 전무하여야겠다고 다짐을 했냐면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그 일에 전무하리라고 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일을 하기 전에는 말씀을 제쳐놓고 라고 되어 있지만 뒤에 가면 기도하는 것이 먼저 나오고 그담에 말씀전하는 것이 나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본문을 보면서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참 생각을 많이 해서 그래서 목회의 본질을 찾아내었구나.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새로 발견해낸 목회의 본질이 아닙니다. 바로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는 것은 선지자의 직무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선지자의 중요한 직무는 단 두 가지이었습니다. 선지자의 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이 땅에서 맺힌 것이 하늘에서 맺힙니다. 선지자들이 기도하면 풀어집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가지고 있는 이 기도의 직무가 사실은 말씀을 전파하는 것과 동등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러한 사실들이 현저히 망가뜨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 두 가지 일을 하지 않으면 목사가 아닙니다. 단연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른 일은 잘하는데 훌륭합니다. 그러나 목사는 아닙니다. 첫 시간에도 예를 들었습니다마는 사람도 너무 훌륭하고 인심도 좋고 자기 것 많은 사람들에게 구제도록 나누어 주고 누구하고도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아주 훌륭합니다. 그런데 전쟁은 못해요 그런데 장군입니다. 동의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목회의 성공이냐 실패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선지자의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떠나는 것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괴로워합니다. 그 백성들이 모두 거룩한 성일에 모여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렇게 주님을 경배하기위해서 모인사람들이 성전을 가득 모였다면 선지자도 춤을 추겠지요. 그러나 그것 자체가 선지자들의 이상은 아닙니다. 오히려 광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전의 뜰에 모여 있으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지겹다’ 성전 뜰만 밟는 너희들이 나는 지겹다 에스겔 선지자는 누군가 나타나서 이놈의 성전 문을 닫아버렸으면 좋겠다. 왜? 이 성전은 그런 더러운 인간들이 와가서 마음에 위로를 얻고 거기에서 담대함을 갖고 또다시 죄를 짓고 악을 행하라고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성전이 아닙니다. 그것이 선지자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입만 다물고 있으면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데 그냥 한번 외치고 단칼에 목이 달려 나가는 사람들이 선지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이야기하는 토백해서 죽임을 당하고 칼로 고난을 당하고 죽고 하는 이 모든 고난들이 결국 은 선지자들이 당하는 고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 직무가 하나님의 말씀을 하늘로부터 받아서 담대하게 전파하는 것과 또 하나는 그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비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선지자의 영성은 제사장의 영성과 맞닿는 것입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그 두 가지가 목회의 본질입니다. 이 두 가지의 본질을 아주 충실하게 이행을 하면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이 모일 거라고 나는 장담을 할 수는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진리를 싫어합니다. 진리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이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서 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대중적인 것이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예수 안 믿고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해도 안 받아들였습니다. 여러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안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모두 변화되지 않고 한 구석에서 그 말씀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기를 한 몸에 얻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목회자가 아닙니다. 성도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지만 목회자는 죽기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 두 가지 날개가 꺾이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한 감명 속에서 꺾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자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 일이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중 한사람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바라보았던 메시아로서 실체로 오셔서 그 두 가지를 온 힘을 다하여 하셨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순간까지도 당신자신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의 소원을 올리셨고 마지막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시면서도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목회자는 그 예수의 심정을 물려받은 사람입니다.
