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 있는 자
“철 연장이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전 10:10)
녹취자: 박나리
여러분, 아침에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조용히 생각하시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돌아보십시오. 그 중에서 이것 없이 정말 못살겠다고 생각하는 것을 떠올려보십시오. 스마트폰이 그렇습니다. 또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정말 쓸 데 없어서 가지고 있기 귀찮은 물건을 떠올려보십시오. 그런 물건이 있습니까? 있어도 기억도 안 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쓸모 있는 물건과 쓸모없는 물건의 차이입니다. 쓸모 있는 물건은 항상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 안경이 그렇습니다. 안경이 천만 원이 아니더라도 안경 없이 살 수가 없습니다. 항상 확인할 것입니다. 안경 쓰는 사람은 폰보다도 더 확인이 잘 합니다. 폰을 잃어버린 적은 있어도 안경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쓸모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인가와 상관없이 항상 주인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주인에게 이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 쓸모 있는 물건입니다.
그에 비해서 쓸모없는 것이 있습니다. 저의 정말 나쁜 버릇 중에 하나가 옷을 못 버립니다. 나는 내 옷을 버린다는 것이 용납이 안 되고, 누군가가 내 옷을 입는다는 것은 더더욱 용납이 안 됩니다. 그래서 내가 예전에 하던 제일 좋은 방법은 내 입던 옷을 몇 년 모아서 불태우는 것입니다. 다 태워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태울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쌓아뒀다가 한 달 전쯤 세 포대를 갖다 버렸습니다. 버리고 오면서도 마음이 찝찝했습니다. 이것을 누가 수거해서 인터넷으로 팔 것 같습니다. 마음이 그랬는데 처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쓸모가 없어서 버리는 것입니다. 선물 받은 것도 그 중에 꽤 있지만, 내가 가서 하나씩 다 산 것입니다. 지금은 허리가 너무 줄어들어서 못 입거나, 스타일이 망가져서 못 입거나, 아니면 다 구멍이 나서 못 입거나 합니다. 아니면, 무언가 튀었는데 지워지지 않아서 못 입거나, 옷이 늘어져서 못 입거나입니다. 지금은 소용이 없는 물건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물건은 봐야지만 여기 있었구나 하고 기억이 나지, 머릿속에서 그것이 어디 있나 하고 생각하는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옷장을 뒤지고 서랍을 뒤지다보면 이런 것도 있었구나 생각합니다. 그것이 쓸모없는 물건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집에 귀한 도구들입니다. 어떤 존재가 되고 싶습니까? 하나님 앞에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기억도 나지 않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까? 오늘 성경 말씀을 풀면서 이러한 생각을 한 번 해보십시오. 여기서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자연사물과 인과관계를 아는 것도 지혜라고 부르고, 자연적 지혜라고 합니다. 더 높은 지혜는 도덕적 지혜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며, 궁극적으로 내 인생을 의미 있게 하고 나를 행복으로 이끌 것인가를 헤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도덕적 지혜는 영적인 지혜에 맞닿아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면 도덕 질서를 받아들이게 되어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함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최악의 사람이고, 최선의 사람인지 보십시오. 최악의 사람은 자연적 지혜도 없고 도덕적 지혜도 없는 사람입니다. 삶은 개차반이고 일을 맡겨도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디를 가도 존귀하게 여김 받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버림받게 됩니다. 사람에게도 버림받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버림받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직장 다니면 항상 동료들은 동정하는 마음과 동냥하는 마음으로 데리고 있어야 되는 사람입니다. 주위 사람들의 측은지심에 의해서 겨우 직장에 붙어 있는 사람입니다. 최악의 사람입니다. 이를 기독교권으로 데려와서 보면 일도 못하고 신앙도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진실한 마음도 없고, 일도 잘 못하는 사람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자연적 지혜는 없는데, 도덕적 지혜는 있는 사람입니다. 일은 잘 못합니다. 아무리 가르쳐줘도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위로 올라갈수록 지도자의 수가 적은 것입니다. 백 명의 사람들의 사람 중에서 단순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백 명입니다. 그런데 열 명을 지도할 수 있는 사람은 백 명 중에 열 명 밖에 안 됩니다. 열 명이 모인 그룹 열 개를 한꺼번에 지도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그런 구조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되지 않겠냐고 하는데, 될 수 있지만 안 되는 사람은 안 됩니다. 열 명 정도에 머물러 있을 사람은 열 명 정도를 돌보는데 그 이상으로 자기 자신이 발전한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신앙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 마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라고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그런데 뭔가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신실히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배반하지 않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좋은 토대는 되지만, 그 단체가 일을 위해서 모인 단체인 경우에는 그것은 너무 필요하지만 그거 하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담장이 무너진 것을 고친다면 효자상, 효부상 받은 사람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겠습니까? 