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의지하는 하나님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녹취자: 이새봄
27편을 언제 썼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체적으로 학자들이 생각하기는 아마도 이 시편 27편이 쓰여진 시기는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난 그때쯤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27편을 연대 매김을 합니다.
27편을 열면서 이제 시인이 고백합니다. ‘여호와’ 다시 말해서 자기가 의지하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을 지금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압살롬의 반역은 사실은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예정된 징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서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서 다윗은 그야말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나고, 아마 거의 죽었으면 좋을성싶을 그런 시기를 지났었습니다. 모두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징벌하시지만 그것을 징벌로 주셨지만, 그 징벌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이중의 구조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네가 이렇게 이렇게 나에게 불순종하고 악을 행했으므로 이제 너희 집안에서 칼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는 그 예언 중에 하나로서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난 거고, 그 이전에 이미 이제 더 커다란 집안에 풍파가 있어서 서로 죽고 죽이는 일들이 일어났잖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한 면이라면 또 한 면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다윗이 범죄한 것에 대해서 깊이 분노를 느끼시고, 그 분풀이를 하기 위해서 그것도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 다윗에게 이렇게 견딜 수 없는 시련을 주신 것이다. 만약에 그렇다고 대답을 하면 하나님은 너무 옹졸하신 하나님이 되고 특별히 은혜 언약이 설명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은혜 언약은 하나님이 무한히 죄를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또 그가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측면이 뭐가 있냐 하면, 이번에 여름 수련회에서 욥기를 설교하면서 했던 것과 거의 똑같은 맥락인데, 하나님이 당신을 아는 지식을 이 다윗에게 주셨을 때, 다윗이 씨앗과 같은 신앙으로 시작을 해서 이게 점점점점점점점점 이렇게 커져서 나중에는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목과 같은 신앙이 되는데, 그게 한 번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물론 계기는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신앙이 성숙해져 가고 그 영성이 깊어져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되기까지 다양한 환경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울에게 쫓겨서 애매히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도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배워갔고, 또 죄로 말미암아 지금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는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단순하게 당신의 오래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다윗에게 분풀이하는 마음으로 지금 아주 곤욕스러운 인생을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줄을 아시고 그 고난을 통해서 이 시인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이 그 깊은 고난 속에서 항상 배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가 의지할 바가 하나님 한 분뿐이시라고 하는 것을 고난 속에서 내내 배운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욥의 자기 깨어짐은 바로 그 한 가지 사실을 배우기 위해서, 심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고난이었습니다. 아무튼 그게 내가 의지해야 할 분이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오늘 27편을 쓸 이 시점에도 깊이 깊이 마음에 각인하게 되었고, 그걸 통해서 자기가 의지해야 할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를 보여줍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오르(אוֹר)’라고 하는 이 단어는 빛인데, 크게 세 가지 정도 용도로 쓰입니다. 뭐냐 하면 첫째는 그것이 빛이라고 할 때 그것은 진리를 말하는데 이 진리는 또한 신학적인 빛, 그다음에 윤리적인 빛 이렇게 사용이 됩니다. 그러니까 빛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진리의 효과고 이것이 신학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이것이 윤리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이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라고 할 때 다윗이 늘 사랑했던 진리와 연결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리에 가장 탁월한 효과는 무질서한 것들을 질서잡히게 만들어주는 것이 진리의 힘입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을 보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유대교의 진리를 확신했었습니다. 누구도 꺾을 수 없을 정도로 확신했고 스데반을 죽이는 데도 가편 투표를 했고 어떤 일을 만나든지 간에 그리스도교는 박멸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그가 가진 독특한 세계관과 관련이 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계관,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느냐,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 이방인을 어떻게 보느냐, 유대인을 어떻게 보느냐,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게 모두 한 덩어리로 돼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충격이었습니다. 왜? 만약에 죽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징벌로 죽은 것이고 하나님의 징벌로 하나님이 죽이셨다면 하나님이 살려내실 리가 없다 이것입니다. 살려내실 분이면 죽이실 리가 없고, 여기에서 큰 충격을 받고 깨달으면서 눈이 열리게 되어서 그리스도가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때 그리스도께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십니까?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진리의 정수이기 때문에 빛으로 나타나는 게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세계가 창조될 때도 첫 번째 말씀이 “빛이 있으라” 하시는 것으로 세계의 창조가 시작이 됩니다. 이렇게 이 빛이 가리키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그 고난 속에서 자기가 의지하는 하나님이 왜 자기가 의지할 만한 하나님인지를 세 가지로 묘사하는데, 첫째는 하나님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자신의 무지를 깨우쳐 주시는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편안한 시간에 예쁜 탁자 위에서 단정하게 성경을 펴놓고, 그런 방식으로만 진리는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때로는 하나님의 징계, 채찍을 맞는 피 흘림 속에서, 때로는 원수들에게 박해를 받는 고난 속에서, 때로는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괴로워하며 주님 앞에 씨름하는 그 시간들을 통해서, 그 모든 시간들을 통해서 그 진리는 우리에게 발견되고 우리에게 거듭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빛으로 다가옵니다. 빛은 그 자체는 비추기만 하는 역할을 하지만, 일단 그 빛이 비추고 나면 사물들을 존재의 질서가 어떤지, 가치의 질서가 어떤지를 보여주어서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생각들을 바꿔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의 빛이 하는 역할입니다.
