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존재의 부흥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벧전 2:9)
녹취자: 백지영
우리가 마지막으로 읽은 베드로전서 2장은 64년에서 68년 네로황제의 박해시대 때 기록되었다고 믿어집니다. 특별히 이것을 로마에서 기록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이유는 5장의 ‘바벨론에 있는 교회’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이 로마에 대한 암시가 아니겠느냐고 주석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어쨌든 당시 대대적인 박해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 교회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쓰인 서신이 베드로전서 2장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 구절의 이 방대한 양을 오늘 여러분에게 해석해 보일 시간은 없고, 또 그것은 오늘 이 강의의 의도를 벗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좀 눈여겨보고자 하는 것은 여기에 나오는 "택하신 족속"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구절은 희랍어로 '게노스 에클레크톤'이라는 단어입니다. “선택받은 족속”이라는 뜻입니다. '게노스'라는 단어가 말입니다. 역대상 16장에 보면 70인 역에 '에클레크토이 아우 투'라고 나옵니다. "그의 택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로마서 16장 13절로 넘어가면 '에클레크톤 엔 큐리 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주님의 탁월한 자들” 혹은 “주님이 선택한 최고의 사람들”, 여기에서 '에클레크톤'이라는 말은 영어의 'choice', 그리고 여기에서 'The best'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이 구절을 설명해 보면 “선택받은 족속”인데, 그것은 그 당시에 보편교회에 속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공동체적으로 지칭하고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심각한 선교적인 위기에 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선교적인 위기라고 하는 것은 해외에 있는 선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의 목회적인 상황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최근 한 20년 사이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변화가 한국 사회에 밀려왔고, 그래서 저는 20년 전 우리 교회를 개척하던 시절과 지금이 어떤 시대냐고 물으면 완전히 다른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게 어떻게 다른 시대인가 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관점을 가지고 현대의 상황을 직시하는 사람들만이 파악할 수 있는 차이점입니다.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났고 그리고 무엇인가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난 변화가 도입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상당히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역사의 조류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하는 한 목회자로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하며, 오늘 앞에 발표하신 임 목사님이 고민하는 것과는 또 다른 각도에서 한국 교회의 상황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이 문제를 고민하고 글을 썼습니다. 안 읽습니다. 이유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제가 2주 정도 심혈을 기울여서 쓴 책이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이라는 책입니다. 모든 서점가에서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머리에 쥐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종류의 눈물이 흐릅니다. 이러한 심각한 교회의 상황과 현재 처하고 있는 교회의 이런 위기상황들은 지성의 면밀한 성찰이 없으면 올바른 길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30년 전만해도 교회를 하면 사람들이 모였고,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20년, 30년 전에는 교회가 아주 커지는 것이 그 자체가 사회적인 영향력을 암시했습니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이 세상의 불신자들은 교회가 아무리 세력을 규합하고 한 교회가 오만 명, 십만 명이 모여도 그것을 사회적인 영향력의 크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 영향력이 없다기보다는 선한 영향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어떤 사회적인 이슈가 있어서 교단이 뭉치고 교회들이 합쳐지고 해서 어마어마한 부피로 불려서 성명서를 내고 방송에 떠들고 신문지상에 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도올 김용옥 씨 같은 사람은 기독교에 대해서 예고합니다. "건드리고 비판할 가치도 없는 집단이다. 스스로 자기 자신의 모순 속에서 자멸하고 말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라." 기독교 인구가 천만이다, 천이 백만이다 합니다만, 처음부터 난 믿지 않지만 또 그것이 2천만이 된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규모와 크기와 세력으로 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나라였으면 고등학교 교과서에 두 줄밖에 안 나오는 이스라엘을 택하지 말고 전 세계에서 위대한 팍스를 이루었던, 팍스 로마나, 팍스 브리태니카, 팍스 시니카, 팍스 몽골리아 이렇게 어마어마한 제국들을 이루고 그 평화를 이룩했던 나라를 택했어야지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나라를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손톱만한 크기도 안 되는 나라를 택하셨는데 그 나라를 택하셔도 당신의 구원의 위대한 경륜을 이루기에는 충분했던 것입니다. 