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고치심(1)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시 107:20~2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시편 107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이후에 지은 시입니다. 누가 지었는지 우리가 읽은 이 시편 107편에는 표제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용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시고 약함과 실패, 혹은 불순종 속에서 방탕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키신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의 행동을 하나님의 인자, 곧 헤세드와 연결시킴으로써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은총의 탁월함에 대해서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귀환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시인은 바로 그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그의 행하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인자는 하나님의 성품이고 바로 그 성품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어떤 구원의 행동을 하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II. 인자하심과 행하심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또 그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좀 어려운 말로 하나님의 속성과 그 속성들의 시행 방식에 관한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이고 그런 성품을 가지고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행동하셨는지를 아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비결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유지하면서 사는 실제적인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자하신 분이시기에 기적과 같이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남으로써 해방을 맞이했던 것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여전히 바벨론의 통치 아래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민족의 통치 아래에 있으면서도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사건이니 꿈을 꾸는 것 같은 기적적인 역사였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큰 섭리가 있었습니다. 전체적인 구원사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것은 귀환하기 전 약 7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70년을 20세를 한 대로 보면 이미 네 대에 접어든 시기였고, 25세로 보더라도 3대에 접어드는 기간이었습니다. 이미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대부분은 예루살렘의 기억을 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또 후일 그 예루살렘에 성전까지 지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꿈꾸는 것 같다고 노래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깊고 심오한 인상을 남겼는지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노래할 때마다 출애굽 사건에 버금가는 사건으로 바로 이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귀환을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행하실 때에 헤세드가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인자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당시에 이해하던 이 헤세드의 개념, 그것이 주는 인상은 오늘 신약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라는 말에서 받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만은 못했겠지만 그러나 그와 유사한 느낌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받았고, 이 헤세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특별히 주어진다는 생각을 했을 때에 선민사상이 나왔고 이 헤세드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것처럼 자기의 백성들에게 공평을 베풀어야 된다는 개념에서 정의 혹은 공의, 히브리말로 ‘미쉬파트’의 개념이 나왔고, 또 언약 백성으로서 이러한 하나님의 헤세드를 받으며 사는 인생의 기쁨을 이야기했을 때 거기서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독특한 행복의 개념이 나왔던 것입니다. 심지어 성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바로 이 헤세드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는 점에서 ‘하씨드’라는 명칭이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헤세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굳게 붙들고 살았던 하나님의 최고의 성품이었습니다. 마치 오늘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그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이해하게 되듯이 또한 구약의 성도들은 이 헤세드를 붙들고 이 모든 세계와 하나님과 인간, 이스라엘, 그리스도의 교회까지 바라보면서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신 데는 구속사적으로 큰 의가 있습니다. 돌아가서 성전을 새로 수축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랑으로 불붙게 만드셨고, 이제 이렇게 이스라엘의 내적인 신앙의 부흥들이 일어나게 함으로써 이제 육적인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이제 신약의 교회가 세워질 때에 그 영적이고 정신적인 뿌리를 튼튼히 형성하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이 헤세드는 언약 관계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입니다. 하나님이 악인이나 선인이나 모든 피조물들을 너그럽게 대하시지만 그러나 특별히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을 베푸시는데 이것이 바로 헤세드의 사랑이고 오늘날 우리말로 말하자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헤세드, 이것은 자기만족을 위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인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는 그 헤세드를 받은 사람으로서 그 인자하심을 따라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의 신적인 계획이 있었습니다. 십자가 사랑은 우리에게 감격적이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지만 그 십자가의 의미를 안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런 십자가의 사랑을 왜 나같이 더러운 죄인에게 베풀어 주시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실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랑이 최종적으로 우리 안에서 소비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 사랑을 받아서 누릴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을 누리면서 살기 때문에 거기로부터 생명과 은혜를 충만히 받아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서 살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남에게 베풀지 않는 그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인생에 있어서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만나며 낙심할 때마다 먼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대상이라고 하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껏 살아온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생각하고 또, 걸어온 삶의 발자취마다 감사의 조건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국가적으로는 재난의 시리즈로 이어진 그런 힘든 한해였고, 또 우리 자신들에게도 돌아보면 정말 어느 해보다도 크고 작은 일들이 많이 발생한 한해였던 것 같습니다. 