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각기동대,
포스트 휴머니즘 시대를 맞이하다
녹취자 : 오희열
자, 공각기동대를 모두 보고 오셨습니까? 안 보고 왔으면 얘기가 안 되고 봤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기억에서 희미해졌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다시 내용을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 영화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가를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보면서 일단 제가 1부로 공각기동대에 대한 강의를 하고 그 다음에 여러분의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고 필요하면 토론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화면을 띄워주십시오. 제가 이 공각기동대를 네 번을 봤습니다. 할리우드 영화로 세 번을 봤고, 원작 애니메이션으로 한 번을 봤습니다. 여러분에게 강의할 게 아니면 그렇게 여러 번 볼 필요가 없는데 어제 애니메이션을 보고 오늘 할리우드 영화로 한 번 더 봤습니다. 원래 영화관에서 상영된 공각기동대(고스트 인 더 쉘, 2017) 는 원작과 많이 다릅니다. 제작 경로는, 1991년에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이 나옵니다. 원작자의 나이는 젊습니다. 1966년생인가 합니다. 그 당시에는 더 젊었을 것입니다. 1995년에 애니메이션 극장판이 나오고 TV 드라마가 2002년, 2004년도에 나옵니다. 그리고 2017년도에 스칼렛 요한슨이 주연배우로 등장해서 할리우드판이 나옵니다.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습니까? 별로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원작에서 어려운 것을 다 빼고 아주 가볍게 할리우드에서 녹여냈는데도 아마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의 90%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를 잘 모를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고 나오면서, “에이씨, 만화같네.”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선 여기에서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라고 하는 로봇과 인간의 융화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전개됩니다. 그 사회는 제가 보기에,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 변화들에 대해서 우리가 좋은가 싫은가를 이야기하기 전에 어차피 그 변화는 흘러가는 것이고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견해를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시대를 알고 판단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아주 확고한 기독교 신앙과 지식들이 있습니다. 그 가치관과 세계관을 여기에 어떻게 도입해서 이 문제를 풀어볼 것지를 고민하지 않으면 우리는 답을 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책임 있는 인생을 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 여기에 인간과 로봇의 지향점입니다. 스칼렛 요한슨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몸 뒤에 구멍이 네 개가 있습니다. 저는 그게 있는 것도 사실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요즘 모든 것이 블루투스를 사용하는 시대인데 거기에 구멍을 뚫어서 코드를 꽂고 앉아있는지, 그걸 보면서 “헐...” 했습니다. 그것은 좀 구석기 시대의 코드가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완전히 지워버리지 않은 것은, 그렇게 바꿔버리면 사람들이 더 비현실, 초현실적이어서 이해를 하지 못할까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 구멍이 아닙니다. 여기 인간이라는 존재와 로봇이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냥 인간이 아니라 이미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입니다. 인간과 기계가 합쳐져서 소위 말하는 사이보그가 되어서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인간을 너무 멀리 떠난 존재입니다. 그런데 차이는 고스트(Ghost)가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고스트라는 말은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유령, 혼령, 혹은 영혼을 말합니다. 심지어 킹 제임스 버전에서는 성령님을 고스트라고 합니다. “영”입니다. 그것을 고스트라고 불러버립니다.
어쨌든 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고스트가 있는 인간의 뇌, 인간의 몸은 우리의 인생에 적합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젊었을 때는 괜찮은데 나이가 들면 몸에 문제가 자꾸 생깁니다. 그런 불편을 싹 해소시켜줍니다. 그 몸을 우량한 신체로 갈아 끼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뇌만 남았습니다. 이 사람의 경우에는 개성이 있습니다. 개성이 있지만 정보에 대해서는 뒤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정보를 생각하면서 진화를 하려고 합니다. 그에 비해서 기계는 정보와 네트워크의 바다에서 태어납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인간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이세돌이 바둑을 그렇게 잘 두는 사람인데, 들리는 얘기에 따르면 AI 알파고가 재밌게 하려고 한 판 져주었다고 합니다. 이미 그 속에 1700만개의 기보가 다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때와는 또 달라져서 이세돌과 둔 다음에 훨씬 더 강해져서 꺾을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정보에 대해서는 비교가 안 되지만 개성은 없습니다. 자기가 모든 것들과 구별되는 독특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스트가 없는 존재는 어떻게 하든지 개성을 획득하고 싶어하고, 있는 존재는 정보와 네트워크를 차지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쿠제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마지막에 시커먼 것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사람입니다. 첫 번째 볼 때는 어둠속에 있는 매우 나쁜 악당으로 나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고 오히려 그 사람이 스칼렛 요한슨 즉, 쿠사나기를 구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쿠제를 아무도 꺾지 못합니다. 가장 커다란 이유는 사이버네틱스를 형성하고 사이보그가 되어도 네트는 기본적으로 기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아무리 탐색을 해도 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쿠제의 얼개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의 뇌를 중심으로 이제까지 전혀 없었던 네트워크를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면서 진화해 나가는 것입니다. 애니메이션 원판에서 쿠제는 “퍼픽 마스터”라고 해서 “인형사”, 혹은 “인형의 주인”으로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정보가 끊임없이 확장되고 그 총량이 늘어날 것입니다. 어마어마하게 새로운 정보들이 생산되면서 늘어날 것입니다. 여태까지 인류가 집적한 정보들을 모두 수집할 때, 그것들을 CD에 담아서 저장하면 그 높이가 달나라까지 이른다고 합니다. 이게 벌써 한 20년 전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그런 CD가지고는 이야기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만한 칩 하나에 인류가 생산해 낸 어마어마한 정보가 그 속에 들어가고 그 정보의 양이 달나라까지 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하나가 얼마가 되느냐가 문제일 것입니다.
제가 열린교회를 개척하고 설교를 5300번쯤 했다고 합니다. 그전에 한 것까지 합하면 5600번쯤 되는데 몇 년 전에 교회에 있는 직원이 선물이라고 하면서 미니디스크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뭐냐고 하니까 여태까지 설교한 모든 것이 거기에 다 들어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참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제는 아마 반도체 기술이 좀 더 발달되면 내가 한 5600편의 설교, 용량으로 따지면 1만 기가정도 되는 것을 여러분이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USB에 다 들어갈 수 있는 시대가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온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데, 대학 박사과정 시절에 미국에서 사시던 교수님 집에서 수업을 했습니다. 거기서 당신의 노트북 컴퓨터를 자랑하시는데, “교수님, 새로 사셨습니까?”, “이거 어렵게 구했네. 이게 용량이 어마어마해.”, “얼마나 됩니까?”, “80메가야.”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컴퓨터는 20메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폭발적으로 용량이 증가해서 이제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엄청난 정보의 바다에서 정보를 끊임없이 확장하고 그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과정을 통해서 놀랍게 진화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새롭게 태어난 생명체가 된 사람이 쿠제입니다. 이 쿠제가 결국은 사람은 자기 개체를 쉽게 복제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스트와 쿠사나기 모코토의 뇌를 다시 합성시키고 고스트 융합을 꿈꾼 것입니다. 그런데 쿠사나기는 자신의 뇌에 새로운 의체를 입게 됩니다. 그래서 쿠사나키 모코토가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쿠제는 총에 맞아 죽습니다. 이 쿠사나기는 쿠사나기 자신이기도 거부하고 쿠제도 거부합니다. 할리우드 영화와 마지막 장면이 다릅니다. 할리우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좀 웃깁니다. 주인공이 다시 그들 속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경찰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인데, 그런 이야기는 원작자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지막 대사는 쿠사나기이기도 거부하고 쿠제도 거부합니다. 그리고 쿠사나기가 제3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이 사람의 앞에는 자기도 모르는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 어디로 갈까? 네트는 광대해.”하면서 원판은 끝이 납니다. 끝이 할리우드 영화와는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진짜로 의미를 보려면 원판을 봐야 합니다.
