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말라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수 7:5)
녹취자 : 허혜숙
성경에서 마음이 물 같이 녹는다는 표현이 항상 긍정적으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부정적인 것이 여기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녹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원주민이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들고 건널 때에 요단이 말랐다더라, 그런 소문을 들으면서 전쟁은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이미 원주민들의 마음은 물같이 녹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두려움이 가져다주는 물 같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도 사람의 마음을 물처럼 녹이고 두려움도 마음을 물같이 녹입니다. 그런데 그 결말이 놀랍게 다릅니다. 은혜가 마음을 녹이면 하나님의 품으로 파고들게 되고 두려움에 마음이 녹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여리고성을 함락한 후 기세등등해진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아이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하는 그 장면이 꽤 길게 나옵니다. 아이성은 아주 작은 마을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이 주는 도덕적 교훈, 영적인 교훈이 너무 크기 때문에 상세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도대체 두려움 때문에 녹는 마음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은혜에 감동될 때에도 녹아버리고 두려움이 엄습할 때에도 녹아버리는데 이 두려움이 존 오웬의 표현에 의하면 surprise의 형태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늘 느끼는 그런 두려움이 아니라 확 하고 엄습하는 어떤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들이 마음을 물같이 녹이는 것입니다. 물같이 녹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하면 무엇인가를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없게끔 마음이 두려움에 의해서 지배당하는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생각할 때 호러 물 같은 것을 보면서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다양하게 쓰입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너는 왜 한 달란트를 그냥 내버려뒀니? 이자를 주는 사람에게 맡겨서 이자라도 받게 하지 왜 그랬느냐?’ 했더니 ‘주님이 매우 엄하신 분이신 줄 알아서 내가 두려워하여 묻었나이다.’ 했습니다. 결국 그것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갈팡질팡하면서 무엇인가를 하기도 하지만 그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에도 도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으로 우리를 한편으로는 얽어 메였던 것을 풀어주어서 하나님을 마음껏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고 한편으로는 우리를 꽁꽁 묶어서 아무것도 시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마음을 물같이 녹여서 우리를 악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옥한음 목사님께서 살아계실 때 한 이야기입니다. 해도 해도 안 되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오죽했으면 그 목회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개 목사 골목에서 붕어빵을 만들어 몇 년 팔다가 안 되면 잉어 빵으로도 바꿔보고 국화빵으로도 바꿔본다. 자네는 안 되는 것이 뻔한데 왜 똑같은 방법으로 계속하고 있는가? 그 목사님이 그 교회를 다른 도시로 옮기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합니다.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두려움 때문에 다른 것을 시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목회자에게 가장 큰 적입니다. 사람들은 나에게는 전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없다 그것이 내 달란트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논리에 뛰어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논리는 좀 빠지지만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사교적이지는 않지만 철저한 사람도 있고 반대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동등한 것을 주시지 않은 것은 인정합니다. 아, 어떤 사람에게는 적게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많이 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마음에 열정이 있는 사람은 안 되는 것을 계속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포기하지도 않고 하던 대로 계속 하지도 않으면 세 번째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렇죠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을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눈을 뜨게 해 주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최근 3년 동안에 나한테 너무 오버해서 야단맞은 교역자가 있었나? 생각해 봤습니다. 너무 뜬금없는 일을 해서 왜 그런 쓸데없는 일을 했냐고 나한테 야단맞은 사람 있으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에게는 모르겠는데 내 기억에는 별로 없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제는 담임목사님의 눈치를 잘 알아서 한다는 것도 있지만 도전정신이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깜짝 놀라고 아니면 한 번 무시당한들 어떠랴 생각하고 깊이 기도하고 생각해서 ‘목사님, 제가 이런 방법을 제안을 드립니다.’ 그래서 코로나 상황에서 독창적인 것을 내가 눈여겨 다 읽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한 사람은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나쁜 사람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고 있는 일을 더 순수하게 더 완전하게 더 성과 있게 하는 것도 훌륭한 일입니다. 그것도 끝이 없으니까. 어떤 사람이 성경만 설교했는데 그것 때문에 교회가 안 되는 사람도 있고 성경만 설교했기 때문에 교회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결국은 누가 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 표로 사역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시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시도하지 않고 세월이 흘러갈 때 그것은 (퇴화되어 버립니다.)
