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와 기도
녹취자 : 허 혜숙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양식을 주셔서 그 양식대로 성전을 짓고, 그 성막을 짓고 성막의 규례를 따라서 제사를 드리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그 성막을 관리해야 할 것인가를 지시받고 있는 장면입니다.
여기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켜기 위해 내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켤 지며 아론은 회막 안 증거궤 장 밖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것이 대대로 지킬 너희의 규례니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들이 광야 생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언제나 뵈올 수 있게 한 특별한 조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이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만약에 하나님이 지상에 기초를 세우고 지은 성전에서 우리를 만나주셨다고 한다면 아마 그들은 건축을 하면서 광야생활을 하는 모순을 겪어야 되었을 것입니다. 전혀 무리가 없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동식 성전을 짓도록 명령을 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재료들을 가지고 성막을 지었지만 멀리 바깥에서 보면 그 성막은 그렇게 아름다운 성막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12평의 성소, 6평의 지송소를 덮고 있는 열여덟 평으로 된 그 천막은 지붕이 물 돼지의 가죽으로 이루어진 지붕이었습니다. 비바람과 많은 햇빛을 받으면서 색이 바래고 멀리서 보면 거무튀튀한 색깔의 그저 그런 천막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 들어 가 보면 아주 화려했습니다. 금과 은, 그리고 청색 홍색 자색 실로 짠 아름다운 앙장들이 있었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되는 각종 그릇들이 아름다운 그릇들이었습니다. 우리의 목회 생활도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밖에서 볼 때에 우리의 목회가 비록 화려해 보이는 것이 없고 사람들이 괄목할만하게 주목해 줄만한 것이 없어도 우리들이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목회를 하면 그 안에는 그 속에 들어와 본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는 아주 아름다운 그런 행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자기만족에 빠진 그런 종류의 행복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이 겉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는 목회 내면의 행복인 것입니다.
오늘 날 문제는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겉으로는 거무튀튀하고 허연 광목이 에워싸고 있는 그런 초라한 성소였지만 속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성전 내부의 광경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목회의 정신이고 목회의 원리 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오히려 정 반대로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화려한 텐트를 치고 온갖 물감을 들인 예쁜 천을 교회 주위에, 목회 주위에 둘러서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끄는 것이 목회의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줄 알고 한 번 들어가 봤더니 속에는 정말 거무튀튀한 물 돼지가죽 이외에 아름다운 기명도 없고, 아름다운 등잔불도 없고, 또 아름다운 그 아무것도 없는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그런 내면의 세계를 우리들은 보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부터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목회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원래 이 복음사역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도에 돌아오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위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 돌아오는 가장 훌륭한 길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라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만난 당신의 종들에게 이 복음사역의 소명을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우리가 언제부터 목회의 겉멋이 들어서 외적인 성장에만 목을 매고 우리의 목회의 진정한 뿌리는 잘린 채 헛되고 세상에 속한 것들을 추구하는 목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되었을까? 이것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일어난 일일까? 우리는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간단한 것입니다. 밖에 있는 것들이 좋기 때문에 외형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인 참된 기쁨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외향적인 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만족을 주려고 하는 시도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직장을 약 8년 정도 다녔습니다. 물론 회심한 이후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직장에 다니던 한 여성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다. 연세가 좀 있으신 아줌마였는데 모두 모여서 예수 믿고 난 이후에 자신들에게 일어난 변화들에 대해 간증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들은 여러 가지 감동적인 말로 이야기를 했는데 이 아주머니는 아주 간단하게 정리를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주머니에 만원(그 당시에 만원은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약 30만 원 정도입니다.)이 있어도 늘 가슴이 허전하고 불안했는데 요새는 버스표 한 장만 있어도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가 맨 처음에 하나님 앞에 복음사역자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그 때 우리의 마음에 가득 채웠던 것은 성공에 대한 열망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한을 우리가 목회를 하면서 풀어보자 해서 우리들이 목회의 길에 들어 선 것이 아닙니다. 직장생활에서 올라가 보지 못한 높은 지위에 목사가 되어서 한 번 올라가 보자 라고해서 이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맨 처음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고백 했을 때에는 그런 것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이 벌레 같은 인간을 구원해 주신 십자가의 사랑,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줄만 알았는데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받고 있었고 그래서 그 주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내 마음을 가득 채운 유혈과 행복, 눈을 떠보니까 이 좋은 구원의 길이 있는데도 그것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핍절한 영혼들이 수없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너무 불쌍해서 그리스도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그 마음이 너무나 뜨거워서 이제는 도저히 이 세상의 직업과 복음을 전하는 일, 이 두 가지를 함께 병행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에 깊은 탄식과 눌림이 있었기에 우리는 여러 가지 인생의 길을 버리고 복음사역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맨 처음 우리를 불러주셨을 때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세상 사랑을 버리려고 이를 악물고 몸부림 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명예와 자랑들을 포기하려고 피나게 몸부림을 쳐서 그 일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노력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다만 예수를 깨달았습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러면 우리만 그랬겠습니까?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뛰지 못하는 장애인에게 100m를 13초에 주파하라고 계속 소리를 지르고 주먹을 휘두르는 것은 잔인한 일입니다. 