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와 간구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녹취자 : 오희열
오늘 아침에 신문을 보니 싱글로 사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아직 결혼하지 않고 혼자 계신 분들을 향해서 동정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사람들은 빨리 죽는답니다. 수명이 5년 정도 짧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한 사람 가운데는 죽고 싶은 사람이 많답니다. 어차피 이리 가도 고난, 저리 가도 고난입니다. 그래서 결혼하지 못한 분들이 심한 박탈감을 느끼실 필요는 없습니다. 결혼한 우리들이 먼저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기사가 있었습니다. 혼자 있어서 우울하게 지낼 때 면역력 형성이 현저하게 방해를 받아서 1/3 이하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우리의 몸의 면역력은 우리 몸을 보호하는 갑옷과 같은 것인데 이 면역력이 떨어지고 나면 그 이후에 우리 몸 하나가 해체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패혈증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어떤 사람이 코털을 몇 개 뽑았는데 48시간 안에 죽었답니다. 어떤 사람은 아이들과 바닷가에서 조개를 잡고 이틀 만에 죽었답니다. 상처를 통해서 바이러스가 들어올 때 면역력이 거의 제로가 된 상태에서는 순식간에 핏속에서 바이러스가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48시간 안에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면역력이 없을 때는 무균실에 있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패혈증입니다. 이러한 면역력의 형성이 현저하게 방해를 받는다는 기사였습니다.
그래서 즐거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즐거워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고, 염려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염려가 되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의 마음의 주인은 우리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움직일 수 있고 자신의 마음을 자신도 어찌할 수 없어서 방임되는 순간이 한 순간이라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항상 말을 할 때, “나도 모르게…”, “나도 감당할 수 없게…” 이런 표현을 쓰곤 하는데, 대부분 거짓말입니다. 그 속에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 영웅주의적인 과장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사로잡으시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도 결국은 우리의 주체성을 강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하나님이 급하시면 빨리 인도하시니까 그것을 어떤 강제력처럼 느껴지는 것이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강제력이라는 표현자체는 ‘enforcement’인데 물리적인 강제력의 방식으로 우리 마음에 강제력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느꼈던 영혼에 대한 신적인 강제력은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불타고 있었던 자신의 사명감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염려의 문제가 나옵니다. 성경은 이 염려를 불신앙과 비슷하게 분류합니다. 왜냐하면 이 염려가 두 가지 인데 하나는 신령하고 거룩한 것들을 위한 염려와, 또 하나는 세속적이고 육적이고 지상적인 것을 향한 염려입니다. 이 두 가지는 각각 우리에게 다르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전자에 속한 것들은 그 사람이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내 눈의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르나이다” 하며 노래하고, 예레미야가 황폐하게 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너희에게는 내 마음에 내게 임한 것 같은 불이 없는가?”하며 물은 것도 바로 이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있어서 거룩함을 향한 추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황성주 박사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고민하는지를 우리의 몸이 안다고 합니다. 황성주 박사는 예방의학자인데 이 분의 책 한 권을 거의 읽었는데,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님의 의를 보면서 가슴아파하는 염려는 우리의 건강을 촉진한다고 합니다. 세포를 깨어나게 하고 활기차게 한답니다. 그런데 결혼을 못해서 슬퍼진다거나 돈 때문에, 욕망 때문에 근심이 되면 몸이 그것을 알고 죽음의 기운이 작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무엇인지까지는 설명하지 않았는데, 우리 몸에 건강하도록 자극을 주는 근심이 있고 파괴시켜버리는 근심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을 육체가 읽어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만약 아무 근심걱정이 없고 풀어지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적절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기사에서는 이것을 좋게 설명하는데, 염려하고 걱정하고 혼자 살아서 외로운 상황이지만 그것을 해석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면 그 사람을 성숙시키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사르트르가 이야기하는 불안이라는 것, 실존철학자들이 말하는 불안이라는 것이 없으면 성숙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14년 3개월 때 논둑에서 울었던 사건을 이야기했는데, 그때도 너무 불안했습니다.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걱정이 삶의 기반 자체를 뒤흔들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지만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 제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아마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았다면 스님이 되었든지 신부가 되었든지 했을 것입니다. 아마 무당은 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지저분해서 말입니다. 아니면 김용옥 씨처럼 이상한 것에 빠졌든지 말입니다. 아마 종교적인 것이 없이는 못 살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성숙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삶 속에서 일어나지만 대답은 삶 속에 없고 바깥에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자신의 삶이 남의 것인 것처럼, 유체이탈적인 사고를 하루에도 몇 번씩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그것을 선현들이 ‘반성’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유체이탈을 하지 않으면 반성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뭘, 그건 당연하지 나는 그렇게 해도 되지.”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들은 반성이 없는 것입니다. “정말 나는 좋은 사람일까?”, “나는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정말 맞는 거야? 이거 거짓말 아닐까?” 