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8일 새벽예배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지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행 3:1~6)
녹취자 : 한지인
그런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을 2장 뒷부분에서 그려낸 다음에, 3장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그렇게 넘쳤던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바깥에서 나타나는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셨던 성령의 놀라운 은혜, 공동체의 사랑, 그리고 복음을 듣고 변화된 사람들, 그 안에 넘치는 은혜가 어떻게 교회 담을 넘어서 이 세상속으로 흘러들어갔나 하는 것을 3장부터 본격적으로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성도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은혜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박해가 없었으나, 그렇게 자신에서 부어진 은혜와 거룩이 교회 담을 넘어서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고자 할 때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교회 바깥에서도 나타나지만, 동시에 교회가 큰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도행전의 구도가 결국 교회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사셨던 그 삶을 아주 훌륭하게 구연해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야기 하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으니, 우리도 그 짐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자”라는 권유가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세례를 받기 위해서 요단강으로 나오실 때 비둘기처럼 내리신 성령의 은혜로 그분이 메시야이심이 알려집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고, 지난 30년 간의 사적인 삶과는 다른 메시야로서의 삶을 사십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의 고난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십니다. 그와 똑같은 것을 교회가 짊어집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감림을 경험하고 교회가 충만한 기쁨 속에서 말씀의 은혜를 받으며 떡을 뗄 때에는 박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부어주신 은혜와 거룩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교회의 담을 넘어 세상으로 나가고자 할 때에는 많은 박해와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난을 받는 곳에서 교회가 홀로 버려져있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강하게 그들을 붙드시고 도와주시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3장의 처음 뚜껑을 열면서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도하러 올라갔다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하루에 세 번 기도했습니다. 구약에서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던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다른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러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발견했습니다. 거기에 앉아있었던 이유는 그 자리가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도하러 올라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한껏 하나님 앞에 잘 보이려고 준비되어 있을 때, 아주 비참한 모습으로 앉아서 긍휼을 호소하면 사람들이 던져주는 몇 푼의 돈을 모아서 연명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부터 이 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계속 이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손을 벌리면서 구걸을 하니, 베드로와 요한의 그 유명한 이야기가 여기에서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를 보라”고 하니 얼마나 큰 돈을 주려고 보라고 하나 기대에 찬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사실, 이 말도 사실이 아닙니다. 2장에 보면, 사람들이 모여서 찬송하고 자기의 소유를 주장하는 사람이 없고 오히려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고 했습니다. 그 돈이 어디서 났을까요?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준 기금으로, 사도들은 그 돈을 모아서 평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재분배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돈이 많은데 왜 여기에서 없다고 했을까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한 말은 진짜 예루살렘에 돈이 없다는 것보다는, 내가 진짜 너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문제에 대해, 오늘 돈을 주어서 목숨을 부재하며 사는 도움도 필요하겠으나, 이것을 통해서 사도들은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불행과 고통의 일부분을 일시적으로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행과 고통의 근원을 고쳐서 그 사람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이라고 보여준 것입니다. 일어나서 걷고 뛰고 건강하게 되었으니 다른 사람에게 구걸할 필요가 없이 자신이 활동해서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 전체가 새롭게 회복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도 살아가는 그 회복이 돈 몇 푼 쥐어주고 오늘이나 내일 목숨을 연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명령했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렇게 해서 3장에서 처음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후에 계속해서 이런 원리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일부분으로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종교가 기독교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앉아서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돈을 구걸하며 하루하루 연명해가던 이 사람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고쳐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수많은 유대교 신자들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면서도 아무도 그의 인생을 그렇게 본질적으로 고쳐놓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이 일을 행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사실은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고쳐서 건강을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하려고 결심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그냥 하루하루 구걸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처럼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접근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복음은 이처럼 우리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고쳐놓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성령의 능력은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게 만들어서 우리가 일시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고쳐서 새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과 은혜의 능력을 가지고 고통하는 세상에 나아가서 그들을 근본적으로 고치는 이 일을 교회가 감당할 때 놀라운 변화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변화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