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것’이 된 말씀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시 119:56)
녹취자: 원수연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라고 나오는데, 히브리어 성경에 보니까 재미있게 되어있습니다. ‘조트 하예타 리’ 그랬는데 이것은 ‘그것들은 나를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혹은 ‘그것들은 나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 앞에 나오는 여성대명사 ‘조트’는 바로 그 앞 절에 나오는 ‘율법’이라는 ‘토라테카’를 받습니다. 그 앞 절에 뭐라고 나오냐면 ‘내가 밤에 여호와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 율법을 지켰사옵나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 율법이 바로 여기 대명사인 ‘그녀’, ‘그녀가 나의 것이 되었습니다.’ ‘하예타’ 이렇게 나옵니다.
‘그 율법이 나를 위한 것, 혹은 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나오는 이 구절은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들을 줍니다. 그것을 여기서 모두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확실히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다 나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 율법이 나의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동일한 화법입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고난 중에서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어떤 커다란 각성과 함께 그 말씀이 담고 있는 의미와 사실들에 대해 개인적인 체험을 가지고 그 속에서 삶으로 어떤 열매를 맺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시인이 이야기하는 ‘그 말씀이 나의 것이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아주 의미심장한 고백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도 나오는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제가 그릇 행했었는데, 고난을 당하고 나서 주님의 율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 같은 말입니다.
우리의 살아온 신앙생활을 보면 그 때마다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놓던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삶의 상황에 따라서 새로운 것들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들이 삶의 상황을 파악하고, 또 그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 때 자신이 처한 그 삶의 상황 속에서 그 어떤 일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계에서는 구성신학이라고 하는 것들이 새롭게 시도가 되는데, 아주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건 무슨 뜻이냐면, 우리들은 서론부터 시작해서 조직신학적인 질서가 딱 잡혀있습니다. 칼빈 이래로 짜여 있습니다. 조직신학은 뭐든지 그 순서를 따릅니다. 구성신학에서는 내용이 자유주의냐, 보수주의냐를 문제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조직신학의 구성이 과연 불변적 뼈대인가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고 그 조직신학이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에 답할 수 있도록 조직신학을 구성하는 주제의 뼈대들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전에 한권씩 사셨을 텐데, 마이클 호튼의 조직신학 책을 보셨을 것입니다. 기존의 구성과는 다릅니다. 순례자의 신학이라고 붙여놓았습니다. 그런 것들은 이미 구성신학적인 고려가 그 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 구성을 가지고 거기에 자유주의를 넣을 수도 있고, 보수주의를 넣을 수도 있고, 개혁주의를 넣을 수도 있고, 다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들이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냥 긍정할 수 없는 것은,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그 틀을 마구 흔들면서 신학을 진술해나간다면, ‘과연 그것이 우리의 불변하는 진리에 대한 전체적인 관점과 견해들을 조직신학에 담아낼 수 있을까? 담아내지 못하면 나머지는 어떻게 해야 하나?’하는 문제들이 나옵니다.
그것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기도 하다.’ 이런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조직신학을 계속 반복해서 하지만 우리의 조직신학은 사실 기독교적인 윤리 실천의 바탕이 되는 것인데, 결국은 기독교 윤리학도 조직신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직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기독교 윤리도 가르칩니다.
환경이라든지, 저작권 문제라든지, 소위 이야기하는 컴퓨터 디지털시대에 사는 오늘날 우리들의 심각한 문제들, 게임 산업, 이런 것들이 인간에게 주고 있는 피해는 굉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인이 이런 게임 산업을 주 업무로 하고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서 돈을 버는 것이 직업윤리 상에 있어서 옳은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심각한 문제들을 실제로 게임 산업이 낳고 있습니다. 그럼 사실은 주류를 제조해서 파는 것보다도 더 심각하게 그 직업의 윤리성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될 여지를 남기는 것입니다. 수많은 젊은 아이들의 정신적인 문제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닌텐도 같은 폭력적인 게임을 보고나서 그런 일들을 합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답변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따른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헐’ 하는 느낌이 듭니다.