먼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리스도예수의 존귀하심, 그 분의 은혜 안에 사는 탁월한 행복, 그것이 무엇인지를 성도들에게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을 버리라고 그렇게 외치지 않아도 버립니다. 목사가 하나님 이외의 다른 곳에서 기쁨을 얻기 시작하면 그 영혼은 병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이 세상 사람들이 훔쳐 갈 기쁨도 아니고 그런 기쁨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 세상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낼 그런 종류의 기쁨도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성막의 내부에 찬란하고 아름다운 광경과 같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교회도 이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성도들이 멀리서 바라볼 때에는 그냥 교인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교회인 줄 알았는데 쑤욱 들어가서 말씀을 듣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섬기면서 보니까 밖에서 보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교회의 내면의 세계가 아름다워요. 그것을 보면서 ‘아,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니 정말 우리는 행복 하구나’ 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것, 그것이 목회의 본질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목회를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게 목회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오늘 마지막으로 그 대답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주 중요한 명령을 하십니다. 그것이 한 가지 사실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성막에서 켜는 등불에 관한 지시사항이었습니다. 등불을 밝혀야지만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었습니다. 이 등불을 밝히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감람유를 가져오라고 해라 그리고 그것을 모두 모아서 성소에, 성막에 등잔을 밝히는 기름으로 사용하라’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름을 가지고 와서 불을 붙이면 햇빛하나 들어올 수 없도록 물 돼지가죽에 의해서 철저히 차단 된, 그래서 언제나 캄캄할 수밖에 없는 그 성막에 밝고 환한 빛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이런 생각 하지 않습니까? 아니 하나님은 왜 그렇게 아이디어가 궁핍하실까? 아니 그것을 물 돼지가죽으로 뒤집어 씌워놓지 말고 구멍을 뚫어놓으시든지 그 당시에는 물론 없었지만 비닐로 씌워서 햇빛이 훤히 들어오게 하면 애써서 등잔을 밝힐 필요가 없는데 왜 들어오는 햇빛은 철저하게 차단해 버리시고 대낮에도 24시간 등불을 켜도록 그렇게 명령을 내리셨을까? 여기에는 심오한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 빛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진리입니다. 이 ‘빛’ 히브리어로 ‘오르’라고 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다른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에도 빛이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빛도 많이 있고 텔레비전만 틀고 신문만 열어 보고 잡지만 열어 보아도 빛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정말 필요한 것은 이 세상에 일리가 있는 그 빛들이 교회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의 맑은 빛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세상에서 세상의 빛을 쪼이며 이 생각 저 생각 잡다하게 그렇게 정보를 얻으며 살던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비로소 그 빛들 중에 어느 것들이 거짓된 빛인지 진리의 말씀을 들어 깨닫고 그 빛이 영혼을 찬란하게 비추어 그 영혼의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는 주일을 경험하면서 몸은 세상에 살지만 마음은 진리인 하나님을 앙망하며 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교회에서 이 등불을 사용하기를 거절하고 상식의 빛으로, 세상의 햇빛으로, 교회를 밝히려고 한다면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받을 심판은 중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목회를 하기 전까지는 내가 오류에 빠지면 나 하나의 영혼이 망가지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영혼이 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만약에 참 빛과 거짓된 빛을 구별하지 못하고 진리를 가르쳐야 할 교회에서 상식을 설교하고 복음을 외쳐야 할 예배당에서 이 세상의 일리를 설교하고 있다면 그는 현대판 거짓 설교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외치기 전에 자신이 구도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무엇인가를 안타깝게 찾고 그 진리를 알기 위해서 갈망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채 이 세상의 황제처럼 영광을 받고 백 년 동안 이 세상에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진리의 빛을 받고 단 하루를 노예처럼 살다가 거지처럼 죽어도 그것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구도자가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구도자일 뿐만 아니라 도열의 삶을 사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도하는 그 기쁨, 그 구도의 기쁨이 있는, 말하자면 도열의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설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찬란한 진리의 불이 예배당에 가득히 비취게 되기를 하나님께서 너무나 간절히 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진리로 나오는 것을 언제나 기뻐하셨지만, 특별히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사람들은 말씀을 맡은 종들이 그 말씀을 탐구하고 그 말씀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가장 기뻐하시고 많은 복을 그들에게 주셔서 자신이 어두움 가운데서 빛으로 돌아오게 하셨고 또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오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의 목회에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목회의 원리를 뛰어넘으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정말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갈망하고 찾는 사람들입니까? 최근에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거나 혹은 성경을 묵상하면서 말할 수 없는 기쁨 속에 마음이 뜨거워져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경험이 우리의 지성 속에서 마르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에 그것이 마르지 않고 있다면 교회는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교회 일 것입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병들어 망하는 나라 한 복판에는 부패한 도시가 있었고, 부패한 도시 한 복판에는 잠자고 있는 교회가 있었고, 잠자고 있는 교회 한 복판에는 영적으로 병는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칼 라일이라고 하는 영국의 사상가는 ‘한 시대의 교회의 설교자는 다음 세대의 뱃머리이다’.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즉 한 시대의 교회당에서 울려 퍼지는 설교를 들으면 다음 세대의 이 역사라고 하는 배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 번 오늘날 우리의 관심사를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정말 우리가 이 진리를 탐구하고 이 진리를 깨닫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 빛을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 안에 찬란하게 가득 채우도록 이것이 바로 목회의 이념이 되고 있는 지 물어보고 있는 것입니다. 저더러 누가 목회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탄광에 석탄을 캐러 나가는 사람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캐기 위해서 모자를 쓰고 곡괭이를 들고 들통을 쓰고 내려가는 광부 말입니다.