여기서 많은 철학적인 질문들이 제기됩니다. 제일 먼저 ‘자아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근대적인 인간관에서는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기억에서 찾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무엇이 진짜 기억이라는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도록, 인간이 기계에 의해서 인간의 기억을 조작하는 것입니다. 이미 이런 이야기는 몇 년 전에 나온 토탈 리콜에서도 제시되었습니다.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잘생긴 남자 주인공이 예쁘게 생긴 여자 주인공과 함께 삽니다. 아주 사랑하며 행복하게 삽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주입된 기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 남자를 사랑하지도 않고 목적이 있어서 그 남자에게 접근한 것입니다. 남자의 원래 정체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전사였습니다. 이렇게 기억이 주입된 것입니다. 이런 것을 만약 컴퓨터나 기계를 통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인간이라는 것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그리고 만약 저장장치가 획기적으로 발전을 하고 인간 속에 있는 뇌라는 물질을 어떤 신호로 받아서 기계 쪽으로 옮길 수 있다고 하면 사실 그 용량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저장장치가 발전한다면 여러분의 태어나면서부터의 모든 의식과 잠재의식의 기억을 USB 하나에 다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떼어내서 필요b없는 부분을 삭제하고 원하는 부분을 집어넣어서 다시 부팅할 수 있다면, 그런 경우에 “나”라는 사람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영화에서 쿠사나기 모코토가 고민하는 문제가 그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무엇이 진짜인가?” 누군가의 편의에 의해서 기억이 조작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배워왔던 기억의 지속성은 정말 자기 정체성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것인지 하는 철학적 문제들, 그리고 정신적 실체, 영혼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그리고 제일 어려운 것은 “생명”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사실 이것은 생물학자들도 정의를 내리지 못합니다. 생명현상에 대해서 연구하지만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의를 못 내립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철학자는 하다하다 안 되니까 부정적인 방법으로 설명을 합니다. “생명은 죽음에 항거하는 모든 기능이 생명이다.” 이것도 완전한 설명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생명이라는 것이 자기복제, transcription(전사)이라고 하는데 생명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생명에게는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modification(변화, 변이), 자기를 둘러싸고 어떤 일들이 일어나면 거기에 대해서 반응을 하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것이 식물이든 동물이든 곤충이든 인간이든 뭐든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그 환경이 적합하지 않으면 피하려고 하고 피할 수 없을 때에는 그 환경에 적합하도록 자기 자신을 바꿉니다. 이것을 변양, modification 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자기복사(replication),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씨앗, 자기 자신의 개체를 남기는 것입니다. 가을이 되면 이 풀이 다 죽어버리는데 뿌리는 죽지 않습니다. 그 다음해에 다시 태어납니다. 씨를 뿌려서 더 번성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특성입니다. 외부에 대한 반응, 변양, 그리고 self transcription 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보면 자기 복제와 보존이라는 DNA 자체가 생명인가? 여기에 우리가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DNA가 생명이다? 생명이 있을 때 그 안에 간직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생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생명이 정보 프로그램과 무엇이 다른가? 쿠제가 아주 중요한 대사를 하나 남깁니다. “생명이란 정보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결절점이다.” 결절점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느 한 부분에서 딱 꺾어지는 것입니다. 논리 1, 2, 3, 4, 5, 6, 이렇게 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딱 꺾어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게 하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확실한 설명이 되지는 않습니다.
원작의 고민은 이런 것입니다. 쿠사나기와 인형사의 융복합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기계도 아니고 인간도 아닙니다. 이미 성(性)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과 기계가 서로 소통하는 상황이 됩니다.
제가 그저께 샘 병원에 갔는데 의사들과 모여 앉아서 이 문제에 대해서 토론을 했습니다. 만약 인공지능이 계속 발달을 해서 단순히 정보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결정을 할 수 있을 때는 그 존재를 인격체로 봐야 하느냐, 존중해 줘야 하느냐, 아니면 도덕적 결정에 대해서 책임을 물어야 하느냐, 아니면 그것에 대해서 그 개체를 인격적인 존재로 봐야 하느냐? 이런 논의들을 했습니다. 그 중에 어떤 의사 선생님은 인격체로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격의 정의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고도로 지적활동을 할 수 있으면 다 인격체가 되느냐는 신학적 의문들이 남습니다. 여기서는 인간인 동시에 기계로 나옵니다. 여태까지 인간은 인간이고 기계는 기계이고 동물은 동물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 벽이 다 철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정체성의 격벽이 없어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원작의 고민인데 할리우드 작품에서는 끝이 너무 시시하게 끝납니다. 보는 사람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원작자의 고민이 묻어있지 않습니다.
근현대철학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하면 17세기 이전까지, 데카르트가 출현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인간은 기본적으로 둘로 이루어져있는데 육체가 있고 영혼이 있다고 봤습니다.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형상은 모양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기능을 가진 인간으로 창조되었고 그 인간은 모든 피조물들과 완전히 구별된 매우 매우 중요한 존재로 창조되었고 그 근거가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주셨고 영혼은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것 때문에 인간이라는 것이 규정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17세기에 데카르트가 나옵니다. 오늘날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발전된 기술의 진보는 사실 데카르트가 강력한 발동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이전까지는 인간은 무엇을 발견하고 어떤 법칙을 찾아내도 그것은 불완전하다, 그리고 인간은 신 앞에서 유한하고 모자란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발견한 법칙을 과연 그렇게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했었습니다. 데카르트가 와서 그 문제를 극복합니다. 데카르트가 한 유명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cogito 는 cogitare, 생각하다의 1인칭 동사 변화입니다. I think, ergo는 therefore, sum은 I am 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입니다. 여기서 “생각하다”라는 말이 그냥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끊임없이 어떤 것에 대해서 회의하는 것입니다. 의심을 품고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사고는 이런 것입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확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인간이 생각하고 회의를 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마지막에 가장 확실한 것, 부인할 수 없는 것 하나는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어떤 식으로 이런 이론을 정립했느냐 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이성적으로 따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하고 학문의 세계에서 제외 해버린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 학문의 최고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라 아니라고 하고 제외해버린 것입니다. 그 당시 불 일듯 일어났던 계몽주의에 대해서 기독교를 보호했다는 설도 있지만 사실은 그것보다도 기독교의 어떤 기초들을 흔들어버리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가 쓴 편지 가운데 나오는 내용인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당신이 이 모든 세계가 움직일 수 있도록 법칙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그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의 이성은 그 법칙을 발견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법칙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비평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찾아낼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신뢰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을 편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인간이 뭔가를 찾아내고 사유하는 것에 대해서 신빙성을 부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전과 다른 것은 형식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법칙이 있고 학문은 이 법칙을 찾아간다고 했지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은 이성의 영역에서 제외되는 종교의 영역이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법칙의 세계니까 이 법칙의 세계에서는 있는 법칙을 발견한 사람이 최고의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중심의 관점을 사실상 사람 중심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엄격한 이원론적인 사고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영육 이원론입니다. 영혼은 따로 있고 물질적인 존재는 영혼과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문제가 생깁니다. 이렇게 영육이원론으로 구별하고 나면 어떻게 우리 영혼이 물질이 아니고 물질과 완전히 다른 것인데 어떻게 그것이 실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서 우리 영혼의 상태가 육체에 영향을 주고 우리 육체의 상태가 영혼에 영향을 끼치는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들어 낸 이론이, 사람 이 뒤에 송과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소나무 열매 비슷하게 생긴 것인데 거기에서 영혼과 육체가 만난다, 정신과 육체가 만난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과학적으로 말이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영화에 나오듯이 구멍에 꽂는 것 같은 것도 생각해보면 그런 것입니다. 그 후에 유물론이 생겨나는데 유물론은 사실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2세기경에 루크레티우스라는 사람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을 쓰는데 그게 기독교 세계에서는 전부 불태워진 책이었습니다. 그때 벌써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세계가 아주 엄밀한 과학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그 당시 많은 철학자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미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이때에 와서 폭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마지막에 물질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고 기계론적인 인간관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세계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모든 것들은 다 법칙이 있어서 자연 현상 속에서 움직인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여하게 했던 사람이 뉴턴이었습니다. 뉴턴이 『프린키피아』라는 책을 써서 일약 인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이 됩니다. 그 책의 부제가 ‘모든 자연학에 대한 수학적 설명’이었습니다. 천둥이 치고 번개가 치고 돌멩이를 위에서 놓으면 떨어지고, 꽃이 피고 하늘의 별이 빛나는 이런 모든 것들이 수학적 공식으로 설명된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입증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인간의 사유의 대변혁이 어마어마하게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세계에 대해서 인간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도 공식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는 세계관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인간의 몸에 그대로 적용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물론적 세계관은 인간자체를 아주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기계로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게임도 하고 채팅도 하고 시리 같은 기능도 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알고 있습니다. 그 기계를 뜯었을 때 그 부품 하나하나가 어떻게 작용을 해서 이런 작동을 하고 또 이 부품을 어떻게 만드는지는 아이가 어려서 모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확신합니다. 이것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고 엄격한 전기신호와 프로그램에 의해서 작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보는 인간의 정신세계도 그런 각도에서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초등학생 같아서 인간을 그 기계처럼 다 분해하고 어떻게 만드는지는 모르지만 딱 그 기계처럼 작동한다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풀리지 않는 문제가 정신과 육체가 어떤 관계가 있고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입니다. 그래서 나온 학문이 ‘수반물리학’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다양한 감정의 변화 같은 것을 화학적 변화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고 나면 마지막에 분자식 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몸의 70~80%가 물, H2O입니다. 만일 인간을 바짝 말리고 나면 뭐가 남겠습니까? 그것도 다시 분자식으로 쪼개집니다. 그 분자들이 서로 이렇게 만나고 저렇게 만나면서 원소들이 인간의 몸의 다양한 형태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 결합이 약해지거나 사라지면 늙습니다. 모든 것이 더 결합할 수 없고 와해되어 버릴 때 인간의 육체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을 보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윈이라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다윈이라는 사람의 사고는 그 당시로 보면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주 특별하게 창조하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원숭이에서 진화되었다고 하니까 기독교계에서 보는 인간은 뚜껑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이겼습니다. 이 진화론, 저의 경우에는 중학교 2학년 때 이 진화론을 배우면서 기독교 신앙을 버리는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도표 한 장이 나에게 신앙을 버리도록 배경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 도표는 진화론에서 포유동물의 배의 발생초기에 관한 도표였습니다. 나중에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모르십니까? 가서 인터넷으로 찾아보십시오. 돼지, 소, 개, 인간의 배의 발생초기 모습이 똑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모습을 갖추어서 사람은 사람새끼를 낳고 개는 개새끼를 낳고 돼지는 돼지새끼를 낳고 소는 송아지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신앙도 별로 없어서 “이게 뭔가?” 하면서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우리의 부모들과 교회에서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빨리 주님을 영접하고 확고하게 신앙을 갖지 않으면 아직 어려서 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기다릴수록 확률이 적어집니다. 여러분은 지금이라도 믿게 되었으니까 다행입니다.