좀 모자라도, 조금 부족해도, 자기 시대의 언어로 신앙의 고백을 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찬송가와 성경은 20년도 안 되서, 때로는 10년밖에 안 되서 갈아엎으면서 합니다. 왜요? 돈이 들어옵니다. 한번만 바꾸면. 수백만 권이 팔려나갑니다. 어마어마한 수입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을 교단의 크기에 따라 나눠 갖는 것입니다. 만약에 신앙고백도 그렇게 만들어서 판다고 하면 10년에 한 번씩 작성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직무유기 행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긍정적인 측면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다루고 있는 이 시인의 고백과 관련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신학을 공부하고 지식이 충만하다고 할지라도, 그냥 지식의 창고에 있는 그것 중에 하나를, 말씀의 칼을 하나 빼들고 설교하고 목회하는 것과 그 칼 중에서 자신의 피가 칼날에 묻어있는 칼을 빼드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칼날에 피가 묻어있는 칼로 목회를 해야 되겠는데 그 칼이 두세 자루밖에 안됩니다. 그러면 만날 단상에 올라가서, 전도에 꽂힌 사람은 전도이야기만 하고 기도에 꽂힌 사람은 기도이야기만 하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특정한 설교만 아주 열정적으로 하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이야기합니다. 율법이 얼마나 광범위합니까? 좁게 이야기하면 십계명이지만, 넓게 이야기하면 모세오경 전부입니다. ‘그 율법이 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 율법이 나의 것이 되었습니다.’ 어떤 과정을 통해서입니까? ‘밤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였사옵나이다’ 여기에서 ‘자카르’라고 하는 것은 단지 히브리 사람들에게 지성적인 기억이 아니라, 마음과 뜻을 다 실으며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은 ‘다시 하나님께 헌신하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이 ‘자카르’의 특성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드려 하나님께 헌신하고, 주님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그 말씀이 자신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지난주에 수련회에서 설교했지만 내일도 설교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아는 지식을 전달함에 있어서 나비넥타이를 맨 웨이터가 되셔서 금접시에 당신을 아는 지식을 담아서 우리에게 서빙하시는 법은 없습니다. 언제나 눈물과 땀과 피에 젖은 베보자기에 싸여서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사람은 예외 없이 고난의 사람입니다.
어저께 조선일보에 한 면 전체에 김형석 교수 인터뷰가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김형석 교수를 잘 모르겠지만 우리 나이 대 된 사람들은 그 분하고 안병욱 씨 책을 읽으면서 자랐습니다. 안병욱 씨는 숭실대 교수였고 이 양반은 연세대 교수였는데 안병욱 씨는 돌아가셨습니다. 이 분은 지금 96세신데 그분들의 책을 읽으면서 우리들이 자랐습니다. 이 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안다니는 그리스도인. 관념적인 그리스도인 같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만 플라톤주의적 기독교인이라고 그럴까요?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기자가 김형석 교수한테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물어보니까 “60세”라고 그랬답니다. 깜짝 놀라서 “왜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데 60세까지만 가십니까? 그 앞에 20대도 있고 30대도 있는데.” 그랬더니 안병욱 씨 살아있을 때 자기네들이 이야기했는데, “우리가 만약 옛날로 돌아간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 그랬더니 안병욱 씨 이야기는 65세에서 75세 사이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3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그 피를 흘리고 싶지 않습니다. 열다섯 살은 더더욱 돌아가기 싫고.
무슨 뜻이냐면 사상의 성숙이 있는 사람은 무조건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고 젊은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자기의 나이가 들면서 성숙해가야 할 지성의 파산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너무나 많은 피를 흘리면서,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 없이 그냥 온몸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 하나씩 하나씩 깨달으면서 왔는데, 60세, 65세정도 되면 아직 젊음이 좀 남아있고, 젊음이 남아있다고 하면 웃기지만 어쨌든지 간에 기동할 수 있고, 똥오줌 가릴 수 있으니까 아직은 그래도 살만하고 그 다음에 이 지식이 자기를 안전하게 해주는 양쪽의 최대공약수를 찾아보니까 60세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이 50대 때 쓴 책들을 읽으면서 자랐습니다. 딱 그 시기에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냐면, 우리 인생을 굳건하게 붙들어주는 것은 지식과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율법이 자신의 것이 되었다고 할 때 이 시인은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시인의 생각입니다.