저는 17년 전에 지하실에서 일곱 명의 성도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한 이후로 너무 힘들고 바빴던 몇 년을 제외해 놓고는 끊임없이 공부를 하려고 애를 써 왔습니다. 그리고 목회에 꼭 필요해서 마음을 쏟아야 하는 시간, 명백하게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임무를 수행하는 시간, 기도하는 시간 외에 나머지 시간을 제일 먼저 바치는 시간은 공부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도 열심히 했더니 건강이 안 좋아졌습니다. 그랬더니 저의 집 사람이 하루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 제발 공부 좀 그만 하세요. 몸이 상하잖아요. 당신 여태까지 공부한 것만 풀어놓아서 설교를 해도 열린 교회 은퇴할 때까지는 먹고 살텐데 누가 그렇게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렇게 온 몸을 다해서 건강을 소비하면서까지 공부를 하느냐?’고 하는 말이 공부하라는 애들은 안 하고 공부를 하지 말라는 아빠만 열심히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떤 때는 거짓말을 하나도 안 보태서 누가 옆에서 나에 대해서 칭찬을 해 줄 때 가슴이 할퀴는 것처럼 속이 상합니다. 마음속으로 치면 ‘나는 당신이 아는 것처럼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이 아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이 아는 것처럼 그렇게 탁월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어린아이처럼 주님 손에 붙들려 무지한 나를 깨우셔서 오늘도 내 마음에 한 줄기 빛을 주시지 않으면 내가 이 사람들에게 빛을 전할 수 없는 사람이고 주님의 교회의 등불은 꺼지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매일매일 공부합니다.
저 가방을 들고 주일마다 이렇게 올라가니까 어느 교인이 ‘목사님, 양복에 저 가방은 정말 안 어울립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내가 저 가방을 메고 강대에 올라가는 깊은 사연을 모릅니다. 저 가방은 대학생들이 메는 가방입니다. 메고 올라가면서 매일매일 저는 말합니다. ‘나는 대단한 설교자가 아니다’. 설교하고 난 후 온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 통로를 빠져나오면서 ‘나는 은혜를 끼치는 설교자가 아니다, 나는 공부하는 학생일 뿐이다. 이제 설교가 끝났으니 다음에 불을 지피기 위해서 나는 탄광에 석탄을 캐러 가는 길이다.’ 그래서 저 가방은 공부 가방이고 한 들통이기도 합니다. 가끔 그럽니다. ‘여보, 오늘 우리 놀러갈까? 오늘 우리 극장 구경 갈까?’ ‘다음에 하자, 다음에... 지금 나는 고3이다, 목사는 고3이야 고3.’ 한국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아줌마, 혹시 사람하고 고3하고 지나가는 것 봤어요?’ 가족도 고3이면 TV를 못 틉니다. ‘그러면 언제 대학 들어가는데?’ ‘조금만 기다려 조금만 힘들어도 참으면 죽을테니까 그 때 우리 맘껏 천당 가서 놀자’. 지금은 놀 때가 아니라 공부 할 때입니다.
그래서 책을 손에서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도 쓸모없는 남의 예화집이나 설교집이나 이런 것이나 읽고 도용해서는 안 됩니다. 깊이 있는 신학 책, 여기 젊은 목사님들이 많은데, 앞길이 창창한데 놀러 다니면 안 됩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매달려서 젊은 날에 공부해야 합니다. 묵직하고 깊이 있는 고전과 신학 책들, 그리고 현대 신학에 관한 책들, 현대 사회에 관한 책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이 모든 사상사적 흐름들을 우리에게 알게 해 주는 이러한 이 시대의 코드들을 읽어 낼 수 있는 책들을 폭넓게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심방을 가서 어떤 교수, 어떤 사상가, 어떤 과학자, 정치가, 경제학자, 인문학자, 역사학자, 그리고 심지어는 컴퓨터전문가를 만나도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풍부한 상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지식의 한 복판에 꼭 있어야 될 것은 성경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목사가 성경을 펴고 그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 주님이 이 말씀 속에 기록해 놓으신 뜻을 깨닫고 그것이 마음에 커다란 기쁨이 되고 그래서 그것을 인하여 마음속에 참된 은혜가 밀려오는 말씀의 감격이 목사에게 있을 때 그것이 바로 목사의 말씀 사역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유익은 설교 감각이 아주 풍부해 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17년 동안 설교를 부교역자들에게 맡긴 적이 없습니다. 제가 출타를 하거나, 몸이 너무 아파서 강단에 설 수 없는 경우, 행사가 있거나 일이 있어서 도저히 그 예배에 참여할 수 없거나, 집회를 나가는 경우를 제외하고 항상 제가 직접 설교를 했습니다. 17년 동안 설교를 했더니 새벽 기도를 빼놓고 4천 편을 설교 했다고 통계가 나왔고 그 4천 편은 모두 녹음 테잎을 해서 텍스트로 풀려있는데 원고지 약 30만매 정도의 분량이라고 합니다. 한 방을 가득 차지하고 있고 나도 그 속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는지 원고 없이 설교를 해서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면서 저는 거의 무엇을 설교해야 하는가를 가지고 고민하는 날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은 거짓말이지만 손에 꼽을 정도이고 항상 설교하고자 하는 내용들이 설교시간보다는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끊임없이 공부하고 성경을 대하면서 성경 속에서 은혜를 받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비법을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예전에 없었던 것인데 이런 노트를 가지고 신학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일들은 계속 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그 모든 공부의 한 복판에는 항상 성경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있고 그 옆에는 히브리어 성경과 희랍어 성경이 있으면 좋고 라틴어 성경이 있으면 더 좋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읽을 때에는 설교를 할 계획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구도자로서 ‘종이 여기 있나이다, 제가 어떻게 믿고 살면 주님의 마음이 좋으시겠습니까? 이제 제가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으니 말씀 하시옵소서’라는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천천히 읽어가면서 그 때 마음에 부딪치는 구절이 있으면 멈추고 다시 읽기 시작합니다. 다시, 다시... 그러니까 이것은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 이 성경구절이 마음에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그 때 더 천천히 성경을 묵상하면서 읽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구약이면 히브리어 성경이나 아람어 성경, 신약이면 희랍어 성경을 펴놓고 한글 성경이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는지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번역을 바로 잡은 다음에 다시 또 읽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열 번, 스무 번 읽는 사이에 성경의 어떤 메시지들이 자기에게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조금 읽을 때는 내가 성경을 읽지만 성경을 깊이 읽을 때면 이번에는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의 마음을 읽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빛이 비취기 전에는 나도 몰랐던 나를 성경이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이 성경이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해 줍니다. 