그래서 다윈은, 지금 있는 나라고 하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고 봅니다. 계속해서 굴러가다보니까 생겨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리차드 도킨스입니다. 무의지적인 자연의 무한한 활동의 반복이 현재의 결과를 낳았고 그것을 진화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우연적인 존재라고 하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고, 있을 수도 있었고 없을 수도 있었던 존재이고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미와 목적에 관한 질문을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각기동대에서 “공각”이라는 말은 “빈껍데기”라는 뜻입니다. 빈껍데기를 쓴 기동대, 기동대는 경찰이라는 뜻입니다. 영화 원제목은 Ghost in the Shell 인데 왜 그렇게 번역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동대와는 상관이 없고, “껍질을 쓴 영혼”이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한 논의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포스트 휴머니즘, 트랜스 휴머니즘이라는 사상들이 출현하기 시작합니다. 논의가 굉장히 본격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휴머니즘이라는 것을 사회시간에 뭐라고 배웠습니까? Human 이 무엇입니까? 인간, 사람입니다. Human being, 인류입니다. Humanism 이라는 것은 인간이 중심이 되어서 모든 사물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생각하는 모든 사고와 문화, 지적활동과 사상의 전체를 가리켜서 휴머니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이 휴머니즘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입니다. 르네상스는 다시 태어난다, “재생”이라는 뜻입니다. 인류의 재탄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가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까? 인간 자각이 다시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역사를 잠시 간추려보겠습니다. 로마가 있는데 서로마가 400여년 경에 망하고 5세기경에 망하고 동로마제국이 1300년경에 망합니다. 그리고 14세기에 접어드는데 그때를 바로 우리가 르네상스라고 부릅니다. 르네상스의 사상이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많은 역사가들은 1417년을 르네상스의 중요한 시작의 시기로 봅니다. 1417년이 어떤 해였는가 하면, 아까 말씀드린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이 폼포나치라는 사람에 의해서 수도원에서 발견된 때입니다. 그것이 발견되고 다시 프린트되어서 세상에 퍼진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사람들의 눈이 막 깨이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과학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퀴즈를 하나 내보겠습니다. 지구가 둥글다고 하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확인한 것이 몇 세기쯤 되었겠습니까? 10세기? 18세기? 기원전 3세기? 맞습니다. 기원전 3세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오래전에 그런 어마어마한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발견해냅니다. 해가 기울어지는 각도를 계속 기록하는데 그 기록을 대조해보니까 다른 것이었습니다. 서로 같은 시간인데 다른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추적을 하면서 지구의 직경이 대략 어느 정도인지까지 찾아냅니다. 어떻게 보면 숨겨진 수학적 사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발견은 했는데 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쏟아지지 않고 지구에 있는지, 반대편의 물이 왜 쏟아지지 않는지를 설명하지 못한 것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그렇게 되면서 인간중심사상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휴머니즘에서도 과격한 휴머니즘과 온건한 휴머니즘, 그리고 기독교적인 휴머니즘으로 나뉩니다. 과격한 휴머니즘은 신의 존재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에 도전합니다. 그리고 온건한 것은 중간에 위치하고 기독교 휴머니즘은 휴머니즘적인 사상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 사상을 통해서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참된 인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르네상스가 본격화 된 것은, 이 사람들이 그리스 문학을 다시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설명하자면 굉장히 길어집니다. 그 연구의 시작이 10세기에 있었던 십자군 전쟁부터 시작됩니다. 십자군 전쟁에서 기독교가 쳐들어갑니다. 무슬림들과 전쟁이 일어납니다. 무슬림 사회가 아주 미개한 사회인줄 알았는데 전쟁을 하고 가서 보니까 엄청난 문화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탁월한 학문과 문화를 세웠는지 학자에 따라서는 이견이 있지만 당시 무슬림 사회에서는 대학의 기원을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양에서는 대학이 세워진 것이 12세기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아베로에스라든지 아비첸나라든지 하는 어마어마한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세워 놓은 어마어마한 학문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 보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비롯해서 그리스가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스페인 쪽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과장이 좀 섞였겠지만 일설에 의하면 그리스의 과학과 철학에 관한 내용을 양피지에 번역해오면 그 무게만큼 금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번역가들이 엄청나게 대우를 받았는데 그 사람들이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사람들은 참으로 인간이 누구인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제가 말한 플라톤이나 그리스의 고전문헌들을 읽어보면 세계는 무엇이고 인간은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고민을 하면서 정말 인간이 인간답게 살면서 이렇게 교회의 억압을 받으면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렇게 그 사람들이 휴머니즘을 세웁니다. 기독교 휴머니즘의 총화를 이루었던 사람이 여기에 나오는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지난번 카프카의 ‘변신’을 가지고 북 콘서트 할 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 앞에 사랑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인간이 왜 여기에 있고 그가 어떤 목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해서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많은 종교개혁자들은 다 인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예외 없이 인문주의자들이었는데 어거스틴 같은 초대교부들의 사상과 만나면서 그 인문주의들을 하나님 없는 무신론을 해석하지 않고 성경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발견하면서 사실은 기독교적 인문주의가 생겨나고 거기에서 종교개혁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인문주의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휴머니즘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의미를 탈각하고 인간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는 주의입니다. 그런데 포스트 휴머니즘이라는 용어는 최근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휴머니즘에서의 휴먼이 누구인지, 엄마의 뱃속에서 정자와 난자가 결합되서 “응애!”하고 태어난 아이에 국한됩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자라서 그렇게 생활하고 있는 인간, 그것을 기준으로 놓고 휴머니즘이 형성된 것인데 그것은 여태까지의 휴머니즘이고 포스트모던, 모던은 근대주의인데 포스트모던은 “후기 근대주의”입니다. 혹은 “탈근대”라고 합니다. 그래서 “후기 휴머니즘”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렇게 엄마 뱃속으로부터 “응애!” 하고 태어나서 주민등록에 등록되어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던 그 휴머니즘적인 사유는 끝났고 그 이후의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물질적인 주체와 물질적인 신체가 재통합되는데 따라서 여기에서는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자기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포스트 휴머니즘입니다. 이것은 무엇이 결정하느냐? 기술에 달린 것입니다. 어디까지를 휴먼이라고 볼 것인지는 기술의 발전에 달린 문제로 봅니다. 무시무시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트랜스 휴머니즘입니다. 이것은 이것보다 조금 낫습니다. 이것은 관점자체가 인간에 맞춰 있습니다. 그러면서 적극적으로 기술을 받아들여서 나 자신을 우량한 개체로 변화시켜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못 해? 잠깐 우리 병원으로 와.”, 뒤에 구멍을 네 개 뚫고 딱 박아서 쫙 화면에 띄워서 공부 못하는 인자를 가위로 자르듯이 잘라버리고 약한 과목에 대해서 정보가 필요한데 그것이 수학이라면 여태까지의 수학적인 모든 지식과 이해력을 집어 넣어줍니다. 물리를 잘 못하면 그것을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공부 잘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런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자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의료보험까지 된다면 너도나도 가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강남에 가면 똑같은 여자들이 많이 걸어 다닌다고 합니다. 같은 날 같은 병원에서 수술한 사람들, 그리고 사진을 갖다 주면서 “커피 광고모델 김태희처럼 해 주세요.” 합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지 말입니다.