어제도 산책을 하면서 지나온 한해를 돌아보니 정말 많은 일들이 제 개인적으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길을 걸어오면서 힘들고 어려운 때도 있었지만 돌아보면 그 힘들고 어려운 시기들마다 환경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고통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고통은 눈에 보이는 것이었고 위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기는 했지만 언제나 이 세상 끈끈이에서 떨어져 나와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마다 하나님은 언제나 깊고 은밀한 방식으로 시련이 있는 곳에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고통이 있는 곳에 피할 수 있는 길을, 피할 수 없는 괴로움이라면 그것을 견디고 이길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돌아보면 하나님 앞에 불평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감사의 조건들로 가득 찬 한 해였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절대적인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 해석하고 또 어떻게 그것을 맞이하며 사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에게는 자살의 원인이 되는 고통스러운 시련이, 또 한 사람에게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하는 제목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 속에서 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평탄한 길을 하나님이 주셨을 때에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지난 한해 살아온 날들을 고요히 생각해 보십시오. 힘들고 어려웠으니까 이제는 확 떼어버려야 하는 한 해라고 생각하지 말고 바로 그 한 해 동안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의 굴곡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얼마나 크고 또 그 속에서 우리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주님에 관한 지식에서 자라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의 가장 큰 본문은 이렇게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주님의 관계 속에서 해석하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나님의 어떠한 성품을 보여주셔서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교훈을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지난 한 해 동안에 겪어온 모든 길들이 여러분을 지혜롭게 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주님이 베푸신 인자를 회고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인자를 보이시는 방법
A. 말씀을 보내심
하나님은 당신의 인자하심을 세 가지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이 당신의 인자를 보이시는 방법은 말씀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마치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을 하인처럼 부리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마치 살아있는 인격체 것처럼 사람들 속에 들어가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주고, 또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교통의 다리를 만들어 주는 그런 말씀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시는 당신의 인자하심을 하나님의 말씀을 베푸심으로 드러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종 노래했습니다. “자,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자. 우리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노래했을 때 그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가장 탁월한 이스라엘 백성의 특권은 바로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는 민족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글속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예루살렘에서 나오고 그 흘러나오는 율법으로 모든 나라의 백성들이 영혼의 유익을 누리게 될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말씀은 이루어져서 이스라엘을 통해서는 율법이 나왔지만 그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불변하는 복음의 진리가 흘러나옴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먹고 죽은 자에서 산 자로, 버려진 자에서 선택된 자로서의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인자한 성품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실 때에 가장 우선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고쳐 하나님 앞에서 코람데오(coram Deo)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이 세상에서 물질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 탁월한 재능을 부여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찬양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성 속에서 그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에 의해서 주님의 자비하심과 그 은총은 높이 들려 올려지는 찬송 제목이 됩니다.
성경의 빛을 받기만 한다면 우리의 신앙의 경험은 성경 다음으로 우리에게 매우 유용한 교재가 됩니다. 그러면 한번 우리의 신앙생활의 과거를 돌아보십시오. 우리 모두에게는 불같이 순수하고 뜨겁게 주님을 사랑했던 날도 있고, 그 사랑 가운데 멀어져 주님을 멀리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방황하던 어두운 날도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매우 불행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사랑의 자원이 끊어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는커녕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가는 것 자체가 너무너무 힘겨웠습니다.
제 나이 15살이 되던 어느 해였습니다. 겨울 2월로 기억을 합니다. 길을 가던 한 소년이 논둑에 엎드려서 한없이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 15살이 되고 약 2개월 정도 지난 때의 일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 어린 아이로 하여금 그 논둑에 엎드려 장시간 동안 오열하며 통곡하고 울게 하였을까요? 가난함이나 육신의 불편함이나 내가 원하는 어떤 것들을 손에 넣지 못한 이 세상의 욕심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아이가 차가운 논둑에 엎드려서 통곡하며 울며 검불을 뜯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제 인생에 있어서 첫 번째 자각이었습니다. 그때에 맑은 하늘 아래 시간은 11시쯤 되었을 때 통곡하고 울었는데 그 길은 제가 교회 가던 길이었습니다. 교회에 가던 길에 논둑에 엎드려져서 한없이 통곡하고 그날 교회에 안 갔습니다. 그 통곡했던 것은 무엇이냐 하면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이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이 삶의 끊임없는 비참과 슬픔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어린 나이였는데도 부자가 된다면,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를 간다면, 예쁜 여학생을 만난다면 그 슬픔이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메어집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청소년 사역자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왜 교회는 그 15살 먹은 아이가 교회 오다가 논둑에 엎어져 통곡하며 울었던 근원을 알 수 없는 그 무서운 의문에 대한 답을 하나님이 교회보고 하라고 주셨는데 왜 교회는 그 아이에게 그 지식을 전달해줄 수 없었을까요? 그리고 저는 6년 동안 교회를 나가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푸르른 하늘 아래 논둑에 엎드려져 ‘나는 어디로부터 왔고 그리고 이 무서운 현실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것에 대해서 티끌만큼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너무 쉬운 지식이었는데 나라는 한 인간의 영혼은 교회에서 사랑 받은 기억도 없고, 누군가가 다가와서 진리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싶어 하는 교회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그렇게 고통 하는 사람에게 답을 주고 싶었습니다.