그런 모든 과정은 기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아프기도 하고 쓰리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됩니다. 예전에 알지 못했던 진리의 세계들을 발견하면서 그 속에서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험악한 세계를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그리고는 한없이 그 광경에 취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을 읽다가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가슴 벅찬 감격에 울기도 하고,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이런 진리를 보여주시는 기쁨 때문에 하나님을 끌어안고 입이라도 맞추고 싶은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모든 묵상이 끝나고 나면 이제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부분의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서 빨리 들어달라고 칭얼거리는 기도이지만 말씀에 흠뻑 젖은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고 싶은 그것을 따라 기도하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될 때 나의 목회를 향해 내가 가지고 있는 관심사와 우리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관심사가 얼마나 다른 것인가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은 그 기도가 한 시간이 될 수도 있고 두 시간이 될 수도 있고 더 길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더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흠뻑 젖은 다음에는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잊어버리기 쉬운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에 빨리 그 때 하나님이 주신 그 말씀에 대한 깨달음들을 정리해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에게 오늘 아침 주시는 영혼을 흠뻑 적신 이 말씀들에 대한 깨달음들을, 이 찬란한 진리의 빛을, 교회 안에서 성도들에게 가르칠 때 나는 무엇이라고 이것을 어떤 형태로 가르칠까 하는 것을 고민하면서 그것을 메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성경을 읽다가 은혜를 받았는데 이렇게 주실 때가 있습니다. 이런 분량이면 육 개월 정도는 충분히 설교 할 수 있는 분량입니다. 지금 보여드린 이 종이의 1/3을 가지고 250 페이지짜리 책을 한 권 썼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매일매일 이것은 이것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무엇을 설교해야 될지를 생각할 때에 이것을 설교해야 되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에 이것을 펼쳐놓고 구체적인 책들을 갖다놓고 다시 공부를 하면서 설교를 조직을 하는 것입니다. 설교하러 올라갈 때에는 이것을 다 써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가득 담아서 그래서 작은 메모지 한 장을 가지고 그렇게 올라가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적시고 지나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생생하게 느낌이 살아있고 어제 말씀드린 증인으로서 증언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도 17년 동안 목회를 해 왔는데 좋은 일만 있었겠습니까? 가슴 아프고 쓰라린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슴 아프고 힘든 일이 있어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왜? 목회에서 교인들이 속을 썩이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주시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훨씬 크니까요. 때로는 못 된 교인들이 가슴을 아프게 해도 이렇게 말씀에 깊이 젖어서 은혜를 받으면 그런 하찮은 일에 정신을 빼앗기고 휘말릴 여유가 없습니다. 왜? 지금 하나님의 진리를 지금 섭취하고 석탄을 캐기도 바쁜데 그 사람들 가지고 싸우고 그렇게 마음 상하고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가끔 교인들이 실망했다고 하는데 저는 17년 목회하면서 실망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왜? 처음부터 기대를 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은 사랑해 줘야 될 대상이지 우리가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아멘.
요한 사도가 자기 수명에 죽은 유일한 사도였던 것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밧모라고 하는 섬에 복음의 증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핍박을 당하여 유배를 당하였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과 교회의 성도들을 떠나 절해고도의 외로운 섬에서 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향에 가고 싶다고 울지 않았을 것이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만나고 싶다고 징징거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90세가 넘어 100세를 바라보는 백발의 노 사도가 계시록 4장에서 가슴을 찢으면서 통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통곡했는지 아십니까? 희랍어 성경에는 ‘그 사람이 울었다’라고 하는 대목을 ‘에클라우센포 루’라고 기록을 합니다. 이 단어는 흐느껴 우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어 우는 영어 ‘cry’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강인하던 사도가, 백세를 바라보던 백발의 노 사도가, 어린애처럼 가슴을 찢으며 통곡을 하면서 밧모 섬에서 울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천사의 음성이 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마지막 때에 될 일을 기록해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마지막 때에 될 일은 자기가 직접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르쳐줘야 알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마지막 때에 될 일을 두루마리에 담아서 하나님이 내려 보내셨는데 인봉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천사가 그 두루마리가 내려올 때 ‘이 인봉을 뗄 자는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것을 열어줄 수가 없다’ 라고 선언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렇게 강인하던 이 노 사도가 백발을 휘날리며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처럼 통곡했던 것입니다.
