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2012년 시리즈
영원한 사랑
김남준
열린교회
목 차
1.은혜와 사랑 (고전 12:31-13:1) 2008.6.15 주일오전 1
2.사랑이 없으면 (고전 13:1-3) 2008.6.22 주일오전 17
3.사랑 없는 헌신 (고전 13:3) 2008.6.29 주일오전 28
4.사랑은 오래참고 1 (고전 13:4) 2008.7.6 주일오전 35
5.사랑은 오래참고 2 (고전 13:4) 2008.7.13 주일오전 44
6.사랑의 참음과 본성의 인내 (고전 13:4) 2008.7.20 주일오전 54
7.사랑은 온유하며 (고전 13:4) 2008.7.27 주일오전 62
8.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고전 13:4) 2008.8.3 주일오전 71
9.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고전 13:4) 2008.8.10 주일오전 79
10.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4) 2008.8.17 주일오전 87
11.무례히 행하지 아니하고 (고전 13:5) 2008.8.24 주일오전 100
12.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고전 13:5) 2008.9.21 주일오전 110
13.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고전 13:5) 2008.9.28 주일오전 120
14.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13:5) 2009.2.15 주일오전 130
15.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고전 13:6) 2009.2.22 주일오전 143
16.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 13:6) 2009.3.1 주일오전 156
17.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며 (고전 13:7) 2009.3.8 주일오전 169
18.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고전 13:7) 2009.3.15 주일오전 183
19.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고전 13:7) 2009.3.22 주일오전 195
20.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 (고전 13:7) 2009.4.19 주일오전 204
21. 신령한 은사들의 한계(고전13:8) 2012.2.26 주일오전 219
22. 떨어지지 않는 사랑(고전13:8) 2012.3.11 주일오전 228
23. 온전한 것이 올 때에(고전13:9-10) 2012.3.18 주일오전 237
24. 온전히 알게 되는 날에(고전13:9-10) 2012.3.25 주일오전 248
25.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릴 때(고전13:11) 2012.4.15 주일오전 258
26.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릴 때 2(고전13:11) 2012.6.10 주일오전 271
27. 지금은 희미하게 알지만(고전13:12) 2012.6.17 주일오전 279
28.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고전13:12) 2012.6.24 주일오전 288
29. 믿음 소망 사랑(고전13:13) 2012.7.1 주일오전 298
30. 사랑은 영원히(고전13:13) 2012.7.8 주일오전 309
§ 차례
1. 은혜와 사랑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2:31-13:1)
I. 본문 해설
II. 그리스도의 몸
A. 교회의 유기적 성격
1. 유기적 생명
2. 유기적 통치
3. 유기적 봉사
B. 은사의 유용성과 한계
C. 사랑은 은사인가?
III. 은혜와 사랑
A. 은혜의 결과, 사랑
B. 사랑과 질서
1. 목적이 있는 사랑
2. 질서를 버리고 잡는 사랑
C. 은혜와 사랑의 관계
1. 애성을 가진 인간
2. 타락한 인간의 애성
3. 인간의 문제는 사랑의 문제
4. "Agape"와 "Caritas"
5. 구원받은 인간의 애성
IV. 결론과 적용
2. 사랑이 없으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I. 본문 해설
II. 모든 선의 근원, 사랑
A. 사랑 없는 은사
B. 사랑 없는 헌신
III. 사랑이란 무엇인가?
A. 사랑의 정의
B. 하나님의 인간사랑
C. 인간의 하나님 사랑
IV. 그리스도 없인 사랑을 모름
Ⅴ. 결론과 적용
3. 사랑 없는 헌신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I. 신앙의 증거들에 대한 오해
II. 사랑 없는 헌신
III. 죄인들이 만나는 그리스도
IV.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사랑에 대한 헌신
Ⅴ. 결론과 적용
4. 사랑은 오래 참고1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I. 바울의 사랑 경험
II. “오래 참음”이란
III. 참음이 필요한 이유
A. 사랑의 정의
B. 예수 사랑은 새 질서임
C. 고난의 사랑과 구원의 지혜
IV. 결론과 적용
5. 사랑은 오래 참고2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I. 사랑에 대한 두 이해
II. 그리스도 사랑의 역동성
A. 새 생명의 원리와 성령
B. 십자가 사랑의 현재화
C. 사랑 - 오래 참음의 동기와 목표
III. 오래 참게 하는 사랑
A. 은혜의 지속적 시여
B. 하나님 사랑에 대한 경험의 핵심
IV. 결론과 적용
6. 사랑의 참음과 본성의 인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I. 사랑의 참음
A. 참음의 실천 : 그리스도를 알아감
B. 자기 의존을 버림
II. 본성의 인내
A. 더 큰 자기 목표를 위한 인내
B. 인내를 통한 성품의 굽음
III. 그리스도에게 배움
IV. 결론과 적용
7.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I. 온유의 말 뜻
A. ‘크레스튜오마이’(χρηστεύομαι)
B. 오래 참음과 온유함
II. 온유함의 근원 : 사랑
A. 하나님과의 평화
B. 자기 사랑을 버림에서 오는 친절
III. 온유함의 모본, 그리스도
A. 지상 생애에서 - 인격과 삶
B. 천상통치에서 - 긍휼과 자비
IV. 결론 - 그 온유를 본받아
8.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I. 시기의 말 뜻
A. ‘젤로이’(ζηλοῖ)
B. 사랑과 시기치 아니함
II. 참된 사랑이 시기치 아니하는 이유
A. 하나님으로 인한 만족
B. 이웃의 행복에 이바지 하고자 하는 성향
III. 그리스도에게서 배움
9.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I. 자랑의 의미
II. 사랑과 자랑
A. 사랑의 경험
B. 새로운 자랑
III. 자랑과 은혜 경험
A. 사랑 : 끊임없는 은혜 경험
B. 감사 : 십자가의 현재적 경험으로 자기를 앎
10.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I. 문맥 안에서의 ‘교만’
II. 교만의 어의(語意): 퓌지오타이(φυσιουται)
III. 사랑과 ‘교만’
A. 사랑 : 초월적 경험
B. 사랑과 ‘자기 없음’의 경험
1. 용서를 통하여
2. 은혜를 통하여
C. 사랑: 하나님의 뜻을 실행함
Ⅳ. 우주적 흐름으로서의 사랑
Ⅴ. 결론
11.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I. 문맥 안에서의 ‘무례함’
II. ‘무례히’의 어의(語意): 아스케모네이(άσχημονεῖ)
III. 사랑과 질서
A. 아름다움의 본질 : 복수의 어울림
B.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질서
C. 회심 : 신적 질서로 돌아감
Ⅳ. 사랑 : 그 질서를 즐거워 함
Ⅴ. 결론
12.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I. 본문 해설
II. 이 구절의 의미
A. 원어적 의미
B. 참뜻 : 자신을 추구하지 않음
III. 자기사랑
A. 계명에 없는 자기사랑
B. 두 가지 사랑
C. 자기사랑의 정체
IV. 하나님 사랑 안에 있는 인간의 행복
A. 두 왕국과 사랑의 질서
B. 사랑의 중심일 수 없는 인간
C. 자기사랑과 진리의 빛
Ⅴ. 결론
13.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I. 본문해설
II. “성내다”의 말뜻
A. 희랍어: ‘파로크쉬네타이’
B. 단어의 의미
III. “성내지 아니하며”의 참뜻
A. 어떠한 분노도 없다는 뜻이 아님
B. 분노의 이유와 관계있음
C. 분노의 이유는 두 가지로 대별됨
1. 자기사랑
2. 하나님 사랑
IV. “겪음”과 사랑의 진보
A. 진리의 빛으로
B. 은혜의 힘으로
V. 그리스도를 본받아
14.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I. 본문해설
II. 이 구절의 의미
A. 원어적 의미
1. 악한 것 : ‘토 카콘’()
2. 생각지 아니하며 : ‘우 로기제타이’(οὐ )
B. ‘성내지 아니하며’와 관련됨
1. ‘악한 것’을 생각한다는 의미
2. 인간 안에 있는 보복의 심리
III. ‘악’이란 무엇인가?
A. 선(善)과 질서
1. 선(善) 자체이신 하나님
2. 질서와 선하심의 나타남
B. 질서와 사랑
1. 사랑으로 질서를 받아들임
2. 질서를 벗어난 고통에 아파함
a. 자신에 대해 : 회개함
b. 타인에 대해 : 애통함
3. 좋으신 하나님
C. 악(惡)과 그릇된 질서
1.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
2. 그릇된 질서를 받아들임
IV. 악을 이기는 사랑
A.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의미
1. 악을 용납한다는 의미가 아님
2. 의를 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님
3. 자기사랑에서 비롯된 성냄으로 복수하지 않음
4. 죄 자체와 죄인을 구분하는 사랑
B. 타인의 ‘악’에 반응하는 인간
1. 본성과 관련하여
2. 환경과 관련하여
C. 악을 이기는 은혜의 힘
1. 본성과 관련하여
2. 환경과 관련하여
V. 결론 :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15.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6)
I. 본문해설
II. 이 구절의 의미
A. 원어의 뜻
1. ‘불의’ : ‘테 아디키아’(τῇ ἀδικίᾳ)
2. ‘기뻐하다’ : ‘카리에이 에피’(χαίρει ἐπὶ)
B. 참된 의미
III. 불의 : 자기사랑의 열매
A. 자기사랑 : 신적 질서를 거부함
B. 자기사랑의 열매 : 불의한 삶
1. 생활의 표준 : 자기좋음
2. 생활의 동기 : 만족과 사랑
3. 질서 있는 불의와 무질서한 불의
IV. 의(義) : 하나님 사랑의 열매
A. 신자의 사랑의 반응적 성격
B. 하나님 사랑 : 신적 질서를 받아들임
1. 생활의 표준 : 복음 진리
2. 생활의 모본 : 그리스도의 생애
a. 율법의 내용은 때론 불분명하지만
b. 그리스도의 삶은 언제나 분명함
C. 의롭게 살게 하시는 은혜
V. 결론 : 은혜로 살아가는 길
16.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6)
I. 본문해설
II. 이 구절의 의미
A. ‘함께 기뻐하고’의 주체
B. ‘그 진리’ : 테 알레데이아()
III.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이유
A. 하나님과 진리
B. 진리와 사랑의 동일성
영원한 사랑 1 (2008.6.15 주일오전설교)
C.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진리
IV. 진리와 함께 기뻐함 : 적용
A. 다른 기쁨 : 악이 아님
B. 다른 선택 : 불의가 아님
C. 다른 가치 : 이익이 아님
V. 결론
1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I. 본문해설
II. 이 구절의 의미
A. ‘참고’ : ‘스테게이’ () - 덮어주고
B. ‘모든 것’ : 언제나
III.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
A. 덮음의 대상
B. 덮음의 동기
C. 관계의 소중함
IV. 결론 : 허물을 덮는 사랑
18.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I. 본문해설
II. 이 구절의 의미
A. 믿으며 :
B. 모든 것 :
III. 모든 것을 믿는 사랑
A. 믿음과 사랑
B. 사랑의 속성으로서의 믿음
IV. 사랑 : 믿음으로 가는 길
영원한 사랑 2 (2008.6.22 주일오전설교)
19.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I. 본문해설
II. 이 구절의 의미
A. 바라며 :
B. 두 갈래의 해석
1. 내세적 소망
2. 현세적 희망
III. 모든 것을 바라는 사랑
A. 믿음과 희망
B. 사랑의 속성으로서의 희망
IV. 사랑 : 희망으로 가는 길
영원한 사랑 3 (2008.6.29 주일오전설교)
20.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I. 본문해설
II. 이 구절의 의미
A. ‘견디느니라’: ύπομένεί
B. 용기 있는 견딤
1. 궁극적인 목표
2. 종말론적 기대
III. 견딤의 대상
A. 사람들의 악
1. 이웃의 악
2. 자신의 악
B. 주어진 십자가
IV. 사랑이 견디게 하는 방식
A. 은혜의 공급: 사랑
1. 내 안에 없는 자원
영원한 사랑 4 (2008.7.6 주일오전설교)
2. 하나님 안에 있는 자원
B. 십자가의 현재적 경험
1. 예수 죽음의 실재화
2. 예수 부활의 실재화
V. 결론: 사랑 안에서 사랑 받음
21. 신령한 은사들의 한계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I. 본문해설
II. 신령한 은사의 한계
A. 탁월한 은사들
- 예언, 방언, 지식
- “예언들이 있다 해도 폐지될 것이며(katargethesontai) 방언들이
있다 해도 그칠 것이며(pausontai) 지식이 있다 할지라도 폐지
될 것이다(katargethesetai)"
B. 하나님의 뜻을 알게함
- 예언(propheteiai): 신약의 예언
- 방언(glossai): 변화, 계시성x
- 지식(gnosis): '지식의 말씀‘ 8절
영원한 사랑 5 (2008.7.13 주일오전설교)
C. 은사의 한계
- 은사의 일시성
- 은사의 수단성
III. 결론
22. 떨어지지 않는 사랑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I. 본문해설
II. 본문의 정확한 의미
A. 떨어지다: "piptei"
1. 문자적: 떨어지다, 넘어지다, 박살나다, 붕괴되다
2. 상징적: 멸망하다, 없어지다, 실패하다
B. 언제까지나: “oudepote"
- (어떤 경우에도) 결코
C. 사랑은: “heagape"
- (모든 사랑이 아닌) 그 사랑
III. 떨어지지 않는 사랑
A. 떨어지는 은사
- 불완전함과 관련
1. 예언, 방언, 지식: 아는것
2. 아는 것의 한계: 영혼의 어둠, 지성의 눈멂(죄+계시+약함)
영원한 사랑 6 (2008.7.20 주일오전설교)
3. 구원과 완성 사이에서 유용함
B. 떨어지지 않는 사랑
- 완전함과 관련
1. 기원: caritas 사랑은 하나님의 agape로부터 와서 그분께로 돌아
감
2. 대상: 시간속에도 사랑의 대상 있으나 시간을 초월함
3. 영원: 구원의 완성 후에도 유용
IV. 천국 - 사랑의 나라
A. 사랑: 관계의 성향
- 선을 흘려보냄
- 타자의 행복을 위함
- 그 안에서 사랑을 받음
- 사랑하고 받음: apape 안에서
B. 교회: 그 나라의 모형
- 그 사랑의 선취적 모형
- 은혜를 통한 감화
- 사랑을 받고 사랑함
영원한 사랑 7 (2008.7.27 주일오전설교)
- 교회의 아름다움: 관계의 아름다움
- 사랑으로 진리의 가치를 보임
V. 결론: 은혜를 사모하라
23. 온전한 것이 올 때에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9-10)
I. 본문해설
II. 부분적인 은사들
A. 부분적으로: Ἐκ μέρους
- 부분으로부터
- 온전하지 못함
B. ‘아는 것’과 ‘예언하는 것’
1. 지식과 예언의 은사
- 정확하고 신뢰할만함
- 당시로선 꼭 필요했음
영원한 사랑 8 (2008.8.3 주일오전설교)
- 두 은사의 교회적 의존성
2. 부분적인 계시였음
- 탁월한 은사지만 한계 있음
- 지식과 예언 자체가 부분적인 계시에 의존함.
주어진 계시를 모두 알아도, 알게 한 계시를 모두 이해해도
부분적임
III. 온전한 것이 올 때
A. 온전한 것: τὸ τέλειον
- 목표에 도달한, 달성된, 다자란
- 탁월한 은사들의 지향점을 보여줌
- 지도와 목적지의 비유
B. 온전한 것이 올 때
1. 시기에 대한 두 해석
a. 신약계시가 종결될 때
b. 육체가 부활하는 영화의 때
영원한 사랑 9 (2008.8.10 주일오전설교)
2. ‘때’에 대한 올바른 해석
a. 그때: 영화의 때를 가리킴
b. 성경계시의 완성은 그 중요과정
c. 사도시대와 그 후 시대의 차이
- 완전히 무시할 때: 은사주의
- 완전히 단절할 때: 의문에 매임
d. 지식과 예언의 계시성의 변화
- 그때처럼 초월적이고 직접적x
- 복음에 대한 탁월한 통찰과 주어진 성경계시에
대한 해석에 성령의 조명과 은혜의 초월적 신비임
- 새로운 계시가 더해지는 것 아니라 주어진 계시를
깨닫고 통찰하게 하심: 오성과 이성을 도우심
IV. 결론
24. 온전히 알게 되는 날에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9-10)
I. 본문해설
II. 지금과 ‘그때’ 아는 것
A. 지금 아는 것
영원한 사랑 10 (2008.8.17 주일오전설교)
1. 점진적 계시의 과정
2. 구원 완성 이전의 앎
a. 인간의 생래적 한계
- 영혼의 어둠
- 지성의 눈멂
- 죄의 내재함
b. 창조세계와 저주
B. ‘그때’ 아는 것
1. 점진적 계시의 완성을 넘어섬
2. 영화의 날의 앎
a. 새로 도입되는 앎의 방식
- 모형-실체-영광의 완성
- 성경 완성을 기다리는 앎x
- 성경을 통한 간접적인 앎x
- 조명을 통한 앎 아닌 vision
b. 새로운 지식의 내용
-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점증적
- 구속사에 대한 지식: 완전함
- 자연사물과 영적사물에 대해
- 모든 지식의 통합: 모든 지식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음.
그를 통해 삼위를 사랑함
III. 천국, 지식과 사랑의 나라
IV. 결론
25. 어린아이의 일을 버릴 때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I. 본문해설
II.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
A. 두 용어의 의미
1. ‘어린아이’: νήπιος
- νή(부정어)+ πιος(말하는것)
영원한 사랑 11 (2008.8.24 주일오전설교)
2. ‘장성한 자’: ἀνήρ
B. 비유의 의미
1. 생각하는 것: 지식
2. 말하는 것: 예언, 방언
III. 하나님 나라의 성장
A. 하나님 나라 성장의 국면들
- 영역, 통치, 기쁨
- 영광, 사랑, 계시
B. 그 나라: 지식의 확장
1. 계시방식의 변화
- 구약(모형) → 신약(실체)
- 신약(실체) → 완성(영광)
- 계시방식의 변화: 지식의 증대
IV. 하나님 나라와 지식의 증대
A. 성육신~부활까지
- 구약의 새 해석
- 하나님 나라를 보이심
B. 성령강림~영화까지
- 성경계시의 완성까지: 계시성격
- 성경계시의 완성이후: 조명성격
C. 영화시대 이후
- 직접적 전달(비전)
영원한 사랑 12 (2008.9.21 주일오전설교)
- 하나님의 영과 영혼, 영혼과 영혼
- 지식, 예언, 방언: 원시수단이 됨
- 장성한 자와 같은 지식을 가짐
- 지성의 분량 외 장애 없이 확장
- 지식을 통한 사랑의 확장
- 아름다운 그물망: 존재와 아름다움, 영광, 지식의 충만
V. 결론
26. 어린아이의 일을 버릴 때(2)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I. 본문해설
II. 구원의 도상에 있는 성도
A. 순례자의 신학
- 순례자와 지복자
–지식의 크기와 방식
B. ‘어린아이의 일’
- 복수(τὰ τοῦ νηπίου)
- 말함, 깨달음, 생각함
- 지식 획득수단으로서의 은사: 구원의 완성 이전까지만
- 완성의 빛에서 보면 유치한 단계: 사랑이 더욱 절실히 요구됨
영원한 사랑 13 (2008.9.28 주일오전설교)
III. 어린아이의 일을 버릴 때
A. 지식 획득의 방식의 한계를 앎
1. 고린도 교회의 오류
a, 지식 획득 방식의 유치함 모름
b. 영원히 가치 있는 것을 무시함
2. 고린도교회의 유치함
- 지식과 사랑의 결핍
B. 어린아이의 일을 버릴 때
1. 찬란한 영화의 빛 앞에서 생각함
2. 두 가지를 대조함
a. 영화의 날에 사라질 유치한 신적 지식의 획득방식 vs
그 날 갖게 될 직접적이고 영광스러운 방식
3. 사랑은 변함없이 지속됨
IV. 결론
영원한 사랑 14 (2009.2.15 주일오전설교)
27. 지금은 희미하게 알지만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I. 본문해설
- 지금과 그때의 보는 것
II. 지금 보는 것
- δι᾽ ἐσόπτρου ἐν αἰνίγματι
- “불분명함 안에서 거울을 통해”
A. 당시 거울: 석경, 동경
B. 은사의 한계
1. 지식의 은사에 집중함
- 방언, 예언, 지식, 믿음(1-2절)
- “구제와 불사르게 내어줌”은 은사가 아님(3절)
2. 불분명함 안에서 봄
- 방언, 통역, 예언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
(14장)
- 방언은 통역을 필요로 함
- 예언하는 영은 또 다른 영의 제제를 받아야 함(14:32)
- 그러는 가운데 더욱 주님을 의지함
3. 완성된 성경계시 안에서는
- 당시와 비교할 수 없는 분명함
- 성경의 명료성과 충분성
- 그러나 모든 것이 완전히 분명치는 않음
- 그러는 가운데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질서 안에서 사랑을 따라
감
III. 그때 보는 것
- πρόσωπον πρὸς πρόσωπον
영원한 사랑 15 (2009.2.22 주일오전설교)
-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A. 분명함 안에서 봄
- 하나님을 마주 대하여 본다는 의미가 아님
(신적본질은 볼 수 없음)
- 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는 볼 수 있을 것임
(외관적 봄+지상에서 남기신 말씀의 뜻을 온전히 앎)
B. 친밀한 사랑 안에서 봄
- 단지 알기만 하는 지상의 지식 아님
- 보는 것 안에 있는 모든 지식은 사랑의 정동을 동반함
- 이 땅에서도 그 지식의 방식을 부분적으로 경험함
C. 결국 지식과 사랑은 통합을 이룸
- 사랑 없는 지식, 지식 없는 열심은 모두 오류이거나 영적
미성숙
IV. 결론: 겸손함과 사랑
28.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I. 본문해설
- 지금과 그때의 보는 것
II. 지금 보는 것
- γινώσκω ἐκ μέρους
- “한 부분으로부터 알고 있다”
A. 부분적인 앎 ← 명백성과 대조
B. 은사의 한계
1. 부분 안에서 봄
영원한 사랑 16 (2009.3.1 주일오전설교)
- 방언, 통역, 예언이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있음
- 그러나 그것은 해석을 필요로 함
- 한 부분으로써 전체를 읽어야 함
2. 완성된 성경계시 안에서는
- 당시와 비교할 수 없는 통일성
- 성경의 완전성과 대비됨
- 그러나 모든 것이 완전히 알려진 것은 아님
- 아직도 부분적으로 알기에 더욱 주의하고 질서 안에서 사랑을
따라감
III. 그때 아는 것
- ἐπιγνώσομαι καθὼς καὶ ἐπεγνώσθην
- “온전히 알 것이다 내가 온전히 알려질 것처럼”
A. “온전히 알 것이다”
- 에피스테몌와 독사의 지식
- 명료성 아닌 전체성의 문제임
–하나님의 성품과 의지에 관한 지식: 믿음으로 순종하던 것이
이해됨.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 더 느낌
B. “내가 알려진 것처럼”
- 하나님께.. 나 자신에게.. 성도들에게..
C. 영원히 계속될 사랑
- 결국 완전한 지식 안에서 은사의 필요성은 사라짐
- 그러나 사랑은 지금처럼 계속됨
IV. 결론: 사랑은 영원하다
영원한 사랑 17 (2009.3.8 주일오전설교)
29. 믿음 소망 사랑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I. 본문해설
- 지금과 그때의 보는 것
II. 지금 있는 것들
A. “항상 있는 것인데”
- Νυνὶ δὲ μένει πίστις, ἐλπίς, ἀγάπη, τὰ τρία ταῦτα
“그런데 지금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머물러 있는데”
- ‘그때’(τότε) 와 ‘지금’(νυνὶ)
B. 은사와 신망애
1. 남겨진 세 가지: 신망애
- 온전히 알게 될 그 날이 올 때까지
- 은사 남겨져 있지만 신망애로 삶
2. 은사의 경륜과 신망애
–어떤 은사 폐지되거나 변함
–영원하고 온전한 주의 뜻 알 때까지 우리를 살게하심: 신망애
–은사로써 주의 뜻을 부분적으로 앎
–살게 하시는 것: 은사 아닌 신망애
III. 믿음, 소망, 사랑
A. 영광의 지식에 이르기까지 삶
B. 신망애로 살아감
1. 신망애는 은사 아님: 사도가 보여주겠다고 한 ‘탁월한 길’(12:31)
2. 여기 ‘믿음’은 12:9의 은사들 중 하나로서의 믿음X
- 믿음의 두 용례: 은사+일반적 믿음
영원한 사랑 18 (2009.3.15 주일오전설교)
- 온전히 알 때까지 사는 법: 계시와 선하심에 대한신뢰
3. 여기 ‘소망’은 은사가 아님
- 온전한 지식과 지복에 대한 소망
- 그 나라의 앎과 행복을 바라며 살아감
- 부분적으로 맛보나 그 때문에 더욱 온전한 지식과 행복을
갈망함
- 그 소망을 가진 자는 덕스러운 삶으로 자기소망을 입증해야 함
4. 여기 ‘사랑’은 은사가 아님
- 은혜의 결과로서의 사랑
- 새로운 정신능력의 도입 아니라, 인간의 사랑의방향을 바꿈:
오직 은혜로만 가능
5. 함께 있는 신망애
IV. 결론
30. 사랑은 영원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I. 본문해설
II. “그 중 제일은 사랑이라”
- μείζων δὲ τούτων ἡ ἀγάπη
“그런데 그것들 중에서 더 탁월한 것은 그 사랑이다”
A. 불완전한 인도 안에서 삶
- 하나님의 뜻: 은사, 성경, 성령인도
영원한 사랑 19 (2009.3.22 주일오전설교)
-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하심
- 객관적 은혜는 주관적 은혜로 발현
B. 은혜작용과 신망애
- 은혜의 저자이신 성령
- 은혜의 삼위일체적 작용, 믿음은 지성, 소망은 감정, 사랑은
의지에 우선적으로 관여함
- 성부, 성자, 성령이 세 위격이시나 한 본질인 것처럼, 믿음,
소망도 은혜작용의 결과이나 은혜작용의 본질은 사랑이다.
- 영화의 때에는 더 이상 순례자의 길에서의 믿음x, 소망x,
오직 사랑만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남을 것임
III. 사랑은 영원히
A. 영원으로부터 온 사랑
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사랑이심
- 삼위일체 안에서, 완전성과 사랑
- 위격적 사랑이 곧 자기사랑이심
B. 시간 속으로 온 사랑
1. 인류 속으로 온 사랑
- 사랑과 지혜로 세상을 창조하심
- 하나님 아는 것, 사랑하는 것 전부임
- 하나님 사랑의 최고봉,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
2. 교회 속으로 온 사랑
- 구원은 그 사랑 때문에 회심하는 것
- 중생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생명주심
- 성화는 그 지식과 사랑 안에서 자라감
- 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상 인류 알게 함
- 시간 속에서 사랑하나 영원을 향하여
C. 영원 속으로 돌아가는 사랑
- 육욕적사랑(cupiditas)은 자기와 시간 세계 안에서 소비됨↔
그러나 아가페 사랑은 모두를 사랑하나 누구에게서도 멈추지 않
고 영원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흘러감: 하나님의 자기 회귀적 사
랑에 참여함(원수까지 사랑함)
- 믿음, 소망은 영원을 바라보나 거기로 돌아가지는 못함(영원하지
않음) 그러나 사랑은 영원을 단지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영
원을 시간 세계 안으로 끌어들여 누리고 있는 것임
–이 사랑 안에서 살라고 교회를 주시고 그 안에서 진리와 성령으
로 은혜를 누려 시간 안에서 영원을 향해 살게 하심
IV. 결론: 영원한 사랑의 힘으로
영원한 사랑 42
영원한 사랑 1 (2008.6.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 (2008.6.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3 (2008.6.29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4 (2008.7.6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5 (2008.7.13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6 (2008.7.20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7 (2008.7.27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8 (2008.8.3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9 (2008.8.10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0 (2008.8.17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1 (2008.8.24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2 (2008.9.2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3 (2008.9.2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4 (2009.2.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5 (2009.2.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6 (2009.3.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7 (2009.3.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8 (2009.3.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9 (2009.3.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0 (2009.4.19 주일오전설교)
1.은혜와 사랑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2:31-13:1)
I. 본문해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모든 성경이 똑같은 정도로 중요한 계시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고린도전서 13장은 기독교 신앙의 정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영광스런 13장을 깊이 천착하고 탐구하게 되면 나머지 성경 66권 전체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13장 전체에 대한 설교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두주에 걸쳐서 서론적인 강론을 먼저 드리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어떤 문맥에서 기록된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3통의 편지를 썼고 그 중에 한통은 유실되었고 2통이 남아서 고린도전서와 후서로 불리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매우 우울한 배경을 가지고 쓰였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들어와 있는 심각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한 교정의 목적으로 씌어 진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는 항구도시였습니다. 거대한 국제무역시장이 있는 곳이었고 철학과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생활하고 있는 아주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고린도 시에는 몇 가지 정신이 있었는데 첫째는 물질주의입니다. 항구를 타고 국제무역을 통해 수많은 돈이 들어오게 되었고, 이것은 결국 도시 전체를 물질만능주의 사고에 젖게 만들었습니다. 날카로운 이익이 대립되는 것이 장사와 무역이니 당연히 여기에는 자기만을 아는 이기심이 근본적으로 깔려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향락주의입니다. 뱃사람들이 오랫동안 금욕을 하고 항구에 도달하게 되면 여기에서 자기의 육욕을 마음껏 발산하게 되니까 향락산업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도시 전체의 정신이 향락주의적인 정신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철학과 사상을 따라서 파당을 나누며 학파를 형성하고 쟁론을 일삼는 것이 이 도시의 정신이었습니다. 시장이나 토론장으로 마련된 광장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인생과 사상에 대한 견해를 발표하고 추종자들을 모으고 토론을 하는 정신이 고린도 시의 정신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 고린도교회가 그런 도시로 묘사됩니다.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러한 정신을 가진 도시에 세워진 교회를 의미하고, 교회의 사명은 이러한 잘못된 도시의 정신을 바로 잡는데 어떤 식으로든지 이바지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처음 복음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침체에 빠지게 되자, 도시의 정신이 오히려 교회로 파고 들어오게 되었고, 많은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11장에서는 성찬에 관한 문제를 다루면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성찬의 불균형을 책망하고 있는 장면은 이미 물질주의가 교회에 들어온 것을 보여줍니다. 또 교회 안에 있는 심각한 도덕적인 문제들을 바로 잡지 않고 있는 것은 도시의 향락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온 모습을 보여줍니다. 1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울파 게바파 베드로파 하는 파당들이 교회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도시 안에 있는 파쟁의 정신이 교회에 침투한 것을 보여줍니다.
II. 그리스도의 몸
고린도전서 12장이 13장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사랑을 다루기 전에 12장에서 은사의 문제를 다루다가 이것이 나온 것입니다.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유기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할 때 이것은 몸과 머리의 관계가 나누어질 수 없는 유기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이것은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A. 교회의 유기적 성격
1. 유기적 생명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공유되는 것이니 교회의 생명은 곧 그리스도의 생명이요, 그리스도의 생명과 교회의 생명은 하나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영생을 얻은 자들은 각기 그리스도와 접붙여진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와 접붙여진 사람들의 완전한 연합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통일체적으로 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있어서 그리스도와 교회는 유기적 생명을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유기적 통치
그리스도가 머리이시라는 사실은 머리가 의도하는 대로 몸을 다스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다스리시는 방식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은혜를 공급하시므로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셔서 당신의 통치에 따르게 하시는 방법과, 또 하나는 그릇된 자들을 하나님이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위로서 당신이 세우신 종들을 통해 치리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통치주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3. 유기적 봉사
13장과 관련 있는 것은 유기적 봉사, 혹은 유기적 섬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머리이시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부어주실 때 한 사람 한 사람은 교회 안에서 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교회 자체가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세상으로 나가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을 이루어가는 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경륜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께 접붙여져 각기 하나님을 섬기며 살 뿐 아니라 그 섬김이 공동체적인 연결을 이루어 교회 전체가 예수의 공동체적 화신이 되어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일들을 뒤잇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스스로 돌보고 이 세상에 나아가 전파하고 치료하고 가르치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지상 생애의 사역을 뒤잇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유기적 봉사인 것입니다.
B. 은사의 유용성과 한계
은사는 바로 이 일을 하기에 적합하도록 하나님이 시키시는 준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그것을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기에 적합하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은사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설립할 당시에 교회의 초석을 놓기 위해 지금 우리가 받는 은사와는 수준과 종류가 다른 특별한 영적인 은사를 교회에 부어주십니다. 그렇게 부어주신 특별한 은사들은 그 은사를 가진 사람에게 주신 사명에 적합하도록 그 사람을 준비시키는 효과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을, 어떤 사람에게는 통역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 분별함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주신 것들이 바로 은사입니다. 이 은사가 교회를 섬기는데 이바지하지 못하고 은사들끼리 서로 충돌을 일으킴으로 커다란 소란을 빚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도록 주신 은사가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을 찌르는 수단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너희가 은사를 받았다고 자랑을 하는데 은사가 우열을 가리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에 유익을 위한 것이다. 그러면서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이렇게 말하면서 “너희는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라고 한 후에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13장에 나오는 사랑 역시 12장의 영적 은사와 연결선상에 있는 은사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도 12장에 나오는 은사와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대한 문제가 생깁니다. 병을 고치는 은사는 병자를 섬기기에 적합한 것이고,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는 아직 영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지식의 말씀은 아직까지도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한 은사입니다. 방언을 통역하는 것은 방언하는 사람들을 섬기는 은사가 되고, 통역을 통해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은사가 됩니다. 그러면 사랑은 누구를 위한 은사가 되는가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누구를 위한 은사일까요? 내가 만약에 몸이 건강하다면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진 사람의 도움이 내가 필요할까요? 안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은사를 가진 사람의 도움은 어떠할까요? 내게는 모든 은사들이 다 있기 때문에 사랑을 가진 사람의 섬김은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은 은사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C. 사랑은 은사인가?
성경에서 ‘은사’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좁은 의미로 사용되면 영적인 특별한 은사를 가리킵니다. 좀 더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공로가 아닌 선물로 주신 모든 것을 은사로 표현합니다. 로마서 8장은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라고 표현합니다. 은혜도 역시 하나님이 값없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므로 그것 역시 은사입니다. 은사라고 하는 말자체가 선물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사도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은사와 은혜를 대조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너희들은 특별한 영적인 은사를 받았고 그것들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우위에 있는 것이냐를 가지고 다투는데 그것은 너희들에게 한 가지가 빠졌기 때문에 그런 논변을 펼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은사보다 더 좋은 것을 너희에게 보여 주겠노라.”라고 하면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III. 은혜와 사랑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를 행할 수 있도록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키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여기서 감화라는 말은 그 기운을 인간의 영혼과 전 본성 속에 깊이 스며들게 한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사로잡히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 은혜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화이고, 그 감화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A. 은혜의 결과, 사랑
예수를 믿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사람만 예수를 믿지, 예수를 안 믿어도 되는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인간은 타락한 이후, 본질적으로 누구를 의존하며 살지 않고 독립하면서 살려고 하는 악한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에 자신이 아주 비참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영위해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깊이 깨달았을 때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에 관해 듣게 됩니다. 한사람의 죄인이 하나님을 믿기 위해 그분께 나아갈 때 사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믿으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관심사는 자기가 이렇게 살고 싶지 않고 또 다른 인생을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보다 더 행복한 상태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랫동안 자기 스스로 살아왔던 인생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십자가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다른 곳에서 알게 되는 사랑은 참 기독교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알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 이것을 통해서 인간은 구원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직접 바라보아서는 잘 알 수 없는 희미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또렷하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지혜이고 방법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순간,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 자기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티끌 같은 인간이라는 것, 자기가 하나님을 거슬러 창조 목적을 배반하며 살아온 끔찍한 죄인이라는 것, 그러한 인간에게 합당한 것은 영원한 형벌이라는 것,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자기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사랑은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심오한 경험은 용서를 통한 경험입니다. 죄의 용서를 통한 경험만이 참되고 진실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그것을 깊이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고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아가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겸손하게 깨닫게 됩니다.
B. 사랑과 질서
1. 목적이 있는 사랑
이해를 돕기 위해서 여러분의 사변을 넓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사랑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할 대상이 있기 전에는 사랑이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가 서로 사랑하심으로써 하나님 아닌 다른 세계가 존재하기 이전에도 당신 자신이 사랑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아 창조한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창조하신 모든 피조세계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돌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마지막으로 어디로 가는 사랑일까요? 그 사랑은 당신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형제가 마지막 목적이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고 자매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또 다른 목적이 있는 사랑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사랑이십니다. 당신의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사랑하셔서 사랑을 받는 것들은 하나님 밖에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으로 회귀하는 자기 회귀적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서부터 가장 하나님을 닮고 싶어 했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랑의 방식입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네가 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 같아지리라”고 말합니다. 사랑의 방식에 있어서 인간이 하나님을 잘못 본뜨게 된다는 것을 예고한 유혹이었습니다. 특별하게 나쁜 사람이 아니면 자기 가족은 사랑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가족이 행복해야 자신이 평안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족은 내가 아니지만 가족을 향한 사랑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선대해주는 친구를 사랑합니다. 때로는 자기의 이익에 많은 부분을 친구를 위해 포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투자입니다. 내가 친구를 선대함으로써 친구가 나에게 베풀어준 것을 갚고 친구를 행복하게 해서 친구가 나에게 더 많은 선을 베풀어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친구를 향한 사랑도 결국은 자기 회귀적 사랑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사랑하면 안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크기가 멀수록 비교적 고상한 사랑이 되고 멀리 돌아오지 않고 아주 가깝게 돌아올수록 추악한 사랑이 됩니다. 아주 멀리 돌아올수록 여전히 중심축이 자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칭찬받는 사랑이 됩니다.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요즘 같은 시대에 비교적 칭찬을 받을만한 사랑이지만 애국자들이 볼 때는 비난받을 수 있는 사랑일 수가 있습니다. 가족의 이익과 나라의 운명이 걸렸을 때 가족을 뛰어넘어서 더 넓게 휘돌아오는 나라 사랑이 덕스러울 수 있습니다. 애국자인 중국 사람과 자기 나라만을 사랑하는 일본사람 둘이 만나면 서로 싸우는 것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류애를 가진 사람은 이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사랑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계속 줄어들어서 가족도 엄마 아빠도 본 척 안하고 마누라만 좋아하고 남편밖에 모르는 사랑은 가깝게 돌아오기 때문에 약간 추한 사랑입니다. 마누라도 모르고 영감도 상관하지 않고 자기만 먹고 자기만 즐거워하면, 이것은 추악한 사랑입니다.
2. 질서를 바로잡는 사랑
넓은 호수가 있습니다. 바람 한 점 없어서 잔잔한 호수입니다. 헬리콥터 위에서 큰 돌멩이 하나를 호수 가운데로 풍덩 떨어뜨렸습니다. ‘출렁’ 하면서 물결이 일어나더니 정확하게 원을 그리면서 호수 전체로 퍼져나갑니다. 하나의 원이 확장되어 가면서 더 큰 동심원을 그리며 호수 전체에 균형 있게 펼쳐집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사랑 자체를 주신 이유는 바로 이런 사랑으로 하나님 한 분의 사랑을 전달하는 하나의 질서를 이루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감미롭고 아름다운 세상이 됩니다. 석양이 지는 호수에 하나의 파문이 일기 시작하면 직경이 수십m, 넓게는 800m 되는 원이 멋있게 그려집니다. 그때 여기저기서 주먹만 한 돌멩이들이 날아옵니다. 그러면 돌멩이가 떨어지는 곳에서 다시 파문이 그려질 것입니다. 크고 질서 있게 확장되어져가던 원의 확장에 간섭이 일어납니다. 위에서 호수를 내려다보면 질서 있게 펼쳐져가던 동심원의 확장은 간섭을 받으면서 아주 어지러운 문양들을 그려내고 물결이 서로 간섭을 일으키고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타락한 후의 인간의 악한 모습입니다. 악이라는 것은 잘못된 질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질서를 고집하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악입니다.
C. 은혜와 사랑의 관계
여기서 우리는 은사와 구별되는 은혜가 사랑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터득하게 됩니다. 이 은혜와 사랑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애성을 가진 인간
하나님이 인간을 맨 처음 창조하실 때 육체는 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거기에 영혼을 불어넣으셔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영혼만 있는 것도 인간이 아니고 육체만 존재해도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육체와 만나게 하셨을 때 사랑할 능력도 주시고 사랑 자체도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맨 처음 창조되었을 때 백지 상태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느끼는 것도 없는데 하나님이 하나씩 가르치셔서 천천히 사랑이 들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은 그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사랑 자체를 주셨습니다. 처음 주신 사랑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질서를 사랑하는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실 때 당신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창조하시고 이끌고 나오실 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던 그 사랑은 하와를 향한 사랑이었지만 하나님이 하와를 그렇게 사랑하기 원하셨기에 사랑하는 사랑이었습니다. 하와를 향한 사랑과 하나님 자신을 향한 사랑은 전혀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하나님 사랑의 연장선상에 있는 질서의 확장이었습니다.
2. 타락한 인간의 애성
그러나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타락은 인간의 사랑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아주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사랑은 물건처럼 한 번 주고 끝내도 여전히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에는 특이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능력과 사랑 자체를 주셨어도 당신 안에 있는 사랑을 뚝 잘라서 인간에게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전원이 필요한 전열기구와 같습니다. 영혼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계속해서 생명과 사랑이 공급되어야 본래의 능력과 사랑의 성격을 유지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교통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그의 영혼으로 흘러 들어와서 아름답게 지녔던 사랑의 공급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고립된 인간은 마치 전선이 잘린 전열 기구처럼 그 속에 종래 가지고 있었던 순전한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끊어진 모습이 바로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이 여자가 줌으로 내가 먹었습니다.”라고 했던 하와를 향한 아담의 깊은 원망과 비난에서 타나났습니다. 둘은 절대 싸운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니까 하나님의 질서아래에서 이 여자를 사랑할 수 있었던 사랑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할 점이 있습니다. 사랑 자체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없어져 버렸지만 사랑의 능력이 박탈당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인간이 타락과 함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모두 박탈당했다면 모든 인간은 아무런 욕망도 없이 핏기 없는 얼굴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의욕이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이후로 인간은 더 열렬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 속에서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을 때 충만했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타락과 함께 고리가 끊어지면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으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사랑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자기 사랑이 되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사랑에 열렬한 존재로 태어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의 사랑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에게로 회귀하고자 하는 사랑이 됩니다. 자기가 온 우주의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중심에 서서 선한 자와 악한 자를 판단하며 사랑합니다. 그에게 능력과 재산, 권력, 건강, 이런 자원이 많으면 큰 돌이 되어서 호수에 풍덩 떨어집니다. 작은 돌멩이들로 일으킨 파문을 큰 파도로 덮어버리고 자기의 질서를 모든 사람에게 강요합니다. 오늘날 이것은 치열한 경쟁에서 볼 수 있습니다. 더 예뻐지려고 하고 먹고 살 것이 충분히 있는데도 더 많이 벌려고 하고 더 많이 알려고 하고 더 많이 건강하려고 하는 것은 자기를 주인 삼아서 그 파문을 확장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나 자신을 움직일 때는 조금 행복합니다.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내 뜻대로 움직여주는 것은 조금 더 행복합니다. 온 세계가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낍니다. 돈, 재산, 권력은 굴복하게 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이것들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누르면서 자기를 떠받들게 만듭니다. 역사를 보면 모든 왕들은 황제가 되고 싶어 했고, 황제가 된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신격화 했습니다. 처음에 주님을 믿지 않고 살 때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상처받았다고 하는 것도 둘 중에 하나입니다. 내가 파문을 펼쳤는데 사람들이 말을 안 들으면 나는 상처를 받게 됩니다. 나는 나대로 펼쳐보고 싶은데 더 큰 파도가 밀려와서 나를 덮어버렸을 때 그때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3. 인간의 문제는 사랑의 문제
하나님 사랑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인간의 삶에는 평안함이 없고 끊임없는 번민과 갈등의 연속이 됩니다. 어느 한 순간 자기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중앙에 떨어져서 크게 파문을 일으키며 온 호수 위에 펼쳐져가는 단 하나의 사랑의 질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질서를 선명하게 보여주시는 분이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전에는 내가 사랑하는 것이 마지막으로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끊임없는 고통과 갈등의 연속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하나님에 의해 일어나는 사랑의 파문 속에서 그 파문을 전달하는 중간에 있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전에는 내가 나와 하나님을 사용해서 나를 기쁘게 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나를 사용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나는 하나님의 기쁨 안에서 행복을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휘돌아오는 큰 사랑의 물줄기의 과정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감으로써 진정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누린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게 될 때 이 사랑은 세상에서 유래를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사랑입니다. 찬란한 햇빛과 같아서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도 없고 본질이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4. "Agape"와 "Caritas"
하나님 사랑은 눈부신 태양과 같아서 본질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앞에 빛을 받게 될 때에 내가 나를 사랑하며 산 것이 고통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만이 사랑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때 인간의 마음속에서도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사랑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을 까리따스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가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까리따스의 사랑은 반응으로서의 인간의 사랑이기 때문에 두 사랑이 서로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까리따스의 사랑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아가페의 사랑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이고, 까리따스의 사랑은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표현하면 됩니다. 본질적으로 둘은 일치를 이룹니다. 그것이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갖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이 올바로 사랑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참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가족 사랑하라”는 것이 나오는데 자기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안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자기를 사랑하라는 책들이 많이 나옵니다. 자신이 사랑을 못 받아서 문제가 아니라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서 문제입니다. 이것도 포스트모더니티입니다. 성경이 자기를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는 데에는 중요한 시사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명령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면 절대로 자기를 올바르게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명령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사람이면 이미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도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사랑한 사람만이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는 까리따스의 사랑이 없이 자기를 사랑하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전체로서의 자기 존재를 사랑하지 못하고 편파적으로 육체만을 사랑하게 됩니다. 인간이 진리에서 멀게 되면 필연적으로 육체를 편파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진리에 약한 모든 사람은 자기 존재를 공정하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밝은 빛이 필요합니다. 진리의 밝은 빛으로 육체와 영혼의 본질과 질서가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정한 질서에 자신을 가져다 놓고 그 질서를 따라서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데, 질서에 대한 사랑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일치를 이룹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질서대로 사랑하는 것, 하나님이 정하신 사랑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이 불러일으켜지는 것은 은혜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우리에게 사랑을 가지고 옵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인간 전체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자기밖에 모르고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며 자기 사랑의 질서를 그리는 재미로 인생을 살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중생시키고 거듭나게 하심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5. 구원받은 인간의 애성
이렇게 인간이 거듭날 때 최소한 두 가지의 중대한 변화가 그 사람의 영혼 안에 생겨나게 됩니다. 첫째는 존재론적 변화입니다. 성향의 변화입니다. 기울어진 표면에 무엇을 얹어 놓으면 무엇이든지 굴러 떨어집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마음의 기울기 즉, 영혼의 성향이 무엇을 하든지 자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친구를 만나든지 무엇을 하든지 자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런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그러했습니다. 존재는 곧 성향입니다. 성향이 다르면 존재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중생시키시면 자기밖에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이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기울게 됩니다. 무엇을 행하든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갖게 됩니다. 처음 회심할 때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서 마르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전적인 무가치함, 하나님 사랑에 대한 끝없이 넓고 큰 영광을 찬송하게 됩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네
예전에 주님을 믿지 않을 때 “너는 벌레일 뿐이야.”라고 하면 아마 죽이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나니까 자기는 정말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당신을 향한 사랑을 넣어주신 것처럼, 타락으로 자기밖에 사랑할 수없는 인간에게 중생과 함께 하나님 사랑을 넣어주셨습니다. 보이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중생한 사람에게는 이런 존재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성향이 심겨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저는 신자가 되었는데도 실제 삶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거의 사랑하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러면 신자들은 왜 범죄 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왜 신실한 신자들에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기 사랑으로 성향이 확정되어진 중생 이전의 상태에서 죄를 짓게 되면 양심의 빛이 가책을 갖게 할 때는 있지만 그것이 의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죄를 지을 때는 의지와 마음 사이에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즉, 단일의지로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중생과 함께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성향이 있게 됩니다. 은혜생활을 잘 할 때는 기울기가 급합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기울기가 낮아집니다. 기울기는 가변적입니다. 어떤 기울기에서든지 죄를 짓게 됩니다. 그때 신자도 불신자와 똑같이 죄를 짓습니다. 의지가 이미 균열 상태에 있습니다. 죄가 이미 내 안에 번성했기 때문에 나를 죄로 끌고 가는데 중생과 함께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본성이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의지가 아니라 균열된 두 가지 의지로 죄를 짓게 됩니다. 복합의지에 의한 범죄라고 합니다. 불신자는 단일 의지로 죄를 짓고 중생자는 복합의지로 죄를 짓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긴 하지만 많은 은사들은 이 기울기 자체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기울기를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은사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 은혜는 우리를 참다운 구원에 이르게 만들어줍니다. 예전에는 자기 사랑에 빠져서 살던 사람이 어느 날 복음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큰 사랑에 대해 눈 뜨게 됩니다.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셔서 이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시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 계획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자기 욕망을 따라 살면서 범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이미 영원한 형벌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복음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서른 세 해 동안 깊은 고난과 큰 비참의 생애를 사신 것을 성경말씀을 통해 뚜렷이 보게 될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확 밀려옵니다. 이제껏 나의 인생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내가 중심이었는데 사실은 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용서받고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신은 결코 중심이 될 수 없는 수많은 피조물 중에 찌꺼기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를 신뢰하며 살았던 모든 인생을 후회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 인간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참 인간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사람의 마음에 가득할 때 인간이 어떻게 살게 되는지를 그리스도의 모본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계시면서 보여주신 모든 삶은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 사랑의 열매였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삶과 격차가 나는 것을 발견하면서 그분 안에 있었던 충만한 무엇이 내 안에는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모든 삶을 우리가 충분히 따라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삶의 모본을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은 ‘그냥 한번 보여주셨을 뿐이지 그분의 모본이 우리의 삶과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우리는 죄인인데.’ 이렇게 생각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다르게 탁월하고 덕스러운 인생을 사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철저한 자기 부인의 생애를 보면서 우리는 그분을 감히 흉내 낼 수 없지만 최소한 하나는 할 수 있습니다. “그분 안에 있었던 참되고 진지한 까리따스 사랑이 내게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나에게 그런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의존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은사보다도 더 많이 사랑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아니면 진리를 듣기 힘든 세상에 태어나서 살고 있습니다.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의 질서는 차치하고라도 교회 안에는 복음과 진리에 대한 인식, 참된 기독교 신앙, 오래된 복음주의가 서서히 잊어져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교와 비빔밥이 된 혼탁한 사상이 들어와서 ‘그 가르침을 그대로 따를 때 과연 구원이 있을까?’ 의심하게 하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버젓이 일어납니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어느 교회에서는 기도를 해주면 이빨이 금으로 변하는 일들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이빨이 금으로 변했느냐 안 변했느냐가 아닙니다. 그것이 금으로 변했기 때문에 믿는다면 미친 짓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나가서 “내 백성을 놓아달라.”고 할 때 말을 안 들어서 피,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의 재앙이 차례대로 일어났습니다. 맨 처음에 애굽의 술사들도 똑같이 따라했습니다. 애굽의 술사를 믿어도 괜찮은 것이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그렇게 믿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이빨이 진짜 금이다.” “아니다.”를 가지고 논쟁을 합니다. 그것이 왜 중요합니까? 금이 아니라 다이아몬드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악의 세력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작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물리의 법칙 하나가 증거가 되어서 믿고 있는 것이라면, 그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굳이 그것을 믿음으로 부른다면 초라한 믿음입니다. 확률을 의지하는 믿음일 뿐이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참된 믿음일 수가 없습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은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하나님의 사랑에 영혼이 깊이 젖고, 얼굴 전체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입맞춤을 받고 있는 동안, 나의 심장이 주님의 가슴에 닿아 그분의 박동소리를 충분히 느낄 수 있으리만치 세밀한 사랑의 연합 속에 있는 동안에는 더 이상 신비한 것이 부럽지 않습니다. 그 사랑 자체가 탁월한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잡지에서 보니까 ‘사람들의 관계에서 좋은 인상을 주는 비결’이라고 하면서 마술을 몇 가지를 배워 다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형제가 있는데 교회에 와서 마술을 잘 합니다. 많은 사람의 호기심을 끌었는데 자매인 나도 저 사람이 하는 것이 너무 신기해서 차츰차츰 앞으로 나가서 마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나자마자 다른 것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해봅니다. ‘저 사람이 마술을 몇 가지를 알고 있을까?’ 그러다가 어느 날 사랑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그러면 마술을 보여 달라고 하겠습니까? 네 마음을 보여 달라고 하겠습니까? 이제 마술은 관심이 없습니다. 보고 싶은 것은 마음입니다. 신비에 대한 모든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대부분 버림 받은 느낌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면 이제 그런 것을 안 보여 주셔도 됩니다. 예전에 믿음이 없을 때는 능력을 봐야만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게 되면 사랑은 이미 그 안에 믿음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겨우 하나님을 믿게 되지 않습니다. 알고 싶은 것은 산을 옮기는 하나님의 능력, 구름과 바람을 몰고 다니시는 하나님의 큰 힘, 이런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찬양)
내 생애에 가장 귀한 것 주 아는 것 내 생애 귀한 것 주 아는 것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아는 것
성경의 진리에 입각해서 명제가 생겨나게 됩니다. 사랑은 지식에 대한 갈망을 부르고 지식에 대한 갈망은 사랑을 불러들인다.
왜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자신과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술만 보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빨이 금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 한명도 없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심오한 관상의 세계에 들어가서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모호한 하나님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거기에서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고 은혜에 감격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는 무한하고 놀라운 세계입니다. 놀라운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이 가져다주는 첫 번째 존재론적 변화입니다.
두 번째는 인식론적 변화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죽었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고 해서 육신의 생명까지 죽은 것은 아닙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것을 통해서 외부 사물들과 접촉하게 됩니다. 오감을 통하지 않고는 외부 사물과 접촉할 수 없습니다. 외부 사물과 접촉하면서 모든 사물에 대한 것들이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들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됩니다.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면 아름다움의 기준은 인류가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은 것이 기준이 됩니다. 내가 좋으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내가 좋으면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랑하게 되면 거기에서 수많은 표상들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는 1, 2, 3, 4, 이렇게 되어 있는데 욕망에 의해 이 질서들을 다 뒤바꿔 놓습니다. 잘못된 질서를 스스로 만들고 사랑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인간 영혼의 찢어짐과 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 그 이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이 비중생자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은혜로 중생시키고 회생시킵니다. 눈이 열리게 되면서 비중생자는 볼 수 없는 영적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인식의 능력이 사랑의 능력과 함께 생겨납니다. 예전에는 볼 수 있는 감각적인 사물 속에서만 아름다움을 찾았는데, 아름다움의 본체가 정신과 영적인 세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세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모든 영적인 세계의 사물들의 아름다움 가운데 최고봉이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에 찬란한 아름다움의 빛이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이미 맛보고 알았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이 환하게 들어오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은 너무 기뻐서 그 아름다움을 붙잡으려고 하고 그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게 됩니다. 그 때 이것을 겨우 본 따서 만든 세상에 있는 사물들이 하찮게 여겨집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이 만든 인공미는 자연미를 모방한 것입니다. 자연미는 하나님 아름다움의 모방일 뿐입니다. 그 아름다움이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물의 형체를 갖출수록 고차원적인 아름다움을 담아내기엔 부족한 사물이 됩니다. 아름다움을 담은 것보다는 아름다움 그 자체를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를 부당하게 사랑하며 감각적인 사물들에 얽매였던 눈을 들어 천상의 세계, 신령한 세계 속에 있는 영적인 아름다움에 마음이 확 끌리게 됩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있는 것들입니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을 사랑하게 되면 이 땅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께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자유, 정의, 평화, 안식, 우정 이런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사람의 삶이 훨씬 고상해집니다.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그림자만 사랑해도 사람이 고상해지는데 하나님 자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본체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비교될 수 없는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은혜 생활을 안하면서 기울기가 올라갈 때 잠시 세상에 몰입했던 정신과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아름다움에 대한 보고가 성경입니다. 자연세계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희미합니다. 고도의 학문을 필요로 합니다. 자연과학을 잘 알아야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엑기스가 녹여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깊이 발견합니다. ‘윌리엄 워즈워드’라는 시인은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마음 뛰노나니 나 어려서 그러하였고 어른 된 지금도 그러하거늘”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영적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우리의 마음이 막 뜁니다. 뛸 수밖에 없습니다. 중생과 함께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감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찬란한 아름다움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비치게 됩니다. ‘정말 아름답구나. 그 크고 놀라운 사랑, 십자가의 사랑’ 그때 비로소 얼마 전까지 내 마음을 끓였던 이 세상에 있는 육욕적인 질서를 따르는 사랑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이렇게 아름다우신 주님을 배반하고 쓰레기 같은 것들을 사랑함으로 주님의 마음에 못 박고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당신의 계획에 어긋났던 나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참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나쁜 사람입니다.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라는 경건한 교부는 자기 책 속에서 “나는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라고 했습니다. 끊임없이 눈을 들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우리의 마음은 다시 뛰놀게 됩니다. 착각과 오만에서 벗어나서 아름다운 사랑의 질서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범죄하고 침체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영원히 버린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됩니다. 중생한 신자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성향은 절대로 소멸되지 않습니다. 다만 사위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불씨를 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많은 생각들에 둘러싸이고 갈등을 느끼고 있지만 어느 순간에 하나님 앞에 와서 조용히 마음을 열고,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읽으시도록 할 때 우리에게 바람이 붑니다. 확 불꽃이 일어납니다. 오래 동안의 침체를 벗고 어둠 속에서 방황했던 날들을 불태우고, 나 같은 인간을 위해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셔서 생명을 버리신 그리스도, 이 세상에 악인이 나 하나 밖에 없어도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을 그리스도의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커서 집을 나간 탕자와 같은 내가 돌아와 그 사랑 안에 살기를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만들어줍니다. 은사는 우리의 영혼에 전 본성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은혜는 이처럼 우리의 본성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핏줄이 온 몸에 퍼져 온 신경과 우리의 온 몸에 생명을 공급하고, 외부 세계의 정보들을 받아들이게 해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전 본성을 깊이 파고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연적인 성품을 가지고 비관합니다. 성격이 급하고 물질에 헤프고 따지기를 잘해서 친구들이 없다고 합니다. 자연적인 본성은 나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각자 알록달록하게 주신 것입니다. 성격이 아주 급합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몰라서 자기 사랑에 빠져있습니다. 자기 회귀적인 사랑을 합니다. 성격이 급한 것은 사람들에게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이 사람이 자기 사랑에 대해서 깨뜨려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전 본성을 변화시켜서 예수 사랑으로 꽉 차면 이 사람은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낭비벽이 있는 사람도 문제가 안 됩니다. 자기 사랑으로 꽉 찼을 때는 자기만을 위해 물질을 허비하는 사치스런 삶을 삽니다. 예수 사랑이 꽉 차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본성이 변화되면 제일 좋은 것은 자기에게 인색하고 남에게는 후한 것입니다. 자기 개인 생활에 있어서 짠돌이로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와 줄 때도 벌벌 떱니다. 아주 특별한 사람만 자기에겐 엄격하고 인색하지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너그럽지, 일반적으로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물질생활에 있어 다소 헤프더라도 문제가 되는 것은 물질을 넉넉하게 사용하려고 하는 씀씀이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만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전 본성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변화되어서 예수 사랑으로 꽉 차게 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후하게 하고 나눠주는 사람이 됩니다.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면 그 지식이 칼이 되어서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합니다. 예수 사랑으로 꽉 차게 되면 진리를 탐구하는데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저는 쉽게 믿는 사람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쉽게 버립니다. 번민을 많이 하고 고민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번 예수에 사로잡히면 알지 않고는 배길 수 없습니다. 지식이 사랑을 부르고 지식은 사랑을 도입합니다. 그러면서 사랑이 성장해 나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전 본성에서 부패성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깃들에 만듭니다. 우리의 본성이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IV. 결론과 적용
신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최상의 섬김은 무엇일까요?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헌신도 나쁠 것 없겠고 아무도 가지 않는 오지에 던져져서 복음을 전하다 죽는 선교사의 일생도 좋을 것입니다. 오해와 비난 핍박과 모욕 속에서 굴하지 않고 양떼들을 끌어안고 목회를 하며 일생을 사는 것도 칭찬받을 만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보다 더 뛰어난 섬김이 있습니다. 신자가 이 땅에서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뼈 속 깊이 사무친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그 큰 사랑, 허물과 죄로 죽은 더러운 인간을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자기 안에 갖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생에 자기는 없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이 행복을 받으시고 옆으로는 세상에 있는 인간이 나의 희생을 통해서 행복해지는 것, 그 안에서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는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은 모든 것보다 가장 뛰어난 섬김입니다.
