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 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 이니이다 할찌니라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 ”(호 14:3-4).
I. 본문해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세아 선지자로부터 들은 예언의 내용들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의 예언 활동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약 60여년 이상 예언 사역을 이후에 이어지는 왕까지 계속 하였고, 그 때는 주전 8세기 중엽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정치 ․ 경제 ․ 군사적으로는 강한 나라가 되었지만,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매우 부패한 상태가 된 것을 안타까워하시면서 번영 속에서 그들이 잊고 있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선지자 호세아를 보내어 예언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호세아는 그 이름의 뜻이 구원이라는 뜻이고, ‘예수’라고 하는 이름도 이 호세아의 이름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니 사람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치는 것이 이 선지자의 중심 메시지였습니다.
II. 엎드러진 이유
그러나 오늘 이스라엘은 불의를 인하여 엎드러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엎드러진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의 엎드러짐 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제적으로는 아주 부강한 나라가 되었고, 무역을 통하여 산업을 일으키고 그리고 국민들이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매우 부패한 나라가 되어서 주님 앞에 엎드러진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A. 앗수르를 의지함
이렇게 신앙적으로 엎드러진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앗수르를 의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형편은 전통적인 강대국이던 남쪽의 ‘애굽’, 곧 여러분들이 역사에서 배운 ‘이집트’와, 그리고 위쪽 북방으로는 이제 신흥 세력으로 강성해지기 시작했던 ‘앗수르’, 여러분들이 역사시간에 배운 ‘앗시리아’라는 나라 두 사이에 끼어서 그들의 패권 정책에 의해서 나라의 존립이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에 ‘므나햄’이라고 하는 왕은 이제 앗시리아에 의하여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에 은 일천 달란트를 가지고 뇌물로 바치며 자기의 나라를 보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말을 타지 않을 것이며’ 라고 하는 이 말은 애굽으로 원조를 청하러 가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애굽은 기병으로 유명한 나라였습니다. 이렇게 양대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면서 이스라엘의 명맥을 이어가려고 하는 외교적인 노력은 세상 적으로는 지혜 있어 보일지 모르나, 신앙 적으로는 매우 부패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당신보다는 앗수르를 의지하고 애굽을 의지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적 부패성을 질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난 한 해 동안 신앙에 실패했다면, 단지 달력 한 장 넘겨서 새로운 해가 밝았다는 이유 때문에 올 해는 성공하리라고 하는 그런 근거 없는 기대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그리고 간 궤적입니다. 글씨를 잘 쓰지 못하는 학생이 하얀 종이에 글을 쓰다가 노란 종이로 바꾸었다고 해서 명필이 될 수는 없는 것이죠. 만약에 여러분들이 2009년과는 다른 새로운 한 해를 진정으로 맞이하고 싶다면, 달력만 넘길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도 넘겨서 작년 한 해를 실패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인 여러분들의 마음과 영혼을 고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올 한 해는 지난해와 다르게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강대국에게 위협을 받을 때에 앗수르에게 도움을 간청한 것은 외교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이 빼어내신 바 된 민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온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돈이 많고 나라가 부강하다고 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군할 때에는 그야말로 거지 떼와 같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을 정복하기 직전 가나안 원주민들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만들었던, 하나님과 동행함을 보여주었던 때였습니다. 우리의 지난날의 실패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실패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믿음 없이, 씩씩하게 사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자기를 하나님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요체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티끌 같이 미약한 존재인지를 알고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자기가 얼마나 쓰레기 같이 더러운 인간인가 하는 것을 알고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 그게 신앙의 요체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전심으로 당신의 품에 안기며 당신 한 분 만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사람을 도우십니다. 그래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세상에서 짓밟힐 것 같은 자들로 이기게 하시고, 세상에서 넘어질 것 같은 자들로 일어서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내 편이시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가 무엇을 겁낼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대적이 많든지 적든지 우리가 일년 동안을 살면서 환란을 한 번 만나던지 열 번 만나던지 그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 모든 것들 중 단 하나도 우리의 힘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용기와 그리고 결단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데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처음 종교 개혁을 일으켰을 때 그는 개신교를 세우려고 종교 개혁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그는 로마 카톨릭을 개혁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 더러운 부패는 바로 하급의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가들의 농간이라고 믿었습니다. 