교인들이 속 썩여서, 나보고 나가라고 해서, 그까짓 자동차 사주면서 마음 상하게 해서, 이 일 저 일로 마음을 괴롭혀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까?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20일 30일 금식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어 본 적이 있겠죠. 그러나 여러분, 그것보다 더 칭찬받을 만한 일은 하나님 정녕 나에게 이 말씀을 닫으시렵니까? 하나님 나에게는 왜 성도들처럼 이 말씀에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까? 주님, 나의 어두운 마음을 열어 이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해 달라고 이 백발의 노 사도처럼 소리를 내어서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성도들이 예배드리러 왔다가 주님을 못 만났으면 왜 못 만났는지를 생각하며 회개해야 된다라는 대목에서 여러분들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면 목사가 성경을 읽고 말씀을 깨달으려고 할 때 깨달음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 똑같은 태도로 머리를 조아리며 ‘나의 어느 부분이 주님 보시기에 마음이 들지 않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감추시렵니까?’ 라고 하나님 앞에 울어야 하지 않을까요?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이 목사를 조금 사랑하시면 사례금을 많이 올려주시고 또 자식들이 잘 되어서 좋은 대학 가고, 또 좋은 처자 만나서 시집 장가가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목회자를 진짜로 더 많이 사랑해 주시면 말씀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는 복은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 섭리의 복이고 또 하나는 영적인 복 (spiritual blessing)입니다. 일반섭리의 복은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여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우연히 교회를 건축했는데 옆에 아파트가 들어 왔더라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찾다가 우리 교회에 돈 많은 사람이 들어 왔더라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도대체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제직회에서 좋은 자동차를 사주기로 결정을 했더라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아들이 공부를 잘 해서 하버드 대학에 들어갔더라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섭리의 복은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시는 복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적인 복은 하나님이 목회자의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시는 그런 종류의 복입니다. 그를 바꿔서 새 사람이 되게 만들고 이제까지 나태했던 목회에 대해서 회개하게 만들고 죽은 자와 방불하던 설교를 살아있는 하나님의 음성이 되게 만드는 영적인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복입니다.
사도요한은 하나님이 말씀을 열어주지 않자 통곡하며 어린아이처럼 몸부림치며 울었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천사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다윗의 자손 중에서 예수그리스도만이 어린 양이 이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니라’ 하며 예수님이 그 인봉을 떼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젖어서 감격할 때 그 때 로이드 존슨 목사님은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일 날 설교가 끝나고 내려오기만 하면 아쉬워 진다. 아, 또 일주일을 또 기다려야 설교할 기회가 오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일 년에 네 번 부흥회를 합니다. 전부다 68회 부흥회를 했습니다. 한 번도 외부 강사가 오지 않았습니다. 성도들도 원하지 않습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렇게 목회하다가 죽을 것입니다. 어느 날 제가 위임 목사가 되고 노회에서 와서 저를 위임목사로 위임을 해 주었습니다. 그 때 제 마음에 하나님께 드린 간절한 기도가 있습니다. 두 가지만 하나님이 해 주시면 저는 이 열린 교회에서 종신하겠습니다. 첫째, 간절히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신앙에 은혜를 주시는 것, 그래서 저도 언젠가는 이 강단의 마지막 ‘김남준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입니다’라는 주일이 오지 않겠습니까? 곧 올 것입니다. 올 때에 그 때에 그 설교가 내 설교를 개척할 때부터 30여년을 들은 성도들조차도 마지막 은퇴할 때 성경 본문을 읽을 때 무슨 설교가 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설교를 하다가 죽는 것, 은퇴하는 그 날이 살아온 날 중에서는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날이고 앞으로 살아갈 날 중에서는 가장 조금 예수님을 사랑하는 날이 되도록, 그 두 가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을 해 주신다면 나는 종신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약을 하였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설교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교인이 많이 모이는 것은 설교를 잘하고 말씀에 감화를 받기 때문에 성도들이 모두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어느 정도 커지면 그것은 마치 겨울날 눈사람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눈을 뭉치기 어렵지만 웬만큼 눈이 뭉쳐진 다음엔 언덕에서 눈을 굴리면 굴러가면서 눈이 커지듯이 교회도 그렇게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래서 우리의 목회의 외부적인 성과를 우리 자신의 신령한 은혜의 열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얼마든지 그 안에는 세속적인 요소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엄하게 자신을 점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점점 사무친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한 때 여러분이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고 새 사람이 되었어도 6개월만 은혜를 못 끼치면 목사 알기를 발톱의 때같이 여깁니다. 더군다나 목사가 무슨 허물이라도 생기게 되면 죽일 듯이 덤벼듭니다. 그렇게 성도의 사랑은 아무것도 아닌 간사한 것입니다. 그러면 대접받으면서 목회하고 싶으면 말씀의 권위 하나만큼은 분명하게 세워서 누구도 그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도록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끊임없이 분투하고 몸부림 쳐서 스스로 마음속에 금주에 하나님은 이 말씀을 주셔서 내 영혼을 살리시는구나 감격할 수 있는 말씀 생활을 누릴 때에 원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은 설교하고 싶을 것이고 원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은 설교 할 때 그 진리의 참된 빛이 교회당을 가득 메우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등불입니다. 