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1:3-4)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는 다윗 왕의 집안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말 성경 본문의 일부를 그리스어 성경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육신(肉身)에 관해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靈)을 통해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성결의 영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는 표현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의 부활이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이다. 둘째는 성령은 거룩하게 하시는 영이시다.
II. 바울이 경험한 혼란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오늘 이 성경을 기록한 인간 저자인 바울이 경험했던 한 가지 혼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세계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그리고 구원의 계획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어려서부터 믿어온 유대교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완고한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A. 십자가와 처형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처형과 심문에는 유대인 지도자들에 의해 고안된 교묘한 종교적인 책략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이었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유대인 최대의 명절이었고, 이 군중들은 예수를 사형시켜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울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15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예수를 죽이고 싶으면 사형시켜 달라고 하면 되었을 텐데, 왜 이 사람들은 사형 중에서도 유독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구체적으로 요구하였겠습니까? 이것은 사형시키는 방법까지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사주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종교적인 음모였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그의 죽음을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어떤 종교적인 신념과 결부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신명기 2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여러 죽음 중 유독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변명할 여지 없이 하나님이 직접 정죄하시고 심판하신 것이기에 그의 죽음에는 실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나무로 되어 있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그분이 선지자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죽은 큰 죄인임을 유대인들에게 확실히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달라고 매달렸던 이유입니다. 이것은 미래를 위해서도 아주 좋은 수법이었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을 낼지라도 백성들의 마음이 흔들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었으니 결코 부활의 소문이 사실일 리가 없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B. 예수 부활의 사건
사도 바울은 예수 부활의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가 메시아인 것을 믿고 회심하기 전 그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아주 독실한 유대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두 가지 뚜렷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심리적인 편견이었는데, 유대인만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이요, 나머지 인종은 쓰레기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신학적인 편견이었는데, 나사렛의 젊은 예수는 결코 메시아일 수가 없다는 확신이었습니다.
당시 사울은 정통적 유대인으로 엄격하고 보수적인 유대교주의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퍼트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분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기 위해 대제사장에게 오늘날 영장과 같은 공문을 청하고 다메섹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그의 일생을 바꾸어 놓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그렇게 믿을 수 없었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선교 역사를 바꾸어 놓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이 사건을 세 번이나 보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에 의해서 경험된 이 사건을 사도행전 9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울은 절대로 거짓말일 것이라고 믿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하신 모습을 직접 뵙게 되고, 그의 음성까지 듣고 답변까지 하게 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순간 커다란 혼란에 사로잡혔습니다. 왜냐하면, 모순되는 두 가지 사실이 그의 마음속에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 이것은 이미 어려서부터 유대교에서 배워 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바로 이 신앙에 결부해서, 예수는 나무에 매달려 죽었으니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를 받은 큰 죄인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예수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부활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직접 다메섹에서 목격한 사건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전승을 따라서 자기네 조상인 모세가 부활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외경 중에는 모세의 승천기라는 책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특별히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대단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 24절에는 에녹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는 이 세상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 올라간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열왕기하 2장 1절에 의하면 병거를 타고 하늘로 들리움을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구약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극소수의 사람에 지나지 않았고, 이 인물들의 특징은 하나님께 엄청난 사랑과 인정을 받은 종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이런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라고 그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부활하신 광경을 직접 보게 되었고, 그 음성까지 듣게 되었으니 사울은 매우 커다란 혼란을 느꼈습니다.