비전이 뭐냐고 물으면서 사람들을 휘몰아가는 시대에 잊어버리기 쉬운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의 가장 큰 소원은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예수를 많이 닮는 것입니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은 자신의 책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복은 그리스도를 많이 닮는 것이다.” 그 사랑을 많이 닮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슬퍼할만한 어떤 죄도 지은 적이 없었지만 그분이 슬퍼한 것은 사람들을 슬퍼했기 때문이었고, 당신은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었지만 가난하게 사신 이유는 자신이 가난해지심으로 가난한 이들을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 안에 있는 사랑이 그런 삶을 택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젊은 날에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비전은 예수 많이 닮는 것, 그분의 화신이 되는 것, 그분이 이 세상에 살아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 그 섬김을 하는 것, 그분이 가지셨을 마음으로 행하면서 사는 것, 나는 잊어지고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나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으로 인도되는 것, 그 것 말고 우리에게 영원한 비전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이 태어나서 많은 일들을 하지만 대부분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이 일을 할 때 그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때 그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것이 일생의 최고의 비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도움이 없이도 홀로 살 수 있는 사람들은 내게 있게 마시고 상처받은 사람, 마음에 한을 품은 사람,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고쳐질 수 없는 사람들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십자가의 고난을 느낄 수 있는 삶, 그것이 진정으로 복된 삶이 아닐까요? 주님이 그런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사랑 42
영원한 사랑 1 (2008.6.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 (2008.6.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3 (2008.6.29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4 (2008.7.6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5 (2008.7.13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6 (2008.7.20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7 (2008.7.27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8 (2008.8.3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9 (2008.8.10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0 (2008.8.17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1 (2008.8.24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2 (2008.9.2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3 (2008.9.2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4 (2009.2.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5 (2009.2.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6 (2009.3.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7 (2009.3.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8 (2009.3.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9 (2009.3.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0 (2009.4.19 주일오전설교)
2.사랑이 없으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I. 본문 해설
사랑은 모든 은사와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한 것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마음 안에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그 사랑의 성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기를 기뻐하시는 모든 것들을 사랑함으로써 인간은 참 사랑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하기에 앞서서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사랑의 우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II. 모든 선의 근원, 사랑
A. 사랑 없는 은사
사도는 모든 선의 근원이 사랑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먼저 그는 놀라운 은사들을 열거합니다. 사랑의 방언과 천사의 말, 예언하는 능력,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기는 믿음, 기타 모든 은사들을 염두에 두면서 그 은사들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은사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하나님이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주신 아주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 은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 교회의 일들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은사가 사랑이 없을 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은사는 교회를 섬기게 하지만 그것은 도구일 뿐이고, 그 도구를 통해서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은 사랑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모든 은사보다 더 사모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우리의 전 본성을 변화시켜서 우리를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B. 사랑 없는 헌신
사도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로 사랑 없는 헌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보면서 우리는 의아한 마음을 갖습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소유를 다 팔아서 남을 위해 주고 심지어는 자기의 몸을 희생하되 불사르게 내어주기까지 희생하는 헌신 속에 어떻게 사랑이 없을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한 물질을 팔아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심지어는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죽음에 이르는 헌신을 위해서는 어떤 종류이든지 반드시 사랑이 필요하고 그런 사랑과 열정이 없이는 누구도 이렇게 행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충격적으로 우리의 가슴 속에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다.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랑이 없으면, 사랑은’이라고 할 때 말하는 ‘사랑’은 이제껏 우리가 알고 있던 사랑과는 매우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명료하게 깨닫게 됩니다.
III. 사랑이란 무엇인가?
A. 사랑의 정의
인간의 모든 비극은 사랑이 없기 때문에 아닙니다. 그릇된 사랑을 받고 그릇된 사랑을 하는 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바위나 돌멩이들은 불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식물과 동물은 혹시 불행해질 수 있더라도 덜 불행할 것이고, 자신들이 그 불행을 선택하는 예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무한히 불행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에게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어떤 특정한 대상을 끊임없이 좋아해서 거기에 고착하여 그것을 즐거워하고자 하는 마음과 영혼의 지속적인 움직임입니다. 이 사랑은 사물을 향할 수도 있고 사람을 향할 수도 있습니다. 사물을 향하면 그것을 집착이라고 부르고, 사람을 향하면 그것을 애정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그것을 즐거워하고 그것에 끊임없이 붙어 있으려고 할 때 그렇게 하는 또 다른 목적이 그 위에 있으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그것이 최종적인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이제 점점 나이가 든 형제자매들이 많아져서 걱정입니다. 외모는 집사급인데 정체는 아직 청년입니다. 우리들은 하루빨리 형제자매들이 결혼하도록 적극적으로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청년 1부가 30세까지라고 합니다. 옛날 같으면 서른 살이 넘으면 이미 청년이 아닙니다. 그런데 서른 살만 되어도 우리 교회에서는 어린 축에 속하니 큰일입니다. 우리의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청년들이 대충 가면 좋을 텐데 만만하지 않습니다. 제가 구역장 수련회에 가서도 웬만하면 특별한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사람은 목사나 전도사님이 짝 지워주면 주님의 뜻 인줄 알고 웬만하면 가라고 했습니다.
어느 자매가 자기를 좋아하는 형제를 만났습니다. 결혼할 단계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자매가 아무리 봐도 얼굴도 예쁘지 않은데 자기를 좋아해주는 것이 감격스러워서 형제에게 물었습니다. “형제, 나 좋아해?” “그럼 좋아하지.” “나 예뻐?” “그럼 예쁘지.” “나 사랑해?” “그럼 사랑하지.” “왜 사랑해?”라고 물었을 때 거기에 대답을 못해야 사랑이지 여기에 대답을 널름 하면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왜 그렇게 좋아?” 그럴 때 “그것이 나도 궁금해. 너만 보면 계속 끌려. 눈을 감으면 생각나고 내가 미쳤나봐.” 이래야 그것이 진짜 사랑이지 “내가 너를 왜 사랑하냐고? 너네 아버지가 돈이 많잖아.” 그러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수단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를 낳을 때 괴로움을 다 잊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며 기릅니다. “엄마, 나를 왜 그렇게 사랑해?” “너를 길러야 내 노후가 보장되잖니.” 그러면 참다운 사랑이 아닙니다. “나도 모르겠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세상에서는 사랑을 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불행하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기만 해도 이렇게 불행해지지는 않습니다. 최소한의 인간의 삶은 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나를 밟고 더 높은 것을 사랑하는 수단으로서 사랑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항상 내가 그 사랑의 최종적인 목적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사랑에 대한 인간의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사랑하실 때 모든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사랑하면서 그 사랑이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되어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랑은 하나님이 마지막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이 최종적인 목표가 되도록 돈을 사랑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내가 최종적인 목적이 되도록 사랑합니다.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러 사람을 각각 최종적인 목적인 것처럼 사랑했다가 미워하고 미워했다가 사랑하면서 끊임없이 출렁거리며 흘러갑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과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하시는 하나의 사랑의 흐름과 상관이 없는 사랑을 만들어 갑니다. 그것이 모두 고통이 됩니다.
인생을 좀 더 면밀하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받는 대부분의 많은 고통은 우리의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배신도 당하고 고통도 당하는 것입니다. 불교 같은 종교에서는 인간의 모든 번뇌를 끊고 행복에 이르는 길이 사랑의 인연을 끊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눈앞에 있는 인간의 고통의 해결을 위한 임시적인 치료책은 될 수 있습니다. 사랑과 모든 집착이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모두 끊어버림으로써 인간은 진정한 행복과 평정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전혀 다릅니다. 그 사랑을 모두 끊고 번뇌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올바른 것을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뜨겁게 사랑하게 될 때 진정한 행복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B. 하나님의 인간사랑
그러면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사랑이 저마다 다르고, 그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고통도 다양하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세상에서 발견되는 모든 사랑도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을 본 뜬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이 무엇이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이 항상 무엇이어야지 처음엔 아니다가 나중에 무엇이 된 것을 ‘무엇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빚으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비로소 사랑이셨다면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시던 때가 있으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명제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홀로 있어서는 확인되지 않는 정신작용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대상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면 인간과 모든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는 하나님께 사랑받을 대상이 없었을 텐데 어떻게 하나님이 사랑이실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이것에 대한 설명이 바로 삼위일체의 교리입니다.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위격으로 계셨습니다. 그러나 세 위격은 세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 어떤 때는 성부로 어떤 때는 성자로 어떤 때는 성령으로 모양만 바꾸어서 나타난 것도 아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완전한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면서 결코 세 분이 아닌 한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자는 성부를 사랑하시며 성령은 성자, 성부를 사랑하시고 각 위는 서로서로에게 사랑을 받으심으로써 이 세상에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도 삼위 하나님은 아름다운 사랑의 교통 안에서 사랑의 하나님이 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 자신의 사랑은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계신 존재의 성향이었습니다.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을 끊임없이 이 세상 속에 펼쳐 보이시고 창조한 것들을 사랑하심으로 관계를 맺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사랑을 보여주심으로써 모든 창조된 세계 안에서 당신 자신과 교통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결코 하나님일 수가 없고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십니다. 그러나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 밖에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스스로 경계를 가지신 분이 되는 것이니 창조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아니되 하나님 안에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사랑이십니다.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향한 사랑, 모든 피조물들을 향한 사랑을 통해서 결국 당신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된 사랑이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사랑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 분이십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성질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와 그 안에 있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필연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때마다 이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중 인간은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순결한 영이십니다. 보이는 물질이나 사물과 같이 장소와 시간에 매이는 분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영을 닮은 영혼을 지닌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닮은 영혼을 가진 인간, 당신처럼 생각하고 당신처럼 느끼고 당신처럼 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인간을 창조하셔서 그와 더불어 가족관계를 가지며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인류 역사이래 수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이 왜 존재하는지 그 목적을 물어왔습니다. 오늘 성경은 수많은 질문들에 대해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게 답합니다. 인간이 창조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기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께 전심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이러한 근본적인 하나님의 창조 의도를 벗어나서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필연적인 사랑이기는 하지만 하나님보다 더 큰 존재는 없기 때문에 이 필연은 하나님 자신이 선택하신 필연입니다. 누군가에 의해 강요되거나 영향을 받은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당신이 창조한 인간들을 선대하기 위하여 스스로 택하신 하나님의 존재의 성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빗줄기처럼 끊임없이 내려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기 위해 존재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인격적이면서도 필연적으로 사람들을 향해 쏟아져 내리는 사랑입니다. 선량한 부모의 마음 안에 있는 사랑, 선량한 아내 안에 있는 남편을 향한 사랑은 어느 정도 이런 필연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자식이 하는 짓은 한없이 미운데 자식은 미워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안에 어느 정도 있는 사랑의 필연성입니다.
한 일화입니다. 남녀가 서로 사귀었는데 어느 한 순간에 여성이 남성을 향해 절교를 선언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이 여자인 자신의 자존심을 심히 상하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헤어져서 두문불출하고 집에 있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먹지도 씻지도 않고 자다가는 깨고 자다가는 깨고 열흘이 넘는 시간이 흘렀답니다. 그때 비로소 이 여자는 자기의 인생의 힘이 그 남성을 사랑하는데서 흘러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기에는 건너지 못할 강을 건넌 상황이 되어 버렸고 그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흐르는 눈물은 말라 소금이 되었고 그 여자는 그렇게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곳에 와서 그 소금을 구경하곤 했는데 그 소금을 보고 돌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이별하지 않는다는 속설이 생겨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간의 사랑도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필연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이란 끊지 못하는 버릇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인간을 향한 사랑이 바로 이런 종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끊지 않으시고 쏟아 부으시는 사랑입니다.
설교를 듣는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필연성을 가지고 쏟아 부으시는 큰 흐름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라면, 우리가 그 사랑을 느낄 때도 있고 전혀 못 느끼기도 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없이 인간을 향해 쏟아 부어지는 사랑이지만 그 사랑을 느끼는 것은 인간입니다.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그것을 느낄 수도 있고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똑같이 새가 지저귀는데 마음이 몹시 고통스럽고 괴로운 날은 새가 운다고 말하지만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으면 새가 노래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결국은 성경은 모든 인간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라고 끊임없이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자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러하다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은 어떠할까요?
C. 인간의 하나님 사랑
인간은 처음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그분의 사랑으로 돌보고 가꿀 수 있도록 사랑의 마음과 선한 의지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게 되면서 영원불멸하고 아름다운 육체가 늙음과 죽음에 종속되고 사멸할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에 일어난 것보다 더 큰 변화가 영혼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처음에 주신 하나님을 향한 올곧고 순수한 사랑이 뿌리 채 뽑혀버리고 거기에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이 뿌리박게 되었는데, 그것은 인간에게 또 다른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 운명처럼 심겨진 사랑이 자기 사랑입니다. 예전에 하나님을 사랑하던 참된 사랑이 타락과 함께 뽑혀져 버리고 그릇된 사랑이 인간의 뼈 속까지 필연성을 갖고 뿌리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 때문에 모든 인간과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 자리에 있기를 원하고 자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고 사물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행복이 되고 하나님 자신에게도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의 근원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고통이요 자기 자신에게도 끊임없는 불행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뱀이 인간을 유혹한 것과 같이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했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처럼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그릇되게 본받음으로 큰 불행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공교롭게도 하나님을 잘못 본뜨는데서 시작합니다. 인간의 교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들 위에 탁월하게 뛰어나신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처럼 자기 스스로 뛰어나 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교만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기뻐하는 모든 인간과 피조물들에게 즐겁게 나누어 주셔도 하나님에게는 모자라는 것 없이 풍부하십니다. 인간의 사치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러한 것을 흉내 내고자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원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내일을 생각하며 절제해야 하지만 모든 것을 소비하면서도 모자라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을 흉내 내보려는 것이 사치입니다. 인간의 음란함조차도 하나님을 그릇 되게 본뜨는 것입니다. 음란함은 다른 사람들과 육체적인 접촉을 통해서 자기를 즐겁게 하고 그 안에서 큰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음란함을 통해서 둘인데도 혹은 셋인데도 잠시나마 일치를 이루어 하나인 것처럼 되어 보려는 정신작용이 음란함의 심리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이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사랑함으로 모든 피조물들을 당신 안에서 하나로 묶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그분 외에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칼빈은 자신의 기독교 강요에서 인간이 불행해지는 근원이 바로 필연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그릇되게 본뜨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이미 아우구스티누스가 칼빈보다 약 1,200년 전에 자신의 고백록 첫 장에서 언급한 내용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든지 관계를 맺지 않든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떠날 수 없고 그분과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면 떠날수록 악을 행하게 되는데 모든 악은 하나님을 잘못 본뜨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모든 것을 올바르게 본뜨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를 행복하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사랑입니다.
타락한 이후로 인간은 이렇게 자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결국 거기에는 자기가 중심이 되는 자기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고귀하게 만드신 아름다운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 가족들과의 관계, 심지어는 그리스도 안에 맺어진 교회에서 지체들과의 관계도 자기 사랑의 뿌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쓴물로 인해 더럽혀지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가장 고귀한 사랑이 자기 사랑을 벗어나지 못할 때 그 사랑은 극렬한 미움과 원망의 관계로 바뀌게 됩니다. 가족들과의 관계에서도 각자가 자기 사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랑할 사람들에게서 끊임없이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으며 아름다워야 할 관계들이 쓰라린 고통을 주는 관계로 바뀌게 됩니다.
지난 한달 동안 여러분은 가정에 관한 시리즈들을 들었습니다. 가족들과의 관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식이 부모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일평생 아파합니다. 그러면 부모에게는 무슨 이득이 있었느냐 하면 상처를 준 부모의 마음에도 가시가 가득합니다. 자식에게 뼈아픈 상처를 준 부모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가시에 찔린 어린양입니다.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고통 하지만 아내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남편의 마음이 행복에 이를 수 있었겠습니까? 어떤 극악한 악을 지닌 인간도 결국 돌아가 보면 극악한 죄로 인해 느끼는 즐거움은 잠깐이고 영혼 안에는 온갖 가시와 상처가 가득합니다. 인간은 그것을 보고 손가락질 하지만 하나님이 인간들을 바라보실 때 당신의 사랑을 떠나 그릇된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다가 상처받은 영혼들로 보입니다. 부모로부터 상처받은 자식에게도 하나님이 약이고 자식에게 상처를 준 가해자인 부모에게도 하나님이 약입니다.
IV. 그리스도 없인 사랑을 모름
모든 인간은 아무리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도 그것으로 완전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철학자들과 어리석은 종교인들은 스스로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응시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디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나타난바 되셨으니 하나님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 사랑은 찬란한 햇빛으로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연애 편지였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애인이 북쪽에 있어요. 그의 마음을 알고 싶어요.” 북풍 바람이 불 때에 아무리 코를 킁킁거리며 바람의 냄새를 맡아도 그것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점을 치거나 하늘에 높이 떠있는 별을 보고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가 마음을 모두 담은 사랑의 편지를 한통 보냈다면 그것보다 더 자기를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읽게 만들어주는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고백한 사랑의 편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며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 그 자체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을 우리 눈으로 보긴 보지만 눈부신 것 외에는 볼 수 없습니다. 눈이 부시도록 태양을 바라보면서도 눈이 부신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눈부신 사랑을 모든 인간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실 때 사랑의 특징이 무지개 빛깔처럼 찬란하게 드러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혀 예수를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눈부셔서 있다는 것만을 알뿐 설명할 수 없지만,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과 접촉하시면서 용서해주시는 것을 보고 우리는 눈부신 사랑이 본질적으로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병든 자를 차마 보실 수 없어서 그들의 헌데를 어루만지며 고쳐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섬김을 통해 직접 볼 때는 눈부셔서 그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사랑을 우리의 눈과 피부로 온 마음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에게 친절하게 진리를 가르쳐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섬기시는 모본을 통해 우리의 눈으로 차마 볼 수 없는 찬란하게 눈부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찾으러 갔던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고 자기 사랑과 허물에 빠지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직접 보아서는 알 수 없지만 이천 년 전에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지금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사랑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은 끝없이 크고 넓었건만 이 사랑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가슴이 돌과 같은 불쌍한 인간들을 위해 당신의 사랑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당신의 불붙는 마음을 보여주셨고, 종처럼 인간들을 섬기는 섬김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안에 있는 눈부신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찬란하고 눈부신 빛은 지성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에 흐르는 섬김의 땀과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면서 흘리는 눈물은 강퍅한 죄인이라도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위대한 사랑의 절정은 그리스도께서 형벌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시는 붉은 보혈의 피 속에서 나타나셨습니다. 세상의 의로운 사람을 위해 가끔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고 선한 사람을 위해 대신 죽는 사람이 있지만 하나님이신 그분이 더러운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대적하는 더러운 인간들 안에 티끌만큼이라도 남아 있는 당신의 형상을 찾아서 그들을 회복시켜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사랑을 받는 본래의 창조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동물을 닮은 욕망을 따라 사랑하고 싶은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기 싫은 것을 미워한다면 인간의 모든 불행과 영혼의 비참함은 거기에서 생겨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 앞에 참회의 눈물을 흘릴 때 선명하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했던 것들에 대한 깊은 후회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해주셨다는 감격과 나 같이 흉악하고 더러운 인간에게서도 사랑을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인간의 참된 본분은 위로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불쌍한 인간에게 흘려보내는 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그 사랑은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흐름 속으로 들어가는 일련의 사랑 안에서 인간은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되고 가장 행복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과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데 가편 투표를 하고 피 흘릴 때 그의 옷을 지키며 증인이 되었으며 대제사장의 공문을 취하여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 한마디 말씀에 사도 바울은 거꾸러졌고 그 사랑에 깊이 사로잡힌바 되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통해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위대하고 놀라운 사랑을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 안에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비밀이십니다. 알면 알수록 새롭게 발견하게 되고 발견하게 될수록 더 많은 사랑의 빛이 비쳐옵니다. 더러운 자기 자신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일평생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께 사랑 받으며 살게 됩니다. 이 세상에 그릇된 사랑 때문에 고통 받고 괴로워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다가가서 참다운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줄 수 있습니다. 세상에 매인 사랑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되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거대한 사랑의 흐름 속에서 즐거워하고 행복해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를 믿고 회심하여 삼십사오 년 정도 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도 여러분과 똑같이 사랑을 받고 싶었고 사랑하고 싶어 살아온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구도의 길에서 깨닫게 된 아주 평범한 성경의 진리가 있었습니다. 한 인간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외로움은 사랑받지 못하는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못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문제를 성경에 기초해서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지만,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미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의 참된 비전은 세상에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번영을 누리며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와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 사랑을 발견하고 이 벌레 같은 인간을 그렇게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매이는 것입니다. 가치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을 향한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큰 사랑에 감격해서 자기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없고 오직 내 안에 예수만 계셔서 그분이 사랑하고 싶어 하시는 사람을 그분 마음대로 사랑하는 도구가 됩니다. 때로는 그 사람이 내가 가장 미워하고 가슴에 칼을 품는 원수이지만 내 안에 있는 그분이 사랑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게 됩니다. 그분의 사랑이 나를 통해 흘러갑니다. 그래서 그는 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벌레 같은 나를 위해 주님이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으니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이요 티끌임을 고백하고 십자가 사랑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나는 없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사는 것은 이제 나 때문이 아니라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Ⅴ. 결론과 적용
인간의 많은 불행은 소유의 모자람이나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의 부족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과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이 끊임없이 마음에 흘러들어와 우리는 전혀 사랑할 가치가 없는 존재들이며, 일생의 자랑이 우리 안에 계신 예수뿐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하신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사랑할 때 겪는 모든 아픔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 죄 없으면서도 대신 죽으신 예수의 십자가 고난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사랑에 목이 메여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의 많은 불행과 고통, 깨어진 가족들과의 관계, 수없는 사람들에게 칼을 휘두르면서 자신도 전혀 행복하지 않은 인간들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어떤 치료책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런 인간들에게 찾아오셔서 하신 일은 채찍을 휘두르고 교도소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끌어안으신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은혜 없이는 형성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종류의 사랑을 은혜 없이 얻을 수 있겠습니까?
(찬양)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난 관계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죽음은 우리 안에 역사하고 생명은 우리의 이웃들 안에 역사합니다. 내가 한 번 더 죽어서 네가 살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힘으로 그대가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향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사랑에 있어서 불구였던 우리를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과 고난을 생각하며 기꺼이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마치 달걀이 껍데기를 깨고 바깥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한 새로운 사랑의 세계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참된 사랑입니다.
영원한 사랑 42
영원한 사랑 1 (2008.6.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 (2008.6.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3 (2008.6.29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4 (2008.7.6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5 (2008.7.13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6 (2008.7.20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7 (2008.7.27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8 (2008.8.3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9 (2008.8.10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0 (2008.8.17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1 (2008.8.24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2 (2008.9.2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3 (2008.9.2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4 (2009.2.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5 (2009.2.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6 (2009.3.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7 (2009.3.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8 (2009.3.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9 (2009.3.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0 (2009.4.19 주일오전설교)
3.사랑 없는 헌신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I. 신앙의 증거들에 대한 오해
신앙에는 항상 신앙이 있다는 증거가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신앙은 원래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증거를 통해서 신앙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사도는 이러한 신앙의 증거들에 대한 오해가 있음을 먼저 지적합니다. 그는 1절에서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니 하나님과 관계에서 받는 눈에 띄는 표징입니다. 사도는 이것이 하나님께 은사를 받은 증거일 수는 있지만 신앙의 참되고 결정적인 증거일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2절에서 예언하는 능력과 모든 비밀, 지식을 말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경험할 수 없는 신비한 체험, 신앙의 세계를 아는 수준 높은 지식들이 결코 참된 신앙의 증거일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산을 옮길만한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위대한 역사를 자랑하고 믿음의 역사를 통해서 이룬 큰일을 자신이 성취해서 얻은 무용담인 것처럼 자랑하지만 큰 믿음조차도 참된 신앙의 본질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사도는 3절에서 더 파격적인 선언을 합니다. 구제와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헌신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이 참된 신앙의 증거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자기의 유익을 위해 쓸 많은 물질을 다른 사람을 위해 주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죽음에 내어주는 헌신을 하는데도 그것이 참된 신앙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일까요?
II. 사랑 없는 헌신
이것은 방언과 신비한 체험과 지식과 큰 믿음과 구제와 많은 헌신이 사랑 없이도 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사랑이 없이 이런 헌신이 가능할까요? 엄밀하게 말하면 사랑 없이는 이러한 헌신이 불가능합니다.
요즘 자전거들을 많이 타고 다닙니다. 우리 딸도 어디에 응모했더니 자전거가 당첨되었다고 좋아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자전거 하나에 5만원밖에 안 합니다. 중국에 가니까 오토바이가 20만원밖에 안 합니다. 5만 원짜리 자전거는 비싼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살 수 있는 좋은 자전거는 한 대에 2천만 원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나타 한 대 값입니다. 그 자전거를 탄다고 해서 자동차처럼 빨리 가는 것도 아니고 택시와 부딪혀서 이기는 것도 아닐 텐데 왜 그렇게 비싼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약 25년 전에 제가 맡은 구역이 4개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구역에 구역예배를 갔는데 방에 자전거를 들여놓았습니다. 집사님이 자기 남편의 자전거가 워낙 비싸다고 하면서 150만 원이라고 합니다. 시간만 나면 자전거를 기름걸레로 닦는다고 합니다. 자전거를 사랑하니까 그렇게 합니다. 예전에 있던 교역자 중 한 분이 열린 교회에 와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 분이 쉬는 날 하는 일은 김 목사님 테잎을 솜으로 닦는 것입니다. 좋아하니까 그렇게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헌신이 안 됩니다. 칠십 평생을 무대에서 연기만 하고 살아온 어떤 배우가 팔십을 바라보면서 인터뷰를 했는데 마지막 소원을 물으니 무대에서 피를 토하며 연기하다가 죽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면 사도가 이야기하는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말은 말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에 사도의 말이 사실이라면 가능성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이 그 사랑이 아니다.” 이렇게 말해야지만 말이 됩니다. 교회에서 예의바르고 성실하고 선행을 하고 자기 맡은 일에 빈틈이 없는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참 훌륭한 것입니다. 그것이 모두 그 사람으로부터 온 것은 아닙니다.
영국에서 목회하고 계신 분이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말을 잘 들어서 목회하기가 좋다고 합니다. 영국에 유학을 올 정도니까 학교에서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큰 은혜를 받아야 가능한 일이 그 교회에서는 “잘 하십시오.” 하고 목사 선생님이 한 말씀 하면 계속 지키는 것입니다. 1부 예배 때 구멍 뚫리듯이 아무데나 앉는 것은 은혜 받아도 안 고쳐집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그러지 마십시오.” 목사 선생님이 한번 말씀하시면 집에 가면서 “우리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지.” 그리고 그 다음 주부터 그대로 지킵니다. 그런데 변화는 안 된다고 합니다. 한 때 윤리 운동을 많이 하던 한국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사역하던 전도사님을 알아서 몇 해 동안 좋은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자기네 교회에서 모든 교인이 교회의 심볼로 알고 존경하는 성도가 한 분 있다고 합니다. 평생을 세무서장을 지내신 분입니다. 그 당시 세무서장이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도 세무서장 하시던 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큰 빌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평생을 세무서장으로 지냈는데 19평 연립에 살고 청백리상도 받았습니다. 유혹을 뿌리치고 돈 한 푼 받지 않고 티 없는 공직자 생활을 하고 빈털터리로 퇴직을 한 것입니다. 그런 세무서장 출신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분이 훌륭한 공직자였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하는데 목회자의 양심으로 그분을 심방하고 대화하면서 그 훌륭한 분의 영혼이 죽어 있다고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남들이 뇌물을 받고 빌딩을 사고 집을 사고 호사하는 동안 자기가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어떤 헌신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헌신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만들어내는 모양은 아주 비슷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어떤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건물이나 토지를 감정하는 사람입니다. 기업에서 몇 십만 평되는 땅들을 가지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고 할 때 한 평에 몇 만원씩만 더 쳐주면 은행에서 몇 십억 혹은 몇 백억을 더 대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이 감정사에게 있습니다. 이 사람이 감정하러 갔더니 감정을 해야 하는 회사에서 사장이 사람을 다 물리더니 가방을 열고 낡은 만 원짜리 지폐로 1,500만 원을 내놓았답니다. 무릎을 꿇고 죽어가는 기업가 한 사람을 살려달라고 하더랍니다. 집사님께서 꼭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돈은 집어넣으라고 하면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결과는 거의 같지만 시작은 똑같지 않습니다. 둘 다 도덕적이지만 한 사람은 영혼이 죽어 있고 한 사람은 영혼이 살아있습니다. 이것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III. 죄인들이 만나는 그리스도
놀랍게도 성경을 보면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탁월했습니다. 모두 십일조를 정직하게 하나님께 드렸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매일 세 번씩 시간을 따라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마 은혜를 받아도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의 삶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도덕적이고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못 만났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나타나서 진리를 가르쳐주시니까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평생 남자에게 몸 팔던 창녀, 동족의 돈이나 후리면서 사기 치던 세리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죄 때문에 예수님을 만났다면 죄악이 가득한 도시에 타락한 술집과 유흥업소가 있는 그 곳에는 예수님과의 만남의 감격이 넘쳐야 할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은혜는 죄 때문에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는 죄 가운데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를 구원해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향한 갈망 때문에 임하는 것입니다.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예수님께서 팔복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복산에서 천국백성의 자격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들은 위로를, 온유한 자는 땅을, 주린 자들은 배부름을 받게 될 것이었지만 이 모든 것들은 천국 백성이 누리는 복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신 복은 천국 그 자체였습니다. 두 번째 복부터 나머지 여덟 번째 복은 첫 번째 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것은 뿌리가 잘린 의로운 삶, 이데올로기에 헌신하는 충실한 생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성도를 ‘하씨드’(dysij)라고 부릅니다. ‘하싸드’(ds'j)라는 동사에서 온 것인데 ‘하나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구약에서도 자기가 노력해서 성도가 된 것이 아니라 어찌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입혀짐으로서 성도가 된 사람들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성도는 사도들에 의해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아가페토이’(αξγαπητοι)라는 단어는 ‘아가페 사랑을 받은 자들이여’라는 뜻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사랑을 입은 자들이 성도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말할 때 하나님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내 안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있지요? 다른 사람은 예수에 미쳤다고 말하는데 나 자신을 곰곰이 성찰하면 내 안에 예수가 없어서 미칠 것 같은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남들이 바라보는 나와 실제 나 사이에 좁힐 수 없는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주일에 열심히 봉사하고 이런저런 일을 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갈 때 이상하게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은 공허감이 밀려오는 때는 없습니까? 이것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반석이 그리스도가 아닌 삶입니다. 참된 헌신은 반석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사랑이기 때문에 하는 헌신입니다. 참된 충성은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고난을 받으시고 충성스럽게 사셨는지를 발견한데서 나옵니다. 반석이신 그리스도의 토대 위에 서있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리스도가 반석인 사람들은 우리 교회, 내가 속한 공동체, 이런 것에 묶이지 않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쓰는 용어 가운데 제일 싫어하는 용어가 단합 대회입니다. 무엇을 단합하겠다는 것입니까? “목사님 우리 부서 단합대회 갑니다.” 부서만 단합되면 되겠습니까? 전 세계의 교회가 단합되어야지. 그런 사랑은 하나님께서 온 세계를 감싸 휘돌아 당신 안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그 사랑이 아닙니다. 성도의 시작은 하나님을 향한 노동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봉사해서 도와드려야 되는 분인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신 하나님입니다. 시작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사랑, 끝없이 넓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마음속에 부어집니다. 그 사랑이 내 안에 있는데 형언할 수 없습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은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전달해주는 것이 은사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우리 옛날 말에 개꼬리 삼년 묻어서 황모가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황모는 붓의 재료에 쓰이는 고급 털입니다. 제 기억에는 노루 털로 알고 있습니다. 한 획만 그어보면 붓의 품질을 압니다. 황모는 먹을 붓에 찍으면 털이 기름을 바른 것처럼 뭉칩니다. 가장자리에 흠집 없이 글이 써집니다. 개털은 먹을 발라도 그것을 다 토해내고 털마다 뻣뻣이 서기 때문에 그것으로 그리면 개같이 써집니다. 3년을 묻어 두어도 황모가 되지 않습니다. 본성이 변하지 않음을 이야기합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바뀌지 않은 개털 같은 인간을 은사의 도가니에 3년을 묻어 놓아도 황모가 안 됩니다. 그러나 변하게 되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은혜의 물에 담가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변화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천성을 가지고 고민을 많이 합니다. “목사님 저는 원래 천성이 대범하지 못하고 꼼꼼해서 남편을 힘들게 합니다.” “저는 말이 너무 많아서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말 잘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자연적인 은사입니다. 만약에 아론이 말을 못했더라면 모세를 수종들 수 있었겠습니까? 꼼꼼한 것도 은혜입니다. 덜렁거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적인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슬려서 그 특징들을 사용하려고 하는 악한 본성이 문제입니다. 은혜의 물에 잠기게 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꼼꼼하고 따지기 좋아하던 성격은 예수 안 믿고 변화가 안 되면 꼬치꼬치 캐고 문제를 삼는데 사용되지만, 은혜의 물에 깊이 잠기면 다른 사람들은 덜렁거리면서 지나가는 것을 꼼꼼히 챙기는 사람이 되니까 요셉같이 수종되는 사람이 됩니다. 은혜가 없는 사람이 말을 하면 마치 얼음판 위에서 자동차 바퀴 미끄러지듯이 자기도 감당 못할 말을 아무렇게나 쏟아놓고 다니며 계속 고난을 받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도저히 할 말이 없는 장소에서도 어디서 그렇게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오르는지 우리는 위로할 수 없는 사람을 위로하고 우리는 격려할 수 없는 사람을 격려합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큰 고통을 받고 괴로울 때 지체들에게서 큰 격려를 받고 사랑을 받는 것은 돈이나 떡이 아니라 말 한마디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전 본성을 바꾸어놓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이 그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만약에 나에게 참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다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광우병 사태가 나면서 어떤 사람이 분신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정의감에 불타서 그랬겠지만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렇게 온 몸에 신나를 끼얹고 죽어가는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그것도 나름대로 자기의 열정이 꽂힌 사랑이 있었을 것입니다. 미친 소고기를 먹을지도 모르는 후손에 대한 절절한 사랑보다는 국민들이 싫다고 하는데 수입하려고 하는 인간들에 대한 증오심이 불타고 있지 않았을까요? 이것이 바로 사랑의 차이입니다.
IV.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사랑에 대한 헌신
그리스도께 대한 인격적인 사랑에 기초한 헌신이 참된 사랑입니다. 말씀드린 것 같은 경우와 정반대되는 것이 스데반의 죽음입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던지는 돌무더기에 맞아서 죽어갔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사랑이 있었고 불타오르고 있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진리를 담대히 외치다가 죽어갔습니다. 그렇게 죽어가면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누구도 미워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랑이 다를 때 그 사람의 마음도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무엇이 있었습니까?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스데반이 마지막으로 했던 이 기도는 놀랍게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시던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향해 침 뱉고 채찍질하고 창을 겨누는 무리들을 향하여 기도하셨습니다. 미움과 멸시를 받으시고 죽어 가시면서도 그분의 염려는 죽어가는 자신의 육체가 아니라 자기를 죽이는 죄인들이 받을 영혼의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저희가 모르고 하는 일입니다.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분의 마음속에는 자기를 버리고 배신하며 도망간 제자들에 대한 원망도 없었고, 은 삼십을 받고 자신을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 준 가롯 유다에 대한 미움도 없었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죽이는 악한 무리들을 향한 원망하는 마음도 그분에게는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분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신 일이었고, 그분 안에 있는 사랑이 가져온 헌신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충성스러운 사람은 두 종류입니다. 두 사람의 모습은 거의 똑같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의 사랑 때문에 충성스러운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처음에는 그렇게 출발했지만 예수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성취의 욕망, 혹은 일에 대한 재미, 심지어는 목사에 대한 충성, 이런 이유들 때문에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일이 잘 될 때는 두 사람의 사이에 구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이 잘 되지 않고 고난이 올 때 두 사람은 현저하게 차이가 납니다. 예수의 사랑이 기반이 된 사람은 그 일을 하면서 고난을 받을 때 예수를 생각합니다. 많은 고난을 당할 때 자기로 하여금 이렇게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살게 한 동기가 예수의 사랑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예수의 사랑으로 이것을 극복합니다. 그런 사람도 고난이 오면 고통스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생기면 죽을 것처럼 힘들고 괴롭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 고난을 통해 자기를 그 사명으로 불러주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기회로 삼습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예수와의 더 깊은 연합 속으로 이끌려 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기반이 된 섬김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욕망은 끊임없이 우리를 움켜쥐게 만들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끊임없이 버리게 만듭니다. 욕망은 그리스도를 하찮게 여기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를 높이도록 만들어줍니다.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고 살리신 위대한 십자가 사랑 앞에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줍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내게 있는 모든 좋은 것이 그분께로부터 온 것이고 그분의 사랑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아무 가치 없는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가 사신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만들어줍니다. 이 은혜의 감격 속에서 우리 안에는 보이는 세상보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헌신하게 만듭니다. 비록 그 성과가 적을지라도 사랑은 희망이 없는 곳에서 희망을 찾아내고 그것을 위해서 헌신하게 합니다. 벌판에서 하나의 불씨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불을 켜고자 애쓰는 사람처럼 희망이 없는 동토의 땅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소망은 사랑의 친구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소망도 없습니다.
Ⅴ. 결론과 적용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참된 변화 없이 교회 생활에 길들여지고 예의 바른 섬김에 길들여지고 성실한 봉사에 길들여지는 것은 잘 훈련된 짐승과 같은 삶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이 밀려들어와서 내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요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더러운 인간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 때문에 내가 오늘 살게 되었고 기동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로 산 나는 이제는 나의 것이 아니요 예수의 것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사나 죽으나 내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은혜의 강물에 떠밀려서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그 강물에서 떠난다면 물고기가 물을 버린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목마름이 거의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 자리를 떠날 수 없다고 하면서 이 예배가 하늘나라에 가기 전 마지막 예배인 것처럼, 지옥으로 가기 전 마지막 구원을 얻을 기회인 것처럼 사생결단으로 예배를 드려본 적이 있습니까?
회심 집회 때가 되면 콩알같이 어린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달라고 회개하는 장면을 한 번 와서 보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 예배드리면서도 못 만난 하나님을 그 아이들은 한 번의 예배 속에서 만납니다. 주님은 지금도 당신의 은혜에 목마른 사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 같이 갈망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돈으로도 물질로도 명예로도 이 세상의 썩어질 사랑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목마름을 가지고 생수를 갈망하듯이 오직 주님의 은혜를 찾는 한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바리새인 같이 반듯한 사람들을 뿌리치시고 죄짓고 타락한 창녀와 같은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들의 죄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사모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4.사랑은 오래참고(1)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13:4)
I. 바울의 사랑 경험
하나님의 존재를 육신의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처럼 성도의 마음 안에 있는 사랑 자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 자체가 영혼의 힘과 경향성이기 때문입니다. 영혼도 보이지 않는데 하물며 그 안에 있는 힘과 경향을 어떻게 직접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도 안에 있는 사랑은 볼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밖으로 표출됩니다. 그 사람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이나 상황과 관련을 갖게 될 때 영혼 안에 있는 사랑의 경향성이 마음을 통해 행동으로 발산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보이지 않지만 사랑이 있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게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이는 마치 햇빛 그 자체는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프리즘을 통과하게 될 때 일곱 가지 찬란한 무지개 빛깔로 나타나는 것처럼 또한 사랑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사람 안에 사랑이 있고 없음이 드러납니다.
4절부터 사도는 사랑의 여러 특성들을 설명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등등의 특성들을 거론합니다. 이것은 각각 사랑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나타나는 효과입니다. 사랑을 파인애플처럼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파인애플을 잘라 놓으면 가운데 구멍이 뚫린 동그란 모양이 됩니다. 그것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서 합체를 해보면 파인애플 모양이 됩니다. 한 조각을 빼면 그것이 오래 참음이고 또 한 조각은 온유함이고 또 하나는 질투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랑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겸손한 것인 것처럼 그런 식의 구성을 이루면서 하나의 사랑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어떤 구성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성향이 인간 안에 있습니다. 고통스런 현실과 만나면 거기에서 오래 참음이라는 특성이 나타납니다. 거칠고 완악한 인간을 만나면 온유함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데 자기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만나면 그를 용서해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사랑 자체는 햇빛과 같아서 분석할 수 없지만 삶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사람을 만나게 될 때 그 사람의 필요에 따라서 찬란한 빛깔로 나타납니다. 이 사랑의 모양이 바로 삼위 하나님의 존재의 모양을 닮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의 놀라운 특성들을 하나하나 다 경험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랑을 어디에서 경험하여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특성들을 찬연하게 묘사해 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다메섹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는 사랑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바울의 사랑 경험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키가 작고 이마가 튀어나오고 목이 짧고 광대뼈가 불룩 나온 못생긴 사람이었고 말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확신과 신념에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자부심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서 피 흘리며 죽는 광경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켜봤던 표독스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지금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하나님 대적하는 이단의 괴수 정도로 생각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씨를 말리는 것이 하나님께 잘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죽은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율법대로 형벌을 받은 것이라고 굳게 확신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분명히 살아있는 예수였습니다. 이 사람 속에 큰 혼란이 오게 되었습니다. 이제껏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보면서 율법을 따라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믿었는데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아난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필멸할 인간이 죽음을 보지 않거나 죽음에서 하나님께 들리움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특별한 인정을 받고 있다는 표였습니다. 에녹이 그랬고 믿음의 사람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이 사람은 저주를 받아서 나무에 매달려 죽은 예수와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사랑하셔서 다시 살려내신 예수 둘 사이에서 신학적인 설명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의 죽으신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이었고, 그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하나님이 가상하게 여기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인정하셔서 하나님이 죽음에서 살려주셨다는 것이 그의 신학적인 깨달음이었습니다. 의롭고 흠 없으신 그분이 더럽고 비천한 인간들을 위해 대신 죽으시게 한 것은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놀라운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 사랑은 삼위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삼위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의 지상 생애와 그분의 인격 안에서 경험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발견하게 된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 일생을 살 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중에는 옛날 자기처럼 짐승과 같은 인간들도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사도 안에 있는 사랑은 찬연한 빛을 발하였고, 연약한 인간으로서 그 빛을 발하지 못하게 하는 자기 사랑과도 싸우며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의 특성이 무엇인지 조금씩, 조금씩 배워갔던 것입니다.
II. “오래 참음”이란
많은 특성들 가운데 사도가 제일 먼저 꼽고 있는 것은 오래 참음이었습니다. 원래 그 사람의 자연적 성품은 오래 참는 성품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거칠고 막된 성격의 사람이었으며 참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오래 참음이 무엇인지를 배워가야 했습니다. 이 사람의 회심하기 전의 성품은 회심하고 사도가 된 이후에도 불쑥불쑥 나타납니다. 사울이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아무도 그의 회심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에 악명이 높은 유대교 신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사도 바울의 회심을 진실하다고 증명해준 보증인이 있었으니 바나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한사람으로 저명인사였습니다. 그런데 후일 전도여행을 떠나는 문제를 가지고 바나바와 함께 심하게 다투고 갈라서게 되는데 이것은 사도 바울이 은혜가 떨어져서 발휘된 옛날 포학한 기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시간이 흐르고 보니 바나바와 바울이 의견이 갈라졌지만 바나바의 말이 맞았습니다. 또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밥을 먹다가 유대인들이 오니까 안 그런 척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불붙은 확신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순식간에 열을 받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면으로 볼 때 바울은 베드로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자신이 학식에 있어서는 베드로보다 뛰어나다고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교회의 지도자였으니 바울의 그러한 면책은 베드로의 리더십에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겠습니까? 아마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판단이 흐려져서 그런 행동을 했겠지만 바울은 조용히 그를 권면하고 복음의 참된 의미를 일깨워 주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은혜가 떨어지고 열 받았을 때 나타난 옛 사람 사울의 사랑 없는 성품이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어 일생을 사는 동안에 끊임없이 맞닥뜨리게 된 사랑의 특성은 바로 오래 참음이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지상의 생애는 바로 오래 참음의 연속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참는 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참는 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기 안에 있는 자연적인 성향과는 반대되는 일이지만 그 일의 가치를 확신하고 고통을 견디면서도 원래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을 가리켜서 참는다고 합니다. 타락한 죄인들이 향락을 즐긴다고 말하지 향락을 참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병원 침대에 10시까지 허리가 아프도록 누워있는 것이 참는 것이 될 수 있지만 게으름뱅이가 10-11시까지 침대에 누워있는 것은 결코 누움을 참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참음은 어떤 높은 가치 때문에 자기 안에 있는 성향을 이기고 그것을 이기기 위해 투쟁하고 감내하면서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참고 싶은 데까지 참는 것은 진정한 참음이 아니며 참을 수 있는 데까지만 참는 것도 진정한 참음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III. 참음이 필요한 이유
그러면 오래 참음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다른 사랑이 이 세상에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A. 사랑의 정의
우리가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깊이 뉘우치게 될 때에 하나님은 숙명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자기 사랑을 뽑아 파괴하시고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을 심으십니다. 예전에는 나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내 인생의 참된 기쁨이요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의 주관대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치 늪에 빠진 사람이 헤어 나오기 위해 몸부림칠수록 몸과 늪 사이의 간격이 생기며 깊이 빠져들어 가는 것처럼 자기 사랑의 굴레 속에서 숙명적인 불행을 경험하며 살던 것이 자신의 인생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그는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마음으로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아직 그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지만 자신은 각각 따로 존재하기에 하나가 아닙니다. 중심이 하나님이라고 할 때 그것은 하나이지만 중심이 자신이라고 할 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바로 세상입니다. 예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힌 사람들을 하나님이 파송하셨을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맞닥뜨려야 될 세상은 무수한 자기를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들 모두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사랑은 가만히 있지 않고 확대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행복 하고 싶어도 함께 사는 아내가 죽을병에 걸리거나 고통을 받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십여 년 전 어느 날 밤에 방배동에서 건널목을 건너는데 트럭에서 장미를 팔아서 세 단을 달라고 하니까 아저씨가 실실 웃으면서 “아저씨, 사모님께 무엇을 잘못했어요?” 그러면서 건네줍니다. 잘못하긴 무엇을 잘못합니까? 내가 좋아서 사 가지고 가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자기가 아무리 행복하려고 해도 아내가 행복해야 자기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데 꽃을 사가는 모양입니다. 그것이 아내 사랑입니까? 자기 사랑입니까? 자기 사랑의 확장된 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만 생각을 바꾸어서 사랑을 해도 세상에서는 박수칩니다. 그것도 안하는 인간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무리 확대해도 참된 사랑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엄청난 철학적인 변론입니다. 여러분에게 이해하기 쉽게 찬찬히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기만 행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내가 병들면 안 되고 아이들이 공부를 못해서 빌어먹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도 돌봅니다. 이것이 가족애입니다. 이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가족이 아무리 똘똘 뭉쳐서 행복하게 살아도 나라가 외적에게 침입을 받아서 전쟁이 일어나거나 경제가 나빠지거나 부패한 인간들이 권력이 쥐고 흔들면 안 됩니다. 나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확장된 것이 애국심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랑의 동선이 확장되어가는 것입니다. 사랑의 동선이 확장되어 갈수록 고상한 사랑이 됩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큰 재난이 있었을 때 혼자 살지 않고 모든 가족을 데리고 피난 간 사람보다는 나라가 백척간두에 섰을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가족의 목을 모두 베고 전쟁터로 나간 계백 장군의 기상을 더 높이 샀던 것입니다.
사랑의 동선이 확장되어 갈수록 그 사랑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아주 고상한 사랑이 되고 안으로 좁혀 들어와서 아주 좁혀 들어오게 될 때 그 사랑은 점점 더 추악한 사랑이 됩니다. 가족들조차도 돌아보지 않고 저 혼자 벌어서 먹고 쾌락을 즐기고 자기 밖에 모르고 살면 가장 비루하고 타락한 인간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죄 중에서 음란이나 육체의 타락에 빠지는 것을 경고하는 이유는 이 사랑은 아예 동선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서 도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자기를 우상 삼는 타락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개방의 물결이 번지면서 성에 대한 관심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인간이 즐길 자유가 있고 이것을 억압하는 것은 비인간적이라고 하는 이 세상의 사상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 사람을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자기 자신의 영혼도 아니고 육체 하나만을 우상처럼 떠받들고 그것에 봉사하는 것이 음란이고 성적인 타락입니다. 가장 극단적으로 사랑의 외연이 안으로 오그라들어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런 사랑을 비롯해서 다양한 종류의 원주를 가진 사랑이 세상에 무질서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난 다음에 즉시 들어온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비유를 하면, 큰 호수에 가운데 돌멩이가 떨어지면서 질서정연한 아름다운 파문이 넓은 호수에 번져가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크고 작은 돌멩이, 흙, 먼지들을 쏟아 부어서 무질서한 수천만 개의 파문들이 이 세상에서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고통은 그런 잘못된 질서 때문에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B. 예수 사랑은 새 질서임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랑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지금은 사라져버린 하나의 큰 파문으로서의 하나님 사랑을 그 안에 가지고 나아갈 때 수많은 사람의 간섭을 받게 됩니다. 간섭하는 사람의 충돌은 모두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사랑의 질서를 그리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질서인 예수의 사랑을 가지고 그들에게 찾아가면 갈등과 고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폭력과 부패, 갈등과 미움, 원망과 시기 이런 것들이 왜 일어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가 원하는 질서대로 움직이지 않는 또 다른 사람의 질서와 맞닥뜨리게 될 때 생겨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사랑이 있고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게 될 때 그 사랑은 우리 마음속에 힘이 됩니다. 우리 안에서 그런 사랑의 질서가 이룩될 때 사랑의 질서가 우리 안에 머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이 사랑의 질서가 나와 관련된 삶의 현실 속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비유를 들면, 깨끗한 사람은 깨끗한 장소에 있고 싶어 합니다. 마음의 성향이 청결한 사람은 깨끗한 곳에 있고 싶어 합니다. 지저분한 곳에 불편함 없이 뒹굴고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은 성향적으로 청결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 마음 안에 있는 성향과 자기가 놓인 환경 상태가 유사할 때 인간은 마음이 제일 편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사랑은 우리 바깥에서도 실현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마음으로 예수님을 아주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면 내 삶속에서도 예수님이 소중하게 여겨지고 나와 관계를 맺은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예수님이 소중하게 여김을 받으시길 원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마음으로 기뻐하면 나의 삶속에서도 그런 기쁨에 넘치는 생활이 되길 원하고 다른 사람도 예수님을 기뻐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하찮게 생각하거나 예수님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슬퍼지고 마음에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입니다.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지역에 가서 예수의 복음을 들고 전합니다. 피도 살도 섞이지 않는 이방 사람들에게 섬김과 봉사로서 예수를 전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도 우리처럼 예수를 알고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어차피 누군가가 그 복음을 전해 주었기 때문에 예수를 알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예수님의 사랑은 약하지만 이 세상에서 자기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완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사랑을 따라 살아가면서도 이것이 돌멩이에 계란을 던지는 것 같이 무모한 일이라고 느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랑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게 됩니다. 단절적인 사랑과 교통하는 사랑입니다. 자기가 중심이 된 사랑은 그것을 아무리 확대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중심이 자기를 위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아무리 이것을 확장해도 다른 사람과 다른 차원에서 부딪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사랑을 확장해서 내 가족을 매우 사랑합니다. 이 가족애는 나의 가족의 행복과 관련된 또 다른 사람의 가족애와 충돌하게 됩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사랑을 더 확장해서 내 나라를 끔찍이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나라를 끔찍이 사랑하는 다른 사람과 맞닥뜨리게 될 때 그것은 투쟁과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개교회주의 같은 것이 그런 것 아닙니까? 사랑의 중심이 예수에게서 시작되었으면 모두 한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시작이 ‘나’이면 우리 교회에 대한 탁월한 열심은 또 다른 교회에 중심을 박고 자기 사랑을 확장한 사람과 부딪히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칭찬받지 못할 추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사랑은 아무리 이것을 확장해나가도 끊임없이 사람들과 단절을 이루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열심 없는 사람들이 교회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려고 해도 힘이 있고 기력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도 한주 나오고 한주 빠지고 하는 사람이나 설교할 때 들어와서 축도 끝나기 전에 나가는 사람이 교회의 무슨 문제를 일으키겠습니까? 이미 존재 자체가 문제입니다. 사람이 일꾼으로 세워졌으면 자기가 맡은 일들을 사랑하는 것이 미덕입니다. 그런데 동기가 예수가 아닙니다. 그래서 남전도회를 끔찍이 사랑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여전도회와 부딪힙니다. 식당을 서로 쓰겠다고 싸웁니다. 좋은 예배실을 서로 쓸려고 싸웁니다. 이런 사랑을 사적인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이것을 단절하는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어 확장된 사랑은 겉으로 표방하는 목표가 아무리 고상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끊임없이 사람들과 단절을 불러오게 됩니다.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사랑에 깊이 빠질수록 끝없이 고독해집니다. 이것이 사랑의 역설입니다. 아무리 자기를 칭찬하고 쓰다듬어주어도 자기 사랑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단절하게 만드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자기를 사랑하라고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를 사랑해서 인간은 참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나를 어떻게 잘 사랑해야 할까?’ 이런 것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알면 거기에서 자기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 지를 배우게 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배우지 못합니다. 자기를 잘 사랑함으로 하나님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불가능한 길입니다.
반면에 교통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사랑입니다. 나를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으므로 예수 사랑으로 돌아갈 때 예수는 나의 예수일 뿐만 아니라 너의 예수이고 우리의 예수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예수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우리 모두가 만나고 예수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처럼 예수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모든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교통하는 사랑이 됩니다. 그 교통이 얼마나 놀라운지 예전에는 내 가족만을 사랑했는데 내가 예수를 사랑하게 되니까 상관이 없는 사람들의 가족도 사랑하게 됩니다. 예전엔 내 나라밖에 모르는 애국주의자였는데 예수의 사랑으로 돌아가고 나니까 이방인들, 불교를 믿는 사람들,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내 관점에서는 그를 사랑하지 않지만 내가 돌아간 예수의 관점에서는 그들도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될 정도로까지 사랑의 외연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원수라는 개념은 나를 중심축으로 삼았기 때문에 등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서 중심축을 옮기고 나니까 원수 또한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여기 있을 때는 아무리 나의 사랑의 원을 확장해도 원수는 원수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고 나니까 원수도 하나님에게는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그렇게 사랑의 대상이 확장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사랑은 세상 속에 이런 질서를 새롭게 구축하기 위해 진리와 성령으로 우리에게 부어진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해서 저들의 영혼과 지성을 일깨워 참된 중생과 회심에 이르게 해야 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을 다 내어주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아직까지도 우리를 이 세상에 남겨두신 주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기쁨과 행복이 우리에게 넘칩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이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찬양)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와 나 항상 동행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하신 큰 이유였던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가치는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이 세상에서 즐겁게 사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반딧불처럼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망가진 세상에 하나님의 질서를 다시 펼치는데 내가 얼마나 이바지하고 죽었느냐에 인생의 참된 가치가 달린 것입니다.
C. 고난의 사랑과 구원의 지혜
그런데 여기에 아주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고난의 사랑과 구원의 지혜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하고 참된 사랑은 그 자체 안에는 어떠한 고통이나 괴로움이 없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영원한 세계 안에서 성자가 성부의 속을 상하게 한다든지 성부가 성자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버린다든지 성령이 불효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진다든지 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시간 세계 속에서, 특별히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타날 때는 큰 고통과 함께 그 사랑이 나타나게 됩니다.
쇳덩어리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어떤 오물도 붙어있는 것 같지 않은데 뜨거운 불에 쇠를 달구면 쇠에 달라붙어 있던 쇠가 아닌 것들이 먼저 타기 시작합니다. 쇠는 1,250℃에 녹지만 다른 물건들은 그보다 낮은 온도에서 녹아버립니다. 쇠를 태우는데 나무를 태우는 불길이 일어나면서 거기에 달라붙어 있던 오물들이 타오르게 됩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찬란한 사랑이 죄인들이 있는 이 세상을 비취게 될 때 타락한 죄인들과의 만남 속에서 이 사랑이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순간 그것은 그분께 큰 고통이었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분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모욕과 핍박을 받으시고 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모든 인간들을 사랑하셨지만 이 세상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이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세계 속에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순간부터 사랑은 반드시 고통을 동반한 것이며 희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질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는다는 것 자체는 형벌입니다.
교회에서 예수 믿는 사람 둘이 혈기로 대판걸이 싸우면 누가 이깁니까? 은혜 떨어진 사람이 이깁니까? 은혜 많은 사람이 이깁니까? 은혜 많은 사람이 개망신을 당합니다. 좇아가서 잘못했다고 빌어야 합니다. 저 사람은 은혜가 별로 없어서 한 달, 두 달 회개 안하고도 넉넉히 살 수 있지만 나는 혈기로 한 번 대판걸이를 했는데 저녁 때 집에 들어오니까 괴로워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다시 화해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치고 이 세상에서 신선처럼 살다간 사람이 없습니다. 어그러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는다는 것은 육적으로 볼 때는 형벌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런 고난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 이 세상의 인간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를 3주에 걸쳐서 설교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어떻게 해서 이 사랑이 오래 참을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당신의 십자가 사랑을 알고 구원을 받은 신자들이 수많은 불완전한 지체들과 함께 교회 안에서 살며 그들을 사랑하게 될 때 당신이 경험한 것과 똑같은 사랑의 희생과 고난을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내가 사랑할 적마다 예수의 사랑을 생각나게 해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은혜를 받았지만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고 살 때는 몰랐는데 내게 있는 사랑이 시키는 대로 나보다 약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의 잘못된 사랑의 질서를 끊임없이 견디면서 내 안에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질서로 그에게 영향을 미치고자 할 때 고통스런 과정들을 통해 예수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끝없이 사랑을 해서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신자라 할지라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선한 것이 자기에게는 전혀 없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고백으로 받아 내시면서 또한 그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의 사랑과 구원의 놀라운 지혜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을 하는 자는 하나님을 안 것이며 하나님을 알았다 하더라도 만약에 하나님의 사랑을 안 것이 아니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안 것이 아닙니다.
입을 벌려 배우지도 않은 외국어로 방언을 하고 천사의 말을 하기 시작할 때 신비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을 높은 신앙의 경지에 이른 사람처럼 부러워할 것입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미래의 일을 예언하고 신앙의 신비한 세계를 파악하면 거기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들은 다른 신처럼 보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의 지식을 꿰고 많은 신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을 때 무지한 사람들은 그의 입을 보면서 존경을 표할지 모릅니다. 자신의 몸을 용기 있게 불사르게 내어주고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서 구제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대단하게 여기겠지만 그가 사랑을 모른다면 이 모든 것들은 그가 하나님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오직 신자의 신자 된 참된 표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랑을 경험하고 싶다고 말하는 지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은 태만한 삶을 통해서는 경험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사랑은 가시에 찔린 사랑이기 때문에 가시 같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를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에 태어난 운명인 것처럼 그는 살게 하고 자기는 죽으려고 하는 인내 속에서 십자가의 가시 돋친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분의 사랑은 채찍에 맞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가 피 뿌리신 복음을 위해 박해를 받을 때 우리는 그 고난을 통해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는 사랑, 그분은 병들고 우리는 나음을 입은 십자가의 사랑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머리나 손, 발만 따라가고 돈 든 지갑만 따라가는 신앙이 아니라 전 존재가 따라가는 신앙입니다. 그 안에서 예수의 사랑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를 위해 오래 참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면서 우리의 참음이 아직 멀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매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요 우리가 당하는 괴로움도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가 찬란히 드러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 우리가 오래 참는 사랑을 보여줄 수 있게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이런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어서 오래 참았더라면 지금은 원수 맺은 사람들과 함께 손잡고 예수 안에서 사랑하고 사셨을 것입니다. 만약 지금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에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그때도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나는 다만 용서받은 흉악한 죄인에 불과하고 나의 나 된 것은 예수의 은혜일뿐이라는 고백이 있었더라면 지금은 가슴에 원한을 맺고 헤어진 가족들과 수많은 동료들, 사랑하도록 부름은 받았으나 그들의 가슴에 못 박고 내쫓아버린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예수 안에서 살고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는 것입니다. 참음은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의 빚진 자로서 이제는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데서 비롯되는 참음입니다.