지금 현재 한국이든 미국이든 70세가 넘으신 목사님들은 비록 신학이 좀 어눌하고 젊은 목회자들보가 교육을 많이 받지는 못하셨어도 그 속에 무엇인가 목회의 본질을 붙드는 정신들이 그나마 남아 있습니다. 기도도 참 많이 하셨고 그리고 지금 연세가 70세 80되신 분들은 한국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정말 신학교를 간다고 할 때 가난하고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그 결심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신학대 입학한 게 30년 좀 더 되었는데 학교가면 제일 부러운 사람들이 라면사서 먹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매일 라면을 사 먹을 수 있을까 과장이 아니라 정말이었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한권의 책을 사기위해서 일주일 동안 점심을 굶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선배들 우리보다 한10년이나 20년 앞에서 살았던 분들은 그것도 우리는 너무 호강하면서 신학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가족들에게도 핍박을 받고 따돌림을 받고 정말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 속에서 많은 기도를 배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적으로는 많은 지식이 좀 부족해서 그 목회의 본질을 붙는 정신들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젊은 목회자들은 너무 기도안합니다. 정말 기도 안합니다. 나는 오늘 여기 모인 목회자들 가운데 하루에 세 시간 이상 기도하시는 분이 얼마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세 시간은 그만두고 두 시간이라도 온 마음으로 기도하시는 분이 얼마나 됩니까? 더욱이 교회가 커지고 나면 이제 기도는 부목사들이 하는 것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결국 목회자들의 목회에 충실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는 하늘나라의 그리고 그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없으면 목회에서 감당해야할 많은 어려움들을 인내하고 감당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목사님들이 모여서 자기교회 교인들이 자기 괴롭힌다고 불평하고 그리고 이런저런 교회의 흉을 봅니다. 그것 절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너무너무 슬퍼하십니다. 친구들 목사님 모여서 자기교회 험담하고 자기 장로들 헐뜯고 말 안 듣는 교인들 비난하는 교회치고 나는 건강한 교회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 얘기를 다른 사람을 만나서 자꾸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라면 자기 안에서 응어리가 안 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목회라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짐승 같은 인간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변화되어 양떼를 만들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명인데 자기 안에서 응어리져서 풀어지지도 않는 그 일들을10년 15년 전에 일어난 일을 아직까지도 응어리를 못 풀고 부여잡고 앉아있으면 그 목회자 안에 있는 성령께서 자유롭게 일하실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목회에 있어서 개 줄입니다. 개 줄이란 강아지 목에다 줄을 걸어놓으면 강아지가 가까이 있으니까 자기 몸에 개줄 인줄 모릅니다. 그러다가 저기서 사람이 지나가면 짖으려고 자기 목에 걸려있는지도 모르고 확 뛰어나갑니다. 그러면 줄이 모가지를 잡아채는 것입니다. 깨갱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실망은 기대에서 나오고 모든 낙심은 너무 많은 희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무슨 그렇게 평신도들한테 큰 기대를 거십니까? 그냥 교회 나와 주는 것만도 고맙지 뭔 그렇게 큰 기대를 겁니까? 원래 목회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성도들이 죄 가운데 구르다 살다온 사람들입니다.
