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인턴십 개강예배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요 1:6-7)
녹취자 : 김미현
우리가 이제 ‘목회자’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하는 그 복음적 활동들을 가리켜서 ‘목회’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 말은 매우 애매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목회’ 그러면 그 ‘목회’ 속에는 너무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저는 목회자가 되고 나서 목회를 5년하고 나서야 ‘아, 목사가 하는 일이 범위가 이런 것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담임 목회를 5년하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여러분들이 부교역자 시절에는 목사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온전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목회라고 하는 카테고리 속에 들어오는 일들이 방대합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목회라는 이름 속에 이루어지는 많은 일들을 우리가 안할 수가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제도 우리 교회가 늦게까지 진을 빼면서 교회에 불이 나서 2층이 탔는데 그것을 놓고 교회를 어떻게 복구할 것이냐를 가지고 여러 시간 동안 의논했는데 내가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기에 머리가 나쁘고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그런 생각을 별로 안했는데도 굉장히 판단이 어려운 국면들이 나타날 때는 지식의 한계를 많이 느낍니다. 그런 것들은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목회라는 카테고리 속에 들어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설교뿐만 아니라 행정을 하는 일, 조직하는 일, 경영, 출판, 디자인, 심지어는 행사를 조직하고 심지어는 식음료, 위생, 화재,금융, 법률, 법률, 건축, 미술 모든 것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모르는 것은 시킬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이론입니다. 모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 방대한 상식과 지식을 요구하는 직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 모든 것이 목회사역에 있어서 피할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본질적인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일이 아니더라도 안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본질적인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빛에 대하여 증거 하는 일입니다. 이 빛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복음서의 기자들이 혹인 사도바울이 빛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 할 때 그것은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빛이 무엇이냐 하면 히브리 말로 오르라고 하는 단어인데 설명하면 굉장히 길지만 그 빛이 자연적인 빛을 의미하기도 하고 혹은 어떤 도덕적인 선한 행실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런 의미에서의 윤리적인 빛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리고 그것이 진리를 가리키는 신학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런 빛의 신학적인 용례가 신약으로 계승이 되면서 그러면서 이제 유대인들이나 구약에 익숙한 사람들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어휘로서 이 빛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혹은 예수님께서 빛에 대해서 말씀 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이해한 그 빛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이야기한 빛에 대한 설명을 이해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빛이라고 소개했을 때 이것은 그 처음 듣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발언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편을 여러분들이 보면 이 빛은 사실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며’ 그 빛 자체가 하나님을 가리키고 그리고 하나님은 진리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진리가 그 어떤 사물들에 빛이 비치면 그 빛을 통해서 빛이 없었더라면 보지 못했을 사물을 보는 것처럼 진리가 비추면 그 진리의 빛 때문에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고 잘못 판단했던 것들을 올바르게 판단하게 되는 것이 빛이 효과인데 그것이 진리 혹은 율법, 구약의 말씀들이었다가 그것이 예수의 인격 하나로 수렴될 때 그것은 곧 그 모든 구약의 빛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모여지고 이제 예수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그 모든 것을 밝히는 참된 진리의 빛이 이제 퍼져 나온 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빛이 펴져 나온 것이 기록된 것이 신약성경입니다. 이런 신학적인 사실들에 직면했을 때 ‘구약에서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시다.’