영원한 사랑 42
영원한 사랑 1 (2008.6.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 (2008.6.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3 (2008.6.29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4 (2008.7.6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5 (2008.7.13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6 (2008.7.20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7 (2008.7.27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8 (2008.8.3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9 (2008.8.10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0 (2008.8.17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1 (2008.8.24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2 (2008.9.2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3 (2008.9.2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4 (2009.2.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5 (2009.2.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6 (2009.3.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7 (2009.3.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8 (2009.3.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9 (2009.3.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0 (2009.4.19 주일오전설교)
5.사랑은 오래참고(2)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13:4)
I. 사랑에 대한 두 이해
지난 시간에는 바울이 이런 사랑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와 오래 참음이란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왜 이런 오래 참음이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삶속에 있어서 필요한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이 어떤 성질의 사랑이기에 그 사랑은 사람들을 향하여 오래 참는 특성을 드러내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는 사랑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질에 대한 답에 있어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과 세상에서 배운 교훈 사이를 오고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런 사변의 능력이 현저히 부족한 사람들 속에는 복음 진리를 규명하는데 기반이 되는 개념들이 혼돈을 일으켜서 올바른 진리를 바로 붙잡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이해하는 일반적인 사랑의 개념은 대부분 정태적인 개념입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그것을 자기의 자산처럼 마음에서 활용하며 그것으로서 남을 사랑하는 개념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또 신자라 할지라도 이런 사랑의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해석하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계좌에 입금되듯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는 그것들을 자원으로 삼아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선을 베푸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야기하는 신자 안에 있는 까리따스의 사랑의 개념과는 전혀 낯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내리는 성경적 사랑의 개념을 염두에 두시면 이후의 성화의 삶, 특별히 사랑에 관한 교훈들을 이해하는데 좋은 빛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II. 그리스도 사랑의 역동성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성경적인 사랑의 개념은 정태적인 개념이 아니라 훨씬 더 역동적인 개념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방앗간에 가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는 물레방아가 있었습니다. 방앗간에 들어서면 한쪽에서는 푹 파인 절구 같은 곳에서 곡식들이 찧어지고 있고 그 곡식을 찧는 공 서너 개가 아주 바쁘게 상하 운동을 하면서 움직입니다. 한 구석에는 그것으로 모자라기 때문에 디딜방아가 있어서 한 아낙네는 디딜방아를 찧고 또 한 아낙네는 그 방아에다가 곡식을 계속 밀어 넣는 일들을 했습니다. 방앗간에 들어선 사람은 부지런히 절구 공이가 상하 운동을 하고 곡식들, 고추가 빻아지는 과정을 보면서 그 자체에 큰 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힘은 절구 공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방앗간 바깥에 있는 커다란 물레방아에서 나온 힘이 피댓줄을 통해 전달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좀 더 추적해가면 물레방아 자체가 스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물길을 타고 내려오는 물이 폭포수처럼 떨어지면서 그 물의 힘으로 물레방아를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똑같이 그리스도인의 마음 안에 있는 이 사랑의 작용도 이와 유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 안에 있는 그리스도 사랑의 역동성입니다.
A. 새 생명의 원리와 성령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생한 신자 안에 심겨진 생명의 원리와 성령의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중생하고 회심하기 전에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사람이었다고 불립니다. 에베소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들”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본질적으로는 악한 영들이 역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영혼의 상태에서 그들은 죄와 사망의 법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망의 법이라는 것은 죽음의 원리를 가리킵니다. 죽음의 원리라고 할 때 이 죽음은 영혼의 죽음을 뜻합니다. 육체의 죽음은 생명의 박탈이고 소멸이지만 영혼의 죽음은 그런 종류의 소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작용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죽은 육체는 행실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망한 몸은 동작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은 영혼에는 죽은 행실이 뒤따라 다닙니다. 그것을 성경은 'dead works'(죽은 행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즉, 죽은 영혼이 살아있는 육체를 통해서 행하는 모든 육욕적인 삶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망의 원리가 물레바퀴라면 죄는 그 물레바퀴를 돌리는 물입니다. 그 물이 물레바퀴를 돌리면서 방앗간 안에서는 수없이 많은 죽은 행실의 곡식들이 빻아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적극적으로 원하지 않아도 넘치는 욕망과 죄의 영향을 받으면서 모든 정신의 작용과 행동, 삶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의 빛에서 멀리 떠나 있었던 죄인 된 우리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복음을 듣게 하십니다. 그 영혼을 중생과 회심을 통해 다시 태어나게 하실 때 외모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지만 내면의 세계에서는 재창조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상상할 수없는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죄와 사망의 법을 허물어뜨리시고 생명과 성령의 법을 심으십니다. 아까는 사망의 원리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생명의 원리를 심으십니다. 법은 곧 원리입니다. 객관적인 규범으로서의 법을 이야기 할 때는 자기 바깥에 있는 규칙을 말합니다. 그러나 실효적인 힘으로서 법이라고 말할 때는 인간 자신 안에 있는 필연성과 실효적인 힘을 말합니다. 그 법은 사람의 본성 안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술꾼이 술을 마실 수밖에 없도록 느끼는 강제력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처벌하겠다는 자신 밖에 있는 객관적인 규칙이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술을 좋아하는 자기 안에 있는 성향이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법이 중생과 함께 신자 안에 심기게 됩니다. 그 법을 생명의 법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인간이 거듭나면서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상태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영향을 받을 수 있도록 그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좁은 의미의 영생이라고 부릅니다. 영생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의 교통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생의 본질입니다. 생명의 법이 그에게 심겨지면 사망의 법이 심겨진 사람이 사망의 죽은 행실의 열매 맺듯이 그는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선한 삶입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 심겨진 생명의 법은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게 하고 순종하게 하는 내적인 원리이지만 우리에게 심겨지기만 하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독립적인 원리는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작용할까요? 내주하시는 성령님, 우리가 예수를 믿고 중생할 때 우리 안에 오셔서 떠나지 아니하시는 성령님은 우리 안에 심겨진 법은 아닙니다. 성령님은 성령님이고,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심으신 법은 법입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생명과 성령의 법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움직이고 역사하는 법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법을 심으셨다고 해도 성령이 우리에게 떠나가신다면 그 법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망의 법이 물레바퀴라면 죄가 물이 되어서 그것을 돌리면서 죽은 행실이 나오듯이, 생명의 법이 물레바퀴라면 성령의 은혜가 물처럼 흘러서 생명의 법이 작동하여 온갖 선한 행실들을 맺게 됩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생명의 원리를 심으실 때 그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우리 속에 심으신 사랑의 원리이지만 끊임없이 신자의 영혼 안에서 역사하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작용을 통해 발휘되게 됩니다.
B. 십자가 사랑의 현재화
우리가 맨 처음 구원을 얻을 때 처음으로 십자가의 사랑을 아주 선명하게 경험합니다. 이제까지는 온 우주의 중심이 ‘나’라고 생각했고 최고의 가치는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이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모든 불행이 나를 주인 삼으며 살아온 것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거기에서 자기가 깨뜨려지고 자기를 신뢰하고 믿고 의지하고 사랑했던 모든 것을 버리게 되고 비로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예전의 내 마음 속에 다가왔던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이 내 속에서 현재적으로 재현되는 은혜의 경험이 지속될 때 계속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주님이 나의 전부라고 고백하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내게 큰 고통과 상처를 준 인간이 있습니다. 그를 뼈 속 깊이 원한을 품고 원수처럼 미워했습니다. 그런 일이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깊이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나 뿐 아니라 내 원수를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이 녹아 내렸습니다. 수 십 년 동안 가슴에 묻어 두었던 피 묻은 칼을 내려놓고 그를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렇게 그를 용서하고 사랑한 사람이 다시 용서한 사람을 미워하고 원수처럼 생각하게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때 많은 신자들은 혼란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진실에 관한한 과거를 믿지 않고 현재를 믿는 습성이 있습니다. 현재 자기가 느끼는 감정이 더욱 현실적이기 때문에 과거의 기억과 현실의 경험이 모순을 일으킬 때는 현재의 편을 듭니다. ‘현재 저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이 진실하고 현실적인 것이고 부인할 수 없는 것이라면 과거에 그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랑했던 것은 잘못된 경험이었다. 혹은 진실성이 없는 경험이었다.’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용서하고 그를 깊이 사랑한 것도 진실이었고, 지금 다시 그를 원수처럼 미워하고 있는 것도 진실입니다. 사랑은 마치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계좌에 입금시키시듯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우리가 소유하고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주셨어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가 누구이고 어떤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는지를 가르쳐주시는 현재적인 사랑의 경험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만 그 사랑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행한 많은 선행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선행을 행한 것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작용으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역동적인 흐름을 통해서 비로소 사랑의 수많은 특성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C. 사랑 - 오래 참음의 동기와 목표
그 특성 가운데 가장 현저하고 탁월한 것이 오래 참음이라고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오래 참는 것만큼 그 사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 사랑의 작용의 진실됨을 입증할 수 있는 특성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은 오래 참음의 동기이기도 하고 오래 참음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구원을 받은 후에 구원 전파의 사명을 받고 일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신명을 바쳤습니다. 그에게 돌아왔던 것은 영광이나 존귀와 아름다운 평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돌아온 것은 멸시와 욕과 핍박이었고 만물의 찌끼처럼 여김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머리 둘 곳 없는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를 뒤따라가는 시련과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때 그가 참을 수 있었던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오늘은 힘들지만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질 거야.’라고 하는 낙관적인 인생관이 오래 참음의 동기였을까요? ‘지금은 고난을 받지만 나중에는 이 세상에서 축복을 받을 거야.’라는 비전이 주는 희망이 고난을 감내하게 만드는 이유였을까요? 아닙니다. 그로 하여금 오래 참게 하는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큰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고 하였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것, 다른 사람이 받지 못한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을 통해서 받게 되었다는 사랑의 경험이 오래 참는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오래 참는 이의 목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오래 참는 마음이 결국은 하나님께 더 많은 사랑을 받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자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자리에서 오래 참다가 어느 한순간에 참기를 거절해 버릴 때 우리는 한순간의 영혼에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주님이 맡겨주신 그 사명의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올 때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의 친밀한 교제로부터의 소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럴 수 있을 정도의 영적인 상태가 되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원함, 거리감이 충분히 느껴지고 있습니다.
III. 오래 참게 하는 사랑
A. 은혜의 지속적 시여
오래 참게 하는 것이 사랑의 특성이기 때문에 누구도 오래 참음 없이는 자기가 참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신자로 하여금 고통 가운데서 오래 참게 하심으로써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이 특성을 드러내실까요? 그 대답은 은혜의 지속적인 시여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전가되었고, 신자의 마음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사랑의 성향을 만들어냅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모든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친절과 사랑을 드러내게 되고 이것이 바로 신자의 외적인 삶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삼위일체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신자인 우리의 영혼 속에 끊임없이 역사하고 성령의 역사는 우리 안에 이미 심겨진 생명의 법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해서 마음 안에 사랑의 작용이 이루어지도록 만듭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나에게 커다란 상처와 고통을 준 사람조차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용서하고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한번 물 붓듯 부어진 사랑 그 이상의 것이니, 이는 그 사랑의 경험과 함께 끊임없이 우리 마음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 안에서 역동적으로 역사하는 사랑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에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 점을 가지고 깊은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답을 못 얻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어느 곳에서는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한 번에 확 부어져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로잡아 사랑하게 하는 것처럼 묘사되고, 어떤 곳에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연단되고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 인도되어서 자기 안에 샘솟듯 솟아나는 것 같이 묘사됩니다. 이 둘을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여러 달을 고심하다가 결국 신학적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신자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 사랑에 관한 중요한 신학적인 질문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해서 진지하게 천착하고 답을 내려고 했던 신학자들은 지극히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깨닫게 된 것은 이 두 가지 사랑의 형태는 각기 독립되어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법과 내주하시는 성령의 작용이라는 두 사실 안에서 하나의 통합을 이루며 신자 안에서 경험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신학적인 깨달음의 일부를 고린도전서 13장 4절을 기초로 여러분에게 나눠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말했을 때 그가 신자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랑의 작용에 대해 상정하고 있던 바였던 것입니다.
B. 하나님 사랑에 대한 경험의 핵심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사랑에 대한 신자의 경험의 핵심은 죄에 대한 용서입니다. 죄에 대한 용서가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과 큰 힘을 깨닫게 해주는 수단이 됩니다. 성경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넘침은 곧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의 넘침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축복은 일반 섭리의 복과 영적인 복으로 나누어집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고 돈을 많이 벌고 얼굴이 잘 생긴 형제를 만나고 제 때에 시집가는 것들은 일반 섭리의 복입니다.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간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오래 가슴에 새겨지지 않고 곧 잊혀집니다. 그러나 영적인 축복은 하나님이 직접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영혼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축복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영적인 복이라고 부릅니다. 영적인 복의 대표적인 것이 용서입니다. 이 용서는 하나님이 일반 섭리의 작용을 통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 앞에 죄를 짓고 번민하며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고 구원을 앙망하는 영혼의 소동을 잠재우고 거칠어진 영혼에 은혜의 기름을 바르는 하나님의 섭리의 직접적인 작용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신자는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 사무치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탁월하게 사랑한 인물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던 여러 인물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죄에 대한 심오한 용서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에 대한 심오한 용서의 경험은 영혼 안에 직접적으로 당신의 임재의 영향력을 행사하시는 성령의 작용이기 때문에 잊혀질 수 없는 깊은 인식을 우리 마음 속에 가져다줍니다. 용서의 경험의 핵심은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지극히 비참하고 더러운 인간 자신을 죄에서 놓임을 받게 해주신 사죄의 은총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뚜렷하게 가슴에 새겨집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된 후에 복음을 위하여 살았지만 이 세상에서는 복음을 위해 헌신하며 산 것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고난과 시련, 핍박과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거의 예외 없이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본래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몹쓸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사죄의 경험, 구원의 경험 속에서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 안에서 처음 은혜 받을 때 불현듯 한번 떠올랐던 신비한 경험이 아니라 백발의 노사도가 되고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말년에까지 매일매일 되풀이 되었던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찬양)
이 세상 날 버려도 난 관계 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 뿐이랴
단지 용서해주기만 하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 복수하지 않겠다는 의사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신 후에 우리를 당신의 품으로 뜨겁게 불러들이셔서 용서 받기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가 단지 과거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사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죄를 넘어서 그 이상의 사랑의 관계 속으로 우리를 불러들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 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죄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영혼에 어둠이 오고 스스로의 존재를 지탱하는 것조차 힘겹게 느껴질 때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듣게 됩니다. 그 사랑의 마음에 녹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큰 사랑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타났고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자비의 나타남이기 때문입니다. 가치 없는 나 같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흠 없고 의로우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까지 온 힘을 기울여 자기 사랑의 질서를 파문으로 그리는 보람에 살았던 사람이 이것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었음을 깨닫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접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는 없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셔서 사랑의 물결을 일으키실 때 출렁거리는 사랑의 파문의 물결에 속한 한 방울의 물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며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한때 주님을 만났지만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마치 수많은 거울들이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빛을 발할지라도 태양이 빛을 잃어버리면 빛을 반사할 수 있는 거울이 무용지물인 것처럼, 끊임없이 공급되는 주님의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서 사라지게 될 때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경험했던 뜨거운 용서, 그 큰 사랑, 자기 겸손의 모든 고백들은 빛을 뿜어내지 못하는 거울과 같이 됩니다. 사랑은 한순간의 격렬한 감정적인 체험이 아닙니다. 더욱이 자기 안에 일어나는 감정의 고조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의 분량의 척도로 삼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무모한 판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자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까리따스의 사랑은 공동체의 삶의 지평 속에서만 입증될 수 있다고 단언하였던 것입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순간의 감정은 격렬하지만 충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삶속에서 끊임없이 발휘되는 오래 참음의 특성은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지 아니하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사랑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몰라도 공동체의 삶의 지평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 오래 참는 사랑의 특성이 발휘되는 것을 보시며 그 안에 있는 사랑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것은 어느 한순간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적인 삶속에 끊임없이 재현되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경험을 통해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 역동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지속적인 영향에서 형성되는 성향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심겨질 때만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심겨진 후에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존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소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날 뿐 아니라 은혜의 지속적인 영향의 작용 아래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사랑의 특성들이 우리의 삶속에서 찬란하게 발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이 의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여정에서 때로는 본받고 싶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우리는 경험해 본적이 없는 놀라운 영적인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도 만납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서 우리가 주눅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천사의 말을 하고 사람의 방언을 할지라도 우리는 그 앞에서 소외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비록 은혜의 세계의 심오한 비밀을 터득하고 성경의 교리들에 대한 해박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앞에서 초라함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감당할 수없는 헌신의 모습 앞에서도 위축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은 신앙의 한 특성이지 본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독교적인 경건의 최고봉,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영성이 참된 복음의 영성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천사의 말을 하고 하늘의 비밀을 본 사람도 하나님의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위해 구제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사랑의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께 사로잡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께 사로잡혔다는 것은 귀신에게 사로잡혔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귀신이 우리를 사로잡으면 불속으로 던지기도 하고 물속으로 우리를 던지기도 합니다. 미친 듯이 거리를 뛰어나가기도 하고 우리의 힘으로 억제할 수 없도록 욕을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사로잡혔다는 말은 이런 의미로 사로잡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혔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사랑에 붙들렸다는 의미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욕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큰 고난을 당하시고 복종하시되 마지막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도록 하고자 하는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랑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타락은 술 취하고 간통하고 탈세하고 살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타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구원 받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침체에 빠지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나를 구원하신 것이 특별한 은혜라기보다는 기본적인 은혜라고 생각하는 오만함을 가지게 됩니다. 구원을 일상적인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모든 경건의 비밀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신자의 일생은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매일매일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다만 용서받은 죄인일 뿐임을 깨닫고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가 감당할 수 없도록 분에 넘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 큰 사랑을 받은 것이 한순간도 자연스럽지 않고 형언할 수없는 감격으로 다가오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주님이 내게 주신 모든 계명들, 거기 있으라고 하신 부르심의 자리,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원수들까지도 가볍게 느껴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천사의 말을 하고 삼층 천의 하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온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을 이유가 없지만 사랑의 사람 앞에서 우리는 머리를 숙입니다. 그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은 것처럼 또한 우리도 그를 통해 예수를 본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IV. 결론과 적용
얼마 안 되는 우리 짧은 인생의 길을 돌아보십시오. 그때 내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있어서 오래 참을 수 있었더라면 지금은 원수 맺고 살아가는 사람이 나의 가장 사랑하는 형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내 마음에 사랑이 있어서 오래 견뎠더라면 지금 깨어진 가정이 단란하고 주안에서 아름다운 가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의 사랑의 원리를 생각하며 입술을 굳게 깨물고 주께서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고난을 감당하며 서있었더라면 이때까지 끝도 없이 긴 세월을 가혹하리만치 방황하며 인생을 허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래 참고 견디는 것이 어려울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 이것이 내 안에 있는 사랑의 크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 없음을 깊이 고백하고 사랑의 원천이신 그리스도께 돌아와야 합니다.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의 깊이와 크기와 넓이를 헤아리며 나의 나 된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는 사랑을 부어달라는 기도입니다. 다른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구하는 의도와 달라서 거절할 수도 있고 외면하실 수도 있고 혹은 이것을 구하는데 저것으로 바꾸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내게 부어달라는 기도, 내가 그리스도처럼 사랑하게 해 달라는 기도, 사랑할 힘이 없기 때문에 나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는 간절한 기도는 다른 것을 주시지도 않고 거절되지도 않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그 사람이 당신 자신을 위해서 살게 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방법을 찾아 헤매고 보다 더 좋은 수단을 찾아서 방황하는 인생의 날들의 절반만이라도 무릎을 꿇고, ‘주님의 사랑을 내 안에 부어달라고, 나의 영혼에 가장 큰 비참은 내 마음에 사랑이 없음이라고’ 마음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한다면 여러분은 지금과는 훨씬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시간이 없습니다. 나 자신을 다 태워 사랑의 빛을 발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의 화신처럼 살아도 인생의 길이는 너무나 짧고 그 사랑을 통해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수효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시간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진리를 알게 하시고 은혜를 주신 것은 깨닫지 못하는 여러분의 가족과 이웃, 형제와 자매들, 지체들을 위해서 한 알의 밀알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사람이 깨닫지 못한 것을 여러분은 깨닫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슴에 와 닿지 않는 복음의 진리가 여러분의 가슴 속에는 사무치게 하셨습니다. 그 은혜 자체가 하나님의 소명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 아름다운 외모와 탁월한 학문이 없을지라도 늘 소박하게 사랑을 가슴에 간직하고 모두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베푸신 고난을 기억하며 그들 앞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참된 사랑으로 오래 참음을 보여주며 살아갈 때, 그는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마음에는 기쁨이 될 것이고, 세상은 그를 주목하지 않을지라도 하늘에 있는 성도들은 그를 주목하며 기도해줄 것입니다.
인생의 아름다움은 지위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입니다. 최고의 아름다움은 사랑하는 영혼입니다. 그 일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기억해야 될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쓰신 사랑의 편지도 핏빛 편지였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펜 삼아 그 아들의 옆구리를 통해 흐르는 피를 먹물 삼아서 우리에게 쓰신 사랑의 편지가 우리 앞에 있는 성경입니다. 오래 참음으로써 여러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진실함을 입증하고 수많은 시험을 이김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께 사랑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항상 살아계셔서 사랑을 위해 희생한 것 못지않은 넘치는 보상을 영혼 속에 베푸실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영원한 사랑 42
영원한 사랑 1 (2008.6.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 (2008.6.22 주일오전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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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사랑 10 (2008.8.17 주일오전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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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사랑 12 (2008.9.2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3 (2008.9.2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4 (2009.2.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5 (2009.2.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6 (2009.3.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7 (2009.3.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8 (2009.3.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9 (2009.3.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0 (2009.4.19 주일오전설교)
6.사랑의 참음과 본성의 인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13:4)
I. 사랑의 참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랑은 어느 한순간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는 주신 그 사랑을 활용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특성이 바로 오래 참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이 없으면 누구도 오래 참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끊임없이 공급되는 은혜야말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에서 이루면서 사는 유일한 통로라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은 사랑에 있어서 매우 결정적인 특성이지만, 참음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 참음과 그런 것 없이 우리의 본성으로 인내하는 참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저는 이것을 사랑의 참음과 본성의 인내라는 말로 대조하고자 합니다. 신자 안에 끊임없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사랑의 성향 때문에 참게 되는 것입니다.
A. 참음의 실천 : 그리스도를 알아감
참음의 실천은 실천하는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랑을 알아가도록 만들어줍니다. 참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참고 견딜수록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원래는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리스도를 만나고 가장 크게 변한 성품가운데 하나가 오래 참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자기의 사도직을 의심하고 바울이 어떻게 사도냐고 반문할 때 그는 고린도후서 12장 12절에서 자기의 사도된 표를 오래 참음으로 제시했습니다. 이적과 기사, 표적을 행하였지만 그것보다 자신이 더 사도임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특징은 오래 참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사람의 본성적인 인내의 크기나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에게 주신 탁월한 사랑 때문에 환난과 핍박, 고난과 시련, 복음 전파에서 오는 모든 역경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인격 안에 맺히게 된 오래 참음의 열매야말로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께 택함 받은 사도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던 것입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오래 참는 것을 실천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때문에 자기의 정욕을 죽이고 오래 참는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자기 이익을 포기하게 만드는 사랑의 근원은 사랑 자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는 과정을 통하여 끊임없이 그가 믿음으로 바라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에게 주어지는 힘이며 능력인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랑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상황을 참고 견딜 때 많은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미운 사람에게 떡을 하나 더 주는 것은 쉬운 것이지만 자신에게 큰 고통을 준 사람을 향해 복수심을 버리고 진정으로 용서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보다도 더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라면 그러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 인내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참는 그것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 된 우리들을 향하여 일체의 참으심으로 오래 참으셨던 것을 생각하라고 가르칩니다. 참음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랑을 알아갑니다.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분노, 자기 사랑을 끊으려는 끊임없는 결단과 노력이 없이는 오래 참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 때문에 참고 견디려고 할 때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만큼 우리 자신이 해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 해는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이 당하게 되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해를 당할수록 우리의 옛 성품은 드러납니다. 용서하지 않고 참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각종 욕망과 악은 인내의 과정을 통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참는 것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참음이 지속되지 않으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사랑이 참고 견디며 그리스도의 인내를 이루어가라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참음은 단순히 참고 견디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했습니다. 오래 참음이 사랑이 아니라 오래 참음이 있는 그곳에 바로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래 참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사랑이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종종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죄를 짓고 악을 행한 사람을 향하여 말하기를 “됐다. 내가 그 일은 불문에 붙일 테니까 이제 우리 다시 만나지 말자.” 이것은 진정으로 용서한 것이 아니라 복수하지 않겠다는 의사인 것입니다. 오래 참음의 목표는 단지 참고 견디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것에 있습니다. 용서와 오래 참음의 완성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래 참아야 하고 오래 참음은 궁극적으로 참음, 그 이상의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손해를 입힌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서 폭발해버리고 그와의 관계를 끝내버리면 사랑이 역사할 수 있는 관계 자체가 상실된 것입니다. 참음은 관계를 지속하게 만들고 관계는 사랑이 흐르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인간은 사랑이든지 분노이든지 마음 안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드러낼 때 어느 정도 기쁨과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삭히지 못한 분노가 가슴 속에 응어리질 때 그것은 죄만큼이나 무서운 결과를 그의 영혼 속에 만들어 냅니다. 그러니 단지 참고 견딜 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나에게 고통과 손해를 입힌 그 사람을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우리는 스스로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맞닥뜨릴 때마다 비로소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자기 자신 안에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안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인내가 요구되지만 누군가를 미워하고 분노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순식간에 쓴물이 솟아나서 자신의 온 영혼과 마음을 두루 적시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성도는 자기 안에 다른 사람을 능히 사랑할 수 있는 어떠한 능력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매순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사랑하며 사는 것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B. 자기 의존을 버림
누군가를 미워하고 자기에게 처한 어떤 역경과 어려움을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자기를 의존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 의존의 마음을 버리게 됩니다. 자기를 의존하는 만큼 신자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게 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만큼 자기를 불신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자신을 의지하고 나 자신과 한패가 되어 살았기 때문에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이제는 자기 의존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셨던 그리스도를 보면서 자기를 불신하고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자기를 의존하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의존하게 되고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이 자기 사랑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든 사랑은 의존의 감정입니다. 의존하지 않는 것은 결코 사랑일 수 없으며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하여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자기 안에 사랑 없음을 깨닫게 될 때 그는 그리스도를 향한 절대 의존의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주님이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오래 참도록 명령받았지만 스스로 참을 수 있는 힘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서 참을 수 있게 하는 은혜의 능력인 사랑을 끊임없이 구하게 됩니다. 경험적으로 볼 때 사랑의 사람이 기도의 사람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위로부터 공급되는 은혜 없이는 육신의 안목으로 잠시 사랑할 수는 있지만 끝까지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사랑을 우리가 신뢰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붙잡아 은혜를 공급해주시는 동안에만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끝까지 사랑하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 안에 역사하고 계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고 그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훨씬 더 신뢰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군가를 끝없이 사랑해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인생의 참 뜻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다양한 아름다운 사랑을 봅니다. 부부의 사랑,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 친구끼리 주고받는 우정도 인류 역사 이래로 수많은 문학 작품들의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왔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영원한 사랑이고 완전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한 때는 부모를 깊이 사랑하고 존경했지만 상처를 받고 마음 깊이 부모에 대한 한을 품은 자식들도 있고, 부부가 깊이 사랑하고 신뢰했지만 어느 한쪽이 그 신뢰를 배반했을 때 사랑의 깊이만큼 미움의 골이 깊이 파인 것을 봅니다. 자식밖에 모르고 살아왔던 부모가 보상 받을 수 없는 사랑 앞에서 자식에 대한 깊은 사랑이 흠으로 바뀌게 되는 일들도 경험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이것은 인간 속에서 주고받는 사랑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완전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그런 종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끊임없이 잇대어 주실 때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 부모를 사랑한 자식은 부모가 그를 실망시켜도 그것을 극복하고 부모를 사랑합니다. 그런 사랑으로 부모를 사랑한 사람은 부모가 돈이 많고 도덕적이기 때문에 부모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함께 살다가 어느 한쪽이 정절의 의무를 위반하고 배신하면 한쪽은 이혼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끝까지 부부의 사랑을 이루는 것입니다. 만약에 부부의 사랑이 서로의 아름다움, 자기를 향한 헌신적인 사랑 때문이었다면 배신의 순간에 서로는 서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며 그 후에 생겨나는 원한은 사랑의 깊이에 비례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내를 사랑할 때 그리스도 때문에 사랑하고 내가 남편을 사랑할 때 그리스도 때문에 사랑한다면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고 극복하지 못할 고난과 시련이 없을 것입니다. 남편은 나를 실망시킬 수 있고 아내는 나를 배신할 수 있으나 나로 하여금 아내와 남편을 사랑하게 했던 그리스도는 언제나 변함없는 분이시니 아내로부터 실망하거나 남편으로부터 배신을 받을 때 그리스도 때문에 배우자를 사랑했던 사람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많이 느끼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호세아 속에 있었던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이 아니었습니까? 끊임없이 외도하고 남의 자식까지 낳아오는 자기 아내를 도덕적인 의무감 때문에 용서한 것이 아니라 뼈가 타들어가도록 가슴 깊이 역사하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아내를 끊임없이 용서하고 사랑했습니다. 이것은 마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원한의 자리에서 어떻게 사랑을 꽃피우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성취하기를 바라는 사랑입니다.
II. 본성의 인내
A. 더 큰 자기 목표를 위한 인내
오래 참음을 이야기할 때 참된 사랑의 참음과 대조가 되는 본성의 인내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 평범한 가정주부가 아사히신문 소설 현상 모집에 공모를 했고 그 당시 엄청난 상금이 딸려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당시 백만 엔의 상금을 걸고 아사히신문사가 소설을 현상 모집했을 때 2,000여명이 모여들었습니다. 그중에 7명으로 인원이 좁혀졌을 때 아직까지 문단의 눈길을 끌지 못했던 평범한 가정주부의 글 한편이 소개되었습니다. 3명으로 인원이 압축되고 마지막에 당선된 작품이 있었습니다. 60년대에 백만 엔이면 지금은 10억 원은 될 법한 어마어마한 상금을 거머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미우라 아야코’라는 그리스도인 여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들을 섞어서 『빙점』(氷点)이라는 소설을 써서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빙점’이 무엇입니까? 물이 어는 지점이 빙점인 것처럼, 인간이 자신의 성품을 가지고 참고 또 견딜 수 있는 인내의 마지막 지점을 빙점이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는 그러한 빙점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성으로 인내하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 것, 그것은 훌륭한 것이지만 참음의 궁극적인 저력이 은혜가 아닌 본성에서만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오래 참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참는 사람은 망가지면서 참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성의 인내는 궁극적으로 더 큰 자기 이익을 위한 인내입니다. 우리는 종종 아주 탁월한 희생으로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혹은 부모를 위해 참았던 사람들을 봅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매우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알고 보면 자기 사랑의 확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깨뜨려지고 자기를 미워하는 일 없이도 이러한 사랑의 확장은 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도 어떤 계기가 있어서 자식을 사랑하는 태도가 바뀔 수 있고 부모를 향한 태도가 바뀔 수도 있고 나아가서 나라와 민족을 향한 사랑의 태도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저의 아버님이 자신의 어머님에게 참 잘 하셨습니다. 그것이 평소에 항상 잘 하셨던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부터 눈에 띠게 태도가 돌변하셔서 어머님에게 마음을 다 드려서 효도하셨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때 아버지의 연세가 40세 중반이 지났을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아니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어느 한순간에 어머님을 향한 태도가 완전히 바뀌면서 효성스럽게 할머니를 대하셨습니다. 제 생각에는 30대까지는 사업이 승승장구하고 자기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을 산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다가 사업이 여러 번 실패하고 인생의 쓴 맛을 보시면서 부모의 존재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돌아가시는 날까지 헌신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해도 인간에게 어떤 계기가 있어서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에 대한 태도가 바뀌는 일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도 칭찬할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의미로 보면 이것도 자기 사랑의 확장입니다. 남편과 아내도 사랑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언제나 빙점이 존재합니다. 참고 인내할 수 있는 어느 지점이 존재합니다. 그것을 능가하는 고통이 주어질 때 자신의 마음은 깨어지고야 맙니다. 좋은 의미에서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고 참다가 어느 한순간에 더 이상 참지 못하는 순간이 오게 됩니다. 그때에는 커다란 파국이 일어나거나 혹은 더 큰 무너짐이 있게 됩니다.
B. 인내를 통한 성품의 굽음
대개 성격이 활달하고 성깔이 있어서 수시로 물건도 집어 던지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폭력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절대 자살하지 않습니다. 조용하고 사려가 깊어 보이고 자기의 감정을 좀처럼 내색하지 않는 사람들이 큰일을 저지릅니다. 필리핀을 갔는데 사람들이 친절하고 온순합니다. 선교사님이 하는 이야기가 선교 온 지 10년이 넘었는데 이웃사람끼리 멱살을 잡고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절대 큰소리를 내지 않는답니다. 사람들이 온순하다고 사람이 좋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차를 몰고 가다가 마음이 상해도 창문을 열고 침을 뱉고 쌍소리를 하는데 10년씩 살아도 이웃에서 큰소리 한번 안 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선교사님이 하는 말이 그래서 이 나라 사람들은 무섭다고 합니다. 사장이라도 자기 직원을 너무 혼내면 안 된다고 합니다. 야단을 치면 가만히 있다가 한계가 넘으면 대드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권총을 꺼내 쏜다고 합니다. 싸우는 것은 별로 못 봤는데 권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몇 번 봤다고 합니다. 차라리 싸우는 것이 낫습니다.
본성으로 인내하는 것은 참 훌륭한 것이지만 은혜 없이 강요당하는 것처럼 본성으로 인내하게 되면 원한이 생깁니다. 예전에 시집살이 하던 선조들은 가슴에 한이 맺혀 있었습니다. 안 좋은 사연을 많이 안고 있으면 암으로 죽든지, 스트레스가 계속 쌓여서 소화기에 문제가 생깁니다. 남 보기엔 씩씩하게 견디고 이겨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에서는 여러 가지 질병의 원인이 됩니다. 단순한 인간의 본성만으로는 인내할 수가 없습니다. 인내할 때 다른 사람은 유익을 얻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내면세계는 계속 망가집니다. 같은 값이면 평탄한 길을 걸어온 사람을 사위와 며느리로 얻는 것이 좋습니다. 나이가 25살 밖에 안 되었는데 장편소설을 쓸 정도로 사연이 많은 며느리, 사위, 남편감은 별로 안 좋습니다. 소설에서는 멋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견디면서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상처가 생겼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극복하게 하는 길이 꼭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 속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 사랑입니다. 이것들이 계속 그에게 부어질 때 인간의 힘으로는 견딜 수 없는 고난과 시련조차도 이기고 견디게 하는 비상하고 놀라운 능력이 마음 안에서 나오게 됩니다.
현대의학에서 가장 최근에 나온 연구의 성과가 있다고 하는데, 파장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전에는 우리 몸의 세포의 생성, 유전자의 인과관계들을 통해서만 질병의 원인을 캐려고 했습니다. 최근에는 어떤 사실들이 발견되었냐 하면 우리 몸 전체가 파장을 만들어내는 물체라는 사실에 착안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뇌파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뇌에서 어떤 파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뇌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모든 세포에 전달되는 물질까지도 파장을 가지고 있어서 파장이 우리 몸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머릿속으로 아름답고 좋은 것을 생각할 때 나오는 파장과 분노하고 원한에 사무쳤을 때 나오는 파장이 다릅니다. 파장이 나올 때 그 파장이 영향을 미칩니다. 파장에 제일 먼저 영향을 받는 사람이 자기 자신입니다. 최근에 나온 연구에 의하면 우리들이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고 사랑할 때 나오는 분비액들이 파장을 냅니다. 그 파장은 좋은 파장입니다. 그 파장이 핏줄을 타고 분비물들을 전달하면서 우리의 세포 속으로 들어가 유전자와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한번이 아니라 반복해서 계속 일어난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반대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악한 마음을 품게 될 때도 똑같이 분비물들이 나오게 됩니다. 이때 나오는 분비물은 아드레날린 같은 것들인데 그것이 핏속을 타고 흐르면서 그 분비물의 입자 하나하나마다 파장을 발생합니다. 그 파장이 세포 속으로 전달되면서 유전자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 살아간다고 할 때 항상 기쁘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눈물을 흘려야 될 때도 있습니다. 찬송이 말하는 것처럼 “눈물흘림을 며칠 더 당하고 행할 길을 다 가다가” 이것이 우리의 인생길입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고난을 당하고 원수를 용서하고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사랑하고 인내하면서 끊임없는 괴롬을 당해도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은혜는 우리를 끊임없이 사랑하게 만듭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 안에 역사할 때 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고난과 역경과 시련을 겪으면서 우리가 입었던 고통들을 중화시켜주는 놀라운 효과를 갖게 됩니다. 은혜 없이 참고 견딜 때는 견디고 참는 시간을 통해 우리의 성품이 망가지고 완고해지게 되지만, 똑같은 고난을 겪어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이 역사하면 오히려 더 많이 성화되고 진실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III. 그리스도에게 배움
사도는 오래 참는 사랑의 특성을 어디에서 배웠을까요? 그는 불같은 성격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자기 같이 더러운 죄인을 끝까지 용서하시고 참으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래 참고 인내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셨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은 그 사랑 때문에 용서받은 죄인임을 끊임없이 확인했습니다. 그는 매순간 주님의 은혜를 갈급해하고 주님의 은혜에 목마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사랑의 지속적인 공급으로 그는 본성으로는 참을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변하고 변하여서 오래 참고 인내하며 예수를 닮은 사람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얼마 되지 않은 우리의 작은 인생의 과거를 돌아봅니다. 그때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은혜가 있어서 참았더라면 지금은 원수가 되었지만 친구가 되었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인내와 오래 참는 사랑이 우리에게 있었더라면 지금은 깨어진 가정도 아마 깨어지지 않고 온 가족이 단란하게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우리에게 있었더라면 화해하지 못한 채 두 눈을 감아야 했던 부모를 죽음 저편으로 떠나보내는 불효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끊임없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급해주시는 큰 은혜 때문에 매일매일 사랑하며 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우리는 자기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매순간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은혜에서 오기 때문에 매순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참된 사랑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사명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래 참으신 사랑으로 끝까지 참고, 그리스도께서 인내하신 사랑으로 일체 인내함으로써 모든 과정에서 겪는 고통을 통해 당신을 알아가도록 도우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의 기도, 더 많은 사랑을 주셔서 더 많은 사람을 향해 오래 참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는 결코 거절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가장 간절한 소원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셔서 펼치셨던 그 사랑이 신자들 통해 끊임없이 파문으로 번져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우리는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내가 극복할 수 없는 원수 같은 관계도 결국은 그 사람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내게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나에게 사랑스러웠던 사람이 지금은 참을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은 그 사람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전에 내 마음에 넘쳤던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큰 은혜가 우리 안에서 소진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혈육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할 필요가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성도로서의 삶의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그에게 있어서 오래 참게 하는 사랑은 은혜의 열매일 뿐이고, 이 은혜는 모든 은사보다 더 많이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어떤 사람은 물질이 없어서 헤매고 어떤 사람은 또 다른 것이 없어서 고통을 받지만 어떤 것도 그들의 궁극적인 해결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들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참된 사랑입니다. 사랑하시되 가치 없는 죄인들을 위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하셨던 하나님의 큰 사랑, 그 사랑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최고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 사랑을 안 사람들로서 그 사랑으로 자신을 죽이고 다른 사람은 살게 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사랑을 전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까지도 우리를 이 세상에 살아있게 하셨습니다. 사랑하기에 편리한 환경은 죽을 때까지 오지 않습니다. 사랑은 환경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의 은혜를 받은 사람의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사람의 부족함을 보는 대신 여러분 안에 모자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임을 고백하며 그 은혜로 채워주시고 매순간 은혜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붙들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 은혜가 없다면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함으로써 여러분 안에 주님이 충만하게 사실 것입니다.
영원한 사랑 42
영원한 사랑 1 (2008.6.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 (2008.6.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3 (2008.6.29 주일오전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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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사랑 10 (2008.8.17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1 (2008.8.24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2 (2008.9.2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3 (2008.9.2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4 (2009.2.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5 (2009.2.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6 (2009.3.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7 (2009.3.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8 (2009.3.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9 (2009.3.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0 (2009.4.19 주일오전설교)
7.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13:4)
I. 온유의 말 뜻
A. ‘크레스튜오마이’(χρηστεύομαι)
이어서 사도는 사랑의 두 번째 특성을 거론합니다. 그것은 온유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온유의 말의 뜻을 살펴봅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온유하며’를 ‘크레스튜오마이’(χρηστεύομαι)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크레스토스’(χρηστοσ), ‘남에게 유익이 되는, 유용한’ 혹은 ‘도움이 되는’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동사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는 ‘온유한, 선한’, 혹은 ‘자비로운, 쉬운’, 이런 뜻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많은 영어 성경에서는 “사랑은 온유하며”를 “사랑은 친절하며”(Love is kind)라고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둘 다 정확한 번역은 아니지만 온유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고 다른 사람을 향해 절친한 것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B. 오래 참음과 온유함
‘온유하며’라는 말은 ‘오래 참고’라는 말과 짝을 이루며 등장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오래 참음’이 자연의 성품이 아닌 거듭난 신자의 성품인 것처럼, 여기에서 말하는 ‘온유함’도 자연의 성품이 아닌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성도의 성품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온유라고 하면 무골호인과 같이 다른 사람과 부딪히지 않는 성격 좋고 부드러운 품성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온유는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 비슷한 예로 모세를 들 수 있습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여 장가를 들게 됩니다. 구스는 오늘날 에디오피아이기 때문에 모세가 취한 구스 여자는 흑인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온 이스라엘 회중에서 소동이 일어났고 심지어 이제껏 모세를 따랐던 미리암과 아론까지도 모세에게 반기를 들며 대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모세의 태도에 대해 성경은 말하기를,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세를 무골호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과 잘 지내고 어떠한 결단이나 용기, 분투,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는 그저 좋은 성품이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온유한 사람의 본은 예수님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과 잘 지내고 무골호인처럼 누구에게나 좋은 분이 되시지는 않았습니다. 진리를 거스르는 사람들에게는 용기 있고 담대하게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셨고 분투하는 삶과 전투적인 생애를 살아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온유는 자연적인 성품이 아닌 거듭난 하늘의 성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과 온유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속성의 두 가지 측면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을 창조하시고 또 이 땅을 통치하고 다스리면서 살도록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먹고 입고 마시는 육체의 생명으로부터 정신과 영혼에 이르는 영적 생명까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을 거스르며 살아갑니다. 각자가 하나님인 것처럼 자기 질서를 만들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거스르는 질서가 가득한 이 세상을 즉각적으로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행하신다면 이 세상에는 피 묻은 돌멩이와 죽은 시체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거스르는 모든 죄인들을 향해 오래 참으십니다.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견디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많으시기 때문에 그들이 돌이킬 날을 손꼽아 기다리시면서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고통을 받으시며 견디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선하고 악한 모든 사람들에게 햇빛을 두루 비춰 살게 하는 것처럼 당신을 거스르는 죄인을 오래 참으시면서 햇볕과 같이 당신의 친절과 자비를 베푸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온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래 참음과 온유가 짝을 이루며 등장하는 모습입니다.
오래 참음은 원하지 않은 질서 속에서 견디는 수동성을 가리킨다면 온유함은 가치 없는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사랑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만나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슴 속에 사랑을 주셔서 그 사랑의 성품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거스르고 또 자기를 거스르는 세상의 인간들의 악과 모든 고통을 오래 참고 견디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어서 햇빛이 선인과 악인에게 두루 비치는 것처럼 자비와 친절을 베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런 사랑을 깨닫도록 구원으로 부르시고, 구원을 이미 얻은 성도들에게는 은혜를 부어주셔서 그 사랑이 가슴에 충만한 가운데 사람들에게 자비와 친절을 베풀도록 이끄십니다.
II. 온유함의 근원 : 사랑
자기를 거스르는 악한 사람들을 향하여 온유한 성품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그분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악한 사람들을 향해 일체의 온유함으로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A. 하나님과의 평화
온유함은 하나님의 많은 사랑 속에서 이루어지며 그분과의 평화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과 완전한 평화를 누리고 있는 상태에서 인간은 타인을 향하여 온유하게 친절을 베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제껏 모세를 따랐던 미리암과 아론이 자신을 대적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모세와만 말씀하셨더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않았느냐?” 하면서 모세의 권위에 전면적으로 대들고 백성들을 충동질하였습니다. 그야말로 교회의 큰 위기가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서두르거나 지도자로서 칼을 빼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우상을 섬겼을 때 어떻게 행하였는지 기억할 것입니다. 이방 여자들과 함께 간음하며 이방 신을 음란하게 섬겼을 때 비느하스는 담대한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칼을 빼어 들었습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동족들인데도 그들을 칼로 죽여서 간음하듯이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성품을 드러내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자기를 향해 대적하는 인간들을 향하여 온유한 모세의 모습을 보십시오. 온유함은 개인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에서 드러나는 사랑의 속성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는 일정한 권한이 있습니다. 온유는 자신의 이익이 침탈당할 때 혹은 다른 사람의 악으로 인하여 자기의 유익한 것들을 빼앗기게 될 때 발휘되는 사랑의 품성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대적하고 하나님을 훼방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결코 온유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담대했고 그들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할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상당 부분 모세의 개인적인 신상을 향한 공격이었습니다. 모세는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싫어하는 흑인 여자를 아내로 취하였을까요? 흑인, 황인이라는 피부 색깔과 민족은 모세에게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육적인 이스라엘이나 이방 사람의 구분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고 마음에 할례를 받거나 육체의 할례를 받은 회중 가운데 있는 백성들은 영적인 이스라엘의 백성이었기 때문에 그가 구스 여인에게 장가들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엄연히 거룩한 백성 중 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를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미리암과 아론은 민족적인 편견에서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를 개인적으로 공격하였습니다. 비난을 받을 때 모세는 마음이 상하지 않고 오히려 잠잠하여 온유함이 지면에 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하나님께 인정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자신의 행동에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릴만한 요소가 티끌만큼도 없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온유함의 원천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원리적으로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온 지난날의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순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평화가 수립되었습니다. 우리의 죄와 악을 인하여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반감과 원수 된 감정들은 청산되고 하나님은 우리와 완전한 평화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이 평화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평화는 우리의 영혼과 마음의 상태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기초로 우리를 당신과의 완전한 화목 가운데로 불러들이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주권에 달려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평화는 수시로 흔들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지만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고 죄와 불순종으로 그분의 곁을 떠나는 동안에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실제적인 삶에서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우리는 자기를 거스르는 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마음의 여유를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온유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인품이나 본성적인 품성을 의지하지 말고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평화 속에서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내가 여기 서 있는 이유,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하나님 앞에 분명히 아뢸 수 있고, 그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것이고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완전한 실제적인 평화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온전한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평화는 하나님을 향한 완전하고 헌신적인 성도의 사랑의 감정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사랑하는 것 안에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평화가 누려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고 인정하시며 하나님과의 평화에 막힘이 없다고 하는 확신 속에서 담대하게 되고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이 평강 속에서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악을 행하거나 우리가 원하지 않은 질서 속으로 데려가서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친절히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모본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사시는 짧은 공생애 기간은 고난과 시련, 핍박과 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항상 하나님 앞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요, 그가 하시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꾼이라는 인정을 한 몸에 받고 계셨기 때문에 그분을 헐뜯는 비난과 충동, 수많은 대적과 원수들 앞에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시고 온유함으로 일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완벽한 평화에서 비롯되는 온유함입니다.
온유라는 것을 한번 시범을 보이는 것은 쉽겠지만 시범이 아니라 온유한 것 자체가 성품이 되어서 끊임없이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이것은 한번 하나님이 우리를 바꾸어 놓으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공급을 통하여 오래 참게 되는 것처럼 온유함 역시 끊임없는 사랑으로부터 우러나는 것이니, 끊임없이 우러나오는 사랑은 우리의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작용하는 하나님 은혜의 결과입니다. 이 온유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 부으심이 필요합니다.
한때 지면을 덮을 정도로 온유함이 가득해서 많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었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그 온유함을 잃어버리고 이미 용서한 사람들을 다시 미워하고 온유가 변하여 포학으로 바뀌는 것은 가능합니다. 우리가 베푸는 사랑이 우리 스스로를 원천으로 하여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 잇대어 아침마다 새롭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사랑의 사람이 되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를 거스르는 사람들을 향해 온유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하늘나라에 이르러서까지 그치지 말아야 하는 절실한 기도의 제목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을 부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부어지는 은혜의 지속적인 공급, 그것을 통해서 우리 안에 충만해진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를 거스르는 사람들을 온유하게 대함으로써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천성적으로 게으르고 무관심한 성품이 실제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온유함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끔 보게 됩니다. 이런 자연적인 성품의 온유함을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열매로서의 온유함과 혼돈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람이 욕심이 있다고 해서 모든 방면에서 욕심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저 같은 경우는 좋은 집에서 살아야겠다는 욕심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더 살아봐야 알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가끔 심방을 가면 성도가 집의 가격을 이야기하는데 솔직하게 단 한 번도 그런 아파트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 대신에 저는 책에 대한 욕망이 많습니다. 옷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가격도 색상도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어느 날 팔백만 원짜리 가죽 옷을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 옷을 입고 외출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건을 들고 가다가 쿵 하고 부딪히면서 팔백만 원하는 가죽 옷을 찢었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 가격도 모르고 옷에 대해 관심이 없으니까 옷이 찢어져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이것을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는 아주 온유한 사람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의 자연적인 성품이 좋은 것은 상황에 맞고 그것이 편리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일을 잘 하려면 사람이 항상 좋을 수는 없습니다. 목표가 있고 사역에 열정을 쏟아 붓는 사람은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저는 교역자나 직원들에게 마음은 둥글고 일은 네모지게 하라고 합니다. 사람이 좋은 사람은 야단을 쳐도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그 대신 별로 고쳐지지도 않습니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은 어쩌다 야단을 치면 가슴 깊이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적인 성품과 거듭난 성품의 차이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친절함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를 실제적으로 누리면서 살아가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온유함은 자연적인 온유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연적인 성품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어차피 하나님이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없는 것 때문에 속상해 하지도 말고 있는 것 때문에 자랑하지도 마십시오.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연적인 성품이 있는 것 때문에 그 사람은 깊이 고통하고 괴로워합니다. 시인이나 예술가를 보면서 ‘우리는 스쳐지나가는 것들을 그들은 어쩌면 그렇게 깊이 느끼면서 아름답게 묘사해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예민한 감각을 지닌 사람은 그런 감각을 지녔기 때문에 인생 살아가는 것이 너무 괴롭고 고달픕니다. 다른 사람은 “그것이 뭐 어때?” 그러지만 그 사람은 괴롭고 고통스럽고 쓰라린 것입니다. 형벌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것을 너무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은혜만 많이 받으면 다 해결됩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하나님이 우리의 성품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러나 기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은혜가 들어오면 그 기질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속에서 독소가 되는 죄의 요소들이 빠져나가고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성격이 까탈하고 다른 사람과 다시기를 잘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받으면 사려가 깊고 예리하고 통찰력이 있고 결단력이 있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로부터 온유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평화를 누릴 때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때입니다. 그때 성도는 하나님과 완전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때가 성도의 마음이 가장 순결한 때입니다. 거기에서 다른 사람을 향해 친절을 베풀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B. 자기 사랑을 버림에서 오는 친절
‘온유하다’라는 ‘크레스튜마이’(χρηστεύομαι)라고 하는 단어는 ‘크레스토스’(Χρήστος)라는 형용사에서 옵니다. 'useful, helpful'과 같은 뜻으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거나 유용한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밀려들어와서 우리의 성품을 강력하게 변화시킬 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성향을 마음속에 갖게 됩니다. 사랑은 바로 그런 특성이 있습니다. 즉, 사랑은 다른 사람을 향해 도움이 되고 유용하게 되려는 성향입니다. 왜 이렇게 될까요?
맨 처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의 마음과 영혼 안에 사랑의 성향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는 살아가면서 사랑을 배운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 즉각적으로 사랑의 성향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이 사랑의 성향은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성향이므로 아담은 하와가 창조되었을 때에 자기의 존재가 여자에게 도움이 되고 유용한 존재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 성향이 아담 안에 실제적으로 있었습니다. 자기가 하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의 존재가 하와의 인생에 유익이 되고 도움이 되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담 안에 있었습니다. 그 마음은 아담 안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와 안에도 있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와가 이끌려 나올 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똑같은 마음이 하와 속에서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돕는 배필로 창조하셨을 때 어찌하든지 하와라는 존재는 아담이라는 남성에게 유용하고 도움이 되고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서 자기 때문에 남편인 아담의 인생이 활짝 피어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하는 것이 타락하기 전 하와의 마음속에 두신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아담을 향해 하와는 어디에 있으며 하와를 향해 아담은 어디에 있냐고 여러분은 묻고 싶을 겁니다. 타락한 후에 이런 사랑이 파괴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찾아온 제일 큰 변화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기도 했고 타인을 향한 사랑이기도 했는데 이 사랑은 대립되는 또 다른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갈등을 일으키고 대립이 되기 시작한 것은 타락한 이후에 생겨난 일입니다. 처음에는 이 사랑이 하나의 사랑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타인이 있고 타인 안에 하나님이 있어서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타인을 사랑했습니다. 자기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하나님 사랑을 놀랍게 경험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이러한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나를 섬겨. 나는 적어도 이렇게 하나님 앞에 소중한 존재야.”라고 할 법도 한데 이런 공식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내가 하나님 앞에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이토록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 떠오릅니다. 기독교적 사랑이 가지고 있는 역설입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자기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듣고 있는 내용은 사랑에 관하여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고 많은 시간을 걸려 설명해야 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논의가 되고 있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은 자기를 잊게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경험됩니다. 나 같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고 놀랍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 그 사랑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느 한 사람을 목적으로 하여 흐를 때 거기에서 멈추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약에 멈춘다면 자신이 하나님 사랑의 궁극적인 목적이니까 높아질 수 있고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나에게 흘러 들어와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내가 이렇게 중요한 존재로구나. 다른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섬기게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밀려와서 이 사랑은 자기를 관통하고 타인을 향하고 온 세계 속에 흐르는 사랑이 됩니다. 이제까지는 자신이 빛을 통과시키지 못하는 덩어리였습니다. 사랑을 더 많이 받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 사랑에 사로잡히게 되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투과시켜버리게 됩니다. 자기 자신은 오히려 잊혀지고 하나님 사랑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됨으로써 그 안에서 만족을 얻게 됩니다. 이 사랑은 나를 뚫고 흘러서 모든 인간을 향해 휘돌고 마지막엔 하나님 자신으로 돌아가는 하나님의 자기 회귀적 사랑입니다.
성경이 자기를 사랑하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을 반영하고 있는 책은 가랑잎에서 바늘을 찾기만큼 힘듭니다. 이런 것들이 상담 속에 무분별하게 도입되면서 오늘날 복음으로 굳건히 터를 잡고 있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시킵니다. 자기 사랑에 대해서는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만 배우면 그 안에서 자기는 저절로 사랑을 받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목할 만한 말을 남겼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모든 문제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깊이 경험되어질 때 우리는 자기 사랑을 버리게 됩니다. 인간이 자기를 사랑함으로써 만들 수 있는 사랑의 질서의 파문은 창조주 하나님이 온 우주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로 통일되게 하시려는 사랑의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스스로 버리고 자기를 잊게 됩니다. 모든 다툼, 원한, 원망, 미움, 질투, 이런 것들은 대부분 자기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기의 행복을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가치라고 생각하는 거기에서 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되면 거기에서 자기 사랑을 버리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됩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서 친절해지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는 통로가 되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사는 것에 둡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참 사랑이고 긍휼이며 자비입니다.
인간의 정체는 자기를 사랑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숙명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릇된 방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을 버리는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져오게 되고 그 때 비로소 그는 추루한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 자기가 정말 사랑해야 할 자신이 그 안에 존재하게 됩니다. 이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진리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인간이 진리의 광명을 떠나면 결국 자신의 부패한 육체 밖에는 사랑할 수 없다.” 우리의 존재는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둘을 하나님의 질서에 부합하게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자기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우리의 지성은 만져지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영혼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우리의 육체만을 편파적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수많은 욕망과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과 죄악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육신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생겨난 많은 욕망의 실현은 보이지 않는 영혼을 끊임없이 죽이고 파멸로 몰아넣는 효과를 가져 옵니다. 육신을 편애하는 것이 영혼의 끊임없는 파괴를 가져오는데 자신의 영혼을 짓밟고 파괴하면서 육신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자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비로소 인간의 영혼과 그분에 의하여 창조된 육체 사이에 균형을 이룬 온전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이 온유함은 자기 사랑을 철저하게 버리는 데서 오는 온유함입니다.
III. 온유함의 모본, 그리스도
A. 지상 생애에서 - 인격과 삶
우리는 이런 온유의 모본을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상 생애에서 그의 인격과 삶을 통하여 당신 자신의 온유함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 속에는 당신 자신이 전 존재를 바쳐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유용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성향으로 충만하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도 그분의 온유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가난한 생애를 사시고 멸시와 욕을 당하시며 큰 고난의 길을 걸으셨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예수님의 마음에 가득했기 때문에 이 땅의 모든 인간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는 것으로 온전한 만족을 누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자기의 것이 전혀 없는 철저히 헌신적이고 이타적인 삶이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부요하게 하는 하나님의 자원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항상 넘쳤기 때문에 그분은 자기를 온전히 드려 우리를 위해 친절하고 유용한 존재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은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하시는 절명의 순간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을 미워하시기는커녕 당신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를 못 박는 죄인들이 받을 최후의 형벌을 인하여 마음 아파하시며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온유하신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의 온유하신 일생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예고되었습니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B. 천상통치에서 - 긍휼과 자비
지상 생애가 끝난 후에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신 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셨습니다. 천상에서도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구원과 은혜를 베푸시면서 통치하시는데 그분의 천상의 통치 속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IV. 결론 - 그 온유를 본받아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악을 행하고 불순종하고 모욕하는 막 되먹은 인간들을 향해 일체의 오래 참으심을 보여주십니다. 복수의 칼날을 가는 대신, 친절을 베푸셔서 그들이 마음이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고 어루만지십니다. 우리는 모두 한 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악한 인간들이었다는 것과 예수 죽인 것과 우리의 죄를 인하여 뉘우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창과 칼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고 지옥 형벌의 위협이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 가슴 아프게 만든 것도 아니었습니다. 쓸모 있는 인간을 향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당신이 주신 자원으로 당신을 모질게 대적하고 악을 행하는 더러운 나 같은 인간을 향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어루만지시는 사랑, 하나님의 온유한 성품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녹았고 우리가 꺾어졌습니다. 율법의 칼날은 우리를 주님 앞에 무릎 꿇게 하지 못하였고, 지옥의 형벌은 우리를 두려워 떨게 하였을지라도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녹아지게 하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이시면서도 나 같이 더러운 인간을 향해 온유함으로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녹고 무릎을 꿇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요” 이 말은 온유한 사람이 부동산에 투자해서 돈을 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정신적인 감화력을 가리킵니다. 이 땅에 수많은 자기의 영토를 자랑하던 제국의 황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나라는 사라졌고 지금은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평생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신 생애를 사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세상 어디에서나 거룩한 감화로 영향을 미쳐 온 땅의 백성들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한 번도 찾아와 보신 적이 없는 대한민국 땅에서도 우리는 주님께 정복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온유로 정복하는 나라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은혜 안에서 온유한 삶으로 주님의 은혜의 통치를 펼치는 도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사랑 42
영원한 사랑 1 (2008.6.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 (2008.6.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3 (2008.6.29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4 (2008.7.6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5 (2008.7.13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6 (2008.7.20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7 (2008.7.27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8 (2008.8.3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9 (2008.8.10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0 (2008.8.17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1 (2008.8.24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2 (2008.9.2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3 (2008.9.2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4 (2009.2.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5 (2009.2.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6 (2009.3.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7 (2009.3.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8 (2009.3.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9 (2009.3.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0 (2009.4.19 주일오전설교)
8.사랑은 투기하지 않으며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I. 투기의 말 뜻
A. ‘젤로이’(ζηλοῖ)
이어서 사도는 사랑의 세 번째 특성을 말합니다. 그것은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입니다. ‘시기’, ‘투기’라는 말뜻은 무엇일까요? 희랍어 성경에서는 ‘젤로이’(ζηλοῖ)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은 좋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나쁜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무언가 열심으로 끓어오르는 감정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열심을 내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시기는 다른 사람의 성취나 성공에 대하여 느끼는 격렬한 부정의 감정입니다. 시기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소유하거나 내가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 도달하거나 내가 이루지 못한 일들을 성취했을 때 그 상황과 사람에 대한 총체적인 부정의 감정입니다. 시기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시기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향한 미움을 간직하고 있고, 그런 상태에 이르지 못한 자신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학대의 감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시기의 가장 파괴적인 효과인 하나님을 향한 원망도 이 안에 포함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구원의 공평성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가운데에 품꾼의 비유를 드셨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주인이 일군을 청하여 데리고 왔습니다. 아마 일군은 특별히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기를 일군으로 써 주어서 하루 삯을 받고 일을 한 것에 대해 감사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9시에 불러오고 어떤 사람은 12시에 불러왔습니다. 그랬을 때 이들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할 일 없이 놀다가 일거리가 생기고 자기를 써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얼마나 반갑고 기쁘겠습니까?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주인이 5시에도 일군을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일은 6시에 마쳤습니다. 마지막에 일이 끝나고 나서 하루 품삯을 계산할 때 주인은 이 사람들에게 똑같은 품삯을 주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감사의 마음으로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일하던 사람이 마음이 상하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늦게 들어온 사람이 같은 품삯을 받는 것을 보지 않았더라면 퇴근하면서 까지도 주인에게 고마운 마음, 하나님께 감사한 감정을 가지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비교해보고 다른 사람이 한 시간 일하고 하루 품삯을 받아가는 것을 보니까 비교의식이 생겨났습니다. 처음에는 하루 일하고 하루 품삯만 받아도 감사했는데 비교 의식을 갖게 되니까 감사한 마음이 한 번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기입니다.