나는 교회를 꿈꿀 때에 이렇게 큰 교회를 필요하다고 꿈꾸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안 그럴지 모르지만 한 번도 교회가 이렇게 커서 다행이라든지 이 큰 교회가 주는 유익을 누려야 되겠다든지 하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 5년 전에 당회에서 부목사들을 개척해서 내보내지 말고 나를 좀 내보내달라고 했더니 장로님들이 한 칼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짐이 아닙니다. 교회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그렇게 15살 먹은 어린 아이가 논둑에 엎드려져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채워질 수 없는 어떤 고통 때문에 슬피 울 때 두 가지, 그 영혼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하나하나 그에게 가르쳐 주어 진정한 영혼의 변화에 이르게 하는 것,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래서 토요일이면 교육관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면 선생 같기도 하고 학생 같이 생긴 사람이 꾸벅꾸벅 밝게 웃으며 여학생들이 인사를 합니다. 선생님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학생이랍니다. “토요일 날 어떻게 교회에 왔니?” 그러니까 “목사님 우리 기도회해요.” 나는 정말 그 아이들을 보면서 눈물이 납니다. 바로 내가 너보다 어렸을 때에 그렇게 울고도 6년이 넘도록 죽음을 넘나드는 고통 속에서 답을 못 찾았는데 너희들은 이렇게 온화한 얼굴로 기도회를 하러 가니 아주 진심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데 잘 쓰는 말일수록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교회 건축을 통해서 영광을 돌린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영광만은 못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이해되는 인간의 지성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한 번 더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이해되는 인간의 지성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들으라. 기억하라. 잊지 말라. 가슴에 새겨 두라.”고 하는 명령어가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깨닫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각 사람에게 보내시는 가장 좋은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큰 영광은 바로 이 말씀을 흘려보내는 통로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섬겨본 사람들은 그 속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쓰시는 기쁨을 알았던 사람들은 마약과 같아서 그 영혼을 섬기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마치 그만 두면 커다란 벌을 받을 것 같은 다급한 강제의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 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특별한 취미가 없습니다. 회심하기 전에는 팝송을 듣거나 기타를 치거나 축구를 하거나 야구를 하거나 이런 것들이 취미였는데 한때는 그림 그리는 것도 취미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없습니다. 좀 한번 가져보려고 애를 써도 마음이 잘 끌리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취미가 뭐냐 그래서 독서요 그러면 에이 그럽니다. 그거 말고 뭐 다른 것을 기대하는데 없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그래도 한번 찾아보라고 하면 저는 대화 같습니다. 그래서 외국에나 한국에나 어디를 가다가 아름다운 장소를 만나면 하고 싶은 것이 딱 두 개입니다. 거기 조용히 방해 받지 않고 앉아서 책 한 권을 쓰고 나오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소원이 있으면 정말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싶은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장소에 모여서 하나님에 관해서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거기에서 느끼는 그 즐거움과 기쁨은 이황 퇴계의 말에 의하면 돼지고기의 맛있는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그 맛이 그 안에 있습니다.