라는 사실은 그 선포 자체가 굉장한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구약에서의 신학적인 의미에서의 빛을 수렴하는 최종적인 성취로서 토푸스 그 빛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더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이 설교 시간에 우리들이 결론내릴 수 있는 하나는 어떻든 그렇게 온 인류가 진리가 무엇인지를 더듬어오고 결국은 결론을 내고 도달하지 못했던 많은 진리를 찾는 방황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인격 안에서 보여 주심으로서 ‘하나님을 떠나서 그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돌아오고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와 올바른 관계 맺으면서 참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라고 하는 모든 답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나타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빛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라고 하는 것을 결국은 이 빛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 빛을, 그래서 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잘 증거 해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에 이르게 하고 구원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잘 가르쳐서 더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목회이고 이 목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을 정확하게 계승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경은 너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고 그 모든 일을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그 성경을 사용하는 방식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으로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한 4~5년 전인데 어느 잡지사에서 저를 인터뷰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제 이름이 신문에 방송에 오르내리는 것에 대해서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목사들 중에서 나처럼 인터뷰를 거절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방송 사절입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부감을 느꼈는데 홍보팀에 얘기를 했습니다. 그것도 기독교 잡지도 아닙니다. 일반잡지입니다. 해도 되겠느냐고 했더니 선교적인 측면에서 한번 해주셔도 좋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만났습니다. 기자가 왔습니다. 불신자입니다.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이렇게 돌아가면서 리더들과 인터뷰를 해서 싣는 것입니다. 이번에 종교 차례인데 개신교차례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를 정한 것입니다. 한 시간 반 정도 인터뷰를 했습니다. 예수를 왜 믿어야 합니까? 예수를 왜 믿어야 하냐하면 하고 쭉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한 시간 반 정도 인터뷰를 했는데 이 사람이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개신교에서 어느 목사님도 인터뷰하고 누구도 했는데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목사님은 스님 같으십니다.” 큰마음의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 불신자의 눈에 스님은 철학자로 보이고 목사는 비즈니스맨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스님은 철학자로 보이고 목사는 비즈니스맨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이야기를 덧붙이기를 개신교의 유명한 목사님을 인터뷰를 하면 회사 사장님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 근본적인 본질이 빠져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윌리엄 버클레이 라고 하는 사람이 목회자에 대해 말하기를 ‘그는 유능한 행정가일수도 있고 학자일수도 있고 조직가일수도 있습니다. 운동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리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목회의 소명은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진리를 담지 함으로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불붙는 진리가 마음에 있는 것이 그것이 목회의 소명의 증거입니다.
아마 바울 신학에 대해서 한국학자가 쓴 박사논문 가운데 최근 40년 동안 가장 커다란 충격을 준 학계의 파장을 일으킨 논문이 있다면 김세윤 교수의 ‘The Origin of Paul's Gospel’이라는 Mohr-Siebeck에서 나온 그 논문일 것입니다. 이분이 쓴 논문은 저명한 신약학자 부르스 밑에서 논문을 썼습니다. 논문의 요지가 무엇이냐 하면 사도바울이 예수그리스도를 대적한 아주 철저한 유대주의자로서 두 가지 편견을 가졌는데 예수는 메시야일수가 없다는 것 둘째는 유대인은 우월하다는 것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쓰레기라는 이런 두 가지 편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어떻게 자기가 가장 하찮게 여기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가 되었을까하는 추적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는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숙명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부활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했을 수가 없다.’ 믿었는데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가는 길에서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무에 매달려 죽었으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인데 살아났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살리신 것입니다. 죽음을 보지 않거나 죽은 자를 다시 살아나게 하신 것은 그 사람을 하나님이 아주 특별하게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활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함을 받았으며’ 이렇게 나옵니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 에녹 같은 사람이 죽음을 보지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갔습니다. 