좀 더 크게 그리고 엄청난 규모와 규합된 세력으로 그 자체가 이 세상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바벨론의 사고방식이지 예루살렘의 신학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시계를 2000년 정도를 거슬러 올라가서, 만약에 1세기 혹은 2세기의 문맥으로 돌아가서 그 시대에 로마제국의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떤 인상을 주었을까 라는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문헌을 찾아보았습니다. 성경 이외의 문헌에 베드로의 설교라는 문헌이 있습니다. 거기에 불신자가 본 기독교인에 대한 인상이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 아닌 제 3의 족속이 나타났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당시 로마제국에서 헬라의 헬레니즘이 광범위하게 제국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이 헬레니즘에 쉽사리 동화되지 않고 뚜렷하게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수의 집단이었지만 이들은 광범위하게 로마 제국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는 삶의 방식, 쉽게 이야기하면 '포르마 비벤디', 삶의 형식에 있어서 대조적으로 구별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헬라인들 이방인들이고 또 하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소수의 집단들이 출현했는데 그 모습이 충격적입니다. 익숙하게 자신들이 보아왔던 헬라인 이방인의 포르마 비벤디도 아니고 그리고 유대인의 라이프스타일과도 다른데, 그 사람들이 ‘크리스티아노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폴리갑의 순교라는 외경이 있습니다. 거기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 시대에는 기독교인이라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건한 족속들이 있습니다." 그 불신자들의 눈에 볼 때 ‘크리스티아노이’, 그것은 굉장히 모욕적인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명사 뒤에 ‘호이’를 부치면, 거기에 ‘추종된’, ‘예속된’, ‘똘마니’ 이런 의미입니다. "예수에게 예속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놀라운 특징은 아주 선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족속들입니다." 이게 불신자들이 바라보는 기독교인에 대한 인상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영웅전을 쓴 플루타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플루타크가 쓴 책 가운데 도덕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법이 아주 발달된 나라였고 로마 법정의 제국의 이름으로 내리는 판결을 ‘디바인 져지먼트’(divine judgment), ‘신성한 판결’이라고 사람들은 불렀는데, ‘도덕론’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로마 법정의 신성한 판결의 피고가 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은 선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족속들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 불신자들이 그 당시 기독교인들을 바라보는 인상이었습니다. 멜리토라는 초대교회의 교부가 부활절 설교 속에서 불신자들이 기독교인에게 갖는 인상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직 기독교에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공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박해와 핍박이 있고 그리고 믿음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시기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이름붙인 사람들을 향한 그 시대의 불신자들의 인상입니다.
자, 만약에 불신자들에게 오늘날 기독교인들에 대한 보편적인 인상을 말하라고 하면 어떤 인상이 나올까요? 이런 상황을 보면서 오늘 우리는 기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와 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기업이 위기에 처하면 CI를 바꾸고, 이름을 바꾸고, 이사진들을 교체하고, 최고책임자를 발령하고, 광고를 하고, 사회적인 기업의 이미지를 개선합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세상이 교회에 대해서 내리는 평가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곳이라는 점,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와의 성육신적인 연합 속에 있기 때문에, 하나의 거대한 그리스도의 가능성 있는 몸처럼 여기는 것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한 신학적인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나의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교회 역사의 유구한 시대 속에, 중세서부터 종교개혁자들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던 그런 종류의 교회론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물론이고 칼빈과 교류했던 패트루스 마터 버미글리 같은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교회론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교회는 이 세상으로부터 어떠한 인상을 받느냐 이것이 교회의 존재의 목표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독특한 집단이고, 그로 말미암아 반사적으로 이 세상의 도덕과 윤리를 충족시키거나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윤리적인 효과를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세상이 박수를 쳐도 우리는 그 장단에 맞추어서 춤을 추거나 우쭐거릴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 박수소리는 언젠가 아주 빠른 속도로 조롱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의 교회의 당당함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이런 모든 논의들을 종합해 볼 때 기독교인의 구별은 존재적인 특성입니다. 