염전을 하는 어떤 장로님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는데 평생 잊히지 않습니다. 김장철에 굵은소금을 수돗물 받아서 풀면 잘 안 녹습니다. 설탕은 뜨거운 물에는 잘 녹지만 소금은 뜨거운 물에 집어넣어도 잘 안 녹습니다. 염전하는 장로님 이야기가 일주일정도 말리면 햇빛이 좋을 때는 소금이 되어 나오는데 그것을 가마니에 잔뜩 넣어서 배를 가까이 대고 싣는데 그러다가 잘못해서 소금가마니를 떨어뜨립니다. 풍덩 하고 바다에 빠지면 너무 아까워서 건져냈는데 불과 이삼 분만에 건져내었는데 소금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성도라고 말하고 빛이라고 말하지만 원래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건져온 사람들입니다. 물론 목회자를 포함해서 우리 성도라고 하는 인간들이 원래는 세상에서 건져온 종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며 찬란한 햇빛아래 있을 때에는 보송보송한 소금이지만 한번 세상 물에 풍덩 들어가면 그게 원래 본 고장이기 때문에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실망을 하고 괴로워하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맹세코 나는 그런 일이 없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전20년 열린 교회를 하면서 목회자들을 만나서 교인들을 흉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뭐 교인들이 다른 교회에 비해서 아주 훌륭한 것 아니지만 그들 볼 때에는 훌륭하다고 그래야지 내가 그 교회에서 목회를 하니까 아유 참 훌륭하십니다! 하지만 마찬가지입니다. 해아래 무슨 새로운 죄인이 어디 있습니까? 다 그 죄인입니다. 기대를 안 하는 것은 너무 좋은 것입니다. ‘목사님 누구 시험에 들었데요. 그러면 ‘어 그래 올 것이 왔구나. 그동안 안든 것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뭘 그렇게 기대를 겁니까? 그러면서 가슴에 품고 그러면 안 됩니다. 그게 무엇 때문이냐면 설사를 안 해서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무엇을 먹다가 체하거나 아니면 속에서 안 좋은 것 먹어서 장에서 생선회 같은 것 잘못 먹으면 꼬입니다. 그러면 우리 몸에서 온몸에 명령을 내려서 수분 동원력을 내립니다. 온 몸에 있는 물들이여 모두 창자로 모여라 창자로 모여서 확 하고 쏟아냅니다. 똑같이 인간이니까 목회자도 인간인데 마음상한적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느 교회에서는 교인이 주보를 들고 와서 목사님 이게 작년12월 마지막 주 주보이고 이게 금년 마지막 주보입니다. 작년에 비해서 금년에 한명이 늘었습니다. 그 많은 목회비를 가지고 뭘 하셨습니까? 회사에서 이렇게 일하시면 쫓겨납니다. 그러더랍니다. 그런 이야기 듣고 맘 상하지 않는 목사가 누가 있겠습니까? 맘 상하는 일이야 언제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상해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설사를 해야 합니다. 그것을 한 번에 확 쏟아서 쏟아 내버려야 합니다. 왜? 목회자인 내가 지 보고 목회하나 ?지가 목회하라고 해서 내가 지금 목회하는 거냐. 이겁니다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일인데 그렇게 말하는 저는 교인이 줄어들고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한 번도 기도안한 인간입니다. 한번이라도 기도해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던 인간이라면 목회자한테 오하서 주보 두 장 들 고와서 말도 안 되는 개념 없는 짓 안합니다. 어차피 그는 양떼가 아닙니다. 염소입니다. 기도해줘야 합니다. 뭘 그것을 싸웁니까. 이렇게 얘기하면 심할지 모르지만 여러분 지나가는데 어맨 사람 발로차서 넘어뜨리면 너 웨 나를 이렇게 괴롭게 하냐고 싸우겠지만 개가 물었으면 개하고 싸우겠어요? 너 왜 나 무시 하냐고 저사람 안 물고 날 왜 물었느냐고 그러면서 멱살을 잡겠어요. 따귀를 때리겠습니까? 개를 상대로 수화를 할 겁니까? 좀 통 큰 마음을 가지세요. 장사를 해도 그렇게 하면 가게가 안 됩니다. 통 큰 마음을 가지세요.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는 목회자들은 사랑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그 고통과 많은 것들을 녹여 내는 것입니다
(찬 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교인은 목회자들을 향해 이를 가는 인간은 있어도 목회자는 교인을 향해서 그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됩니다. 그러면 목회에 복이 없습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얼마큼 무한히 언제까지 무제한으로 그러다 죽는 게 목회입니다. 참 기도가 신비한 것이 그렇게 목회자를 괴롭히고 헛소리 하고 다니고 그러면 심경이 괴롭잖아요. 그래서 한번 이라도 만나서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실제로 제가 전도사일 때 목회하던 근처의 교회에서는 교회도 교인 열댓 명 모이는 교회인데 목사는 그래도 올바르게 한다고 교회 개척하자마자 재정집사를 세웠습니다. 이 개념 없는 재정집사가 자기가 재정집사를 맡고 보니까 교회재정이 자기 것인 줄 알고 목사님이 여기다 지출하려고 하면 그것은 좀 곤란하겠는데요 하더랍니다. 교인 열다섯 명 모이는 곳입니다. 목사님 내 허락 없이는 이렇게 돈쓰시면 큰일 납니다. 