아니면 자격증 가진 사람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겠습니까? 효자, 효부는 문제가 안 됩니다. 어차피 이틀 일하고 떠날 사람입니다. 받을 돈 받고 기가 막힌 기술을 가지고 제대로 담장을 복원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가 하면 반대인 사람이 있습니다. 자연적인 지혜는 있습니다. 어딜 가든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소용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도덕적 지혜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 사이에 신의도 없습니다. 범죄 조직에 구성원들이 서로 믿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으로서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시키면 일을 잘 합니다. 그런데 그 이상의 어떤 유대감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배신합니다. 스승의 날이 되면 일주일 전부터 꽃다발과 과일이 옵니다. 얘는 왜 이러나 하면 어김없이 일주일 뒤에 추천서 써달라고 연락이 옵니다. 끊임없이 인간관계를 이용해먹는 사람들입니다. 스승의 날을 맞이해서 문자를 보냅니다. 나는 순진해서 전혀 몰랐습니다. 불특정 다수에게 뿌린 문자였습니다. ‘김 목사님’이라는 말이 안 들어갑니다. 다음부터는 그 말이 들어가 있어도 안 믿기로 했습니다. 김 씨에게 다 보내는 것입니다. 어장 관리하는 것입니다. 내가 자기 어장관리 대상입니까. 그런 것은 전혀 일말의 도덕적 지혜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관계를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일을 잘해도 그런 사람과는 깊게 인연을 맺으면 안 됩니다. 법정스님이 살아계실 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모든 사람과 좋은 인연을 맺으려고 애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대부분은 흘러가는 인연입니다. 가벼운 인연을 깊게 맺으려고 할 때, 인간에게는 끊임없는 배신과 고통이 뒤따릅니다. 흘러가는 인연을 내버려두십시오.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헤르만 바빙크가 합니다. 화란 교회 분열의 시절에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이지만, 우리 모두가 친구가 될 필요는 없다고 했습니다.
최악의 사람은 자연적 지혜도 없고, 도덕적 지혜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최악의 사람입니다. 최선의 사람은 당연히 자연적 지혜도 있고, 도덕적 지혜도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올라갔지만 파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기 절정을 누렸던 영화배우가 은막에서 사라졌지만 절정에까지 오른 뒤에 파산하고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그 사람을 불러서 분장시켜 다시 연기하라고 하면 재능이 어디가지 않고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적 지혜는 여전히 변함없지만, 도덕적 지혜에서 추락한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도덕적인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하든지 기저가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서 토대 위에 성취라는 집이 지어지는 것이지, 토대가 없어지지만 사상누각이 되어 평안할 때는 괜찮지만 물이 들어오면 무너지고 파괴됩니다. 항상 인간으로서의 기초를 닦아야 합니다.
이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종교입니다. 바로 신앙입니다. 이것은 결코 자연적인 지혜를 통해 얻을 수가 없습니다. 데카르트는 사물을 보며 생각을 했고, 칸트는 실천이상비판에서 이를 보완했습니다. 이들에게 발견할 수 있는 문제는 눈에 보이는 자연적인 사물들에 관한 측정의 잣대입니다. 정신적 잣대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제공해줍니다.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자연적 사물이 아닌 것에 가지고 갑니다. 그럴 경우에는 측정에 있어서 대상 오류가 됩니다. 고기를 근으로 달아 팔아야 되는데, 고기를 길이로 재서 판다면 측정할 수 없습니다. 두께가 획일 되어 있어야지만 고기를 자로 잴 수 있습니다. 양말은 한 켤레에 얼마씩 파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근으로 달아서 판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LPG가스를 자로 재서 팔 수 있겠습니까. 칸트 자신은 그런 말을 분명하게 했지만, 후대 사람들은 두 가지를 혼용하면서 자연사물을 재는 특정 자를 가지고 그것을 그대로 옮겨서 초자연적인 사물들을 재면서 있다 없다 생각하게 되는 오류를 만듭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혜는 한 인간으로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느냐 하는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됩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이 어떤 일을 함으로써 훌륭한 사람이냐 아니면 아랫대가 뛰어난 사람이냐 할 때에는 인간됨을 재는 자와는 또 다른 것을 요구합니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돌을 쪼는 정이나 이런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목수를 두고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물건을 자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철로 된 연장이 있습니다. 대패나 끌이나 모든 것들은 다 날이 있어서 그것으로서 나무를 절단 내거나, 아니면 파내거나 아니면 얇게 껍질을 벗겨 냅니다. 여러분들은 대패질을 못해 봤을 것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우리 집을 지었습니다. 이틀에 한 번씩 대패와 망치를 꺼내서 살살 숫돌에 갑니다. 물로 깨끗하게 닦아서 대패에 낀 뒤, 나무를 밀면 어제 들어갔던 힘의 30%는 절약이 됩니다. 미끄러지듯이 종이 같은 나무껍질이 벗겨집니다. 지금은 다 기계로 하지만 손대패 시절에는 그렇게 했습니다. 철연장이 무뎌졌다면 일의 능률이 안 오를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는 즉시 하던 작업을 멈추고, 과연 이것이 최선인가 생각하고 두드리고 날을 빼고 잘 갈아서 다시 사용을 하는 것이 장인의 제대로 된 태도입니다.
