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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 바른 무교병
만일 그것을 감사하므로 드리거든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 희생과 함께 드리고(레7:12)
녹취자: 박은경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화목제의 규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화목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올리는 제사였고 이 제사를 히브리어로 샤렘이라고 불렀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샬롬이란 단어와 동일한 어근입니다. 이 화목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개인적으로 감사한 일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올리는 감사의 제사였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서원한 일과 관련하여 드리는 서원제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누가 강요하는 사람이 없지만 스스로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올리는 낙헌제 혹은 자원제가 있었습니다. 이 제사가 끝나고 나면 그 제사 후에 그 모든 음식들을 레위인과 함께 헌제자와 함께 빈부와 귀천이 없이 노비까지 함께 모두 먹고 마심으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한 가족이라고 하는 것을 신앙적으로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화목제는 개인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국가적으로 경사가 있고 감사한 일이 있을 때 공동체적으로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이러한 감사, 화목의 제사에 바쳐지는 제물에 관한 규례 중 일부입니다. 바쳐지는 제물을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가 바로 기름 섞은 무교병이었습니다. 구약에서 무교병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발효되지 않은 떡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트를 넣지 않은, 발효되지 않은 떡을 화목제의 첫 번째 제물로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절에는 예수님이 이 누룩을 바리새인의 외식에 비유하셨습니다. 성경은 이 누룩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제시하기도 하고 부정적인 방법으로 제시하기도 하는데 부정적으로 제시할 때에는 외식 혹은 부패한 교훈을 가리키는 것이고 긍정적으로 제시될 때에는 복음의 영향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서말의 가루에 넣은 한 줌의 누룩비유에서도 아주 분명해집니다. 오늘 여기에서 화목제에 바쳐지는 이 무교병은 그런 의미에서 누룩을 부정적으로 보고 해석해야 하는 대목입니다. 누룩이 없는 이 떡이 제사에 바쳐진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모든 공경하는 삶이 순수하고 꾸밈이 없는 진실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가식과 거짓, 위선과 허위가 없는 마음 중심의 단순함과 순수함에서 우러나오는 경건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바쳐질 만한 가장 훌륭한 제사입니다.
여러분은 칼빈이 기독교 강요 초판을 쓸 때에 자신이 기독교강요를 쓰는 목적을 순수한 경건을 위해서 쓴다고 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한 번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주님을 믿고 소명을 받았다고 하지만 우리가 진실하지 않은 적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거짓과 허위, 위선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예배와 기도, 이런 많은 섬김들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쳐질 수 없게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가 완전한 사람일 수는 없고 완벽한 삶을 살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기준에 우리자신을 비추어보며 그 말씀에 신실하게 합치되는 삶을 살려고 해야되는데 이것이 바로 진실한 삶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고백록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당신이야 우리에게서 당신을 감출 수 있지만 우리는 당신으로부터 우리를 감출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당신에게 모두 드러났으니 고백하지 않은 들 주님이 모르시는 것이 무엇이 있겠사옵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바로 꼬람데오의 삶입니다. 위대한 설교자, 큰 교회의 목회자, 많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학자가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꾸밈과 거짓이 없는 순수한 경건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무교병이 기름을 섞어서 반죽을 한 무교병이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신자가 하나님 앞에 신실해지는 데 있어 성령의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구도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고는 누구도 진리에 합치되는 진실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기적을 행하고 커다란 목회적인 업적을 이루는 데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셔서 가장 즐겨하시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도록 만드십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칼빈이 구원받은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할까를 말하는 가운데 온전함과 순수함을 꼽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그 신앙을 딛고 이 세상에서 어떤 업적을 이루고 성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찬송)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는 기름을 바른 무교병입니다. 이것은 무교병을 빚어두고 그 위에 기름을 바른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이 부분을 맛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메시아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이것은 기름 부은바 된 전병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내면화하는 데 치중해 왔고 개인화에 하는데 헌신해 왔기 때문에 내가 마음속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한번 구원받고 주님이 우리를 견인해 주시기 때문에 이러한 확신을 강력히 갖고 있으면 우리의 삶은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결국 우리의 삶의 개혁과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이 기독교는 우리 한국사회에서 그렇게 많은 욕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이렇게 내면의 신실함과 외면의 올곧음, 이것들이 분리된 종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도처에서 들려오는 거짓, 추문 그리고 차마 입에 담기 싫은 도덕적인 수준의 저하들은 현저하게 기독교 선교에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선교가 문제가 아니라 정말 그것이 진실한 기독교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의 저명한 학자인 리차드 멀러교수가 강의를 하게 된 것을 나는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오랫동안 이 일에 대하여 기도해 왔습니다. 예배시간에 어느 개인을 높이기 위한 의도는 전혀 아닙니다. 제가 교수님의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의 4권의 책 중 첫 번째 권을 읽으면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던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내가 신학을 연구하면서 너무나 오랫동안 궁금해 했던 것들을 모두 설명한 중요한 챕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삶의 지혜로서의 신학이라고 하는 항목이었습니다. 