하도 화가 나는 목사님이 참다가 한주먹을 날렸는데 옥수수가 세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답니다. 목회는 그렇게 하려면 신학교에서 태권도를 가르쳐서 보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 앞에 가장 약한 자가 되어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마음이 녹아내리면서 그러면서 주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옛날에 이준표 목사님 돌아가셨는데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 얘기인데 시골교회인데 장로님이 딱 한분이었는데 그렇게 사사건건 반대하고 자기를 괴롭히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저 장로 좀 정말 바꿔주시고 변화시켜주십시오 하고 눈물로 매일 기도하셨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응답이 오더랍니다. 준표야 걔는 나도 못 바꿨다 네가 바꿔라 하시더랍니다. 기도 많이 하면 정말 나쁜 교인들이 바뀝니다. 그런데 일평생 기도해도 안 바뀌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기도하면서도 바꾸기를 믿음을 가지는 것이 좋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목회의 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게 웃으면서 할 대목이 아닌데 지금 우리들이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울면서 해야 하는데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 그리하지 아니 하실지라도 내가 목회를 그만 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저도 이렇게 사람이 순해보여도 성격이 보통이 아닙니다. 왜 웃어요? 오늘 마지막 날이라고 막 웃는 것입니까. 제가 이렇게 양처럼 양순해 보이고 할 말도 못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저도 한번 성깔이 나면 무서운 사람입니다. 저도 나름대로 뭐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사건을 경험하면서부터 목회에 있어서 사람 핑계 안댑니다. 모든 사람이 들어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다니면서 교회를 힘들게 하던 개념 없는 인간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래도 참는 것 꽤 하는 사람인데 그때는 정말 참을 수가 없어서 불러서 혼을 내줄까 하고 내가 한번 혼을 내면 정말 다리가 덜덜 떨리도록 너 혼낼 수 있는데 정말 한번 혼을 낼까 그러다가 참아라. 주님도 참으셨는데 아주 기분이 나쁘고 못된인간 이라는 게 확신이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절히 기도하니까 그렇게 가엾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괴로워서 울었는데 나중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그 인간이 너무 가엾어졌습니다. 그래서 열린 교회에서 은혜 받고 신앙 생활하다가 어디를 가서 정착을 하겠습니까? 여기저기 빙빙 돌다가 다시 연락이 왔어요. 목사님 한번 뵈러 가면 안 될까요 ?그래서 와라 다시 와서 신앙생활 잘 해 라. 그 이후로 내 마음속에서 모든 것을 지워버렸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 이야기는 안합니다. 그런 힘이 기도 속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는 안 나옵니다.
(찬양)
마지막 피한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가끔 만나면 동료들이 자기 목회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 은혜롭고 너무 훌륭하고 그렇답니다. 좀 기다려 보라고 했습니다. 나 아는 목사님이 전화가 왔습니다. 형님은 외부에서 장로로 왔을 때 그 교회의 장로로 다시 삼으려면 얼마나 기다릴 필요가 필요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쉽게 말할 수 없지만 나는 5년이 최하 기본이다 하니까 근데 형 우리교회에 다른 교회에서 온지 2년이 되신 분이 있는데 너무 훌륭해 신앙이 너무 좋고 교회를 아주 뜨겁게 사랑하는데 이번에 장로로 세우고 싶은데 안될까요? 그래서 제가 하지마라고 했습니다.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아 그런데 이분은 틀려요 그러더니 6개월 후에 전화가 왔습니다. 형님 왜 그때 충고해주어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왜? 정확하게 그렇게 자기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난지 석 달이 지나서 나서 뒤집히기 시작하는데 온통 교회를 휘젓고 다닌답니다. 그 때 장로 세우려고 했는데 말려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합니다. 다음에 전화하면 또 말려줄게 했습니다.