화 목사님이 부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초창기에 집필할 때 부흥에 대해서 많은 책을 쓴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관심사는 아직까지도 제 마음 속에 남아있고 그때 쓴 책과 모든 사상들이 추호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조나단 에드워드 시대 혹은 평양 대부흥 시대의 그런 부흥이 우리에게 그대로 임하게 해 달라는 그 기도가 나쁜 것은 아니고 그것도 필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종류의 새로운 부흥을 이 시대가, 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지금은 상대주의가 밀물처럼 밀려오는 시대입니다. 퀴어축제를 비롯해서 기존의 가치관들을 모두 허무는 엄청난 사회적인 변혁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들은 하나의 우발적인 현상이 아니라 그 뒤를 캐 들어가면 도저히 웬만한 사람의 힘으로는 흔들 수 없는 엄청난 철학적인 기저를 가지고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강의의 본류는 아니지만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지금 유럽에서는 섹스와 젠더를 구분합니다. 섹스는 물리적인 성입니다. 딸은 여자로 태어나고 아들은 남자로 태어납니다. 젠더는 자기가 살면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예전엔 우리가 섹스 그러면 생물학적인 것이고 젠더 그러면 사회학적인 것이었습니다. 두 개가 일치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갈라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유럽에서 일부의 견해가 아니라 이미 아주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유럽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던 이런 식의 좌파적인, 좌파가 모두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신자유적인 사고방식이 모든 것들이 다 수용되고 상대주의로 흘러가버리니까 이미 더 이상 거기에서 대결의 접점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기존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아시아 쪽으로 들어오게 되고 특별히 기독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고 교회에 선명한 대치구도가 가능한 한국사회로 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도 이런 문제가 첨예하게 문제가 안 될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이미 여기서 그런 것들에 대해서 사상적으로 우리처럼 바리게이트를 치지는 않는 사상적 배경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이미 대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것들을 신경질적으로 대항할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이렇게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밀려오는 이 사회적인 현상의 대변혁, 그리고 이 격랑의 가치관의 혼돈 뒤에 그들이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철학적인 질서가 무엇인가 그것을 헤아리자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신학자들에게 요구하고 목회자들에게 요구할 것 아닙니까? 미친 듯이 밤잠 안자고 공부해서 피를 토하듯이 써냈는데 못 읽습니다. 쉽게 쓰면 내용이 없다고 하고 묵직하게 쓰면 소통이 안 된다고 하고 중간으로 쓰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오늘 갈 때 책 한 권씩 다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나올 정도니까 여러분은 의식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제가 간곡히 눈물을 흘리며 권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 그 400페이지짜리 책을 한번 진지하게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이해가 안 되면 인터넷에서 용어를 검색해 가면서 꼭 읽으시기를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성의 헌신 없으면 극복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뭘 위해서 기도해야 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자, 우리 교회를 키웁시다. 주님께 큰 성전을 바쳐서 영광을 돌립시다.” 이제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공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교인들이 공감을 안 합니다. 이제 뭔가 다른 것을 우리가 요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방나라와 이스라엘이 구별되었습니다. 이것은 제의나 나라의 크기, 제도 이런 것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구별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아주 여러 곳에서, 특히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이방의 빛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말로 '오르', '빛'입니다. 히브리말로 '오르', 이것은 크게 구약에서 세 가지 용례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가 물리적인 빛입니다. 두 번째가 신학적인 빛입니다. 세 번째가 윤리적인 빛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우신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참된 사람이 됨으로써,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이 됨으로써, 하나님은 안 보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이니까 그들을 보면서 참 사람 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어쩌면 저들을 저렇게 행복한가, 그 행복이 먹고 마시고 바르고 입고 소비하는 그런 종류의 행복이 아니라 돈 많은 나도 도저히 누릴 수 없는 그 어떤 복된 상태에 저들이 도달해 있구나, 그것을 보면서 도대체 저들을 저렇게 사람 되게 하고 진정으로 복된 상태에 있게 하는 그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그 사명이 이제 육적인 이스라엘의 껍질이 깨뜨려지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선교계획을 이야기하면서 ‘백 투 예루살렘’(Back to Jerusalem)을 이야기하고, 유대인들이 회심하면 어떻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다 옳지 않은 해석입니다. 