유대인들의 전승에 따르면 모세는 죽었으나 부활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예수가 바로 그런 계열을 뒤이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마어마하게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주받으면 안 되었고 저주받았다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순 된 두 가지 사실이 다 진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죽음의 의미가 자기의 죄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죽음이 아닌 또 다른 종류의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어마어마한 빛이 그에게 들어오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가 이제껏 믿고 살아왔던 모든 유대교 사상과 자신이 배운 헬라의 철학, 로마의 정치, 이 모든 것 속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그 엄청난 요소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결국 그렇게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신 것이 예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죄 때문이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서 살리셨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일시에 깨닫게 되면서 그가 소위 얘기하는 아나케, 운명, 숙명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자신이 징벌을 받을 것 같은 숙명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이것이 결국은 사도바울의 소명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모든 인류들이 참 인간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지만 행복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지만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찾기 위해서 모든 인간들이 저 멀리 이집트 시대부터 시작해서 가까이는 주전 3세기, 5세기 그리스의 철학자들까지 치열하게 고민을 합니다. 누가 그것을 답을 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 것에 대한 최종적인 답을 하나님이 그런 것들에 대한 답을 배제하는 대치품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모든 인류 역사의 철학과 정신사가 물어왔던 인생과 세계의 모든 의미에 대한 질문들이 그리스도로 수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우리들이 증거 한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개념을 내포하는데 첫째는 신학을 제대로 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야 합니다. 이것은 학문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이런 비슷한 훈련을 수없이 받아도 여러분 자신이 요령이 생길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여러분들을 새사람 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맨날 가방끈 들고 세미나 따라다니는 사람 중에서 목회를 제대로 하는 사람은 하나도 못 봤습니다. 오히려 정말 제대로 목회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잘잘한 신학자들은 남의 신학을 배움으로서 누구는 이 말했고 누구는 이 말했고. 얼마나 기가 죽습니까? 독일과 프랑스와 미국을 오가면서 수많은 학자들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최근의 연구동향을 말하는데 기가 죽습니다. 우리는 기가 안 죽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다는 것입니까? 지금 얘기하는 것이 진리의 핵심에 대해서 무엇을 얘기하느냐?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가? 그렇지만 진짜 원천적 교사라고 제가 부르는데, 궁극적인 의미의 유일한 교사는 그리스도밖에 없지만 원천적 교사와 파생적 교사가 있습니다. 원천적 교사는 자신이 사상가입니다. 원천적 사상가 앞에서는 최근의 학설이 어떻고,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런 이야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실례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도 바울 앞에서 최근에 당신에 대해서 누가 논문을 썼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점에 있어서 현저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흔적이 없습니다. 오늘 여기에 보니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나니 이름은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했으면 하나님 곁에 있다 온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예화) 인턴십이 7기, 8기 정도 되었을 때 형제 하나가 들어왔는데 총신 다니는 학생이었습니다. 너무너무 자매를 좋아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자매가 그 때 28이었나 27이었습니다. 어립니다. 결혼하고 신혼이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몸이 좀 안 좋다고 해서 병원에 갔더니 위암말기입니다. 결국 죽었습니다. 엄청나게 눈물로 기도하고 그랬을 것입니다. 똑같은 형제가 또 하나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아내를 천국 보내고 인턴십에 들어온 것입니다. 아내가 암에 걸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은 아이가 둘입니다. 한 살짜리, 세 살짜리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내가 맨날 “당신 그렇게 기도 안 해서 이다음에 어떻게 목회해. 기도해.” 뺀질거리고 안 한 것 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죽게 된 것입니다. 형제가 결심을 했습니다. 열두시 까지는 집안을 돌보다가 밤 12시에 매일 숲속에 들어가서 기도하였습니다. 6개월 동안입니다. 진짜 여러분이 그 심정이 되어보면 어떻겠습니까? 아이는 어린아이들이고 아내는 죽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혼신의 힘을 쏟아서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무섭고 그랬는데 자기 인생보다는 숲속이 덜 무서운 것입니다. 6개월을 온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아내는 죽었을까요? 