깊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목사님들께 오늘 강의 마지막 날이니까 한 가지만 가르쳐 주겠습니다. 아무도 미운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내가 이렇게 까지 여러분들을 괴롭히고 힘들게하는 사람을 뜨겁게 사랑을 하십시오. 나도 그렇게 못하지만 그러나 미워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도 때문에 성도를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목회는 좋은 목회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20년을 특별한 이유 없이 성도들과 마주앉아서 밥 먹은 적 없습니다. 그렇다고 목회에 특별히 문제가 안았습니다. 여성도 들이 와서 미주알 고주알하고 와서 뭐 좀 상담하자고 하면 설교 꺼내줍니다. 가정에 대해서 설교한 것 꺼내줍니다. 열 개나 열다섯 개 테이프주고 이거 가서 다 듣고 그래도 질문 있으면 와라 그러면 대부분 안 옵니다. 뭘 앉아서 그걸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살면 됩니다. 그런데 미워하는 마음 품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도와 목사와의 관계 그런 것 없고 성도와 성도사이 관계 그런 것 없습니다. 모두 그리스도 때문에 사랑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를 향한 사랑자체가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성도를 사랑하게 된 것이니까 성도가 실망시켜도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주님이 사랑하라고 그러셨는데 나는 목회자인 여러분들을 흉보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대게 식사하고 얘기하다보면 자기 괴로움을 토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이런 괴로움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마세요 그것은 부부사이에도 하는 게 별로 안 좋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이 그런 것을 안하면 배출을 못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배출하는 방법은 하나님 앞에서 하세요. 차라리 저 인간은 정말 나쁜 인간입니다. 주님 한번 생각해보세요. 주님도 담임목사였으면 벌서 떠났을 것입니다. 우리교회 담임목사는 벌써 떠났을 것입니다. 차라리 그렇게 기도를 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마음을 바꿔주십니다. 성도는 종종 목회자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 청소년 시절에 엄마는 나만 미워해 그러고 가출도 애들이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믿고 너무 담대해지면 안 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이 새벽기도는 오늘날 기도는 사역의 성공의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기도를 접근합니다. 그래서 기도해서 성공한 사례 그거 아닙니다. 그런 측면이 물론 있을 수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목회자 자신이 기도하는 일차적인 이유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예수의 영적생명에 충만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짐을 지고 나와서 주님께 모두 쏟아내는 것입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가운데 계신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깊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모든 무거운 짐들을 벗겨주시고 그래서 우리의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그런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이런 위로를 못 받으니까 교인들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 하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꾸 위로를 구하면서 목회자가 비굴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의 몇몇 사람들을 싸고돌고 자기편을 만들고 그러는 것 아닙니까 목회자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형제들이 지들끼리 모여서 편먹고 형을 골릴 때도 있고 형들이 편먹고 동생을 왕따 시킬 때도 있지만 아버지는 동생편이나 형 편들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외로워도 중립에 서서 그래서 진리의 편에선 사람들을 데리고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진리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오래참고 기다리면 하나님 앞에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서도 강의를 하면 얼마나 기도해야하는지 묻는데 그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부부가 매일 같이 살아도 등 돌리는 부부가 있고 자주 떨어져 살아도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기도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고 사역이 뭐가 잘 안될 때에 기도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유아기적인 신앙입니다. 자기가 더 잘 압니다. 지금 내가 메말라있다 목회사역을 감당하기에는 고갈되어 있다 느끼지 않습니까? 그 고갈이 일이 많아서 고갈된다고 하는데 아닙니다. 일은 우리를 성령 충만하게 만들 수도 없고 고갈시킬 수도 없습니다. 고갈 되는 것은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고갈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충만한 기도생활이 없기 때문에 고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너무 많이 하다보면 번 아웃됩니다. 그럼 쉬면 충전된다고 생각하는데 절대 아닙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너무 일을 열심히 하셔서 휴가를 드렸는데 휴가 중에 사건이 터지고 큰 어려움을 당합니다. 내가 그래서 설교할 때는 영력이 조금 필요한데 휴가 갈 때는 두 배의 영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유이니까 설교할 때야 자기가 설교하지 뭐하겠습니까. 