기술자는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거짓말입니다. 전혀 기술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기술자들이 쓰는 연장은 다릅니다. 그래서 공사를 하면 반드시 기자재 소모비라고 하는 원가 계산이 첨가됩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공구를 의뢰한 쪽에서 대주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어서 자기 기구를 가지고 오지만, 감가상각비를 받는 것입니다. 이중섭 씨가 쓰는 붓은 우리 집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딸이 쓰는 붓과는 다릅니다. 거의 공부에 접근 못한 일반 목회자들이 쓰는 사전과 교수들이 쓰는 사전은 다릅니다. 사전의 수와 종류도 다릅니다. 비교도 안 됩니다. 15년 전에 ‘Knowledge 철학사전’이 참 좋았습니다. 사고 싶어서 몇 달 동안 손가락을 빨다가 사야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샀습니다. 15년 전에 11권에 580만 원이었습니다. 그 책은 생산이 안 됩니다. 주문을 넣으면 BOD입니다. ‘Book on Demand’라는 뜻입니다. 입금이 되면 책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지금 2판이 나와서 사야 되는데 너무 비싸서 엄두를 못 냅니다. 그렇게 다릅니다. 15년 전에 CBS를 갔습니다. 삼각대가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삼각대는 후져 보이고 그 삼각대는 탄탄하고 좋아보였습니다. 그래서 PD님에게 삼각대가 참 좋다고 우리 교회에도 저런 것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비싸다고 하길래 그 까짓 것이 얼마나 비싼가 했는데 1,500만 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전문가들이 쓰는 것은 다릅니다.
세 번째는 연장을 관리 안하는 사람은 자기 일에 의욕이 없는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해도 해도 안 되는데 같은 일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은 성실한 것이 아니라 일할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일할 의지가 없는 것은 연장 던지고 가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할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직업을 계속할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안 되는 연장을 계속 똑같은걸 사용하면서 시시콜콜한 결과에 만족해하고 있는 것은 결국 일할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기 그렇지만 코로나 사태 기간 중에 수련회 보고를 보면서 ‘저 교역자는 다음 학기를 끝으로 교회를 떠나겠구나.’ 짐작하고 있었는데 딱 맞아 떨어졌습니다. 무엇을 보고 알았는지 아십니까? 한 번도 소통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라고 하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는데 방법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일하고 싶다는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사역에 대한 의지는 독창성에 의해서 판별이 됩니다.
힘을 들이고 일하는 사람은 연장에 예민합니다. 대패질을 하는데 이만한 나무가 있습니다. 힘이 들어서 짧게 왔다 갔다 하며 깎습니다. 나무에 한번 멈출 때마다 흔적이 남습니다. 매끈하게 깎으려고 한다면 팔을 길게 뻗고 한 번에 확 잡아 당겨서 끝까지 가야 합니다. 표면이 깨끗하게 됩니다. 날이 바짝 서서 예리하지 않으면 끝까지 가지 못합니다. 날이 나무에 걸립니다. 만약에 하려면 엄청나게 힘을 줘야 합니다. 그러다가 날이 더 나빠지면 나무를 파고 들어가서 나무를 뜯어놓습니다. 잘 갈린 아주 좋은 대패는 나무 위에 대고 잡아당기면 물 흐르듯이 소리를 내며 지나갑니다. 이런 창호지 같은 나무껍질이 두께가 일정하게 칼로 벤 듯이, 마치 김 같이 쏟아집니다. 최선을 다해보면 날이 무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팔에 힘이 너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날이 박힌 대패든 나쁜 날이 박힌 대패든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제 10km를 조금 넘게 걸었습니다. 걸으면서 산을 올라갔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 걷기가 싫고 힘이 듭니다. 그런데 힘들다고 생각하고 걸으면 더 힘듭니다. 진짜 다시 내려오고 싶습니다. 하나의 지혜를 터득했습니다. 산에 올라가기 힘들 때 가장 쉽게 산을 올라가는 비결은 땅을 박차고 힘을 내는 것입니다. 아니면 때려 쳐야 합니다. 아니면 반드시 발목이 다치든지 넘어지든지 합니다. 양 다리 허벅지에 힘을 주고 나는 올라가야 된다고 하면, 힘을 내서 또박또박 밟으면서 자기 몸을 밀어내야 합니다. 그때 가장 안전한 산행을 할 수 있습니다.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입니다. 안 할 것이면 때려 쳐야 합니다. 쉬는 시간에는 확실히 쉬고, 일할 때에는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최선의 것으로 완전하게 해내야겠다고 하는 자연적 지혜의 완결성과 영적 지혜의 완결성이 필요합니다.