B. 사랑과 시기치 아니함
사도는 사랑은 시기치 아니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 자체는 하나의 사랑 안에서 통합된 마음입니다. 13장에 나오는 ‘사랑’은 앞에는 모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모두 ‘이 아가페’(η ἀγάπη)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은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을 결합시키고 다른 사람에 대하여 단절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 가든지 고향 사람만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고향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친절하지만 자기와 고향이 같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서는 배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우러난 사랑은 ‘우리끼리, 우리만, 우리하고만’ 이런 단어를 사용하면서 그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끼리 묶는 단절의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정반대로 단절되지 않고 바깥으로 교통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사랑을 버리고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분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과 이 사람 안에 있는 사랑은 다른 사랑이지만 질적으로는 하나의 사랑이 됩니다. 그 사랑도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의 사랑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와 남을 아우르고 마지막에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하나의 회귀적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우주적 일치성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호수에 떨어진 큰 바위, 그것에 의하여 그려지는 파문에 관한 비유를 말씀드렸습니다. 각자 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인데 그 사랑은 수단이 되는 많은 것들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돈도 사랑하고 쾌락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고 지식도 사랑하고 많은 것들을 사랑하지만 그것은 결국 마지막에 자기를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기 위한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은 오직 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자기를 사랑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은혜를 받은 후에 사랑하게 되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개인적인 사역들도 사랑하게 되고, 내게 붙여주신 지체들도 사랑하게 되고, 성경말씀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 찬송들도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이 주신 교회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비전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수단이 되는 양상일 뿐이고 이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사랑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자기 사랑도 다양한 목적의 사랑을 양산해내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다양한 목적의 사랑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양상이며 중간 수단이고 마지막에는 다 돌아가서 자기 사랑과 하나님 사랑으로 회귀하게 됩니다.
신자가 아닌 사람의 사랑의 특징은 철저한 자기 사랑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특징은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입니다. 각각 자기 나름대로 사랑의 파문을 그리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게 되고 자기 사랑이 끊임없는 고통과 번민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그는 자기가 사랑했던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이 중생과 함께 신자의 마음속에 심겨지게 됩니다. 그런 사랑이 깊이 심겨지게 될 때 그것은 사랑의 한 성향이 됩니다. 그 성향이 바로 하나의 사랑으로 흐르는 사랑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의 사랑의 질서 속에 있기 때문에 내가 성취하지 못하는 것을 이웃이 성취하고 내가 누리지 못한 것을 누려서 기뻐하는 것이 나 자신에게도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기쁨이 곧 하나님 자신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II. 참된 사랑이 투기치 아니하는 이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참된 사랑이 투기치 아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A. 하나님으로 인한 만족
첫째는 참된 사랑이 갖는 만족적 특성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영혼의 진정한 만족이 교제의 기쁨 속에서 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다는 확신이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충만히 사랑하신다는 사랑의 경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확신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주님께 온전히 순종했다고 해서 모든 삶의 질서들이 한 번에 우리가 원하는 삶의 질서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내가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가 주님을 믿고 순종하게 되었는데도 고통스러운 삶의 환경, 해결되지 않은 가정의 문제, 사회적인 문제들은 여전히 그대로 있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견딜 수 없었던 상황인데 하나님 사랑을 알고 난 후에는 영혼 안에 주시는 하나님의 참된 만족과 교제의 기쁨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형편이 됩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 때 육체의 자원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자원을 아울러 소유함으로써 살아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차이입니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사랑은 내가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아도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은 사랑을 그 사람으로부터 받을 때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자기 몸으로 낳은 자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냐고 묻는데 엄지손가락은 덜 아픕니다. 새끼손가락은 더 아픕니다. 자기 속으로 낳은 새끼도 더 사랑스러운 자식이 있고 덜 사랑스러운 자식이 있습니다. 아이 하나를 낳고 얼마 있다가 이 아이가 철이 들 때쯤 두 번째 아이를 낳았습니다. 엄마가 이 아이만 24시간 데리고 있고 온 가족이 그 아이에게만 관심을 가질 때 먼저 태어난 아이는 찬밥이 됩니다. 그러면 이 아이는 잠도 잘 못 자고 밥도 잘 못 먹고 평소에 하지 않던 이상한 버릇들이 생겨나는데 이것들이 심리적인 분리 불안증입니다. 심하면 소아 정신과의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비교적 순수한 사랑이라고 하는 부모와 자식의 사랑조차도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참 신기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큰 사랑을 경험하게 될 때 하나님이 나만 사랑하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옆에 있는 사람도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이 그를 사랑해 주신다는 소식을 들을 때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교제하고 싶고 함께 있고 싶어집니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는데 저 사람도 그런 사랑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모든 기쁨이 땅에 쏟아지는 것 같았는데,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이 사람이 똑같은 간증을 할 때 너무 반갑고 기쁘고 내가 받은 이 사랑이 배가됩니다. 사랑의 교제를 나누면서 서로 단단하게 합치되어서 서로 의지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또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시 셋이 뭉치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 있는 참된 사랑으로 말미암는 교제입니다. 그런 사랑을 경험하고 행복이 크면 클수록 그들은 이상하게 눈물이 많은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염려 때문에 그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릴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참된 사랑의 경험은 그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필연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사랑은 자기와 같은 사랑을 나눈 사람을 향해 확장되고 이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을 향해 또 확장되어서 사람으로부터 받는 사랑과 다른 사랑의 파문이 퍼져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지혜와 사랑으로써 창조하셨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랑의 파문을 그리면서 사람과 사람을 묶고, 그들을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밖으로 흐르고 뻗어 나가서 우주 전체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우르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이었습니다. 죄가 들어옴으로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는 것 같았지만 오히려 죄 때문에 참되고 순수하고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마음속에 부어주셨습니다. 인간들로 하여금 사랑의 줄로 묶어서 그 사랑이 파동을 치며 온 우주를 휘돌아 하나의 사랑 안에 묶여지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 때문에 행복하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나만 사랑하시는 것 같다는 착각을 갖게 만드는 그 사랑이 얼마나 무한한 사랑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전도, 선교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 아닐까요? 단지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려주어서 지옥 갈 사람을 천당에 가게 만드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이 사랑도 함께 전해주어서 그들의 성향 자체가 이런 사랑으로 온전해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서 사랑의 가치를 발견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웃을 향해 흘러 들어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그래서 그 사랑이 흘러가고 굽이치면서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서 행복해지는 것이 참다운 사랑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밀양’이라는 영화를 저는 못 보았습니다. 지금도 보지 못했고 볼 생각도 없습니다. 그것을 쓴 작가가 최근에 죽었습니다. 영화는 못 보았지만 내용은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 믿는 사람이 늘 사랑을 외치지만 예수 믿고 열심 있다는 인간들의 윤리보다 차라리 하나님을 모르고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도덕이 훨씬 더 우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때 우리는 마음이 굉장히 쓰라립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순간에 시작되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사랑의 사람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강력한 사랑의 성향을 넣어주시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 사랑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이지만 완성된 사랑은 아닙니다. 중생은 우리의 영혼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성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믿고 은혜도 받고 열심 있는 은사주의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끊임없는 감화를 받으면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닫고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사는 사랑의 성향이 계속 증진되고 사랑의 은혜 속에 있어야 이웃을 위해서 해가 되지 않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어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이런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힘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공급입니다. 이런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해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할 때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셔서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고 이타적인 생활을 해나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참된 만족이 신자 안에 있을 때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는 삶을 살 때 그는 시기할 수 없습니다. 그의 소망은 하늘에 속한 것이고 그의 기쁨은 주님의 임재에서 오는 기쁨인데 이 세상의 썩어질 것에 대해 시기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B. 이웃의 행복에 이바지 하고자 하는 성향
참된 사랑이 시기하지 않는 이유는 사랑 그 자체가 이웃의 행복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마음의 경향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이웃이 하나님 안에서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누리지 못하는 것들을 누리게 되었고 자기에게 없는 것들을 갖게 되었고 자기가 없는 권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어찌 그를 축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큰 사랑이 자기 마음 안에 역사할 때 이 사랑은 이웃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되고자 하는 경향성을 부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니까 자기는 없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게 되고, 하나님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원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시기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하나님 바깥에서 어떤 좋은 것을 성취하고 얻었다고 해도 시기할 수 없습니다. 그가 얻은 행복이 신앙과 영혼을 팔아서 얻은 것이라면 그것을 얻기 위해 손해를 본 영혼의 고통과 버림받음으로 인하여 눈물 흘리게 되지,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물질이나 그의 명예를 인하여 시기하게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참된 사랑이 갖는 특성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온유를 해설하면서 온유라는 말의 의미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쓸모 있게 되려는 경향,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려는 경향성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유의 특성이고 친절입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성향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졌을 때 그를 축복하고 시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졌다면 그것 때문에 망가진 그들의 영혼을 생각하면서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게 됩니다. 참된 사랑은 결코 시기하는 자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가르치는 바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이 세상을 흘러가며 자신은 빼앗기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것,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신자의 삶입니다.
저는 설악산을 참 좋아합니다. 설악산의 아름다움은 봉우리의 높음에도 있지만 설악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휘감고 흐르는 개울이 설악산의 아름다움을 더해줍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흐르는 개울일 적이 거의 없습니다. 항상 물이 없다가 비 온 뒤 2-3일이 지나면 최고의 절경을 볼 수 있습니다. 빗물에 씻겨서 깨끗한 산과 풍부한 물의 흐름 속에서 재잘거리는 개울들이 어우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가 1년에 며칠 되지 않습니다. 제가 만약 도지사라면 물이 설악산에서 흘러 바다로 들어가게 하지 말고 산 아래 커다란 수조를 만들어서 그 물을 탱크에 다 받아서 밤에는 전기가 남으니까 남는 전기로 밤새도록 수조에 있는 물을 끌어 위의 탱크로 옮기고, 낮이 되면 다시 물이 시원하게 흐르게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그러면 아마 더 많은 관광객들이 와서 전기세는 나올 것입니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요새 한강을 개발한다고 그러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단순합니다. 한강 주변에 계속해서 아파트가 지어지는데 한강을 아무리 예쁘게 개발하려고 해도 아파트가 있는 한, 강이 예뻐질 수가 없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150층 정도 되는 빌딩을 지어서 아파트를 전부 합쳐버립니다. 나머지 땅들은 전부 자연화 해서 모든 사람이 한강에 근접하면서 한강을 누리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리학에서 물이 없는 강을 ‘와디’(wadi)라고 하는데 무수천은 보기 흉합니다. 아름다운 강들이 처음부터 아름다웠던 것은 아닙니다. 붉은 흙으로 뒤덮인 황야 계곡 사이로 물이 흘러 갈 때는 주변에 있는 흙들이 끊임없이 빼앗기는 것 같았는데 세월을 머금고 물이 끊임없이 계속 흐르자 그것을 인하여 풀들이 돋아나고 나무들이 자라고 열매가 떨어져서 다시 꽃이 피고 싹이 나고 잎이 돋고 나무들이 생겨나고 벌레들이 생겨나고 새들이 깃들고 들짐승들이 깃들면서 생태계가 형성됩니다. 생태계가 형성되어 숲을 이루게 되면 예전에는 흙이 강의 신세를 졌는데 이번에는 강이 흙의 신세를 집니다. 물을 머금었던 숲에서 물을 끊임없이 흘려보내서 메마른 철에도 강물이 도도하게 흘러갑니다. 지구의 최대의 댐은 산입니다. 산이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머금고 그 물을 토해내서 갈수기에도 산 아래 있는 모든 밭들이 물대인 동산처럼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생존하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은 자기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저장하면서 자기를 최종적인 목적으로 삼고 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삶입니다. 하나님께 더 많은 자원을 구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영적인 자원들, 은혜와 사랑, 용서와 진리에 대한 깨달음, 은혜의 세계를 아는 지식들을 가지고 무지와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건지고 연약한 사람들을 붙들어줍니다. 우리에게 주신 젊음과 육체의 힘, 건강, 물질까지도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기면서 흐르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이용하려고 할 때 자기 사랑에 사무쳐있으면 부르르 떨게 되지만 참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져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이용해서 유익을 얻게 될 때 그것이 주님 안에 있는 행복이라면 우리는 그것 때문에 행복해하고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잃어버려도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원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 시기하지 않는 이유인 것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합니다. 두 가지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고 하나의 사랑이 하나님과 나와 이웃을 관통하며 흘러서 그들 모두를 다시 하나님께로 데려가고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의 부요함 속에 살게 하는 종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을 시기하지 않습니다. 그의 참된 만족은 이 세상과 다투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소유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III. 그리스도에게서 배움
사도는 사랑이 시기하지 않는다는 모본을 그리스도에게서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한번은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달려와 예수님께 고하였습니다 “예수님,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고 많은 사람들을 자유케 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반가워서 네가 우리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으니 너도 우리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지만 우리는 따르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면서도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 선생님의 이름을 팔아서 귀신을 내어 쫓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비록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당신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고 있으니 그들도 우리와 같은 편에 속한 사람들이고 이것은 우리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어린아이에게 냉수 하나라도 대접한 사람은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유명한 말씀을 바로 그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유한 자들도 많이 만나셨지만 그들의 부유한 것을 인해 그들을 질투하시거나 부러워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들의 부유함 때문에 영혼이 궁핍해지지 않을까를 염려하시면서 그들의 영혼을 돌보는 일에 마음을 쓰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순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권력 있는 자들도 만났지만 그들을 두려워하거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시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권력을 주신 더 높으신 권세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가르쳤고 사랑하도록 타이르셨습니다. 혹시라도 그가 가지고 있는 권력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거나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을지를 염려하시면서 오히려 그를 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삶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들이 모두 한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셨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각각 자기를 버리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하셨고,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이로운 존재가 되기를 원하셨으니 이것을 통해 하나님 사랑 안으로 모든 도덕 세계의 인간들을 통합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도, 다양한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로 통속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이 하나의 진리에 의해 파동을 일으키며 온 세계에 두루 흐르게 될 때 그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행복과 번영을 누리고, 그리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신 궁극적인 목적,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랑의 물속에서 넘쳐나게 되기를 꿈꾸셨습니다.
바로 이런 꿈을 교회에 심으셨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아직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는 은혜가 없으나 그대들에겐 은혜가 있습니다. 이 은혜를 끊임없이 주고 은혜에서 미끄러진 사람들에게는 용서의 은총을 주시기로 한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와 이 은혜를 간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넘치는 사랑을 주십니다. 이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의 번영과 성취 안에서 시기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성취되는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아서 그들의 행복이 하나님의 기쁨으로 환원되도록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이미 안 사람들끼리 단단하게 하나가 되고, 그 사랑의 교제 속에서 사랑이 증진되고,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진리를 나눠주고 그들의 영혼도 이 사랑 안으로 돌아오게 해서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 속으로 섭렵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복음 전도는 바로 사랑을 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신성한 지혜의 핵심인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교적인 삶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사랑의 삶입니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 사랑 안에서 역사하는 진리, 진리와 함께 일하는 사랑, 그 속에서 우리는 동일하게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탁월하신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런 사랑으로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사랑 42
영원한 사랑 1 (2008.6.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 (2008.6.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3 (2008.6.29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4 (2008.7.6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5 (2008.7.13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6 (2008.7.20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7 (2008.7.27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8 (2008.8.3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9 (2008.8.10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0 (2008.8.17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1 (2008.8.24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2 (2008.9.2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3 (2008.9.2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4 (2009.2.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5 (2009.2.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6 (2009.3.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7 (2009.3.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8 (2009.3.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9 (2009.3.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0 (2009.4.19 주일오전설교)
9.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I. 자랑의 의미
이어서 사도는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랑’의 의미는 ‘페르페레에베때’(περπερεύεται)라는 희랍어 단어인데, 이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한번 밖에 안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을 목적으로 사실이 그러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자기를 부풀려서 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원래 이 단어는 공기를 주머니에 가득 집어넣어서 팽팽하게 부풀게 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로도 사용했습니다. 정확하게 우리말로 번역하면 ‘뻐기다’라는 단어입니다. 사실이 그렇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기 위해서 뽐내면서 사실, 혹은 사실 그 이상을 부풀려 말하는 것을 가리켜서 ‘자랑하다’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자랑이었습니다. 12장에 보면 은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저마다 이런 은사를 저마다 받아 외적인 인정을 얻고 싶어 했습니다. 교회에는 다툼과 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사도는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겠다고 말하면서 13장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II. 사랑과 자랑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고 잘라서 말합니다. 은사는 원래 교회를 섬기도록 주신 것인데 이것을 마치 자신이 얻은 것처럼, 자기 자신의 장점인 것처럼 뻐기고 자랑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온갖 분쟁이 일어난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에게 은사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참된 아가페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 안에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사랑과 자랑은 어떤 관계가 있기에 사도는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분명하게 못 박을 수 있었을까요?
A. 사랑의 경험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모르던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사랑을 지닌 사람이 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그가 어떻게 붙들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사랑은 엄밀한 의미에서 초월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과 인간들을 사랑하시지만 그 사랑은 초월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없으면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붙들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있는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햇빛을 주십니다. 모든 만물에게 비를 주셔서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초월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에게로부터 받는 사랑은 받는 대상이 있고 베푸는 주체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바로 그 사람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오는 사랑은 더디기는 하지만 그 사랑을 깨닫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는 분이 아니십니다. 초월적인 사랑은 인간에게 그렇게 쉽게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한때는 그런 초월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에 있는 보이는 모든 것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보이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사랑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는 것을 굳게 확신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이 주는 사랑은 그들이 주는 물질이나 나를 위해 베푸는 호의를 통해 사랑을 조금씩 확인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랑은 그런 것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았지만 어느 순간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정말 죄인이라는 사실과 우리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인생을 사람답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 때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행과 죄를 숙명처럼 타고난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보이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 사랑은 용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경험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던 성경의 위대한 모든 인물들은 용서를 통해 그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물질적인 축복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배려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영혼에 직접 행하시는 축복이 아니라 일반 섭리 속에서 간접적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배려하시는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시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직접 행하시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참 죄인이고 이 세상에서의 모든 불행과 고통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용서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주님이 죄 때문에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큰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큰 용서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죄이기 때문에 그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사랑도 무한한 크기와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집주고 땅 주고 돈 주고 명예를 주신 적이 없다 할지라도 원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끊어진 단절 속에서 몸부림치고 발버둥 쳐도 죄의 결과인 불행과 고통과 생명 없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의 큰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이런 용서를 받았을 때 우리가 깨닫는 것은 자신을 용서해주신 하나의 무한한 사랑 앞에 자기가 얼마나 무가치한 인간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단체의 구별은 뚜렷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단체는 모두 자기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아무 쓸모가 없는 인간이요, 자랑할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해주신 은총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이 세상 단체와 차이가 납니다. 이런 사랑을 깊이 경험했기 때문에 이전에 자신이 자랑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자랑거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한없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 하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나님 사랑의 크고 높음을 보여주십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안에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고백은 하나님의 위대한 용서를 통해서 나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드넓은 우주를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이 티끌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은 발아래 구르는 한 알의 모래만도 못한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만, 위대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이유 때문에 존재의 의미를 찾게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용서를 경험하게 될 때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만한 그 무엇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B. 새로운 자랑
복음을 안 사람들은 자기 의를 미워하게 됩니다. 자기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 선행을 행해서 하나님 앞에 받아 들여질만한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자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한 종류의 자기 의는 자랑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자랑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금 자랑하고 있는 내용에 있어서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훌륭하다는 자기 자랑의 마음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고 참된 그리스도인은 항상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나는 지식도 모자라고 체험도 모자라고 지위도 낮고 얼굴도 못생기고 신앙도 형편없구나.’ 이렇게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자기 비하에 빠지라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서 자랑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훌륭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에 자신은 하찮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상대적으로 깨닫는데서 오는 자기 비하의 감정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비굴함입니다.
나는 사랑받을 만한 것이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는 것은 나보다 훌륭한 장점을 가진 지체들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 자기가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 인간인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자기에게 오셔서 용서해주셨는가를 절실하게 깨닫는데서 오는 낮아짐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비천하고 더러운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큰 용서를 받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기까지 악하고 죄 많은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것이 참된 복음적인 경건이고 복음적인 하나님 사랑을 깨달은 신자의 마음입니다. 이 때 신자의 마음속에는 완전히 새로운 자랑이 생겨나게 되고 자기 자신의 절대적인 무가치함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고백하게 됩니다. 은혜 안에 있는 신자는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한 신자의 경건의 깊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향해 어떤 절실한 마음을 품고 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한 사람의 경건의 깊이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깊이이고, 한 사람의 거룩함의 깊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영향력의 크기입니다. 오래 예수를 믿은 사람들에게서는 이상하게 십자가에 대한 감격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움직이셨던 처음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확실한 증거입니다. 오랜 신앙생활 속에서 남이 보지 못한 은혜의 세계를 보고, 남이 들어보지 못한 진리의 설교를 듣고, 남들이 체험해보지 못한 신비를 경험했다 할지라도 십자가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는 것은 처음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난날의 신앙생활을 회상해보십시오. 언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친밀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늘 문을 열고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진리가 영혼을 흠뻑 적시고 행복하게 만들었던 것이 언제였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교회 한 모퉁이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길 때, 교회를 향한 사랑과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사용하신다는 기쁨 때문에 마음속에 감사가 충만했던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때는 모두 십자가에 대한 깊은 감격이 있을 때였습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것이 새로운 자랑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에 대한 눈물이 언제 우리 마음에 있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돈이 많을 때, 하나님이 축복해주셔서 잘 나갈 때, 교회에서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될 때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오래 믿었든지 처음 믿었든지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깊이 느끼고 있을 때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복을 많이 주셔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아주 높은 자리에 세워주셔도 하나님을 몰라보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사랑하는 마음과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이 한 인격 안에서 공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지금 내가 짓고자 하는 죄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럴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줍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돌아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 오래 전부터 나를 기억하고 사랑하시며 집을 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아버지처럼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알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머리나 팔다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어떤 죄인이었는지를 절실하게 깨닫고, 그 큰 사랑으로 구원받고도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하찮게 여기며 지었던 불순종과 죄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기도할 때 우리를 용납해 주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에서 자신의 가치가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나라는 인간 자체가 은총의 덩어리일 뿐입니다. 나라는 인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장점과 훌륭함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행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자신을 신처럼 여기면서 살아온 교만함 외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사랑의 성향으로 사랑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나에게 그리스도의 용서를 통해 하나님 사랑을 알게 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 앞에서 압도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요, 앞으로도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살아갈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 안에서 사람들 앞에 뻐길 만한 장점을 발견한다는 것은 심리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종종 책 속에서 아주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인물들을 만납니다. 혹은 교회의 역사에서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지식의 깊이에 있어서 내가 평생 연구를 해도 이 사람처럼 될 수 없겠다고 하는 일종의 좌절을 안겨주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때는 자신이 그렇게 초라하고 작게 느껴질 수가 없습니다. 넓은 지식의 세계, 한없는 진리의 세계 앞에서 도대체 내가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될 때 한없이 작고 비참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모든 위대한 지식의 원천이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알고 모르는 것이 없으신 위대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압도하시는 사랑 앞에서 나의 장점들이 보이고 다른 사람에 비해서 뻐길만한 그 무엇이 내게 있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까요?
III. 자랑과 은혜 경험
A. 사랑 : 끊임없는 은혜 경험
자랑과 은혜의 경험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저금통장에 넣어 주시는 것처럼 사랑을 주시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식으로 주시는 것이라면 그 사랑을 우리가 쓴 다음에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침으로써 역사합니다. 비유를 하면,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주시는 은혜는 통장에 돈을 넣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호수에서 계속해서 물을 보내는 것처럼, 마치 링거를 맞는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계속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성령으로 말미암는 은혜의 작용의 결과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큰 사랑 앞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은 사람이 시간이 지나서 자기가 아주 대단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일은 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하나님 사랑과 은혜가 마음에 계속해서 부어질 때 비로소 우리가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것만큼 우리는 하찮은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이 느껴지고, 우리가 대단하고 큰 존재라는 사실이 느껴지는 것만큼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찮게 느껴지게 됩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용서를 통해서 경험하게 될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은 정말 위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이 세상에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인간들에게까지 흘러가기를 절실하게 바라는 마음입니다.
B. 감사 : 십자가의 현재적 경험으로 자기를 앎
이런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신자는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십자가를 현재적으로 경험함으로서 한 순간만 깨닫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매순간 십자가의 현재적인 경험을 통해서 자신은 다만 아무것도 아닌 티끌 같은 존재이고 더러운 죄인인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해주심으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상과 사람의 철학은 인간을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합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큰 자연의 세계 속에 흐르는 티끌 같은 한 부분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나 오늘 하루 태어났다 사라지는 하루살이나 계곡을 흐르는 물이나 나무에서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는 나뭇잎사귀와 똑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분수를 알고 겸손해지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인간이 하나님이 된 것처럼 우리 각자가 이 세상에서 최고의 존재이고, 세계 최고의 가치는 내가 행복해지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꿈, 하고 싶은 것들을 이 세상에서 한껏 펼치면서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세상 철학의 역사는 인간에 관해 두 가지 극단을 달려온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인간의 존재의 참된 가치와 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어렸을 때 제가 자랐던 고향에 가서 여름수련회 말씀도 준비하고 지쳐서 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숲속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찬송도 부르고 설교 준비도 하고 기도도 하고 쉬었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어렸을 적 고향을 밟으니까 눈물이 났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조그만 나무였던 것들이 45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큰 나무로 자랐습니다. 계곡의 물, 하천은 그대로 있는데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살던 동네를 돌아보면서 칠팔십 년 된 건물들이 무너질 것 같으면서도 아직도 있습니다. 거기서 뛰어놀았던 기억에 있는 몇 채 남지 않은 집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45년 뒤에는 내가 여기에 다시 올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때에도 이것들은 그대로 있을 것 같으면서 눈물이 확 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무상한 존재인가?’ 하루를 살다가 지나가는 하루살이나 매미를 보고 우리는 덧없다고 말합니다. 오늘 피었다 내일 아궁이에 던지는 들풀을 보면서 우리들은 덧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70년을 살다 죽는 인간이나 7일을 살다 사라지는 파리나 그 기준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입니다. 네가 이렇게 하찮은 존재인 줄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임을 알라고 합니다. 수없이 많은 인간이 태어났다 사라지고 온 우주와 세계가 움직이면서 인간은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지만 성경은 그것만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찮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어떤 면에서 커다란 물질세계 속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찮은 인간이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는다는 점에서 인간은 한없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의 인간의 사상과 철학들은 부분밖에 못 보기 때문에 참 인간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지도 보여주고, 하찮은 인간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도 보여줍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확정지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쓸모없는 인간을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 날마다 주님을 등지고 악하게 죄를 짓는 존재임에도 그 관계를 끊지 않고 다시 찾아가서 엎드리면 여전히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보답은 감사입니다.
(찬양)
이 세상 날 버려도 난 관계 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하게 됩니다. 그때 자기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십자가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이 원수 되었던 나를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사랑스러운 존재로 바꾸어 주었습니까? 하나님을 모질게 대적하는 것이 운명인 것처럼 살아가던,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인간을 꺾어 하나님 앞에 세워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전에는 하나님 앞에 진노의 자식이요 하나님을 떠났던 원수 된 인간이었으나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랑스러운 자녀로 만들어준 것이 십자가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이 말을 했으면 가슴에 와 닿지 않았겠지만 사도가 이 말을 했기 때문에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는 한때 이 세상에 너무 많은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 종교 지도자의 부푼 꿈을 안고 달음질치던 젊은이였습니다.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의 가장 엄한 규례를 따르는 베냐민 지파의 자손인 것을 자랑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것을 자랑했고 율법을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을 자랑했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 때문에 교회를 핍박하고 지체들을 죽이려던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이 자랑이었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길 뿐만 아니라 해로 여기게 만들었을까요?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사도는 이것이 모두 세상 자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오히려 그는 일평생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나는 부득불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할 것이라(고후 11:30)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약함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자랑할 것이 없는 인생은 정말 꿈이 없는 인생입니다. 우리에게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아직도 주님을 만나기 위해 다 버려야 했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자랑합니까? 정말 우리에게 자랑거리가 무엇입니까? 어느 순간 인생의 막이 내리고 불현듯 우리가 주님께 간다고 생각할 때 그때도 우리와 끊어지지 않은 인연을 가진 것들이 무엇일까요? 모든 것들은 이 세상에서 삶이 마치는 순간에 우리와 인연이 끊어지는 것들입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고 놓아지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죽으면서 유언을 남기셨는지 그의 묘에는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및 그의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라고 새겨져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던 신자가 교육을 많이 받으면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수 있습니다. 어리고 미숙하던 사람이 교회를 섬기면서 점점 더 잘 섬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금방 회심해서 새가족으로 있던 사람이 세월이 흐르면서 그 교회에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도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변화입니다. 그런 다양한 삶의 외형적인 변화와 상관없이 젊었을 때든지 늙었을 때든지 곤고할 때든지 은혜가 충만할 때든지 어릴 때든지 연로했을 때든지 우리에게 늘 있어야 할 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외에는 내게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하는 현재적인 신앙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정말 자랑할 것이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생명 있는 날 동안에 이런 마음을 품고 살게 되는 것은 매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매일매일의 신앙생활, 기도생활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은혜를 받을 때 우리는 매 순간 은혜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 예수께서 흘리신 눈물로 우리 마음의 유리창을 닦을 때 올바른 것이 뚜렷하게 보이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흐르는 피로 우리의 마음을 닦을 때 사랑하지 말아야할 것과 사랑해야 될 것 사이의 구별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사랑의 교리를 보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매순간 받지 않고서는 사랑을 계속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도 자기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그의 은혜라”라고 하는 고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하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느냐, 얼마나 큰 업적을 이루느냐, 그런 것이 우리의 꿈일 수 없습니다. 마음에 품은 간절한 소원은 내 설교를 들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분이 날이 갈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인간임을 절실하게 알고 젊어서 뿐 아니라 나이가 많이 들어 백발이 얼룩얼룩할 때도 말씀에 끊임없는 은혜가 내 안에 있어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주님 앞에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여러분 중 한 지체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소박한 꿈입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향한 견딜 수 없는 사랑과 자랑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여러분 안에 충만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영원한 사랑 42
영원한 사랑 1 (2008.6.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 (2008.6.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3 (2008.6.29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4 (2008.7.6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5 (2008.7.13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6 (2008.7.20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7 (2008.7.27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8 (2008.8.3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9 (2008.8.10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0 (2008.8.17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1 (2008.8.24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2 (2008.9.2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3 (2008.9.2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4 (2009.2.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5 (2009.2.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6 (2009.3.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7 (2009.3.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8 (2009.3.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9 (2009.3.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0 (2009.4.19 주일오전설교)
10.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I. 문맥 안에서의 ‘교만’
이어서 사도는 사랑의 또 하나의 특성, “교만하지 아니하며”를 말합니다. 이 ‘교만’은 어떤 의미에서 거론된 것일까요? 우선 이 특성 앞에서 사도는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를 말했습니다. 자기를 있는 것보다 더 부풀려서 사람들에게 집중 받고 높임을 받고 싶어 하는 자기 자랑의 마음은 그 뿌리가 교만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 사도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문제를 두고 이런 언급을 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말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남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하여 우월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지식은 세상에 대한 사물들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대해서도 동일합니다. 성경에 관한 많은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월한 마음을 갖기 쉽고,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조차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깔보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지식의 종류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어떻게 습득했고 그 지식을 어떻게 유지하고 있느냐가 지식을 통해 교만하지 않도록 하는 관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식의 획득 방식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과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교통하며 얻은 지식은 절대로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 못합니다. 생각과 생각 속에서 오가는 많은 지식들은 우리를 교만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지식을 얻을 때 우리의 마음을 굴복시키고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일들을 어렵게 만듭니다.
지난 주간에 비가 오락가락 하는 가운데 우리는 산 속에서 여름수련회를 가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먼 곳에 시간을 내서 가야하고, 불편한 환경에서 지내야 하고, 돈도 많이 드는데 인터넷을 통해 편안한 옷차림으로 거실에 앉아 조용히 듣거나 휴식을 취하면서 들으면 얼마나 더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한 번밖에는 선포되지 않습니다. 15년 동안을 여러분을 가르쳐본 결과,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주님의 말씀을 알고자 하는 마음만이 아닌,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함께 모인 예배 현장에서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될 때 가장 강력한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 현장에서 자신의 곤고한 영혼을 건져주실 하나님의 전폭적인 은혜를 갈망하는 가운데 그 진리를 듣는 것과,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책들을 뒤적이는 것과, 지난주에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궁금해서 인터넷을 켜는 것 사이에서 말씀에는 차별이 없을지 몰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믿음과 전적으로 의탁하는 사랑 속에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쉽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아무리 위성 통신이 발달하고 인터넷이 유용하게 사용되어도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꺼버릴 수 있는 웹상에서 생애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보다 예배의 현장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경험하면서 주님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을 때는 우리 자신이 무너지고 있는 때이기 때문에 전달되는 지식으로 인해 교만해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우리의 지성 속에 차가운 정보만을 남기고, 그 정보 속에 깃들여있던 하나님과의 별빛 같은 생생한 만남, 타오르는 불길과 같은 경험이 사라진 후에 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얻은 지식을 가지고도 다른 사람을 향해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지식의 획득 방식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열정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사람과 경건 안에서 이 지식을 유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한번 깊이 만나고 지식을 획득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렇게 획득된 지식이 거룩한 경건 안에서 유지될 때 교만해지지 않고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고 유익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II. 교만의 어의(語意): 퓌지오타이(φυσιουται)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할 때 ‘교만하다’라는 단어는 희랍어로 ‘퓌지오타이’(φυσιουται)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 전체에 7번 밖에 안 나오는 단어인데 고린도서에서 6번이 씌어졌으니까 고린도교회가 이 점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경고를 받은 교회였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언감생심 이들은 교만해져서 교회 안에 있는 심각한 도덕적인 타락도 방치했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를 가지고 교회에 상처를 주었으며, 심지어는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아버지와 같은 목회자인 사도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며 도전하는 방만한 죄를 저질렀으니 이 모든 것들의 바탕에는 교만함이 있었습니다. ‘퓌지오타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젠체하다, 부풀리다, 바람이 들어가서 팽팽해지다’와 같은 허황된 가운데서 우쭐하여 높아져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일곱 번 사용된 가운데 6번이 교회에 보낸 편지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들이 빠진 위험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단번에 고린도 교회를 얕잡아 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아마 “우리 교회가 고린도교회처럼 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으면 졸던 사람 외에는 “아멘” 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 고린도교회만한 교회를 어디에서 보셨는지 거꾸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오기 직전에 아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에피큐리오스학파 사람들과 스토아학파 철학자들과 논쟁을 하면서 그들을 굴복시켰지만 믿은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 중에 가장 초라한 열매를 거둔 경우 중 하나였습니다. 그 전도 사역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발을 들여놓은 곳이 고린도지역이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지방에 전도하러올 때 심히 두렵고 떨렸다고(고전2:3) 고백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중대한 결심을 했노라고 회상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에 관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여기에서 ‘작정하였노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까? 결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순수한 복음으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결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많은 사역의 여정 중 가장 마음이 낮아져서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사역이 시작되었던 지역이 바로 ‘고린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 바울로부터 선명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들었고, 그 앞에 깨뜨려지면서 고린도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는 당시에 유명한 항구 도시였고, 항구 앞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국제 무역시장이 서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터가 남아 있습니다. 그곳은 그리스 시대부터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놀라운 부를 과시하고 국제 무역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도시였고, 물질적으로는 아주 풍요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철학적인 사유와 사상에 대한 성찰에 탁월한 헌신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사상을 전하였고, 사상적으로도 매우 발달해서 여러 가지 철학과 사상을 따라 학파를 형성하던 동네였습니다. 그곳에서는 아프로디테라는 신을 모시는 신상이 있고 제단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방신을 섬기며 무역과 농사에서의 풍요를 기원하던 복잡한 도시였습니다. 여기에 선명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선포되었고 그 도시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경험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의 놀라움 속에서 이들이 믿음을 받아들이고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많은 은사를 경험하였고, 그 은사 때문에 복잡한 문제가 생겨날 정도로 생명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도대체 어디에 이런 정도로 훌륭한 교회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이들에게서 사라지자, 하나님 앞에 좋았던 것들 때문에 나빠지게 되었습니다. 은사가 얼마나 훌륭한 것입니까?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도록 위탁되었습니다. 은사들은 연약한 하나님의 교회를 굳데 세우는데 아주 요긴하게 쓰이는 섬김의 도구들이었습니다. 한 가지가 사라지자, 하나님이 주신 은사끼리 충돌을 일으키면서 수많은 지체들을 갈라놓았고 분쟁의 정신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복음을 아는 지식은 얼마나 훌륭한 것입니까? 그러나 한 가지가 사라지자 이 지식을 가지고 형제들에게 칼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라진 그 한 가지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지식을 얻을 때는 믿음과 사랑으로 획득했지만, 십자가를 통한 참된 경건이 그들에게 살아있지 못할 때 그 사랑은 마음속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차가운 논리만이 남아서 사람들을 정죄하는 칼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책 속에서 모든 죄의 뿌리를 교만으로 보았습니다. 자기 사랑이 죄의 뿌리이지만 자기 사랑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교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의 시조인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모든 사람들 안에 사망과 함께 죄가 역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담의 범죄의 근원도 교만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것들을 너희 마음대로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너희가 정녕 죽으리라” 선악과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선악과의 정체와 이것을 먹지 말라고 하는 명료한 지식이 살아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는 뱀의 유혹을 받았지만 마지막 판단을 내린 것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먹어도 괜찮아. 먹으면 더 좋은 일이 일어날 거야. 하나님은 절대로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이 뭘 알겠어? 내가 더 잘 알지. 먹어도 돼.’ 이것이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가 목구멍까지 가득 차 있다고 할지라도 ‘아니야. 그것은 틀렸어.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으로 옳아. 네 생각은 틀렸어.’라고 말하면 죄가 목까지 있어도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지는 않습니다. 의지가 동의해주지 않으면 죄는 마음 안에 있지 산출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교만이 작동해서 하나님의 판단보다 나의 판단이 더 맞다고 생각하고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은 사랑이 없는 자리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랑이 사라진 만큼 교만은 생겨납니다. 사랑과 교만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III. 사랑과 ‘교만’
여러분에게 사랑과 교만이 어떻게 밀접하게 연관이 되고, 우리 안에서 교만이 어떻게 생겨나고 사라지는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A. 사랑 : 초월적 경험
사랑은 원래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감정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동물들에게도 있지 않습니까?”라고 하는데 동물들은 사랑이 아니라 본능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가시고기가 온 몸의 비늘과 지느러미가 다 헤어 떨어지고 마지막에 새끼들에게 다 뜯어 먹히도록 자신의 몸을 희생하지만 자기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지 그 의미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하나님이 물질세계의 생존을 위해 주신 본능입니다. 만약에 짐승이 새끼를 낳고 따끈따끈할 때 다 먹어버린다면 세상에는 생명의 연속성이 끊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본능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감정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원래 그 사랑은 하나님 안에만 있는 것이었는데 당신을 닮은 인간의 영혼 안에도 사랑을 주셔서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게끔 만드신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도 인간만이 진정으로 알 수 있습니다. 동물들도 자기를 예뻐해 주면 좋아합니다. 동물들이 사랑을 받을 때 좋은 느낌을 받지만 주인이 자기를 사랑해주는 계획이라든지 자기에게 부여하는 의무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반응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랑은 처음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난 다음에 생겨난 가장 큰 비극은 사랑을 올바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근원적으로 박탈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동물적인 사랑은 인간에게 남아 있지만 하나님이 원래 아담에게 주셨던 순수한 사랑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사랑할 힘까지도 박탈당했다면 문제가 적었을 텐데 사랑할 힘은 남아 있지만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했습니다. 대상을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랑이 굽은 방식으로 마구잡이로 표출되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악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정의는 그릇된 질서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것이 중요하고 이것이 올바르고 이것이 아름다운 것이고 이것이 선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랑이 끓어오르는데 아름다운 것보다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추한 것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추한 것이 나에게는 콩깍지가 씌어서 예쁘게 보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선하게 보이는 것이 나에게는 안 좋아 보이고, 하나님께 악하게 보이는 것이 나에게 선한 것처럼 보여서 굽은 방식으로 사랑이 마구 분출되듯이 쏟아져 나갑니다. 그렇게 여러 방향으로 쏟아져 나갈 수 있는 것이 악입니다. 사랑의 크기가 큰 사람들이 악을 더 많이 저지르게 됩니다. 나이가 많아서 정욕도 없고 물질에 대한 욕망도 없고 무덤이나 보러 다니는 시절이 되면 자기가 죽을 무덤을 사놓고 죽습니다. 그리고 예쁜 여자를 본들, 아름다운 외국의 풍경을 본들, 맛있는 음식을 본들, 어차피 간병인의 보호를 받으며 변을 받아내는 처지에서는 욕망이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 속에서 그런 사랑의 크기 자체가 현저히 줄어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이 인간에게 경험되는 방법이 중생과 회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의 죄에 대해서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며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사실을 붙들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사랑의 경험이 어떤 식으로 경험됩니까? 내 안에 원래 있던 것들이 깨어나는 것 같은 경험입니까? 아니면 전혀 없었던 것들이 하늘로부터 나에게 부어지는 경험입니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생애 최초로 경험할 때는 내 안에 있는 것들이 깨어난다는 감정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확 부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고 그것이 위로부터 부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랑의 경험은 자기 바깥에서 초월적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을 스스로 일깨워 구원하려고 하는 종교들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가망성이 있는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오직 밖으로부터 건져내어주지 않으면 스스로 구할 수 없는 존재라고 보는 것입니다.
사랑의 경험은 하나님의 존재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 존재를 이야기할 때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당신이 만드신 세계와 맺는 관계를 두고 크게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하나는 초월성이고 하나는 내재성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가 없이는 지은바 된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사람도 하나님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만드시고 하나님을 닮게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질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서로는 서로에 대해서 전적으로 다른 존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모든 피조 세계를 생각할 때 우리 마음속에 뚜렷이 그어놓아야 할 선입니다. 그 선을 시종일관 굳게 붙들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이 땅에 있다는 사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도저히 비슷할 수조차 없는 무한하고 현저한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바깥에 있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이 세계보다 작은 셈이 됩니다. 그러니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계를 다 창조하셨고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질적으로 무한한 차이를 가진 사물들이지만 하나님을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창조되었으나 창조된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 안에 있지만 당신 자신을 어떤 피조물에게도 나누어주지 않으십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 풀들도 하나님 안에 있지만 이것을 뜯었을 때 그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안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체는 하나님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은 비록 풀이나 꽃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예외 없이 하나님 안에 있지만 하나님 자신을 세상에 있는 피조물들에게 티끌만큼도 나누어 주셔서 갖고 있게 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교리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은 금방 혼란이 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다른 것은 이해가 되는데 거듭난 인간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거듭난 인간은 분명히 예수를 믿는 순간에 그리스도께 접붙여지고 성령님이 그 안에 와 계신 존재이고 성령님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나 이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합니다. 물론 거듭난 신자 안에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님이 계시고 안 계신 효과만 나타내시는 것이 아니라 진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신자의 육체는 성령이 거하시는 전입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영 없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고 그리스도를 우리 주라고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속에는 예수의 영, 성령이 계십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안에서 성령님이 계신 것과 당신이 인간 안에 계신 것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은 참 성령님이 맞지만 삼위일체 안에 계신 것처럼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차별성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어떠한 본질도 피조세계 속에 나누어주지 않고 모든 피조물들을 품고 계십니다. 당신의 어떠한 부분도 피조물 안에 없는 피조물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모든 만물이 하나님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합니다. 그러므로 “어디든지 신(神)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라고 설명하는 것은 불교적인 설명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초월성입니다. 그러면서도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우주가 아무리 드넓고 끝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주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공간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 자신이 공간이거나 공간 속에 하나님이 일부의 장소를 차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사랑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이지만 하나인 사랑이 신자에게는 두 가지 방식으로 경험됩니다. 첫째는 초월적인 방식이고 또 하나는 내재적인 방식입니다. 초월적인 방식이란, 예를 들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제멋대로 인생을 살았는데 어느 한 순간 복음 앞에 거꾸러지면서 자기가 깨뜨려집니다.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향하여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기이하고 큰 사랑의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초월적인 사랑의 경험입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가르치던 학생 가운데 한 명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신학교에 들어온 사람인데 조직폭력배의 두목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회심을 하고 개척교회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들어왔습니다. 어느 학생이 와서 두 주째 목사님 점심 사드리게 해달라고 조르는데 안 갔습니다. 얼굴에 칼자국이 나있고 너무 험한 사람이어서 같이 밥을 먹고 싶지 않았습니다. 굳이 가자고 해서 밥을 먹었습니다. 성령을 체험하고 회심하게 된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사랑의 경험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이지만 깨어난 사랑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초월적으로 부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구원받을 때 한번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후에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늘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초월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그런 사랑의 경험 앞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자기의 티끌 같은 존재를 거기에서 깨닫게 됩니다. 거기에서 자기가 허물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런 사랑의 경험은 신자가 된 후에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개인적인 부흥과 방불한 것입니다.
또 하나의 경험은 내재적인 사랑의 경험입니다. 예를 들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뺀질거리고 기도도 안하고 새벽기도도 안 나옵니다. 예배 시간 앞뒤에 세속적인 스케줄 잔득 잡아놓고 예배 시간에 간신히 나와서 졸다 가거나 다른 생각하다 갑니다. 그러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은 단절되고 죄가 융성해집니다. 그럴 때 목양도 잘 안 받습니다. 늘 바쁘다고 합니다. 가치도 없는 일에 정신을 팔고 돌아다닙니다. 6개월, 1년, 살다보면 곤고해지기 시작합니다. 잠이 안 오고 괴롭고 성공도 잠시입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죄에 눈을 떠서 이 죄, 저 죄를 지어봅니다. 그때는 괴롬을 잊을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괴로움이 증폭됩니다. 곤고한 정도가 아니라 죄를 지은 양심의 가책까지 괴롭히고 견디기가 힘이 듭니다. 마음이 지옥이 됩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옛날을 회상합니다. 예전에는 이것보다 더 나쁘게 살다가 어느 날 교회에 갔더니 성령의 불이 내려서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주님을 생애적으로 만나 이 모든 것을 다 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한번만 더 그런 경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만 그런 기도가 응답이 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백번을 양보해서 그런 기도가 응답되어서 다시 한 번 놀라운 초월적 사랑의 경험이 주었다고 할지라도 그가 그 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힘이 듭니다. 왜 그런지를 ‘은혜와 부패’라는 시리즈에서 한 달 동안 설교했습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 책이 있으니 빌려서 읽으십시오.
왜 그렇게 생애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해도 신자가 된 다음에는 그런 감격으로 돌아갈 수 없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첫사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많아도 돌아갔다고 간증하는 사람은 희귀합니다. 그릇된 방법으로 첫사랑을 찾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찔리십니까? ‘영적인 침체도 세월이 흐르면 나아지겠지.’ 그랬던 분들이 있습니다. 10년 지났습니다. 안 변합니다. 그 동안 사회적인 지위도 바뀌고 직업도 바뀌고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고 교회에서는 이런저런 직분을 맡았지만 본질적인 변화는 아닙니다. 그렇게 마음대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영혼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껍데기만 살아갑니다. 뺀질대면서 기도도 안 합니다. 경건생활이 거의 없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도 단 30분이라도 마음을 깊이 쏟으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천사도 이 세상에 내려와서 그렇게 살면 타락할 것입니다. 죄를 좋아하는 부패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 경건생활을 안 하고 별 수가 있겠습니까? 곤고하게 살면서 쏟아지는 폭포수 같은 사랑을 만나게 해달라고 빌어도 응답이 안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정신이 번쩍 납니다. ‘아, 내가 틀렸구나.’ 그리고 회개를 합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마음 밭에 죄가 잡초처럼 자랐습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새벽기도를 나오고 구역예배도 가고 성경도 매일 읽고 묵상도 하고 책도 읽고 설교도 듣고 공부도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다 보니 좋습니다. 그런 생활을 점점 멀리하면서 이제는 다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몇 주가 지났습니다. 예전에는 이상하게 기도만 하려고 무릎을 꿇으면 철벽이었는데 조금씩 창문이 열리고 빛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그렇게 살다보니까 어느 순간 마음의 눈이 녹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생겨납니다. 이때 사랑은 밖에서 폭풍처럼 밀려들어오는 사랑이 아니라 내 안에서 샘솟듯이 흙탕물을 거둬내고 서서히 사랑이 올라오는 것 같은 경험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 사랑에 대한 내재적 경험이라고 합니다. 죄와 싸워 이긴 승리라고도 부릅니다. 죄와 싸워 이겨서 우리 안에 묻혀 있던 은혜의 샘들이 다시 솟아나게 됩니다. 새살이 돋기 시작합니다. 상처를 많이 받았는데 은혜를 받으니까 새살이 돋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두 가지를 항상 같이 해야 합니다.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초월적 사랑의 경험이든 내재적 사랑의 경험이든 둘 다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초월적 사랑의 경험은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이 초월적 사랑의 경험은 모든 만물과 땅을 초월해 계신 지극히 위대하시고 영광스런 하나님을 알게 만들어주고, 내재적 사랑의 경험은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난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내 안에 충만하신,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하게 만들어줍니다. 물론 이 두 개가 완전히 나눠지는 것은 아니지만 초월적인 사랑의 경험은 초월적이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내재적인 사랑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탁월하신 사랑을 알게 합니다. 초월적인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 안으로 사랑이 들어오고, 내재적인 경험을 통해서 우리 바깥으로 눈을 들어 존귀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송축하게 만들어 줍니다. 두 가지 사랑의 경험이 사실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의 사랑에 대한 각기 다른 경험을 보여줍니다.
B. 사랑과 ‘자기 없음’의 경험
이러한 하나님 사랑에 대한 탁월한 경험은 자기 존재와 관련된 경험을 필수적으로 동반하게 됩니다. ‘자기 없음’의 경험입니다. 그러면 ‘자기 없음’의 경험이 무엇인가? 우리가 예전에 하나님을 모르고 나를 의지하고 살 때는 힘이 없는데도 ‘난 힘이 있다.’ 별로 가치가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인데도 ‘나는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죄가 비롯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산산이 부서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두 가지를 통해 경험됩니다.
1. 용서를 통하여
용서를 통하여 자기 자신이 아무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경험은 자기 신뢰가 깨어지는 경험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 때는 이 세상 사람이 모두 자기를 버려도, 엄마도 나를 버려도, 사랑한다고 목숨을 걸었던 남편이 나를 버려도, 세상이 나를 끝까지 버리지 않는 존재가 하나 있습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의 영원한 친구는 자신입니다. 자기를 믿고 살았기 때문에 자기가 둘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한순간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십자가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자기가 정말 끔찍한 죄인이고 이제껏 행한 모든 일들은 죄에 물들었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게 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에 나타난 흉악한 형벌을 보면서 우리의 죄의 깊이와 넓이와 흉악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자신과의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나는 평생 너만 믿고 따라 왔는데 마지막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나는 이제껏 너만 사랑했는데 결국은 그렇게 사랑하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 결국은 하나님을 등지게 만들었고 주님의 큰 사랑의 부르심을 향하여 내 귀가 멀게 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들이 여러분입니다. 뼈 속 깊이 자기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던 신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옛날에 예수 바깥에 있을 때 자신에게 했던 것만큼만 하나님께 하면 여러분은 모두 순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발견하고 깊이 깨닫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깨닫습니다. 내게 어떤 감정이 일어나면 ‘이것이 올바른 것인가?’ 내게 어떤 욕구가 생겨나면 ‘이대로 하면 과연 괜찮을까?’ 되묻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대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면 ‘이 생각과 계획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큰 죄를 그리스도 예수께 지우고 자기가 당해야 할 흉악한 형벌을 친히 당하게 하심으로 자기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면서 도저히 자신을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뼈 속 깊이 사무친 것이 죄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기가 아무 가치 없는 인간이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자기가 예전에는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자신의 존재는 자기 인생을 끌어다가 죄악의 구렁텅이 속에 던져놓고 짓밟아버린 것밖에는 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자기를 사랑하신 위대한 사랑의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라는 고백을 거기서 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심오하게 깨달은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죄인들이었습니다. 죄 가운데서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2. 은혜를 통하여
또 하나의 ‘자기 없음’의 경험은 은혜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됩니다. 신문이나 TV를 보면 얼굴 예쁜 사람들이 나와서 광고를 합니다. ‘얼굴 잘 생긴 사람들이 나온다고 무슨 영향이 있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엄청난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얼굴이 예쁘게 생긴 탤런트들은 돈을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거저 찍으라고 해도 안 찍어 갑니다. 도움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에게 인간은 평등하다고 하면 웃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 로마의 문명이 발달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전기불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달구지를 타고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은 얼마나 발전했는지 자고 일어나면 눈부시지 않습니까? 며칠 전에 대전에 내려가서 우리나라 국방과학을 연구하시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나라 국방과학 수준이 눈부시게 발달했노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무기를 만들어내는 단계를 넘어서 기술을 응용하여 독자적인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도달했다고 합니다.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좋아할 수도 없고 싫어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탱크를 2천억을 들여서 개발했는데 터키에 4천억을 받고 수출을 했다고 합니다. 이번에 만들어낸 소총은 세계 최고라고 자부한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달은 쳐다보고 느낄 뿐이었는데 이제는 달에 갔다 오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2013년엔 사람들이 화성에서 활동을 할 것이라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3000년에는 지구의 용도가 폐기될 것이라고 보고 그 다음에 가서 살 수 있을 가장 유력한 별이 화성이라고 본다고 합니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이미 백년 계획을 세워서 화성 이주계획을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과학이 발달되었으니 달구지를 타고 다니던 시대의 문명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위대한 과학과 문명의 발달을 이루었어도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는 일은 자기 힘으로 1mm도 옮겨 놓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전적인 무능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들이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30년 전에는 가정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20년 전에는 어둠 속에서 행하던 악들이 지금은 백주 대낮에 거침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악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시고 자기를 창조하신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 하나만 움직이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달까지 30만km이고 화성까지는 빛으로 가도 몇 십분 가야 하는 거리이지만 한발자국도 안 되는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창조목적을 벗어나 살아가는 인간을 바꾸어 선을 향하게 만드는데 있어서는 수많은 학교 교육과 도덕 교과서, 과학의 증거들을 들이대도 악을 향하는 인간의 본성과 마음 자체를 바꾸어 놓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은혜의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얼굴이 잘 생긴 탤런트는 광고를 한번 찍으면 10억을 받고, 못 생긴 사람은 차에 치어 죽어도 몇 천만 원 밖에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강원도 갔다가 우연히 스님을 만났습니다. 스님이 나에게 차를 태워달라고 손을 흔들어서 태워주었습니다. “스님이 차를 얻어 타셨는데 목사님의 차를 얻어 타셨네요.” 하니까 스님이 깜짝 놀랍니다. 가면서 신앙, 종교 이야기도 했습니다. “목사님은 내가 만난 목사님들과 많이 다르네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는데 자기 집안이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라는 것입니다. 중이 되면서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나를 낳아준 엄마가 나에게 마귀새끼라고 할 수 있냐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별 의식 없이 살았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가 생명 없는 종교를 택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의 딸, 혹은 자기의 누이를 마귀라고 해 버리고 나면 과연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 어디에 마귀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라고 되어 있습니까? 얼핏 보면 신앙심이 뛰어나서 그럴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신앙심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사랑이 모자랐기 때문에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도 예수를 믿습니다. 우리 교회에 왔던 형제 중에 삶이 하도 고달프니까 중이 되려고 절에 들어갔다가 제 책을 읽고 회심해서 돌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을 하나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이교도에서도 구원해내시고 노예 상인도 구원해 내셔서 당신의 자녀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지만 절대적인 의미에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다 똑같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더 가치 있는 사람이 있고 덜 가치 있는 사람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그 크기는 무엇이 결정할까요? 선한 의지의 크기입니다. 가슴에 이 문장을 깊이 아로새기십시오.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고 한 인간의 가치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선한 의지의 크기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시시해 보여도 영혼을 잘 가꾸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VIP 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선한 의지가 큰 사람이 소중한 사람입니다. 선한 의지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만드신 목적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의 크기인데, 이것은 사랑의 감화에 의해서 계속 성장하는 의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미사일을 가지고 수많은 보물을 가지고도 할 수 이 일을 하나님의 은혜는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고백록』 속에서 이런 회상을 합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일까? 내 팔을 보고 이것을 집으라고 하면 쉽게 집고, 내려놓으라고 하면 말을 듣는데 마음을 향해 명령을 하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손과 발까지의 거리보다 마음과 마음 사이의 거리가 더 짧은 데도 마음은 마음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스스로 바꾸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만이 할 수 있습니다.
C. 사랑: 하나님의 뜻을 실행함
하나님은 은혜의 힘으로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악과 죄, 고통 속에서 건져내어 악한 의지를 선하게 변화시키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의 마음을 돌이켜 하늘의 거룩함을 향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심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씩씩하게 사는 것으로 자신이 그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자기가 깊이 무너지고 녹아지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찬양)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하나님의 은혜가 어루만지니까 십자가에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 고난 당하고 죽으신 하나님의 큰 사랑이 마음속에 밀려옵니다. 창칼로 위협해도 바꿀 수 없던 마음과 버릴 수 없던 옛 삶의 태도와 헛된 것들에 대한 사랑을 버릴 수 있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통하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만드시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이 사랑을 주시고 심지어는 불신자들에게까지 사랑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경건의 요체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하나님에 대해 이끌리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두 개의 마음이 구획지어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두 개가 서로를 끌어안고 통섭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친근하게 하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떨림이 아니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만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깔보는 사랑이 아닌, 사랑과 두려움의 통합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한없이 두려워하고 떨려 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려하는 사랑의 탁월한 감정이 경건의 요체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신자로 하여금 ‘자기 없음’을 경험하게 만들어줍니다. 자기 무화의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가치와 능력에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용서와 은혜를 의지하여 겨우 살아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존재는 없고 자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두려움을 가지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우주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기쁨으로 아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통한 ‘자기 없음’의 경험입니다.