휴가 가서 아무것도 안하면자기를 지키려면 더 많은 영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휴가 는 고갈 될 때 가지 말고 충만할 때 휴가를 가세요. 그러니까 일이 우리를 고갈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예수님은 진작 고갈되었어야 하고 사도들은 안식년도 안 갔는데 진작 고갈되었어야 합니다. 일이 고갈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경우를 돌아보면 한가 한 때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도 조금 일이 적을 때인데도 영적으로 아주 가라앉았던 때가 있고 정말로 일이 많아서 눈코 뜰 새가 없었고 건강도 안 좋아져서 화장실에 앉으면 피를 한 컵씩 쏟던 때도 있었는데 그런데도 제 지상의 생애에서 이 제 것 살아온 날 중에 가장 성령 충만하게 살아왔습니다.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들이 기도하셔야 합니다. 많이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깊이 하셔야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매일 영적인 체중계에 달아보면서 자기가 일상적인 교회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에 만족을 느끼면 안 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게 아니라 그것을 마음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그 일을 감당하고 있는지 영적인 그런 힘들이 에너지가 자기에게 남아 있는가 생각하면서 그것들이 부족하다고 생각이 되면 강대에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강대에서 흘린 뜨거운 눈물은 교회 바닥 속으로 스며듭니다. 쓴 뿌리는 그 쓴 뿌리 노릇하는 사람 욕하고 목회자가 싸우고 소송하고 그러지 않아도 그 기도의 눈물이 들어가면 쓴 뿌리가 말라죽습니다. 그리고 알곡과 같은 성도들에게는 그게 흘러들어가서 성도들이 열매 맺습니다. 목회자가 일을 할 때에는 일하는 거기에만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도할 때는 아무데나 다 목회자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일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마음을 쏟으면서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저는 목회하다가 종종 뭐 특별히 잘못된 것은 없는 것 같은데 잘 되는 것도 별로 없는 때 같은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특별 기도를 합니다. 금식기도를 하는 게 좋은 방법이지만 그것도 나이가 들면 그것도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금식기도를 할 수도 있고 제가한 방법은 오늘부터 두 달 동안 열두시 까지 기도한다. 자기와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새벽기도 나와서 안 들어갑니다.12시까지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6시부터 12시까지면 6시간을 하는 겁니다. 6시간 다 기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거기앉아서 성경을 읽다 기도하다 성경을 읽다 기도 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12시 이전 까지는 일어나지 않기로 하는 것입니다. 약속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정말 그렇게 심방을 다녀도 안 되던 성도들 가정의 일이 전화한번 안했는데 해결이 됩니다. 그것이 영적인 목회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신지 우리가 누군가의 마음에 괴롭힘을 당할 때에는 그 괴로움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위로를 주십니다. 부정적인 모든 것들은 긍정적인 것이 나타날 수 토대가 됩니다. 어두움이 있기 때문에 빛이 아름다움을 알 수 있듯이 그런 것입니다. 괴롭고 꼬인 일이 있어도 그렇게 몇 달을 기도하고 나면 하나님이 확 열어주십니다. 마음의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을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보장할 수 있습니다. 약속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교회에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이 있더라도 석 달만 열두시 까지 기도하기로 다짐하고 매일 여러분들의 강대상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교회에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겁니다. 그 일이 무엇인지는 내가 말할 수 없지만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러한 기도의 의무자체가 목회자에게 즐거운 의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깊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주님을 날마다 닮아가고 기도하는 겁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하나님과 영혼들을 섬기기 위해서 땀을 흘리신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생애는 눈물의 생애 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구속사역을 이루는 길에 나타난 거룩하신 하나님아버지 앞에서 울었습니다.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한 번도 안 나오는데 우셨다는 기록은 성경에 세 번이나 나옵니다. 그중에 두 번은 에클라우센이라고 하는 희랍어 동사가 사용되는데 이것은 영어로 cry입니다. 눈물이 흘리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서 엉엉 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괴로우셨으면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으면 하나님이신 그분이 통곡하면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까? 당신은 지극한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셨으나 그들은 지독한 미움으로 예수께 대적했고 마지막에는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과 죄인들을 이끌어 하나님께 구원받고자 하는 당신의 사랑의 성품사이에서 고뇌하며 그 괴로움을 심한 통곡과 눈물로 쏟아내었습니다.