시인이 그런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이 진리의 빛이시기 때문에 그 빛을 결코 평안한 상황 속에서가 아니라 시련과 고난 혹은 징계를 당하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셨기 때문에, 이 시인이 오늘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이방으로 쫓겨나는 상황에서도 자기가 의지할 분이 오직 하나님뿐이시라고 하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진리에 대해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빛에 대해서 배우게 하시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진리의 빛을 발견하는 사람은 고통 속에서 그것을 ‘고난’이라고 부르지만, 그런 깨달음이 없을 때 그것은 고통 속에서 ‘고생’이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매일매일 여러분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한 다음에 또한 “나의 구원이시니”라고 말합니다. 구원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지금 모든 상황은 제대로 된 상황이 아닙니다. 일체의 질서가 제 자리를 떠났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왕좌에 있어야 할 다윗은 쫓겨나고 패역무도한 압살롬은 바로 아버지의 그 보좌에 앉고 법궤는 빼앗기고 남의 나라 땅으로 쫓겨나게 되었을 때 악인들은 그 승리가 영원하리라고 믿었습니다. 모든 것이 잘못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시인이 본 구원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무조건 자기를 건져주시는 것이 아니라 악인을 악인의 자리에 배치하시고 선인, 의인을 의인의 자리에 배치하시고 원래 잘못된 질서에서 튀어나온 것들을 제자리에 갖다 두시고 자기가 원래 있어야 될 자리를 떠난 자신을 하나님이 제 자리에 갖다 놓으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그때 찾아오는 것이 샬롬이고 하나님의 카보드(כבוד),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십니다”라고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시편 한 절을 더 보겠습니다. 시편 3편입니다. 1절과 2절을 같이 읽읍시다. 시작.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사람이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여와 주는 나의 방패이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방패는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것이고 영광은 자기가 수치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 영광을 되돌려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시니이다. 잘못했기 때문에 왕 앞에 처분만 기다리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죄인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그대는 머리를 들라” 하는 왕의 음성이 있을 때 그때 그가 머리를 들면 소망이 생기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이것이 바로 시인이 생각하는 구원이었습니다. 구원의 개념은 그냥 좋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될 자리로 돌아가는 것, 그런 점에서 신자의 일생 전체가 구원의 과정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세 번째 시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가 의지하는데 그 하나님을 왜 의지할 만한가 할 때 “나의 생명이십니다”라고 합니다. 생명이 무엇입니까? 무엇인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힘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이 없으면 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생명의 기운이 다했을 때 그것을 우리가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에는 어떠한 생명의 흔적도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이렇게 쫓겨나서 이방에 망명와 있고, 그러면 못 돌아갈지도 모르고 아니면 망명한 나라가 압살롬의 나라와 외교적으로 스트레티지()를 형성해서 다윗을 넘겨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잖습니까. 그래서 육체적인 죽음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고 멸절되지 않도록 지켜주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다윗은 사실은 왕으로 기름부음 받기 전까지는 정말 순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뭐 가정에서 별로 아버지에게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명이라는 거친 들판으로 하나님이 불러내신 이후에 다윗의 생애 전체는 매 순간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생애였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에 의해서도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세바의 반란이나 압살롬의 반란이나 모든 것들이 끊임없는, 말하자면 죽음의 위협의 그림자가 드리운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신의 육체 생명의 구원자이신 하나님 덕분에 자기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과 함께 강조되어야 될 것은 다윗은 영적으로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든지 죽음 따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든지 주님의 때가 되면 죽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또 자신이 사실은 죽었으면 좋을 정도로 괴로운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리 애착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한 살아야 되잖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바로 영적인 생명입니다. 그 영적인 생명을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경험했기 때문에 결국은 사울에게 쫓겨서 남의 나라 땅에 가 있을 때 유명한 시편 18편을 쓰잖습니까.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그 힘이 바로 생명입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나가게 만들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지막에 절망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그런 영혼의 힘, 그것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이 큰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가 압살롬과 전쟁할 준비가 끝났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자기를 진리로 인도하시고 또 자기를 구원하시고 자신에게 육체와 영혼의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가 그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는 한 나는 무서워할 것이 없다라고 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가지고 오늘날 우리들이 모든 개인사 속에서 일어나는 서사를 하나님의 메타 서사에 묶으며 살아갈 때 하나님 앞에서만 사는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용기를 가지십시오.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든지 하나님을 다윗처럼 의지하는, 그런 빛과 구원과 생명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