Ⅳ. 우주적 흐름으로서의 사랑
이런 사랑은 우주적인 흐름으로서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 안에 있는 사랑, 사랑이신 당신 자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당신이 만드신 모든 피조세계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호의, 이 모든 것은 각기 구분이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과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세계를 돌보시는 것 사이에는 뚜렷한 구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하나의 아름다운 흐름을 형성합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준비하러 강원도에 갔는데 밤중에 나와 보니 별들이 은하수와 함께 하늘에 가득합니다. 티끌과 같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지구를 넘어서는 가보지도 못하고 헤아릴 수도 없는 우주를 당신의 품에 품으시고 모든 세계 안에 당신의 찬란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특별히 그 사랑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에게 자기의 외아들을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심으로 당신의 큰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온 우주를 휘돌면서 당신 자신 속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우주적인 큰 사랑의 흐름 속에 나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고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만도 못하고 꽃의 아름다움만도 못한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Ⅴ. 결론
하나님은 아무 가치 없는 인간을 위해 예수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큰 사랑의 파도 앞에서 어떻게 교만해 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티끌인 것을 깨닫게 되고, 아름다운 인생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하게 됩니다. 우주 전체를 싸안는 주님의 위대한 사랑의 흐름 앞에 우리는 수많은 은하수 중에 작은 별 하나, 혹은 티끌과 같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당신이 흘러가게 하고 싶으신 대로 우리의 인생을 사용해주시도록 하나님께 순종하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 것처럼 또한 이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며, 위로는 하나님을, 아래로는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이웃들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예수를 만난 사람의 인격적인 특징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사랑 42
영원한 사랑 1 (2008.6.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 (2008.6.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3 (2008.6.29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4 (2008.7.6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5 (2008.7.13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6 (2008.7.20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7 (2008.7.27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8 (2008.8.3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9 (2008.8.10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0 (2008.8.17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1 (2008.8.24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2 (2008.9.2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3 (2008.9.2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4 (2009.2.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5 (2009.2.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6 (2009.3.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7 (2009.3.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8 (2009.3.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9 (2009.3.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0 (2009.4.19 주일오전설교)
11.무례히 행하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I. 문맥 안에서의 ‘무례함’
이어서 사도는 사랑의 또 다른 한 가지 특성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입니다. 문맥 안에서의 ‘무례함’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것은 앞에 나온 사랑의 특성인 “교만하지 아니하며”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무례함은 교만함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부풀려져서 자기를 우월한 존재로 생각하게 되면 그것은 사랑이 없는 증거이고 거기에서 모든 무례한 행동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II. ‘무례히’의 어의(語意): 아스케모네이(άσχημονεῖ)
여기에서 나온 ‘무례히’ 행한다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라는 구절을 보면서 ‘사랑을 이야기하다 왜 갑자기 예절 이야기가 나올까?’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간단한 한두 가지의 예의나 범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례히 행한다.’라는 말은 희랍어로 ‘아스케모네이’(άσχημονεῖ)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스케마’(σχημα)라는 희랍어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이 ‘스케마’는 영어의 'scheme'이라는 단어의 출처이고 ‘형식, 틀, 예법, 방식’,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거기에 ‘아’(ά)라는 부정 접두어가 붙어서 ‘스케마가 없이 행동한다.’ 이런 뜻이 된 것입니다. ‘형식 없이, 틀 없이, 규모와 예법이 없이 행동한다.’라는 뜻입니다. 요즘 동시대의 말로 푼다면 ‘개념이 없이 까불다.’라는 정도의 뜻이 될 것입니다. 이 단어의 정반대말이 ‘유스케모스’(εύσχημος)라는 단어인데 ‘좋다’라는 의미를 가진 ‘유’(εύ)가 ‘스케마’(σχημα)와 함께 붙은 것입니다. 이 단어가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적당하게’ 라는 단어로 번역되었고, 12장에서는 ‘아름다움’이라는 말로 번역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은 “사랑은 규모, 법, 도리, 규범, 이런 것들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 안에서 끓어오르는 비이성적인 정념이 아니라 놀라운 질서를 가지고 그 질서를 지향하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III. 사랑과 질서
A. 아름다움의 본질 : 복수의 어울림
우리는 사랑과 질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 사랑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움의 본질은 복수의 어울림입니다. 즉, 하나로만은 아름다울 수 없고 다른 것들과 함께 어울림으로써 아름다워지게 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자연의 모든 사물들은 단수로 된 것이 없습니다. 모두 복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 하나도 수많은 물질의 구성요소들이 함께 서로를 잡아당기고 교통하는 가운데 물질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풀잎 하나도 평범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물질의 구성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유통하면서 자라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육체도 많은 물을 비롯한 수많은 구성요소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떤 사물이 소멸된다는 것은 이 결합이 흩어져서 구성요소가 각각 해체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인간이 죽으면 영혼과 육체가 헤어지고, 육체는 다시 세월이 흐르면 흙으로 돌아가면서 수많은 구성요소들로 각기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물질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물질 하나하나도 여러 가지 구성요소들의 어울림으로 이루어져 있고 하나하나의 사물들은 다른 사물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아름다움을 만들어냅니다. 밤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의 서로 다른 밝기와 거리, 거기에 따른 빛깔들, 이 모든 것들이 어둠과 어우러져서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연적인 사물들이 복수로 어울려짐으로서 아름다움을 연출해내는데 더 많은 개수가 더 정교하게 어울릴수록 그 아름다움은 더 탁월하고 뛰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질서
하나님은 이렇게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이 아름다움은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질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당신 자신 안에서 아름다우십니다. 하나님도 꼭 복수이셔야 했던 것입니다. 성부는 성자를 낳으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함으로써 삼위로 존재하십니다. 한 하나님이시지만 세 인격을 가지시고 성부 성자 성령 각각의 탁월한 아름다움이 서로를 사랑하심으로 세 개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으로서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도 삼위로서 서로 사랑하는 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실 수 있고 사랑이 아닐 수도 있는 우연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에게 필연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삼위 안에 있는 사랑을 모든 피조세계를 향해 흘려보내시는데 이것이 바로 삼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경륜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세계를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아름다움은 두 가지로 집약되는데 하나는 자연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계의 하나하나의 사물을 완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나무는 나무로서 완전하고, 하늘은 하늘로서 완전하고, 인간은 인간으로서 부족한 것 없이 완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이 완전함은 사물 하나하나에 깃들여 있는 구성요소들이 서로 아름답게 어울리면서 만들어낸 완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물들을 서로에게 어울리도록 창조하셨으니 사물들만 지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도 만드셨습니다. 공중에는 새가 날게 하셨지만 땅 위에는 짐승들이 다니게 하셨고 물속에는 고기들이 헤엄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물들을 아름답게 창조하셔서 모든 세계 속에 질서를 부여하신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아름다움을 많이 느낄 수 있도록 해주면 신앙에 훨씬 가까이 다가갑니다. 무질서와 어울리지 않은 많은 것들이 어울리는 것처럼 주입될 때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자연 속에만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아름다움이 질서이기 때문에 아름다움의 질서들이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아래로는 사람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알아 인간들이 이 질서 속에 어울려서 아름답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을 창조하실 때 모두 한 번에 창조하십니다. “하늘에는 새가 날아라.” 말씀하시니까 수많은 종류의 새들이 하늘을 날았습니다. “바다에는 각종 물고기들이 헤엄치라.”라고 말씀하시니까 커다란 고래로부터 시작해서 작은 플랑크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류의 물고기들이 한 번에 창조되었습니다. “땅 위에 짐승들이 있으라.”고 명령하시니까 땅은 수많은 짐승들을 내고 짐승들은 이리저리 땅 위를 다녔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인류가 온 땅에 널리 번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땅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지라.”고 하셔서 한 번에 늙은 사람, 젊은 사람, 어린 아이 할 것 없이 남녀노소 수많은 사람을 세계 각처에 흩어놓을 수 있으셨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만들지 않으시고 하나만 만드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흙으로 둘을 만들어서 남자, 여자라고 하면 될 텐데 하나님은 딱 하나만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아담입니다. 여자는 아담의 갈비뼈를 꺼내서 창조하셨습니다. 많은 남자들이 여자보고 “너는 나 아니면 만들어질 수 없다.”라고 하는데 사실 남자가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자기는 흙에서 만들어졌지만 여자는 훨씬 고급 재료를 사용해서 만들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아담과 하와는 남녀로서 결혼을 통해 부부가 되기 이전에 이미 한 몸이었습니다. 자기의 살과 뼈의 한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루할 정도로 긴 세월이 걸려야 인류가 번성하는 방법인 생육의 방식을 택하셨습니다. 물고기는 한번 알을 낳을 때 수 만개를 낳습니다. 사람도 한번 낳을 때 수없이 낳으면 좋을 텐데 하나만 나옵니다. 둘 나오는 집안이 가끔 있고 셋 나오는 집안은 아주 드물고 네쌍둥이도 있다고 하지만 희귀합니다. 그렇게 지루한 과정을 거쳐서 인류가 이 세상에 퍼지게 하셨던 것에는 하나님의 오묘한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류를 하나의 가족으로서 살게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피부색의 차이, 사는 곳의 차이, 이런 것과 상관없이, 그리고 얼마나 번성해서 수십억의 인구가 땅에 충만하게 되든지 하나님은 이렇게 창조하심으로써 모든 인간을 한 가족이 되게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는 한 가족이 되지 않도록 그것을 깨뜨리고 거기에서 뛰쳐나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죄는 순식간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인간의 마음에서 앗아가 버렸고, 숙명적으로 자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리자 가족 관계로서 살아가는 것은 큰 고통이 되었고,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동거하기에 심히 불편한 관계로 깨뜨려졌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대에 와서는 동생과 함께 한 가족으로 동거하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기 때문에 그를 돌로 쳐서 죽이고 부모를 떠나 정처 없이 먼 곳으로 떠났던 것입니다.
이후로 퍼지는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을 상실했기 함께 어울려 질서를 갖추며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도전했고, 온 인류를 한 가족으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공공연하게 도전하였습니다. 이 도전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도 했지만 민족과 나라, 고향, 자기 식구 등을 덩어리로 묶으며 온 인류를 하나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가족화 계획에 대해 노골적으로 대항하는 체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전라도, 경상도를 나누며 싸우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를 짓는 것인지를 충분히 이해할 것입니다. 한 나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은 다른 나라를 적으로 만들고, 자기 고향에 대한 철저한 애정은 다른 고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적대감을 갖도록 합니다. 이런 이치로 세상은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셨던 계획으로부터 멀리 이탈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한 가족이 되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한 가족이 될 수도 없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원래 창조의 계획대로 하나의 가족으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종말에 이르러도 하나님이 정하신 사랑의 질서에 대해 항거하며 끝까지 한 가족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다수들을 지옥에 보내심으로써 창조세계를 더 이상 더럽히지 못하도록 보존하십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이시고,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의 변화를 주셔서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이 정한 질서를 따라 한 가족으로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은 즉시, 이전의 개별자로 살던 자리에서 돌이켜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지체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성향을 주셨고, 우리를 접붙여 교회의 아름다운 연결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미래에 구원 받은 모든 인류들을 하나로 엮어서 완전한 한 가족으로 만드시는 모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구원을 받아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완성하시기 전까지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오는 영향과 자신 안에 있는 잔존하는 부패성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마음속에 있지만 순간순간 가족으로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싫고, 공동체 속에서 뛰쳐나가거나, 이 공동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제멋대로 행동을 하고자 하는 욕구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가 유혹을 받았던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의 소산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대책 없이 내버려 두시지 않고 끊임없이 은혜를 주심으로 사랑을 솟아나게 하십니다. 질서를 깨트리고 아름다운 가족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것을 싫어했던 마음을 뉘우치고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보이는 교회 안에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가 만약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교회의 질서와 자연적인 질서를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명백히 싫어하는 것입니다.
C. 회심 : 신적 질서로 돌아감
회심은 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랑의 질서와 관련 시켜서 말하자면 회심은 신적인 질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런 질서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내가 온 우주의 중심이고, 내가 이 질서의 판단자인 것처럼 제멋대로 행동하며 살았습니다. 그 마지막은 견디기 힘든 고통과 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것의 마지막 결과가 쓰라린 고통이요 커다란 악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결국은 자신도 행복해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하게 되는데 그 회개는 질서를 이탈한 것을 고통 속에서 뉘우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이런 것들을 잘 보게 됩니다. 함께 가족으로 살아가는데 아내는 아내로서 남편은 남편으로서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자식을 자식으로서의 자기 자리가 있고 각각 거기에 도리가 있습니다. 이런 자리와 도리를 떠나서는 사회가 불행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어떤 종교나 도덕의 형태이든지 그러한 질서를 가르치려고 애써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뿌리를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유교에서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가르쳤지만 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가라고 물을 때는 “그것이 옳으니까.”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습니다. “왜 자식은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이번에는 땅에서 이야기가 안 되니까 하늘로 올라가서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늘에는 누가 있어서 그런 뜻을 정했지요?”라고 물으면 유교는 우리에게 그 뿌리를 가르쳐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사랑하시되, 순간 끓어오르는 이성 없는 정념으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지혜와 무한한 사랑 가운데 질서를 가지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희미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떠나서는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에 사람 사는 사회의 도리가 동양이나 서양에서 유사했던 것입니다.
회개는 이러한 질서의 이탈을 고통 속에서 뉘우치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는 가장으로서 자기가 서야 할 위치가 있고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 합니다. 왜냐하면 힘들게 돈 벌어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아내를 위해, 자녀를 위해 절제하고,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젊은 시절에 자기 마음대로 살아보는 것입니다. 집에 와서 폭력을 휘두르고 돈을 벌어 가족들도 부양할 책임을 지지 않고 허랑방탕하게 자기 마음대로 돈을 사용하며 자녀들을 구타하고 폭언과 폭력을 일삼습니다. 지금은 권력이 있으니까 할 수 있지만 오래 가지 못합니다.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옵니다. 젊어서 아내를 사랑해 주지 않으면 나이 들어서 아내를 의존해야 할 때 아내는 남편이 자기에게 기대는 것이 뱀이 기대는 것보다 싫습니다. 젊었을 때는 돈도 있고 힘도 있고 가정의 권세도 있으니까 자녀들에게 폭언과 폭력을 마음대로 행했습니다. 자신은 잊어버렸지만 자식들의 가슴속에는 그대로 남아서 애비를 애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엊그제 식당에 갔다가 노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에는 오복(五福)이라 그랬는데, 요새는 육복(六福)이랍니다. 조실부모(早失父母)의 복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일찍 부모님을 여의는 것이 복이라고 그런다고 합니다. 그 중에 더 큰 복은 유산을 많이 남겨놓은 조실부모입니다. 노인들 넷이 앉아서 밥 먹는 내내 그 이야기를 하는데 마음속으로 그렇게 측은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젊은 날 질서를 어기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열매는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신기한 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살면, 자기는 희생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질서를 휘돌아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반대로 질서를 어기면 그 고통이 휘돌아서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서로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회개는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질서를 이탈했다는 것에 대한 회개입니다. 인간은 심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고통이 없으면 절대 회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떠난 것이 신나면 절대 회개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에 신났던 것들이 모두 끝나고, 질서를 어기며 살아온 결과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면 견디기 힘든 고통을 만들어냅니다. 자기가 이 고통의 주범이라고 생각하고 질서를 이탈했다는 것을 깊이 후회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믿음은 그 질서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손해를 보는 것 같고 고통을 받는 것 같고 괴롬을 겪는 것 같지만 결국은 이 질서대로 살면 내가 행복해지리라는 것을 믿고 살아갑니다.
순종은 그러한 하나님의 질서가 자기 자신 안에, 이웃 안에, 온 세계 안에 아름답게 펼쳐져서 그 질서 안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자기를 바치는 헌신입니다. 이러한 질서의 이탈은 환경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안에서 시작됩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나면 내가 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께 가장 죄송합니다. 명백하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가 아닌, 나 된 것을 내가 고쳐보려고 하는데 잘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아파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크신 희생과 사랑을 기억하며 자기를 꺾고 십자가에 못 박는 자기 쇄신과 자기 깨뜨려짐은 자기 내면세계에서 신적인 질서로 돌아가려고 하는 몸부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있다는 것이 입증됩니다.
오늘 하루의 삶을 살면서 ‘그 이야기는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왜 그랬을까? 그 행동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왜 했을까?’ 이렇게 반성하는 것이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삶을 하나님의 질서로 비추어보는 것입니다. 그때는 그렇게 행동했지만 잠시 후에 자기의 행동을 숙고하면서 “저의 그러한 행동은 나를 포함한 모든 세계를 하나의 가족으로 묶으시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아름다운 질서에 대한 이탈이었고 도전이었습니다. 너무 마음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회개이고 자기반성이며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질서를 이탈하려고 하는 끊임없는 자기 사랑과 아름다운 신적인 질서로 돌아가게 하는 끊임없는 은혜와의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신앙생활을 진지하게 반성해보십시오.
여러분은 목회의 어려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가난하고 사례금을 제대로 못 받고 자녀를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하고 불편한 사택에서 사는 것이 목회의 고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난하게도 살아보았습니다.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굉장히 많이 불편합니다. 그러나 뼈를 찌를 정도로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목회의 십자가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큰 사랑의 경험, 핑계 댈 수 없는 명백한 진리의 빛과 깨달음, 감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처음 감격했던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에서 이탈하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하나님은 목회자에게 아무런 힘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교회에는 칼도 없고 창도 없고 감옥도 없습니다. 한 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회개하고 주님의 사랑을 즐거워했던 교인이 어느 날 은혜가 떨어져서 짐승처럼 행동하면 교회와 목회자는 그것을 그대로 뒤집어쓰는 것 외에 항거할 힘이 없습니다. 그것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교회가 그를 제재하고 치리하고 징계한다고 해도 이미 하나님을 얕볼 정도로 마음이 막된 사람들에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질서가 무엇인지 몰라서 마음대로 살았지만 그것을 알고 난 다음에는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수많은 악이 질서의 이탈 때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누구의 강요도 없이 깊이 뉘우치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은혜가 식고 육욕이 솟구치게 되자 이전에 하나님께 받았던 사랑, 아름다운 질서들을 다 팽개쳐버리고 어느 순간에 자기가 온 우주의 주인이고 양순하게 주님의 은혜를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은 자기의 밥인 것처럼 막 되게 행동할 때 목회자와 교회는 그 모든 고통을 한 몸에 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는 어려움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맡기셔서 교회를 이끌게 했다면 인간보다 뛰어난 완전함을 가지고 있을 테니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짐승같이 행동해서 교회에 아픔을 주는가 하면, 그 사람이 회개하고 나면 다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해서 고통을 줍니다. 목회자는 모든 성도들 가운데 한 형제로서 부름을 받았고, 주님을 보다 깊이 만나서 영광의 세계를 먼저 보았다는 점,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목양을 하게 되었다는 것 외에는 여러분과 똑같은 형제일 뿐입니다. 그에게도 아름다운 것은 즐겁고 추한 것은 더러우며 따뜻한 곳이 좋고 냉정한 것은 싫습니다. 설교 시간에는 담대하게 올바른 것을 외쳐도 돌아서서는 눈물을 흘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매 순간 우리를 붙들어 끊임없이 그 질서로 돌아가게 하지 않는다면 자기의 자리를 지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세우신 질서를 이탈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막된 삶을 사는 동안에 그의 영혼은 견딜 수 없이 곤고해지고, 이미 그의 마음과 영혼에 하나님의 벌이 내려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서를 세우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도 모르고, 규모와 법도, 예법이 없이 함부로 무례히 행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행하는 순간, 스스로 성도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들의 막되 먹은 삶이 교회에 남긴 수많은 흔적과 고통의 상처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그들을 붙드시지만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빌미로 자기의 육욕을 따라 무례하게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심으로써 자기가 떠난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가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자각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Ⅳ. 사랑 : 그 질서를 즐거워 함
교만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를 끊임없이 이탈하여 법도에 어긋나고 제멋대로 행동하도록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의 뜻입니다. 이것은 인사 잘하고 예의바른 국민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도 여기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의 큰 사랑의 질서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않는데, 단지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서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모두 가식이고 아첨이지 않겠습니까? 교만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부풀려 생각해서 사실보다 높은 지위로, 사실보다 더 많은 능력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려는 마음의 지속적인 경향성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경향성이 사라진 자리에 자리 잡은 타락한 인간의 부패한 본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사랑과 겸손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가 뛰어나지 않아도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려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싶어 하지만, 교만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파괴하여 자기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젠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만은 그의 판단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이 지정하신 질서보다는 자기가 생각하는 질서를 더 좋게 생각하고, 그것을 옳게 생각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원인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던 이유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안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자신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랑과 한 인격 안에서 전적으로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그 질서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과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누군가를 향하여 가진 태도는 그 사람에게 속한 생각이나 물건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납니다. 옛말에 아내가 사랑스러우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과 갖는 관계 안에서 사랑이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앞에서는 여러분에게 존중심을 표해도 여러분이 머무는 공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여러분이 없을 때 발로 차고 집어던지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면 그 사람의 진심은 여러분을 현저히 깔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뿐만 아니라 그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함께 좋아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교회와 우리의 영혼과 마음, 우리의 가정과 이 세계 안에 세우신 질서를 함께 사랑하게 됩니다. 가끔 그 질서를 심각하게 파괴하면서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질서를 파괴한다고 강변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사악함에 위선을 보탠 것입니다.
사랑은 ‘무아’(無我)의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고 나면 자기가 얼마나 존귀하고 아름답고 가능성이 있는 존재인지를 보게 된다고 하는데 거짓말입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자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즐거워하도록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어떠한 식으로든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심지어 자신의 육체까지도 사랑하지 말도록 경고합니다. 누구든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 사람이 회개하고 그 질서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흠뻑 취하여 그분을 뜨겁게 사랑하게 될 때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그의 마음을 가득 메우고 있는 찬란한 아름다움은 이 세계를 전체를 감싸고 교회 전체를 품으며 휘도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내가 회개하고 은혜를 받고 나니까 나도 정말 예쁜 사람이구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만한 사람이구나. 참 훌륭하다.’라고 생각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상상일 뿐입니다. 만약에 그럴 수 있었다면 성경은 부분적으로 혹은 조건적으로라도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특성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랑은 ‘무아’의 사랑이고 ‘자기 잊음’의 사랑입니다. 찬송가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찬양)
주여 꽃처럼 향기 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주님이 좋을 수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일평생 좋으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자기의 업인 것처럼 살아왔던 자신의 삶이 악이었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깊이 깨닫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 가득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큰 은혜가 가슴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탁월하신 아름다움에 취한 사람이 자기의 아름다움을 보며 즐거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신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은 죄 된 자신의 존재의 탁월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주 탁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무엇인가 좋은 것을 발견하게 되면 ‘이것은 이렇게 좋은데 좋은 것의 원인이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좋으실까?’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것들, 좋은 것들을 보면서 좋은 것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결코 이 사랑의 질서에서 이탈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의 질서에서 이탈하는 이유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이 우리의 사랑의 최종적인 목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것이 물질이면 물질 때문에 하나님께 범죄하며 사랑의 질서를 이탈하는 폭력을 가하게 되고, 그것이 육욕이면 육욕 때문에 하나님이 세우신 사랑의 아름다운 질서를 이탈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웃,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부름 받은 교회의 많은 지체들에게 그대로 고통이 되고, 그에게 고통과 아픔을 가하는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 예수 자신에 대한 박해요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인생을 살고, 이런 질서에 대한 관념 없이 제멋대로 내키는 대로 교회 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후일에 종교적으로 살아왔던 자신의 나날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무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았던 악한 삶이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될 것입니다.
Ⅴ. 결론
세상의 명예나 물질의 유익과 사람들에게 받는 좋은 평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침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십자가의 사랑과 가망 없는 죄인을 권고하시는 가슴을 녹이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자기의 교만을 접고 순간 이탈한 것을 회개합니다. 십자가의 큰 사랑을 생각하며 짐승 같은 사람들의 막된 행동들을 묵묵히 참고 견디는 사람들은 쓸데없어 보였던 수많은 고통의 시간들이 사실은 주님을 섬기며 살아왔던 날들로 주님의 마음에 기억된다는 것을 마지막 날에 보면서 놀라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바로 그러한 질서를 즐거워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믿음의 규칙과 생활의 교훈을 따라서 하나님이 자기를 세워주신 자리에서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십자가에 대한 묵상으로 이기고 견디는 것입니다. 질서를 깨뜨리는 폭력을 인내하면서 주님의 사랑이 사람들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사랑은 아무렇게나 행하지 아니합니다. 그 질서를 사랑하고 질서 안에서 나 때문에 타인을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자신도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행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어울리는 것들입니까?
12.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I. 본문 해설
이어서 사도는 사랑의 또 하나의 특성을 해설합니다. 참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된 사랑의 핵심을 찌르는 대목입니다.
II. 이 구절의 의미
A. 원어적 의미
그러면 이 구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부정확한 번역 때문에 우리는 본문을 오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는 구절의 희랍어 본문은 ‘우 제타이 타 헤아우테스’(ού ζητει τά έαυτης)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직역하면, “사랑은 자기 자신을 추구하지 아니하며”라는 의미입니다. 한글 성경의 의미와 거리가 있습니다.
B. 참뜻 : 자신을 추구하지 않음
이것의 참뜻은 “사랑은 자기 자신을 목표로 삼고 추구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구하지 아니하며”라는 단어는 ‘제타이’(ζητει) 인데 ‘바카쉬’(בָּקַשׁ)라는 히브리 단어의 번역입니다. ‘바카쉬’라는 단어는 특별히 구약의 시편에서 많이 나오는데 ‘하나님을 찾다, 구하다, 갈망하다’ 이런 것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자신을 추구한다.”라는 명제는 “너희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으라, 하나님을 구하라, 하나님을 갈망하라”고 하는 성경적인 명제의 정반대편에 서 있는 문장입니다. 사랑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목표로 삼고 자기 자신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III. 자기사랑
A. 계명에 없는 자기사랑
자기 사랑과 관련해서 생각을 해보면, 성경은 놀랍게도 어느 곳에서도 너희 자신을 사랑하라고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사랑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책을 통해서 인간의 불행은 자신이 자기에게 버림받은데 있다는 논리를 대담하게 펼칩니다. 그런 책들은 놀랍게도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조차 마음을 끄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본성에 속한 것이 아니지만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가르쳐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백히 본성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이런 논리들은 많은 사람들을 기만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를 버리는 것 자체도 자기 사랑의 한 형태입니다. 만약에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참으로 행복해지고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성경은 어디엔가 필연적으로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기록되었을 것이고, 성경은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함으로써 행복에 도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왜 자기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우리에게 주지 않는 것일까요? 다음 사실을 살펴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면 이미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명령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는 이미 참되게 자기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라고 새삼스럽게 명령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것들이 존재합니다. 인간은 이 세상의 많은 것들 중 어느 것에 꽂혀서 그것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태일 뿐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자기를 사랑하든지 둘 중에 하나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세상 사랑도 나오고 물질 사랑도 나오고 자식 사랑도 나오는데 어떻게 목사님은 하나님이 아니면 자기밖에는 사랑할 대상이 없다고 합니까?”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할 때 행복해지는 나를 위해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질을 사랑한다고 했는데 물질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물질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사랑하면 물질을 모아서 사용할 때 내가 행복해지기 때문에 물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사랑은 결국은 자기 사랑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자기를 사랑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면 이미 자기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사랑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으면 이미 올바르게 자기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라고 이야기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한다면 잘못된 방법으로 자기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고, 만약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이미 올바르게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니까 추가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라고 가르쳐 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그릇되게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겐 똑바로 자기를 사랑하라고 가르쳐주어야 될 것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명백한 것입니다. 이러한 혼란은 두 가지 사랑을 혼돈 하는 데서 옵니다.
B. 두 가지 사랑
사랑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용하는 사랑과 누리는 사랑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사용하는 사랑이 아니라 누리는 사랑입니다. 사용해야 하는 것은 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일을 못하는 사람이 연장만 탓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틀렸습니다. 대개 어떤 일을 훌륭하게 수행해내는 대가들은 평범한 사람들은 별로 본 적이 없는 아주 특별한 연장을 가지고 일을 합니다. 목공 일을 하든지 특별한 예술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갖기 어려운 훌륭한 연장을 가지고 일을 합니다. 그들이 쓰는 도구 자체가 틀립니다.
요즘 저는 건강을 위해서 자전거를 열심히 탑니다. 제가 듣기로는 중국에서 싸게 들어오는 것이 많아서 4-5만원이면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돈 있는 사람들은 좋은 자전거를 타는데 2천만 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자전거가 2천만 원 넘어도 어차피 발에 힘이 들어가야 앞으로 가는 것인데 왜 그렇게 비싼 것을 살까? 그런 좋은 것을 사용해서 기록을 새롭게 수립해야 하는 선수들이 그 안에 있을 것입니다. 몇 달 전에 꼭 필요한 책 한권을 미국으로 주문했더니 258만원이라고 견적서가 왔습니다. 잘못 된 것 같아서 산 곳에 전화를 해봤더니 3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책인데 진짜 258만원을 달라고 합니다. 300년 전의 책입니다. 골동품처럼 전 세계에 몇 권 없으니까 부르는 것이 값입니다. 그래서 결국 포기하고 못 샀습니다. 전문가들이 쓰는 도구는 그렇게 다릅니다. 특별한 도구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 도구를 사랑합니다.
한수진 형제가 영국에서 오래 유학을 하다 돌아와서 예배시간에 바이올린을 연주했는데 그 바이올린이 유명한 스트라디바리우스입니다. 41억짜리 바이올린입니다. 개인이 그것을 소장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장형주가 8억짜리 첼로를 동아건설에서 기증받았을 때도 깜짝 놀랐는데 그것 다섯 대를 팔아야 살 수 있는 악기입니다. 개인이 살 수 없으니까 이런 것들을 재단에서 구입해서 장래가 촉망되어 보이고 기술이 입증된 사람에게 상으로 6개월 내지 1년, 혹은 2년을 대여해줍니다. 그 악기를 가지고 연주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제가 만약 258만원을 주고 그 책을 샀다면 아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책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내가 그 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줄 어떤 지식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용하도록 되어있는 사물들에는 사랑이 궁극적으로 거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에 비해서 누리는 사랑이라는 것은 그것을 사랑하는데 더 이상의 목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참다운 사랑입니다.
형제가 자매를 뜨겁게 사랑하고 쫒아 다니다가 결국은 자매의 마음이 정복됐습니다. 형제가 얼굴도 멋있습니다. 보통 얼굴이 멋있으면 머리에 든 게 없는데 똑똑합니다. 똑똑하면 신앙이 없는데 교회도 열심히 다닙니다. 그래서 꿈인가 생신가 해서 형제에게 물었습니다. “자기, 나 사랑해?” “그럼. 사랑하지.” “얼만큼 사랑해?”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지.” “끝까지 사랑할거야?” “그럼.” 여기까지는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그렇게 사랑해?” 모른다고 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불현듯 본심을 토해낸 것입니다. “너네 아버지가 돈이 많잖아.” 그 순간에 앞에 했던 모든 고백들은 빛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자매를 사랑하는 것은 맞습니다. 만약에 부모가 아프다고 그러면 약을 사들고 가서 먹이고, 피가 모자란다고 하면 자기 피를 뽑아서라도 넣어줄 것입니다. 사랑해야 장인의 덕을 볼 것 아닙니까? 이 자매는 형제에게 어떤 존재냐 하면, 장인의 재산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 사랑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장인이 파산했다 그러면 더 이상 사랑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사용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선악과 사랑에 대해 일평생 탐구를 해야 합니다. 사랑에 대해서 그런 공부를 하기를 권하는 바입니다. 사랑은 본래 영원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게 되면, 인간의 사랑인데도 어느 정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게 됩니다. 그리움 같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영원을 아는 가장 훌륭한 비결은 철학적으로 영원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 자체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영원과 관련된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본래 이 사랑이 삼위 하나님께 속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존재이시기에 이 사랑도 하나님의 영원한 삼위의 교통 안에서 영원에 속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비록 인간들끼리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사랑을 하게 되면 이상하게 영원에 대한 놀라운 감격이 생겨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죽더라도, 영원히, 끝까지’ 이런 단어를 많이 씁니다. 세속적인 인간으로서는 쓸 수 없는 거룩한 단어들인데 사랑을 하게 되면 회심도 안했지만 사랑의 본체인 하나님에 대한 모종의 느낌을 갖게 됩니다. 거기에서 영원에 대한 생각들이 도입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사랑이 영원하지 않지만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영원의 성격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사랑이 육체의 작용만이 아니라 영혼의 고유한 작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혼은 본래 영원한 존재는 아니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을 덕 입어서 영원히 존재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규정된 피조물입니다. 모든 문제와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피조물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은 영원에 속해있지만 사랑하는 피조물들은 시간과 함께 완전함을 잃어버리고 소멸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지속되는데 사랑해야할 대상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 사랑은 목표를 잃어버렸어도 여전히 없는 목표를 쇄신해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고, 결국 거기에서 끊임없는 고통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만 우리의 정신이 한 곳으로 모아져서 영혼의 고유한 질서를 갖게 되고,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사랑하게 될 때는 영혼의 질서들이 흐트러지고 정신이 찢어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마음과 영혼에서 말과 삶이 우러나오는데 마치 조율이 잘 되지 않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처럼 이질적인 소리들이 엉켜서 흘러나오게 됩니다. 이게 바로 삶의 무질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 끊임없는 욕망과 충동이기 때문에 삶이 무질서해집니다. 이 속에서 솟아나는 인간의 육욕은 질서를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하게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마음의 특징입니다.
C. 자기사랑의 정체
자기 사랑의 정체는 하나님을 잘못 흉내 내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본뜨고 악한 사람은 하나님을 그릇되게 본뜹니다. 선한 사람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본뜰 때 기쁨이 생기고 악한 사람은 하나님을 그릇되게 본뜰 때에 기쁨이 생겨납니다.
방탕한 인간은 더러운 사람입니다. 방탕이라는 것은 통제되지 않는 모든 욕망을 그대로 실현하면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방탕한 사람은 해야 될 것도 안 하는가 하면, 해서는 안 될 일도 서슴없이 하면서 기쁨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선한 것이 없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행함으로 기쁨을 누리는 것이 방탕이라면, 그것은 아주 명백하게 모든 것을 당신이 원하는 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을 본뜨는 것입니다.
사치는, 자기는 더 이상 경제적인 여력이 없는데 경제적인 여력이 무한히 있는 것처럼 낭비해서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탤런트 한 사람이 사채에 몰려서 자살을 한 후에 사채에 관한 방송이 나왔습니다. 저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1월에 1,000만원을 빌리면 7월에 5,800만원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돈이 급했으면 그렇게 무서운 사채를 쓸까?’ 그렇게 생각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무서운 돈을 얻어서 명품을 사는 연예인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치입니다. 다음 달에 들어올 돈이 있으니까 돈을 빌려서 명품을 사서 들고 다니는 즐거움을 먼저 맛본 후에 돈은 한 달 후에 갚으려는 것입니다. 돈을 더 많이 갚아야 하는 희생보다 미리 땡겨서 맛보는 기쁨이 더 클 것이라는 판단으로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사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셔도 모자라는 것이 있으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이 충분하신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고 당신 자신의 기쁨을 위해 나누어 주면서 행복해 하는 것을 본뜨는 것이 사치입니다. 사실은 없는 데 많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낭비함으로써 기쁨을 얻는 것이 사치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고 풍부하심을 본받아 사용하려는 것이 사치입니다.
이 세상에서 육체를 가지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면 빠지게 되는 가장 격렬한 기쁨이 성애입니다. 한때 아우구스티누스도 만약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쾌락을 위해서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인생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런 성적인 방탕도 알고 보면 하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행복입니다. 하나님 자신 안에 한없는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것이 없어도 당신 자신 안에서 행복하신 분입니다. 인간은 그런 기쁨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음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는데 그런 기쁨을 은혜를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받지도 않으면서 깊은 행복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적인 방탕입니다. 몰입의 경험, 그 자체가 하나님 안에 있는 참된 행복을 잘못된 방법으로 본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존 칼빈이 자신의 책속에서 “그러므로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악을 행하든지 선을 행하든지, 자기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하나님을 본뜰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선한 사람들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극도로 악한 인간들조차도 그것을 흉내 낸다.”라고 말했습니다.
살인은 어떤 존재가 이 땅에 살아 있는 것이 싫어서 그 존재를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있는 것이 자기에게 너무 고통이 되기 때문에 그 인간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 미움이고, 실행에 옮겨졌을 때에 그것이 살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까지 하나님이 모든 존재에 대한 주권을 쥐고 계십니다.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에 이르기까지 당신이 주권을 쥐고 계신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살인함으로써 그를 이 세상에서 영원히 제거해버리려고 하는 것은 명백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본뜨려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인간은 환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악이 주는 즐거움이고, 자기 사랑이 가져다주는 기쁨입니다. 악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질서를 뒤집어버리는 것입니다.
IV. 하나님 사랑 안에 있는 인간의 행복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당신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고 가장 선하신 분이며,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주는데 이것이 성경의 명백한 질서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밑이지요. 하나님은 내려오십시오.” 그러고는 이웃은 더 밑으로 내려놓고 나는 위에 올려놓습니다. 질서를 뒤집어 놓은 다음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악한 삶입니다. 회개는 자기 사랑 때문에 뒤집어 놓은 질서를 내 마음속에서 다시 올바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 바깥에서는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인간의 모든 수고는 결국 불행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사랑은 의지하는 감정입니다. 특히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달라서 의지하는 감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온전한 의지의 감정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던 때를 생각해보면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꼭 붙들고 주님께 기대면서 살아가는 연약함 안에서 행복을 느꼈던 것입니다.
A. 두 왕국과 사랑의 질서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의 나라의 차이는 사랑의 질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나라이고 세상나라는 자기를 중심으로 사랑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세상에 자기를 중심으로 삼는 인간은 수없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그 사랑 안에서 일치와 평화를 이룰 수 있지만 세상 나라에서는 모두가 자기에게 헌신하기 때문에 평화를 원하지만 사실은 평화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B. 사랑의 중심일 수 없는 인간
인간은 사랑의 중심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실 때 당신과 구별되는 물질로 창조하셨지만 창조된 물질과 세계는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물질들은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창조되었으면서도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져서 결코 그분을 떠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인간들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우주 전체를 휘감는 하나님의 자기회귀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처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 전체로 볼 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향해서 사랑하시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모든 죄는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의 판단을 믿고 나의 의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의 행복을 최고로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이것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님과 맞서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자기 사랑은 자기에게서부터 사랑을 시작해서 자기를 위해 사람을 사랑하고 물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필요하면 하나님도 이용하다가 마지막에는 자기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기 전까지는 사랑 비슷한 것도 행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참된 사랑과 닮은 어떤 것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당신의 보이지 않는 사랑을 아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당신의 사랑을 볼 수 있도록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줄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는 사람에게 우리는 그것을 보여줄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인간들에게 베푸셨던 사랑을 통해서 죄인들을 향한 가슴 저미는 사랑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영광을 버리고 비천한 사람의 몸을 입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하나님을 떠난 불행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분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수치와 고난 속에 사시면서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지도 못하고 무엇을 사랑해야 될지 알지도 못한 채로 목숨을 이어가는 인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자기희생과 대속의 본보기를 통해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탁월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타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릇된 방법으로 하나님을 본뜨며 살았던 자기 사랑으로 초래된 불행과 고통 속에서 오직 그리스도 보혈의 능력만이 자기를 구해낼 수 있음을 믿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제공된 구원의 가능성을 전심으로 붙드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아닌 많은 것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은 세상이지 자신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세상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해야만 자기가 진정으로 만족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물질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 물질이 자기를 기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인간은 자기가 아닌 많은 것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것 중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참으로 완전하고 영원한 존재에 바쳐질 때 불행해지지 않습니다.
저는 개를 참 좋아했습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안에는 항상 개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할머니가 개를 못 키우게 하셨습니다. 저는 개가 죽으면 며칠씩 울었습니다. 할머니께서 개 죽으면 우는 손자가 가여워서 개를 못 키우게 하셨습니다. 철이 든 뒤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사람 때문에 우는 것도 힘든데 개와의 인연을 가지고 개 때문에 슬퍼해야 할까? 차라리 다른 방식으로 개를 좋아하도록 노력하자.’ 그 다음부터는 개를 안 기릅니다.
사랑은 남아있는데 사랑해야할 대상이 사라졌을 때 그것은 죽음에 버금가는 고통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남기고 죽는 것이 고통스럽습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 자신이 죽은 것이 고통스럽습니까? 전자가 더 고통스럽습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은 그 사랑이 아직 내 마음에 남아 있는데 사랑할 사람은 사라진 것입니다. 거기에서 오는 깊은 비애는 때로 남아 있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지만 무섭고 두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C. 자기사랑과 진리의 빛
자기 사랑이라는 것이 자기를 공정하게 사랑하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도 인간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이 참된 사랑이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육체와 영혼 모두에 대한 균형 잡힌 사랑이어야 합니다. 나에 대한 사랑도 그런 종류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금욕주의, 육체를 멸시하고 학대하는 사상은 기독교 역사에 늘 있어 왔습니다. 육체를 극도로 미워합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사상이 아닙니다. 마틴 루터가 그런 고행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며칠 씩 물 한 모금, 낱알 하나 안 먹고 피골이 상접해서 건강을 해칠 정도로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균형 잡힌 사랑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우리에게 진리의 밝은 빛이 비치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 때문에 결단코 공정하게 자기를 사랑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은 자기의 육체 밖에는 사랑하지 못하는 존재가 됩니다. 문제는 자기를 그렇게 사랑했는데 자기도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토록 끔찍하게 사랑하는 육체도 자기를 배반하면서 계속 죽음의 기운에 삼켜지며 늙어갑니다. 죽어서 사라짐으로써 영혼을 바쳤던 뜨거운 사랑을 배신합니다. 그런 점에서 자기의 사랑을 받는 자신의 허무함은 다 사라져서 자기를 버리고 떠나가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과 세상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자기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노예가 되어서 자기가 시키는 대로 일생을 살았지만 행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릇된 자기 사랑의 무게 때문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깊은 고통 속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볼 수 있도록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주신 복음적인 사실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서 살아 숨 쉬면서 우리를 섬기신 생애 전부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의 극치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고난의 죽음 속에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 즉, 하나님 밖에서 나를 사랑하는 사랑의 최종적인 운명과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이 사랑의 최종적인 결과를 동시에 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빛에서 멀어져서 끊임없이 나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내가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나에게 집착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질게 대적하며 그분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전면적으로 항거하는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형벌 받아야 할 자신의 모습을 그리스도 예수의 찢으신 살과 흘리신 보혈의 흔적 앞에서 보게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다가 허무에 굴복하여 궁극적으로는 심판에 이르게 될 비참한 인간을 운명의 굴레에서 건져주시기 위해 찾아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큰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 사랑의 늪에서 몸부림칠수록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가서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인간들을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십자가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우리는 진리의 빛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을 때려주시지 아니하면 결국은 허무하게 자기를 사랑하다가 비명 속에 죽을 수밖에 없는 비천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가득한 사람 중에 나 같은 인간을 찾아오셔서 어두운 마음의 눈을 열어 우리의 육체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마셔도 마셔도 목마르지 않은 영원한 샘물 같은 기쁨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밝은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남이 못 본 것을 본 사람들입니다. 우리 안에 자기를 사랑하려고 하는 성질은 뼈 속 깊이 사무쳐 있어서 한때는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었던 사람도 변질되어서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높이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매순간 사라질 것과 영원한 것을 구별하게 만들어주는 진리의 참된 빛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어두운 마음을 찢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찬란한 말씀의 빛, 진리의 광채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안광을 비춰주시는 하나님의 찬란한 진리의 빛 앞에서 우리가 사용해야 할 것과 사랑해야할 것 사이의 구별을 분명히 하고, 우리 안에 있는 고결한 사랑을 무엇을 위해 바쳐야 할지를 깨닫게 만들어주십니다.
Ⅴ. 결론
사랑은 그 자체가 커다란 힘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무게가 됩니다. 무게 중심이 육체로 흐를 때 우리의 영혼은 굴러 떨어져 진창에 빠지게 되고, 그 무게가 하나님께 흐르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강물 안에 있게 됩니다. 구렁텅이에 빠지도록 만드는 사랑의 힘을 끊고 참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만들기 위해서는 또 다른 힘이 필요합니다. 그 힘이 바로 은혜의 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깊이 밀려와서 오랜 세월동안 운명처럼 나를 묶고 있었던 사랑의 집요한 필연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줍니다. 이 세상에 대한 사랑, 육체에 대한 집착, 결코 끊을 수 없을 것 같이 커다란 강제력을 행사하던 필연들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하찮게 부서지고 풀어져서 당신의 참된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의 참된 목표는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의 힘입니다.
(찬양)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난 관계 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은 홀로 있는 외로움을 면하고자 하는 노력이지만, 하나님 이외에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은 이러한 기대와는 상관없이 외로움으로 갚아줍니다. 하나님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은 일시적으로 우리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 같지만 마지막은 홀로 있는 것보다 혹독한 고독과 외로움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 이외에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유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을 그런 식으로밖에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하고 불변하고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 사랑은 우리의 마음에 더욱 기쁨이 넘치게 만들고, 사랑에 빠지면 빠질수록 그 사랑은 한없이 솟아나는 샘물과 같아서 그 사랑을 흠뻑 맛본 사람들의 마음속에 더 큰 사랑을 발견하게 만드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치고 피곤한 삶의 이유를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한, 어디에서도 그 영혼은 자유로울 수 없고 그 마음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보려고 했던 여러분의 모든 노력들을 깊이 뉘우치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사랑 42
영원한 사랑 1 (2008.6.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 (2008.6.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3 (2008.6.29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4 (2008.7.6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5 (2008.7.13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6 (2008.7.20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7 (2008.7.27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8 (2008.8.3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9 (2008.8.10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0 (2008.8.17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1 (2008.8.24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2 (2008.9.2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3 (2008.9.2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4 (2009.2.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5 (2009.2.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6 (2009.3.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7 (2009.3.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8 (2009.3.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9 (2009.3.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0 (2009.4.19 주일오전설교)
13.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I. 본문 해설
이어서 사도는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말합니다. 성내지 아니하는 사랑의 특성은 그 앞에 나오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사랑의 특성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II. “성내다”의 말 뜻
A. 희랍어: ‘파로크쉬네타이’
본문에 나오는 ‘성내다’라는 말의 뜻이 무엇일까요? 희랍어 본문에서는 ‘파로크쉬네타이’(παροξύνεται)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신약성경에 많이 등장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우리말은 능동태로 되어 있지만 희랍어 성경에는 이 부분이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직역하면, “사랑은 어떤 자극에 대하여 분내도록 자극받지 아니하며” 혹은 “사랑은 무언가에 의해 화가 돋구어지지 아니하며” 그런 의미입니다.
B. 단어의 의미
이 단어의 의미는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에 많은 우상들을 보았습니다. 성경은 사도 바울이 마음에 분하였다고 했는데 이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다투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것의 구약적인 배경은 ‘분노하다, 노하다, 진노하다’ 이런 정도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III. “성내지 아니하며”의 참뜻
A. 어떠한 분노도 없다는 뜻이 아님
오늘 사도가 사랑의 특성으로 들고 있는 “성내지 아니하며”의 참뜻은 무엇일까요? 당시 많은 로마제국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던 사상이 있었습니다. 금욕주의적인 성향을 띤 스토아 사상이었습니다. 이것은 불교사상과도 다소 유사한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들의 변화는 덧없는 것이라고 보고, 인간의 가장 높은 덕은 환경에 의해 어떠한 감정의 흔들림도 없는 바위와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사물들이 바뀌고 변하고 사람의 인연이 맺어지고 끊어지는 것에 따라 좋아하고 괴로워하고 증오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는 모든 것이 덧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했을 때의 의미는 감정의 흔들림이 없고 어떠한 분노도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B. 분노의 이유와 관계있음
이것은 분노의 이유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것을 그렇게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숙청하시던 사건을 비롯하여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설명하기 어려운 의문점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그 마음 안에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 아버지와 이 땅에 있는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하셨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어떠한 감정의 흔들림도 없는 무정한 생애가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시고 분노하시고 슬퍼하시고 눈물을 흘리시고 안타까워하신 생애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성전을 정결케 하신 사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서 돈을 바꾸고 제물을 팔고 있었습니다. 온유하던 예수님께서는 비둘기를 팔고 돈 파는 자들의 상을 뒤엎으시며 진노하셨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무리들을 내어 쫓으시며 그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그 일이 있기 직전에는 예수님이 많은 무리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오고 계셨는데, 40년 후에 다가올 예루살렘 성의 심판을 바라보시며 통곡하며 우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할 때 이것의 참뜻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모든 분노가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한 사람의 신자가 주님을 만나 참된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면 분노의 이유가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회심하기 전에는 세상을 향해서 웃고 울고 좋아하고 낙심합니다. 돈을 조금만 벌면 얼마나 기뻐하는지요? 사람들에게 작은 칭찬을 듣기만 하면 마음이 하늘로 날 것처럼 좋아합니다. 동시에 세상에서 실패하거나 뒤쳐질 것 같으면 어찌 그리 슬퍼하는지 모릅니다. 그 슬픔이 지나치면 비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는데 그가 얼마나 세상 안에서 세상에게 환대를 받으며 살고 싶은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은 세상을 향해서는 웃고 울고 기뻐하고 좋아하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는 흔들림 없는 바위덩어리와 같습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영적인 생명도 없고 하나님을 좋아하는 마음의 취향도 없으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지식들이 전달될 때 떨며 기뻐하는 행복도 그에게는 낯선 것입니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면 정신없이 부산을 떨거나 바위덩어리 같이 굳어진 채로 긴 예배 시간을 견딜 뿐입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벌떡벌떡 일어나서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얼마나 급한 일이 있으면 나갈까?’ 하면서 이해가 되지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저렇게 바쁘신 분이 예배에는 어떻게 나오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황제를 알현하고 황제가 여러분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걸어 나간다면 성문을 나가기 전에 목이 잘릴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고 뛰어나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하나님은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황제들의 위엄을 합쳐도 도달할 수 없는 위엄과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예배의 시간은 결코 공연시간이나 관람시간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순간부터 마치고 돌아가는 순간까지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엄위와 두려움,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자리에 그분이 임재하고 계시다는 현존의식, 자기와 같은 인간에게 주님을 경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고, 찬양받으시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에 떨리는 애정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도 회심하지 못했거나 은혜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은 이 시간이 지루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소 잡아먹은 귀신같은 자세로 버티고 예배시간 끝나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는 그야말로 마음에 어떠한 움직임도 없는 비피동적인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가 인간으로서 흔들림이 없는 평정과 높은 수준의 인간의 덕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취향의 문제이고 영적인 경향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예배시간에 하나님 앞에 침묵할 수 있고 어떤 감정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관심이 없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것과 여러분의 마음의 취향이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약하고 유리 그릇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피곤하면 졸수도 있고 예배시간에 순간적으로 자세가 흐트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매주일 되풀이 된다면 여러분의 영혼은 현저히 하나님을 싫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예배자로서 합당한 자세를 취하지 않거나, 발을 길게 뻗고 신발을 벗고 발가락을 움직이면서 배를 내밀고 안하무인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보면 분노가 느껴집니다. 예배시간 내내 마음을 다스리면서 설교를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진심으로 회심하고 나면,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없는 풍부한 정서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한 사람 안에 주님을 향한 참된 사랑이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예수님이라면 분노하셨을 그 자리에서 함께 분노하고, 예수님이라면 기뻐하셨을 자리에서 함께 뛸 듯이 기뻐하고, 주님이라면 우셨을 그 자리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지 정반대의 태도를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무조건 성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인격화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C. 분노의 이유는 두 가지로 대별됨
1. 자기 사랑
중요한 것은 분노의 이유입니다. 자기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은 자신의 이익이 침해받을 때 분노하게 됩니다. 요즘 차를 타고 가다보면 라디오에 광고가 나오는데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습니다. 돈 빌려주는 회사의 광고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돈은 예민한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말하기를, 다른 모든 것을 이야기하면 끄덕거려도 돈 이야기를 하면 예민해지는데 돈은 모든 신자에게 있어서도 영감대라고 합니다. 거기를 건드리면 확하고 느껴진다고 합니다. 헌금 이야기를 하면 졸던 교인도 깬다고 합니다. 자기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면 자기 이익에 관련된 일들이 일어날 때 그것을 빼앗길 것 같은 순간에 자극을 받습니다. 결국 확 하고 성내게 됩니다.
시골에 가면 옛날에는 새우젓 독에 뜨물을 버렸습니다. 음식물 찌꺼기를 버리면 돼지 기르는 사람들이 가져가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있으면 찌꺼기들이 천천히 가라앉습니다. 위에는 마셔도 좋을 것처럼 맑은 물이 됩니다. 사람들은 청주처럼 맑은 물이 새우젓 독에 가득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만 내버려두면 그 물은 마치 청주처럼 은은한 빛깔을 냅니다. 맑은 물처럼 있습니다. 뜨물 가지러오는 돼지집 주인은 그냥 가져가지 않고 리어카 뒤에 긴 막대기를 준비해서 뜨물을 휘둘러서 가져갑니다. 그러면 언제 그렇게 맑은 물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가라앉은 찌꺼기들이 확 올라옵니다.
우리는 가끔 “나 성질나면 무서운 사람이거든, 나는 건드리지만 않으면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앞뒤가 안 맞는 말입니다. 좋은 사람은 건드려도 성질이 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에 새우젓 독에 아주 맑은 생수를 가득 넣었다고 칩시다. 막대기로 하루 종일 휘저으면 무엇이 올라오겠습니까? 맑은 물만 뱅글뱅글 돕니다. 사람이 좋다 나쁘다는 것은 외모가 아니라 내면세계를 가리킵니다. “나 성질나면 무서운 사람이거든, 건드리지만 않으면 정말 좋은 사람이야.”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건드려서 올라올 뜨물 찌꺼기가 가라앉아 있는 사람은 위에 아무리 맑은 물이 있어도 가라앉은 찌꺼기 때문에 좋은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좋은 사람은 찌꺼기가 없어서 쑤시든지 말든지 언제나 위아래 물이 똑같은 사람입니다.
자기 이익에 손해가 올 것 같은 자극이 주어질 때 똑같은 방향, 똑같은 정도로 성을 내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대해 굉장히 예민합니다. 그 집에 가서 하루 종일 일을 해줄 수도 있고 시간도 주고 무엇이든지 줄 수 있는데 돈에 있어서 자기가 손해를 볼 것 같으면 몇 십 년이 된 인간관계도 한 번에 단절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돈을 특별히 애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돈을 빌려가고 갚지 않아도 다른 사람처럼 분노하지는 않는데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명예를 상하게 했을 때는 살인하고 싶을 정도로 고통을 느낍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모습이 나타납니다. 나타나는 모습은 다르지만 밑으로 내려가면 하나의 핵심에 도달하게 되는데, 자기 사랑, 자기 이익입니다.
어떤 불신자가 자기 친구들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돈에는 예민해서 잘 안 빌려주는데 술집에 가면 술을 먹이려고 한다고 합니다. 양주 한 병을 샀는데 계산을 해보니까 한 컵에 7만원이나 되는 술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자꾸 먹이려고 해서 요즘 약을 먹고 있어서 안 된다고 약봉지를 꺼내 흔들어 보이는데도 그것을 뺏으면서 먹으라고 합니다. 할 수 없이 먹다 보니 3잔을 먹었는데 20만원 어치입니다. 그 친구에게 20만원을 달라고 하면 주겠습니까? 돈은 주기 싫어도 술은 주는 것입니다. 형태는 각기 다르게 나타나지만 마지막에 뿌리는 같듯이, 우리가 여러 가지에 반응하지만 그것은 각자 성품의 문제이고 밑으로 내려가면 그것은 자기 사랑으로 귀결이 됩니다. 자기 사랑이 있는 인간이 어떤 자극을 받았을 때 성내는 것은 그것이 자기 이익을 지키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뼈다귀입니다. 개가 뼈다귀를 구했습니다. 살점이 상당히 붙어있는 뼈다귀를 얻었습니다. 뼈다귀 얻고 거기에 몰두하면서 뼈다귀를 이리저리 굴리고 살점을 뜯어 먹으면서 지상 최대의 만족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전까지 꼬리를 흔들고 주인의 말을 잘 듣던 개가 주인이 그것을 빼앗으려고 할 때 갑자기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으르렁거립니다. 오랫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해오던 주인과의 관계를 언제든지 끊어버릴 수 있을 것처럼 분노하는 심리적인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뼈다귀는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에게 개뼈다귀 같은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뼈다귀 때문에 교인 간에 사랑을 등을 지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하나님께 순종하고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친근히 지내왔지만 그 사람의 영혼과 인생을 위해서 환경에 의해 그것을 빼앗으려고 할 때 하나님도 기꺼이 물어버릴 것처럼 왈왈대고 짖어대지는 않았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이제껏 살아온 성화되지 못한 삶입니다. 우리의 뼈다귀는 무엇입니까? 그 뼈다귀 때문에 하나님도 물어버릴 것처럼 자기 사랑의 인생을 살아오지는 않으셨습니까?
(찬양)
죄악 된 세상을 방황하다가 천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고집대로 영 죽을 험한 세상이 왜 이리 더러운지 이제야 아네
우리가 옛날에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뼈다귀를 물고 으르렁거리는 것이 열정적인 인생인 것처럼 생각하고, 뼈다귀 많이 모아둔 인간들은 으르렁대면서 자부심을 품고, 그것을 빼앗긴 인간들은 침을 흘리면서 어디 가서 하나 빼앗아 보려고 걸근대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삶이 무가치한 삶이었다는 사실을 십자가 사랑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뼈다귀를 위해 태어난 인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에 주님의 음성이 마음속에 들렸습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게 되었습니다. 뼈다귀나 물고 으르렁거리는 짐승 같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으로 내려 보내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분이 얼마나 고상한 존재인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로 창조되었는지를 보이시고, 머리 둘 곳 없고 박해받는 생애를 사시면서 하나님과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시는 사랑 안에서 인간의 참된 도리와 행복에 이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2. 하나님 사랑
자기사랑이 있는 사람은 자기 이익에 의해 자극을 받지만, 하나님 사랑, 아가페의 사랑, 까리따스의 사랑이 심령 안에 가득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의하여 자극을 받습니다. 역설적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이 심령에 충만히 있었던 사람들은 때로 격렬하게 분노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구약에서 모세만큼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 없고, 하나님 앞에 충성했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기 동포를 깊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끌어안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에티오피아 아낙네에게 장가를 간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넓은 허용 가운데 중혼이 허락되던 시기였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뜻도 있겠지만 홍수 이후에 급격히 줄어든 인류를 번식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보다 큰 섭리도 깃들어 있다고 학자들은 생각합니다. 모세가 또 장가를 든 것은 당시 문맥에서는 문제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평생 곁에서 자기를 섬겨주던 한 핏줄인 누이 미리암과 아론이 반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하고만 말씀하시더냐?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더라. 모세만 지도자가 될 수 있느냐?”라고 하면서 반기를 들었습니다. 평소 모세의 성격 같았으면 한 번에 정리해버렸을 텐데 말할 수 없는 온유함으로 자기를 비난하는 무리를 대했습니다. 성경은 비난받을 때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뛰어났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모세, 개인의 이익을 자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에게는 자기 사랑의 집착이 없었기에 온유함으로 반응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사랑입니다.
전혀 다른 상황이 민수기 25장에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광야 생활 중 유명한 바알브올의 사건입니다. 싯딤이라는 곳에서 잠시 진을 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지역에서 바알브올을 섬기는 제의 속에 남녀의 성적 교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많은 이스라엘 남자들이 바알브올을 섬기며 모압 여자들과 간통을 저질렀습니다. 그때 모세가 얼마나 강하게 자극을 받았을까요? 그때도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였습니까? 아닙니다. 24,000명을 칼로 찔러 죽여 버렸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모세에게 사랑이 없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했던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현저히 언약백성들을 욕보이는 무리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충성심이 그들을 죽이도록 했습니다. 결국은 24,000명이 칼날 아래 죽임을 당하였고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는 그치고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예는 다윗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교만이라는 것을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고, 상하고 깨어진 마음으로 그의 일평생 소원은 여호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기록한 시편의 수많은 글 속에 나와 있는 끔찍한 저주의 탄원을 보십시오. 이것은 그가 영적으로 미숙하고 사랑이 부족하고 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들을 무찔러 주시고, 하나님이 온전한 영광을 받으시도록 간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특별한 사랑이 다윗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너그럽게 대할 수 있을 때 다윗은 타는 듯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끝까지 대적하는 원수들을 진멸해 주시도록 토로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에게서도 이런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의 회심하기 전의 이름은 ‘사울’이었고, ‘큰 자’라는 뜻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는 ‘바울’로 개명했고 이것은 ‘지극히 작은 자’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주님 앞에 늘 깨뜨려지며 겸손하고 온유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감명을 주고 있는 고린도전서 13장도 이 사람의 작품입니다. 그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병든 자를 고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때 이방신을 섬기는 제사장, 많은 무리들이 달려들었습니다. 핍박하기 위해 달려든 것이 아니라 찬송하기 위해 덤벼들었습니다. 소를 몰고 와서 화관을 만들어 그 앞에 가져다주며 엎드려 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가 오래 참고 온유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옷을 찢으면서 통분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헛된 우상으로부터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인데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신들처럼 높이며 섬기느냐”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바나바를 ‘쓰스’라고 불렀고 바울을 ‘허메’라고 불렀으니 이는 희랍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와 웅변의 신 헤르메스를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통분히 여기며 그들을 책망하고 거기를 떠났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분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의 신앙생활은 회심하지 못한 자의 대표적인 본보기이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은 정말 'exciting' 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무덤덤하던 삶, 세상의 가치 없는 것을 향해서만 울고 웃고 격변하는 감정 속에 살던 사람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나니까 너무 'exciting' 해지는 것입니다.
어제도 회심집회를 했는데 작년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회심하지 않았지만 어떤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없을 때 아무개 집사 아이가 회심했다고 하면 ‘공부도 못하는 아이가 회심만 하면 뭘 해. 자랑할 것이 없으니까 별 것을 다 자랑하네.’ 하지만, 은혜를 받고 마음에 하나님 사랑이 꽉 차면 뉘집의 아무개가 이번에 회심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뛸 듯이 기쁩니다. ‘집사님 부부가 그렇게 아이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더니 드디어 회심했구나. 얼마나 행복할까?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서 회심한 기념으로 편지도 보내고 격려를 합니다. 은혜가 사라지면 누가 신앙이 떨어지고 미끄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금방 드는 생각이 ‘그렇게 개떡 같이 신앙생활 하더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인간성도 원래 그렇잖아.’ 그렇게 밖에 반응을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 안에 있으면 누가 은혜에서 미끄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의 일처럼 느껴집니다. 주님과의 실제적인 사랑의 연합이 있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에 아프게 느껴지는 것들이 영적인 연합을 통해서 나의 마음속에 전달됩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자기가 가책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뜨거운 뙤약볕에 먼지만 나는 끝없는 신작로를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것이라면, 마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서 걸어가는 인생의 길은 변화무쌍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저는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보았습니다. 그 나라는 그 나라대로 멋있지만 우리나라처럼 예쁜 나라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느 나라는 수백 킬로미터를 가도록 산만 나옵니다. 또 어느 나라는 몇 십 킬로미터를 달리도록 사막만 나옵니다. 어느 나라는 얼마를 달려가도 바다만 보입니다. 어느 나라에 가면 호수가 우리나라 두 배반만 해서 배타고 나가면 밤새도록 가도 물만 보입니다. 얼마나 시시합니까? 넓은 벌판이 나와서 아름답다하고 감탄하고 돌면 산이 나옵니다. 새들이 지저귀면서 꽃이 피었습니다. ‘산이구나.’ 하고 나오면 강이 옆으로 흐릅니다. 정말 예쁩니다. 이 나라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충만하면 신앙생활은 그렇게 예쁜 것입니다. 시험을 만나도 기대가 됩니다. ‘하나님이 이 시험을 통해 나를 얼마나 멋있게 인도하셔서 당신의 큰 영광과 나를 향한 사랑을 드러내실까?’ 기대가 됩니다.