우리목회자들끼리 이야기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성도들을 위해서 구원받지 못한 영혼 회심한 신자가 서너 명에 한명밖에 안 되는 이교회의 겸손하게 하는 통계를 손에 들고 그러면서도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고 하나님 앞에 경거망동하는 막된 교인들을 가슴에 품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 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용서해주시지 않으려면 생명책에 기록된 제 이름을 지워주십시오 사랑하는 이 교인들 중 몇이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저주를 받아 예수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입니다. 라고 자기 교인들을 위해서 뜨거운 눈물로 기도한지가 언제인지 그리고 기도하다 일어나니까 기도한 그 자리가 흥건하게 눈물이 고여 있는지가 언제였는지 우리 목회자끼리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고백을 해 봅시다 만약에 우리가 이십년의 목회의 길을 혹은 십년의 목회의 길을 교인들 원망하고 불평하는 대신 그렇게 뜨거운 피눈물을 쏟으면서 그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살아왔다면 우리의 교회는 얼마나 아름다운 하늘나라로 변해있을까요? 사도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예수죽인 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면 예수의 생명도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려함이라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사망은 우리가운데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가운데 역사하느니라. 그래서 성도는 살기위해 서 태어났다면 목회자는 죽기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이 세상의 교인들이 나를 존경해 주지 않아도 나 비록 학문이 부족하여 바울과 같이 설교할 수는 없어도 그래 나는 누구처럼 영역이 충만해서 한번 기도하면 죽어가는 환자 일으키는 능력이 없어도 내가 만약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심장을 찢으며 교인들 이름 하나하나에 내 심장에 피를 바르며 그렇게 목회를 한다면 사람은 그것을 몰라줄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기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한 이 년 전인가 정말 7년 만에 교회에서 두주 휴가를 받아서 유럽을 다녀왔습니다. 종교개혁 여행을 했는데 솔직히 마르틴 루터의 유적지를 돌아보면서는 눈물이 안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워낙 혁명가적인 인물이고 나하고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이였습니다. 그런데 칼빈이 목회하던 제네바에 삐에로 예배당에 가서는 거기에 앉자마자 눈물이 한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칼빈을 제가 루터보다 좋아해서가 아니라 루터는 나하고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사람이지만 칼빈의 그 심정은 깊이 이해가 갔습니다. 31개의 질병을 몸에 짊어지고 어느 심리학자가 칼빈을 테스트 했는데 극도의 내성적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만 오천 명이 넘는 교인들을 목회하면서 그 수만은 이단과 싸우고 가톨릭과 싸우고 오시안과 같은 이단의 대적과 싸우면서 얼마나 교회가 험악했는지 볼 세키라는 인간이 있었는데 칼빈을 험담하고 다니는데 칼빈은 여자라면 껄떡 거리라는 미치광이다 여자만 먹은 게 아니라 남자들도 숫하게 먹은 색광이다 하며 온 천하에 편지를 보내고 돌아다닙니다. 그러니 그 내성적인 칼빈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런데 그걸 그 예배당에서 그 가톨릭에서 만들어 놓은 예배당을 하나도 안고치고 거기에서 그대로 목회를 합니다. 그러면서 날마다 눈물의 기도로 우리들이 아는 칼빈주의 신학을 세운 것입니다. 기독교 각료에 특별히 그리스도와 연합에 부분 같은 것은 기도 안한 사람들은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섭리의 부분 같은 것은 그래서 그 삐에를 예배당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기의 피를 모두 쏟아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속죄의 피를 받으시기 전에 먼저 눈물의 기도를 받으신 후에야 속죄의 피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분도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사심 없이 영혼들을 위해 오셨건만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미워했습니다. 