그들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제는 그 껍질들이 깨져나가고 영적인 실체들이 드러나게 됐는데, 그게 신약시대에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이방인들, 이 로마 시대 사람들이 당시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가졌던 충격적인 인상, 쉽게 그저 일반적으로 있을 수 있는 보통사람들이라고 묻어버릴 수 없는 강렬한 어떤 'impression', 이것을 받게 한 것이 그 당시의 교회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가 바로 그런 신학적인 인상을 교회에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통탄할 정도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공부를 안 하느냐는 것입니다. 책을 안 읽습니다. 이것은 신학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신도 위해서 책을 썼는데 신학생들이 못 읽습니다. 주기도문을 썼습니다. 한 달 동안에 피를 토하듯이 썼습니다. 어렵다고 안 읽습니다. 할 수 없이 오늘 터덜터덜 여기 오면서 깊이 있는 주기도문은 내버려 두고 편하게 읽는 주기도문을 다시 한 번 써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에 이 기독교의 사상의 기초들을 허물고 공격하기 위해서 그 허무한 가치관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기독교의 지성이 심각할 정도로 빈약해서 사상이 없이 아주 가벼운 시대가 돼버렸습니다. 제가 책 이야기를 계속해서 미안합니다만, 『영원 안에서 나를 찾다』라는 책은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제가 백번을 읽고 쓴 책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그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제가 이야기하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생겨나는 것은 그나마도 위로입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아직도 멀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지금 교회가 부흥이라고 할 때 그 부흥의 관념을, 부흥이 일어나면 뭔가 교회가 뜨거워지고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 사람들이 헌금을 하고 교회의 규모를 키우고 그러면 우리가 뭔가 큰일을 할 수 있고, 그런 것들을 꿈꾸면서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아주 최상의 대안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불교 인구가 25%다, 50%다, 그래서 무서워해 본 적 있습니까? 저는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화) 어느 스님이 글을 썼습니다. 70이 넘으신 분이신데 너무 감동적으로 쓰셨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경상도 지방으로 친척집에 갔다가 올라가는 길에 친척이 유명한 절이 있는데 가보라고 해서 이 친구가 그 절에 갔습니다. 혼자 절을 돌아다니다가 너무 다리가 아프니까 툇마루에 앉았는데 젊은 스님 한 사람이 걸어와서는 옆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문답이 시작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누구냐?”, “저는 서울에서 고등학교 다니는 2학년 학생 아무개인데 친척집에 놀러왔다가 이 절이 하도 유명하다고 해서 구경 왔고 이제 가려고 합니다.”, "얘야, 너 왜 사니?" 그리고 한 시간 반을 대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 고등학생은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엄마 아빠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두 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제가 출가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 집안은 대대로 가톨릭 집안이었습니다. 엄마 아빠가 정신 나간소리 한다고 펄쩍 뛰었습니다. 마침 거기 사촌 형이 있었는데 일본 불교를 연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엄마 아빠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얘가 이제 인생의 자각이 생겼습니다. 이 아이의 인생은 우리의 인생이 아니니 가게 두시지요.” 그렇게 해서 출가를 했습니다. 그리고 70세가 넘어서 그 16, 17살 때를 회상하며 글을 쓴 것입니다. 그때 먼발치에서 걸어와서 “얘야, 인생이 뭐니?”하고 물어주었던 그 스님이 성철스님이었다고 합니다.
제 나이 15살 되던 해 주일이었습니다. 2월 겨울이었는데 추우면서도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 11시 약간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교회를 가다가 논둑에 엎드러져서 그 15살 먹은 소년이 통곡하면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돈이 없고 가난하고 배고파서 운 게 아니었습니다. 기어 다니면서부터 그렇게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 도대체 "인생이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내 앞에 매일 펼쳐지는 이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신은 존재하는 것일까?" 라는 물음 앞에 목사님들의 설교와 선생님들의 공과는 티끌만큼도 도움이 안 되었습니다. 그렇게 가슴이 찢어지도록 생애 처음 인생에 대한 자각에 눈 뜨고 통곡하면서 한 참 울고 난 다음에 뺨에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닦고 이 15살 먹은 아이가 일생을 무신론자로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신은 없다.”