그 혼란은 무엇이었겠습니까? 만약에 예수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면,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실 리가 없을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진노하여 벌하신 죄인을 인정하셨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만약에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인물이어서 다시 부활시키실 정도의 대단한 인물이었다면 그를 저주하여 나무에 매달리실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동일한 인물에 대해서 극도로 저주하여 못 받고, 극도로 인정하여 다시 살려내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하겠습니까? 부인할 수 없이 이 두 가지는 모두 사울에게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가 나무에 못 박혀 죽은 것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그렇게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예수가 지금 살아서 부활하여 자기 앞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III.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경험함
그러면 그는 말할 수 없는 이 엄청난 모순을 어떻게 극복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메섹 사건은 사도 바울에게 지성에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적인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예수 죽음의 이유가 이제껏 자신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예수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예수가 죽으신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께 짊어지게 하신 죄 때문에 저주를 받으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는 자기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구원하고자 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고 그렇다면 저주를 받은 것과 주님이 부활하게 하신 것,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죽은 것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저주를 받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서 오히려 다시 살리심을 얻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모든 죄가 인류에게 들어오게 되었고, 한 사람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저주를 받으므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살리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깨달음을 그 후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죽음이 예수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죽음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한 대리적인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두 가지 사실의 모순은 해소되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평생 두 가지의 편견은 깨졌습니다. 그리고 정반대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과 모든 인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뚜렷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깨달음의 핵심은 예수가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즉,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기 위해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깨달음을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그는 직접 목격했습니다. 이제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속죄를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 커다란 깨달음이었습니다. 그의 일생은 이 사실을 깨닫기 전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이었고, 이것을 깨달은 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이 구원의 은혜, 대리적인 죽음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고, 그 사랑은 그에게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복음에 있어서 그는 빚진 자가 되었고,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평생을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가 되었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여 자기와 같이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그들을 위한 죽음이며, 이 죽음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일에 자신의 신명을 바쳤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 모든 사람이 죽음에서 벗어나 예수의 생명을 누릴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더 이상 요약할 수 없는 복음에 대한 가장 짧은 성경적인 묘사는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Jesus died for us) 한글로도 네 단어이고, 영어로도 네 단어입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우리를 위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의 죽음이 우리에 대해 갖는 세 가지 의미를 보여줍니다. 첫째는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끔찍해 보일수록 바로 그 형벌이 내가 받아야 될 형벌이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죽음은 그분이 당하시고, 우리는 그 죽음 때문에 이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림처럼 묘사를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큰 형벌을 당해야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모두 끌어안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당신의 죄로 짊어지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형벌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셨고, 당신은 죽임을 당하시고 우리는 당신이 살려주신 것입니다. 마치 비행기 사고를 당했는데 엄마가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대신 죽음으로 아이는 살아났던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예수가 죽으신 것은 우리를 대표하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를 끌어안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를 대표해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사울은 이렇게 예수를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디도서 3장 5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는 하늘에 오르사 온 인류와 세상과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통치자가 되셨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어두운 지성을 찢고 들어오는 찬란한 한 줄기의 빛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이 찬란하게 비추자, 이제까지의 역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향해 달려온 역사이고, 이후의 역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시작되는 구원의 역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에베소서 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능력이 … 다시 살리시고 …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영혼의 어둠을 찢고 들어오는 한 줄기 섬광이었습니다. 