즉 우리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이었던 화란 신학자 패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가 이야기했듯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위한 것이 바로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휘치우스라는 신학자는 신학을 가르치고 경건을 배우지 않는 것은 위선이라고 설파하였습니다. 처음부터 이 둘은 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 많이 신학한 사람들은 더 윤리적이어야 합니다. 물론 누구도 완전한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도덕적이 되어야 하고 윤리적이어야 합니다. 마음 속에서는 늘 깨뜨려지고 변화되고 새로워지지만 많은 갈등과 죄의 유혹들이 우리에게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를 먼저 안 사람들이고 바로 그 지혜를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르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위대한 청교도 존 오웬은 하나님이 구지 사람을 교회의 목회자로 세우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그렇게 살 때 그가 얼마나 행복해지는 지를 교인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천사가 아니라 사람을 목회자로 세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철저하게 우리 신앙의 고백을 반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칼빈주의자가 이 세상에서의 명예나 직위를 위해서 잔재주를 부린다면 그가 어떻게 칼빈주의자일 수 있겠습니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는 칼빈주의자가 자기자랑에 심취해 있고 이 세상에서 오는 좋은 평판에 가슴이 설레고 이것이 사역의 이유가 된다면 그가 어떻게 칼빈주의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보이는 앞에서는 도덕적인 사람이 사람이 없을 때에는 부도덕해 질 수 있다면 꼬람데오를 외치는 칼빈주의자가 어떻게 그 사람을 칼빈주의자로 인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드러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 말씀의 표준에 맞게 살도록 몸부림치는 자기부인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는 이 전병과 함께 드려진 것이 고운가루를 빚어 구운 과자라고 했는데 사실은 떡입니다. 이 고운 가루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하면 절구를 찧거나 맷돌을 갈면 곡식의 분말이 나옵니다. 그것을 그냥 만들지 않고 채에 칩니다. 걸러내고 그것을 또 가느라란 채에 칩니다. 그러면 가루가 아주 미세하게 되겠죠? 그런 미세한 입자로 떡을 만들게 되면 미감이 훨씬 부드럽게 됩니다. 그런 고운 가루를 빚어서 불에 구워서 하나님께 예물로 바쳤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분들은 아십니까? 이것은 바로 누구든지 구속의 은혜에 감사해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열납될 만한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기를 원하는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자기깨어짐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예수원을 평생 섬기다가 돌아가신 토레이 신부님을 기억할 것입니다. 돌아가시기 전 그 분이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우리 예수원에는 많은 형제, 자매들이 옵니다. 그 중에는 아주 예쁜 자매들도 올라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도대체 누가 육신의 정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이 세상 자랑과 세속적인 삶으로부터 나는 이제 완전히 떠났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현세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세상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철저한 참회의 생활입니다. 때로는 정욕이 솟구치고 때로는 물질에 대한 욕심이 생기고, 때로는 소명과는 상관없이 내가 이 세상에서 주인이 되어보고자 하는 자만심같은 것들이 우리 안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회심한 사람이 죄에 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토해놓는 처절한 고백입니다. 그 위대한 사도도 그런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면 우리 같은 사람은 얼마나 많은 그런 고백 속에서 살아갑니까? 그래서 교부 터룰티아누스는 자기의 글 속에서 말하기를 나는 회개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찬양) 우리 죄악과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때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절대 그래서는 안 되는 일에 악한 마음을 품을 때도 있고 때로는 그 악한 마음을 실행하여 죄를 지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이지만 항상 순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에게 길이 있으니 죄가 없다고 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사도요한이 선언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우리에게는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바로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던 그 죄를 위해서, 거기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내가 그렇게 사랑한 그 죄 때문에, 변하지 않는 나의 이 완악함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힘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사상의 힘, 하나는 윤리의 힘입니다. 이 사상은 산 같아야 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기독교의 힘은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사상은 높은 산과 같아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물같아야 합니다. 산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언제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에는 그 거룩한 진리의 빛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깊이 통회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이제껏 믿었던 자기신뢰를 버리고 하나님 의존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17세기의 신학자 휘취우스가 자기의 책속에서 마음을 쏟는 간절한 기도야말로 그 사람이 경건하다는 최고의 표지라고 단언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서 온 것입니다. 산 같은 사상을 위해서는 치열하게 공부하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17세기의 유산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나는 바랍니다. 위대한 사상을 가지십시오. 철저한 윤리의 삶을 사십시오. 우리의 힘으로 그것을 할 수 없으니 또 하나의 제 3의 힘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power of grace, 은혜의 힘입니다. 우리는 비록 약하나 그리스도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통절하게 우리 자신을 깨뜨리며 회개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죄들을 이기고 주의 거룩하신 임재 앞에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산 같은 사상, 물 같은 마음, 그리고 철저한 윤리적인 삶으로 이 어두운 시대를 가르는 한 줄기의 빛이 되기를 두 손 모아 우리 하나님께 비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