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시처럼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롬 16:12)
바울이 이 편지를 썼을 때 아마도 고린도에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직 만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을 믿으려고 애를 쓰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도가 무엇인지를 체계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이 로마서를 읽으면서 어거스틴이 회심했습니다. 그 후에 약 1100년 뒤에 마르틴 루터가 로마서를 읽으며 회심하고, 요한 웨슬리가 이 책을 읽다가 회심을 하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이 로마서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제 그 유장한 기독교 교리에 대한 가르침. 그 가르침에 입각하여 12장부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모든 교훈한 후에 편지 끝머리에 인상 깊은 일을 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많은 자신에 대한 동역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문안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사도바울을 알고 있었고 사도바울도 잘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인사를 한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여기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은 성경에 다른 데 안 나오는 사람입니다. 드루배나와 드루보사도 한 번밖에 안 나옵니다.
저는 오늘 두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고 그 뒤에 나오는 사람 버시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버시를 생각하면서 말하기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고 말합니다. 그 표현을 보면 사도 바울이 이 버시라는 사람을 아마도 여자였을 이 사람을 어떻게 그 여자에 대해서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인상이 얼마나 사도의 마음 깊이 배겼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첫째로, 주 안에서입니다. 이 사람은 사도 바울이 생각할 때마다 주 안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모든 신자가 예수 안에 있다는 뜻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들 가운데 주밖에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 안에 있는 사람.
(찬양)
주 안에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의 안에 있어
그게 무슨 뜻일까요? 사랑은 연합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볼 때에도 진짜 요즘에 주안에 있구나. 저 형제는 진짜 요즘에 주 안에 있구나. 무슨 뜻입니까? 예수와의 연합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람은 사도 바울이 회상하기에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성도를 사랑하는 연합 안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목회자의 심정을 여러분도 알겠지만 이것저것 마음에 안 들어요. 마음에 안 찹니다. 누굴 갔다 놔도 저만큼 못할까 싶습니다. 눈물로 기도를 합니다. 우는 자가 아는 자입니다. 나인 것과 내가 되어야 할 것 사이 격차를 아니까 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에 여러 달 동안 쌓였던 마음에 이 감정들이 한순간에 눈 녹듯이 녹습니다. 어떡하든지 ‘잘 가르쳐 줘야지. 격려해야지.’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족하지만 그 사람도 주님을 사랑하고 나도 주님을 사랑하니까 사랑해서 내려와서 볼 때는 서로 다른데 사랑으로 상승하고 보니까 모두 곁에 있습니다. 그 사람이 모든 것을 녹아주게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버시는 바울에게 그런 사람으로 깊이 가슴에 박혔습니다. 주 안에 있었던 여자.
두 번째는 수고했다 그랬습니다. 그 앞에 두 사람도 수고했다고 했고, 버시도 수고했다고 했는데 굳이 ‘많이’ 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괜히 그랬을까요? 괜히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개 어떻습니까?”, “열심히 했죠.”, “아무개 어떻습니까?”, “아주 열심히 합니다.”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버시하면 많이 수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수고가 무엇입니까? 괴로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누가 괴로운 것이 좋겠습니까? 힘든 것이 기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안타까운 것이 신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타깝기보다는 느긋하기를 원하고 힘들기보다는 편안하기를 원하고 괴롭기보다는 기쁘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누군들 안 그렇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주님도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물러가게 해주십시오.’ 그랬잖습니까?
그런데 왜 이 버시는 그런 일반적인 인성을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면서 많이 수고할 수 있었을까요? 자기가 좋아서 놀이로 푹 빠졌던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돌아올 때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그런 사람 없습니다. 선교사들 초창기에 선교사들이 와서 허약해지니까 과로해서 테니스를 했습니다. 예수 믿은 양반들이 보니까 화장실도 갈까 의심했던 선교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테니스를 치는 것입니다. 와서 공손하게 인사를 하면서 다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귀하신 몸인데 그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아랫것들 시키시지”라고 합니다. 그것은 수고가 아닙니다.