이 불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말씀을 깊이 있게 설교하면 교회가 저절로 부흥이 됩니까? 그건 아니죠. 여러분, 하나님의 잘 준비된 말씀은 장작이고 훨훨 타오르게 하는 것은 성령입니다. 여러분 장작을 산에 많이 쌓아놓았다고 산불이 납니까? 거기에 불이 내려야죠. 갈멜산에 올라가서 장작단을 쌓아 올려놓았을 때 그 때 거기에 물까지 부었지만 위에서 불이 내리자 모두 살라버리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바보 같은 사람들은 공부나 몇 줄 했다고 교회를 아주 이지적으로만 이끌어 나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수없이 설교를 자기 깐에는 깊이 있게 한다고 하는데 자기 부인도 뒤에 앉아서 졸고 있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진리의 위대한 힘은 그것을 타오르게 하는 성령의 역사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둘을 따로 따로 추구하려는 데에서 온갖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1995년도에 토론토에 왔었습니다. 아는 사람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제가 학교에서 부흥을 가르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흥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이 도대체 정말인가 해서 왔습니다. 왔더니 완전히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성령 받았다고 여기저기에서 쓰러져서 벌벌벌 떨고 그리고는 자기 죄를 회개해야 하는데 드러누워서 깔깔대고 웃느라고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너무 웃다가 창자가 끊어질 것 같아서 눈물을 쏟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또 일으켜 세우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고 정신병자들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건 성령의 역사가 절대 아니다 라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온 지 1년이 지나서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면 은혜 받았다고 한 사람들이 그 다음에는 무릎을 꿇고 기어 다니면서 짐승 우는 소리를 내더랍니다. 그 때 알아봤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악령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때 그 운동을 주도했던 지도자에게 한 신학자가 ‘당신 이것이 부흥이라면 조나단 에드워즈 시대에 있었던 회개는 왜 없냐?’고 물었더니 ‘내 신학에서 나도 그것이 약간 궁금하긴 하다’라고 하더랍니다. 궁금하긴 뭐가 궁금합니까? 거짓입니다.
그런 거짓된 신비주의 운동, 쓰레기통에나 들어가야 할 거짓된 운동들을 따라다니면서 교회를 다 망치고 영혼들을 상처투성이로 만드는 그런 탈선들을 나중에 어떻게 배상을 하려고 합니까? 자기 자신의 영혼이야 스스로 책임을 지면되지만 교회의 양떼들이고 주님의 양떼들인데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사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의 역사는 인간의 본성을 바꿔서 예수님을 닮게 만들어주고 은혜의 가장 뚜렷한 표징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줍니다. 누가 성령을 받았는데 그 성령의 진정한 성령의 은혜라면 그 열매는 사랑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는 겸손, 주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이 벌레 같은 인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고백하게 만드는 그 은혜입니다. 그것이 예배당 안에 가득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 안에 성령이 가득하기를 싫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목회자가 우리 교회는 냉랭해지고 싶다는 목회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돌 가슴 철 마음 경연대회를 하는 것처럼 교인들이 분노 할 줄도 모르고, 아파 할 줄도 모르고, 눈물 흘릴 줄도 모르고 기뻐할 줄도 모르는, 마치 석고상을 깎아놓은 것 같은 마치 뭔가 굉장히 화난 사람들처럼 예배당에 앉아서 한 시간을 예배를 드리면서 수십 번 시계를 쳐다보다가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목회입니까? 우리가 정직하게 말한다면 그것이 정말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면서 우리를 불러서 우리의 몸에 피를 발라주시면서 ‘이 복음을 전하라, 너는 방황하는 내 양 무리들을 먹이거라’ 할 때에 주님이 염두에 두셨던 목회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약하고 부족하니까 그렇게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잘 모르니까, 못하니까, 그러면 어느 한 순간에 이것은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분노할 수 있어야 하지 않아요? 자기와 이런 현실 이것으로 만족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분노할 수 있어야 되지 않아요?
저는 바둑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일본에는 토열국이라는 기보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흑백을 놓고 바둑을 몇 십년 전에 두었었는데 바둑을 두다가 지니까 한 사람이 바둑판 위에 피를 토하고 거기 엎드려 죽어버렸답니다. 너무 분해서, 거기 내려오는 기보가 토열국이라는 기보입니다. 아니 오락을 하다가도 지니까 너무 원통해서 울컥하고 피를 토하고 반상에 엎드려 얼굴을 묻고 피를 토하고 죽어버렸는데 우리 목회가 바둑한판만도 못합니까? 우리 영광이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우리가 섬겼던 교회가, 어둠속에서 수없이 방황하던 우리들이 주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예수를 사랑하고, 그래서 비록 이 세상에서 돈 많고 권세 많은 사람들만 모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양 무리를 형성하고 예전에는 거렁뱅이와 같이 주정뱅이로, 난봉쟁이로 살던 개념 없는 인간들이 변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교회를 지상에 그 아름다운 교회를 바라보면서 천사들과 하늘나라에 올라가는 것이 목사의 마지막 소망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안 되고 있잖아요? 분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내 가슴에 십자가 피 발라서 이 소명의 길을 들여보내시고 그래서 잘 나가던 직장도 그만둬버리고 우리 자식들까지도 죽어라고 고생시켜가면서 이 목회의 길에 들어섰는데 목회에 영광이 없다 분하지 않습니까?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우리 목회자들이 성령의 은혜가 너무 없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을 설교하는 시간이 국어시간 같고, 신약을 설교하는 시간이 초등하교 때 교장선생님 조회시간 같아진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런 현실을 보면서 아, 이것은 아닙니다. 그러면서 예배가 끝난 다음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나를 죽여 교인을 살리시든지, 아니면 나를 죽여 하나님 새로운 종을 내 교회에 보내시든지, 하나님, 나는 양단간에 하나를 해야 되겠습니다. 이 둘 사이에 끼어서 이렇게는 살 수 없습니다.’