만약 굉장히 우울하고 힘든 아이가 있습니다. “왜 그러니?”, “친구들이 나를 싫다고 해요.”, “친구들이 왜 싫다고 하는데?”, “나한테 사교성이 너무 없대요.”, “뭐가 문제니?” 하고 사교성을 거기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말도 발랄하게 하고 눈치도 있고 놀라운 사람으로 변해버립니다. “넌 왜 그러니?”, “난 말을 잘 못해요.” 하면 주사식으로 집어넣으면 말을 청산유수처럼 하게 됩니다. 논리성이 모자라면 논리를 넣어줍니다. 그렇게 사람을 계속 바꿔서 우량한 존재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휴머니즘의 입장에 서있긴 한데 일관적이지는 않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대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 인생에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자매는 자기 인생이 가장 힘든 이유 중에 하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만 얘기해 보십시오. 너무 비밀스러운 것이면 얘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공부를 잘 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그대는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것만 해결되면 내가 정말 다른 사람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텐데.’ 하는 것 말입니다. 아, 돈? 그리고 그대는 뭐가 자기에게 빼거나 집어넣으면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까? 본인에게 매우매우 만족하고 있습니까? 워낙 잘 갖추어진 사람이거나 생각이 없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아, 운동을 못 합니까? 자, 그럼 한 번 보십시오. 저 사람처럼 돈을 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돈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마음을 심어주든가, 아니면 돈을 잘 벌 수 있는 기술을 집어 넣어주거나 말입니다. 그리고 공부라고 한 사람에게는 주사 한 번 맞으면 잘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 학생은 자기 부족함을 잘 인식할 수 있는 주사를 놔 주면 됩니다. 그리고 이 학생은 운동이라고 했는데 운동을 잘 할 수 있게 해 주거나 운동 자체를 좋아하도록 성향을 집어넣어 주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연 우리 인생을 힘들게 하는 어떤 요소들은 행복하게 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동전의 앞뒷면처럼 말입니다. 예를 들어, “아, 진짜 너무 좋다! 진짜 너무 좋다!” 라고 한다면 이것은 수없이 좋지 않았던 경험들이 있었던 사람들만이 “아! 좋다! 너무 좋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와, 휴식이다! 쉬니까 진짜 너무 좋네!”라고 한다면 힘들게 노동을 해 본 사람만이 그 기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너무 좋다!” 이것은 외로움을 느껴봤던 사람, 혹은 미워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행복감을 삶 속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어두움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빛의 고마움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아까 공부라고 이야기했는데 생각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이야, 내가 이만큼 해냈어! 나도 공부를 하면 되는구나!” 이것은 못 해본 사람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이것은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가난하고 궁핍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 “난 진짜 풍요롭다! 넉넉하게 사니까 이렇게 좋구나!” 하고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공각기동대를 보면서 느낀 것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장면 중에 하나는 엄마가 나옵니다. 쿠사나기 모코토가 엄마를 찾아 자기 집을 갑니다. 그런데 그 엄마에게 딸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으니까 “1년 전에 나갔어.”, “어떻게 된 거야?”, “잘 몰라. 자살했다고 경찰에서 연락이 왔는데 나는 그렇게 믿지 않아.”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말합니다. 공각기동대 전체를 보면 인간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습니다. 자기가 끊임없이 전뇌를 통해서 우량한 인간으로 바뀌고 네트 속에 들어가는 이야기만 나오지 인간이 누구와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거나 하는 내용은 나오질 않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이 작품에서 추구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 존엄성의 문제인데 철학에서는 크게 세 가지 이론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내재론, 내재적인 이유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이유가 인간 자신 안에 있다고 봅니다. 우리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다운 짓을 하지 않을 때도 기본적인 인간으로서 그를 존엄하게 대해줘야 할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인간에 대한 예의이기 전에 그를 창조한 신에 대한 도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상황적 이론입니다. 이것은 존엄의 이유가 사회질서에 따라서 가변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안락사를 생각해 봅시다. ‘Me before you’라는 영화에서 다루는 문제도 굉장히 철학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렇게 좋은 기억을 심어주었지만 남자가 얼마의 유산을 남기고 안락사가 가능한 스위스로 죽으러 갑니다. 안락사는 상황적 존엄입니다. 내가 더 이상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고 했을 때 살기 싫은 삶은 살라고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본인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죽습니다. 그에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은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그렇게 죽이지는 말고 도저히 살 기운이 없다고 하면 예수를 믿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고 그게 안 된다면 냉동시키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당신이 선택할 수 있다면 200년 후에 다시 살아나서 한 10년 살아보다가 진짜 안 좋으면 다시 냉동이 되든지 죽겠다고 한다면 좀 낫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이것이 상황적 존엄입니다. 내재적 존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안락사는 안 된다고 합니다.
자, 이게 내가 읽어낸, 보석같이 빛나는 영화 전체에 대한 이해를 좌우하는 몇 개의 대사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오우레 박사가 누구인지 아실 것입니다. 쿠사나기는 메이저, 소령의 계급인데 사실상 쿠사나기를 만든 사람입니다. 쥴리엣 비노쉬가 오우레 박사의 역할을 했는데 이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기억에 집착하지만 기억은 우리를 정의해주지 않아.” 여기까지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인간관에서 이륙해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것이 아니라 행동, 현재 내가 행동하는 것이 우리를 정의 한다는 것입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이것이 마지막 대사로 나옵니다. 굉장히 철학적인 내용입니다. 그 다음으로 오우레 박사가 쿠사나기 모코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는 네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라. 너는 인류의 미래야.” 이 대사가 말해주는 것은 결국 지금 사람의 몸에서 “응애!” 하고 태어난 사람은 정신을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라고 보고 그냥 일상적인 교육과 삶 속에서 형성되는 것을 내버려둔 채 기계적인 작용을 하지 않아서 열등한 인간이 되는 사회는 매우 매우 불행하고 무가치한 사회이고,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 인간을 우량한 인간으로 만들어 낼 때 그것이 우리 인류의 미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제기하고 싶은 반론이 이것입니다. “도대체 좋은 사회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데이터를 이해하고 정보의 바다에서 어마어마한 사실들을 알고 신체적으로 특성이 우수해서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빨리 도달하는 것, 등을 한다고 할 때, 그것은 성능이 좋은 차에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차가 어디로 갈 것인가? 그리고 왜 거기로 가는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가는가? 이런 것을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그런 것을 제시하지 못 합니다. 그 말을 하니까 미라, 쿠사나기가 하는 말이, “제가 그 말을 들으니 참 외롭네요.” 합니다. 이 대사는 참 인간으로서의 모코토가 느끼는 외로움입니다. 미래에 자신이 희망이라고 하니까, 나중에 자신이 첫 번째가 아니라는 98명이나 죽였다는 것을 깨달은 데에서 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 생각할 때 그 속에는 “관계”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쿠사나기의 동료 흰머리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뭐가 달라? 꿈, 현실, 상상, 모두 같은 거야.” 이 현실이 현실인지, 상상이 현실인지, 현실이 상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친구들 가운데 게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게임을 많이 하십니까? 게임을 많이 하면서 몰입하고 나면 착각, 착시현상이 일어납니다. 이 게임이 현실같고 현실이 게임같이 느껴집니다.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보셨을 것입니다. “매트릭스”는 “층층이 되어 있다”는 뜻인데, 거기에서 보면 그곳을 통과하고 나니까 현실이라고 알았던 사회가 모두 프로그램 되어 있던 가상사회였고 내려오고 나니까 현실이 나옵니다. 이렇게 될 경우에 현실이 인식 속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가상세계에 몰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가상세계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현실세계에서는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고 많은 대가를 치러야하기 때문입니다. 토탈 리콜에서도 보면, 메뉴를 선택하게 하는데 우주를 탐험하는 삶을 살 것인가, 서부의 영웅이 될 것인가, 등등 선택을 하면 그 속에서 자신이 움직이면서 마지막에 프로그램대로 뭐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현실 그 자체에 혼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과 맞설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쿠제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그렇게 실험을 통해서 전뇌인간이 되었는데 그게 진화의 기회가 될 줄을 알았으나 시간이 흐르고 보니까 나는 그것을 뛰어넘어서 진화해 버렸다.” 인간이 계획된 대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기술이 발전되어 확 뛰어넘은 것입니다.