여러해 전 미국을 방문했을 때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철학자 한 분이 사람을 통해서 목사님이 오시면 좀 뵙고 싶답니다. 그 유명한 분이 왜 나 같은 시골 변두리의 목사를 만나려고 하느냐 그래서 만났습니다. 그날 우리는 제일 먼저 산책을 하면서 그 다음날 만났는데 산책을 하면서 우리들이 아주 장시간 동안 산책을 하면서 역사, 경제, 정치, 문화, 종교, 철학, 심지어 자연학에 대해서까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날 하루에 다섯 시간을 대화하고 헤어질 때가 됐는데 그 분이 “저녁 잡수신 다음에 목사님 뭐하세요? 저는 숙소에서 잡니다.” “그러면 또 만납시다.” 그래서 다시 네 시간해서 그날 하루 동안 아홉 시간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리고는 대게 쓸모없는 일에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나오면 가슴이 공허하고 허무감이 밀려오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게 인간의 행복입니다.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냥 우리 귀에다 대고 확성기에서 들리는 음성처럼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고 해서 그것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이 우리가 단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으려고 하고, 그 안에서 이해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말씀을 통해 전달되어 원래 그 말씀을 주셨을 때에 주님의 심정까지 우리에게 전수됐을 때에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해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이해되실 때에 그것이 믿음으로든지 혹은 지식으로든지 간에 어쨌든 하나님이 이해되는 우리의 지성 안에서 하나님은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요즘에 국제시장이 그렇게 영화가 유래 없는 인파를 모은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우리 아들도 가서 보고 한 시간 내내 펑펑 울다가 왔답니다. 사실은 나는 흥남부두에서 철수한 적도 없고, 6.25를 겪은 적도 없는데 어쨌든 부모님 세대의 일들이 생각이 나면서 그렇게 눈물이 났다고 하는데 저도 보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바로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바로 그 과정들을 모두 겪으셨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왜 그렇게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키냐 하면 이해를 하기 때문입니다. 효도는 따로 가리킬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를 이해시키면 그래서 진짜 나쁜 새끼도 그 새끼가 시집 장가가서 자기보다 더 못된 새끼 만나서 새끼 때문에 되게 고생을 한번 해보면 그 새끼도 효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공감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우격다짐하시는 조폭처럼 숭상을 받고 싶어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룩하고 인격적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이 이해될 때에 그때 하나님은 그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 한해에 시련과 역경이 있었지만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순간순간 이 어두운 지성에 하나님을 이해시켜 주셔서 그 지식의 힘으로 그 은혜의 힘으로 시련을 이기고 고난을 이기며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올해도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셔서 살리시는 한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백성을 고치심
두 번째는 백성을 고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고치다’라는 단어가 히브리말로 ‘라파’인데 의사가 환자들을 치료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여호와 라파’라고 하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주님의 성함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질병 상태에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에 그들이 어떻게 신속히 부패했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그들은 망가지고 질병 상태에 있는 인간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의사처럼 그들을 치료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치는 것은 다른 사람을 고침으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영혼을 고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친구이자 제자인 알리피우스, 네브리디우스라는 두 사람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지를 한 사람 만났습니다. 그런데 거지가 배가 부르고 뭐 좋은 일이 있는지 그 남루한 거지의 옷을 입고도 실실거리며 싱글벙글거리면서 아주 만족한 얼굴로 지나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어거스틴은 질문했습니다. “자, 우리는 철학을 하는 사람들인데 이렇게 괴롭고 우울하고 슬픈 삶을 살고 있고 저 거지는 아무것도 모르는데도 저렇게 만족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저렇게 행복한 거지가 되고 싶은가? 우울하고 슬픈 철학자가 되고 싶은가?”라고 했을 때 모두 대답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렇죠. 행복한 거지가 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차라리 불행한 철학자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말하기를 만족스러운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그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실상은 그 말이 어찌 진실일 수 있겠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정말 불행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 불행한 철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불행하게 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돼지는 되기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정말 그가 원하는 것은 행복한 거지보다는 행복한 철학자, 진리를 발견한 지혜자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발견을 못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하나 깨달을 수 있는 사실 하나가 인간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주관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주관적인 행복과 객관적인 선의 상태가 조화를 이룰 때에 그것을 진정으로 행복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매스컴에 의해서 그리고 사상들에 의해서 세뇌를 당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너 좋은 대로 사는 것이 행복이다. 네가 만족하면 그게 행복이다.”