빛이 없을 때에는 그 어둠 속에서 더러운 것이 더러운 줄을 모르고, 없는 것이 없는 줄도 모르고, 있는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찬란한 빛이 들어옴으로 예전에 가졌던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이 무너지고 새로운 것들이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새롭게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알고 보니 육적인 이스라엘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고, 이 껍질이 터짐으로써 밀알이 썩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가 생겨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알맹이는 버리고 껍데기를 위하여 충성하였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도 그는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생명 없는 차가운 율법과 그것에 대한 복종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게 되자 그는 성령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예전에 유대교 주의자로 살 때는 전혀 본 적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하늘 자원이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쏟아졌습니다. 진리와 함께 풍성한 은혜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지상에 있는 모든 샘물들은 태양 없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태양의 에너지를 받아서 식물은 화학 에너지로 삼고, 그리고 이것을 인간의 몸이 섭취함으로써 에너지를 활용하게 됩니다. 음식을 먹지 않고는 누구도 육체의 생명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육체의 생명입니다. 똑같이 인간의 영혼은 태양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사랑과 생명을 받음으로써 영혼이 힘을 얻고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말하는 것은 단지 미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고, 어디로 갈 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서의 인생의 의미를 자기가 온 곳과 갈 곳에 비추어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이 그의 인생에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의 삶은 불안하고 확실하지 않습니다. 두렵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이 세상의 쾌락과 오락, 그리고 정신을 다른 곳에 팔음으로써 언젠가 자신이 죽어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물론 우리는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날에 우리의 영은 온전하게 되어서 사랑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릴 것이고, 나팔 소리와 함께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완전한 육체를 입고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때의 미래에 누리게 될 영광과 부활의 생명만을 위해서 예수가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일생 동안 잊어버리지 않도록 생생하게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만약에 아직 이런 확신이 없는 분들은 속히 구원을 얻기 바랍니다. 어쨌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 세상을 사는 것이 괴로울 때가 없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목사인 저도 한때는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는 세상에서 뜨고 싶지 않은 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저와 같은 고난의 때, 그리고 절망의 때를 지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면 그 절망의 때는 그저 영원히 절망의 순간입니다. 다만 그것을 회피할 수는 있습니다. 정신을 딴 곳에 팔고, 너무 너무 괴로우면 술을 퍼마시고 곯아떨어져 버린다든지 아니면 오락에 빠져서 정신을 딴 곳에 팔아 버리면 마치 진통제를 맞은 것처럼 잠시 인생의 통증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맨정신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 순간을 잊어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못할 것입니다. 결국 괴로움은 괴로움으로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할 수만 있으면 딴 데 정신을 팔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매스미디어와 텔레비젼을 가득 메운 상품에 대한 광고는 대부분 우리의 정신을 회피하게 하기 위해서 나온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는 이런 고통의 순간을 피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몸은 너무 아프고, 마음은 가라앉았습니다. 불을 끄고 누워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밤이 내가 이 세상에서 맞이하는 내 인생 마지막 밤이었으면,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지더라도 내일 아침에는 제발 이 세상에서 눈 뜨지 말고 천국에서 눈을 뜨고 싶다." 그렇게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잠이 오질 않습니다. 이리저리 뒤척여도 잠이 오질 않습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습니다. 다행히 마음 한구석에서 속삭입니다. "일어나라, 주님께 가거라. 주님께 기도하거라." 아무 힘도 없이 일어나 두툼한 외투를 걸치고,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서 추운 날씨에 발걸음을 예배당으로 옮깁니다. 와서 보니 텅 비었고,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에 앉아서 기도를 시작했지만, 마음이 굳어져서 기도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너무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말조차도 할 수가 없으니, 사람과도 말을 섞기가 싫은데 하나님께 말하고 싶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기도하러 나왔으니 무엇이든 주님께 푸념하듯이 얘기를 했습니다.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나는 왜 이렇게 괴로운 인생을 살아야 됩니까? 주님,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내 주위에 있는 하나님 욕하고도 잘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그래도 믿어보려고 하는데, 왜 이렇게 괴로운 시련이 그치지를 않는 것입니까?" "저는 너무너무 외롭습니다." 기도를 하다가 나중에는 은혜가 아니라 자기 설움에 빠지게 됩니다. 눈물이 흐르고, 이윽고 나의 기도는 간절한 울부짖음으로 변합니다. 어느 순간에 자기 하소연이 하나님을 찾는 마음으로 바뀌었는지 는 모릅니다. 그래서 결국 마음을 쏟아 놓습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오 주여 아침에 내가 기도하고 주께 바라리다
그러면서 마음이 샘물처럼 터지며, 나의 설움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내 인생의 괴로움을 토로하고,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며 아파할 때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놀랍게도 고통의 이유가 내 인생의 곤고한 시련으로부터 이동하여, 예수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얼마나 괴로워 오셨을까 라는 사실로 이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이 세상의 고통으로 말미암는 이 괴로움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고통이 투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천 년의 간격을 뛰어넘어서 골고다 언덕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의 죽음이 내 마음과 영혼 속으로 실재화되어서 침투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물이 종이에 스며들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내 속에 스며듭니다. 그래서 실제로 나를 죽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죄, 하나님을 향한 원망, 절망하던 나, 이 세상을 떠나고 싶어하던 나의 이기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죽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치 뿜어져 나오는 소독약에 균이 죽듯이, 그렇게 내가 죽게 됩니다. 그렇게 죽는 나조차도 나 자신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픕니다. 그런데 그 아픔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에 투영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나의 이기심을 죽이는 것이, 죄를 죽이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웠으니, 자아가 깨지는 것이 이렇게 아팠으니,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죄를 위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실 때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찬양)