현대 사상에서 특이점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 용어는 천문학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기술의 발전이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폰을 보십시오. 저는 2008년도에 만들어진 폰을 쓰고 있습니다. 제 것과 여러분의 것, 두 가지를 놓고 대조해보면 지금 것은 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메모리가 128기가가 되는 아이폰이 나오고 앞으로는 256기나 512기가도 나올 것입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폭발적으로 발전한 기계를 놓고 비교해보면 두 가지가 기본적으로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발전했습니다.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 이정도인데, 이것이 점점 빨라질 것입니다. 처음에는 1988년도만 해도 모토로라에서 나온 벽돌만한 휴대 전화기가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사람을 때리면 죽을 정도로 컸습니다. 식빵처럼 컸습니다. 그것도 아무데서나 통화가 되는 게 아니고 어디 근처를 가야 통화가 됩니다. 그리고 제가 1993년부터 휴대폰을 사용했는데 20년 넘게 쓴 것입니다. SK에 충성했는데 해주는 것도 없습니다. 그때도 보면 배터리가 20분 사용하면 다 떨어지고, 전파가 터지는 곳이 있고 안 터지는 곳이 더 많았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폭발적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런 벽돌 같은 것으로 시작해서 그 다음에는 요렇게 발전하고 또 요렇게 발전하는데 그 비율이 똑같은 비율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수학적인 곡선으로 그리자면 이렇게 그리면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게 너무 폭발적으로 발전해서 거의 직선 가까이 올라가는 상황이 온다는 것인데 그때를 특이점의 시대가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가 가진 모든 사고의 틀을 다 깨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폭발적으로 발전해서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면 전혀 새로운 것들이 나와 있고 기계자체가 진화해서 완전히 새로운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휴대폰 같은 경우 매번 새 기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휴대폰 자체가 스스로 진화를 해서 새로운 기능을 스스로 업데이트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사용하는 아이폰 같은 것의 dictation 기능 같은 것은 한 사람이 계속 그것을 사용하면 정확도가 계속 상승합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 스스로 진화합니다. 영화 터미네이터 같은 것을 보면 나옵니다. 그런 시점이 올 경우에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세계관 같은 것들이 모두 무너지는 때가 오고, 그것을 특이점이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진화가 인간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때 인간은 과연 그 기술을 통제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한카 책임자와 오우레 박사와의 대화입니다. “모든 데이터를 다운받고 제거해라.”합니다. 테러리스트와 연합해서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오우레 박사는 “안 돼, 그녀는 내 것이다. 그녀가 비록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고스트는 남아있다.”고 대답합니다. 한카 책임자는 “그놈의 고스트 때문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 고스트는 인간이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유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것 때문에 망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사고방식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내 것이다.” 라고 하는데 또 “너는 물건이 아니야.”라는 말도 합니다. 헷갈려합니다.
오우레 박사가 마지막에 한카 무리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빨리 기억을 다운로드받고 제거해버리라고 하니까 실험실에서 제거하겠다고 하는데 오히려 기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활성화시키는 것을 집어넣고 마지막에 저장장치를 그녀에게 주면서 “빨리 도망쳐, 이게 너의 진짜 기억이야.” 하고 자신은 죽습니다. 결국 이것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 여자가 그렇게 98명의 사람을 희생시키는 프로젝트에 헌신해서 결국 그 프로젝트를 아주 우수하게 성공시킵니다. 그때까지는 오직 우수한 인간을 만드는 것 하나에 집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사람도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제정신이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쿠사나기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뇌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의체이지만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랜 세월을 과학기술에 헌신하고 로봇을 만드는 일에 몰두해왔으면서도 이 여자를 향한 마지막 사랑의 표현이, “미라, 빨리 도망가. 이게 네 진짜 기억이야.” 하고 여자를 도망치도록 하고 자신은 장렬하게 죽습니다.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입니다. 아까는, “건드리지 마. 그 여자는 내꺼야.”라고 할 때는 기계에 불과했고, 오우레 박사가 한카의 지시대로만 했으면 자신을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에게 옛날 기억을 주는 것이 그녀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기억을 찾아간 결과 자기의 정체를 알게 됩니다. 가출한 학생 중의 하나였습니다. 착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이 가출했겠습니까? 문제가 있으니까 가출했을 것입니다. 가출해서 불량서클, 불량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가출 학생들의 모임에 어울리고 그러다가 과학기술에 항거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경찰이 들이닥쳐서 체포되고 경찰은 그 과학기술에 항거하는 위험한 반동분자들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젊은 몸을 의체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억에 직면하는 것이 이 쿠사나기에게 행복이었을까?, 즐거운 느낌이었을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면서 자기의 과거에 대한 진실에 직면합니다. 그런데 왜 오우레 박사는 미라를 향한 마지막 사랑의 표현이 그녀의 기억이 담긴 usb를 그녀에게 돌려주는 것이었겠습니까? 그녀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든 그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이겠습니까? 마지막의 표현이 왜 그것이었을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 이미 이러한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자신은 누구인가?” 우리가 굳이 이 공각기동대와 같은 현실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만약 인간의 정체성이 기억에만 있다고 할 때 중대한 문제가 생겨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어느 한 순간에 치매에 걸려서 기억이 모두 상실되어 버리면 그때 나는 내가 아닌 것인가? 나라고 봐야 합니까? 아니라고 봐야 합니까?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내가 치매에 걸려서 완벽하게 기억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내도 알아보지 못하고 여러분도 알아보지 못하고 무슨 직업에 종사하면서 일평생을 살았는지도 기억이 없습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릅니다. 그때의 나는 나입니까, 아닙니까? 왜 대답을 못하십니까? “나” 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가장 중요한 기억이 없는데 말입니다. 신체? 신체? 신체도 변했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오. 사고가 나서 심각하게 훼손이 되었다든지 혹은 줄기세포를 통해서 한 20년 정도를 뒤로 갔다고 생각해 보십니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여러분은 쉽게, “그것도 나 입니다.” 할 수 있습니까? “지, 정, 의”라고 하셨습니까? 지식의 내용도 없어지고 느끼는 감정도 달라지고 따라서 의지의 행사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지, 정, 의”는 인간 모두가 가지고 있는 능력, 기능입니다. 내가 A도 아니고 B도 아니고 “나”라고 하는 근거가 되기에는 약합니다.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나를 기억하는 사람에 의해서? 만일 그들의 기억이 모두 조작된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결국 이 질문에 대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깊은 감동으로 밀려온 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것은 우리 개별적인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기억까지 사라지고 우리가 생각했던 모든 관계까지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나 일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않든지 나는 나입니다. 다른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 중 아무와도 같지 않은 개별적인 영혼을 내가 가지고 있고 내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 한 나는 나 일 수밖에 없고 그 영혼과 물질이 유통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까?, 물질에 의해서 잠식되거나 영혼에 의해서 물질이 잠식되어서 경계가 모호해져버리고 실제가 사라지는 과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질문에 기독교적 관점에서 단호하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맨 처음에 인간의 정자와 난자를 채집해서 시험관에서 아기가 태어난다고 할 때 많은 기독교인들이 논쟁을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심각하게 도전하는 것이다.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태어난 인간은 영혼이 없을 것이다.” 라고 까지 주장을 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시험관 아기로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벌써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들을 영혼이 없다고 보지 않습니다. 사고 자체가 막혀있으면 말도 되지 않는 엉뚱한 틀에 갇혀서 생각하게 됩니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띄웠을 때 교회에서 엄청나게 분노했습니다. “하늘에는 새가 날게 하셨고 인간은 흙을 밟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공중을 새처럼 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하신 자리를 이탈하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다.” 라고 했습니다. 지동설도 마찬가지였지만 우리는 지금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모두 고려하면서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전의 시대에 어느 부분까지 우리가 그 기술을 가지고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서 문을 열 것인지,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주체성을 더 가지고 고민해야 합니다.
