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고한 자를 기억하심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시 22:24)
녹취자: 변상윤
다윗이 이 시를 언제 썼는지는 누구도 확정할 수 없겠습니다. 어떤 정황 하에서 쓰여졌는지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추측들은 하지만 확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 시가 사람들에게 굉장히 널리, 성가대 지휘자의 지휘를 따라서 성전에서 널리 불려졌던 노래이고 그 당시에 곡의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새벽에 사슴’이라고 하는 곡조에 맞춰서 아마 이 노래를 불렀던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다윗이 심히 고통을 받고 있는 때였습니다. 그것이 자기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원수들의 무고한 박해 때문인지 아니면 두 개가 결합된 무엇 때문이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깊은 고통을 받고 있을 그때였습니다. 그때 얼마나 고통을 받고 비참했는지 그는 말하기를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로까지 그렇게 비참해졌으니 말할 필요도 없고 또 사람들이 자기를 조롱하기를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한다’ 이렇게 자기의 신앙의 근본적인 끈까지 공격을 하고 조롱을 하며 저주를 받았던 그때였습니다. 시인들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방식을 연구해 보는 것은 굉장히 큰 도움을 줍니다.
이 시편이 너무나 독특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시편 이외의 모든 성경은 바깥에서 성도 혹은 자기 자신을 바라다보는 방식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은 성도의 마음 안에서 바깥으로 세계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주 독특한 기록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관점들이 성경의 곳곳에, 특히 잠언이나 혹은 예레미야 애가나 이런 곳에 시의 형태로 곳곳에 조금씩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거대한 책, 무려 최소한 천 년 이상에 걸쳐서 쓰여진 시가 그렇게 인간 안에서 인간 바깥의 세계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런 관점으로 쓰여진 것을 두터운 하나의 책으로 성경 안에 실렸다고 하는 것 자체가 참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성경 전체의 구성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객관적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자신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해가는 보화와 같은 가르침들이 이 시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연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시편을 참 사랑하게 됩니다. 아마 제가 생각해도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성경책에 눈물을 떨어뜨렸던 책이 시편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24절의 내용은 제가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이렇게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들이 시편 속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는 방식이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어떤 금광석을, 그 성분이 무엇인지를 시금석에 갈아보면서 광석의 성분을 판별하듯이,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 시금석이 고통입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행복과 기쁨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배우지만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을 배우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의 시행 방식, 소위 얘기하는 ‘모두스 오페란티’라는 것을 배웁니다. 이 속성과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본질을 아는 것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것과 영이시라는 것, 이 두 가지 이외에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에게 허락된 지식의 세계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하나님도 하나님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인간에게 설명하실 수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설명하신다 하더라도 인간이 그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질을 아는 것은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결국 하나님이 영원히 스스로 계신 분이시라는 것, 그리고 영이시라는 것, 두 가지 사실만 알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출애굽기와 요한복음 4장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계시하신 것 이외에는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것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기타 성경에 하나님이 어디든지 안 계신 곳이 없으시고 등등등등 나오지만, 그런 것들은 그 두 구절에 대한 해설일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속성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시인도 역시 똑같이 깊은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들었던 나병 환자를 고치신 이야기나 이번 주에 듣게 될 절망적인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이야기 같은 것들을 가만히 보면 중풍병과 나병이라는 시금석을 사용해서 푹 하고 한번 긁음으로써 그 시금석의 가루들이 묻는 것입니다. 그런 가루들이, 비유를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속성의 분말들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 절망적인 나병 환자를 고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이런 성품을 가지신 분이시고 이런 성품을 불쌍한 사람들에게 행사하시는 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결국 성화가 구원받은 이후에 모든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별로 성화가 아닙니다. 