저는 지금도 그런 15살짜리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교회를 크게 짓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선교의 계획을 짜고, 돈을 걷어서 어떤 일들을 한다고 하고 그러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인상을 줄 수 있겠습니까? 과연 이 초대교회에 존재론적인 선포로 사람들에게 인상에 중요한 자국을 남겼던 이 사람들이 주었던 그 인상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다른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과 함께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피조물은 예전에 이 세상에 얽매어 살던 사람하고는 놀랍게 변화된 사람이지만 변화된 사람을 출발점으로 해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그 사람을 완성하고자 하는 그 표준에는 아직도 먼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화의 문제가 대두되는 이유입니다. 조국 교회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는 성화를 설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화가 사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야 할 거의 모든 설교의 주제입니다.
더 눈물 나는 이야기 해 드리겠습니다. 한 7, 8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기독교 잡지가 아니라 어느 일반 잡지사에서 인터뷰를 요청해 왔습니다. 그래서 왜 나를 인터뷰하려고 하느냐고 했더니 정치, 경제, 문화 돌아가면서 인터뷰를 하는데 이제 종교 차례이고 가톨릭, 불교를 지나서 개신교 차례인데 제가 선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터뷰가 시작되었습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교회가 무엇입니까?”,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내가 알고 있는 지성과 모든 한도 안에서 성심껏 신자끼리 통용될 수 있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불신자인 그 사람도 이해하도록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나면서 이 사람이 한마디를 던졌는데 그 충격이 지금도 생각할수록 가시지를 않습니다. “목사님, 수많은 기독교 인사들을 인터뷰했습니다.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가 않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목사님은 스님 같으십니다.” 그 이야기가 충격적으로 들렸던 이유는 제가 그 말 뒤에 숨겨진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파악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목회자는 비즈니스맨처럼 비치고 스님은 철학자처럼 비쳤던 것입니다.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물에 대해서 정합성(整合性)을 가지고 사물과 사태들을 일관성 있게 파악하게 만들어주는 지식의 체계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사실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1세기, 2세기 때 그렇게 또렷한 인상을 그 당시의 로마 시대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런 종류의 확고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상은 지식의 크기도 문제가 되지만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기독교의 진리의 체계들이 확고하게 가치관이 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보면 신자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 순간 덤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순간이든지 자기의 가치관과 모순되는 길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장렬하게 피를 뿜으며 죽는 게 성경이 그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뭘 알아야지, 뭘 확고하게 자기를 붙든 사상이 있어야지만 거기다 피를 바를 것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상이 장엄한 얼개를 가지고 전개된 것이 로마서, 특히 로마서보다도 더 위대한 것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입니다. 간단한 서신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런 인상을 사람들에게 갖게 했던 것이 무엇인가? 그 단초를 오늘 사도 바울이 얘기했던 “내가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하는 이 고백이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는 갈라디아교회에 유대교 완전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침투했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도 믿어야 되지만 구원을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 하고 이것을 위해서는 할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모든 서신서에 깃들여 있는 친절한 인사를 생략한 채 그들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경고하고, "십자가에 의한,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하면서 그 유명한 고백, “이후로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해석이 두 가지가 있는데, 육체적 해석과 형상적 해석입니다. 한국교회에 아주 기분 좋게 널리 퍼지고 있는 정설은 육체적 해석입니다. 그 중에서도 육체적 해석에 세 가지 설이 있는데, 첫 번째가 물리적 핍박설입니다. “내가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할 때에 이 ‘스티그마’는 핍박 때문에 받은 물리적인 몸의 상처인데, 그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사실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깊은 신학이 없어도 문맥을 보면, 지금 갈라디아교인들하고 사울이 논쟁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과 복음, 육체와 영혼, 그 다음에 그들이 갖고 있는 할례의 표와 사도 바울이 얘기하는 예수의 흔적이 아주 뚜렷한 엔티디시스를 이루면서 갈라디아서 6장을 수놓고 있습니다. “너희가 남자 몸 거기에 찢어가지고 표를 냈다고? 나는 팔뚝에 그런 게 있다.” 그랬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F.F.프루스나 크레머 같은 사람들이 형상적 해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육체적 해석의 두 번째는 가톨릭에서 받아들여지는데, 신비주의적 성흔설(聖痕設)입니다. 예를 들자면, 전설에 의하면 아시시의 프란시스가 깊은 신비주의적인 그리스도와의 교통의 연합 속으로 관상기도 속에 들어가면서 주님이 두 손과 두 다리 그리고 옆구리에 심각한 상처를 내어주셨는데 예수가 받으신 그 오상(汚傷)을 자기도 받았다 이게 '스티그마티제이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제의적 문신설입니다. 수많은 이방의 제의에 수종 드는 사람들이 자기 몸에 문신을 새겨 자기 자신을 신께 헌신했듯이 사도 바울도 모종의 무언가를 새겨서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다고 하는 서약을 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추측입니다.