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오늘 이 일화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절대 이 행복 자체가 인간 자신에게서 개발된 것이 아니라 행복의 근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주관적으로 만족을 느끼는 측면도 물론 있어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도하신 선한 상태를 아울러 가지고 있어야지만 이것이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내가 만족스럽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식의 행복관은 그리스도인들이 유지하면서 살아야 할 행복관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런데 우리들이 정말 행복이 아닌데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고 진정으로 아름답지 않은 곳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망가진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보내셔서 그것을 지적으로 엔조이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 삼아서 우리를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탐이 없는 행복을 누리며 주님 안에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바로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자를 보이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논리를 통해서 볼 때에 결국 인생의 진정한 행복, 그리고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 앞에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주님이 말씀을 보내어 주시고 그 말씀으로 자신의 영혼이 치료되고 고쳐져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이제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저의 지인들 중에는 중병을 앓다가 이 세상을 뒤로 하고 하직한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된 고백이 이것이었습니다. 건강할 수만 있다면 내가 정말 지게를 지고 먹고 살아도 아니 단 3일을 살아도 행복하겠다고 말입니다. 건강하지 않은 사람에게 예쁜 옷이,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 쓸모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생각해야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영혼을 고치셔서 그래서 새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고치는 그 과정은 모두 고통스럽습니다. 제가 5월 달에 수술했을 때에 비강을 드릴로 뚫고 뼈를 깎아냈는데 먼저 수술을 받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여튼 그게 별로 그렇게 어려운 수술은 아닌데 하여튼 더럽게 힘들고 아프답니다. 뭐든지 안 아픈 게 있겠습니까? 며칠 동안 정말 죽을 맛이었습니다. 요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호흡이 자유롭습니다. 항상 공기가 모자라는 느낌이었습니다. 호흡이 자유롭습니다. 치료는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즐겁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이 보내신 말씀을 통해서 지성 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함으로써 그 주님의 심정이 전달됨으로써 여러분의 영혼이 고쳐질 수 있다면 그게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 열일곱 살에 논둑에 엎드려 통곡하며 울었던 그 아이에게 교회는 단 한 번도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내민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교회에서 나를 가엾은 영혼으로 진지하게 대해준 사람을 거의 못 만났습니다. 딱 한분 그의 가까운 선생님 딱 한분을 만났습니다. 오른쪽 손에 손가락 하나 없는 집사님이었는데 그 이외에는 아무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에서 왜 이렇게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가르친 결과들을 교재로 만들고 여러분에게 어떻게 하든지 접근해서 그것을 이용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는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그것만이 하나님이 여러분의 지성 속에서 이해되는 길이고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여러분이 궁극적인 인생의 불행의 원인을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도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교회에서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괴로워하면서도 그 길을 알 수 없었고, 주님께 돌아올 때까지 피투성이가 되도록 그 어린 나이에 진창을 구르면서 피투성이가 되고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하루라도 자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말씀이 없었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어디 가서 무슨 말씀을 받아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있습니다. 말씀도 있고 가르쳐 주는 사람도 있고 ‘넌 뭘 원하냐?’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요. 고쳐지고 싶어요.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어요.’ ‘그렇게 되라.’ ‘왜 그러냐?’ 하나님의 말씀도 있지 않느냐 손만 뻗으면 책, 손만 뻗으면 교재, 손만 뻗으면 음성 자료, 손만 뻗으면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역장들과 다 있습니다. 왜 그러면 그걸 이용해서 하면 되지 않느냐 그랬더니 하는 말이 의지가 약해서. 하나님은 정말 그렇게 당신의 백성들을 고치심으로써 당신의 헤세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C. 위경에서 건지심
마지막으로 위경에서 건지십니다. “위험한 지경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위험한 지경이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한 단어로 되어 있는데 ‘쉐히토트’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웅덩이, 구덩이, 무덤, 파괴 이런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시편 40편 2절에 보면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나를 끌어 올리시고” 또 시편 88편 8절에서는 “깊은 구덩이 어둡고 음침한 곳이 있다”고 노래합니다. 결국 이것은 도움을 받을 길이 없는 역경에서 우리들을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했고, 그 불순종은 고난을 불러오고 고난 속에서 그들은 음식을 전폐할 정도로 낙심했고, 그 속에서 몸은 질병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그들의 몸을 고치신 것처럼 영적인 회복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포로로부터 귀환하게 하시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시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베푸신 이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선포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사람들은 변하나 하나님은 언제나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자녀들이 위험한 지경에 오래도록 방치되어 망가지지 않도록 수시로 그 깊은 웅덩이에서 그들을 건져내시듯이 위험한 지경에서 구원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불순종했으나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신 분이였고,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을 생긴 대로 살게 내버려 두지 않고 고치시려는 하나님이 때로는 잔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렇게 고치시려는 이유는 바로 여러분을 고쳐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게 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올 한 해 우리들이 어떤 일을 만날는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세상의 환란과 시련이 흰 이빨을 드러내고 파도처럼, 해일처럼 밀려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우리를 붙들 것이며 그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우리에게 말씀을 보내어 우리를 고쳐 끊임없이 위기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 한 가지를 굳게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뜻 깊은 한 해를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시작하고 그 말씀의 힘으로 이기는 한해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