유요한 목사가 근육학에 대해서 알고 있잖아요? 모든 것을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보면 여기가 진통제를 먹어도 소용이 없고 눈물이 날 정도로 너무 아픕니다. 그래서 운동치료센터에 갔습니다. 거기에서 이렇게 보더니 몇 가지 동작을 해 보라고 합니다. 의사는 아닙니다. 저것이 마사지일까 할 정도로 마사지를 조금 해 주고 그 다음에 천천히 손을 드는 운동을 시키는 것입니다. 너무 오래 앉아있어서 이쪽에 있는 근육이 퇴화되어버렸다고 그게 지탱해주지 못하니까 창으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이 온다고 합니다. 경추도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매일 힘들 정도로 너무 아픕니다. 퇴화되어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예전에는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래도 흉내는 냈습니다. 이국주가 아이유 흉내를 내고 춤을 추면 비슷하게 따라는 할 수 있습니다. 이국주가 80이 되면 그것 못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전에는 따라서라도 할 수 있던 것을 이제는 아예 할 수 없게끔 사역의 근육이 퇴화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30대에 창의적이지 않던 사람은 50대에 가도 비창의적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키워야할 근력입니다. 퇴화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목회의 방법은 퇴화되어서 별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설교가 몇 십 년에 한 사람 나올 정도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왔다가 가고 왔다가 가도 그 설교 한편을 듣고 눈물바다가 될 정도입니다. 그래도 교회는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저는 회심하고 나중에 목사가 될 때까지 내 영혼 전체를 흔들어놓는 설교자를 못 만났습니다. 내가 은혜를 못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천둥처럼 울려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들은 다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내가 생생한 설교를 듣고 존 오웬처럼 회심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한 번도 없었습니다. 거의 없었습니다. 내가 그런 사람을 오랜 세월 못 만났는데 여러분 중에 한 사람이라도 그런 사람이 될 경우는 없지는 않겠지만 매우 적습니다. 그러면 그런 감화력이 없어도 목회는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마음이 녹으면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태만함으로 마음이 굳어집니다. 그래서 퇴화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푼 꿈을 안고 목회를 시작했다가 50세도 되지 않아서 목회에 대한 희망을 내려놓고 사는 목회자들이 많은 이유가 거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밖에 활동하는데 관심을 가져서 사회적으로 활동하는데 나가든가 아니면 그럴 처지도 못 돼서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든가 아니면 그런 열등감 때문에 중직들과 다툰다든가 이러면서 결국은 가장 힘겨운 중년의 때를 보내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 중 한 사람도 그런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목회의 길은 방파제 안에 있는 항구입니다. 저 바다 바깥으로 나가면 상상도 못하던 수많은 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바다를 얼마나 큰 배를 몰고 항해할 것인가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제 제자 중 한 사람이 17만 톤 배를 모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qualification은 두세 사람이 타고 다니는 뚜껑 덮인 고기잡이 항해사의 qualification과는 다릅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깊이 눈을 뜨면서 자기 자신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은 절대 다른 사람이 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충고해주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나부터도 남의 교역자에게 이러니저러니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제가 ‘늙음에 관하여’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입은 닫고 먹을 것이나 사 줘야 좋다고 하지 입을 열고 훈장질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인색해서가 아니라 말을 잘 안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것을 터득하면서 하나씩 둘씩 쌓여가는 것이니까 목회에 있어서 빛나는 지혜라고 하는 것은 평생 불교에 수행했던 사람 몸에서 나오는 사리와 같습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을 똑같은 자세로 참선을 하니까 몸 안에 여러 가지 물질들이 쌓이면서 사리가 맺히는데 개신교 목사도 기도 많이 하고 화상하면 그런 것이 나온답니다.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손에 있는 것을 네 손에 쥐어줄 수는 없습니다. 말을 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들어서 자기의 땀과 눈물과 피로 그것을 살아낸 후에야 자기의 사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크기가 결국 그 사람의 인물의 크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가볍게 듣지 마십시오.
보십시오. 모든 운동하는 선수가 슈퍼스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슈퍼스타가 된 모든 사람은 기본기가 탄탄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탄탄한 기본기를 가지고 살아갈 때 그것들을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변모가 가능해집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요즘 코로나 상황에서 여러분들이 많이 애쓰고 있는 것 너무 치하하는 바입니다. 물론 내 칭찬 받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치하하는 바입니다. 건강을 돌보십시오. 조바심을 갖는다고 목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시험에 들었다고 하는 사람 찾아도 가보고 교회에 대해서 꼬였다는 사람 만나서 타일러도 보고 이런 저런 일로 어쨌든지 간에 사람을 만나고 조직을 짜보고 시도도 해 보는데 무엇도 작동을 안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용히 모든 손을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가서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를 지나고 보면 하나님이 섭리의 손으로 사람들 마음을 움직여서 문제가 해결된 것을 봅니다. 그런 여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되는 사람의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마음을 쏟아놓는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입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워낙 안타깝게 여기는 일이면 아무것도 못할수록 마음은 더욱 안타까워지지만 그런 일이 아니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잊혀 져서 기도도 안 되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오히려 조바심 내지 말고 어떤 때는 한 걸음 물러서서 나의 시대가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나의 목회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주님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려놓고 하나님이 목회자이신 것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기도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놀랍게 하나님이 어루만져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목회에 변화를 가져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다시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로 배워야 됩니다. 그래서 자기 부서에서 마음을 쏟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결코 홀로 두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모든 두려움이 물러가게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왜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음을 물 같이 쏟는 사람들은 모든 두려움이 물러가게 하실까요?