그분이 일체의 순수함으로 영혼들을 사랑하셨건만 그렇게 미움을 받으셨다면 우리같이 인격적으로 모나고 예수님처럼 완전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당하는 것 배신을 당하는 것 이것은 너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것을 자꾸 있을 수 없는 일이 자기 교회에서만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장시간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합니다. 특히 여기 젊은 목회자들이 많이 오셨는데 그 기도의 기준을 연세 드신 목사님께 맞추지 말고 지금 나이 서른에다 맞추십시오. 나이가 들게 되면 우리가 젊은 시절에 넣지 않던 복병들이 찾아옵니다. 그것은 건강입니다. 주위에 기도하시다가 돌아가신 분들이 여러분 계십니다. 이천수 목사님 아드님도 금식기도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까 나이 들어서는 그렇게 기도하는 게 위험합니다. 더군다나 그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이 위험합니다. 젊었을 때에는 체력이 있으니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맨 처음 열린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마음속으로 나 자신과 약속한 것이 하루에 세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부교역자들 뽑을 때 다짐을 했습니다. 나처럼 세 시간 기도할 수 있겠느냐? 저 솔직히 말하면 요즘에 세 시간 기도 못합니다. 왜 ?사역이 그것을 허락을 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개척할 때 지금 사역의 크기를 비교해 보면 열배쯤 늘어났습니다. 다 집어치우고 기도만 하면 하면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많이 기도 못합니다. 그러나 하려고 항상 애를 씁니다. 그러면 젊은 목사님께 말씀 드리지만 나는 세 시간에 출발했기 때문에 그래도 이십년 지나도 이만큼 하는데 여러분들이 만약에 30분에 출발했으면 이십년 저만큼 목회한 다음에는 거의 기도 안 할 겁니다. 확신합니다. 쉴 것 다 쉬고 무슨 목회를 합니까? 그게 노는 길이지 십자가의 길이겠습니까? 가끔 부교역자들이 새벽기도 빠지면 내가 이야기 합니다. 자네가 새벽기도가 빠지는 것은 이해 가는데 같이 자는 자네아내는 내가 이해가 안 된다 남편을 어떻게 그렇게 섬기냐고 했습니다.
각오를 새롭게 하셔야 합니다. 더욱이 이민 교회 중에 새벽기도 없는 교회도 많습니다. 언제 기도할까 정말 궁금합니다. 자기 교회가 기도해야 할 가장 좋은 장소 입니다. 저는 기도하기위해서 기도원 가기도 하지만 정말 기도하고 싶을 때는 교회가 제일 좋습니다. 설교 준비할 때는 기도원을 가기도 합니다. 엎드려서 기도합니다. 여러분 남보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교인들이 아침에 전화를 걸었는데 8시 걸었더니 사모님이 기도하러 올라가셔서 강대에서 아직 안내려오셨어요, 10시에 전화 걸었는데 아직도 안내려오셨어요 하며 6개월만 그런 전화를 통화하면 교인들이 생각이 바뀝니다. 아 우리도 기도해야겠다. 기도를 안 하는 교인들이 교회가 모든 일들이 잘 풀릴 때에는 재수가 좋다고 말하고 기도 많이 할 때는 하나님이 도와주셨다고 합니다. 기도하셔야 됩니다. 간절히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더 많은 메시지들이 이 본문 속에 있고 저의 설교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쯤에서 마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목회자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꿀같이 달콤한 길 걸어가라고 이길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생각하며 결어가라고 이길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물어물하면서 이 수련회 마치지 말고 오늘 기도를 할 테니까 오늘 이 기도시간에 자신과 약속하세요. 하나님과 약속 못하더라도 자신과 약속하십시오! 하나님 내가 기도안한적은 없지만 그러나 오늘 말씀 듣고 보니 정말 예수님처럼 기도한 적은 드물었습니다. 제가 오늘 나 자신과 이 수련회가 끝나기 전에 약속합니다. 제가 이렇게 변화된 기도로 헌신하겠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성도를 향한 미움과 원망을 녹여서 일체의 뜨거운 사랑으로 내가 이 목양의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죽으면 죽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