성화가 아니라 ‘어떡하면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주님과 함께’라는 구절을 토를 달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고, 아니면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길이 무엇일까?’ 이런 것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행복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금과 같이 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을 배우며 행복해지고, 또 그렇게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을 갖게 되는 것만큼만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목회자의 설교의 대부분은 성화에 집중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성화 설교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신학적으로 정리가 안 됐기 때문이 가장 큰 이유고 그 다음으로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기쁨을 매일매일 누리면서 살아갈 때 그 설교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놓고 제가 사실은 한 한 달 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신과를 갔습니다. 그리고 심리검사를 받았습니다. 저는 사실은 수면제나 받아오려고 그랬는데 하도 한혜성 원장님이 받아보라고 해서 한 650개 정도 되는 문제를 풀었고 굉장히 복잡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머리에 뭘 뒤집어 쓰고 뇌파 검사도 하고 다 했습니다. 한혜성 원장이 검사 결과를 받아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지극히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대형 교회 목회자를 수없이 검사를 해봤는데 다르게 나온다고 합니다. 무엇이 달랐냐 그러니까 야망이 없다고 합니다. 야망이 없는 것으로 나옵니다, 테스트 결과가. 나 진짜 야망이 없습니다. 그러고 특별히 미워하는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교감신경이, 인지 능력을 좌우하는 것이 높으리라는 것은 자기도 예상을 했는데 몰두하고 책, 공부, 목회 사역, 스트레스 많이 받고 하니까 부교감 신경이 그런 것들을 조절하고 적응하는 것인데 형편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꽤 높게 정상치로 나오고 그래서 굉장히 놀랍다고 그러면서 굉장히 건강하시다고 그래서 (사실은) 은근히 걱정했었습니다. 검사를 받았는데 원장 앞에서 정신이 너무 여기저기가 병들어서 ‘저 꼴에 누구를 가르치나.’ 이렇게 원장이 생각하면 어떡할까 걱정을 했는데 그래도 하나님이 체면을 세워주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정신세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일을 겪지만 우리 정신세계가 스스로 복원할 능력을 가져야 됩니다. 그것을 갖지 못할 때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깊이 망가지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 오늘 이 시인도 똑같이 지극히 고통을 받고 오죽했으면 하나님의 사람이 "나는 벌레라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입니다"라고 고백을 했으니까 얼마나 자존감이 바닥까지 내려간 상태에서 비참해졌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 많은 일들을 겪은 것들이 시의 형태로 요약해서 나오고, 심지어 그 많은 황소들이 자기를 에워싸고 바산에 힘센 소들이 자기를 둘러쌌다는데 이 바산은 북이스라엘에 있는 사마리아 쪽의 지명입니다. 그때 그곳이 힘센 소들의 산지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래서 바산의 힘센 소, 혹은 바산의 암소 그런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그런 것들이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것입니다.
유튜브에서 며칠 전에 한번 보니까 사자가 하도 배가 고프니까 들소를 공격했습니다. 여러 마리가 공격을 했는데도 하여튼 들소한테 제대로 걸렸습니다. 사자를 뿔에다 달고 계속 공중으로 올리면서 떨어질 때쯤 되면 정확하게 뿔을 떨어지는 지점에다 대서 사자를 찌르고 찌르고 찔러서 갈비뼈고 뭐고 다 아작을 내서 밟아버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소가 사자를 이긴다는 것이 우리가 상상이 안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힘이 워낙 세니까, 사자는 기껏 해봐야 한 250kg 정도밖에 안 나가고 소는 거의 1톤씩 나가니까, 엄청나니까 도저히 게임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다 받으면서 뭐라고 고백을 하냐 하면 14절 한번 보시겠습니까? 14절부터 15절까지 같이 읽어봅시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입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뼈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고통을 겪고 지나 보면 처음에 예수를 믿을 때는 이 시편이 문학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냥 지어낸 이야기들이 써 놨는데 그것이 아니라 실제의 경험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져 버렸고 내 뼈는 어그러졌으며’ 왜 어그러집니까? 두들겨 맞아서 뼈가 이리저리 다 튀어나온 것입니다. ‘어그러졌으며 마음은 밀랍 같아서’ 밀랍이 뭐입니까? 초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열을 받을 때 녹아내렸으며 침은 말라서 질그릇 조각 같고’ 다 무엇에건 쉽고 부서져 버리는 것이고 혀는 마지막에 인간의 힘이 도저히 없을 때 혀도 못 움직이는 상황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입천장에 붙어버렸습니다. ‘나를 죽음의 진토에 두었습니다.’ ‘진토’라는 것은 티끌인데 결국은 자신의 존재가 티끌하고 거의 다 동일체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과정을 모두 거쳐서 24절에서부터 희망의 메시지들이 쭉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의 깨달음을 통해서, 고통을 통해서 깨달은 새로운 사실인데 그 사실을 오늘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24절에 처음에 보면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않으시며" 이것이 첫 번째 발견입니다. 곤고한 자의 곤고라 그랬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에누트 아미’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곤고한 자의 곤고 당함, 괴로운 자의 괴로움을 당함, 수동태 분사입니다. 그러니까 고통을 자기가 말하자면 ‘파시오’ 겪는 것입니다. 이렇게 겪음을 통해서 곤고한 자의, 자기 자신이죠, 곤고한 자의 고통당함을 멸시하거나 혹은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발견한 한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다른 곳에서 ‘어찌하여 나를 멀리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시나이까?’