설득력이 있는 것은 형상설입니다. 왜 그러느냐하면 여기에 나오는 희랍어 '스티그마'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흔적입니다. 표시, 마크입니다. 그 당시의 노예들에게는 노예의 마크를 새겼습니다. 여러분은 로마의 군인들이 'SPQR'이라는 마크를 새긴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마크를 새긴 것입니다. 가축에도 새겼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노예제도에 따르는 스티그마의 문맥을 다 알고 있는 수신자들에게 사도 바울이 이 스티그마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한국 성경뿐만 아니라 킹 제임스 버전을 비롯해서 모든 영어 성경에 심각한 오역이 하나 있는데, 'The servant'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특별히 그 단어가 신양성경에서 사도들이 자신을 소개할 때, “그리스도 예수의 종 된 바울은” 할 때 'For the apostle the servant of God' 혹은 'Jesus Christ'라고 할 때 ‘서번트’는 잘못된 것입니다. 더 오래 전서부터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한 1년인가 2년 전에 미국에서 정식으로 책이 나왔습니다. '둘로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둘로’스는 'slave'입니다. ‘서번트’가 아닙니다. 당시 ‘서번트’는 출근하는 ‘서번트’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혈연적인, 노예적인 복종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위가 낮기는 하지만 고용계약 관계입니다. ‘슬레이브’는 그 집안에 살면서 자식을 낳아도 개가 새끼를 낳으면 그 집 소유가 되듯이 자식도 자기 소유가 아닌 그런 예속된 사람들이 바로 ‘둘로스’입니다. 사도 바울이 극단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자신이 'The slave of Jesus Christ'라고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노예들은 강압에 의해서 혹은 'Self selling'에 의해서, 전쟁에 졌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팔아서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노예가 되었지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때문에 노예가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자기 인식은 'The slave of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스티그마타 투 예수", "그 예수의 그 흔적들"이라는 이야기는 결국은 자신의 소유주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입니다. 그 소유됨이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둘로스 크리스투’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이미 구약에 탄탄한 신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에벳 야웨’라고 하는 ‘야웨의 종’의 개념이 계속 구약 내내 흐르다가 신약에 와서 기독론적인 전환을 겪으면서 ‘둘로스 크리스투’가 된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자기의 책 속에서 하나님이 목회자를 세우신 것은, 그가 설교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살 때 어떤 존재가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목회자를 세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모든 불신세계에서 구원하여 그리스도인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불신자들에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믿고 우리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에 어떤 존재가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에 참된 부흥이 일어났을 때 그 부흥의 불을 끄고 심각하게 손해를 입히던 사람들은 불신자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오염된 세력들이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이야기가 무슨 뜻이냐 하면, 전 세계의 선교적인 경험을 보면 한국에서도 기독교인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몇몇 교회가 애를 쓴다고 해서 일반적인 방법으로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세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특별한 성령의 부으심과 강력한 영적인 부흥이 있다면 그것은 상황을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옳은 판단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런 상황 속에서 다음 세대에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사회에 미칠 영향력과 문제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인이 성경이 그리고 있는 진정으로 가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revivals existence', '존재의 부흥'입니다.