문화는 계속 바뀝니다. 결단코 제가 여러분 나이였을 때는 “성형수술”이라는 단어 자체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고가 나든지 불이 나서 입이 붙었을 때 그것을 의학적으로 찢어내서 제대로 기능하도록 만들고, 너무 흉한 모양의 피부를 긁어내서 피부를 복원하는 것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런 의학적인 문제가 없어도 얼굴을 예쁘게 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하나님이 주신 얼굴을 맘대로 손댄다고 그것을 죄라고도 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형수술이 죄입니까? 아닙니까? 돈 벌어서 열심히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결혼을 해서 딸을 낳았는데 엄마, 아빠 둘 중에 누구도 전혀 닮지 않았답니다.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던 중에 명절에 처갓집에 놀러갔는데 옛날 앨범을 보게 되었답니다. 자기 딸과 똑같이 생긴 아이가 사진 속에 있었답니다. 알고 보니까 자기 아내였답니다. 성형 수술한 것은 유전이 되지 않고 원판이 유전됩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한 번 해 보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이 계속 발전하면서 우리가 고민하면서 기독교적 답변을 찾아가야 할 문제들입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포스트 휴머니즘도, 트랜스 휴머니즘도 우리 기독교의 입장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전통적인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그런 과학기술을 어느 정도 우리가 수용할 수 있을까? 하는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변함이 없는 성서와 변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고민하면서 그 속에서 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이상입니다.
<질의 응답>
질의 1) 고등부 3학년입니다. 뒤에 구멍을 뚫어서 성격을 바꾸거나 자질을 바꾸는 미래가 올 수 있다면, 자신의 본성 같은 것을 바꾸어서 절제하게 되고 죄가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면 기독교에 말하는 죄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답변 1) 저는 그런 과학기술의 발전이 극단적으로 발전하면 살인, 폭력, 사고 등의 문제들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3년 전에 유럽을 갔을 때 TV 에서 독일의 자동차 산업에 대한 특징이 나왔는데 완전자율주행차량이 나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벤츠에서 만들었고 시연을 하는데 도시의 자기 집에서 타고 어디 어디를 가고 싶다고 하니까 차가 출발을 해서 도시를 지나고 고속도로를 지나고 산길을 지나고 농촌을 지나서 어느 한적한 농가주택에 정확하게 주차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벤츠에서는 2018년에 양산을 하겠다고 했는데 정말 내년에 나오는지 보고 싶습니다. 지난번에 구글 차량이 사고 난 것도 1억6천만 분의 1 이었다고 하는데 나중에는 자동차 안에서 운전대에 손을 대면 범칙금을 내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생각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겨우 15초간 자율 주행하는 차량이 나왔는데 그렇게 놓고 본다면 결국 가까운 시일 내에 자동차의 후면충돌이나 정면충돌이 굉장히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과학기술에 대한 관점들을 인간에게 적용시켜서 인간 자신을 그렇게 조정해서 살인을 못하게 하거나 범법을 못하게 하는 기능을 넣으면 지금보다 훨씬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과연 도덕적인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도(道) 라는 말은 우리 바깥에 어떤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덕(德)은 기본적으로 영혼의 힘입니다. 인간 자신의 영혼의 힘이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합니다. 그 힘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힘입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이렇게 사랑이 자기 속에서 솟아나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하기 싫은데도 그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선한 것을 선택하는 그런 사회가 도덕 사회이지 프로그램자체가 되어서 그렇게 움직이는 사회를 과연 도덕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리고 죄 문제를 이야기 했는데 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떤 악이나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 자체가 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살아가려고 하고 영화에서 보듯이 자기를 극대화하는 것, 자기가 중심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죄입니다. 아마 이 안에 있는 죄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럴 수는 있을 것입니다. 성폭력을 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들을 유전자적으로 아예 제거해버린다든지 하면 사람들이 성 불능상태가 되고, 아이를 낳아야 하면 구청에 가서 이야기하면 이틀 동안 풀어주거나 리모컨 스타일로 해서 비디오가게에 가서 빌려서 보고 나면 일주일 후에 싹 지워지는, 우리나라에는 아직 없는데 미국에는 일반화 되어 있어서 빌린 비디오를 반납하지 않습니다. 빌려가서 이틀인가 일주일이 지나면 저장된 내용이 다 사라져버립니다. 그것처럼 이틀 동안 아기를 갖도록 해주면 이틀 동안 부부생활을 할 수 있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 소멸해버린다면 성범죄가 현격하게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도덕 사회라고 말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살려고 하는 것을 아무리 물리적인 방법으로 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미 있는 정보를 토대로 무엇인가를 계속 선택하도록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은 기계와 과학이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질의 2) 고등부 2학년 윤예진입니다. 저런 사회에서 뇌만 빼고도 온 몸이 다 의체인 상황인데 그런 상황에서 사람의 영혼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자와 난자가 아닌 다른 인공적인 것으로 사람을 만들어 내면 그 사람도 영혼이 있고 그 사람도 전도해야하는 대상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2)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런 상황일 것입니다. 굳이 난자와 정자를 결합시켜서 인간을 만들 필요도 없고 줄기세포로 뇌만 배양해서 뇌를 만들고 그 뇌가 독자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가정할 때,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영혼을 가진 존재로 봐야하지 않을까, 신학적으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의체와 결합되어서 만들어질 때 굳이 오우레 박사가 했던 것처럼 사람을 죽이고 뇌를 꺼내거나 뇌와 신체를 분리해서 각각 다른 의체를 입혀서 사이보그로 만들고, 그 몸을 사용해서 다른 뇌를 집어넣어서 제 3의 인간을 만들고, 그것도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화에서는 과학적인 코드가 맞지 않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아까 몸에 꽂는 플러그 이야기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 영혼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조심스럽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독자적으로 사유하고 판단하고 도덕적인 결정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렇게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질의 3) 고등부 1학년 이솔진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마음에 영접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는데 기억을 잃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면서 다른 삶을 살아간다면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답변 3) 이 영화와는 별로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이것과는 별개로 질문한 것입니까? 그것은 저의 신학적인 판단으로, 어떤 사람의 구원이라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기억에 의존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어느 날 아들의 늦게까지 자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아들이 얼마나 힘들까? 늘 좋은 운동화를 사달라고 졸랐는데 가엾구나. 하면서 좋은 운동화를 사라고 15만원을 뒷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엄마가 외출할 때 그 말을 한다는 것이 깜빡했습니다. 아들은 자기가 자는 동안 엄마가 운동화 사라고 돈을 넣어주신 것을 모르고 다닙니다. 그 아들이 그것을 모르고 다닌다고 해도 뒷주머니에 15만원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까 사실이 아닙니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식할 때까지는 운동화 가게에 가지 않을 것입니다. 돈도 없는데 왜 운동화가게에 가서 15만 원짜리 운동화를 신었다 벗었다 하겠습니까? 구원도 똑같이 팩트입니다. 그래서 한 번 하나님이 구원하셔서 그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면 그가 기억을 잊어버렸다고 할지라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봐야합니다.
질의 4) 안녕하세요? 저는 2학년 8반 김대성입니다. 제가 구원받은 것 같습니까 안 받은 것 같습니까?
답변 4) 구원을 받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까? 안 받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까? (받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은 것을 본인이 믿느냐 안 믿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냐 아니냐 라는 것입니다. 실제가 자기의 확신보다 더 중요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본인도 자기가 구원받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받지 않았다고 한다면 못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구원을 갈망하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가장 중요한 표입니다. 자, 그러면 본인 자신이 그 질문에 대해서 삶으로 마음으로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입증해야 할 때입니다. 자, 일어나십시오. 박수! 저기에서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가져오십시오. 박수!