살았을까요?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과정에서 이 형제를 깊이 변화시켜 놓고 죽은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한 사람의 신학과 목회의 깊이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 깊이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모든 사역은 목회자 자기 자신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교역자들은 다 외웠는데 열린교회 교역자 모임에서 얘기하는데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자가 되어 본 적이 없는 예배인도자, 진지한 설교 청취자가 아닌 설교자, 열렬한 기도자가 되어 본 적이 없는 기도 인도자, 교회의 치리에 복종해 본적이 없는 당회장,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그 자리에 있으니까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부목사이니까 새벽기도를 나오는 것이지 부목사 아니면 절대 안 나옵니다. 담임목사이니까 예배를 드리는 것이지 설교자가 아니면 절대 예배드릴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직업 활동이지 그런 것은 인력시장에서 사람 사다 써도 다 하는 것입니다. ‘너 여기서 오늘 부목사 행세를 해야 한다.’ 그러면 단정하게 입고 공손하게 인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 예수께 수렴된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할 때는 모든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와 지식으로 소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 하면 버나드 램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의 책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해석학을 이야기합니다. ‘비록 우리는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의 언어로 진리를 찾아냈지만 이것을 사람들에게 전파할 때에는 계몽주의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저 사람들의 사상 속에 접근을 해서 저 사람들의 사상과 소통을 하고 그것이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해야 하는데 결론을 이야기하면 전혀 공부를 안 합니다. 그러니까 신학교 다닐 때 까지는 레포트도 내주고 총신은 레포트 많이 내주기로 유명합니다. 레포트 내주는 데 그것도 너무 많이 내 주는 게 좋은 게 아닙니다. 책을 안 읽고 레포트를 씁니다. 어떤 학생들은 한 달에 레포트를 9개, 10개 썼다고 하는데 그 책 읽겠습니까? 레포트 하나에 300페이지만 읽는다고 하여도 2700페이지를 읽어야하는데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비양심적인 방식으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신대원 다닐 때까지는 어떻게 볶여서 하는데 졸업을 하고 난 다음에는 목회랍시고 뛰어들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신없이 하고 부지런하기나 하면 괜찮은데 게으름이 베어서 새벽기도도 안 나오고 무질서해지는 것입니다. 졸업 하고나서 파트타임으로 사역하면 교회 출근 안하고 그러니까 이렇게 저렇게 결국은 공부를 할 수 없고 공부를 한다고 해도 어디에 써먹겠습니까? 학점을 주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서 시험 보는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목회 요령만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도 열심히 있어야 배우지 멍하고 앉아있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서 나이가 40,50 되어도 아무데도 데려 가겠다는 데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형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난 신앙도 없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해서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지식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런 학문적인 공부는 안 해도 성경에라도 빠져서 성경의 달콤함을 느끼면서 좀 수준이 떨어져도 그냥 성경에 집착하는 설교라도 하면 좀 수준 낮은 사람이라도 와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신대원 다니는 학생들이 우리 교회 초창기에 들어와서 교리반에서 교리시험 보면 20점 나왔습니다. 졸업을 할 때까지 조직신학 7개 주제에 대해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책을 읽거나 진지하게 공부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성경을 펴도 신학적으로 설교할 수 있는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기 있습니다. 노숙자 이야기 듣고 좋은 얘기 하나가 예화로 떠올랐습니다. 예화에 맞는 본문을 찾습니다. 이것은 건성으로 읽고 이야기합니다. ‘착하게 삽시다. 기도 많이 합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면 복 받습니다. 행복을 찾아 가는 게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그러니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빛이신 그리스도를 만나서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는 일들이 목회에서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혁주의 목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날의 현대 사상의 구조와 개혁주의의 세계관을 극과 극입니다. 완전 정반대 대척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개혁주의 식으로 목회를 하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이 되게 하는 비결이 무엇이냐 하면 온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개혁주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게 됩니다. 오늘날 30년 동안 완벽하게 한국 교회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 회심과 중생이라는 주제입니다. 회개하라는 얘기를 안 합니다. 그것은 목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심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학문을 가지고 그 빛을 증거 합니다. 