이 벌레같은 나 위해
주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따라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 자신의 죄와 이기심, 그리고 하나님보다 나를 생각하던 마음이 죽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당연히 절망도 함께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죽음이 이천 년의 간격을 뛰어넘어 나를 죽이는 이 고통과 함께 바로 동시에 예수의 생명이 내 속에서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죽어서 썩은 냄새나는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이 이 부활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간으로 생각하면 아무런 살 소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정말 내가 택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은 선택은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고통이 없고, 더 이상의 씨름이 없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솟구치면서 죄는 죽고 예수의 생명이 이천 년의 간격을 뛰어넘어 우리 속에서 솟아납니다. 마치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느냐 하면, 수맥을 전문가가 찾았습니다. 그리고 타공을 하기 시작합니다. 추공을 하기 시작합니다. 드릴로 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펌프를 박습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자마자 거기서 어느 순간 흙탕물이 솟구치기 시작합니다. 마치 몇 m를 솟아 오르면서 물이 솟구치기 시작하고, 그 흙탕물은 잠시 후에 맑은 물로 변하여 가뭄에 시달리던 수많은 농부들로 하여금 환호성을 지르게 만드는 것이니,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보다 더 기쁜 일입니다. 왜냐하면, 비는 내리다 멎지만, 땅에서 솟아오르는 용솟음치는 이 물은 결코 마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명을 불어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얼마 동안을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했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데, 기도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외투를 입고 교회당을 나섰습니다. 문을 열고 나서니 왔던 그 어두운 골목길인데, 올 때 봤던 그 골목길이 아닙니다. 절망의 골목, 그리고 나를 죽음으로 가라고 내몰던 골목길이 아니었습니다. 아직은 살만한 세상, 그리고 내게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나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내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주님 원망하고 낙심하며 사는 동안에 그분이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이것은 회개의 눈물이요, 기쁨의 눈물인 것입니다. “그래, 희망이 있구나. 하나님의 사람은 불변하니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 주일 손이 나를 붙들 것이다. 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가 있겠는가." 아멘 하며 아 왜 5 1명 카이 알고보니 이제껏 자신의 목을 짓누르던 그 무서운 인생의 문제들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너무 불행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봐야 죽는 것밖에 아닐테니, 그것은 정말 우리가 탄식하며 기다렸던 것이 아닙니까? 비로소 이제 자신에게서 놓여 나서 오히려 자기처럼 고통받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작년 통계를 보면 대한민국 사람 다섯 명 중에 한 사람이 심각한 외로움을 한 해 동안 느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그런 분 안 계십니까? 집에 돌아와도 가족이 나를 소외시키는 것 같고, 사회에 나아가 봐도 이제는 나의 때가 지나고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것 같은, 외롭다는 고립감을 느낀 적 없습니까? 오늘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두 가지도 없고, 딱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는 외롭지 않아" 하고 가슴을 두드리는 자신감도 아닙니다. 그리고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떤 사람이든지 여러분보다 더 불쌍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해 보십시오. 그가 여러분 가족이어도 좋고, 아니면 고아원의 어린아이 하나여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마음을 쏟으며, 진심으로 사랑해 보면 자신이 외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외롭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그분을 버리고 떠났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것에 대해서 책망하거나 낙심한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에 사람들이 예수를 버린 것만큼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고백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 주시는 것이지, 결코 예수의 절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부활의 생명을 앞당겨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인생을 살 수 없을 것 같고 죽을 것 같은 그때에 누군가가 와서 그냥 옆에만 있어주고 잠시 손만 잡아 주어도 다시 살고 싶은 희망이 생깁니다. 여러분들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해 내신 것은 바로 이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서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는 그 인생의 순간에 살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갑니다. 그리고 조용히 눕습니다. 아까는 너무 괴로워서 잠이 안 왔는데, 이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별빛처럼 마음에 빛나서 잠이 오지를 않습니다. 무엇 때문에 나 같은 이 못난 인간을 위해 예수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오늘 이렇게 당신을 믿고 의지할 때마다 부활의 생명을 나에게도 주시는 것인지 깨닫습니다. 이런 삶을 살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이 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경험을 매일 매일 반복하고 사는 것이 가장 최선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하루에 두 번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들은 절대 불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그 고통을 생각하며 한번 눈물을 흘리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면서까지 사랑하셨던 불쌍한 영혼들을 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그의 인생에 절망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처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생명을 누리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Ⅳ.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그 생명과 사랑을 잃어버린 채 힘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십자가로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부활의 생명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십시오. 십자가와 부활의 생명에 붙잡혀 이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불행한 세상을 하늘의 행복으로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