IV. “겪음”과 사랑의 진보
인간이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환경과 접촉하고 그 환경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환경으로부터의 겪음은 사랑의 진보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겪음은 반드시 변화를 가져옵니다. 외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특별히 내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현재 한 사람의 마음과 영혼, 생활의 상태는 그가 어떠한 환경 속에서 살아 왔는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겪음’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이러한 겪음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환경은 내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주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까? 목회를 결심하고 헌신하니까 목회라는 상황이 주어졌습니다. 우리 교회가 여전히 방배동에 있었으면 이 중 1/3 정도는 못 만났을 사람들입니다. 방배동 사람들을 만났을 것입니다. 이런 환경은 우리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결국 이런 환경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그 환경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면서 살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으로 결정됩니다. 똑같은 상황을 만났는데도 우리 안에 사랑이 없으면 원망하고 미워하고 원한을 품고 마지막에는 다른 사람들도 불행하게 하고 자신도 불행해질 수밖에 없지만, 자신 안에 참된 까리따스의 사랑이 있으면 오히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 때문에 자신이 더욱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변해가고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
여러분, 일평생을 자신에게 너무 큰 고통과 상처를 준 사람을 미워하고 원한을 품는 일은 가능합니다. 그러던 사람이 회심하고 주님을 만나서 주님의 사랑에 깊이 감화를 받아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 일평생 자기를 미워하던 그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은혜가 떨어져서 그 사람을 생각하면 다시 이가 갈리는 일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치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들어 치유에 관해 말하지만 그 중 90% 이상이 신학적으로 잘못된 토대 위에서 인본주의적인 접근을 합니다. 신학적인 진지함과 풍부한 기반이 없는 사람들이 치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대부분 인본주의 심리학을 기초로 성경을 왜곡하는 가운데 전개되는 프로그램들입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신앙을 성경에 입각해서 온전히 소화하고 있는 사람들은 굳이 치유라는 방법으로 접근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다른 교회에는 치유학교가 많이 있지만 우리 교회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안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증인입니다. 은혜 많이 받고 누구를 용서했습니다. 순간의 감정이 아닙니다. 몇 년 동안 그 사람을 용서하고 그 사람을 눈물로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몇 년 뒤에 은혜가 떨어지고 미끄러지니까 내 인생 꼬인 것이 그 인간 때문이라는 생각이 울컥 일어나면서 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의 상처가 살아나는 일들을 여러분 자신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치유하는 사람들은 치유된 줄 알았는데 안 되어서 다시 왔다며 재입학을 합니다. 그렇게 들락날락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상처는 받지만 치유는 없습니다. 절망적이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길이 하나 있습니다. 매일매일 은혜 가운데 살면 됩니다. 옛날에 치유되었다고 하면서 그것이 마치 자기 공로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은혜의 줄을 놓으시면 다시 칼 들고 나타날 수 있습니다. 왕년의 은혜는 왕년에 먹고 살았고, 어제 은혜는 어제 필요했고, 오늘은 오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매순간 의지하게 하십니다.
옛날에 그렇게 미워하고 상처를 받았지만 진정으로 용서해 주었는데 그 사람을 다시 쓴 물이 나오도록 미워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지금 와서 나를 다시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다 끝난 일입니다. 시간, 장소 속에서는 끝난 일인데 내 마음에서는 안 끝났습니다. 사랑이 내 마음에 충만할 때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유익을 구하면서 살기 때문에 자기에게 상처준 것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주님을 알고 주님께 가까이 가게 된 것이 쓰라린 고통의 풍랑을 인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원망하지 않고 그 사랑 안에서 용해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이것이 식습니다. 식는 만큼 마음 안에 자기 사랑이 강하게 나타나면서 그 사람이 나를 다시 괴롭히는 것은 아니지만 남아있던 기억이 살아납니다. 기억은 인간의 감정의 막을 통과해서 저 밑으로 가라앉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가리켜 “우리의 기억은 영혼의 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음식물이 입안에서는 맛이 느껴지지만 목으로 넘어가면 맛을 못 느낍니다. 맛없는 음식이 들어가든 비싼 음식이 들어가든 구별이 없습니다. 몇 초를 위해서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그것도 알고 보면 허무한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 때는 우리의 기억을 건드리면서 희로애락의 감정을 만들어 냅니다. 가라앉을 때는 더 이상 슬펐던 일도 슬프지 않고 기뻤던 일도 기쁘지 않고 안타까웠던 일도 안타깝지 않습니다. 어느 계기가 있어서 상상 속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그때 밑에 있는 기억이 뜨물이 올라오듯 올라오는데 다행히 이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꽉 차있습니다. 올라와도 이전의 아픔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예전에 상처의 기억이 올라왔는데 은혜가 바닥으로 내려가서 자기 사랑으로 꽉 차있습니다. 마음에 쓴물이 번지면서 옛날에는 그렇게 뜨겁게 용서하고 사랑했는데 다시 마음에서 피 묻은 칼을 꺼내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불신자 이야기가 아니라 은혜 받은 우리,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에서 끊임없이 자라가는 것이고 진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성화되기를 간절히 열망합니까? 성화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잘 다듬어진 도덕적인 삶, 교회에서 상승하는 직분이 성화의 결과가 아닙니다. 성화의 결과는 본성 안에서 죄가 죽는 만큼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서 순수하고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큰 사랑을 마음에 간직하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셨던 것처럼 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한순간도 신앙의 걸음을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15년 목회하고 본격적으로 설교 사역을 시작한지 20년이 넘습니다. 그 동안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은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을 수없이 발견했습니다. 받은바 은혜에 대해 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미끄러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놀라운 신앙의 체험을 가지고 그분을 뜨겁게 사랑했어도 우리를 교만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주님을 끊임없이 붙들지 않으면 미끄러지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도 교만할 수 없습니다. 이전에 아무리 주님을 크게 만났어도 오늘 이 순간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시여, 이 손을 꼭 잡고 놓지 말아 주시옵소서. 매순간 진리의 빛으로, 매순간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은혜의 힘으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라고 주님 앞에 고백하게 됩니다.
Ⅴ. 그리스도를 본받아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자신 안에 충만하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을 무덤덤하게 사신 것이 아니라 울고 웃고 분노하고 사랑하며 열정적으로 사셨습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됩니다. 주님이 우셨던 자리에서 울고, 주님이 분노하셨던 자리에서 분노하고, 기뻐하셨던 자리에서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내려다보실 때 모든 인간들이 당신을 향해 냉담하게 살아갑니다. 심지어 구원받고 사랑해주신 백성들조차도 자기 사랑에 빠져서 하나님을 향해 무덤덤하게 살아갑니다. 여러분이 이 사랑을 마음에 간직하고, 예수님이 마음에 느끼셨던 모든 것들을 동일하게 느끼며, 주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걸어가셨을 길을, 그분이 여기 계셨더라면 섬기셨을 섬김을 이루면서 살아갈 때 세상이 아무리 칠흑 같이 어두워도 여러분은 주님이 보시기에는 빛나는 별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높은 지위나 많은 재물들, 사람들 위에 뛰어난 학문이 우리를 보석처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가진 재물이 없고 남에게 있는 탁월한 건강이나 지위가 없어도 순전한 주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안에 있어서 이 세상을 살도록 허락하시는 동안에 온 마음으로 때를 따라 돕는 주님의 은혜를 목말라하며 예수를 본받아 살아갈 때 이 세상은 여러분 한 사람이 있어서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영원한 사랑 42
영원한 사랑 1 (2008.6.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 (2008.6.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3 (2008.6.29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4 (2008.7.6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5 (2008.7.13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6 (2008.7.20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7 (2008.7.27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8 (2008.8.3 주일오전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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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사랑 12 (2008.9.2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3 (2008.9.2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4 (2009.2.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5 (2009.2.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6 (2009.3.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7 (2009.3.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8 (2009.3.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9 (2009.3.22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0 (2009.4.19 주일오전설교)
14.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Ⅰ. 본문해설
이어서 사도는 참된 사랑의 여덟 번째 특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구절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Ⅱ. 이 구절의 의미
A. 원어적 의미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할 때에 여기에서 ‘생각하다’라는 말은 ‘로기제타이’(λογίζεται)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무엇 무엇으로 여기다’, 혹은 ‘무엇 무엇으로 계산에 넣어두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의로운 것이 없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공로 때문에 주님 앞에 의롭다 여겨질 때 바로 ‘로기제타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어느 영어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번역하기를, 제정을 담당하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돈을 꾸어주고 그것을 기록해 두는 것처럼 계산해둔다고 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다른 사람에게 꾸어준 것을 장부에 잘 적어두는 것처럼 계산에 넣어두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 번역은 “사랑은 다른 사람이 내게 행한 악에 대해 계산에 넣어두지 아니하며” 이 정도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
B. ‘성내지 아니하며’와 관련됨
이 구절은 사랑의 여덟 번째 특성을 나타내주는데 이것은 바로 앞에 나타난 일곱 번째 특성인 “성내지 아니하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악한 것을 생각한다.”라는 뜻은 다른 사람이 내게 행한 어떤 악이나 손해 때문에 분을 품게 되어서 자기가 당한 것에 대해 자기를 괴롭힌 사람에게 복수하리라고 마음에 적어두는 것을 가리킵니다. 혹은 자기가 직접 그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 무엇인가 불행한 일을 당하여 자기에게 행한 것같이, 혹은 그 이상으로 악을 당하게 되기를 기대하는 심리를 가리킵니다. 사랑은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Ⅲ. 惡이란 무엇인가?
여기에서 말하는 ‘악한 것’이라는 것은 그저 나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텐데, 그러면 이 ‘악한 것’이라는 것은 결국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문제는 대단히 방대한 담론의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전문적으로 이것을 여러분에게 설교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철학에 많이 치우친 문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라도 우리가 ‘악’(惡)이 무엇인가 알아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만약에 악이 무엇인지 바로 알지 못하면, 악한 것이 무엇인지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을 연구함으로써 악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善)을 이해함으로서 악을 알게 됩니다. 이는 마치 어두움을 따로 연구하지 않아도 빛이 무엇인지를 경험해 본 사람은 어두움을 직관적으로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A. 선(善)과 질서
우리는 선과 질서의 문제를 통해 악의 대칭이 되는 선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시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떠한 나쁜 것도 행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 자신이 선 자체이심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지만 또한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공평하신 분이시지만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지만 의로운 분이십니다. 의로운 분이시지만 또한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여러 가지 좋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누어질 수 없는 분이시고 하나님은 그 어떤 것으로 구성요소를 가지고 결합함으로써 하나님이 되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기독교 교리에서 ‘하나님의 단순성’이라고 부릅니다. 단순하다는 말은 여러 개의 구성물로 합쳐져서 하나를 이루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누어질 수 없고 분해될 수 없는 불가해한 단순성을 가리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구성요소로 되어 있다면 요소들끼리 서로 의지할 것이니 그렇다면 하나님이 완전하신 분이실 수가 없고, 만약에 어떤 구성요소로 되어 있다면 구성요소를 지닌 존재가 스스로 구성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서 구성이 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전능성의 교리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성요소가 없이 하나이시고 단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선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시고 공의 자체이십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다 잊어버리고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비유를 기억하면 됩니다. 태양이 찬란하게 빛을 비췰 때 지상에서는 많은 일들이 효과로 나타납니다. 죽은 것 같은 뿌리에서 새싹이 돋는 것도 햇빛이 비취기 때문입니다. 단단하게 얼었던 얼음이 녹으며 시냇물을 흘러 보내는 것도 햇빛이 비취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라난 많은 나무들이 탐스러운 열매를 맺게 되는 것도 햇빛이 비취기 때문입니다. 새싹이 돋지만 태양 자체에 새싹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얼음장 아래로 물이 흐르지만 그 물이 태양으로부터 날아온 물은 아닙니다. 열매를 아름답게 맺지만 사과 열매가 태양 속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태양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어리일 뿐입니다. 햇빛이 비췰 때 세상에서는 햇빛이 비치는 수많은 효과가 발생하듯이, 하나님은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한 분이시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선의 효과가 나타납니다. 고통 받고 아파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위로가 나타납니다. 온유하고 하나님 앞에 선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복들이 나타납니다. 악을 행하고 모질게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공의가 나타납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데 사실 그것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세상 속에 당신이 살아계신 효과로서 나타납니다.
주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으로서 당신의 선하심을 모든 피조물들이 정신과 물질세계 속에서 경험하도록 당신의 선하신 효과를 모든 세상 속에 창조해서 보내십니다. 그것이 바로 질서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모든 자연 세계와 인간의 육체 안에는 자연적인 질서들이 있습니다. 이 질서는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모든 피조물들이 덧입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의학강좌를 하나를 들었습니다. 제가 꼭 공부해 보고 싶은 것이 의학인데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느 박사님이 나오셔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 설명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서 찬양이 나왔습니다. 우리들이 누군가로부터 스트레스를 받고 고통스런 소식을 많이 들으면 ‘아드레날린’이라는 물질이 나옵니다. 몸에 굉장히 안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기분 좋은 일이 있어서 웃고 행복해하면 ‘엔돌핀’이라는 물질이 나옵니다. 돼지에게서 이것을 취해서 한 번 주사를 맞는데 천만 원에서 이천만 원 정도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기쁨과 감사 속에서 생활할 때는 엔돌핀이 나와서 우리로 하여금 괴로움과 고통, 육체의 무질서로부터 우리 몸을 보호해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생에서 엔돌핀이라는 물질이 콸콸 쏟아진다고 표현할 정도로 팍 쏟아질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때가 죽을 때라고 합니다. 숨을 거두고 죽을 때 엔돌핀이라는 물질이 쏟아져 나와서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의 공포와 고통을 잊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인이건 선한 사람이건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죽을 때 나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음속에서 찬양이 퍼져나왔습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고려장을 지내기 위해 어미를 지게에 매고 산속 깊이 들어가는 아들을 위해 가는 길에 이파리를 떨어뜨리면서 자기를 버리고 가는 자식이 돌아올 때 길을 잃지 않도록 했다는 일본 전설에 나오는 어미의 마음처럼, 일평생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았기에 원죄로 인한 죽음의 대가를 받는 인간에게조차 죽음 당시에 당하게 될 끔찍한 고통과 영혼과 육체의 불멸할 슬픔을 기억하셔서 엔돌핀을 쏟아져 나오게 하시면서 죽음의 강을 건너게 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연 속에 두신 질서입니다.
오늘날 지구 온난화로 인해 심각한 위기를 당하고 있는데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이제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지금 당장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멈춘다고 할지라도 앞으로 천년 후까지는 계속 온난화가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바다가 이미 스스로 소화할 수 없을 정도의 이산화탄소를 지니고 있고, 그것을 소모해서 좋은 원소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현저하게 상실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제로’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천년이 걸려야만 회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북극의 얼음이 녹고 수만 년 동안 아무도 들어갈 수 없던 곳을 배를 타고 들어가게 되는 슬픈 현실은 모두 인간이 자연 질서를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자연 질서를 파괴하면 자연은 모든 것을 되갚아서 인간은 자연적인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질서를 인간의 영혼과 정신의 세계 속에도 새겨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질서를 따라 살수록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분은 선하시다는 것이 깊이 규명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를 감시한 사람이 없지만 하루 동안 악을 행한 사람의 잠자리는 고뇌와 외로움입니다.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 사람은 그 선행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어도 그의 잠자리는 안식을 불러옵니다. 인간의 마음과 정신이 하나님이 세우신 도덕 질서를 따라 살 때 비로소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B. 질서와 사랑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질서와 사랑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선하심을 모든 창조세계와 인간의 영혼과 정신 안에 효과로서 나타내시는데 이것이 바로 질서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인간에게 왜 그렇게 사랑을 요구하실까요?
여러분, 혹시 여러분이 싫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본 일이 있습니까? 대표적인 것이 스토커 아닙니까? 나는 너무 싫고 티끌만큼도 마음이 없는데 지겹게 따라다니면서 사랑한다고 그럴 때 이것은 끔찍한 고통이 됩니다. 그러면 젊은 여성과 그 여성을 따라다니는 못생긴 남성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거룩하고 완전하신 하나님과 더러운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보다 작을까요? 클까요? 비교될 수 없이 작은 차이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은 완전하고 거룩하시기 때문에 이 쓰레기 같고 더러운 인간이 당신을 사랑하는 일이 자존심 상하고 어울리지 않는 것이 되어야지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받아야만 만족을 느끼실 수 있는 분이라면 그분이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해주지 않으면 모자라는 분이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참 이상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도록 명령하십니다. 그것도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도록 요구하십니다. 마치 자신에게 무엇이 모자라는 것처럼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고, 만약에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이 하나님 자신에게 크나큰 비참함이라도 되는 것처럼 형벌로 위협하시며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함으로써만 우리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받지 않으셔도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만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척교회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자매 하나가 교회에 와서 깊이 회심하고 열심히 은혜 생활을 하다가 은혜에서 많이 미끄러졌는데 신앙생활을 열심히 안 합니다. 예배드리는 태도도 조금 못됐습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성화가 덜 되어서 직선적일 때니까 아프다고 해서 심방을 갔습니다. ‘아프니까 가서 위로해줘야지.’ 그게 아니라 ‘혼내주고 오리라.’ 하고 갔습니다. 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몸이 어디 아프냐?”는 지나가는 이야기였고 “도대체 문제가 뭐냐?” 했더니 횡설수설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자매는 교회를 좀 옮겨 보는 게 어떠냐? 이 교회는 자매한테 안 맞는 것 같으니 가보도록 해라.” 그랬더니 자매가 하는 이야기가 “저도 사실 그러고 싶은데 작고 어린 교회가 저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제가 말을 딱 막았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우리 교회는 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직하게 말하면 네가 우리 교회를 필요로 하는 거다. 착각을 고치려면 우리 교회에 출석하고 착각에서 돌이키지 않으려면 교회를 옮겨라. 난 간다.” 동기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좋은 심방은 아니었나봅니다. 아픈 사람을 심방하고 기도해주니까 벌떡 일어난 게 아니라 사흘을 더 앓았답니다. 처음에는 몸이 아파서 앓았는데 두 번째는 목사님이 심방하고 나서 마음이 아파서 사흘을 앓고 놀랍게도 하나님이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아, 나는 여태까지 작고 가난한 교회니까 나라도 여기 출석하는 게 얼마나 큰 보탬이 될까 착각했는데 사실은 교회가 나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나같이 망가진 사람에게 이 교회가 필요하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한동안 회복해서 은혜생활을 해나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이 얼마나 불행해지는 지를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회심이라는 것은 사랑으로 하나님 모를 때 자기가 집착하던 질서를 버리고 회개하고, 파문을 그리듯 하나님이 우리의 정신과 마음속에 새겨 놓으신 도덕 질서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한 회개입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말은 그 질서가 선하신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릴 수 있고, 자신의 존재로 이웃의 행복에 이바지할 수 있고, 자신도 그 안에서 기뻐할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나님 앞에 돌이킨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질서를 좋아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는 성경 말씀이 꿀같이 답니다. 말씀 하나도 놓치지 않고 깊이 들어오게 됩니다. 열린 뉴스에 나와 인터뷰하는 어린 아이들을 보면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느껴지지요? 요즘 시대에 묵직하고 시커먼 성경을 펴놓고 하나하나 가르칠 때 그것이 재밌고 기쁘다고 말할 아이들이 어디 있는지 한번 가서 실험해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을 때는 정신이 그 질서를 좋아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질서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훌륭한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고 인간의 정신과 인간이 사는 자연 세계 안에 있는 질서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훌륭한 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질서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질서를 가르쳐주는 성경에서 달콤한 맛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청년 중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회개는 그만두고 연애라도 제대로 해본 사람은 목사님의 설교를 잘 이해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여성이 남성을 아주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남성의 질서를 따라서 행동하고 생활하는 것이 기쁨이 됩니다. 우리 교회에 직원으로 있었던 자매 하나가 시집을 갔습니다. 6, 7년 동안 일했던 자매인데 고기를 전혀 못 먹습니다. 저는 고기 먹는 것을 한 번도 못 봤습니다. 어떨 땐 “너 몸도 약한데 먹어라.” 그래도 절대 안 먹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좋아하는 남성과 연애를 했습니다. 고기를 먹었을까요? 안 먹었을까요? 먹는 것이 그 자매에게 기쁘고 행복했을까요? 한 번도 씹어본 적이 없는 고기의 육질, 거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비위에 맞지 않는 육즙, 그것이 목에 넘어갈 때의 느낌, 뱃속에 들어갔을 때 기름이 확 퍼지는 것 같은 느끼함, 그것이 그 자매에게 행복감을 주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행복했을까요? 그것을 먹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형제의 환한 미소를 보면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러한 힘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이 질서를 가르쳐주는 성경책이 그렇게 달콤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그분의 질서대로 살고 싶은데 그 질서가 무엇인지 아직 잘 몰라요. 그런데 그것을 잘 가르쳐 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좋아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마음속에 충만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질서에 어긋나게 살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불순종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질서를 잠시 벗어났다 할지라도 그 질서를 벗어난 고통 때문에 심히 아파하게 됩니다. 그 질서를 벗어난 것이 자기 자신일 때는 그 아픔을 ‘회개’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이 그 질서에서 벗어난 것인데도 내가 고통을 느끼면서 아파하는 것을 가리켜서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한 애통’,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눈물’이라고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후자의 고통은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시면서 많이 겪으셨던 것입니다. 당신 자신은 죄가 없으셨고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 질서에 어긋남이 없으셨지만,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도처에서 이 질서를 거스르며 살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수많은 인간들의 모습을 발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면서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너희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명령하실 때 자신의 어떤 것을 빼앗아 가시거나 혹은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누릴 수 있는 어떤 것들을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박탈당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당신께 유익이 되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만 인간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도덕과 자연 질서 속에서 그분의 풍부한 선하심을 충만하게 누리면서 살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너는 나만 사랑하라.”고 하시는 지엄한 명령 속에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 중 누구에게도 말씀하시지 않은 훌륭한 요구를 보게 되고, 그 요구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없이는 인간이 누구인지를 깨달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모든 인간에게 이러한 질서를 가르쳐 주고 싶어 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흠뻑 받으며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의 지성을 가지고 이 질서가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것으로는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인류 역사 이래 모든 철학가들과 사상가들이 풀고 싶어 했던 숙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이며, 어디로부터 왔는가? 자기 밖에 있는 온 우주는 자기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만 가치 있고, 어떻게 해야만 참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가?’ 이것이 모든 철학가와 사상가들이 고민해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렴풋이나마 기술 문명의 폭발적인 발전과 자원의 무한한 개발을 통해서 그것을 흡족하게 누리는 것으로써 이러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통해서 이 질서를 깨달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대답해줄 수 없었습니다. 우리와는 비교 되지 않는 탁월한 지성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헌신했건만, 이 질서가 무엇이고 이 질서를 통해 어떻게 선에 도달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철학자들의 복잡한 사고와 지성을 통해서는 이 질서를 보이지 않으시고, 무지한 자들도 자신의 무지 때문에 접근에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는 방법으로 인간이 행복으로 돌아갈 수 있는 질서를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 것을 사도 바울도 사실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방인들과 달리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직하게 보여주시는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된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굽은 유대교의 사상과 유대인의 특권주의적인 선민사상이 만들어낸 성경과는 다른 종류의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확고하게 믿고 있던 질서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는 질서와는 달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구세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도 그는 그분이 우리에게 참 행복을 주기 위해서 오신 질서시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릇된 질서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 그분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질서를 따라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가두기 위해서 다메섹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 앞에 거꾸러졌습니다. 그는 커다란 혼란을 느꼈습니다. ‘내가 아는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나무에 매달려 죽었고, 구약 성경은 나무에 달려 죽은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고 말한다. 예수는 그렇게 저주를 받아서 죽었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고 믿었는데 예수께서 자기 눈앞에서 영광스럽고 찬란한 모습으로 나타나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는 이 두 가지 사실 앞에서 신학적인 혼란을 느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죽이신 것이었습니다. 또, 다시 살아났다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지 않고는 다시 살아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죽이신 자를 또 살아나게 하셨을까? 만약에 그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었다면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지 않으셨을 것이요, 만약에 하나님이 다시 살릴 필요가 없이 원래 살아있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이 죽이시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데, 둘 다 사실이었습니다. 그가 신학적인 고민 끝에 얻은 놀라운 해답은 예수가 죽으신 것도 사실이었고 다시 살아난 것도 사실이었으니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죽음의 의미였습니다. 예전에는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형벌을 받아 나무에 매달렸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깨닫고 보니까 그분이 죽으신 것은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인간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를 죽이셨고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는 의로운 분이셨기에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하나님의 선의 질서가 분명하게 사도의 마음속에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바로 자기가 거스르며 살았던 수많은 무질서의 악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거기에서 그는 그렇게 살았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선의 질서를 따라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을 위해 살기를 다짐했습니다.
C. 악(惡)과 그릇된 질서
하나님이 의지를 가지고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질서를 어긴 우리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그 질서 속으로 인도하려고 하시는데, 도대체 왜 인간들은 이 질서를 따르지 않고 그릇된 질서를 따라 사는 것일까요? 모르는 사람들은 몰라서 그런다 치더라도 이미 이 질서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한 신자들조차도 다시 악에 빠지고 결국은 그릇된 질서를 따라 살면서 인생의 쓰라린 고통을 맛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여기에서 악과 그릇된 질서를 다루게 됩니다. 객관적으로 선한 것이 있고 주관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선한 것은 언제나 선한 것이지만 선한 것을 선하게 느끼는 것은 주관적입니다. 인간은 선한 것보다는 예뻐 보이는 것, 아름다워 보이는 것에 마음이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가 동의하든지 동의하지 않든지 언제나 아름답고, 선한 것은 우리가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언제나 선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요동치면서 변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가득 찼을 때는 하나님이 좋고 교회가 아름답고 지체들이 기쁘고 성경말씀이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부패하여 죄의 지배를 받게 되면 하나님도 마음에 안 들고 성경도 달콤하지 않고 교회도 즐겁지 않고 영혼들도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진짜 좋고 아름다운 것이 다른데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좋아 보이는 것에 마음이 끌리는데 참으로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학생에게는 공부하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할 마음이 없는 학생들에게는 인터넷 게임이 더 예쁩니다. 그래서 끌리는 것입니다. 결국 악이라는 것은 그릇된 질서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릇된 질서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 때 악이 됩니다.
Ⅳ. 악을 이기는 사랑
그러면 이 구절에 대한 이해가 훨씬 쉬워졌습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라고 할 때 ‘악한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을 통해 보여주신 아름답고 선한 질서에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어울리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것을 선택하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이 어울린다고 믿는 마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질서와는 달리 자기 나름대로 형성한 질서에 비춰 볼 때는 그게 아름답고 좋은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에서 우리는 악을 이기는 사랑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A.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의미
여기에서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의미는 악을 용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를 묻어두고 문제 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명령입니다. “너희는 땅 끝 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라”라는 것을 ‘지상명령’이라고 부르지만 이것도 궁극적인 명령은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 전도하러 나갑니까? 무엇을 하러 선교를 나갑니까?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예수를 믿어서 자신의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 전도명령이 지상명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의미는 악을 용납한다든지, 죄를 문제 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성냄’과 관계가 됩니다. 저는 5개월 전에 열세 번째 설교를 하면서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에 대해 설명 드렸습니다. 그것은 일체의 분노가 없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사랑 없으신 분의 모범이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비둘기를 파는 자들을 내어 쫓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바리새인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퍼부으셨던 진노의 메시지들은 무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성내지 아니하며”라는 말은 성내는 것 자체가 아니라 성냄의 이유가 문제가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분노가 없으면 그는 죽은 신자입니다.
B. 타인의 악에 반응하는 인간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성냄은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그런 종류의 성냄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할 때 이것은 악을 용납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다른 사람이 행한 실수나 잘못 때문에 자기가 개인적으로 깊은 손해를 입게 되었을 때, 물질이나 명예, 심지어는 신체 상해의 손해를 입게 되었을 때 ‘내가 당한만큼 마음에 적어 두었다가 기회가 되었을 때 이것 이상의 고통으로 되갚아 주어야지.’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뜻은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성냄으로 타인에게 복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타인이 우리에게 손해를 끼쳤을 때, 우리의 명예를 훼손했을 때, 물질에 심각한 손해를 입혔을 때, 혹은 다른 어떤 것으로 해를 끼쳤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내게 행한 일을 좀처럼 잊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자비와 선과 베풂을 받아도 그것은 가슴에 새겨두지 않지만 원한과 미움은 가슴에 새기게 됩니다. 우리말 속담에도 “은혜는 물 위에 새기고 원한은 돌 위에 새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선하신 질서를 깨달은 사람은 이런 식으로 자기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에게 악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에 대한 타인의 악에 대하여 반응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생존을 위한 인간의 본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를 해코지 하거나 부당한 일을 행할 때 즉각적으로 그를 물리칠 차비를 하거나 나에게 행한 것에 대해 응징하고자 하는 욕구를 갖게 됩니다. 그것을 마음에 오래 품고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기도 합니다. 이런 것이 극단적으로는 복수의 형태로 나타나고 심지어는 살인의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런 식으로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C. 악을 이기는 은혜의 힘
그러면 사도는 어떻게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해를 입을 때조차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악을 이기는 은혜의 힘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개인적인 손해나 혹은 고통, 때로는 잊기 힘들 정도의 아픔을 당하면, 인간 본성으로서는 그에게 복수를 꿈꾸는 것이 당연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다는 것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큰 손해를 입히고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을 주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는 지금 당장 복수할 수 없을 때 억울한 심정을 달랠 수 있는 가장 큰 위로는 악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고통당하는 사람의 놀라운 위로가 됩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었을 때 내게 힘이 있어서 응징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없을 때 우리는 끊임없이 상상합니다. ‘그 인간이 지금도 어디에 살아있겠지? 내게 그렇게 행했는데 네가 잘되는지 어디 보자. 분명히 비참한 일이 일어나고야 말거다. 나를 이렇게 억울하게 하고도 하나님이 계시다면 네가 잘 살 것 같으냐? 교통사고가 나서 병신이 되든지, 이 교회 저 교회를 유리하든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치이며 사람대접도 못 받든지, 아니면 은혜의 세계에 철저히 가로막혀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캄캄한 어둠속을 헤매든지, 네가 그렇게 자랑하고 사랑하는 네 사업에 큰 위기가 와서 거지가 되고 부도가 맞는 꼴을 봐야겠다.’ 내가 직접 그 일을 실천하지는 않지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상상을 할 때 원한 맺힌 사람에게는 그것이 큰 위로가 됩니다. 때로는 그가 그런 일을 당하면서 고통 받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눈을 감을 수 없는 마음까지 생겨나게 되는데 이것이 원한에 사무친 마음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안 그럴 수 있는데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이 사는 것이 사람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기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선을 베풀 때 그 사람이 나에게 행한 선에 비례하여 베풀지만, 신자가 선을 베푸는 이유는 내게 선을 베풀어 준 그 사람 때문에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악인들도 그렇게 행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선을 베푸는 것은 그 사람이 나에게 선을 행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원래는 내가 하나님을 등지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끔찍한 형벌의 고난을 당하여야 할 사람인데 예수님이 나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우리에게는 사랑만 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질서 앞에서 우리는 구원 받은 사람이고 그 질서를 따라 살아야겠다는 결심으로 구원받은 은혜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감사를 표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합니다. 예전에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했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사랑에 의해 구원받은 사실을 깨달은 후에는 예수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성도들이 서로 만나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비방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미움의 성향, 원망의 성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게 커다란 손해를 끼치고 지금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조차도 주님께 있어서는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나는 사랑할 수 없으나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에게 말해야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노라.’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 예수님은 흠 없으신 분이시면서도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으신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그분은 완전한 선 그 자체로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창칼의 위협을 받으시고 몹쓸 고난과 핍박을 일생동안 경험하셨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분이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그분에게 무슨 결함이 있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세상이 어두웠기 때문에 빛으로 오신 그분을 싫어했고, 세상이 악했기 때문에 선으로 오신 그분을 미워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생동안 이 세상에 사시면서 이 땅의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희생하셨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미워했고, 일생동안 섬겼는데도 사람들은 예수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생명이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누군가에게 복수를 꿈꾸고 마음에 미움을 품고 원수 갚는 광경을 상상하는 것은 직접 행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의 불행을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무한한 사랑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용서를 주시기 위해 당신이 어떠한 고난을 당하셨는지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회심할 때, 그 은혜가 우리의 심령에 넘쳤을 때 우리의 마음을 녹였던 것은 그분이 이 세상에서 당하신 고난이었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복종의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만져볼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찬양)
내 주는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하셨네
주 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주신 사랑을 생각할 때 그 사랑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타인이 나에게 악을 행한 것보다 더 모질게 그분의 질서를 대적하며 악을 행했는데도 주님께 용서받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탕감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지금으로 따지면 수천억 원의 돈입니다. 그러한 죄로부터 용서함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악을 행한 사람에게 복수를 하지 않고 그가 어떤 악을 당하게 되기를 기대하거나 꿈꾸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주님은 원수가 주리면 먹이고 그를 위해 축복하라고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일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경험합니다. 마음을 할퀴고 지나가는 지체들의 상처, 내 마음에 가져다준 부끄러움과 명예의 훼손, 나의 물질을 손해 냄으로써 평안했던 삶을 흔들어놓고 손해를 끼친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미움 속에서 십자가를 기억하고 그를 용서하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번째 방법을 택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악을 이기는 은혜의 힘을 끊임없이 공급받는 것입니다. 나를 이길 수 있는 위대한 힘이 나 자신 속에서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주 앞에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도움이 없이는 나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인의 마음으로 종이 상전을 바라고 여종이 주모의 손을 바라는 것처럼 그분이 베풀어주신 은혜가 아니면 사랑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누군가가 나에게 큰 고통을 주었을 때 그를 진심으로 용서하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어려운 일입니까? 자주 경험하는 일입니까? 자주 경험이 되지 않는 일입니까? 자주 경험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를 자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위해서는 기도를 하지만 마음으로 원하지 않는 일에 관해서는 기도하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악에 빠졌을 때 “하나님, 악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 은혜의 힘으로 극복하게 해주시는데 악에 빠지고 싶을 때는 거기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하고 싶지가 않은 것입니다. 내가 미워하는데, 그가 나에게 입힌 손해와 고통이 지금도 나를 괴롭히고 있는데 내 마음 속에서 그를 용서하고 싶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는 기도가 나오지 않는 것이고, 그 기도가 진실한 힘을 가지기란 더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이게 문제인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에게 악을 행한 사람에게 큰 손해를 입고 그를 용서하지 않는 사랑 없음에 대해서 누구도 하나님을 비난할 수 없으니 주님이 물으십니다. “해봤어?” 나는 마음속에 끊임없이 요동치며 복수를 꿈꾸지만 “이 일은 옳은 일이 아닌데.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안 사람은 이렇게 살 수 없는데.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는 힘이 내게는 없습니다. 나의 죄와 악함을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나도 나를 어떻게 돌이킬 수 없으니
(찬양)
주 예수 사랑의 줄로 나를 굳게 잡아매소서
주의 은혜의 사슬로 나를 잡아 매 시옵소서.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을 은혜의 힘으로 돌이켜 주시옵소서. 주께서 돌이키시면 내가 돌이킬 것입니다.” 이렇게 통절하게 간절히 기도하면 마음속에서 나의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거기에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또 한 번 용서하고 나면 그 사람이 나타나서 “어젯밤 꿈에 당신이 그 고통 속에서 나를 용서해주는 것을 보았다. 그동안 널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라고 하면 아마 우리는 자주 그렇게 살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철면피로 나타나서 내가 마음속에 용서하고 용납하려고 하는 그 행동을 또 다시 해서 사랑을 시험합니다. 이런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서 나는 예수를 믿었으나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 겉모양은 예수에 미친 사람 같지만 마음속에는 악함과 미움이 가득하여 주님의 질서를 해친 사람은 기쁘게 용납하고 내 질서를 해친 사람에게는 복수의 칼을 드는 무자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나 같은 인간들에게 에워싸이셔서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그런 생애를 사셨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이기고 나면 사랑하는 자신이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자신에게 힘을 주셔서 사랑하게 하셨던 주님, 사랑할 수 없는 인간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하시고, 용서할 수 없는 인간으로 용서하게 하시고, 복수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마음의 피 묻은 칼을 내려놓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은 그분을 의지하면서 살아야할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그 의존의 감정이 예수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입니다. 이렇게 신앙생활하면서 이 교회 안에서 주님을 알아가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5.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6)
Ⅰ. 본문해설
이어서 사도 바울은 사랑의 열 번째 특성을 소개합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랑, 이것은 사랑의 아홉 번째 특성인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는 특성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사랑의 아홉 번째 특성을 설명하면서 악한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여덟 번째 특성인 성내지 아니한다고 하는 특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드렸습니다. 자신의 질서에 거스르는 행동으로 손해를 입히고 나쁜 일을 행한 사람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마음에 남으면, 그 사람에게 악한 일이 일어나기를 꿈꾸거나 하나님의 질서에 거스르는 어떤 행동이 그에게 동일한 고통을 안겨주기를 바라게 되는데, 이것이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랑의 열 번째 특성인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라는 특성은 나에게 악을 행한 사람이 해를 입기를 바라는, 악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마음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 그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Ⅱ. 이 구절의 의미
A.원어의 뜻
이 구절의 본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의’라는 단어의 희랍어 원어는 ‘테 아디키아’(τῇ ἀδικίᾳ)입니다. ‘테’(τῇ)는 영어의 'the'에 해당되는 정관사이고 ‘아디키아’(ἀδικία)에서 ‘아’(ἀ)는 희랍어 부정접두어로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디키아’(δικία)는 ‘의’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디카이오스’(δίκαιος)라고 하는 ‘의로운’이라는 형용사가 나오게 됩니다. ‘미’(美)와 ‘추’(醜)의 역사를 돌아보면 ‘미’라는 것에 엄격한 기준이 있어서 그 좁은 기준에 부합할 때만 아름답다고 하는 감탄을 자아냅니다. 그에 비해 ‘추하다’라는 것에는 기준이 없습니다. 아름다움을 충족시키는 질서를 떠난 모든 것은 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얼굴이 예쁘다고 할 때는 엄격한 기준이 있습니다. 코가 눈 위로 올라가면 안 된다든지, 입이 좌우가 대칭이 되어야 한다든지 등의 기준이 있어서 황금비율에 맞게끔 인체와 이목구비가 자리를 잡고 얼굴색이 희면 예쁜 것이 됩니다. 이 기준은 시대나 지역에 따라서 조금씩 바뀌긴 합니다. 그러나 바뀔 때도 아무렇게나 바뀌는 게 아니라 비율을 유지하는 가운데 비율을 오가면서 바뀌기 때문에 전혀 얼토당토않게 바뀌진 않습니다. 남한에서는 여성이 예쁘다고 하려면 얼굴이 계란형이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이목구비가 바라야 하는데 북한은 좀 다릅니다. 오랫동안 단절된 가운데 그들은 나름의 미의 기준을 갖게 된 것입니다. 얼굴이 동그래야 합니다. 살이 좀 붙어야 되는데 남한에서는 형제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스타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보조개가 있으면 지금은 촌스럽다고 하는데 거기에서는 보조개와 이쪽의 덧니가 미인의 표준이라고 봅니다. 거기에서는 그것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땅덩어리인데도 50년 이상 분단이 되다 보니까 미의 기준이 약간 차이 나는데, 그래도 북쪽에서 아름답다는 여인이 여기 왔을 때 추하다고 평가받지 않고, 여기에서 예쁜 사람들이 위로 올라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의 기준이 지역과 민족과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바뀐다 하더라도 아름답다는 것은 또렷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추하다는 것은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기준이 없습니다. 그 기준에서 이탈되면 아무리 자유롭게 나가도 충분히 추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뜻하신 의지인 율법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의로운 삶입니다. 거기에 부합하려는 성향을 마음 안에 충분히 가지고 있을 때 그 사람의 내적인 질을 따라 의인이라고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불의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한 진리에 부합하여 살려고 하는 성향이 아닌 다른 여타의 성향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아무 것이나 있기만 하면 그 사람은 불의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라운 것은 ‘불의’라는 말을 ‘아디키아’라고 했습니다. ‘의가 없다.’ 이것은 진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열한 번째 특성에서 이것을 도입합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그래서 여덟 번째는 아홉 번째와 아홉 번째는 열 번째와 열 번째는 열한 번째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롭게 살기 위해서는 기준을 찾고 그 기준에 맞춰야 되지만, 불의하게 살기 위해서는 별도로 찾아야할 기준이 없고, 그냥 기준 없이 살면 불의한 삶이 됩니다.
‘기뻐하다’라는 희랍어는 ‘카이레이 에피’(χαίρει ἐπὶ)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에피’(ἐπὶ)는 'all about a poll'이라는 정도의 뜻이고, ‘카이레이’는 직역을 하면 ‘좋아하다, 행복해하다’입니다. 여기에서 ‘좋은, 선물, 은사’ 등을 의미하는 ‘카리스마타’라는 단어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을 본다면 이런 뜻일 것입니다. “사랑은 누군가가 불의에 빠지거나 불의를 행하게 될 때 그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그것에 흡족해하고 좋아하고 기뻐하며 만족해하는 마음과 정신의 움직임을 여기에서 ‘카이레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B. 참된 의미
그러면 이 구절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거나 경우에 없는 일을 하거나 내가 싫어하는 어떤 일을 해서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마음에 고통을 주었을 때 분노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아홉 번째 특성에서 거론하는 “성내지 아니하며”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어떤 자원과 능력을 가지고 저 사람을 징벌하거나 은근히 저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악한 것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불의를 기뻐하는’ 것은 그러한 마음의 생각과 바람이 현실로 나타나서 그가 죄에 빠지고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거나 그런 상황에 접어들게 되었을 때 마음으로 고소해하고 좋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이런 식으로도 약간 완곡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선한 의도로 그 사람에게 충고했습니다. “너 그러지마. 그렇게 하면 별로 안 좋아.” 그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하지 말라니까. 너 그렇게 살면 나중에 굉장히 큰 어려움을 당하게 돼.” 그런데 이번에는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모욕을 하면서 말을 안 듣습니다. 그럴 때 “내가 저를 위해서 얘기했지, 나를 위해서 그러나? 그럼 네 마음대로 해봐라. 그러다가 큰일을 당하고야 말지.” 이게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사고를 쳤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이 있으면 이전에 모든 과정에 대한 생각은 별도로 그가 지금 처하게 된 큰 위기와 고통, 불의한 죄에 대해서 저런 상황에 저 영혼이 있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불쌍한 일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사랑의 마음이라면, 그 사람이 그런 상황에 접어들었을 때 ‘그것 봐. 내가 뭐라 그랬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내 말이 이루어졌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카이레이에피’ 하는 마음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 중 자비와 밀접한 연관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속성인 자비와 연관이 되는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중 사랑은 또한 자비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성품 중 자비는 오래 참음과 함께 사랑의 아주 중요한 특성입니다. 어떤 사람이 커다란 고통 중에 있게 되었을 때 그것이 비록 그 사람의 잘못에 의해서 당하게 된 고통이라 할지라도 논리적인 관계와는 상관이 없이 지금 그가 당하고 있는 아픔을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게끔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속성이 자비입니다. 그래서 세 가지 속성의 작용이 함께 묶어져서 사랑이라고 분류가 되는데, 그것이 오래 참음과 긍휼과 자비입니다. 자비는 긍휼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비유를 들면, 엄마가 분명히 “거기 올라가지 마라.”고 이야기했는데 애가 끊임없이 화장대 위에 기어 올라갑니다. “올라가지 마라. 거기 위험하다.” 따끔하게 몇 번을 타일렀는데 얘가 올라갔습니다. 두 바퀴를 구르고 쾅 하고 떨어지면서 가구에 부딪혀서 찢어지고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엄마가 “이 모든 것이 바로 네가 잘못해서 그런 거다. 엄마는 너에게 수없이 경고했는데 네가 올라가서 깨졌지. 누구의 잘못인지 한 번 따져보자.”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가 현저히 잘못해서 상처가 났지만 피 흘리는 자식을 보면서 ‘저게 얼마나 아플까?’ 하면서 일단 논리는 접혀집니다. 그러한 단면적인 성격이 자비 안에는 있습니다. 사랑에 그런 속성이 있기 때문에 비록 악인이 불의에 빠져서 고통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마음속에 참된 사랑이 있다면 악인이 불의에 빠져 고통스러운 상황을 보면서 행복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이러한 참된 사랑이 사람 속에 있을 때 그 사람은 타인의 불의를 기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불의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참된 사랑은 진리와 끊임없이 합치된 삶을 바라기 때문에 타인이 불의한 것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신이 불의한 것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Ⅲ. 불의 : 자기 사랑의 열매
지난 시간에는 ‘선’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불의’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불의는 자기 사랑의 열매입니다. ‘의’라는 개념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율법에 합치하는 삶입니다. 이 삶을 가능하게 하는 내면적인 정신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 이 둘을 나타내는 단어가 약간 다릅니다. 외적인 행동은 ‘체다카’(hq;d;x])라는 단어로 나타내고, 내적인 질을 가리키는 것은 ‘체데크’(qd<x,)라고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에 ‘체데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체다카’의 삶을 삽니다. 그 사람의 특성은 객관적인 삶의 표준인 하나님의 율법이 기준이 됩니다. 마음속으로 율법을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도 거기에 합치시키기를 원합니다. 의로운 삶과 의로운 사람과 의로운 행실의 관계는 필연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의로운 사람으로서 의로운 행실을 행하게 되면 의로운 행위가 되지만, 의롭지 않은 사람이 의로운 행실을 흉내 내게 되면 위선이 됩니다. 반대로 불의한 사람이 불의한 삶을 살면 자연스럽게 불의를 행하는 것이지만, 원래는 의로운 사람인데 일시적으로 어떤 목적에 의해 마음에도 없는 불의한 일을 행하게 될 때 그것을 ‘위악’(僞惡)이라고 부릅니다.
종종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법전적인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 건물에 유리창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공을 가지고 놀다가 작은 유리창 하나를 깨뜨리면 만 원이나 이만 원쯤이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호텔의 유리창 같은 것은 금방 가서 살 수가 없고 외국에서 수입을 하거나 특별 주문 제작을 해서 사람 키의 여섯 배나 일곱 배 되는 유리를 트레일러로 실어다가 특수한 장비로 조립을 해서 만드는 것입니다. 호텔 같은데 천정 높이 솟아 있는 큰 유리들은 매우 비싼 것들니다. 그래서 건물을 보험을 들고도 유리는 보험을 따로 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자동차가 개념 없이 차를 몰고 달려오다가 건물을 들이받고 호텔 한 쪽 유리를 모두 날려 버렸다고 칩시다. 건물 주인이 놀라 뛰쳐나가서 운전수를 붙들었는데 알고 보니까 중학교 삼학년짜리 학생이 아빠 몰래 차를 몰고 와서 들이 받아 박살을 낸 것입니다. 사고는 쳤지만 사고를 배상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을 갚지 못하는 동안에는 이 사람이 불의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와서 아이를 야단치고 한 번에 수표를 긁어서 모든 돈을 배상해 주었을 때 건물주는 사고를 친 어린 학생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물을 수가 없고, 두 사람 간에 손해 배상의 책임은 끝난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손해를 끼친 행위는 불법이지만 아버지가 대신 희생을 해서 돈을 지불함으로써 아이를 불의한 상태에서 건져 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희생은 의가 되는 것입니다. 사고는 우리가 치고 죄를 지었는데 희생은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심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면하게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속량하시는 은혜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 예수는 의가 되셨습니다. 한 사람이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는 율법을 따라 충분히 정죄당하고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희생을 보이셨습니다.
A. 자기 사랑: 신적 질서를 거부함
불의라는 것은 자기 사랑의 열매입니다.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 원리에 의해서 하나님의 신적인 진리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계시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정점으로 하고, 하나님을 최고의 존재, 최고의 가치, 궁극적인 선으로 보고 당신 자신의 선함을 모든 피조물들에게 베푸시기 위한 수단으로서 가치의 질서와 삶의 질서를 규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질서가 자기가 만들어가는 질서와 맞을 때도 있지만 맞지 않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드는 질서와 하나님이 진리를 통해서 제시하시는 질서가 부딪힐 때 끊임없이 하나님을 버리고 신적인 질서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B. 자기 사랑의 열매: 불의한 삶
자기 사랑에 빠지게 될 때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는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서 살고 싶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자기를 사랑할 때는 누구의 뜻에 맞추어 살고 싶을까요? 자기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수 천, 수 만 가지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크고 작은 뜻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십계명 같은 것은 큰 뜻입니다. 그러나 작은 뜻도 있습니다. 하나하나는 다 연결이 되어서 한 가지의 뜻으로 집중이 됩니다. 그게 하나님의 창조 목적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면 자기 뜻대로 산다고 했는데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면 나 자신은 하나입니까? 오늘은 이것을 원해서 이렇게 했는데 내일은 저것을 원해서 저렇게 합니다. 오늘은 이게 좋아서 이렇게 살았는데 내일은 저게 좋아서 저렇게 삽니다. 오늘과 내일, 내일과 모레, 오늘과 어제 사이에 항상 통일된 일관성이 있습니까? 악인이 십 년 전에 뜻을 세우고 악을 행한 것과 오늘 충동이 일어나서 악을 행한 것 사이에 놀라운 연결이 있어서 하나를 향해 가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살면 선에 도달합니다. 악은 선 밖에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닌 나머지는 뭐가 되는 것입니까? 아까 설명 드린 미추의 기준을 가지고 보면 됩니다. 선은 범위가 좁고 분명합니다. 거기에 합당하면 선입니다. 거기를 벗어나면 어떻게 살든지 그것은 다 악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사랑이 허무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자신은 영혼과 육체가 골고루 갖추어져서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자신이 아닙니다. 말로는 자기 사랑이라고 하지만, 이 자기 사랑은 자신의 반쪽인 육체만을 위한 사랑입니다. 인간이 자기 육체를 그렇게 사랑하지만 점점 육체는 완전성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소멸해나갑니다. 사랑의 기능은 영혼의 작용인데 영혼을 배제한 육체만을 사랑합니다. 끝까지 사랑을 했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육체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목표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외의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은 허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장 15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도 지나가고 정욕도 지나가기 때문에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진리의 빛 아래 있지 아니하면 자신의 육체 밖에는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 육체도 사랑하는 그 사람을 버리나니 자기를 향한 사랑은 없는 것을 향한 허무한 사랑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악이라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있지 않은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있지 아니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악입니다. 결국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의 생활의 표준은 ‘자기 좋음’입니다. 그것이 일관성이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오늘은 이것이 좋아서 이것을 행하고 내일은 저것이 좋아서 저것을 행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렇게 부유하듯이 떠도는 좋음에 대한 욕망을 가리켜서 ‘정욕’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생활의 동기는 가치가 아니라 자기의 만족과 자기 행복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불의한 삶입니다. 사랑은 이런 것과 양립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진리의 참된 빛입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예수를 오래 믿고 교회를 다니고 이런 저런 일로 봉사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쪽으로 기우는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주님을 믿지 않고 중생하지 않았을 때는 자기 밖에 사랑할 수 없는 필연을 가지고 있었는데 중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끔 해주셨습니다. 중생하기 전에는 전혀 없던 놀라운 변화가 우리의 지성과 의지 안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우리의 의지 안에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는 다름이 아닌 사랑의 성향입니다. 예전에는 전혀 사랑하지 않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생겨나게 되고, 예전에는 우리가 전혀 인식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지적인 감각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도록 우리를 구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한 번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 안에 두시고 우리 스스로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의 사랑이 되게끔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가질 때도 주님을 의지해서 사랑을 갖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로 구원을 얻어서 중생하게 된 것이요, 중생한 후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 생명의 원리를 심으셨지만 끊임없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지 않는 한, 새 생명의 원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새 생명의 원리를 심으셨어도 그것은 성령 안에, 성령과 함께 성령을 향하여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셨고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써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우리의 참여 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단독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성화에서 사랑은 기계를 움직이는 것 같은 사랑이 될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사랑은 하나님께 모독적인 사랑이 될 것입니다. 음식점에 들어갈 때 제일 기분 나쁜 것이 인형이 인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받아도 기분 나쁜 그런 종류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시고 싶으시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참여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의지를 가지고 우리에게 참여하게 하시는 방법이 우리의 선한 의지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동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의 크기가 커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커지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멀리 떠나 악에 가깝게 되었을 때, 우리 본성 안에서 은혜의 작용이 현저히 사라지고 본성의 작용만 남았을 때 그것은 곧 죄의 작용입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편이 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편이 되면 우리가 진리로부터 멀어진 생활을 하고 있는지, 불의한 삶을 살고 있는지 공정한 판단을 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진리의 빛입니다. 불 꺼진 등대 수천 개가 해안에 서있어도 어두운 밤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배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세상은 주일에 교회당 대문이 열리고 마당으로 쏟아져 나오는 인파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참된 진리의 빛을 따라 사는 사람들일 때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신앙 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어두운 밤바다에 불 꺼진 수 천 개의 등대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호롱불로라도 밝혀 그 빛을 내는 단 한 개의 등대는 풍랑을 만난 밤바다의 수많은 배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진리의 빛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공정하게 판단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진리의 빛이 필요합니다. 찬란한 진리의 빛이 비췰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진리로부터 멀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고, 그 때 우리는 회개할 수 있고 돌이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그럴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예배를 드릴 때 자신의 어두운 마음을 찢고 들어오는 찬란한 진리의 빛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나는 너무 어리석은 사람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진리의 발견이 성령의 역사와 함께 우리 속에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매일 우리 자신을 두둔하며 내리는 판단을 신뢰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예배를 드릴 때,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때, 교제를 나눌 때 반짝이는 진리의 빛들이 우리를 비추어 우리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를 객관적으로 보게 만들어 주면 부당한 자기 사랑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빛들이 사라질 때 우리의 자기 사랑은 더욱더 견고하고 뿌리 깊어져서 그 결과로 열매를 보게 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와 상관없는 불의한 삶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있을 수 없으니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이죠.
Ⅳ. 의(義) : 하나님 사랑의 열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한다.”라는 말은 뒤집으면 “사랑은 의를 기뻐하나니”라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사랑은 의를 좋아하나니, 사랑은 의를 진심으로 즐거워하나니” 이 정도의 뜻이 될 것입니다. 의로운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의 삶의 열매입니다.
A. 신자의 사랑의 반응적 성격
신자의 마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이 있을 때 의로운 삶은 그러한 성향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성장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 왜 그렇게 어렵습니까? 하나님보다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는 것은 신자 자신 안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 나타나는 반응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제가 맨 처음 회심한 교회에서 신앙생활 할 때 전도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노총각이었습니다. 서른 대여섯은 되어 보였으니까 지금 사셨으면 칠십 가까이 되실 것입니다. 철야기도를 하고난 다음으로 기억되는데 같이 모여서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됐는지를 간증하는데 이분이 이야기를 합니다. 1970년대였는데 자기는 증조할머니 때부터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계산해 보니까 1900년대 초입니다. 그때는 진짜 개신교 인구의 숫자가 그저 몇 천 밖에 안 되었는데 아주 초창기에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증조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이 병에 걸린 것입니다. 병원에 갈 돈은 없고 무당한테 맡겼다고 합니다. 무당이 이 아이의 병세를 두루 살피더니 “내 능력으로는 안 되겠다. 예수를 한 번 믿어봐라.” 그러랍니다. 이 무당은 예수를 어떻게 알았냐 하면 동네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전도하러 와서 이 동네에서 점치는 무당부터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하고는 담대하게 예수를 믿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내가 서양 잡귀 같은 것 믿을 줄 아냐고 거절했는데 자기보다 훨씬 세다는 것을 그 순간 느낀 것입니다. 이 아이 병세를 보니까 자기가 굿해서 나을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님한테 가보라고 한 것입니다. 동네에서 가장 높은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무당의 말이니까 신뢰를 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나 예수를 믿고 싶습니다. 우리 아이가 죽어갑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그 할머니, 할아버지가 진짜로 예수를 사랑해서 믿고 싶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의 수단입니다.
더 재밌는 이야기는 어떤 권사님이 자기가 예수를 믿은 것을 간증합니다.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물었습니다. 부모가 유산이 많으면 제사를 지낼 때 형제들이 형을 부러워합니다. 형이 늘 제사를 지내니까 집의 모든 가정행사에 있어서 주인이 됩니다. 그러면 주인이 된 만큼 유산이 가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법이 있지만 지금도 법이 있어도 유언장이 그 법을 초월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유산도 없습니다. 아들이 넷이 있어서 며느리를 얻었는데 첫째한테만 그 제사가 다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며느리는 죽을 맛입니다. 이것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저희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말씀하시는데 한참 제사가 많을 때는 일 년에 열 두 번이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죽은 당신 남편의 고조할아버지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얼굴도 못 본 사람을 위해서 죽은 날을 기억하고 시장에서 장을 봐다가 전을 부치고 하려니 돈이 얼마나 많이 들겠습니까? 그저 노는 것 같으면 재미삼아 해본다고 하지만 돈도 없는데 매달 하는 일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이 며느리도 그런 처지에 있었던 것입니다. 억울하고 원통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합법적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예수를 믿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 발로 걸어가서 나 예수 좀 믿게 해 달라고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쉬운 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드리면 되는 줄 알고 잘 나갔더니 저녁 예배는 왜 안 오시냐고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밤 예배를 나갔더니 수요 예배를 나오라고 그럽니다. 수요일에 갔더니 구역예배는 드리시냐고 그럽니다. 그래서 구역예배 가니까 철야예배를 가자고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철야예배에 가니까 새벽기도는 안 하고 무슨 신앙생활 한다고 그러느냐는 것입니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은혜도 못 받는 사람이 흉내를 내고 다니려니까 힘들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제사 지내는 것보다는 낫지.’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해서 교회에 나왔겠습니까? 처음 동기는 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니까 하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예수에 미쳤다고 하고 교회에 빠졌다고 하고 예수교에 마음을 바쳤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 사랑은 사랑이기는 해도 하나의 사랑이 아닙니다. 헤아릴 수 없이 무수하게 많은 게 자기 사랑입니다. 인간마다 단 하나의 자기 사랑이 있는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헤아릴 수 없고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수많은 종류의 자기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도대체 누가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가끔 누가 누구한테 삐쳤다고 그러고 상대를 안 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제가 항상 충고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너한테 만족을 못줬지? 그게 핵심이지?” “네” “그럼 하나 물어보자. 너는 누구에게 그렇게 만족을 줘봤냐? 나도 너한테 만족하겠냐? 이 세상에 태어나서 네가 단 한 사람이라도 만족하게 해준 적이 있냐? 너희 엄마는 너한테 만족했냐?” “아니요.” “너희 아버지는?” “아니요.” 없어요. 그게 만약 사람이라면, 그런 사랑을 하나님이 내버려두셨다면, 그리고 교회에 모였다면 그게 교회가 되겠어요? 한 사람은 제사 안 지내려고 예배드리러 오고, 한 사람은 자식 병 낫게 하려고 예배드리러 오고, 그러면 하나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계기는 그렇게 사용하실지 모르지만 진짜 교회를 만드시고 이 사람들 위해서 그들을 바꾸십니다. 어느 순간에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서 깊이 변화됩니다.
(찬양)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그 사랑 강같이 흐르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하나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B. 하나님 사랑 : 신적 질서를 받아들임
이렇게 될 때 예전 생활의 표준은 자기 좋음이었는데 이제는 자기를 그렇게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나를 신뢰하고 나 좋은 대로 살아보니까 마지막에 돌아오는 것은 쓰디쓴 고통이요 견디기 힘든 괴로움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생활의 표준이 복음의 진리로 바꾸게 됩니다. 그 때 아침저녁 수시로 변하던 자기 좋음에서 돌이켜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불변하는 복음의 진리를 생활의 표준으로 삼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표준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 부합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의 열매인 의로운 생활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율법, 더 넓게 말하면 진리에 부합하는 생활이 의로운 삶입니다. 그렇게 살면 인간이 행복해진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미 믿음을 통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았으니까 조금 낫지만, 만약에 이러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 순수한 이성을 가지고 삶을 합치시켜서 선에 도달하게 하는 참다운 생활의 표준인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이것은 수천 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의 고답적인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누구도 일치된 답을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진리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삶을 그 진리에 합치시킬 것인가?”라는 것을 순수한 이성으로 탐구해야 한다면 머리 나쁜 사람은 절대로 참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 기독교는 머리 나쁜 사람을 배척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단지 진리를 들려주시고 읽을 수 있게 하신 것이 아니라 명백히 볼 수 있어서 진리에 대한 총체적인 지식과 이성적인 추론의 능력이 없어도 진리의 빛을 보는 즉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도록 탁월한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는 것입니다.