질의 5) 1학년 김민서입니다. 목사님께서 아까 오우레 박사가 미라에게 “너는 내것이다.” 라고 했다고 다시 “너는 너란 존재다.”라고 한 것에 대해서 굉장히 모순적이라고 생각하셨는데 오히려 저는 기억이 사람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고 행동이 정의한다고 나왔었고, 마지막에 죽을 때가 되서는 “이게 네 기억이야. 도망쳐” 하면서 기억을 통해서 너를 찾기 바란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저는 이런 점에 대해서 오히려 모순점을 느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5) 그렇습니다. 오우레 박사도 그 말속에 많은 모순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오우레 박사가 처음에는 미라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98명이나 실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아주 우수한 사이보그가 된 것입니다. 그 아이를 보면서 자신이 엄청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그 아이의 기억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만일 그 아이가 쿠제를 만나서 기억을 더듬어가지 않았더라면 오우레 박사는 영원히 양심의 가책에서 자유로운 채 미라를 그런 식으로 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기억을 미친 듯이 찾아가고 결국은 찾아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이 미라에 대해서 양심이 많이 움직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어떻게 보면 오우레 박사는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기계들의 범주를 벗어나서 고스트가 활동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을 보면서 인간성이 회복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자기가 진심으로 미라를 사랑하게 되고 이 미라에게 자기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생명을 버려서라도 그녀의 정체성을 찾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일이 미라에게는 전혀 유쾌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 저장장치를 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을 하면 아마 큰 오류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질의 6) 안녕하세요? 보조교사 입니다. 아까 냉동인간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안락사를 말씀하셨는데, 그 사람을 차라리 냉동을 해서 미래를 살게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하셨는데, 저는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강권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인간이 과학의 힘으로 강제적으로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도 또한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있을 수 있는 사건으로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6) 제가 늘 반복하는 명제 중에 하나는 “살아있는 한 인간은 살아가야 한다.” 입니다. 그것은 반박할 수 없는 명제입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살아있는 한”, 이것은 “육체의 생명”입니다.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육체적인 생명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 매슬로의 심리학에 나오는 인간욕구의 단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생식과 안전입니다. 오줌 누고 싶을 때 맘대로 눌 수 있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어야 하고 외부로부터 자기가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위협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욕구 자체가 위협을 받고 있을 때는 이것만 되면 살 것 같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죽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화장실을 갈 수 있다.” 예를 들어 베네치아에 가면 정치적인 엄청난 숙청이 이루어질 때 그 아름다운 도시들에 무자비한 형벌을 가합니다. 그 중에 제일 무서운 것이 사방 1m 되는 쇠 상자, 철장 속에 사람을 구겨 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가 버립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사람 몸이 우그러진 상태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배변을 모두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을 잠을 안 재우고 먹을 것을 줘도 목숨을 부지할 정도만 주면서 일주일 정도를 그렇게 내버려두면 거의 미쳐버리는 것입니다. 고문을 그런 식으로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의 가장 큰 갈망은 안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도달하면 인간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단계로 계속 올라가고 마지막에는 자아실현의 단계가 됩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실현하면서 자신의 인상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런 사회가 되도록 꿈꾸고 자기를 바깥에 펼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악 간에 옳으냐 그르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아까 이야기 한대로, 물론 내가 이야기한 “살아있는 한 살아가야 한다.” 는 명제에 비추어 본다면 매우 비겁한 행동입니다. 지금 그냥 용기를 가지고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인데 열심히 살다가 죽어야 하지, 그걸 비겁하게 비상구처럼 열고 도망가서, “지금 이 사회에서는 아무래도 쫄려서 못 살겠으니 냉동시켜주고 200년 후에 다시 나와 보면 사회가 달라져 있지 않을까? 그때 좀 살아보고 싶어.” 할 때, 과연 200년 후에 다시 나와서 삶이 가능해지겠습니까? 나이가 이만큼만 먹어도, 여기 김동기 목사님도 이제 아저씨 아닙니까? 여러분이 잘 안 쳐주지 않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채팅방에 들어가서 청소년인 것처럼 했더니 다른 사람이 채팅 대화를 보고, “어? 이상하다. 너 아저씨지?” 하더랍니다. 여기에서도 말이 안 통하는데 200년 후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사는 것이 훨씬 낫지, 어떻게 200년 후에 그 사회를 극복하며 살아가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200년 후에도 계속 냉동상태로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비겁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어떻게 보면 죽여 버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죽게 내버려두는 것보다 말입니다. 스위스 같은 곳에서는 자기가 원하면 죽게 합니다. 지난번에 65세가 넘은 부부 둘이서 함께 가서 죽은 일이 있습니다. 왜 그랬냐고 하니까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누릴 만큼 누렸다고 하고 조용히 주사를 맞고 죽은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잠깐 얼렸다가 다시 뚜껑을 열어주는, 그런 장치라도 만들어 두면 좀 낫지 않을까 생각한 것입니다. 최선은 아닐 것입니다.
질의 7) 저는 고등부 2학년 정예린입니다. 아까 거짓된 기억을 심어줄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사이보그에게 예수님을 믿었던 거짓된 기억을 넣어준다고 하면 그것도 구원으로 볼 수 있는지, 그 거짓된 기억이라는 것을 모르고 산다면 그것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답변 7) 안 믿는 사람인데 믿었던 것 같은 기억을 심어준다는 것입니까? 사실은 내가 믿지 않는데 예전에 내가 교회를 다녔고 그리스도인이라고 기억을 넣어주어서 작동하는 대로 교회도 가면서 사는 경우에 구원받은 것이냐는 것입니까? 구원받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기억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사람이 태어나는 것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영어로 말하자면 Nonexistence, 비존재였습니다. 없었습니다. 18살입니까? 19년 전에 자매는 없었습니다. Nonexistence, 비존재였습니다. “비존재가 있었다.” 이런 말은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무(無)”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경험이기 이전에 팩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우리 영혼이 죽었던 상태에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내가 태어난 것 같은 착각으로, 기억이 아무리 그렇게 착각하고 있더라도 여전히 그 사람은 안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억을 아무리 많이 넣어 주었다고 해도 그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자처럼 흉내를 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잘 했습니다. 박수.
질의 8) 고등부 교사 추은상입니다. 아까 나왔던 질문에서 연장선상에 있는 질문인데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배양된 뇌도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면 영혼으로 봐야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는데 사실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전기적인 기억이든 사람의 기억이든 물리적으로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데 저희가 뇌의 일부분을 수술해서 제거하면 기억이 없어지기도 하고 전자적인 데이터도 어딘가에 위치가 있는데 사실 영혼이라는 것은 물리적으로 장소를 특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교리반에서도 충만적으로 있다고 하셨는데
(아니, 영혼이 충만적으로 있지는 않습니다. 제한적으로 있습니다. 피조물이 제한적 존재, 한정적 존재, 충만적 존재인데 충만적 존재는 하나님만이고 제한적 존재는 마귀, 인간의 영혼, 그리스도의 인성, 이런 것이고 나머지는 장소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눈에 보여지는 만져지는 사물들입니다.)
제가 용어를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실 사람의 영혼이라는 것은 뇌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해해야 하는 부분인 것 같은데, 아까 이야기 하신 부분에서, 뇌를 배양해서 그 존재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영혼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라고 하셨는데,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배양된 뇌에 영혼이 있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주 안에 들어갔다고 봐야 하는 것인지,
답변 8)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어떤 것을 사용해서 뭔가를 만들어 냈을 때 그것을 자기가 창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조크가 있습니다. “하나님, 드디어 우리가 복제인간을 만들어냈습니다. 우리가 드디어 당신의 영역에 도전했습니다. 우리와 당신은 동급입니다.” 했더니 하나님께서, “내가 만든 물건 쓰지 말고 해봐.” 하시더랍니다. 왜냐하면 복제인간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상태에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사고에 따라서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까 이야기했듯이 라이트형제가 비행기를 띄울 때, 지동설이 나왔을 때, 그리고 시험관 아기가 나왔을 때, 그리고 지금 줄기세포 배양에 성공을 했는데 그것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치료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내 간이 완전히 고장나서 이 간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 간을 배양해서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것을 집어넣습니다. 하나하나 그렇게 하다보니까 원래 부모로부터 받은 것은 거의 없고 실험실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장기라고 하는 면에서 본다면 뇌도 그 중에 하나로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본다면 만약 인간이 복제를 통해서 인간복제가 어느 순간 성공해서 영화 The 6th Day 에 나온 것처럼 복제인간이 탄생한다고 할 때, 저는 그렇게 혼란스러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장려하고 환영할만한 일은 아니고,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끊임없이 도전하지만 그러나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 복제인간은 영혼을 가진 인간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아까 이야기했던 뇌 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로 뇌 하나만을 놓고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따지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개혁신학에서는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몇 가지 학설이 나뉩니다. 저수지처럼 인간의 영혼이 함께 있었는데 사람 하나가 태어날 때마다 영혼 하나를 받아서 나온다고 하거나 부모로부터 물려받는다는 유전설도 있고 성경적으로 가장 가깝다고 보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설입니다. 매 사람마다 인간의 영혼은 창조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점도 있습니다. 엄마가 악기를 잘 다루면 대부분 딸도 악기를 잘 다루게 태어나고 아빠가 운동을 잘하면 그 자녀도 운동을 잘 하도록 태어나고 아빠가 심장병이 있으면 그 아들 손자도 심장병의 인자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설명하기는 좀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른 것들이 가진 위험성들을 극복하는 것이 창조설입니다. 그러나 그 영혼이 창조되는 시점이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난자와 정자가 결합되었을 때 영혼이 주어진다고 하는 것은 가장 극단적인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고 마지막에 아기가 태어날 때라고 보는 것도 있는데 나오려고 하다가 다시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그리고 조산한 아이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뱃속에서 몇 개월이 되면 아기가 사람처럼 행동하고 기뻐하고 우울해하고 운동하기도 하는데 그 아기는 영혼이 없다고 봐야 하는 것인지, 엄마 뱃속에서 나오는 순간 영혼이 주입된다고 봐야 하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이 있다고 보는데 그러면 결국 인간이 만들어진다고 볼 때 뇌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무래도 다른 장기들과는 다르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간이 하나 만들어졌는데 그 간이 사유를 하고 도덕적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닌데 뇌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뇌가 과학적으로 발전해서 독자적으로 의체를 다 연결했을 때 그 의체를 가지고 사유하고 행동하는 기능을 온전히 가지고 있다면 영혼을 가진 존재로 봐야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추론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전도도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나오십시오. 박수!