엊그제 생명의말씀사 사장을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한 사십년을 하면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요. 제가 처음 전도사된 지 40년이 다 되 가는데, 지금도 낯설게 느껴집니다. 단 한 번도 이 일을 위해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자신이 없습니다. 그게 목회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여기서 많이 수고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연적인 버시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주와 사랑으로 연합되어 있으니까 많은 수고를 하며 고통을 당해도 그것이 보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모두 견디면서 자신의 일을 감당해 나갔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세워놓으면 조금은 수고를 합니다. 거기 있다는 것 자체가 수고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버시는 많이 수고한 사람이고 사도의 마음에 아로 새겨졌습니다. 그만한 사람 만날 수 없을 정도로 그런 사람으로 아로 새겨졌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의 마음에 어떤 사람으로 아로 새겨져 있을까요? 특히 인생을 다 살고난 후 몇 년 몇 월부터 몇 일까지 열린교회 있었던 동안에 삶을 주님이 어떻게 평가하실까요? 거의 수고하지 않았던 사람은 조금 수고했던 사람, 많이 수고했던 사람일까요?
세 번째는 사랑한 입니다. 희랍어 성경에 ‘아가페 토스’입니다. 그래서 수동분사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랑받는’ 입니다. 그래서 우리 영어로 편지 쓸 때, ‘my be loved brother’ 나의 사랑 받는 형제에게. 물론 내게도 사랑을 받는 거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아가페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 아가페는 하나님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희랍어 신약성경에서는 까리따스와 아가페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냥 다 아가페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까리따스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무슨 뜻이냐면 많이 수고하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못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유능하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많이 헌신하는 것도 인정합니다. 개인적으로 별로 접촉하고 싶지 않습니다. 윗사람한테 인정받을지 몰라도 동료들에게, 아랫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이 사람은 아부해서 지도자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고 모든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이 자칫하면 독선적이기 쉽고 열성이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사람을 배척하기 쉽습니다. 눈에 안 차니까. 그러니까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디가도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 사람이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존재 자체가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잊혀지지 않습니다.
네 번째, 그 사람의 이름은 (Bersis, Persis) 버시였습니다. 학자들은 이름이 무슨 뜻일까 생각을 합니다. 저는 엄마가 지어준 예쁜 여자 이름인 줄 알았습니다. 여자일 거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페르시안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름도 아닙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조선족, 그런 것입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의 역사에서 보면 이방인입니다. 유대인인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입니다. 로마인들이 이방인 교회였으니까 그런데 버시니까 사실은 어떻게 보면 이렇게 나누는 것이 이상할지 모르지만 로마에 언제부터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민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페르시아 지방에서 온 타지인입니다. 어떻게 왔는지는 모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그냥 그렇게 사회적으로 대단한 신분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미국으로 따지면 그냥 저 아시아 촌구석에서 오든지 아니면 다 망해버린 해체된 소련의 저 가난한 나라에서 간신히 그저 밀입국해서 들어온 그러다가 간신히 간신히 체류를 인정받은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로마서의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으면 얼마나 많이 수고했으면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으면 이 여자가 기록이 되었을까?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가치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어디든지 십자가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결국 우리는 너무 하찮아도 하나님 쓰십니다.
몇 해 전에 여기 앉아서 밤중에 릴벡 총장하고 이야기하는데 자기가 얼마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는지를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수학선생님이었습니다. 핀란드에서 미국으로 조상들이 넘어와서 왔는데 언제 왔는지는 옛날에 왔겠죠. 그러면서 릴벡총장이 아버지 때에 수학선생님이었다고 했으니까 그 시절 미국도 많이 가난한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것도 시골에서 얼마나 가난하고 한미하게 살았는지를 말합니다. 들어보니 나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웃음) 그런데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이렇게 충성되이 여겨서 자기를 써주시는 것에 대해서 말하면서 눈에 이슬이 고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고날 때 워낙 특별한 것을 타고난 것은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배만 아프지 아무 도움이 안됩니다. 이렇게밖에 안 태어났는데 어떡합니까? 아무리 내가 요나스 카우프만이나 파바로티의 유튜브를 보면서 ‘드릅게 잘하네’ 하고 투덜거린들, 이 나이에 네슨 도르마를 부르겠습니까? 안 되는 것은 그냥 점잖게 받아들이고 그저 즐기는 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너무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버시 이름 자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기록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미한 가문에 태어났나요? 괜찮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고매한 신앙을 가진 장로님이나 권사님이 아니시라고요? 상관없어요. 유산이 많이 없다고요? 좀 상관있겠네요. 불편할테니까. 그러니까 큰 문제 없습니다. 왜? 어차피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버시처럼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