이렇게 냉혹하게 자기를 이탈해야만 반성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씀하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이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감사하면서 염려하고 있는 것 같은 신령한 염려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도움이 안 되는 염려입니다. 희랍어에서 ‘염려하다’는 단어에는 ‘갈라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염려는 마음을 갈라지게 만듭니다. 설교를 하거나 목회를 할 때 정신이 온전히 하나로 모아져야하는데, 마음이 찢어지고 나면 몸으로는 부서지도록 일을 하지만 이 속에서는 초점이 맞지 않는 볼록렌즈로 불을 붙이는 것처럼 불이 잘 붙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사역을 했는지, 얼마나 오래 예수를 믿었는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주님께만 초점을 맞추고 자기를 쏟아 부은 시간이 있어야만 주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염려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염려하지 않으려고 결심하면 우리가 염려를 안 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명령형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아라.” 여기서 염려는, 염려가 되는 사건들이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을 우리가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개 집사가 열린공간에서 네 욕을 바가지로 하고 있더라.” 이런 말을 듣고 기분이 좋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꽉 붙들고,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굴까? 왜 그랬을까? 나의 어떤 면을 보면서 그랬을까?’ 상상을 하면서 그것을 끌어안으면 이 속에서 염려가 증폭되면서 마음에서 자라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끌어안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는 것과 똑같은 과정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들리는 이야기를 하나도 듣지 않고 자기 멋대로 가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단 한 마디에 그것이 맞을 것이라고 믿고 휘청거리는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실수하게 됩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들리는 이야기가 다가 아닙니다.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런들 어떠랴.’하면서 한 걸은 떼어 놓고 생각하고, 사람이 나를 잘 이해해주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평생 가도록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해서 어떤 사람은 결혼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했어도 헤어지기도 합니다. 이게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는 ‘쿨함’도 인생에 있어서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런 일들을 통해서 무엇을 돌아보게 하시는지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염려가 극단으로 가게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결국은 신앙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일어난 일, 그리고 나의 피하고 싶은 현실도, 우리 인생이라는 극본에는 주인공이 항상 잘 나가고 박수 받는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당하고 찌그러지는 때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이런 각본이 쓰여 있어서 내가 그냥 이런 길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가끔은 남의 일인 것처럼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불안과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믿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된다고 할지라도 결국 우리 인생의 모든 만사는 주님의 손 안에 있다, 그리고 결국은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고백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염려를 이기는 구체적인 실천을 이야기합니다. “기도와 간구로” 라고 합니다. 같은 말의 반복 같지만, 기도는 넒은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교통을 의미한다면 간구는 염려가 되는 사항에 대한 구체적인 간청을 의미합니다. 내가 지금 경제적으로 어려움 때문에 염려가 된다면 다른 기도도 많이 하지만 그 염려로 떠오르고 있는 표적에 대해서 집중적인 기도의 공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렵습니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내게 주시거나 물질을 주시거나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장 돈이 생기지 않을 때도 있지만 적어도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나누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될 때보다 안 될 때가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모두 괴로워하면서 번민하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받아들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너희가 하나님 앞에 뭔가를 구하는데 고통과 불만에 가득 찬 태도로 구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결핍이나 고통이 생기거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박탈당할 때도 있습니다. 자기는 보통으로 가지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가지면 자기 스스로 박탈당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그런 상황을 불평하거나 염려하면서 빠지는 오류는, 그것 말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집중해야 할 것에는 온전히 집중하고 집중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집중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원숭이를 잡을 때 쓰는 방법이 있는데, 야자열매를 파서 주먹 하나만 겨우 들어가게 만들어 놓고 속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과일 씨앗을 넣어둔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씨앗을 잡으려고 손을 넣었다고 씨앗을 잡고 주먹을 쥐면 손을 빼질 못한다고 합니다. 욕심 때문에 그것을 놓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뭔가를 상실하고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힘들 때마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것이 자기 개인을 위한 것이고 육체적인 것이고 물질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는 사실이 내 인생의 본질을 뒤흔들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합니다. 이 집, 이런 나의 소유, 나의 평판, 심지어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 이런 것을 잃어버린들 그것이 내 인생을 뿌리째 흔들어 놓을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면 관계를 잘못 맺은 것입니다. 무엇과도 마찬가집니다.