여름이면 우리 교인들이 예전에는 4일 나갔는데 요즘은 3일을 농어촌 전도를 나갑니다. 해마다 천 백 명 정도가 자기 돈을 내고 30명씩 단위가 지어져서 그 교회에 가서 그 교회 인근 시골지역을 열렬하게 전도를 해 줍니다. 거기에 많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때 있었던 한 토막입니다. 움직인 것이 무엇이죠? 어떤 신비의 체험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가 다 죽어가는 교회의 목회자의 마음을 파고들더니 열렬해 졌습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새로워졌습니다. 바둑을 두다가 졌는데 피를 토하고 죽었다.
목회를 했는데 잘 되었다, 피를 토하고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왜? 우리 맨 처음에 순교할 각오 안 하고 목회의 길에 들어 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한 1년 해보고 안 되면 도로 가서 제과점이나 해야 되겠다 그런 사람이 우리 중에 있습니까? 저는 공직 생활 하다가 나왔습니다만 한 번 해보다 안 되면 다시 공무원 시험 봐서 들어가야 겠다 한 번도 그런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일수불퇴다, 난 이미 이 세상을 떠났고 나의 한 몸은 주님을 위해 바쳐졌다. 그러면 몸부림 쳐야 되지 않습니까?
어느 여자가 마음이 변해서 떠나가는 자기의 사랑하는 남자를 붙들고 애원하는 대사가 나왔습니다. ‘내가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세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은 왜 나를 버리죠? 만약에 당신이 내 몸이 마음에 안 든다면 나는 내 뼈도 갈아버리겠고 내 살도 깎아 버리겠어요.’ 그것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의 심정입니다. ‘하나님, 내 목회가 왜 안 됩니까?’ 크기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내 목회는 생명이 없습니까? 왜 내 설교는 은혜가 없습니까? 왜 나의 목회는 회심이 없습니까? 하나님, 나의 어느 부분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내 뼈가 마음에 안 들면 내 뼈를 갈아버리겠고 살이 마음에 안 들면 잘라버리겠습니다 나에게 복을 주시옵소서’ 그러면 하나님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정말 부어주십니다.
마지막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아주 이상한 명령을 모세에게 내리셨습니다. 등불을 밝힐 기름을 백성들에게 가져오라고 하면서 그 기름이 어떤 기름이냐면 감람을 찧어 낸 기름이라고 했습니다. 찧어낸 기름, 감람을 찧어 낸 순결한 기름을 가지고 오게 하라고 했습니다. ‘찧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히브리어 성경에 ‘까띠뜨’라는 단어입니다. ‘까띠뜨’는 ‘까따뜨’라는 단어의 피동명사입니다. ‘까따뜨’라는 동사는 무슨 뜻이냐면 ‘깨뜨리다’ ‘crush’ ‘부수다’ 이런 뜻입니다. 그럼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반적으로 감람유를 만드는 방법은 이런 식으로 ‘까띠뜨’의 기름제조가 아닙니다. 그것은 감람유를 압착기에 넣어서 ‘press’로 찍어서 ‘press’로 누르면 거기에서 우리가 참기름을 짜듯이 기름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기름은 ‘까띠뜨’의 기름이 아닙니다. 그런 기름을 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굴에도 바르고 음식도 해 먹고 약용으로도 사용을 했는데 오늘 하나님의 성막을 밝히는 이 기름은 그렇게 압착기에 press 방식으로 눌러서 짠 기름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만드는 기름이라구요? 이 순결한 감람열매를 공이로 쾅쾅 때리면 압착하기 전에 깨진 사이에서 충격을 받아서 기름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그 기름만 정성스럽게 채집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저 기름은 안 되고 꼭 그 기름으로만 하라고 한 것일까요? 저 기름은 강제로 기름을 많이 낼 요량을 압착기로 눌러서 짰기 때문에 기름 속에 불순물이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불을 붙이면 그으름이 확 일어나고 불빛의 밝기가 현저히 떨어집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성막을 밝히는 자격이 있는 기름이 될 수 없었다고 하나님이 생각하신 것입니다. 힘들기는 하지만 딱! 하고 깨뜨려졌을 때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한 방울씩 채집해서 아무 불순물이 섞이지 않는 깨끗한 기름을 모아서 그것을 찬란한 불빛으로 밝힐 것을 하나님이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자,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교회를, 우리의 목회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방편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빛과 성령의 이 불 두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목회자의 자기 깨어짐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책 한 권 읽고 어디에서 좋은 강의 들었다고, 심지어 목회자들 가운데는 유명한 설교 집을 뜯어가지고 올라가는 것을 봤다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목회하면 그것이 약장사이지 목회자입니까? 역으로 들어서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이 되어서 이리로 토해내는 것이 그것이 약 파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지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입니까? 어떤 사람들이 그럽니다. 자기는 남의 설교 절대 안 본다고, 아무것도 참고 안 한다고, 그런 사람들이 대개 설교가 내용이 없습니다. 남의 설교도 보고 많이 읽고 은혜를 받으세요. 그 대신 귀로 듣고 입으로 토해놓지 마십시오. 그것은 약장사들이 하는 짓입니다. 누구 설교를 들었던지 이것이 깨달아져서 가슴속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속에서 뒤웅치고 역사해서 자기 언어로 피를 발라서 이것이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는 설교가 될 때에 누구 설교 집을 읽고 설교했어도 그것은 그 사람 설교가 아니고 자기 설교입니다. 무슨 설교의 가치가 독창성을 보여주는 것이 설교의 가치가 아닙니다. 진리를 전달해서 사람들이 변화 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설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르는 중요한 분수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그 말씀을 받으면서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목사가 되고 나면 깨뜨려지는 시간은 많이 주어지는데 깨어질 시간은 별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자기가 말씀 앞에 깨어지는 경험이 없으면 하나님이 깨뜨릴 기회를 수없이 주셔도 우리는 그 기회를 선용하지 못합니다. 성도들은 영혼을 가진 피조물입니다. 목사가 한 마디 설교를 하면 저것이 혀끝에서 나왔는지 귓전에서 나왔는지 뱃속에서 나왔는지 그것을 모르면 사람이 아닙니다. 왜 모르겠습니까?