교황님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로마를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모든 일들이 교황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매일 매일 죽음의 위협 아래 놓인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장 힘든 때에 노래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오,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라고 말입니다. 혹시 또 하나님이 구하시지 않으셔서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자신이 믿는 이 진리는 시퍼렇게 살아서 반드시 불의를, 거짓을 이길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종교 지도자들과 제우들이 모인 보릉스에 불려나가 서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예배당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강력한 심문을 받았습니다. 젊은 황제 칼 5세가 제국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너의 개혁 사상을 철회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때 그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서있나이다. 내가 달리는 어쩔 수가 없나이다, 예수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불신앙, 몸으로는 교회에 다니고 입술로는 신앙을 고백하나 우리의 마음에 은근히 의지하는 것은 우리의 재능, 우리의 물질,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이 세상의 모든 환경들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공을 들이지 않고, 이 세상과의 관계는 공을 들이는, 신앙과 이 세상의 삶이 분리된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를 지난 한 해 실패하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앗수르에게 은 일천 달란트까지 갖다 바치며 뇌물을 주고 우리나라를 도와달라고 말했지만 결국 722년에 앗수르라는 이 나라에 의해서 수도 사마리아는 폐허가 되고 영원히 북 왕국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닌 이 세상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의 최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해를 시작하기 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한 해는 이 점에 있어서 온전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금년에는 우리가 단연코 주 하나님을 의지하리라고 하는 분명한 신앙을 가지고 ‘믿음제일주의’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 것이며, 이 뜻대로 사는 가운데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있고 고난을 받는 것이 있다면 기꺼이 당하겠노라, 그래도 우리 신앙은 이길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한 해를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B. 우상을 경배함
두 번째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원래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고 사랑해야 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을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방황하던 많은 무리들은 대부분 애굽의 화려한 문명을 못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들이 광야에서 떠돌다가 발달한 농경문화가 찬란한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섰을 때, 아마 한국 시골사람을 뉴욕에 갖다가 세워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잘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그 들의 번영 한 복판에는 신이 있었습니다. ‘농사의 신’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신문이나 잡지 혹은 <메소포타미아 유물전> 같은 데에 가 보면 그 신상들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대부분 여자입니다. 엉덩이가 함지박만한 펑퍼짐한 여자들이 가슴에 젖이 있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젖이 아니라 아주 커다란 젖이고, 심지어는 그 유방이 두 개가 아니라 일곱, 여덟 개 씩 온 몸에 달려있는 신상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 큰 엉덩이는 다산의 상징이고, 그리고 그 몸에 붙은 그 많은 젖들은 풍요의 상징입니다. 그 신이 자기를 경배하는 자들에게 그런 풍요와 다산의 복을 줄 것이라고 하는 메시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만 굳이 여기에 있는, 이 오랜 세월동안 번영을 가져다 준, 이 땅의 신들과 대적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느냐... 그래서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의 신도 숭배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눈에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중대한 모독이고 오히려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보다 더 나쁜 죄였습니다. 그럼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그렇게도 싫어하시는 우상을 섬겼을까요? 이것은 우상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섬기는 것이지만, 우상을 섬기는 것은 우상을 위하여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상이 자기를 복 줄 것이기 때문에 섬기는 것이니 이는 자기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숭배는 성경에서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에서 사도 바울이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 라고 하였던 것이죠. 따라서 우상은 도덕성이 없습니다. 제물을 바치면 ‘이게 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냐’ 우상은 묻지 않습니다. 제사를 드리면 제사를 드리기 전 ‘너는 한 해 동안 이 제사에 합당하게 살았느냐’ 묻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너희가 예배에 나왔느냐? 