질의 9) 안녕하세요? 고등부 교사 배현희입니다. 영화에서 결국은 청소년 문제가 발생을 하고 아이들이 잡혀가서 메이져도 만들어지고 하는 것을 보면 미래 사회에서도 청소년 문제의 해결이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청소년 문제가 관계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미래에 분명히 감정과 의지의 문제가 해결이 된다면, 지금도 인공지능이 있는데 사람과 유사한 어떤 존재(로봇), 네, 로봇이 만들어지면서 감정과 의지의 문제가 해결된 인공지능이 만들어진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 청소년들은 어떻게 이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지, 저희는 이미 늙어버렸지만 우리 학생들은 그 사회를 만나게 되고 그들과 공존하게 될 텐데, 이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걱정됩니다.
답변 9) 본인도 걱정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한참 살아야 하니까 말입니다. 최근에 로봇 목사가 나왔습니다. 독일의 루터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이번 주에 어떤 말씀을 들을까? 위로에 대해서 듣도록 위로를 입력하면 그 로봇목사님이 위로에 대해서 설교를 하는데 인간 목사가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은혜를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별로 없는 가운데 설교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내용에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로직(Logic)이 잘 형성되지 않은 사람은 말갈 데 소갈 데 가면서 논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이것이 다 되어 있고 이미 그 곳에 수만 편의 설교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인간 감정에 호소하는 쪽으로 설교하도록 입력하면 심지어는 스스로 작문도 합니다. 인공지능이 소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잘 썼다고 합니다. 그렇게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것 가지고도 논쟁이 있었는데 저는 그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로봇이 설교를 했지만 로봇이 은혜를 끼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치 목사님의 설교를 mp3 파일로 받아서 듣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다만 그게 실제가 아니라 자기가 구성해서 쏟아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사람들이 그 설교를 듣고 변화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방법이 정말 성경적으로 권장할만한 방법이냐고 한다면 우리가 쉽게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최근에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미국의 로봇회사에서 새로운 로봇을 출시하면서 예약자를 받았습니다. 섹스 로봇인데 가격이 무려 1700만원입니다. 그런데 순식간에 1만여 명이 예약을 했습니다. 그 회사에서 한 얘기가, “이 로봇은 당신을 충분히 만족시킵니다. 현재 20가지의 스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로봇과 한 번 같이 자 본 남자는 절대 사람과 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미래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모든 이야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왜 이렇게 흘러가고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인간인 것, 그것은 관계를 맺는 힘입니다.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몇 달 전에 여기서 카프카의 “변신”으로 토론을 했습니다. 그때 가족들이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다들 딴 주머니를 차고 있고 자기 혼자 바보짓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네가 사람들을 사랑하고 자신을 희생해도 그것이 네 인생의 의미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계를 끊어버리고 외로운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도 끊어버리면 인간은 다 고립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자유롭기는 한데 무시무시한 자유입니다. 카프카의 “변신”을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에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그것을 다 끊어 놓은 상태에서는 어떤 존재인지 규명이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지금 이렇게 프로젝터가 있습니다. 이것을 다 뜯습니다. 아마 몇 백 개의 부품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를 꺼내서 이 앞에 까만 보자기를 놓고 거기에 던져 놓습니다. “자, 여러분 이 부품을 볼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누가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어디서 나온 부품인지, 그리고 이것이 무슨 기능하는 기계의 부품인지도 모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계를 다 끊어서 던져놓고 나면 인간은 자기 자신도 자기를 규정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공각기동대의 철학적 배경은 극단주의적 기계론적 유물론적 인간관입니다. 유물론이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물질 밖에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고상한 사랑, 영혼, 마음, 이런 것은 모두 하나의 기능이라는 것입니다. 물질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자, 그렇게 보면 어떤 문제가 나옵니까? 그러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을 전제로 하면 우리에게 의무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이렇게 해라, 이것은 죄다, 이것은 아니다, 이런 것을 인간 자율성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습니다. 동성애? 왜 나쁜데? 그건 왜? 합니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 대학 교수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지금도 계실 것입니다. 그분과 심방을 하면서 함께 식사를 한 적 있었는데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여대인데 여학생들이 모여서 혼전순결에 대해서 토론을 한 것입니다. 거기 예수 믿는 학생들이 많으니까 발제자로 나와서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고 해서 대세가 그쪽으로 다 기울었다고 합니다. 그때 한 여학생이 손을 들고 나와서 발표를 하는데 얼굴도 예쁘고 그 과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얘들아, 나는 좀 생각이 달라. 결혼하기 전에 남자와 살아보는 것도 좋은 인생의 경험이야. 내가 살아봤는데 꼭 그런 나쁜 것만은 아니야.” 라고 하는데 한 순간에 확! 하는 파워가 느껴지더랍니다. 그리고 한 번에 제압이 이루어지더랍니다. 더 이상 반론자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절대적인 도덕적 기준이 사라지고 나면 “왜 그래야 하는데?” 라는 질문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런 쪽으로 사회가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마지막에 남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가? 내가 평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 내가 어떤 때에 가장 만족을 느끼는가? 그런데 그것을 극대화해서 남을 해치게 되면 그게 메아리가 되어 내게로 돌아와서 나를 불안하게 하니까 그것은 안 되고, 그러면서 공리주의적인 개념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완전한 도덕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보면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텐데, 젊은 청년들을 만나보면 열 명중에 두 사람은 매우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결혼생활 자체가 가능하지 않은 사람들이 눈에 보입니다. 여러분도 말이 잘 안 통하고 의외성인 사람에게 저 사람은 4차원이라고 하고 뇌구조가 완전히 다르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공각기동대에서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를 향상하고 광대한 네트워크의 바다 속에서 자기가 그 시대를 살아가기에 가장 적합한 우량의 품질을 가진 존재로 끊임없이 승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과연 거기서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행복은 그런 것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제가 내리고 싶은 결론은, 결국 저런 것들이 아무리 발달되더라도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까 이야기했듯이 지금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요인은 우리를 아프고 힘들게 했던 요인과 동전의 앞뒷면처럼 같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쪽을 탈각시켜버리면 일해보지 않은 사람이 휴식의 달콤함을 알 수 없듯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인간이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리고 인생사 속에서 끊임없이 얘기치 못했던 일들이 일어남으로써 쫄깃쫄깃하고 맛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도전도 느끼고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식의 사회를 극대화시키는 것은 옳지 않고, 결국 우리는 개별적 영혼의 실재를 가진 존재이고 그 영혼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존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하고 사람과 관계하는 속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여기가 어거스틴 파크입니다. 아까 『영원 안에서 나를 찾다』를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천재라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지만 이 사람은 제가 천재로 인정합니다. 이분이 그런 고민을 무지하게 많이 한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마지막 내린 결론이, “하나님, 당신은 왜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까?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손해가 납니까? 손해가 난다면 하나님이 아니실 텐데 그런데도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시고 사랑하지 않으면 벌을 주실 것처럼 협박하시면서 까지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이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찾아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이 필요 없는데, 하나님은 당신 창조하신 우리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하고 자기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의 사랑 속에서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할 윤리적 정당성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앞으로 인생을 행복하게 살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에서 행복과 보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래전 어느 날 딸이 고등학교 다닐 때 교복을 입고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아빠!” 하면서 뜨거운 포옹을 합니다. “웬일이야?”, “아빠, 나 정말 좋은 일이 생겼어!”, 우리 딸이 그렇게 행복해 하는 모습을 평소에 본 적이 없었습니다. “왜 그러니?”, “힘들었던 친구와 오늘 저녁에 화해를 했어. 난 너무 행복해!” 그게 인생입니다.
오늘 집에 돌아가서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내 인생에,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그 사람들이 있음으로 여러분이 누군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만남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과학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해서 손가락 까딱하는 소리 하나에 복제인간이 태어나도 우리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폭발적인 과학의 기술이 우리를 행복 근처에도 못 데리고 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행복을 못 느끼는 상태에서 과학이 발달해서 의체를 입고 100년, 150년, 재수술에 재수술을 해서 300년을 산들 그게 무슨 인생이냐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의미를 찾고 그 안에서 감격하고 눈물을 흘리고 그래서 희열을 느끼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