어렸을 때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우리 집 사람이 말썽을 많이 부리는 주일학교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일부러 균등하게 사랑해 주려고 ‘아, 아무개 참 예쁘구나’ 했더니 가슴을 확 밀치면서 ‘속으로는 예쁘지도 않으면서’ 하고 손을 탁 뿌리치고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온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아, 저 다섯 살짜리도 저렇게 아는구나, 성도들이 왜 모르겠어요? 목사가 정말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그렇게 잘 안 될 때도 많지만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 진리대로 깨닫고 싶어서, 중심에서 구도자로 우러나오는 소쩍새 우는 외침인지 아니면 약 바른 설교인지 침 바른 설교인지 모르겠습니까? 한 두 번이야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장구한 세월동안 그것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깊이 있게 깨어지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에게 질문을 해 보십시다. 가장 최근에 성경을 펼쳐놓고 울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나는 시편에 기록 된 것처럼 깨닫지 못한 것이 짐승과 같습니다. 하나님 나는 정말 불쌍한 인간입니다. 그렇게 눈물 흘려 본 적이 있습니까? 목회자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샘입니다. 주님이 그 샘에 물을 가득 채우시고 모든 성도들이 그 물을 먹듯이 은혜를 받으셔야 합니다. 깊이 그래서 목사님들이 만나면 ‘나 지난주에 성경을 읽었는데 내가 정말 은혜를 받았는데 나는 여태까지 그것을 몰랐는데 그것을 깨닫고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회개했는지 몰라’ 이것이 목사들의 대화여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 죄와 강팍함 우리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해 은혜 허락 하시네
그렇습니다. 내 그릇이 작아서 내 성막은 세 평밖에 안 됩니다. 누구는 그릇이 커서 성막이 3천 평이 됩니다. 그런데 불 꺼진 3천 평의 성막 보다는 불 들어오는 세 평의 성막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지 않겠습니까?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말씀 앞에 깊이 깨뜨려지면 그러면서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책을 읽고 성경에서 많은 지식을 깨달은 것을 밀가루로 삼고, 거기에 목회자가 흘리는 눈물로 반죽을 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가슴속에 넣어 구어서, 주일날이면 성도들의 입에 그것을 넣어주는 목회자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도록 부어지는 주일이면 그 주일 밤에 주님이 불러주셨으면 하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더 이 외로운 목회의 길을 가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생을 가야 하는 동안에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환란과 시련이 있을지도 모르고 내가 사랑했던 어느 성도가 내 가슴에 비수를 꽂고 달아날 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의 검만 주셨지 실제의 칼은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외치고 이 진리를 듣고 변화 받은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칼을 든 사자보다도 더 권위가 있지만 그까짓 말씀 하고 밟아버린 사람들에게는 우리는 그 사람들의 밥일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고난을 만날 줄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떤 가슴 아픈 일이 우리 얼마 남지 않는 목회 사역의 길에 기다리고 있을 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루 속히 우리의 이 고단한 달려갈 길이 마치기를 바라고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너무 오래 이 세상에 구차하게 살지 않고 주님이 쓰실 만큼 쓰신 다음에 우리가 치매가 걸리고 육신의 건강이 나빠져서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기 전 홀연히 주님 품에 가는 것이 감사한 우리의 기도의 제목입니다. 그러나 그 날은 우리가 정한 날도 아니고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 맡겨둡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매일매일 살아갑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에 우리의 소명이 진리를 외치고 영혼을 무릎을 꿇어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왔던 이 성도의 길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고난도 있겠고, 슬픔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우리를 불러주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그리고 주님 앞에 우리가 영혼들을 가르칠 때는 목자이지만 우리 주님 앞에 있을 때는 그저 상처받은 한 마리의 양으로서 나도 불쌍히 여겨달라고, 그리고 나도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달라고, 나에게도 은혜를 달라고, 어린아이처럼 매달리며 주님의 손을 붙잡고 조금 더 눈물의 골짜기 목회의 길을 걸어간다면 잠시 후 이 모든 고난의 길이 끝나고 찬란한 영광의 날이 올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교회와 함께 눈물을 흘리고 일생을 피 흘리며 살아온 우리들을 받으시기 위해 보좌에서 일어나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말할 것입니다. 내 인생 걸어온 모든 길에 그 분이 동행하셨기에 이겼노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