네 마음도 나를 공경하고 있느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엎드러지게 된 이유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상의 힘을 빌어 자신의 만족을 얻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엎드러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한 해 동안 하나님 앞에 가고자 하는 신앙의 목표도 있고 올바르게 행하고자 하는 섬김의 목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보다 우리 자신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하나님보다 우리 자신을 더 사랑했기에 엎드러졌고, 하나님보다 우리를 더 사랑했기 때문에 불순종 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우리를 더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여 깨뜨려지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 있는 모습 이대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이죠. 그래서 진리가 우리의 마음에 들 때에는 진리를 좋아했지만, 그 진리가 우리를 꾸짖고 나무랄 때에는 진리를 미워하고 빛이 아닌 어둠 속에 숨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지난 한 해 동안 실패한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III. 돌아오는 길 : 말씀으로 돌이킴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주는 교훈 속에서 우리는 그 대답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고 말합니다. 돌아오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생각에 있어서 ‘말씀을 가진다’ 라고 하는 것은 그냥 듣는다는 뜻이 아니에요. 자기가 자기의 삶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그것을 지배하고 충분히 체득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에요. 여러분 것은 여러분 마음대로 할 수 있죠. 그것은 여러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것이라도 여러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면 여러분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러 주일이면 교회에 옵니다. 그런데 이제 몇 십 분 후면 이 예배를 끝마치고 예배당을 떠나게 됩니다. 그 때에 다시 근심과 염려와 걱정이 밀려오고 오히려 예배를 드린 속박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느끼고 있다면 그는 말씀을 가지고 돌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찬송 속에서 우리의 경배를 그 분께 올리고, 기도 속에서 우리의 중심을 그 분께 토로하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깊고 내밀한 심정을 전달 받으며, 그 진리의 말씀에 우리의 마음이 감동을 받습니다. 예배가 끝났는 대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나에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살아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주님이 너와 함께 하시리라, 순종하라.’ 이러한 말씀이 여러분 마음 속에 살아서 그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여 여러분이 그 말씀을 사용하여 삶을 바꾸어나갈 수 있을 때, 그것이 바로 말씀을 가진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가진 사람들만이 불순종하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 앞에 고칠 수 있습니다. 가던 길을 바꿀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난 한 해 동안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 빗나가고 있는 길에서 말씀으로 돌이킬 수 있는 시간들을 허비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주의함과, 나태, 그리고 게으름과 태만 속에서 수많은 돌이킬 기회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한 해 동안 살고 보니 우리가 원하는 자리에 와 있지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그 시작은 어느 한 순간에 혁명적인 돌이킴으로 시작될지 모르지만, 그 신앙이 아름답게 이어지는 길은 폭풍 같은 돌이킴이 아니라 매일매일...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찬양) 매일매일 돌이키는 그 돌이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인 것은 크게 보면 두 가지 때문입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성례를 베풀지 않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인간의 잡다한 사상이나 시대의 풍조에 섞이지 않은 순수한 복음의 진리가 선포되고 성도들이 그 진리를 온 마음을 다하여 받아들임으로써 그 모임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우리가 빗나간 삶을 살 때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한 번도 우리를 버려두신 적이 없습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돌이킬 수 있도록 불러주셨고, 그리고 원하는 자에게는 자신에게는 없지만 하나님이 힘을 주셔서 가던 길을 돌이킬 수 있도록 은혜를 예비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중 다수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돌이킴의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자신의 고집대로 계속해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의지하고 우리 주님보다는 자기를 사랑하는 삶을 살기를 고집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여러분들을 끔찍이 사랑해주던가요? 앗수르에 바친 뇌물이 무색할 정도로 결국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짓밟아 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그 순간,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배신자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다시 세상을 사랑할 때에 그 사실을 잊었을지 모르지만, 세상은 가슴에 깊이깊이 여러분들의 이름을 아로 새겼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에 빠질 때까지만 여러분들을 사랑하지만, 여러분들이 주님을 의지하던 신앙을 버렸다고 치는 그 순간, 세상도 여러분들을 간통한 사람처럼 짓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올 한 해 말씀으로 돌이켜 이렇게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V. 다시 사랑하심
이렇게 하나님께로 말씀으로 돌이키게 되면 하나님은 그렇게 엎드러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사랑해 주시겠노라고 약속하십니다.