사람들을 믿게 하고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세계에 대해, 인간에 대해, 자연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 그것이 목회이고 그것이 이 모든 세상의 문화와 정치와 모든 사회의 영역 속에 적용 되어서 하나님이 그 모든 주권을 가지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고백하면서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 그것이 목회자의 임무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났나니 이름이 요한이라.’ 요한은 히브리어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 이런 뜻입니다. 너무너무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돌 던지면 요한이 맞을 정도로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흔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 그가 빛에 대하여서 증거하고 자기를 인하여 사람들을 믿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목회자의 임무입니다. 그래서 이 빛을 어떻게 자신의 온 삶을 실어서 올바르게 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전하는 그것이 자신이 살아가는 삶과 연장선상에 있는 설교가 될 수 있는가? 그 실존적인 고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학의 길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엄청난 종교적인 추구와 우리말로 쉽게 얘기하면 경건에 대한 진지한 추구와 그리고 학문에 대한 열렬한 탐구, 그것을 자신의 삶속에 적용해서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자신 속에서 이미 이루어지는 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설교와 목회는 자기의 관심사를 따라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그 모든 삶의 자연스러운 실천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한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대강의 기초이지만 그것이 이제 실제로 목회 생활 속에서 이루어 질 때에는 별의 별 사건들이 다 일어납니다. 그런 유혹, 유명해 지려는 유혹, 물질과 신분 상승에 대한 유혹, 그 다음에 명예에 대한 유혹, 심지어 이성에 대한 유혹, 이런 것들부터 시작을 해서 목회 속에서 만나는 다양한 상황들 속에서 교회에 아픔과 상처를 주지 않고 수없이 다른 생각과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채찍과 억압이 아닌 사랑과 그리고 설득으로 감화로 그들을 이끌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을 양보하지 않고 함께 가도록 만들어 준다면 단순히 학문이나 주님을 깊이 만난 체험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격의 문제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어떤 직업도 이렇게 특별한 자질을 요구하는 직업을 없을 것입니다. 정말 제대로 된 목회자가 되는 것은 수많은 아이들이 아이돌 가수가 되겠다고 나오지만 그 중에서 김수현 같은 아이는 수백, 수천 명의 한명 나옵니다. 1년에 150개 팀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팀은 한 둘입니다. 그래서 할 얘기는 많지만 여기서 맺으려고 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높은 목표를 가지면 거기에 도달을 못해도 중간은 합니다. 처음부터 목표를 이렇게 얕게 잡으면 수준 이하의 목회자가 됩니다. 그래서 총신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그럽니다. “너희들은 공부를 할 때에 너희들의 경쟁 상대를 총신대에 있는 애들이 뒤에 있는 숭실대 있는 애들이나 지방에 있는 대학에 있는 애들 그렇게 하지 말고 세계 최정상의 대학에서 학생들이 어느 수준으로 공부하고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 봐라.” 한 20년 전에 내가 교수로 있을 때, 25년 정도 되었습니다. 강사로 오신 분이 하버드 출신인데 신문에도 자주 나왔습니다. 자기가 하버드 다닐 때 하루에 600페이지를 읽어야 했다고 합니다. 독서량이, 영어만이 아니라 영어, 불어, 독어, 원서 모두 포함해서, 레포트 쓰는 것 말고 읽는 것만 그렇습니다. 요즘 자기네 후배들이 너무 공부를 안 하는데 480페이지 밖에 안 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아이들을 상대로 해라. 얘네들이 참, 신대원은 너무 늦었습니다. 대학부 애들은 정말 소망이 있습니다. 엄청나게 도전을 받은 것입니다. 그 중 몇 명은 일주일에 5권씩 읽었다고 합니다. 독서모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돌아보면 교인이 500명 정도 있는 교회 목회자를 바라보고 나도 좀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교회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정말 교회 역사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다 간 목회자가 누구인가 생각하면서 깊이 고민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는 그런 꿈을 꾸어야 합니다. 한번밖에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만할 때 총신의 문을 두드리고 학부 야간 신학교 다니면서 일주일씩 이주일씩 점심 값 모아서 생명의 말씀사 원서를 사러 갈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나이 60이 되었습니다. 바람처럼 지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허무합니다. 주님의 은혜는 감사하지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실낱같은 길을 걸어왔을 뿐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런 뚜렷한 계획을 세우고 ‘내가 정말 진실한 종이 되든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접고 가서 치킨 집이라도 하겠다.’ 그런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이 길을 가야할 필연성을 발견하고 저항할 수 없는 신적인 강제력에 사로잡혀서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이 증거 하러 왔다고 한 것처럼 여러분들도 여러분 때문에 많은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