어느 이발사가 저에게 그럽니다. “돈 좀 잘 버슈?” 그랬더니 “목사님, 이 직업이 사람 보기에는 같잖아 보이겠지만 할 만합니다.” “그래요? 왜요?” 그러니까 “우리는요. 가게도 필요 없구요. 시설도 필요 없구요. 가위하고 칼하고 빗하고 면도칼 세 개만 갖고 다니면, 아무데나 의자 하나 놓고 하얀 보자기 하나 목에다 두르면 우리는 작업이 됩니다.” “우리도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만 있으면 사람이 있든지 없든지 벌판에서 사과궤짝 두 개 놓고 설교하기 시작하면 교회가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온 마음을 다해서 그 지식을 찾아야 하고, 그 다음에 그 수많은 지식을 통해서 깨닫게 된 하나님의 말씀들이 ‘조트 하예타 리’, ‘그 말씀이 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이 경험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미꾸라지처럼 쉬운 길을 걸어가려고 하면 안 됩니다. 마지막에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더 많은 얘기가 있지만 마지막 하반절을 설명하면서 마치겠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키 피쿠데카 나짜르티’ 이렇게 얘기합니다. 뒤에 있는 마침표 때문에 긴 발음으로 늘어났습니다. ‘피쿠드’의 복수입니다. ‘피쿠드’는 ‘법령, 법도, 의무’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지시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어떤 예식에 관한 지시나 사변적인 지시가 아니라 생활에 대한 지시입니다. ‘넌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해라’ 왜냐하면 ‘파카드’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판단하다, 방문하다, 심판하다.’ 이런 뜻입니다. ‘피쿠드’입니다. 복수에다가 2인칭 접미가 붙었습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입니다. ‘당신이 지시하시는 삶의 교훈들, 당신이 나보고 이렇게 살거라 하고 말씀하신 그 많은 지시들을 ‘나짜르티’ ‘제가 지켰습니다.’ 그런 고백입니다. 훨씬 더 범위가 좁고 구체적인 뜻을 가졌습니다. 대체로 지킨 것이 아니라 삶의 상황에서 ‘넌 이렇게 살아라’하고 명령을 하실 때 그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제가 ‘죄의 속임의 교리’를 설교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총체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했다는 생각이 개별적인 삶의 의무들을 기피하는 데 아주 훌륭한 재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 20살 때 선교에 나 자신을 다 드린 사람이야.’ 그것도 훌륭하지만 오늘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게 지킨 것입니다. 하나가 아니라 그 많은 ‘이렇게 살아’라는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총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지키는 것은 구체적인 희생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에 욱하는 감동만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에서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습니다.’ 안 해본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매일 십자가 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놀라우냐면, 실제적으로 전개되는 자신의 삶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런 삶을 살라고 나에게 분부하시는구나 하고 거기에 순종하고 목숨을 걸고 그것을 지킵니다. 그러면 희생하는 고통이 매우 큽니다. 그것은 그의 깨어지지 않은 성품의 강인함에 비례합니다. 고통이. 여러분, 주먹으로 벽돌 같은 것 깰 때에, 어렸을 때 그런 장난 잘 합니다. 태권도 다닌다면서. 확하고 부서졌을 때는 별로 안 아픕니다. 그런데 잘못 때려서 안 부서졌을 때는 죽도록 아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탁하고 깨질 때는 엄청난 고통이 따르지만, 그러나 그렇게 지키기 어려운 그 개별적인 삶에 하나님의 지시들을,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기를 꺾고 순종했을 때에 밀려오는 그 기쁨은 그렇게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심오한 깨달음이 강물처럼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말합니다. ‘그 율법이 나의 것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교훈들을, 법도들을, 지시들을 내가 지켰기 때문이옵나이다.’ 혹은 이렇게 해석도 됩니다. ‘내가 주님의 훈계들을 지킬 바로 그 때에 그 율법은 나의 것이 되었나이다.’ 그래서 총체적으로 헌신하지 말고, 정말 하나님 섬기기에 신나고 좋은 환경이 우리에게 늘 주어져서 우리가 헌신한다면, 사실은 우리의 신앙이라기보다는 분위기 때문에 헌신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늘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욱여쌈을 당하면서, 그러면서도 우리의 마음이 올바르기 때문에 개별적인 하나님의 명령에 매순간 순종하고 살아가는, 그런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