자신의 실존이 이 땅에 딛고 살아가는 그 사람이 무엇을 통해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다른 존재로 보이느냐 그게 문제입니다. 그것이 두 가지인데, 기독교의 힘과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힘은 두 가지입니다. 곧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모든 절대적인 가치관을 다 거부하고 통일된 사상의 담론들을 거절한 채 파편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인간의 절대적인 자유를 부르짖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해 봅니다. 그런데 인간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안정이 없습니다. 다음 세대는 지금보다 선교적인 상황이 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기독교의 필요성은 배가 증가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에 있어서는 위기일 뿐만 아니라 또한 기회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목회자가 될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사상으로 자기 자신을 잘 수립하고 성립해서 여기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울려 퍼지는 이 설교가 허망한 사람들의 잘못된 가치관과 세계관과 인생관들을 위대한 능력으로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가, 그래서 그 설교와 하나님의 진리의 위대한 빛 앞에서 자신이 붙들고 있는 고집하는 이 현세적인 사상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하는 것을 지성의 깊이뿐만 아니라 삶의 실제로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교회라면, 그것은 다음 세대가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에 대해서 저는 예고하는데, 크게 잘 모여서 순수한 신앙을 간직하는 교회 그리고 나머지는 아주 기독교의 세력이 약화되고 기독교의 출석인구가 심각하게 줄어들 것이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이미 입증이 되어 온 것들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더 많이 있지만 나머지는 원고를 읽어보시고, 또 하나가 윤리의 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비겁합니다. 그러면 용기 있는 삶을 살아야 되는데 그 용기를 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상황에 열 받는 정도 가지고는 안 된다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는 뿌리 깊고 확고한 사상이 있어서 그 사상과 가치관대로 누가 뭐라든지 자신의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이 유리되지 않기 위해서 사상과 윤리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는데 이게 바로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성령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제 기독교는 많은 사업이나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애쓰는 대신에, 자기를 돌아보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정말 진실한 그리스도인 그리고 그냥 착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이 세상에 맞설 수 있는 확고한 사상을 가진 그리스도인, 그리고 자기의 사상의 지도에 피를 뿌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길러내야 되는 것입니다. 아까 미지근하다는 말씀 들었을 때 제 마음도 뜨거워졌는데, 일본 애도시대 때에 양가의 가문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대표를 보내서 바둑을 두게 하였습니다. 한 쪽이 집니다. 이 대표가 바둑을 헤아리다가 자신의 가문이 바둑대회에서 진 것이 너무 원통해서 바둑판에 피를 뿌리고 그 자리에서 절명을 해 버립니다. 그게 유명한 ‘토혈국’입니다. 아직도 인터넷에 들어가면 기보가 나옵니다. 오락을 하다가도 지니까 피를 토하다가 죽었습니다. 진리를 가진 사람들이 진리를 말하는 것은 입에 침만 바르면 됩니다. 그런데 세상이 원하는 것은 입술에 침 바른 진리가 아니라 피 묻은 진리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한 줄 진리 위에 얹고 거기에 자기 모자기를 드리우고 장엄하게 피를 뿜고 죽을 수 있는, 그렇게 자기 안에서 승화된 진리와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운동의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진리와 사상으로 무장되고 확고한 윤리적인 삶을 살고 그리고 열렬하게 기도하고 자신의 모든 삶에서 그 진리의 표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피 묻은 삶을 살아갈 때, 선교하지 않아도 "The presence is the best proclamation." 현존 그 자체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대중적이 되거나 진리를 부르짖는 사람이 다수인 경우는 기독교 역사에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섬에 공부하러 들어갔습니다. 겨울에. 배를 타고 나오는데 풍랑을 만났습니다. 캄캄한 밤바다입니다. 배가 다시 섬으로 돌아가는 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저기서 딱 한 개의 불빛이 깜빡 거립니다. 그 불빛 하나를 보고 모든 배들이 항구로 피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욕할 필요 없습니다. 나 하나만이라도 정말 진리를 보여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성경적인 사상의 정신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믿고 그리고 열심히 진리를 탐구해야 합니다. 특히 목회자가 될 사람들이 공부 안 하는 것은 미래 교회의 재앙입니다. 치열하게 공부하고 그 가르침에 진하게 피를 발라서 그래서 이 세계에 던져주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