라는 단절을 배웠다면 여기서는 자기 곤고한 자가 곤고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밖으로부터 자신에게 밀려와서 자기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을 안 당할 수 있다면 수동태 분사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안 당하면 되니까.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피할 수 있는 것은 자기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어떤 면에서 자기는 가만히 있는데 고통이 밀려오고 그 고통이 자기를 깎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곤고함을, 곤고당함을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않으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연히 당하는 고난이든 자신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든 곤고한 자가 곤고함을 겪을 때 하나님은 그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시는 분이 아니시다라는 성품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애매히 사람들에게 고통을 당할 때는 그것은 당연히 애매하게 당하는 고통이니까 하나님이 그가 곤고한 자로서 고통을 당할 때 그를 불쌍히 여기시거나 혹은 그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당연하지만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은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대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겪는 대부분의 경험은 아무 죄가 없는데 고통을 받는 것은 일부분이고 대부분 경합돼 있습니다. 자신의, 쉽게 얘기하면 다윗이 그 이후에 겪었던 그 끔찍한, 그 집안의 비참한 가정사들, 결국 그 시작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징벌로 말미암아서 예고된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느 청교도가 얘기했듯이 우리들이 고난을 겪으면서 자신이 모두 욥에게 해당한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대개 경합이 됩니다. 그런데 괴로움을, 자신의 죄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이미 이루어진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 당연히 겪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신다. 이것이 히브리식 표현인데, 반대로 말하면 곤고한 자가 괴롭힘을 당해도 하나님은 그를 존귀하게 여기시고 여전히 좋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이 시인이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고통을 받을 때는 안팎으로 고통을 당합니다. 밖으로는 악인들이 공격을 하거나 나쁜 상황이 고통을 주고, 안으로는 자기 자신의 양심의 가책과 그리고 자기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받고 있다는 고립감과 버림받은 것같은, 하나님을 향한 거리감과 낯섬, 이런 것들을 경험하면서 자기 자신이 깊은 소외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욱 지나치게 되면 정신적으로 자신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끈이 끊어지는 상태까지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친 것 같은 상황이 나타나는 것이 사울 같은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신다. 그렇게 곤고한 자가 고통을 당할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좋아하신다고 하는 것을 시인이 발견을 한 것입니다. 그 고통을 통해서.
그러면서 두 번째 이야기가 마지막으로 나오는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며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울부짖었다고 번역한 말이 ‘솨바’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인데 사실은 조금 약간 과장된 해석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운다’고 하는 뜻은 안 나와 있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간절히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감나게 울부짓는다고 표현을 한 것인데 반드시 들어가야 되는 이 동사에 수반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간절한 어떤 요청을 가지고 온 힘을 다해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만큼 애정을 동반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다시 사랑해 주셨다.’라고 하는 가장 완곡한 표현입니다. 히브리어의 담겨 있는 깊은 서정성에 대한 이해를 가지면 감동이 훨씬 더 큽니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눈길을 끄는 건 바로 그 앞에 있는 것인데 무엇으로 나오냐 하면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랬는데, 숨는다는 말이 사실 히브리어 성경에 없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나오냐 하면 ‘뢰로파나이우민메누’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 하면 ‘그의 얼굴은 그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다.’ 이렇게 나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얼굴’이라는 것이 주님의 얼굴인데, 얼굴에 대한 신학을 이해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누구도 볼 수가 없습니다. 출애굽기에서도 ‘내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보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신인동형적인 표현인데 사람에게 있어서 이 얼굴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 사람들이 있어 사회에서 보면 영혼과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임성우라는 사람을 생각할 때 얼굴을 먼저 생각하지 그가 입었던 옷이나 배나 신체의 팔뚝이나 이런 한 부분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이 얼굴이 너무 신기합니다. 그래서 ‘파님’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복수입니다. 복수로 쓰이는데 이것을 ‘프르랄리우스 미스테리움’이라고 얘기하는데 신비의 복수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신비하게 생각되는 것들을 복수로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이 너무 신비하기 때문에 복수를 사용합니다. 물 같은 것도 마찬가지고 사람의 얼굴입니다.