제가 직장 다닐 때의 이야기입니다. 연말이 되면 전화국마다 전화를 많이 걸게 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큰 숙제입니다. 그중에 한 국장이 미군부대 안에 전화국을 가지고 경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화 좀 겁시다. 가족들이 당신의 전화를 기다립니다.” 수없이 써 붙여도 매상이 전혀 안 오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거 다 뜯어 버려라.” 하고 큰 간판을 만들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한쪽에는 전화하는 미군을 저쪽에서 예쁜 애인이 전화를 받는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되기 전에 전화국 앞에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까 미군들이 장거리 전화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미군은 아예 샌드위치를 싸가지고 와서 의자에 앉아서 그걸 먹으면서 두 시간씩 통화를 하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통화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진리와 율법이 서류로 된 것이었다면, 예수님이 오신 후의 진리는 동영상으로 우리에게 음성까지 곁들여서 다가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을 발견하고 성령을 통해서 그분을 만나는 순간 찬란하고 밝은 빛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그 진리를 논문을 쓰듯이 서술해낼 수는 없지만, 그 삶이 진리에 부합하는 삶인지 아닌지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이 생겨납니다. 진리에 속한 행동과 삶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성향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래서 진리에 대한 앎과 실제로 살아가는 실제 삶이 구별이 안 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진리와 삶이 합치된 놀라운 본보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지상 생애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을 공부했을 뿐인데 저절로 진리를 알게 되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을 뿐인데 삶에 놀라운 적용을 도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의 삶은 진리 자체이시면서 동시에 의로운 삶으로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기 쉽게 그림처럼 보여준 삶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생애에서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던 때는 성경을 가장 사랑하던 때였습니다. 성경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진리의 말씀이 달콤하게 느껴질 때 자기의 사랑을 버리고 예수님을 향한 순결한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진리의 내용은 때론 불분명할 때가 있습니다. 진리 자체는 분명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우리의 지성이 모자라거나 이성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애매하지 않고 분명합니다. 그래서 진리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늘과 달의 비밀, 자연세계의 오묘한 신비, 이런 것들을 과학적으로 풀어내고 인문학 속에 있는 많은 역사와 담론들의 층차를 이해하지 못해도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붙들면서 ‘그분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했기 때문에 “나는 그분을 사랑하고 살 것이다. 나는 그분만 따라 갈 것이다. 그분이 나에게 시키시는 모든 것은 좋은 것이니 거친 바다, 험한 산이라도, 피가 맺혀도 내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따라 갈 것이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훌륭하게 진리를 알고 진리에 합치한 삶을 살게 됩니다.
물론 기독교 안에는 수많은 진리에 대한 지적인 유산들이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몇 번 말씀드렸지만,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으면서는 내가 기독교인이 된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했지만, 종교개혁가 이후의 개혁파 신학자들의 유산을 대하면서는 내가 기독교인 중에서 개혁파 정통주의자의 후예라는 것에 대해 무한한 자긍심을 갖습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역사 이래로 그렇게 풍부한 진리에 대한 지적인 유산을 가진 시대가 없었습니다. 그 숲에서 벌레가 된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아주 자랑스러운 조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자랑스러워해야 되지만 말입니다.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진리에 대한 어마어마한 유산들을 천재적이면서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이 남겨놓은 것입니다.
며칠 전에도 개혁파 정통주의자 신학자들에 대한 최근의 박사 논문이 120권 정도가 제 방에 들어왔습니다. 어젯밤에도 그걸 만지작거리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조상들이 피 땀을 흘려 일궈놓은 어마어마한 유산들 속에 살면서 감사하고 누리면서 살지 않는 것일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수천억 개의 유산이 있는데 그저 분식집이나 하면서 근근이 먹고사는 영세업자처럼 왜 그렇게 살아갈까?’ 오늘 새벽에도 일찍 나와서 자료들을 만지면서 설교가 너무 하고 싶었습니다. ‘이 엄청난 유산들을 성도들이 잘 이해할 수 있게끔 맛있게 가공해서 어찌됐든지 먹여야 할 텐데. 이 어마어마한 것들을 언제 다 하고 죽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자랑스럽고 가슴이 뜁니다. 이 유산은 우리가 끊임없이 활용하면서 살아야 할 유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순전한 사랑이 없으면 그것을 남겨놓은 사람들이 의도하였던 대로 그것을 사용하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오늘 아침 새벽에 나와서 논문을 하나 읽다가 눈물이 났습니다. 칼빈이 살던 시대 이탈리아 출신의 신학자였는데 철학적인 글들을 많이 남긴 박식한 사람이었습니다. 피터 마터(Peter Martyr Vermigli)라는 신학자였는데 칼빈과 편지를 수없이 주고받았는데, 1557년 8월에서 11월 사이에 여덟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사랑이 듬뿍 들어있는 애절한 편지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어떤 연구가들은 피터 마터가 칼빈주의자라고 하지만 우리는 칼빈이 마터 주의자가 아닌지 다시 생각해봐야 된다고 할 정도로 서로 영향을 깊이 주고받았습니다. 각기 따로 신학을 했는데 개혁주의 사상에서 기가 막힌 일치를 이룹니다. ‘왜 우리 시대에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영적인 교통을 볼 수 없을까?’ 그것이 제가 눈물이 났던 이유였습니다. 진리 안에서 아름다운 신학자들의 교통 말입니다. 그 사람들의 유산이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재산인지 모릅니다. 그 어마어마한 진리의 세계들은 순수하게 이성으로만 풀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신의 삶과 교회의 모든 생활이 진리의 표준에 부합하는 생활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했고, 그 일을 위해 온전히 헌신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진리와 함께 어우러져서 어마어마한 유산들을 남겨 놓은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랑 속에서 진리에 부합하도록 순수해질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탁월한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지성을 최대한 사용해서 선조들이 물려준 아름다운 신앙의 지식들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최상의 덕이 아닐까요?
C. 의롭게 살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지나간 모든 죄에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면서 우리가 배우는 진리의 표준에 합당하게 살도록 이끄십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의롭게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의 작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주님께서 성령을 주셨지만 또 다른 은혜를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충만한 은혜를 이미 입었지만 더 많은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더 많은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큰 은혜를 깨닫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간청하고 구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작용만이 끊임없이 나를 버리고 예수를 사랑하게 만들고, 세상을 포기하고 진리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의 삶이 비로소 우리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에 부합한 삶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님을 본받는다고 말하는데 그게 가당하기나 합니까? 죄인이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완벽하게 본받지 못할지라도 예수님의 마음 안에 있는 아가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동일하게 역사할 때 그리스도 예수의 삶을 뒤따라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과 똑같은 삶을 살지 못해도 그분의 삶을 흉내 내어서 주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의로운 삶과 연속성을 가진 삶을 살아서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성품을 보여주려고 할 때 주님이 도와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어두운 지성을 비추는 햇빛 같은 찬란한 진리의 빛으로 본성을 변화시키고 움직이는 성령의 강한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진리에 합치시킬 수 없는 불의한 삶과 결별하고, 의로운 삶을 위한 능력을 갖도록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우리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발견합니다.
Ⅴ. 결론: 은혜로 살아가는 길
결론적으로 신자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은혜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신학의 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자원으로 주님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주님을 사랑할 은혜를 구합니다. 그 은혜로 주님을 사랑할 때도 우리가 주님을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요 주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영광을 그분께 돌려드립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할 뿐 아니라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불의에 빠진 이웃의 비참한 영혼을 자신의 영혼인 것처럼 슬퍼하고, 그들을 위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무엇으로든 그들을 돕는데,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바로 그 일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원수를 용서하되 용서할 뿐만 아니라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하십시오. 그래서 그 사람이 여러분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16.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6)
Ⅰ. 본문해설
이어서 사도는 열한 번째 사랑의 특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말입니다. 사랑의 세 번째 특성부터 부정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즉,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등으로 이어지면서 부정어가 사용되었는데 열한 번째 특성에서는 부정어가 사라진 긍정적인 서술이 나옵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이것이 바로 사랑의 열한 번째 특성입니다. 그러면 이 구절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Ⅱ. 이 구절의 의미
A. ‘함께 기뻐하고’의 주체
우선 여기에 나오는 ‘함께 기뻐하고’는 희랍어 성경에서 한 단어로 묶여져 있는 단어입니다. ‘함께 기뻐한다’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이것이 사랑 자체인가 하는 것입니다. 삼인칭 동사로 나오는 ‘함께 기뻐하고’의 주어가 문법상으로 보면 틀림없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번역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해석은 표현상으로는 사랑을 주어로 하고 있지만 함께 기뻐하는 것은 사랑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담지하고 있는 인격을 가진 존재가 사랑을 가지고 진리로 더불어 기뻐하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저는 이 해석을 훨씬 더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자신이시고, 그 사랑은 하나님의 인격 안에서 우리를 향하여 베풀어짐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람이나 폭풍같이 비인격적인 것이 아닙니다. 안테나를 세우면 주파수가 잡히는 것 같은 비인격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인격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것을 통해 사랑이 경험이 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인간과 동떨어진 사랑의 속성을 보여준다기보다는 그 사랑이 사람의 인격 안에 있을 때 인격과 더불어 사랑이 발휘되는 방식의 열한 번째 특성이 바로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B. 그 진리: 테 알레데이아(τῇ ἀληθείᾳ )
여기에서 ‘그 진리’는 희랍어 성경에 ‘테 알레데이아’(τῇ ἀληθείᾳ)라고 되어 있는데, 직역을 하면 ‘그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진리는 좁은 의미에서 복음진리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넓은 의미에서 자연과 모든 인간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 자신의 참된 진리 모두를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자리하고 있던 고린도시는 희랍 시대부터 아주 발달한 무역도시였고 식견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학문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학문 활동은 대부분 철학과 예술, 문학에 관한 활동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아고라’라고 하는 시장 옆 광장에 늘 모여서 사람들의 연설을 들었습니다. 정치적인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저 멀리 인간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것을 누구든지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었고, 토론을 하면서 지혜와 새로운 지식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일행은 이런 문화적인 환경을 사용해서 새로운 방식의 삶의 길을 복음으로 제시했기 때문에 많은 청중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편지를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받고, ‘테 알레데이아’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복음만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그들이 아고라에 모여서 떠들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인간은 어디로부터 왔고, 우주는 무엇 때문에 생겨났으며, 이 모든 것을 통괄하는 최고의 존재가 있을까?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것들을 탐구하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테 알레데이아’라는 단어를 생각해 냈던 것입니다. 원래 이 단어는 ‘자명하여 의심할 수 없는 것, 감추지 않고 드러난 것’,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감출 수 없도록 모든 사람에게 드러난 통일된, 총체적인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복음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 속에서 우리의 영혼과 마음 안에 펼쳐진 진리를 함께 사랑하게 됩니다. 모든 진리의 엑기스가 성경책 속에 모아져있기 때문에 진리는 성경을 핵심으로 찬란하게 빛을 발하며 인간의 마음과 영혼, 모든 자연 세계에까지 펼쳐지게 됩니다. 이러한 진리는 곧 하나님의 질서를 보여주고 이 진리를 따라 자연에는 자연적인 질서가 있고 도덕 세계에는 도덕적 질서가 있어서 그 질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자연적인 질서를 통해서는 자연적인 진리를, 도덕적인 질서를 통해서는 도덕적인 진리를 보여줍니다. 이 두 가지가 하나로 모든 것의 근원을 추적해가면 그 자체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하나로 이루어지면서 궁극적으로 모든 진리를 보여주는 원래의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타락한 이후로 모든 것을 추적해갈 수 있는 힘과 정신적인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자연적인 진리는 도덕적인 진리와 밀접하게 연결이 되고 이것들은 결국은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언젠가 생물을 전공한 사람과 함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약 60조개 정도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는데 세포가 수명을 다하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처럼 세포도 수명을 다하면 죽습니다. 그 기간이 몇 달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몸 전체에는 등불이 반짝이듯이 수많은 세포들이 죽고 사라지고 새로 생겨납니다. 밤에 밥을 많이 먹고 자면 아침에 부었다는 느낌이 들지요? 본인은 부었다고 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살이 찐 것입니다. 세포가 밤중에 영양분을 먹고 분열해서 늘어난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죽는 것은 누구든지 다 이해가 되니까 세포도 수명을 다하고 죽는 것은 이해가 되겠죠? 인간의 세포의 수명은 인간의 수명처럼 60세, 80세, 100세가 아니라 몇 개월입니다. 육 개월 정도가 지나면 몸 전체가 새로운 세포로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직 죽을 때가 안 됐는데 자살하는 세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포가 자살을 하면서 ATP라는 에너지를 발산하고 그 에너지가 옆에 있는 세포로 가면 세포 공장을 돌리는 동력이 됩니다. 그것을 가지고 영양공급도 하고 세포분열도 하면서 우리의 몸 전체를 유지해 나간다는 설명입니다. 너무 신기했습니다. 자연적으로 죽는 것을 ‘네크로시스’(necrosis)의 죽음이라고 하고 자살을 하는 것은 ‘아토포시스’(apoptosis)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이 세포는 왜 자살을 합니까?” 그랬더니 생물학에서는 그런 것을 공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제가 읽어준 성경 구절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b)였습니다. 교회 안에서 개념 없는 성도들이 펄펄 뛰고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그 말씀을 듣고 일정 수의 사람이 끊임없이 죽으면 교회가 망가지지 않고 삽니다. 가정에서 다 제 욕심대로 날뛰고 질서 없이 살아도 엄마나 아빠, 아니면 아들이나 딸내미 하나라도 예수를 믿고 꺾어져서 죽으면 가족이 복음화가 됩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죽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나는 것입니다.
음악을 하는 분을 만났습니다. 우리 교회도 한번 오셨습니다. 노래를 너무 아름답게 잘 하십니다. 그 교수님하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때 제가 음악에 대해서 공부할 때였습니다. “교수님, 어떤 음악을 들으면 너무 아름다운데 어떤 음악은 아니잖아요.” “그렇죠.” “뭐가 그렇게 음악을 아름답게 하죠?” “그런 건 음악에서 안 가르쳐 줍니다.” “그럼 제가 한번 얘기해 볼까요?” 그리고 비율에 대해서 쭉 설명을 했습니다.
천문학을 연구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별이 천억 개 내지 이천억 개 되는 은하계가 천억 개 내지 이천억 개가 있는 것이 우주입니다. 제가 컴퓨터를 가지고 한참 계산을 해보니까 정확하게 맞을지는 모르지만 과학자들의 숫자를 가지고 대입을 해보니까 별 하나의 운명이 이십억, 삼십억 년에서 길게는 백억 년을 갑니다. 사십억 년을 기준으로 치고 온 우주에 있는 별을 계산해 보니까 일초에 삼천 개 내지 사천 개 정도가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별들이 태어나는 광경을 보면서 감탄을 합니다. 별들이 태어나는 것은 옆에 있는 별이 폭발을 일으키면서 죽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죽는 별이 없으면 그 별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별에 대해서 쭉 이야기를 하기에 제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 별은 왜 폭발합니까?” 그것이 죽는 거라고 합니다. “그 별이 왜 죽습니까?” 수명이 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수명이 다하게 된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랬더니 천문학에서는 그런 것은 안 배운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하고 설명을 했습니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영원히 있게 하지 않으시고 대부분의 많은 것들을 사라지게 하셨습니다. 별들이 몇 십억 년이 되면 ‘팡’ 하고 폭발을 하면서 어마어마한 폭풍을 일으킵니다. 그것들이 우주에 떠돌던 먼지들을 모아서 덩어리를 만듭니다. 큰 힘이 생기면서 폭발을 일으키면 핵 발전 같은 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없었던 수많은 원소들이 수십억 도의 뜨거운 열 속에서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지구 같은 것이 생겨났습니다. ‘팡’ 하고 다시 폭발하면서 별이 생겨납니다. 만약 폭발하고 죽는 별이 없으면 별들은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갈 뿐입니다. 침묵과 어둠이 흐르는 우주 공간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별들을 폭파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으로 그 별들을 사라지게 하셔서 또 다른 것을 창조하시는 것이니 하나님에게는 죽음 그 자체가 살아있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몸에서 종종 어느 세포도 이렇게 죽으려고 하지 않고 자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뭉쳐진 것이 바로 암 덩어리입니다. 그것이 퍼져가면서 엄청난 영양분을 빨아들입니다. 죽지 않으니까 비정상적으로 발달하는데 그 옆에서 붙어서 분열하는 세포들이 그 종자를 받아서 절대 안 죽으려는 세포가 됩니다. 끝까지 안 죽는 세포들의 덩어리가 커져서 결국은 마지막에 암으로 죽게 됩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떻게 우연이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 사람들이 그러한 자연의 사실들을 볼 때 이것은 우연한 과학의 발견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이 모든 우주를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나도 내 안에서 끊임없이 죽어야 영원히 살고 교회가 살고 가정이 사는 진리들이 도덕 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풀끝에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을이 되면 약속이나 한 듯이 나무들은 잎들을 다 떨어뜨립니다. 좋게 말하면 잎 자신이 몸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나무를 살려야 된다. 이 나무가 영양분을 비축하지 않으면 이 겨울을 못 견딘다.’ 그러면서 스스로 탈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아, 우리 인간은 얼마나 이 풀만도 못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잎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된 것은 자연의 질서를 깨달은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우는 것은 도덕의 질서를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질서들을 잡아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고 그것들을 발견하게 될 때 풀포기 하나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래서 주님은 들에 핀 백합화 한 송이에, 들풀 하나에 감격하시면서 우리에게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옷이 이 꽃 하나같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타락한 이후에 그것을 인간의 이성으로 스스로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Ⅲ.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이유?
A. 하나님과 진리
진리를 올바르게 발견하게 될 때 사랑은 그 진리를 아주 기뻐합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진리는 하나님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 하나님과 진리의 관계를 먼저 생각해보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곧 진리라고 믿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믿고 있고 이것이 기독교의 고전적인 신앙입니다. 그런데 불과 한 이삼백 년 전부터 새로운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과 진리는 똑같은 게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이라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초월하시는 분이시고 심지어는 선과 악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진리를 창조하시고 법칙을 만드신 후에 “이 법칙 안에서 살아라.” 하고 주셨는데, 이 법칙 중에 중요한 것들을 진리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진리와 선과는 상관없이 초월하셔서 도무지 알 수 없는 분이고 알려진 것만 진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법칙이다.”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우리들이 보고 알 수 있는 세상으로부터 추방해버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곧 진리이십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겠습니다. 큰 산이 있습니다. 목표가 산꼭대기를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 산을 올라가는 길이 하나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쪽 능선, 북쪽 능선, 남쪽 능선, 서쪽 능선으로 올라갈 수도 있고, 북서쪽, 남동쪽으로도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봉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학문을 통해서 참된 것을 얻어 보려고 합니다. 출발하는 지점이 각각 다른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선한 것이고 바르게 사는 것일까를 연구하는 학문이 윤리학입니다. 윤리학적인 관점을 가지고 ‘참으로 인간이 선하게 사는 길이 무엇일까? 참 선은 무엇일까?’ 하고 북쪽 능선을 타고 올라갑니다. 관심 자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참으로 선한 것이 무엇일까? 선이 무엇일까?’ 하고 올라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으로 산꼭대기에 도달하면 선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또 한쪽에서는 ‘아름다운 것이 무엇일까? 우리 눈에는 이것들이 아름다운데 이것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정수가 무엇일까?’ 하고 아름다움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찾아 올라가는데 마지막으로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미를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철학에서는 참된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또 다른 능선을 올라갑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거기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학에서는 서쪽 능선으로 올라갑니다. 신학의 관심사는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이 무엇일까?’ 하고 찾아 올라가면 거룩함이라는 비인격체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 설교를 들으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도 필요 없고 인간들은 각기 나름의 방법대로 올라가면 결국은 마지막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니 불교로 올라가도 유교로 올라가도 무엇이든 찾아가면서 올라가면 마지막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겠군요. 그러면 하나님을 무어라고 이름을 붙이든 같은 신이 되는 것이겠군요.” 이게 오늘날 우리들이 경계하는 종교 다원주의입니다. 진리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을 거절합니다. 지금 상정하는 모든 학문의 길을 통해서 진리를 찾아가려고 하지만 그렇게 해서 올라가는 길이 하나님을 향하기 위해서는 모든 길이 바라야 합니다. 그런데 올바를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미 연구의 대상이 되는 자연도 부패했고, 그것을 연구하는 인간 자신의 영혼이 타락했고, 그렇게 찾아가려고 하는 인간의 방법 자체가 오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참된 윤리학이면 선을 찾아가다가 하나님을 만나지만 이 세상에 참된 윤리학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생 동안 생물을 배우고도 하나님이 그 생물을 살게 하시고 죽게 하신다는 사실을 터득을 못합니다. 일생동안 천문학을 배워도 별들의 폭발과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은 학문이 가르쳐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생동안 아름다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해도 그 아름다움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별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참된 미학이 있으면 아름다움을 찾아가다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분은 결국 세상의 노래나 미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고 고백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신앙을 통하지 않고 성경을 통하지 않고 성령의 거듭남을 통하지 않고 그 산등성이를 올라가서는 하나님을 만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신학도 예외가 아닙니다. 신학도 하나님 만나고 변화된 사람이 아니면 신학 공부를 해나가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이론적으로나 가능하지 실제에 있어서는 이런 것들이 성경을 떠나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세상의 헛된 학문을 가르쳐 주며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여기 있다고 말하지 않고 진리의 엑기스를 모아놓은 찬란한 계시의 책인 성경을 가르쳐 주어서 하나님을 만나게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 산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거기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의 탁월하심이 그분이 만들어 놓으신 자연 질서 속에 흘러들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비록 윤리학의 세세한 학문은 몰라도 선은 하나님이시고 참된 것은 하나님이시고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뿐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이런 학문 없이도 충분히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찮아 보이던 풀 한포기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빛을 가지고 보게 될 때 지식이 없었더라면 보이지 않았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그 속에서 읽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은 이러한 진리를 기뻐합니다. 발견된 하나의 진리가 진리의 근원이신 참 하나님을 보여주기 때문에 진리 자체 때문이라기보다는 진리가 만나게 해주는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선하심과 아름다우심과 참되심과 거룩하심, 그 자체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 한분이 가지고 계신 효과입니다. 하나님 앞에 고난을 받으면서도 올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경험됩니다. 추하고 더러운 것을 버리고 아름다운 것을 찾아가려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아름다우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오류를 끊임없이 버리고 진리를 찾아가려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참된 것을 보여주시고, 불결로부터 거룩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거룩하심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 자체이시면서 참되고 아름답고 거룩하고 선하심으로 피조물들을 대해주십니다. 피조물을 대하는 관계 자체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피조물과의 모든 관계 속에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는데 이 사랑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오래 참으심과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나타납니다.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나면, 하나님께로부터 자기와 같은 죄인을 향해 오래 참으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롭게 대해 주시는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설교하면 어떤 사람은 반문할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왜 어떤 사람에게는 진노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까?” 결론을 말씀드리면 진노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미운 아이에게 떡 하나, 예쁜 아이에게 매 한 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떡 하나 주는 아이에게는 기대하는 바가 없지만 매 한대 주는 아이에게는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 아이가 참으로 올바르게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이 매질하는 것은 복수이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때리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절실한 사랑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가 그릇 행하고 잘못 살 때 주님이 우리를 때리시고 책망하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징계 속에서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경험하고 그분께로 돌아옵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B. 진리와 사랑의 동일성
여기에서 우리는 진리와 사랑이 하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름다움을 조금 가지고 계시고, 진리도 조금 가지고 계시고, 선함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아름다우심이며 선이시며 진리이십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님을 만난 후에 고백하기를 “영원한 아름다움이시여, 사랑스러운 진리이시여, 너무나 오래된, 그러나 너무나 새로운 당신이시여”라고 했습니다. 진리와 사랑은 하나입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진리 자체를 기뻐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는 하나님이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에 자기의 사랑의 대상인 진리를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안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인생의 모든 곤고함은 하나님께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해결책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보면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는데 거기에서 큰 위로를 얻고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세상의 물질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물질이 동기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자기에게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 자기를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을 알아감으로써 죄를 끊고 절망과 낙심 속에서 새로운 힘을 얻고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두 가지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우리가 설명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을 초월한 영원 속에 계신 하나님의 본질이 시간과 공간 세계 속에서는 속성으로 나타납니다. 속성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앎이 구체화 됩니다. 예전에는 ‘두려우신 하나님, 아무렇게나 살아도 봐주시는 하나님, 주일에 가서 뇌물을 먹이면 용서해주시는 하나님’ 이렇게 애매하게 알았었는데 진리의 말씀이 들어가서 진리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의 성품 하나하나를 맛보면서 그것이 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언젠가 케이크를 선물을 받았습니다. 대개 하나의 케이크를 잘라 먹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미 다 잘라져 있습니다. 열 몇 조각으로 되어 있는데 케이크 조각마다 색깔이 다 다르고 맛이 다릅니다. 다른 조각들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하나 먹고 그 다음 것을 먹으면 맛이 완전히 다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아,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이 이런 것인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두루 뭉실합니다. ‘혼내는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 사랑이라는 쇠창살에 갇혀서 우리가 무얼 하든지 눈물만 흘리시는 하나님’ 이렇게 알았는데 말씀의 빛이 들어와서 하나하나 깨닫게 될 때 회개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 가운데 신음하는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는 분이시구나.’ 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또 예수를 믿기 전에는 가끔 사기도 치고 나쁜 짓을 해도 안 걸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난 후에는 잘못을 조금밖에 안 했는데 기가 막히게 딱 걸립니다. 고통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후회하고 회개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시구나.’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과 약속을 하고 이런 저런 인생의 길을 걷겠노라고 소명을 다짐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환경이 너무 어렵고 자신도 지쳐서 그 길을 못 걸어갑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하나님이 다시 그 길을 걸어가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하나를 맛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알아 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성품에 대한 하나하나의 앎이 첫 번째고, 두 번째는 그 성품이 행사되는 방식, 사랑이면 사랑이 어떻게 행사되는지를 개인적으로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지식과 속성이 행사되는 지식, 그 두 개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 때 진리와 사랑이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기가 막히게 힘들고 ‘세상에 이렇게 사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나면 진리를 따라 사는 것 자체가 그 사람에게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고 즐거움이 됩니다.
어제도 신혼부부 세미나를 했습니다. 제가 예화를 들었습니다. 시집가서 부부가 대판 싸웠는데 알고 보니까 남편한테 얻어맞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혼을 내주고 어디서 손찌검을 하냐고 그랬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아내가 밥을 안 해줍니다. 그래서 제가 “맞아도 싸다. 그래도 때리진 마라.”라고 그랬습니다. 결혼하면 신랑이 밥을 든든하게 먹고 출근하는 뒷모습을 보면 그렇게 뿌듯하다고 합니다. 그게 사랑이 있는 사람의 마음이지 않습니까? 사랑이 있으면 그 일이 그렇게 행복하고 기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는 고난이요 쓰라린 길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할 때 진리를 따라 믿고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은 행복이 됩니다. 그러니까 사랑과 진리는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학 공부를 하는 첫 번째 조건은 뛰어난 머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배워가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됩니다. 오히려 세상의 학문적인 지식이 모자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이 있으면 진리에 대한 지식을 배워갈 수 있지만, 학문이 뛰어나도 주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이 없을 때 모든 지혜는 하나님에 대해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C. 그리스도의 성육신
진리와 사랑이 하나일 수밖에 없는 놀라운 증거를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과 진리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으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와 사랑이 완전히 하나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머리 좋은 우리의 조상들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탐구해도 발견할 수 없었던 진리를 예수를 믿고 사랑하기만 하면 핵심을 명확히 알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던 성육신으로 설명이 됩니다. 진리는 헤아릴 수 없이 분량이 많고, 모든 세계는 진리로 가득 차 있지만, 모든 진리의 총화, 모든 진리가 집약된 최고의 아름다움, 찬란한 빛의 원천은 오로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진리 자체는 눈부셔서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자연 속에 내재된 채 다소 영광이 가리어진 진리를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갑니다. 이번에는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 예수 그분을 진리 자체, 사랑 자체로서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 가지를 통하여 당신의 성육신 안에서 당신이 진리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첫째는 ‘오심’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 자체가 진리를 보여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분을 ‘로고스’,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어서 모든 창조 세계 속에 깃들고 표식을 주고 기호를 주어서 인간의 이성으로 그것을 더듬어서 접할 수 있는 진리의 근원이 바로 예수 그분이셨습니다. 인간이 발견했다고 하는 학문과 자연 세계의 모든 법칙들은 그분이 이 세상에 남겨주신 아주 작은 반짝이는 조각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던 이유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적용하고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는 고난을 위하여 당신의 몸을 준비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따라 이루어진 일입니다.
두 번째로는 ‘사심’이십니다. 이 땅에서 사람의 몸을 입고 서른세 해를 사시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신 하나님을 단지 바라보고 생각하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 자신이 참 진리와 사랑 자체로서 계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시고 아래로는 이 땅의 인간을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곧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진리를 증거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이 진리로 오셔서 진리를 말씀하시고 진리대로 살고 진리대로 행동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주셨는데, 그렇게 하신 모든 동기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멸망 받을 인간을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사랑 때문에 옳음을 포기해야 될 때가 있고, 옳음을 고집하기 때문에 사랑을 희생해야 되는 때도 있는 일그러진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서른세 해 동안 사셨습니다. 사랑으로 진리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분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있는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오지 아니하시고 아무 희망이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불결하다고 버려두었고,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아무 희망이 없는 말종과 같은 인간들에게 주님은 친히 오셨습니다. 그들을 광야나 산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죄인들과 같은 모습이 되셔서 그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소외되고 외로운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면서 그들에게 다가가셨으니 그 이유는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었고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가정도 없으셨고 가족도 거의 없이 당신을 사랑하는 제자들과 이 땅에 있는 죽어가는 많은 죄인들을 위해 심지를 태우며 불을 밝히는 촛불과 같이 자신의 생명을 태우는 일생을 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생애는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으신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진리를 싫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칼입니다. 지식은 사랑 없는 사람의 손에 들리면 칼입니다. 교회에서 지체들을 정죄하고 목회자에게 도전하고 교회의 약한 자들에게 칼을 겨누는 많은 성도들은 오늘 회심하고 예수를 믿은 새 신자가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먹고 설교를 듣고 성경 공부를 많이 한 교인들입니다. 사랑에 의하여 그의 심령이 녹아지지 아니하니까 사랑에 관한 많은 지식은 칼날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일에 쓰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진리를 사용하시던 방법과는 얼마나 다른 방법으로 이 진리를 사용하고 있는지 한 번 보십시오. 진리가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사랑으로부터 분리되어 나갈 때 그 진리는 참된 것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진리를 기뻐하고, 한 인격 안에서 사랑으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것과 같은 유사한 고난을 당하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멸시와 욕을 당하고, 자기가 가장 사랑했던 교인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자기가 가장 긍휼히 여겼던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진리가 아닌 헛된 것들을 찾아서 헌신하며 사랑하며 살 때는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던 사람이 진리를 따라 살고 주님을 사랑하니까 멸시와 핍박과 욕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이 넘치는 생애를 보면서 거꾸로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를 배우고, 오류에 가득 찬 사람들의 욕설과 비난을 통해서 예수님이 참된 분이시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세 번째는 ‘그의 죽으심’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진리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들의 죄를 짊어지심으로 심판을 받은 것은 율법의 말씀을 따른 심판이었습니다. 진리를 따른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 지은 우리를 죽이지 않으시고 죄 없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속죄양 삼아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게 하시고 우리는 살게 하신 것 또한 복음의 진리 안에서 이루어진 사랑의 효과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시퍼렇게 살아있는 진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만나는 사람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진멸되어야 할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같은 인간을 뜨겁게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목이 메는 사랑을 만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도는 원래 사랑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혈기 방자하고 정욕이 충천하여 자기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죽이려고 마음먹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번에 국회에서 일어난 폭행사건을 보면서 이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이 수치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이 나라에 정말 법이 있는가? 정치하는 사람들이 올바른 길을 떳떳하게 걸어가고 엄격하게 그 법대로 살도록 백성들을 가르치고 이끌어야 합니다. 자기의 의견이 그 사람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정정당당하게 논리를 가지고 법의 힘을 가지고 도전하는 것이 민주사회이지 폭행을 행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저도 그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우리 교회는 그 학교에 다니던 출신의 청년들도 있어서 생생하게 들었습니다. 모든 판단을 떠나서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폭력과 실력으로 다른 사람을 힘으로 누르는 것들은 아주 야만적인 것입니다. 어떤 교수 한사람이 생뚱맞은 논문을 하나 발표해서 전국을 분노하게 만들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한 것은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고 그랬더니 온통 들고 일어나서 이 사람 홈페이지가 다 마비되고 테러의 위협을 느낄 정도까지 되었던 사건입니다. 저는 일본에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일본에서는 일제 36년의 지배가 잘못된 것이니 빨리 배상해 주어야 된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글을 쓰고도 테러의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 교수의 이야기에 동의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테러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자기의 생각이 다르면 정정당당하게 논문을 쓰든지, 자기 실력이 안 되면 그와 다른 입장에 서있는 사람을 후원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도와서 그의 주장이 틀린 것이라는 것을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핍박이 가득 한 시대에 통탄하면서 글을 썼습니다. “어떻게 예배의 방식이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고 고문할 수가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이 바라보는 천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예배 방식이 다르면 진리를 가지고 논쟁하고 진리의 힘으로 이겨서 영적인 나라가 오게 해야지, 예배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감옥에 가두고 회유하고 협박하고 고문하고 심지어 불태워 죽이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사랑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랑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는 그의 고백은 전혀 과장이 없는 정확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세월이 많이 흘러간 후에 자기를 미워하고 목회자로서 자신의 사랑을 한때 배반했던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사랑에 관해 설교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그러면서 못된 교인들을 다시 품고 자신의 앞가슴을 풀어헤쳐 젖을 물리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은사를 받았지? 어떤 사람은 이런 은사를 저런 은사를 사용해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지? 그런데 너희 은혜 받았니? 사랑을 아니?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찬양)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 하셨네
나 주님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그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인격 안에 나타나있는 사랑의 세계, 무지갯빛 같이 영롱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속성의 나타남 앞에서 사도는 하나하나 자기가 사랑한 이 세상의 인간들을 향하여 어떻게 아름답게 행사되는지를 발견하면서 전율하였던 것입니다. 한때는 죄인 중의 괴수였으나 성도 중의 가장 아름다운 성도가 되었습니다. 한때는 정욕에 사로잡힌 짐승과 같은 사람이었지만 거룩한 은혜에 잠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때는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하고 폭행하는 악한 사람이었지만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를 당하고 죽으신 큰 고난을 통해서 한번 자기를 부르신 부르심에 후회가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통해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Ⅳ. 진리와 함께 기뻐함 : 적용
결국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게 되는데 그 적용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오늘 말합니다.
A. 다른 기쁨 : 악이 아님
첫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주는 다른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 한 모금을 달라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을 때는 그분이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신다고 할 때 그런 물을 달라고, 그래서 다시는 물 길러 오지 않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분이 누구신지를 깊이 알게 되자 물동이를 버려두고 전혀 다른 기쁨을 가지고 온 동네로 뛰어 들어가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 하는 사람이 되었던 이가 사마리아 여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이 없었을 때 자기의 생각과 다른 사람,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에게 나쁜 것이 일어나기를 생각하면서 거기에서 기쁨을 누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의 세계에 들어간 다음부터 그에게는 다른 기쁨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오한 은혜의 세계를 아는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의 아름다운 질서가 모든 세상 속에 투영된, 말할 수 없는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그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진리의 원천이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는 조건은 뛰어난 지성이나 머리가 아닙니다. 좋은 성경 공부 교재만이 아닙니다. 금박으로 물들여진 잘 넘겨지는 성경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만큼 뛰어난 학문이 없고 미천해도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하지 않고 자신은 악하고, 그래서 주님의 은혜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 주님은 진리로 말미암는 깨달음의 기쁨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금싸라기처럼 내 영혼에 내렸던 때는 하나님을 사랑할 때입니다. 그 때 진리의 금싸라기들이 마음속에 가득 내려서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B. 다른 선택 : 불의가 아님
하나님을 충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불의를 택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그분을 충심으로 사랑할 때 그는 마음과 영혼 안에서 하나님 속에 있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진리를 사랑하게 됩니다. 진리가 삶으로 나타나는 결과가 의로운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따르는 생활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인격이 있을 때 불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불의하게 살아가거나 불의한 일을 당해서 자기에게 고통을 준 것만큼 괴롭힘을 당하게 된 것으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참된 것을 선택함으로써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하고 주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C. 다른 가치 : 이익이 아님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진리와 함께 기뻐하게 될 때 그는 다른 가치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사도는 사랑의 또 한 가지 특성을 말하기를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뜨거운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끔 만들어주는 놀라운 힘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자신의 이익을 찾다가 자기가 정말 사랑하는 하나님을 버리는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그 이익이 침범 당했을 때 성내지 아니합니다. 사랑이 그렇게 시키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히 있는 동안에는 진리와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고 주님 때문에 위로를 받고 핍절한 영혼이 진리와 함께 소생하게 되는 놀라운 기쁨이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주님을 향한 보이지 않는 사랑의 크기가 얼마나 될까요? 진리를 향한 목마름, 진리와 함께 경험하는 하나님의 참된 기쁨, 그 크기에 정확히 비례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며 여러분 안에 주님을 향한 참된 사랑이 있는지 다시 한 번 말씀의 빛 아래서 깊이 점검하십시오.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이 우리 마음 안에 있어서 진리와 소원한 사람들이 되었다면 진리를 떠나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요 진리의 빛으로부터 멀어질 때 참된 사랑으로부터 멀어져 자기의 육체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부패한 사랑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 앞으로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7.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Ⅰ. 본문해설
이어서 사도 바울은 열두 번째 사랑의 속성을 소개합니다. 성경에는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제시되어 있는 속성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참음이 사랑의 속성이라는 것은 첫 번째 사랑의 속성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입니다.
Ⅱ. 이 구절의 의미
A. ‘참고’ : ‘스테게이’(στέγει) - 덮어주고
그러면 이 구절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여기에 나오는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혹은 “참고”라고 번역된 원래의 희랍어 단어는 ‘스테게이’(στέγει)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스테고’(στέγω)라는 동사의 3인칭 단수의 변형입니다. ‘스테게이’라는 단어를 우리말 성경에서는 ‘참으며’라고 번역했지만 이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해석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해왔습니다. ‘스테게이’라고 하는 단어를 우리말 성경에서처럼 ‘참는다’ 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스테게이’라는 단어는 ‘참다, 견디다, 인내하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고린도 교회에서 이 단어가 똑같은 형태로 한 번 더 나오는데, 거기에서는 정확하게 ‘참고’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이것을 근거로 많은 해석가들은 ‘스테게이’라는 단어가 ‘참으며’라고 번역되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영어성경이 이 번역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일단의 많은 해석가들은 이 단어가 ‘참다’라는 뜻이 아니고 ‘덮어주다’라고 번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스테고’라는 동사에서 ‘인내하다, 참다, 견디다’는 두 번째, 세 번째 뜻이고 일차적인 의미는 ‘덮어주다’입니다. ‘스테게이’가 명사형인 ‘스테게’가 되면 희랍 성경에서는 ‘지붕’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덮어주다, 보호해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NIV 성경은 ‘스테게이’를 덮어주는 것으로 번역을 해서 'always protects'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두 번째 견해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해석가들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스테게이’가 ‘참으며’라는 뜻이라면 첫 번째 속성과 중복된다는 주장을 하면서 이것은 덮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의 또 다른 특성을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베드로전서 4장 8절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여기에서 “사랑은 많은 죄를, 허다한 죄를 덮나니” 라고 기록하면서 사랑의 특성 중 중요한 것이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우리말 성경에 있는 번역보다는 두 번째 입장인 ‘덮어주고’라는 번역이 훨씬 더 원문의 의미에 가깝다고 생각을 해서 저는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첫 번째 해석을 전면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노와 격정들을 통제하고 억제해야 하는 많은 인내와 참음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일차적인 의미는 덮어준다는 것이고, 참는다는 것은 덮음의 해석이나 적용으로 도입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열두 번째의 속성은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며”입니다.
B. 모든 것
여기에서는 앞에 나오지 않은 ‘모든 것’이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반복되면서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라는 단어는 ‘판타’(πάντα)인데, ‘모든’을 의미하는 ‘판’의 복수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번역을 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판타’라는 단어는 부사적으로도 사용되는데, 이 경우에는 ‘언제나’라는 뜻이 됩니다. 많은 영어성경에서 ‘판타’를 ‘모든 것’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always'라고 번역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쨌든 사랑은 ‘모든 것’을, 혹은 ‘항상’ 덮어주는데 이 덮음의 특성이 사랑의 열두 번째의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Ⅲ.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
그러면 사랑의 특성이 모든 것을 덮어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허물과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은 본질은 어떤 것일까요? 저는 이것을 덮음의 대상, 덮음의 동기, 덮음의 목적, 이하 세 개로 항목을 나누어서 덮어주는 사랑의 본질을 해설하려고 합니다.
A. 덮음의 대상
먼저 덮는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덮다’라는 것은 어떤 물체를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가려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깥에 있는 것이 안의 소중한 것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덮기도 하고, 혹은 안에 있는 좋은 것이 바깥의 나쁜 것에 빼앗기지 않도록, 혹은 안에 있는 나쁜 것이 밖에 있는 좋은 것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덮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체의 내용의 교통을 막는 덮음입니다. 덮음의 또 하나의 목적은 가려서 불투명하게 만들어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덮음의 의미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어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그 무엇을 덮어주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어떤 것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덮으려고 하는 성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매우 조심해서 다루어야 할 문제입니다. 만약에 사랑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는 속성을 마냥 강조하다보면 하나님의 공평하심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런 사랑의 해설은 하나님의 정당한 성품을 드러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를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려고 하려는 사랑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사랑의 속성인 모든 허물을 덮어주는 성향이 하나님 전체의 성품의 계시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해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덮음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죄가 덮음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문제를 제기한 바와 같이 만약에 죄를 덮고 허물을 덮는 사랑의 특성이 강조된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성품이 설 자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교회는 사랑으로 가득 차야할 필요도 있지만 올바르게 되어야할 목표도 있습니다. 이렇게 상반된 두 가지 사랑의 속성이 계시 안에서 어떻게 조화로운 해석을 발견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의 위대한 장이 고린도서 안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고린도서는 사도 바울이 사랑에 관한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담론들을 펼치기 위해 마련한 연설장이 아니라 사랑하는 그리스도 예수 안의 형제들에게 목회자의 마음으로 쓴 편지라는 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들의 허물을 끊임없이 덮어주는 사랑의 윤리가 강조되는 것은 교회라고 하는 'context'가 일차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맥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슬기 있는 분들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윤리가 세상에서 통용되는 것과 예배당 안에서 통용되는 것이 다르단 말입니까?”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윤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어느 집단에게는 낮은 수준을 요구하시고, 어느 집단에게는 매우 높은 수준을 요구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많이 받은 자들에게는 많이 구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일화가 고린도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법정 소송의 문제입니다. 교회 안에서 법적인 분쟁이 생기자 성도들은 이것을 끌고 세상 법정에 가서 세상 재판관들에게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이 통렬하게 비난하면서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냐고 통박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법적인 문제가 생겼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명백하고 현저한 손해를 입혔고 나는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웃에게 내가 이러이러한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고 그러므로 당신은 이렇게 이렇게 나에게 배상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도저히 수긍하지 않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법에 호소해야 합니다. 그러면 법이 판결을 내려주고, 필요하면 그 사람을 감옥에 보내고, 혹은 그가 변상을 하도록 해서 법의 집행이 끝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 세계를 통치하시는 그분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법원에서 무엇인가 판결이 잘못되었을 때 법적으로 정당하게 논리를 제시해서 그것을 바로잡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이익과 배치된다고 해서 무조건 훼방을 놓고 야유를 하고 심지어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엄벌에 처해야할 악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건전하게 수납되는 윤리가 교회 안에서는 그렇게 수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의 요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 함께 교회 안에 속한 사람으로 어떻게 다툼을 가지고 세상의 법정에 나아가서 세상에서 그 법을 가지고 서로 다투느냐?”라고 합니다. 왜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그들을 통렬하게 비판했습니까? 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교회의 권위에 대한 현저한 무시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권세를 주셨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에 당신이 세우신 목회자와 교회의 합법적인 기관들을 통해 질서 속에서 통치하십니다. 만약에 그들에게 분쟁이 생겼다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해결할 것이요, 만약에 그렇지 못했다면 그 문제를 목회자나 교회의 합당한 기관에 들고 올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판단을 내려줄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이것은 잘못된 것이고 너는 이 사람에게 배상하고 사과를 하도록 하라.” “그리고 너는 이정도면 충분하니까 양해를 하고 받아들이고 이해를 하도록 하라.” 이렇게 판결을 내려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거기에 복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권세는 영적인 권세이기 때문에 그러한 판결에 불복하는 사람을 교회에 지하 감옥을 만들어서 가두고 재산을 압류하고 사형시킬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만약에 교회가 그것을 할 수 없다고 해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권세보다 세상 정부의 육적인 권세를 더 무서워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교회에서 끊어내고 교회의 지체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논리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덧붙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심판할 터인데 어떻게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끼리의 문제를 세상의 재판을 통해서 해결할 수가 있으며, 교회의 권위에는 굴복하지 않는 사람이 그 판결에는 복종하는 것이 어떻게 성도일 수 있느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사 안에서도 실제로 이 문제를 가지고 고소 측과 반 고소 측으로 갈려져 교단이 쪼개지는 그런 비극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지만, 당신이 인류를 사랑하시는 방법을 두 가지 지평 속에서 드러내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지만 모든 인류가 그 사랑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과 언약을 맺은 특정한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은총을 베푸심으로 그들을 아끼셨습니다. 그들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충분히 경험하게 하시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전하는 선교적인 구도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크기가 어떠한지 많은 계시를 통해 직접적이고 풍부하게 알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더욱 더 온전한 삶을 살아야할 높은 윤리적인 표준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전달의 구도가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교회 밖에 있는 열방의 세상으로 나눠진 구도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향한 특별한 사랑을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당신의 교회들에게 먼저 가르쳐주시고, 실제로 당신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성령을 그들에게 물 붓듯 부으심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성품을 알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교회는 이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섬김과 선교적 헌신을 통해서 사랑이 확장되게 하셨고, 그 과정을 통해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사랑하고 진리를 붙들지 않을 수 없도록 경륜하셨습니다. 먼저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그의 성육신을 통해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거기에 감사하고 보다 더 높은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두 가지는 결코 서로 배치되는 모순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덮음의 대상은 외연을 확장해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인류라고 생각한다면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고 용납하고 덮어주는 것이지만, 일차적인 'context'는 교회 안에서 함께 구원받고 성도로 부름을 받으며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 있는 모든 지체들을 말합니다. 본문은 교회 안의 지체들 간에 허물과 죄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사랑의 열두 번째 특성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여러분이 충분한 배경적인 이해를 가지셨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덮음의 대상은 지체들이 우리에게 행한 허물과 악, 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진실하고 깊이 사랑하는 까리따스의 사랑이 충만한 성향으로 깃들면, 그가 교회 안에서 많은 성도들과 함께 살아가는 관계 속에서 많은 허물과 죄, 악함들을 발견할 때 그것을 덮으려는 성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에 지혜 있는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결국은 교회는 성도들끼리 모든 죄를 무조건 다 덮어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하다보면 죄는 그 속에서 얽히고 설키고 썩어서 결국은 교회 전체가 부패하게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랑이 교회를 썩게 만들고 부패하게 만들 텐데 그것이 올바른 것입니까?” 그러나 여기에서 제시하는 것은 어떤 죄나 악을 보았을 때 그것을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덮어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사랑은 경건해지고 싶어 하고, 거룩해지고 싶어 하고, 신실해지고 싶어 하고, 지상에 속한 자가 되기보다는 하늘에 속한 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초월적인 특성이 사랑 속에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시간 안에 있는 잠재적인 것들에 얽매이지만,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면 시간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히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지체들의 죄와 허물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전적으로 자신의 이익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무조건 덮고 용서해야 합니다. 그가 경험하고 있는 지체의 악이나 잘못이 결국은 최종적으로 자기의 이익과 상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것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에 의해서 손해나는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될 것이기에 진정한 사랑의 속성을 반영할 수가 없습니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개혁해야 된다는 미명하에 교회의 많은 악들을 발굴해내고 그것들을 폭로하고 터뜨리고 화제가 되게 만들어서 교회가 정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의 정신으로 보면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 교회를 정결하게 해서 이런 죄들을 드러내고 지체들의 허물을 폭로해서 그것들을 쓸어버려야 된다고 하지만 그가 과연 자신이 속한 몸인 교회에 대한 신실한 사랑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참된 사랑은 어느 개인 한사람만을 향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신 교회 전체를 향한 사랑이고,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사랑과도 나누어지지 않으며, 또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연합을 이루고 있는 삼위 하나님과도 분리될 수 없는 사랑이시라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어떤 사람을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해 견책하고 잘못했다고 경고해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경우에도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를 향한 온전한 사랑 속에서 이 일이 행해지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합니다.
저는 30년 가까이 오른발에 무좀을 달고 삽니다. 마음을 먹고 열심히 주사도 맞고 치료도 했으면 해결을 봤을 텐데 그 정도로 성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너무 아프고 진물이 나면 며칠 동안 깨끗이 씻고 드라이기로 말리고 발가락 양말도 신고 가루약도 뿌리고 연고도 바릅니다. 그렇게 열흘 정도 마음을 쓰면 발이 꾸둑꾸둑해지고 살만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엔 또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이게 완전히 퇴치가 안 되고 여름이면 서서히 도져서 다시 진물이 납니다. 심지어 약도 없이 외국에 갔는데 발가락 두 개가 갈라지면서 살이 드러나고 걸음걸음이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여름이 다가오면 항상 마음이 쓰입니다. 그렇지만 한 번도 다섯 발가락을 잘라버리고 싶은 생각을 가져본 적은 없습니다. 불편해도 그냥 달고 살고, 진물이 나도 약을 바르면서 그냥 그렇게 살지, ‘이까짓 것’ 하고 발가락 다섯 개를 도끼로 잘라 버리고 장애인으로 살고 싶은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가 상이용사셨습니다. 6·25때 중공군과 전투를 하다가 총에 맞아서 왼쪽 다리에 관통상을 입으셨습니다. 그 당시에 대구까지 후송되어서 병원도 없는 천막에 누워있는데, 의사 몇 사람이 빨간 펜을 들고 누워있는 환자들 사이를 걸어 다니면서 표시를 하더랍니다. “이 다리 잘라라.” “네.” 그리고 빨간 줄을 죽 긋는 것입니다. “이 팔 잘라라.” 그렇게 그으면서 가더랍니다. 아버지한테도 왔어요. “이 사람도 여기 잘라야 되겠다.” 그 때 옆에 있는 높아 보이는 의사에게 매달리셨다고 합니다. 제가 죽어도 좋으니까 다리는 제발 자르지 말아 달라고 사정을 했는데 공교롭게 붙들고 사정한 사람이 당시 한국 최고의 외과의였습니다. 그 선생님 마음이 변했습니다. “이 병사는 자르지 말고 한번 해보자.” 그래서 그 당시에는 거의 불가능한 수술을 기가 막히게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르지 않고 총알을 빼내고 무사히 치료가 되셨습니다. 물론 비가 오는 날에는 고통을 받으시고 평소에도 다리 길이가 2-3센티미터 차이가 나서 힘들기는 하셨지만 그래도 어디 가서 장애인이라는 소리는 안 들으면서 사셨습니다. 다리가 총에 맞아서 썩어간다고 자르라고 하면서 빨간 볼펜으로 줄을 그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 다리가 아니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들은 자기 가족은 수술을 안 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이가 다섯 살, 여섯 살인데 뇌에 문제가 있다고 합시다. 그 애의 머리를 열 수 있겠습니까? 자기 아들의 눈에 이슬이 맺힌 채로 마취 상태에서 눈을 감고 있는데 뇌를 뒤집으면서 수술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피붙이니까 못하는 것입니다. 남이니까 하는 것입니다.
B. 덮음의 동기
결국 덮음의 동기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덮음의 동기는 죄를 인정한다든지, 허물에 동의를 한다든지, 악에 대해서 동정심을 갖기 때문에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만약에 이것을 덮어주지 않으면 관계 자체가 깨뜨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덮음의 동기 자체는 영혼에 대한 사랑입니다. 죄에 대한 사랑이나 공감, 동의, 찬성, 이런 것이 아니라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입니다. 그것 때문에 덮어주는 것입니다. 죄가 융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덮음으로 이 영혼이 지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진리와 은혜를 힘입어 다시 살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덮는 것은 많은 인내와 고통을 필요로 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악을 행하고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럴 때 그것을 되갚고 날아온 화살을 다시 쳐내면 그 화살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서 그 사람을 맞힐 것입니다. 그러면 맞은 그 사람은 상처 속에서 또 다시 쳐서 돌려보낼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사랑과 이해로 넘쳐나야 할 교회는 복수와 보복, 상처와 상처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찬 공동체가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몸에 접붙이셨을 때 기대하던 것과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아주 독한 악으로 화살을 쏘았을 때 내가 그것을 맞고 덮어버리면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그것을 용납하고 덮어버리면 더 이상 그 화살은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거기서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동기는 자기에게 악을 향한 영혼에 대한 사랑 때문이고, 그 영혼에 대한 사랑은 자신도 함께 붙어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삼위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나누어질 수 없는 온전히 하나 된 사랑입니다. 죄를 사랑하거나 용납하거나 찬동하기 때문에 덮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사랑하고 그 영혼의 진정한 회복을 바라기 때문에 그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의 매우 중요한 속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은 한때 이런 종류의 사랑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말할 수 없는 적개심에 불타서 교회를 핍박하였고, 의로운 사람 스데반을 죽이는데 가편 투표를 했고, 그가 돌에 맞아 죽을 때 많은 사람들의 옷을 지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의 옷을 지키고 가편 투표를 했을 때 그는 사실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돌로 친 것이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 때 이 사람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이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그 음성은 복수하고자 하는 원한에 사무치는 음성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예수님의 음성 속에는 핍박을 받는 자신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기를 박해하고 있는 사울에 대한 염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을 보태셨습니다. “네가 하는 일이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과 같구나.” 가시덤불이 뭉쳐져 있는데 말이 그것을 귀찮아서 발로 찬다는 것입니다. 그 덤불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발길질하는 말의 뒷발만 찢어져서 피가 흐를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사도 바울이 박해하는 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 것이 아니라 박해하는 사도 바울의 황폐한 영혼과 이후에 그가 하나님께 받게 될 큰 형벌에 대하여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따뜻한 음성으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음성 앞에 그는 무릎을 꿇었고 사랑의 놀라운 특성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핍박자요 포행자요 죄인 중의 괴수였을 때도 주님은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허물을 덮으시고 용납하셔서 결국은 자기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 뜻은 바로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자신을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사도는 깊이 감탄하며 사랑의 특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C. 관계의 소중함
이렇게 끊임없이 사랑의 특성이 덮음이라는 것을 강조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관계의 소중함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 세계를 만들고 특별히 사랑의 대상인 인간을 창조하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이셨던 것은 아닙니다. 이미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도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셨습니다. 그러나 피조세계가 없었을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피조물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인간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찬란하게 드러났습니다. 인간이 창조됨으로써 영원 속에 있던 하나님의 본질적인 사랑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이 자기 같은 인간을 대해주시는 관계의 창조와 보존과 유지를 통해 섭리 속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몇 주 전에 세상 모든 인간들의 곤고함은 하나님께 대한 무지에 있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핵심은 두 가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앎과 그 속성이 행사되는 방식에 대한 지식, 이 두 가지가 합쳐져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구성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의 나타남은 관계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다기보다는 본질에서 비롯되는 성품의 빛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만들어진 관계를 통해 발현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셔서 관계를 맺으심으로 당신의 놀라운 사랑의 특성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찬란하게 비춰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인간이 끔찍하게 타락하고 하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죄를 짓고 그분을 배반함으로써 더욱 더 찬란한 빛을 뿜으며 우리에게 놀랍게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 기름이나 쓰레기 찌꺼기를 던져버리면 불이 꺼지는 것이 아니라 맹렬한 불이 더 밝은 빛을 내면서 확 태워버리는 그런 종류의 효과가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났던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신자들이 발견한 것처럼 찬란하고 눈부시고 아름답게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죄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범죄 하였을 때 하나님이 쓸어버리시고 다시 창조를 무로 돌리셨다면 죄를 진멸하시는 하나님의 엄중함은 나타났겠지만 창조의 목표 자체가 무의미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을 기회로 삼아 당신의 찬란한 사랑을 오히려 더 눈부시게 드러냄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랑 앞에 무릎을 꿇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말합니다. 누군가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악을 행했을 때 “됐다. 내가 더 이상 이것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 다른 사람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 너를 용서한다. 그러나 다시 너와 관계를 갖고 싶지 않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용서라기보다는 복수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입니다. 우리가 회심하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제가 예수 모르던 날들은 방탕하고 주님의 명예를 더럽히던 인생이었습니다. 죄짓고 악을 행하고 율법을 떡 먹듯이 어기며 주께 불순종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 때 하늘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립니다. “알았다.” “하나님, 제가 정말 나쁜 놈이었습니다.” “알았다니까.” “제가 이런 죄까지 지었습니다.” “됐다.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마라. 내가 다 이해하마. 그 대신 더 이상 너와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허물을 덮어주는 것, 용서하는 것, 이 모든 것은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맺어진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지속하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용서했다고 해서 대단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사랑으로 그것을 인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원한을 가슴에 품고도 그것을 진정으로 용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의 한 지체들로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데 누가 나에게 행한 악이나 범죄, 도덕적인 판단과는 상관이 없는 무의식적인 허물을 통해서 나에게 심각한 해를 입혔을 때 그것을 덮어주지 않는다면 관계는 파괴될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이에서는 아무 말이나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할수록 못하는 말이 많이 있어야 정상입니다. 그래야 그 관계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관계가 파괴되고 나면 우리가 그 사랑을 계속할 수 있는 수단 자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본질 속에 있는 당신의 사랑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와 맺은 관계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타락하자 하나님의 사랑은 더 찬란하게 나타남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골방에서 홀로 회심하였을 때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압니까? 우리도 우리 안에 어떤 사랑이 있는지 다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어마어마한 사랑이 있는 것 같았었는데 사실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고, ‘그런 사랑이 내가 있을까?’ 하고 의심했는데 실제로 그 사랑이 놀랍게 구현되는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이 발현되는 무대가 성도와 성도들 간의 관계입니다. 자기를 선대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있을 때는 자신도 굉장히 많은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나에게 선대하고 나에게 많은 것을 베풀면 나도 상응하게 그를 선대하고 좋은 것을 그에게 베풀고 그를 기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중한 선물을 했을 때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서 치른 희생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착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늘 선대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있을 때 자기는 사랑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싫어하거나 악하게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그가 애매하게 자신을 공격하고 자기에게 악을 행하고 손해를 입히고 찌릅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금 잘못했는데 그것에 비교될 수 없는 복수를 당하면서 자신의 허물보다 훨씬 더 커다란 고통을 안겨줍니다. 그렇게 찔림을 당하면서 분노하는 마음이 일어나 성내게 되고, ‘어떻게 저 인간에게 복수를 할까?’ 하고 악을 생각하게 되고, 그가 나쁜 일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것 참 고소하다.’라며 박수를 치며 기뻐하는 마음이 속에서 은근히 솟구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어떤 인간인지를 알게 됩니다. 나를 선대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동안에는 절대 볼 수 없었던 나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이 사랑하는 교회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가득하게도록 두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교회 자체가 어마어마한 까리따스의 사랑에 붙잡혀 있는 것으로 착각할 것입니다. 항상 교회에 개념 없는 악한 사람들, 작은 일에 복수심이 불타는 사람들, 지체들의 허물과 죄를 추호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심어놓으셔서 그들로 하여금 악역을 담당하게 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교회와 많은 지체들은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혼신의 힘을 다해 찬송하고 물질도 드리고 세계 선교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찌름의 고통 속에서 나는 아직 선교되지 못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찬양)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이 모든 것은 껍질일 뿐이고 자기 안에 해결되지 못한 이기심에 사로잡힌 악한 자기 사랑의 자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거기에서 무릎 꿇지 않고, 그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는 이렇게 약한 사람입니다. 성도라고 불리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 많은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빛, 은혜의 사랑, 수많은 하나님의 성품의 경험, 주님을 아는 진리의 지식을 제게 주셨지만 저의 깊은 본질은 아직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저의 악함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저의 본성을 새롭게 할 수가 없사옵나이다.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기에게 고통을 준 지체의 허물을 묻을 때 그 관계는 파괴되지 않고 자신과 저 형제에게 다시 은혜를 부어주시면 아름다운 성도의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는 것입니다. 성도라고 해도 밑둥까지 다 드러내고 공격해서 짓밟아버렸을 때 짓밟힌 사람이 짓밟은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들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생애에서 한두 번 일어나기도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 속에서 상대방의 허물을 밑둥까지 파고들지 않고 그것을 덮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나라 왕의 일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왕이 어느 날 자기가 사랑하는 장수들을 모두 모아놓고 한 방에서 연회를 열었습니다. 당시에는 기름을 떼서 불을 밝혔습니다. 여름이니까 문을 열어놓고 흔쾌히 주연을 즐기는데 갑자기 돌풍이 ‘확’ 하고 불더니 불이 푸욱 하고 꺼졌습니다. 그래서 깜깜한 천지가 되었습니다. 웅성웅성 하는데 저 끝에서 ‘으악’ 하는 여성의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중에 불이 켜지고 장내가 정돈되었는데 거기에 있는 어느 여성 하나가 통곡을 하면서 슬피 우는 것입니다. 왕이 가장 아끼는 애첩이었습니다. “황제 폐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는 폐하만 사랑하는데 불이 꺼진 사이에 어떤 장수가 나를 덮치고 내 몸에 손을 댔습니다. 그 대신 그의 투구에 매달린 구슬을 뜯어서 이 손에 쥐었습니다. 이 구슬이 어느 투구에 달린 것인지 찾아내어 저의 억울함을 풀어주시옵소서.” 그때 왕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모든 장수들은 투구를 벗어서 탁자 속에 넣어라.” 모두 벗어서 탁자 속에 넣었습니다. “계속 주연을 하자.” 그리고 다시 주연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친전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적군의 포위망에 걸려들어서 이 왕의 마차가 위협을 받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왕을 시해하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화살을 쏘며 달려올 때 온몸에 그 살을 고슴도치처럼 맞으면서도 끝까지 왕을 지키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후에 후원군들이 와서 원수들을 물리치고 상황이 종료되었을 때 왕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온몸에 화살을 맞고도 어찰을 지켜준 장수가 너무 가여워서 바닥으로 내려가 장수를 끌어안았어요. “네가 나를 위해 이렇게 목숨을 버렸구나.” 그 때 장수는 그윽한 눈빛으로 왕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폐하, 제가 바로 그날 밤 왕의 애희를 범한 장수였습니다. 술에 취한 마음에 못된 일을 하고 왕의 진노 앞에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용서해주셨습니다. 이 목숨을 폐하를 위해 바쳐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습니다. 오늘 비로소 그 꿈이 이루어져서 저는 행복합니다.” 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무지한 왕도 자기의 장수들 중 누군가의 죄를 드러내면 한 사람과의 소중한 관계가 끊어지고 그를 잃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왕이 가장 아끼는 애희였으니 왕의 수치와 분노가 극에 달하였겠지만 그것을 다스리면서 관계를 유지했을 때 그에게 목숨을 구출 받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왕은 세상의 본성의 빛으로도 이것을 아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성의 빛보다 훨씬 더 많은 복음의 빛, 진리의 빛을 받은 교인들은 눈이 어두워져서 이러한 관계의 이치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랑의 속성을 따라 살지 않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원수 맺는 관계로 발전시켜 자신의 영혼과 교회에 상처를 주는 잘못된 결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익의 당사자인 우리에게 회복할 수 없는 깊은 고통, 잊혀질 수 없는 뼈저린 손해를 입힌 사람을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경은 “너희는 뜨겁게 사랑하라.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생축과 제물로 드리신 것같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이렇게 명령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 말을 오래도록 가슴에 새기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는 우리에게 이미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을 보시면서 명령하실 때가 있고, 우리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인데 명령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후자의 경우, 우리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인데 하라고 하실 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책 속에서 명언을 남겼습니다. “명하신 것을 먼저 저에게 주시옵소서. 그 후에 원하시는 바를 명하시옵소서.” 이해할 수 있겠지요? “명하시는데 나는 그것을 할 수 없으니 명하시는 것을 할 수 있는 은혜를 나에게 부어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내게 명령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기도를 해도 오랜 후에야 응답이 되는 기도가 있고, 기도하면 즉각적으로 응답해주시는 기도가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해달라고, 덮을 수 없는 허물을 가진 사람을 덮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비는 것은 즉각적인 응답이 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찌르는 아픔을 줄 정도로 미운 사람을 위해서 그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진심으로 기도해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없지만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번 미워한 사람은 눈을 감으면서도 화해하지 못하고 죽는 것입니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무엇 때문에 주님은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실 때 그렇게 비열하게 재판하고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았던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용서를 비셨을까요? 그들의 악한 행동은 예수님을 십자가의 형벌로 데리고 갔고, 당신이 육신과 잠시 결별할지라도 자기가 사랑하는 영혼들과의 관계는 끊어질 수 없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또 끊어지기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시도록 하나님께 빌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진심으로 미워하고 자신에게 찌르도록 고통을 준 사람의 허물을 덮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본성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성격이 발끈발끈 했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때로 기억이 되는데 돌아가신 저의 고모님이 “남준아, 너는 참 좋은 아이인데 성격이 너무 발끈발끈 하는구나. 네 성격을 잘 다스리고 고쳐야 된다.” 이러면서 옛날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느 날 점을 잘 보는 도인이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 집에서 물 한 그릇을 얻어먹으면서 “허허, 아깝다.” 그러랍니다. 그래서 “그게 무슨 소리요?” 그랬더니 당신은 참 좋은 팔자를 타고 났는데 꼭 하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에요?” 그랬더니 살인을 할 운세랍니다. 아무리 좋은 운세를 가지고 태어나도 살인을 할 운세라는데 좋은 게 좋은 게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랬더니 그 사람이 글자를 하나 써주고 갔습니다. 참을 ‘인’, ‘참아라.’ 그리고 밤에 집에 들어와 보니까 아내도 잠이 들었고 아이들도 잠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내가 살인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인데 살인을 하게 되면 내 아내는 살인자의 남편이 되고 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테고, 여기 있는 아이들은 살인자 집안의 아이들이 될 것이니 이 가족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면서 고민을 하다가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춤추고 유쾌한 마음에서 사람을 죽일 일은 없지 않습니까? ‘결국은 분노하기 때문에 사람을 죽일 텐데 살인할 운명이야 내 마음대로 못하지만 운명을 따르는 나는 바꿀 수 있지 않겠는가? 어떠한 일에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인내와 평정의 사람이 되자.’ 하고 아내에게 편지 한 통을 남기고 황망히 어느 산 속으로 입산수도를 갔다고 합니다.