자연적 지혜는 끊임없이 탐사하고, 조사하고,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어떤 발상은 단번에 떠오르지만, 그 발상을 구체화하는 것은 반복적인 숙고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제가 지금 한 달 반 정도 이제까지 열린교회에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형태의 성경공부 시스템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가칭하여 LBTS 성경공부입니다. ‘Life-Bible Transformation Study’로서 삶-성경 변화 공부입니다. 아침마다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합니다. 아침에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면 떠오릅니다. 산책하다가도 떠오릅니다. 계속 추가를 해보고 있습니다. 폰에 입력을 하고 있습니다. 기발하고 좋은 생각들이 나면 적어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의 생각이 있으면 추가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 확정합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 사람들은 두 종류입니다. 자연적인 지혜가 워낙 부족하거나, 아니면 자연적 지혜에 바탕이 되는 창의성이 부족해서입니다. 자매가 형제와 사랑에 빠졌는데 부모님이 관계를 반대했습니다. 아버지가 바리깡으로 딸의 머리를 밀었습니다. 그랬더니 스카프 쓰고 청바지 입고 담장 넘어서 만나러 갔습니다. 사랑은 창의성에 중요한 원동력입니다. 창의성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기업에서 인문학자들을 10강좌에 3천만 원씩 주고 불러서 강의를 듣는다고 하는데, 교양 정도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나 그렇게 한다고 창의적인 것이 떠오르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영업을 잘하라고 만들어진 것이 인문학이 아닙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사역을 돌아보십시오. 그런데 해도 해도 별 성과가 없다면, 자신이 전심으로 그 일을 했는지를 돌아보십시오. 비교적 전심으로 했다고 진심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경우에는, 그 방법이 유효한 방법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장사꾼들도 붕어빵을 팔다 반죽과 팥고물도 안 바꾸더라도 잉어빵을 구워서 팔아보기라도 합니다. 안 되는 방법을 이미 수많은 실패가 우리에게 증명해줬는데 꾸역꾸역 똑같은 방법으로 합니다. 믿음이 있고 성실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새롭게 생각해낼 에너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자기 자신이 그 일의 전문성으로부터 점차 멀어집니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열정은 그 일을 얼마나 순수한 동기에서 하느냐 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말 영혼을 살리고 싶고 주님의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싶다는 열렬한 마음의 소원과 방법의 창의성에 의해서 입증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의적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그 일에 대한 욕구가 없는 것입니다. 간절함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철 연장이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그 날을 빼서 숫돌에 천천히 갈아야 합니다. 아주 정성껏 갈아야 합니다. 숫돌로 살살 갈면 부엌칼인데도 양쪽에서 A4용지가 들고 자르면 면도날처럼 베어집니다. 갈지 않으면 무도 안 썰립니다. 그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힘이 더 들고, 힘이 드니까 최선을 다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우리의 일을 망치게 됩니다. 세상에서도 정말 대접 잘 받고, 어디가든지 스카우트 되고, 어디가든지 쓰임 받는 사람은 자기 관리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일의 유용성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유지하려면 피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때에 비로소 자기 자신이 일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됩니다. 열렬히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십시오. 그 때 한 인간으로서 정말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후자 없이 전자만 있으면 그것은 공허한 것입니다. 전자 없이 후자만 있으면 살아가는 삶에 재미가 너무 없습니다. 내가 정말 주체적으로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질서를 만들어가는 보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사역을 되돌아보면서, 똑같은 것을 계속해도 안 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어떻게 바꿔야 할 것인지 생각하면서 사역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