A. 고치심
두 가지 방식으로 이들을 사랑해 주시는데 첫째는, 고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이 패역은 사람의 마음 속에 악하게 굽은 습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해가 바뀌고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담배를 끊고 싶다.’ 그런데 경험해 본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담배를 끊는 사람은 살인도 할 사람이다.’ 그렇게 얘기를 해요. 그렇게 힘들다는 것이죠. 제가 직장 다닐 때 담배를 끊겠다는 두 사람이 제 앞에 라이타와 담배를 갖다 줬어요. 피다가 걸리면 오천원씩 벌금을 물기로 했는데, 며칠 뒤에 옥상에서 담배를 물고 굴뚝 뒤에서 만났어요. 그렇게 힘든 것이에요. 인간의 기호품 하나를 끊어버리는 것도 그렇게 힘이 드는데, 하물며 자기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며 살아가던 완고한 자신의 악한 습성을 뼛속 깊이 배어버린 그 습성을 제해버린다고 하는 것은 폭포수를 폭포 위로 거꾸로 쳐서 올리는 것만큼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고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철학자들도 본성은 그 사람의 운명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꾸십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불같은 성격의 모세를 하나님이 은혜로 고치시니까 비난 받을 때에 그 온유함이 지면의 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표독스럽고 오만으로 가득차고 자기 의에 뽐내던 바울을 하나님이 은혜로 바꾸어 놓으시니까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자기를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는 겸손한 인간으로 고쳐놓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에게는 벼락을 내리게 해달라고 간구함으로 우뢰의 아들이라고 불리우던 제자들도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나니까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포기하고 무릎을 꿇는 그 지점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일을 시작하는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놀랍게 고침을 받고도, ‘나의 나된 것은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주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죠. 우리 안에는 우리도 잘 아는, 혹은 우리는 잘 모르는 그런 패역들이 있어서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그것들로 우리의 삶에 궤적을 그리며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산 한 해였고, 멀리 보면 일평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는 우리를 놀랍게 바꾸어 놓는 큰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바꾸시는, 고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어찌할 수 없는 여러분의 패역을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 받아 주 앞에 다시 생명의 삶을 사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B. 사랑함
주님이 또 한가지 마지막으로 베풀어주시는 것은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저희를 즐거이 사랑하리라’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한결같지만, 그 한결같은 사랑이 시기에 따라서 두 종류로 나뉘어져요. 우리가 느낄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시기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사랑으로 구별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주님의 입의 혀같이 말을 잘 들을 때에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것은 우리가 회개하고 순종할 때에 그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셨다는 사실에 감동한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녹인 것은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구원했네.” (찬양) 내가 그 사랑을 모를 때에도 나를 많이 사랑하셨다는 사실, 뼈저리게 느끼게 되면서 우리는 나의 사랑과는 비교되지 않는 하나님의 그 크고 위대한 사랑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 사랑에 우리의 인생을 맡기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또 한가지 방식의 사랑이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있지 않을 때에는 우리의 삶을 개선할 수가 없어요. 여기서 개선한다고 하는 것은 그냥 일반적인 개선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의지하고 우리 주님이 아닌 나를 사랑하던 이 잘못된 삶을 고칠 수가 없다 그 뜻이에요. 왜냐하면 이것은 돈이나 인간의 결심이나 환경으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죠. 여러분 주위에서도 보면 아주 짜증날 정도로 인색한 사람들이 있죠. 짠돌이라 그러죠. 열 댓 번 밥을 얻어먹고도 자기는 밥을 한 번도 안 사는 사람. 얻어먹는 곳은 열심히 따라가지만, 돈 내야 되는 곳은 기가 막히게 빠지는 사람, 있잖아요. 이런 사람도 세월이 흘러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조금 바뀌더라구요. 많이는 안 바뀌고 조금 바뀌더라구요. 그래서 우리나라 유명한 정치인 한 사람을 기자가 인터뷰했어요. “당신 우리나라에서 재벌인데, 그렇게 밥값을 안낸다면서요?” 신문에 크게 났어요. 그 분 하는 말이 재밌어요. “요즘은 조금 냅니다.” 조금씩은 바뀌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사랑하던 사람, 자기를 숭배하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바뀌지 않습니다. 양상은 달라지지만 그 근본적인 정신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거꾸러지기 전까지는 바뀌지 않아요. 하나님이 그것을 고쳐주시는 거에요. 무엇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고쳐주시는 거에요. 이렇게 우리가 고쳐질 때 비로소 우리가 예전에 고쳐지지 않을 때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에요. 아멘.