중국에서 며칠 전에 유웅렬 교수와 이승구 교수와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저는 선배이고 유웅렬 교수는 40대 중반입니다. 이 교수가 지금 자기 인생에서 최고의 행복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워싱턴 교인들을 다 그곳으로 쓸려 들어온다고 할 정도로 말입니다. 설교를 워낙 잘합니다. 이런 얘기를 하다가 제가 말했습니다. “야망을 조심해라.” 유웅렬 교수는 워낙 순수하니까, “목사님, 저는 그런 야망이 없습니다. 교인이 3000명이 넘지만 저는 비서도 없습니다.”하는데 그건 또 아닙니다. 얼마나 일이 많은데 돕는 사람이 있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저는, “야망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없는 것 같습니다.”, “조심해라.” 그런 야망이 유웅렬 교수 자신에게 있었으면 자신이 엄청 불쾌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조심하라고 했더니 나중에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물어봅니다. “그럼 목사님의 경험에 의하면 도대체 그 야망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나는 유명해져도 보았고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듣고, 나 자신은 동의하지 않지만 나처럼 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 그런데 내가 나 자신을 돌아보니까 이제 나는 목회사역의 끝자락에 서 있는 사람이고 당신은 전성기인데, 나도 나 자신을 돌아볼 때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목사가 되고 싶다든지, 3, 4만 명 모이는 교회를 만들고 싶다든지, 누구처럼 순복음교회를 능가하는 교회를 해보고 싶다든지, 언론사에 돈을 갖다 주고 신문에 내 얼굴을 도배해서 지나가는 아이들도 내 얼굴을 알게 하고 싶다든지, 그런 적은 없다. 지금도 나는 토할 것처럼 싫은 것이 TV 에 내 얼굴이 나오는 것이고 내가 절대 하지 않는 것이 내 설교를 듣는 것이다. 내 이야기가 실린 신문기사 읽는 것도 싫다.”, “그럼 도대체 야망이 무엇입니까?”, “야망이란, 하나님 말고 다른 데서 기뻐하는 모든 것이 야망이다. 예를 들자면 사역에서 느끼는 보람, 이것도 야망이다.”그랬더니 그 교수가 한숨을 쉬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중에 그런 식으로 야망을 품은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여러분 중에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닙니다. 저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곳에서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는 한 우리는 끊임없는 그 즐거움을 확대해 나갈 것이고 그것이 곧 야망입니다. 은밀한 야망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굉장히 좋은 용어로 포장됩니다. ‘한국 교회를 위해서, 주님께 기도하다가 사명을 주셨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통해서 유익을 얻고 작은 교회들이 살아나고…”표현은 이러해도 다 섞여 있습니다. 누가 그것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은 긴 세월을 지나고 보니까 그것도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허무한 것이었습니다. 유명해본들 뭐가 좋습니까? 동네 목욕탕에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심지어 캐나다 뱀프 산꼭대기 목욕탕에서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는 게 뭐가 그렇게 좋습니까? 저는 홀로 조용히 있고 싶은데 뭐가 좋겠습니까?
일본에서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람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설국’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이 사람은 자살을 했습니다. 원인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너무 유명해져서 죽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로부터 이탈해서 껍데기의 삶을 살고, 자기 자신으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기대해주는 자기와 사실의 자신 사이에 너무 큰 괴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중압감을 견디다 못해서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친구들이나 사람들을 만나면 뻥을 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 대부분은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심리적으로 그렇습니다. 그것을 못 견디고 죽는 것입니다. 대체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삽니까?
우리가 뭔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될 때는 이미 넘치도록 주신 것,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했는데 나는 받은 것을 생각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순간순간 부딪히는 이 사물들이 주는 표상, 이것으로 말미암는 허황된 마음과 좌절, 여기로부터 우리를 일으켜 세우셔서 균형된 마음을 가지고 무엇에 의해서도, 심지어는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애착하는 물건을 빼앗길지라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죽음 저편을 불러 가셔도, 온 지구가 파멸에 이르고 나 혼자 남아도 삶의 뿌리까지 흔들리지는 않을 수 있는, 그런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체가 되는 것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심으로 이루고자 하셨던 우리의 삶의 실체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서 하나님 앞에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 안에서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것인데, 염려는 그 주체성을 계속 허물어버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