기도를 시작할 때는 그 일이 꼭 그렇게 되기를 바래서 간절히 매달립니다. 마음을 쏟고 기도하다보면 자기의 죄가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어떤 경우에는 그 기도 제목을 접어버립니다. 주께로 가까이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음을 물처럼 쏟을 수 있는 사람에게 잃어버려서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주를 위하여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려니와’ 했습니다. 잃어버려서 안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짜 잃어버려서 안 되는 것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빼앗아가겠습니까? 세상은 갖고 싶어 하지도 않고 하나님은 누구에게 강탈당하신은 분도 아니시기 때문에 결국은 그는 잃어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무엇을 무서워합니까? 조바심 내거나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블(evil)한 일어났다고 하지 마십시오. 일어난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조용히 거기에서 마음을 낮추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간절히 부르짖읍시오. 일상을 어떤 때는 스톱해 보십시오. 나에게는 왜 이런 교역자가 없을까? ‘목사님 죄송한데 수요예배 못 나오겠습니다, 제가 금식하러 일주일 동안 기도원에 올라갑니다.’ 신학교 때 학기 때마다 담임목사님께 허락받던 일이었습니다. ‘목사님, 너무 죄송한데 다음 주에는 제가 교회를 떠나서 기도원에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허락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왜 그렇게 의외의 제안이 없을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아무도 여러분들을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조급한 마음을 제하십시오. 체력이 떨어집니까? 며칠 휴가내서 쉬십시오. 눈치 안 주겠습니다. 새벽기도 나오기 어려우면 아침기도 나오십시오. 그리고 며칠 쉬고 다시 할 만하면 새벽기도 나오십시오. 어차피 교역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너무 힘드시면 쉬십시오. 그 대신 마음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고정하십시오. 살든지 죽든지 내가 사명의 길을 간다. 사모도 똑같이 이런 일치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왜? 여러분 몇 년 있으면 담임목회 할 것 아닙니까? 나는 마당에서 하는 소꿉놀이입니다. 진짜 바람 부는 언덕에서 개척을 해 보십시오. 오는 사람이 없어서 사모와 나 놓고 설교를 하는데 사모도 당신 설교 듣기 싫다고 주일 예배에 안 나왔다고 합니다. 옛날에 있던 일입니다. 목사가 기둥에 거울을 붙여놓고 거울을 보면서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 심정이 어떤 심정일지 생각해 보십시오. 비참하다구요? 매일 나오는 월세는 어떻게 할 것인데요? 살고 죽는 문제입니다. 피해간다구요? 피해가도 그 사람은 그만큼만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만큼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고 강도사로 있다가 검은 가운 뒤집어 씌워준다고 해서 안수위원이 손 없는 그 날 부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서 청빙을 받아서 어느 교회 갔다고 카페트 깔린 강단에 올라가서 우뚝 설 때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다 벗겨서 목욕탕 안에 홀랑 놔둬도 그 사람 안에 있는 것만큼만 있는 것이고 아무리 화려한 가운을 뒤집어써도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 마음과 생각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진짜 교인들에게 존경받는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존경받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사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존경이 싫지는 않겠지만 변함없이 그렇게 오래 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을 존경하는 교인들을 만난다면 저 사람이 어느 날 나를 욕한다고 전혀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자유하십시오. 그리고 제 눈치도 많이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훨훨 날아서 하고 싶은 것을 하십시오. 그리고 항상 ‘여호와여 종이 당신만을 의지하는 것을 당신이 아시나이다, 밤마다 물같이 내 마음을 쏟는 것을 예수께서 아시나이다, 저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자유롭게 하십시오.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이야기 하십시오. 하기 싫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기 싫다고 말하십시오. 내가 담임목사로서 할 수 있는 만큼 여러분들의 의견을 존중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는 여러분들의 선배들이 그랬습니다. 자기 안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열렬히 섬겼습니다. 한 해 교역자들이 세 사람이 한 사람은 로비에서 한 사람은 마당에서 졸도를 했습니다. 한 사람은 쓰러지는 것을 내가 직접 봤습니다. 시켜서 그랬을까요? 시켜서 일하는 사람은 그렇게 쓰러지지 않습니다. 왜? 그 직전에 쉼을 갖습니다. 선배를 본받아라 그것 아닙니다. 그렇게 해라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는 여러분들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 선배들이 마음에 누리는 자유,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기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완전한 자유, 그것을 여러분들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