두 번째는 하나님이 다시 사랑해주신다는 것이에요.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아까 말씀 드린바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즐거워하신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에요. 그런 사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이 세상의 것들은 모두 흘러가는 것들이고 모두 변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신뢰하고 자랑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제가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에 충격을 받은 얘기를 하나 할게요. 나는 나를 볼 때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은데, 교역자들하고 겨울 수련회를 설악산 쪽으로 갔어요. 제가 한 시간 먼저 도착을 해서 시간이 있어서 목욕탕에 들어가게 됐어요. 세수도 안하고 새벽에 부스스 일어나 누런 잠바떼기 하나 걸치고 갔으니 그 몰골이 좀 그랬겠죠. 목욕탕을 들어가면서 “표 하나 줘요, 아가씨.” 그러니까 나를 이렇게 위 아래로 쳐다보더니, “지역주민이세요?” 그래요. “나 지역주민 아니고 서울에서 왔어요.” 그러니까 “지역주민이면 이천원씩 할인되는데...” 그래요. “나 지역주민 아니니까 그냥 주세요.” 그러니까 “경로우대도 있는데...” 그래요. 그래서 옆을 이렇게 보니까, ‘경로우대 이천원 할인 65세부터’ 아니, 할인 받기 싫다는데... 한 스물 한 둘 된 어린 처녀가 그 새벽에 그런 망발을 해요. 그래서 “경로우대도 있는데, 해당 안되세요?” 그래요. 그래서 “됐거든요, 아줌마!” 그럴려다가, 똑같은 사람되는 것 같아서 “됐어요, 아가씨.” 그러고 거울 앞에 이렇게 섰어요. ‘아, 내가 이제 경로 대상자구나.’ 그래서 요새 집사람이 뭐라 그러면, “나 지역주민이야.” 애들이 뭐라 그러면, “경로대상자인데 뭘...” 참, 세월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많이 사랑하지만, 우리 자신은 우리에게 영원히 사랑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밝은 진리의 빛 아래서만 자신을 공정히 사랑할 수 있다. 진리의 빛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 중 육체만을 부당하게 사랑하게 되는데, 시간은 우리가 사랑하는 우리 자신을 앗아가버린다.‘ 가슴이 떨릴 정도의 명언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렇게 보면서 ’아, 그렇구나, 이렇게 결국은 우리의 육체는 쇠잔해져 가고, 우리가 사랑하는 우리 자신도 끝까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구나. 이렇게 육체는 쇠잔해져가고 겉사람이 후패해져갈 때, 우리의 속사람이 새로워짐으로 우리의 육신의 껍질은 썩어가는 한 알의 밀알이 되고, 거기에서 우리의 영혼이 많은 아름다운 열매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손상되지 않는 신앙의 인격으로 나타난다면, 또한 우리의 육신이 쇠하는 것도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겠는가‘ 그 철없는 여자아이가 나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지만 기분은 그렇게 좋지가 않았어요.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 더 귀하다.” (찬양)
V. 결론 :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우리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행복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계셔서 세월이 흘러가고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소멸되지 않는 진정한 행복을 붙들고 사는 것, 그래서 우리가 행복한 것이 주님의 마음에도 기쁨이 되고 주님이 행복해 하시는 것이 우리의 삶의 이유가 되는 그런 삶이 아닐까요? 그래서 잠시 머무는 세월동안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연장 시켜주시는 동안 주님이 나를 지으신 목적을 따라 살고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주님이 보시기에 더 아름다운 세계가 되도록 끊임없이 주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통로로 삼아서, 위로는 주님 때문에 기뻐하고 우리를 통해 주님 때문에 행복해 하는 모든 사람을 인하여 기뻐하면서 사는 그 삶은 사라져가도 영원히 있는 삶이고 소멸하여도 더 큰 완성으로 가는 삶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을 다시 사랑하시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돌이키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당신께 돌아올 때 갈 길도 보여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말씀으로 돌이켜 다시 사랑하시는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시는 여러분이 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