이 ‘얼굴’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에 가장 가까운 것이고 그 사람의 실체를 보여주는 하나의 중요한 페르소나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던 시인들이 하나님 앞에 구했던 가장 큰 복이 ‘주님의 얼굴을 내게로 비추시며’ 혹은 ‘그의 얼굴빛을 내게 비추시며’ 그것이 시인들의 가장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었고 그것이 신약의 팔복의 언어로 말하자면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시인이 그렇게 고통을 받고 자기가 사람이 아니라 거의 벌레같이 자존감이 모두 떨어져 버린 비참한 데서 뒹구는 것 같은 느낌을 받다가 갑자기 생각이 바뀌면서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터져 나오면서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곤고한 자에게서 숨기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당신의 얼굴을 곤고한 자에게서 멀리 떼어 놓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 얘기는 완곡한 말로 이야기한 것을 풀자면 ‘하나님은 항상 자기의 얼굴빛을 자기의 곤고한 백성들에게 비추시기를 기뻐하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자주 있으면 안 되는데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때가 오냐 하면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은 그런 낙심의 때가 옵니다. 그것은 영적인 깊이하고는 상관이 없이 누구에게나 옵니다. 오히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영적으로 매우 큰 깊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일수록 그러한 비참한 절망감, 그리고 자신이 아무 소용이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고 모든 희망이 끊어진 것 같은 그런 낙심의 때를 오히려 그런 영적인 부흥을 경험한 높이만큼 반대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영혼의 깊은 침체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계속 바닥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이 침체라는 것을 모릅니다. 영혼의 어떤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자기가 침체에 빠졌다는 것을 알지 태어날 때부터 침체 이외에 다른 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침체 그것의 어떤 깊은 고통 같은 것들을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런 때가 옵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깊이 낙심되고 우리에게 하나의 삼탈 현상이 옵니다. 제일 처음 경험하는 것이 물탈입니다. 모든 물질이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같은 느낌이 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탈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탈현, 현실이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온몸의 기력이 다 빠지면서 자신은 더 이상 살아도 특별한 희망이 없다. 그리고 정말 조용히 자신의 인생이 끝을 맞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감정까지 다가오게 되는데, 이것은 높은 영적인 경험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도 찾아오는 바입니다. 시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때 여러 가지 많은 요소들이 현재 그 안에 있기 마련입니다. 잊지 말고 내 말을 기억하십시요. 우리의 인생 전체 내 몸과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까지 모든 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배워가는 과정입니다.
어느 날 꿈을 꿨는데 굉장히 무서운 꿈을 꿨습니다. 여기 사택에 살 때였습니다. 내가 우주로부터 내 몸 하나가 발사가 되어서 저 우주 공간에 확 던져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무서웠습니다. 하여튼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눈을 탁 뜨니까 새벽 4시였습니다. 눈 뜨자마자 그 꿈을 기억하면서 핸드폰을 빨리 꺼냈습니다. 그리고 막 메모를 했습니다. 문장은 연결할 수 없고 꿈에서 봤던 그 캄캄한 우주, 거기에 발사되듯이 던져진 나, 그때 그 우주 공간에서 느끼는, 바라보는 그 하늘,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세계에서 나에 대한 느낌을 막 적었습니다. 적은 이유는 ‘도대체 이런 감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감정의 끝에서 이 무서운 꿈을 꾸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내게 가르치고 싶으신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그런 것을 배우는 아주 훌륭한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으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성경으로부터 배울 수 없습니다. 자신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 성경으로부터 배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여기에서, 우리에게는 평범한 시처럼 느껴지는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떼어놓지 아니하시며’라고 쓴 이 구절이 여기에 들어온 것은 당시 구약시대 사람들이 읽었을 때는 굉장히 쇼킹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소위 얘기하는 ‘베아티튜도 비조니스’, 하나님을 직접 바라보는 지복이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는 것인데 그것을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까지 하던 그 비참한 절망의 상황에 있던 사람이 단번에 기조가 변하면서 지복을, 직관의 복을, 하나님이 절대로 곤고한 자신에게서, 곤고를 겪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서, 심지어는 죄 때문에 겪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 곤고를 겪는 자신에게서 당신의 얼굴빛을 떼어놓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간구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반드시 거절하지 않고 귀를 기울여 들을 것입니다. 라고 하는 확신을 노래한 것은 당시의 문맥으로 보면 굉장히 파격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나는 벌레요 쓰레기 같은 인간입니다.’라고 하고 절망을 했으면 작은 복으로부터 차근차근차근차근히 회복을 해나가는 그런 그림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그런 고난을 겪고 나서 깨닫고 보니까 하나님은 항상 자신 가까이에 계셨고 심지어는 곤고한 자가 고난을 겪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당신에 관한 지식을 나에게 전달해 주고 계셨다, 그 하나님의 친밀하심이 결국은 하나님이 나를 멀리함으로 못 느꼈던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섬으로 못 느꼈던 것이지 하나님은 항상 당신의 얼굴빛을 내게로 향하고 계셨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아주 막막하고 자신은 아무 희망이 없는 그러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자신을 너무 믿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믿음의 닻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빛을 어떤 경우에도 거두지 아니하시고 또 우리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의 애원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사실에 은혜를 받으면서 새 힘을 얻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