유명한 도사를 찾아가 도를 닦은 것은 아니고,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홀로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화내지 않고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도록 자기를 훈련했습니다. 가서 큰 돌멩이 하나를 가지고 ‘이 돌멩이로 반들반들한 그릇을 하나 만들자.’ 하고 뜻을 세웠답니다. 빗줄기에 바위 패이듯이 연장도 없이 손으로 혹은 돌멩이로 두드리고 갈고 다듬으면서 울퉁불퉁한 바위를 속을 파서 반질반질한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모든 추위와 배고픔, 더위, 불편함에 추호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애쓴 끝에 6년이 되던 어느 날, 그릇이 반질반질하게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품에 안고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너에게 더 가르칠 것이 없노라. 하산 하여라. 그래, 이 정도면 나는 이제 운명을 피할 수 있어.’ 그리고 6년 만에 동네에 접어드니 저녁이 어스름한 밤이 되고 있었습니다. 정든 사립문을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나면서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여보” 하고 문을 들어서는데 이상하게 인기척이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다가가 보니까 방에는 벌써 호롱불이 켜졌고 두 사람의 실루엣이 창호지에 비취는 것입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침을 발라서 창호지를 뚫고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그렇게 정숙했던 자기 아내가 어느 중과 뜨겁게 포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댓돌을 보니까 여자 신발 하나, 남자 신발 하나입니다. 6년의 모든 수도와 상관없이 이 속에서 확 하고 분노가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엌에 가서 가장 큰 부엌칼을 쳐들었습니다. 그리고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그 중을 찔러 죽일 요량으로 달음박질하며 올라가는 순간에 ‘참아라.’ 하는 자기 자신의 양심의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속에서 분노가 솟구치는데 댓돌 아래 엎드려져서 칼을 땅바닥에 꽂고 통곡을 하며 우는데 놀랜 두 사람이 문을 열고 튀어나왔습니다. 알고 보니까 자기 언니였습니다. 오래전에 언니와 헤어졌는데 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주를 하러 다니다가 동생 집에 와서 동생과 만난 것입니다. 하필이면 그날이 자기 남편이 내려오는 날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저는 오랫동안 그 이야기가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나의 인생을 바꿔 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 자신의 성격을 성화의 맥락에서 바라보게 하는데 커다란 힌트를 나에게 주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본성으로 이것을 억제할 수는 있지만 미워하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때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자연의 본성은 우리 자신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선대하는 사람에게 에워싸여 있을 때는 우리가 얼마나 악한 인간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악한 의도를 가지고 우리를 비난하는 독한 말, 치열한 미움으로 우리를 탄핵하는 외침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전혀 들을 수 없었던 우리의 영혼과 마음의 진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직도 더러운 인간이고, 그리스도의 큰 사랑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명제와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의 영혼의 현실 사이에서 성도가 택할 수 있는 마지막 피난처는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의 보좌입니다.
(찬양)
내 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
내 주의 은혜 있는 곳 은혜의 강가로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에워싸여 있을 때는 예수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인줄 알았는데 내가 용납할 수 있는 지체와의 관계를 가지면서 내 안에 악이 가득하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처음에는 나에게 악을 행하는 그 사람이 관심이었는데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나에게 악을 행하는 그 사람보다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의 영혼의 처지가 불쌍해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사랑하지 못하는 나와,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욕을 당하셨던 예수의 생애를 대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의 삶은 복음에 전혀 합당한 삶이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에 합당한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사이에서 나 자신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나를 포기할지언정 주님을 포기할 수 없기에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을 데리고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찬양)
물가로 나오라 내 곁에 서라 내 목마른 것을 내가 채우리라
어둠 속에 흘리던 내 눈물 그 눈물을 위해 내가 죽었노라
이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벌레 같은 인간을 향한 그리스도 예수의 그 찬란한 사랑을 깨달으면서 감당할 수 없는 죄의 깊이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의 대조 사이에서 눈물만 흘리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서 나와는 헤어져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는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순간,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고, 우리는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하라시면 해야 하고, 그것이 우리의 도리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구하며 깊은 사랑의 열두 번째 속성 속으로 들어가는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18.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Ⅰ. 본문해설
이어서 사도는 열세 번째 사랑의 속성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열세 번째의 속성은 바로 앞에 나온 열두 번째의 사랑의 속성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며”라는 속성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 많은 허물을 덮어줄 수 있는 힘인데 이렇게 덮어주는 것이 소극적이라면 믿어주는 것은 사랑의 적극적인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열세 번째의 속성은 다음 주에 살펴볼 사랑의 마지막 속성인 모든 것을 바라는 속성과 밀접하게 연결이 됩니다. 이 믿음 때문에 사랑은 끊임없는 소망을 우리에게 제공해줍니다.
Ⅱ. 이 구절의 의미
A. 믿으며
그러면 유서 깊은 이 구절을 해석하기에 앞서 이 구절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믿으며’ 라고 되어 있는 이 부분은 희랍어 성경에 ‘피스튜어에이’라고 되어있습니다. ‘피스튜오’는 ‘믿다’라는 동사의 삼인칭 단수 형태입니다. 번역이 정확하게 되었습니다. ‘피스튜어에이’라고 하는 단어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사람을 믿을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심지어는 믿음의 대상이 어떤 사실이나 사물인 경우에도 이 단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믿는다’는 단어는 아주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인 동시에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핵심적인 행동인 믿음의 행동을 지시하는데도 이 단어가 사용이 되었습니다.
B. 모든 것
어제 설명 드린 바와 같이 ‘모든 것’이라는 단어는 ‘판타’라고 하는데 이것은 ‘항상’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말 성경에 번역된 대로 ‘모든 것’이라고 설명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은 사랑의 속성으로서 믿음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것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그 범위 안에서 그것이 무엇이든지 믿어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신앙에서 가장 근본에 속하지만 어려운 담론인 사랑, 믿음과 같은 문제들을 상세하게 다룰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영혼의 변화와 함께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믿음과 사랑, 이 두 가지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계신다면, 앞으로 다른 성경 지식들을 획득하는데 매우 유용한 기초가 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Ⅲ. 모든 것을 믿는 사랑
사랑의 속성이 모든 것을 믿는 것이라고 했으니 결국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믿는 사랑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A. 믿음과 사랑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사도는 믿음과 사랑의 관계 역시 다른 사랑의 속성처럼 두 지평 속에서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지평은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 혹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믿음이 사랑과 어떻게 연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지평은 바로 그러한 원리들, 즉 신자가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속성이 성도와 성도 사이에, 더 확장해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나타날 때 믿음이 어떻게 사랑의 속성으로 작용하는지 두 가지 지평 속에서 이 문제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조금 더 쉬운 말로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사랑과 믿음의 이치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랑할 때 그대로 적용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믿음과 사랑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먼저 이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의 지평에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래전에는 하나님도,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이들에게 상주시는 이시라는 사실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었기 때문에 그분이 행하신 일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우리들이 어느 한 순간에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이 믿음을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최초의 믿음은 중생한 영혼의 최초의 작용입니다. 즉, 믿음이라는 행위는 단지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물건을 집듯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참된 변화에서 오는 영혼의 움직임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영혼을 움직일 수 있도록 살려놓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믿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종종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설명할 때 믿음이 얼마나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것인가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예를 듭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우리 삶의 모든 행위들이 믿음으로 이루어졌다는 논리를 이렇게 제시합니다. “자, 내가 내일 비행기를 탑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추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비행기를 타는 이유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1977년 4월 5일에 태어났다고 하는데 당신이 태어나는 것을 직접 봤습니까?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엄마가 당신을 낳아주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은 믿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발소에 가서 면도하는 사람에게 자기 목을 맡길 수 있는 것도 결국은 믿기 때문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못 믿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이야기합니다. 얼핏 보기에는 은혜로운 것 같지만 이러한 설명의 오류는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참된 믿음과 보편적인 믿음을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믿음은 넓은 의미에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확률을 믿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1977년 4월 5일에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태어나느라고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엄마가 나를 낳는 것도 본 적이 없습니다. 뱃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위 사람의 증언이나 문서, 살아온 습관, 경험, 이런 것들을 통해 확률로서 믿는 것입니다. 나의 본적지가 경기도라는 사실을 믿는 것, 내가 1977년 4월 5일에 태어났다고 믿는 것, 지금 살고 있는 엄마가 나를 낳아준 엄마라는 사실을 믿는 것은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얼마든지 믿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들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영혼의 참된 변화가 없으면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중생과 믿음의 관계를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중생은 그야말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사실상 죽어있는 영혼이 하나님에 의해 살림을 받는 것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물을 알아보고, 엄마를 알아보고, 내가 태어난 생년월일을 믿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정신의 작용 아닙니까? 정신의 작용 가운데 영혼이 관계하지 않는 작용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영혼의 하위적인 기능과 고등한 기능으로 나눕니다. 이것을 보고 꽃이라고 인식하고 좋아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생기고, 내 생년월일을 믿는 것은 정신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영혼과 관련되어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영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영혼의 근본적인 변화와는 관계가 없는 정신의 작용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에는 고등한 작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런 것들은 영혼의 고등한 작용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죽어있는 영혼이 살아나지 않고는 영혼이 고등한 작용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있는 영혼은 하나님과 그분의 계시의 말씀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결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중생하고 나서 중생한 영혼이 하나님을 믿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그분께 순종하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성인의 경우에는 이미 사물을 인식하고 판단하고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의 경우에는 중생하면 영혼이 인식하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사용해서 최초로 움직이는데 이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슬프게 뉘우치고, 자기를 구원하실 이가 예수 뿐 인줄 알고 그분을 향한 믿음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중생은 믿고 사랑하고 회개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것이고, 실제로 회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 능력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반드시 어른이 되어야만 중생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일부의 그릇된 교파에서는 어른이 되어서 사물의 이치를 판단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회심할 수 없기 때문에 중생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올바른 개혁주의자가 아닙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태안에서의 중생의 가능성까지 이야기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것을 중생으로 해석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람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뱃속에 있는 아이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낙태의 문제는 중대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중생할 수도 있고 아주 나이가 어린 상태에서도 중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아직 자기의 죄를 깊이 인식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깊이 의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경우에 중생은 그럴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고, 그 아이들이 나이가 들면서 사물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는 때가 되면 중생이 발현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변이 일어나거나 중대한 장애가 있지 않는 한, 아이들은 돌 쯤 되면 걷기 시작하고 간단한 말을 하기 시작해서 네 살 정도면 자유롭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글도 쓸 수 있게 됩니다. 아이가 돌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걸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잉태될 때 그 속에 걸을 수 있는 능력, 말할 수 있는 능력, 쓸 수 있는 능력, 식구들을 알아보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이 지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발달하면서 주어진 능력이 바깥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중생한 영혼을 먼저 만드심으로써 자기의 죄에 대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이고, 중생한 영혼이 실제적으로 밖으로 발현되는 것이 회심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야기하는 열세 번째의 사랑의 속성은 다른 열두 번째의 사랑의 속성과 마찬가지로 안 믿는 사람들이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을 남발하거나 세속적인 사랑에도 이런 특성이 있는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와 비슷한 것은 있습니다. 모든 사랑이 결국은 하나의 하나님 사랑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닮은 특성들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꼭 예수를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려는 사람만 허물을 덮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자식을 너무 사랑하는 부모는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자식의 허물을 덮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닮은 특성입니다.
결국은 회개와 믿음이 먼저 있고, 그 때 중생을 통해서 심겨진 새 생명의 원리는 사랑으로 역사해서 그 사람의 마음과 의식 속에서 회심과 함께 풍부하게 작용합니다. 중생한 어린아이들이 진짜로 주님을 만나고 깊이 회심하게 될 때 이미 중생한 영혼이었지만 비로소 샘이 터지듯이 ‘확’ 하고 솟아오르면서 보이지 않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발현되는 것입니다. 최초의 믿음에서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 사실을 강조해서 말하기를, “믿음은 사랑을 창조하나 사랑은 믿음을 창조하지 않습니다.”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최초의 회심에 대해서만 사실입니다. 일단 예수를 믿고 회심해서 주님을 깊이 믿게 되면 그 다음에는 오히려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중생은 많이 중생하고 덜 중생하는 게 없습니다. 영혼이 살아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중간이라는 게 없습니다. 살았으면 살았고 죽었으면 죽었지, 반 쯤 죽였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죽였다는 것입니까? 살려뒀다는 것입니까? 살려뒀다는 것입니다. 99% 죽였다. 살려뒀다는 것입니까? 죽였다는 것입니까? 살려뒀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삶 사이에는 중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튼튼하고 강한 믿음부터 허약하고 미지근한 믿음까지 층차가 많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이 충만했을 때를 생각해보면 마치 두꺼비가 파리를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습니다. 혀가 ‘쭉’ 나와서 먹습니다.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습니다. 계속 먹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탁’ 펴면 ‘싹’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안 믿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너무 많이 믿었더니 공간이 없어서 안 믿어지더라.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이 더 많이 생겨납니다. 설교를 들을 때도 ‘아멘!’ 이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할 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어느 신학 대학 교수가 열린 교회 설교를 가지고 논문을 썼습니다. 그분이 하는 이야기가 이렇습니다. 설교가 이치에 딱 맞고 정교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을 때는 ‘저거 너무 정교하고 딱 맞는데 저게 사실일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너무 정교하니까 사실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또 허술하게 전하면 ‘저게 앞뒤 이치가 안 맞는데 사실일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믿음이 충만하고 강해지면 하나님의 말씀이 쏙쏙 들어오면서 ‘아멘’ 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믿음이 식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정도는 믿어지는데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성경이 수없이 이야기해도 안 믿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가슴에 다가오지 않고,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들어도 ‘그런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믿음이 어떻게 회복되는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믿음이 “우리 이렇게 신앙생활해서 안 되겠다. 앞으로 삼일 동안 믿음 갖기 특별강조 기간이다.” 그래서 뭐든지 ‘믿어야지, 믿어야지’ 한다고 합시다. 사람들이 “믿습니다.”를 연발합니다. 사실 그런 쌍시옷을 사용한다는 게 제대로 안 믿어진다는 말입니다. 진짜 믿어지는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무엇인가를 본다고 할 때 육신의 눈을 가지고 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니까 여러분이 여기 이렇게 모여 있는 게 보입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실체들에 대해서는 그게 적용이 안 됩니다. 지금 이 안에 공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러분이 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우리는 공기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숨을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실체의 경우에는 공기보다도 더 심해서 파악이 안 됩니다. 그럴 경우에는 우리의 지성으로 직접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것은 우리의 지성이 감각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바라보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곧 바라보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눈의 감각으로 보든지, 믿음을 수단으로 보든지 간에 보는 것인데, 그게 정말 마음에 믿어지면 이미 알고 있는 것인데 “믿습니다.”를 연발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만약 여러분을 보면서 “여러분이 여기에 가득 모인 것을 저는 목숨을 걸고 믿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웃을 것입니다. 눈으로 다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여기 많이 모였어도 여러분이 여기 모인 것을 믿는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육신의 눈을 통해서 분명하게 보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똑같이 정신의 눈으로 어떤 사실을 분명하게 보고 있다면 쌍시옷 발음을 되게 내면서 “믿습니다.”를 연발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나는 너를 믿는다.”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여러분을 믿을까, 말까 마음속으로 싸우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워낙 믿으면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개 회사나 정치판에서 안 믿어지는 손을 붙들고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B. 사랑의 속성으로서의 믿음
이렇게 믿음이 식어졌을 때 이 믿음이 어떻게 회복되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면 믿음과 사랑의 관계가 기가 막히게 파악이 됩니다. 집에서 교회 올 때 “오늘 믿어지지 않으면 예배당에서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러면서 교회 오는 사람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엔 없습니다. 심지어는 별 의지도 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옵니다. 그런데 찬양을 드릴 때, 기도를 할 때, 성경을 읽을 때, 사랑하는 지체들과 교제를 나눌 때, 구역 예배를 드릴 때,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어느 한순간 근원이 어디인지 알 수 없게끔 하나님의 사랑이 확 밀려옵니다. 예고하지 않았는데 찬양 속에서, 기도 속에서, 교제 속에서, 설교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밀려옵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러면서 눈물이 확 쏟아집니다. 예배드리기 전에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셨는데 지금은 내게 가장 가까이 계셔서 내 마음을 녹이시며 사랑을 경험하게 해주십니다. 이 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으려고 작정하고 오지는 않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나니까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깊이 믿어집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게 되는 것을 뭐라고 부릅니까?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은혜의 결과가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입니다. 이것이 훨씬 일반적인 경험입니다. 그래서 믿음 갖기 40일 작정은 실패할지 모르지만 은혜를 받으려는 집중적인 기도와 하나님 찾으려는 노력은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도 회복되어집니다. 안 믿어지면 “믿습니다.”라는 말을 기름 짜듯이 짜내지 말고, 차라리 “하나님, 안 믿어집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내 힘으로는 믿을 수 없으니까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믿을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훨씬 치료가 빠릅니다. 믿어지지도 않는 것을 ‘너는 믿고 있는 거야, 알았지? 너는 믿고 있는 거야.’ 그렇게 해서 세뇌시킨들 그게 믿음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최초의 사랑은 믿음에서 나오지만 구원받은 이후에는 놀랍게도 사랑에서 믿음이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극단적으로 끌고 가면 안 됩니다. ‘결국 우리는 믿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구나. 그냥 은혜가 임하면 저절로 믿어진다며?’ 이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믿으라고 명령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라.” 이렇게 명령형으로 우리에게 믿도록 요구합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함으로써 은혜가 우리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지만, 또 한편으로 우리가 믿음에서 미끄러지고 떨어지지 않기 위해 은혜를 유지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주님을 믿으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믿음이든 회개든 하나님 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인간의 의지를 사용하셔서 믿게도 하시고 회개하게도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Ⅳ. 사랑 : 믿음으로 가는 길
이렇게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정의하고 나면 이런 질문이 생겨나게 됩니다. 최초의 회심에서는 우리가 중생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토대로 믿을 수 있었고, 믿으니까 샘이 터지듯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샘솟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지속해나가야 하는 문제가 생겨나게 됩니다. 첫 믿음과 함께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마치 노아의 홍수 때 샘이 열리고 하늘이 쪼개진 것처럼 아래에서는 솟아나고 위에서는 쏟아집니다. 여기에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유하시는 은총,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과 용서에 대한 감각이 확 생겨납니다. 그 다음에는 이것을 지속해야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목회의 본질을 두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회심과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는 것, 이것을 하나님이 목회 사역의 목표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도인 여러분의 입장에서 보면 신앙생활의 대의는 회심하지 못한 사람은 참된 회심을 이루고, 회심한 사람은 그 회심의 의미를 계속 보존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변함없이 믿으면서 살아가려고 할 때 이 믿음을 방해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런 분이시고 저런 분이시라고 믿으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일들이 우리의 인생 속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대표적인 것이 욥의 경험입니다. 욥은 충심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정에 불행한 일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욥의 아내도 경건한 욥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막판에 가서는 “당신이 이렇게 되고도 하나님을 향한 순전함을 아직도 지키려고 하느냐?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려라.” 이렇게 요구합니다. 이런 일들이 삶속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지금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은 나를 끝까지 지켜주시는 분이고 여호와는 내 편이라고 믿고 싶은데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증거들이 때때로 고개를 듭니다. 그 때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하십니까?
제가 중국에 갔을 때 중국의 목사님 한분을 만났는데 간증을 들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청년 시절에 예수를 믿고 은혜를 많이 받아서 신학교까지 다니고 열심히 복음 사역을 하다가 문화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무자비하게 숙청을 했습니다. 이 사람도 체포되어서 22년 동안 강제노역을 했습니다. 22년 동안 가족들로부터 한 통의 편지도 못 받았다고 합니다. 22년 후에 석방되어서 변해버린 산천을 지나 더듬더듬 고향을 찾아갔습니다. 예전에 있던 자신의 집은 다 낡았습니다. 부인은 도망갔고 아들 하나는 미쳐버렸고 마지막 남은 아들 하나는 공산당이 되어버렸습니다. 마당에 주저앉아서 펑펑 우는데 명료하게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래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목사님이 거기에서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찬양)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셨네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 아시니
“그렇습니다. 주님, 내 아내는 도망갔고 한 아들은 미치고 또 한 아들은 공산당이 되었어도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런 증거들이 우리 삶 속에서 수없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성도들 안에 충만하게 있으면 그것들에 의해 설득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욥의 반응이 그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아, 모든 것을 주신 이가 여호와시니 또한 여호와께서 취하시지 않으시겠느냐?” 하면서 욥은 자신의 순전함을 지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설득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분이라는 증거를 접하고 설명할 수 없어도 그것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설득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랑의 열세 번째 특성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믿음 생활에 들어섰습니다. 즉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이후로 그의 전 생애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처절하게 자기를 바친 생애였습니다. 가족도 없었고 친구도 없었습니다. 오직 주님과 사랑하는 양떼들만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생애 전체에서 주님은 언제나 선하시고 날마다 도와주기만 하시는 분이라는 증거를 매일 보면서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 뭐라고 썼습니까? “살 소망이 끊어져서 우리의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만물의 찌끼와 같이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많은 어려움들은 하나님은 그런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분이라고 설득하는 증거들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주님을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이런 증거들에 의해 설득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열세 번째 속성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지 않을 때는 우리의 현재도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 않고 미래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고 과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과거를 돌아보면 지워버리고 싶은 것, 빼버리고 싶은 것, 만나지 말았어야 될 사람들이 수없이 떠오릅니다. 어떤 사람이 글을 쓰기를 “나의 불행은 엄마 아빠에게 태어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출생하게 된 근거까지도 유감인 것입니다. 그런 시선으로 보면 현재 당하고 있는 많은 어려움과 고통은 우연히 다가오는 고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감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게 감사입니다. 감사 강조기간 3일, 그런다고 해서 감사가 저절로 솟아납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내가 가장 불행하고 아팠던 사건 하나하나가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꼭 필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심지어 내가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방황하던 시간들도 결국은 그것을 통해서 나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를 보든지, 현재를 보든지, 미래를 보든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받을 만한 분이 아니시라는 많은 증거들이 새롭게 보이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고백하게 됩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런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니까 가장 아프고 고통스런 일들도 나는 다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나를 설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치대로 사랑의 속성으로서 믿음을 가지고 공동체에 적용을 하면 사도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됩니다. 사람들은 선하고 기쁜 소식을 더 잘 믿을까요? 아니면 불길하고 추한 소식을 잘 믿을까요? 후자입니다. 왜 그럴까요?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을 때는 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해석이 부정적인 정보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많이 사랑하게 될 때는 긍정적인 정보에 의해 더 많이 영향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어떤 사람이 험담을 하고 이건 사실이라고 계속 이야기할 때 너무 화가 나면 “그만해라. 듣고 싶지 않으니까 말하지 마라.”고 합니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한 사실 여부를 확인해볼 생각을 하지 않고 듣기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모든 것을 믿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높은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어느 교역자가 자기 옆에 있는 교역자에게 “말씀드려. 말씀드려.”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목사님의 비리라고 하면서 말씀드리라는 것입니다. “목사님도 궁금해 하실 테니까 말씀드려.” 그래서 “너희는 그것을 왜 궁금하게 생각하냐? 나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나에겐 그것보다 궁금한 게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대화에 관심도 안 보이다가 누군가의 나쁜 소문을 이야기 하니까 바짝 다가앉으면서 “정말?” 이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쁜 소문이 들리니까 “아니야, 그냥 유언비어겠지.”라고 하고 넘깁니다. 두 사람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한사람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한사람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많이 사랑했습니다.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하고 썩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 뒤에 고린도 지방으로 전도하러 왔을 때 사도 바울은 가난한 심령이 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이런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그리고 선명한 복음의 정신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현장에서 전도를 했지만 고린도 지방에서는 낮아질 대로 낮아진 가운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많은 부흥이 일어나고 허다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기 전까지 이 도시에 있는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고 타락하고 죄짓고 편 갈라 싸우고 허무한 인간의 철학과 사상을 좇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교회의 정신으로 고린도시를 변화시키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사도v바울을 아버지처럼 여겼습니다. 그리고 충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잠시 다른 선교지로 옮겨가고 난 후에 고린도 교회에 은혜가 식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고 간 기독교 신앙은 그대로 지키면서 살기에는 너무 비현실적이고 버겁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과 짝하면서 세상과 평화를 누리면서도 주님을 믿을 수 있는 제 3의 길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도시의 정신은 서서히 교회에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도시를 정복해야 할 교회가 도시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장에 등장하는 수많은 파당들, 헌금에 인색한 모습, 교회 안에 일어나는 각양 정욕적인 범죄들, 이것들은 모두 고린도시의 정신이 교회에 물밀듯이 들어온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되자, 여기저기서 사도 바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말하고, 사도 바울이 가르쳐준 신앙에 대해 폄하하는 내용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사도라고 하는데 맞아?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이 3년 동안이나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치셨고, 그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것도 보았는데, 자기는 다메섹으로 가다가 혼자 예수를 만났다고 하네. 누구 증인이 있어? 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본 사람도 없다고 그러던데.” 또 한쪽에서 그럽니다. “그것 큰 역사를 일으킨다고 하는데 왜 자기는 골골한 거야?” 실제로 성경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런 오해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 증거가 거액의 헌금에 대해서 일체 깨끗하게 자기를 지키려고 했던 사도 바울의 헌금관리에 대한 이야기에서 어느 정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혹시 이런 이야기는 안 나왔을까요? “제자들을 보내서 헌금을 엄청나게 걷었는데 슬쩍 하는 거 아니야? 진짜 제대로 쓸까?” 이런 소문은 나지 않았을까요?
한 때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영혼의 아버지와 스승과 같은 사람에 대해서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고린도 교회의 은혜가 식고 사랑이 변질되니까 사도 바울에 대한 태도도 이렇게 변화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태도만 바뀌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삶의 모든 방면에서 온전하게 나타납니다. 성령께서는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셨는데, 은사를 주신 목적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잘 섬기도록 주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이 주신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은혜 아래 있을 때 어떤 성도가 은사를 받았는데 그것을 잘못 활용해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저 인간은 한 형제라도 끝까지 사랑할 가치가 없어.”라고 설득하지만 사랑이 있기 때문에 설득당하지 않았습니다. 내 형제가 잘못을 해도 그전에 교회의 한 지체라는 사랑이 훨씬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그만 사랑하도록 설득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고 나니까 미움이 ‘확’ 번지면서 설득이 되는 것입니다.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고, 문제가 문제를 일으키고,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 파당을 만들고, 은사 받은 사람들끼리 싸움을 하면서 교회는 주님이 세우라고 주신 은사 때문에 큰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선물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신앙이고 인격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함께 섬기면서 살아가야할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은사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다투는 일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결국 사랑이 식어지니까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충만할 때는 오랫동안 덮어주고 믿어주고 희망을 갖던 교회의 아름다운 정신이 붕괴되어버린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사랑이 식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불신하고 자기 지체들을 믿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으로 권고하고 모든 것을 좋은 쪽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여러분을 미워하는 사람과 논쟁을 하다보면 한참 대화하다가 경악하게 됩니다. ‘어떻게 저렇게 해석할 수가 있을까? 나의 모든 행동, 말 하나하나를 어떻게 저렇게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미움은 모든 해석을 악의로 몰고 갑니다. 사랑은 모든 해석을 선의로 데리고 갑니다. 미움은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은 정신의 움직임이지만 사랑은 그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잠시 호되게 야단을 쳐놓고 13장에서는 누그러뜨리면서 사랑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많은 은사는 받았다고 하는데 너희들은 사랑에 대해 너무 모르는구나. 은혜의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구나.” 그러면서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이렇게 천천히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깊이 회개하고 자신들이 잘못한 것을 깨닫고 슬퍼하더라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 때 “그럼 그렇지. 내가 누구라고. 그래서 있을 때 잘하라고 했잖아.”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다음에는 마음이 찔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이 잘못했지만 내가 매를 너무 심하게 때린 게 아닐까?’ 그리고 오히려 그들이 자신의 죄로 인해 너무 많이 근심한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사도 바울은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편지를 쓸 때는 뜻을 세우고 칭찬을 많이 해주면서 위로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게 바로 사랑이 시키는 일입니다. 사랑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선의로 해석합니다. 혹시 사랑하는 사람이 그릇 행하거나 그에 대해 들려오는 나쁜 소식이 있어도 그것에 의해 설득당하거나 관계를 끊어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에게로부터 오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라고 주님께 항상 선하고 올바르게만 살았겠습니까? 혈기도 부리고 욕심도 내고 잘못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증거가 되어서 주님에게 호소했을 것입니다. “바울이라는 인간을 당신이 택한 것이 큰 실수입니다. 저 사람은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인간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모든 증거에 의해 설득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핵심입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지고 심지어 불순종을 행하고 죄를 지어도 그것을 모두 재료로 삼아서 당신과의 보다 풍부한 사랑의 관계로 데려가려고 하시지 그것들을 빌미로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내는 일은 하지 않으십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지라
우리는 세상에 사람들에게 이런 무한한 사랑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너를 포기하셨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께 잘렸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들려오는 수많은 속삭임들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음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지체들로부터 들은 어떤 부정적인 이야기 때문에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거나, 경계심을 갖고 그를 나쁜 사람으로 마음에 새겨 놓거나, 혹은 반감과 미움을 가지고 대하고 있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지체들의 잘못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설득하는 것은 성령의 음성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식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때는 원수도 용서했는데 설령 허물이 있은들 그 지체가 원수입니까? 원수라면 더더욱 사랑해야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까요? 나는 지금 여러분을 야단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염려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성을 가지고 있으니 오늘 설교의 논리에 대해 한번 대답을 해보십시오. 형제에게 어떤 허물이 있다고 칩시다. 그것을 기회로 여러분 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공동체의 지체들을 향한 미움, 편견, 질투를 불러일으키고 그를 상종 못할 사람으로 마음속에 적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여러분이 미워하는 형제의 영혼이 죽는 게 아니라 그대들의 영혼이 매 말라 갑니다. 왜 돌이키지 않습니까? 주님의 사랑이 밀려들었을 때 여러분이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성도의 신앙 따라서 원수도 사랑하겠네.”라는 찬송을 부르지 않았습니까? 복음 들고 나선 이 몸 아골 골짝 빈들에도 소돔 같은 거리에도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나누고 함께 성찬을 떼는 여러분의 지체들이 소돔에 있는 사람들만 못하고 아골 골짝에 있는 인간들만 못합니까? 왜 미워합니까? 왜 한번 맺힌 것을 풀지를 못합니까? 그까짓 것 돈 몇 푼 때문에, 아니면 어디에서 주워들은 이야기 한 두 마디를 가지고 악한 결론을 내도록 짜 맞추는 것 자체가 여러분 속에 예수의 사랑이 없다는 증거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사랑은 모든 것을 선하게 해석합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속을지라도 그와의 관계가 끊어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기도는 잘 되시나요? 주님의 은혜가 밀려오시나요? 하나님의 말씀이 송이 꿀보다 단가요? 아침에 일어날 때 눈을 감으면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아침마다 강물처럼 밀려옵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사랑하는 지체들이 꼴 보기 싫어서 서서히 마음속에 보따리를 싸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무도 말리지는 않습니다. 떠나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죄 짓는 일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가십시오. 여러분 마음에 묶인 지체들을 다 용서하고 보따리를 싸십시오. 그 때는 아무도 말리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송별회를 열어드리겠습니다. 사명을 따라 가는데 누가 말리겠습니까? 여러분이 이 교회 저 교회를 메뚜기처럼 옮겨 다니면서 떠날 때 항상 그런 식으로 결론을 내고 옮겼을 것입니다. 대부분이 그럴 것입니다. 그 죄에서 돌이켜 회복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여기에서 또 한 번 하려고 합니까? 정말 그렇게 하려고 뜻을 세운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13장은 커피나 마시면서 한가히 듣는 시낭송이 아닙니다. 피가 철철 흐르는 복음의 현장에서, 마귀와의 싸움이 끊임없이 있는 교회의 현장에서 온몸으로 부딪히며 사도가 깨달은 진리입니다. 왜 용서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집요하게 미워합니까? 여러분에게 제가 말해보고 싶습니다. 한번 맺힌 것을 풀지 않는 집요한 미움, 이것을 여러분 속에 있는 죄에 대해 한번이라도 그런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악한 마귀에 대해 집요한 미움, 끊어지지 않는 증오심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마귀에게도 자기 속에 있는 죄에 대해서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마음을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형제들을 향하여 갖는 것입니까? 마지막에 시들어가는 여러분의 영혼은 누구 책임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수많은 원수들에게 끊임없이 에워싸이셨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랑이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이 복음의 진리를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를 바랍니다.
19.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Ⅰ. 본문해설
이어서 사도는 사랑의 열네 번째 속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바라며” 이 열네 번째 속성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열세 번째 속성, 즉 “모든 것을 믿으며”와 다음에 소개하게 될 마지막 특성인 “모든 것을 견디며”의 중간에 위치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들을 향해 희망을 갖는 사랑의 속성은 믿음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고, 이러한 희망 때문에 사랑하는 과정에서 오는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은 절망이 유행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희망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참된 희망은 희망만을 가지려고 해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랑을 함으로써 사랑 속에 있는 속성인 희망에 접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구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Ⅱ. 이 구절의 의미
오늘 성경은 사랑의 열네 번째 속성을 ‘바라며’라고 말합니다. 희랍어 성경에 ‘엘피제이’(ἐλπίζει)라고 나오는 이 단어는 옳게 해석된 단어입니다. ‘엘피제이’에서 ‘엘피스’(ελπίς)라는 명사가 나오는데 이것은 ‘소망’, 혹은 ‘희망’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엘피제이’라는 단어는 ‘희망을 갖다, 소망을 갖다’ 이런 의미를 가진 단어로 성경에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혹은 “사랑은 항상 바라며”라고 번역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항상 희망을 가지며”라는 정도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바란다.”라는 ‘엘피제이’에 관한 두 갈래의 해석이 있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바라며’라는 것을 내세적 소망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은 12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12장에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영적인 은사를 가지고 서로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받은 놀라운 영적인 은사는 네가 받은 그 은사보다 훨씬 중요하고 높은 것이다.”라고 자랑하면서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적인 은사가 보다 더 높은 역사의 소산이라고 생각하며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보다 더 큰 소망이 신자들에게 있음을 사도가 가르쳐주기 위해서 이 열네 번째의 특성을 소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바라다’라는 사랑의 속성은 믿음의 종말론적인 보충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바라는’ 것의 목표는 부활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13장 너머에 있는 15장에서 이 부활의 영광스러운 소망을 장시간에 걸쳐서 피력하면서 이것이 잠시 머무는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소망해야 할 바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해석도 잘못된 해석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13장의 문맥 전체에서 놓고 본다면 이것이 충분한 해석이라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13장은 고린도 교회에서 성도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다투는 문제를 다루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신 사랑의 속성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는 것, 온유한 것, 시기하는 자가 되지 않는 것, 자랑하지 않는 것,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 교만하지 않는 것,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 등 이 모든 것들은 현실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특징들인데 갑자기 ‘바라다’라는 희망만을 내세에 있을 부활의 영광과 연관시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궁극적으로 사랑해야 할 분은 예수님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우리들은 마지막 날 믿음의 결과로서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소망을 두며 살아야 하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문맥에 훨씬 더 어울리는 은혜로운 해석이라고 여겨집니다. 현세적인 희망과 ‘바라며’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항상 바라며”라고 할 때 이 ‘바라는’ 것은 저 멀리 내세에 되어질 일이라기보다는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형제를 끝까지 사랑하게 되면 그 형제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그가 부족하고 심지어 악할지라도 그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이 그를 바꾸어 놓으실 것이라는 믿음이 관계 속에서 형제를 포기하지 않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속성과 관련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이 형제가 자신의 마음에도 들지 않고,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행하고 있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언젠가는 가장 좋은 것을 그에게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갖게 되는 소망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항상 바라는 사랑의 특성을 그리스도 예수와의 관계 속에서 경험했습니다. 그는 사도가 되기 전에 유대교 신앙에 붙잡혀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예언을 따라서 정확히 오셨습니다. 구약의 신앙을 순수하게 붙들고 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오심을 고대하였지만 그분이 오셨을 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사울은 전통적이고 고전적이고 성경적인 구약 신앙을 갖는 대신, 유대인의 편견에 깊이 물들어버린 유대교라는 종파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그러한 선입견이 구약을 잘못 해석하게 만들었고, 그 예언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후에 그는 자기가 얼마나 긴 세월동안 하나님을 모질게 대적하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을 만난 것도 바로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넣기 위해 가던 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사울에게 나타나셨고 거기에서 사울은 엎드러졌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살아온 많은 날들이 실상은 무지와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온 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아무 쓸모없는 철저한 죄인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희망이 없는 자기와 같은 인간을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로부터 이런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결국 예수님께서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통해 사도 바울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는 내가 이방과 임금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모질게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하나님 사랑의 원리와는 정반대로 예수 믿는 형제들을 죽이고자 하는 악한 마음을 품었을 때, 이미 예수님께서는 사울을 변화시켜 바울로 만드실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악을 행하고 주님의 교회를 박해하는 모든 날들을 견디면서 예수님은 사울을 변하여 바울로 바꿔 놓으실 소망을 잃어버리지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라며’라고 하는 것은 사랑의 열네 번째 특성을 말하는 것인데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사랑받는 대상에 대해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반드시 변화될 것이고, 그가 지금은 부족하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변화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의 성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모든 정보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좋은 쪽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그를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바꾸실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을 바라는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A. 믿음과 희망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먼저 믿음과 희망의 문제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여러분에게 믿음과 사랑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연결되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제일 먼저 회심할 때는 믿음이 먼저이고 사랑이 뒤따라온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어느 한 순간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믿어지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믿어지고, 이천 년 전에 나무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죄를 위한 죽음이고, 그분이 다시 사신 부활이 내가 하나님을 믿을 때 다시 살아날 부활의 보증이라는 사실이 굳게 믿어질 때 세상에 붙었던 헛된 사랑은 떨어지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을 온전히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혼의 변화입니다. 이 믿음은 단지 확률을 의존하는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전적으로 믿는 믿음에서 우러난 영혼의 변화입니다. 믿는 순간 우리 영혼에는 예전에는 없던 완전히 새로운 성향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거듭난 자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성령의 내주하심과 함께 신자의 중심에 심겨지게 될 때 그것은 결코 신자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고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소원을 품게 됩니다.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은혜에 미끄러져 있을 때는 주님을 덜 사랑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심지어 신자가 극악한 죄를 짓는 경우에도 그 속에 선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의 성화의 단계에서는 반드시 ‘믿음 이후에 사랑’이라는 공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경우에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은혜의 효과로서 주님을 깊이 사랑하게 될 때 사랑의 정서 속에서 주님을 향한 진리가 단순하게 믿어집니다. 주님의 은혜는 곧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사랑을 가져다줍니다.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충만하게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어느 때보다도 더 단순하게 믿게 되고 성경의 모든 진리를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은 사랑을 부르지만 이후에는 사랑이 믿음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의심하는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을 두렵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지고 있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사랑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런 사랑을 가지고 형제를 깊이 사랑할 때는 한 사람이 최종적인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만약에 사랑의 최종적인 종착점이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인간에게 희망을 거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인 사랑의 특성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이 문제를 좀 더 쉽게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 사랑을 닮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닮은 사람들입니다. 사랑을 하는 것도 사랑을 받는 것도 하나님을 흉내 내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입니다. 원래 사랑은 하나님 사랑 하나밖에 없는데 인간은 영혼 자체가 하나님을 빼닮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흉내 내어 이 세상 속에서 많은 사랑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녀 간에도 이런 사랑을 보게 되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이런 사랑을 보게 되고, 형제들이나 이웃 간에도 이와 유사한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사랑은 우리에게 매우 덕스러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부부가 원수처럼 사는 것보다는 서로 사랑하는 것을 훌륭하게 생각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소송이나 하고 재판이나 하는 것보다는 부모를 위해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을 훨씬 더 높은 덕을 가진 행동으로 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만약에 이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떨어지는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끊임없이 희망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가끔 비아냥거리는 말로 콩 꺼풀이 씌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저 사람은 이런 저런 점에서 절망스러운 존재인데 사랑을 하니까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이고, 그를 향해 끊임없이 기대를 갖게 되는데 이것이 사랑의 바라는 특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인간을 최종적인 종착점으로 삼으면 사람을 사랑하고자 할 때 그 사람이 끊임없이 기대에 부응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실망하게 됩니다. 인간의 모든 자원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랑의 감정도 끝이 있고 끊임없이 아름답게 아름다운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어서 기대를 갖게 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깊이 사랑해본 사람은 결국은 그 관계가 깨질 때 죽음 같은 미움도 함께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사랑은 그 자체를 최종적인 종착점으로 삼아서는 안 되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사상을 이렇게 피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사랑을 하고자 하면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자.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는 누구도 잃지 않으니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는 자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느니라.”라고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사랑의 끝이 어떤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변하거나 사라졌을 때 우리의 사랑은 갈 곳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이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라면, 그 사람은 사라져도 그 사람을 사랑한 것 자체가 불변하시는 예수를 사랑하는 통로였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의 궁극적인 목적은 상실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믿어 준다기보다는 그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 때문에 그를 믿어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를 향한 믿음이 항상 현실적으로 성취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하나님이 바꾸어 놓으실 거라고 굳게 믿고 포기하지 않고 사랑했는데도 그러한 기도가 성취되지 않는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만약에 이 사실을 부인한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구원받아야 하고 우리가 기도했던 모든 사람들은 회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실지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인데도 끝까지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실패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비록 자신의 바라는 바가 그 사람을 통해 끝까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가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기 때문에 형제를 포기하지 않고 바라는 과정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이 누리는 유익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더 놀라운 사랑의 사람으로 만드시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한 사람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자원이 있는 것처럼 뻐기면서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겠노라고 하지만 어느 한순간에 그를 향한 기대도 사라지고 더 이상 그에게 바랄 것이 없는 것 같은 사랑의 한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안에서 끊임없는 낙관을 선택합니다. 모든 것을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고 하고 희망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특성입니다. 이 일이 어려울 때마다 그는 주님께로 피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사람들로부터 받는 실망과 낙심, 큰 실패 때문에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실망한 것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랑의 연대가 연약해졌기 때문에 사람과의 잘못된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표현을 씁니다. “상처를 받아서, 누구누구의 이런 행동을 보고 상처를 받아서, 교회에서 이러한 광경들을 보고 실족해서.”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할 때에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런 일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서 훌륭한 신앙생활을 했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잘 달려가는 사람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 것처럼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일들, 지체의 부도덕한 행동, 혹은 사랑하는 형제가 자기를 배려하지 않는 경솔한 행동이 자기 신앙을 넘어뜨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특별히 납득할 수 있는 예를 한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언젠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충만한 은혜 가운데 눈물이 있는 기도 생활을 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로 한번 돌아가 보십시오. 그런 은혜의 때라고 해서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라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은혜 안에서 사는데 주님을 섬기는 과정에서 혹은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이 모든 공동체의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고통이 오게 됩니다. 그 고통이 대부분은 하늘의 비나 눈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오게 됩니다. 그때 어떠셨습니까? 주님을 너무 사랑하고 은혜 가운데 있는데 여러분이 믿었던 지체가 배신했을 때 여러분이 신뢰하던 사람이 실망시켰을 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향한 사랑을 접어버렸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찬양)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 뿐 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그러면서 친구가 나를 버렸기 때문에 주님의 품으로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아내가 나를 실망시켰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이 더 큰 것을 알았습니다. 남편이 나에게 아픔을 주었기 때문에 주님만이 나의 영원한 신앙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사랑은 우리들이 영원히 누릴 사랑의 그림자뿐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 마음속에 사랑이 강화되었습니까? 아니면 포기되었습니까? 오히려 더 크게 불 일듯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에 있어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성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았다는 끊임없는 집착, 자기가 피해자라는 끊임없는 망상, 그래서 자기 자신을 가련하게 생각하는 감정은 기독교 신앙에서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가는데 있어 성령이 주시는 감정들이 결코 아닙니다. 너무나 평범하지만 치열하게 전해주는 사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그는 절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사람이라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사람이 자살하기 직전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증오에 가득차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 죽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살하는 사람의 감정을 모르지만 자살하기 직전에는 놀라운 평화가 찾아옵니다. 거기에는 미움이 없습니다. 그 대신 사랑도 없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끊임없는 피 눈물이 나게 했던 대상을 향한 원한, 복수, 고통, 가슴을 들뜨게 했던 뜨겁고 찬란한 사랑, 이런 것들이 다 사라지고 자신의 인생 자체가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거기가 소망의 끝입니다. 거기가 사랑을 묻은 곳이기 때문에 소망이 거기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사랑의 속성으로서의 희망이 이런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이 세상에서 신자가 경험하는 절망의 감정은 배교의 감정과 동질의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절망하는 것은 그 자체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절망의 감정이 배교의 감정과 동질의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을 향해 희망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절망은 하나님이 희망을 가지시는 여러분 자신을 스스로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함으로써 나에게 기대를 갖는 것 자체가 오판입니다. 당신은 판단을 잘못하셨습니다. 내 판단이 옳습니다. 나는 희망이 없는 존재입니다.”라고 자기의 존재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배교의 감정과 같은 종류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끊임없이 절망을 선택하면서도 그것의 근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모릅니다. 그 근원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갈입니다. 절망이 우리를 이끌고 가려는 최종 종착지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목표도 건설적인 계획도 절망 안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절망의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절망의 죄를 짓는 사람들은 배교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난이든 시련이든 기쁨이든 행복이든 폭풍 같은 아픔이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서 그 모든 것을 묵묵히 감당하면서 절실하게 주님을 찾는 것만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절망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부부와의 관계에서 듣는 수많은 절망의 속삭임들, “저런 인간 포기해 버려. 저 관계를 계속 할수록 너에게는 고통일 뿐이야. 끊어버려.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이 교회 아니면 교회가 없나? 끊어버려. 포기해버려. 저런 인간은 네 마음속에 없다고 생각하고 접어버려. 넌 네 길을 가는 거야.”라는 수많은 속삭임들은 절망의 속삭임입니다. 배교의 감정입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물고 뜯고 싸우는 광경을 보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으로 교통하며 사랑의 주님이 그들의 교제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영광스럽게 보여주어야 하는데, 만나면 동료들을 험담하고 성도들을 비난하고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이야기들뿐입니다. 그런 교제를 피하십시오. 영적인 건강에 매우 해롭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끼리 있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절대로 그런 교제 속에 자신을 던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곧 장애인 주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각성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체주의적인 영향 때문인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불필요한 사람이라는 사고방식이 있어왔습니다. 조상들도 자기 집에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사랑이 얼마나 없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맥도날드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면서 깊이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맥도날드 회사에는 특별한 일거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량으로 납품되는 햄버거를 포장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중증 장애를 걸린 사람들을 채용해서 그 일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발달장애에 있는 아이들이 그 일을 합니다. 정상적인 사람들 속에서 직장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일거리를 남겨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심이 있는 사람에 의해 훈련되어서 가장 단순한 햄버거를 포장하는 일을 익히게끔 하는 것입니다. 미국이나 유럽 같은 데는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자신의 힘으로 노동을 할 수 없고 부양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나라에서 책임져 줍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도 복지제도가 잘 발달해서 굶어죽는 사람은 없도록 배려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복지제도가 우리나라에서도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을 내버려둬도 굶어죽는 법은 없습니다. 그 아이들이 햄버거를 싸서 번 돈으로 집을 사겠습니까? 그런데도 인내심을 가지고 부모와 회사, 사회복지사들은 이 아이들이 안정적으로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더 많은 돈을 투자해서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단순한 노동이지만 그 아이들은 직업인으로서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누군가에 의존하면서 사는 피동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들은 ‘저 고생을 해서 온전한 제품을 못 만들 바에야 차라리 맥도날드가 몇 억의 돈을 기부해버리면 낫지, 왜 하자가 나오는 물건들을 만들기 위해 장애인들을 동원해서 그런 일을 할까?’ 그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회사도 그것을 사먹는 사람도 모두 그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주위에 장애인 자녀를 둔 자매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사회적인 냉대가 아니라 가족들의 불일치입니다. 엄마를 만나면 “그까짓 자식 데리고 있으면 뭐하냐. 고아원에 갖다 줘버려라. 갖다 버려라. 어디다 두고 와라.” 이런 식으로 가장 격려해 줘야할 가족들이 그 자매를 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견디는 것도 한계가 있지 그것이 계속 될 때 자기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일어나게 됩니까? 딱 한 단어, ‘사랑’이 있고 없고의 차이인 것입니다. 발가락에 아무리 중한 무좀이 있어도 그것을 잘라버려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의 발가락인 경우에는 잘라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새끼가 아니니까, 혹은 자기 새끼여도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어디에서 체험했습니까? 당시에는 몰랐지만 후에 복음을 알고 보니까 주님께서 자기를 오래전부터 일체의 오래 참으심으로 기다려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장 극악하게 예수를 모독하고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려는 그때 “이는 내가 택한 그릇이다.” 하시며 오래도록 기다리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만족스럽지 않은 존재일지 모릅니다. 지체들이 보기에는 내가 아무리 많이 돌보아도 발전의 가망성이 없는 존재처럼 여겨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는 실로 오랫동안 자기를 참으신 그분의 자비로운 성품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만난 것은 다메섹 가는 길이었지만 그분의 선택은 영원 전이었고 사랑도 영원 전부터였습니다. 자기가 예수를 사랑하지 않을 때조차 예수는 자기를 사랑하셨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과 정 반대의 길을 걸어가고 심지어는 주님께 칼을 내밀 때조차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주님을 버린 것처럼 주님이 우리를 버렸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나 자신도 아무 희망이 없어서 나를 포기하려고 하는데 주님은 여전히 나에 대해서 희망을 가지고 계시니, 나 같은 인간을 향한 사랑이 신비로울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습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만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아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기대를 겁니다.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고 그 사람을 포기해도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그를 신뢰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붙들고 계신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를 향한 나의 사랑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분이 그 형제를 통해 역사하실 것이기에 하나님 때문에 모든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관계에 대해서 절망하려는 자신과 싸우기 위해 은혜가 필요합니다. 누군가와 관계를 계속 하다가 은혜가 고갈될 즈음에는 마치 벼랑 끝에 매달린 줄을 놓듯이 관계를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이 사랑이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랑하는 관계에 의해 파악이 됩니다. 말세가 될수록 심리학이나 상담학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됩니다. 점점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자아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끊임없이 탐구하지만 이런 것을 탐구하지 않던 때에 오히려 우리는 자신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이웃을 알고 교회를 알고 예수를 알고 세상을 알고 나의 친구들을 알고 그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파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관계를 지탱하기를 포기하고 자기 사랑으로 오그라들 때 그것은 고립의 감정을 가져다줍니다. 인간은 모든 관계로부터 단절되고 나면 자기가 누구인지 해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자기의 내면세계를 파헤쳐보지만 죄악 외에는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심오하다고 말하지만 처음부터 들여다봐도 끝이 없는 자기의 존재를 응시하는 것은 어떠한 희망도 우리에게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가지십시오. 모든 사람을 향한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모든 관계를 향해 포기하지 마십시오. 사랑하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소망을 갖기 힘겨울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은혜를 구하십시오. 희망이 없다고 포기한 사람을 위해 기대하고 위대한 꿈을 꾸어보십시오. 그 사람을 바꾸기 전에 하나님이 여러분 자신을 먼저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20.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Ⅰ. 본문해설
드디어 사도는 오늘 사랑의 열다섯 번째 속성을 거론함으로 사랑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딘다는 것입니다. 견딤이라는 속성이 사랑의 열다섯 번째, 마지막 속성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명백히 열다섯 번째 사랑의 속성은 열네 번째 속성인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와 밀접한 연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랑은 어떠한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않기 때문에 사랑은 또한 모든 것을 견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구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Ⅱ. 이 구절의 의미
A. ‘견디느니라.’ : 휘포메네이
우리말 성경에 ‘견디느니라’고 되어 있는 이 부분이 희랍어 성경에는 ‘휘포메네이’(ὑπομένει)라고 되어있습니다. ‘휘포메니이’라는 동사는 원래 군대용어입니다. 적과 전투를 할 때 적의 치열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진지를 사수하거나 어떤 지역에서 후퇴하지 않는 동작을 가리켜 ‘휘포메네이’라고 부릅니다. 전쟁에 있어서 진지나 지역을 사수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후에 전개될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그 지역, 혹은 그 진지를 적에게 넘겨주지 않는 그런 종류의 견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B. 용기 있는 견딤
그러므로 이것은 용기 있는 견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바로 이렇게 용기 있게 견디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때에 그에게는 궁극적인 목표가 존재합니다.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나는 사랑은 변덕이 심하고 불일듯 강렬한 것 같지만 어느 순간에 자신의 계획에 부합하지 못할 때 단호하게 그 사랑이 끝나기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사람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고 그에게 베푸는 사랑은 그를 겨냥하고 있지만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변하지도 않고 배반하지도 않고 우리를 실망시키지도 않는 완전하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목표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시작되고 흘러가는 사랑은 용기 있는 견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내게 주는 유익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언젠가 그가 나를 실망시킬 때 그 사랑은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아가페의 사랑은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완성과 전달의 과정에서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용기 있게 견디는 사랑의 속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더욱이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한 사도 바울의 사랑에 대한 최종적인 언급은 종말론적인 기대와 연결이 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사랑하는 것이라면, 이 사랑을 성취함에 있어 끊임없는 고통과 시련, 괴로움과 연단이 있을 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이 사랑을 성취할 수 있다는 궁극적인 승리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그렇게 사랑을 성취하면서 살기 위해 몸부림친 자신의 수고와 모든 고통에 대해 주님께서 위로하고 보상해주실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기대를 갖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참 사랑은 그리스도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형제와 지체를 사랑하지만 그것이 종착역이 아니라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한 온전한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모든 것을 극복하고 난관을 이길 수 있는 용기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온전히 이룰 수 없도록 방해하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을 소유하게 되는데 이러한 견딤을 통해 그가 가지고 있는 감정이 진실한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우리 자신이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사랑함에 있어서만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내가 사랑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옳게 판단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아십니다. 우리를 속이는 것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일깨워 주시는 자극이 없다면 자신에 대해 심각한 착각을 하면서 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때문에 참 마음과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할 때 난관을 만나게 하십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온전히 사랑하고자 할 때 난관과 역경, 혹은 자기를 거스르는 이웃의 악을 만나게 하심으로써 그가 그러한 상황을 얼마나 잘 견디는지를 시험하십니다.
여러분은 ‘조흔석’이라는 돌멩이를 알 것입니다. 영어로 'test'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광물을 측정할 때 쓰는 시금석입니다. 고체 상태에서는 분명히 검은색이었는데 조흔석에 갈면 잔 가루로 변하게 되는데 이 때 가루의 색깔은 회색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보기에는 분명히 푸른색 돌인데 가루를 만들어 놓고 보면 하얀 가루가 나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애틋하게 사랑하는 감정을 품고 이 정서를 지니게 되면 우리는 경솔하게 “이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랑일거야. 나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야. 내 안에 이런 사랑이 어느 정도는 있어.”라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막상 시금석과 같은 존재를 만납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보십시오. 이들은 한때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십자가로 말미암는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은사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은사들이 서로 부딪혀 문제를 일으켰고, 그 문제 때문에 교회는 심각한 다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는 모든 은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섬기도록 주신 것이지만, 이 은사가 하나님의 교회를 올바로 세우는데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사랑이라는 인격 속에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언급되고 있는 열다섯 가지의 사랑의 속성들은 한 결 같이 사람과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경험되고 파악되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유지되어야 할 일종의 덕들입니다. 항상 내 마음에 가지고 있는 질서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나와 함께 손잡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있다면, 우리 안에 사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많이 있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견뎌야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이 참된 것인지 여부를 시험하는 많은 지체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에게 은혜가 많고 성격 좋은 지체들을 만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꼬이고 망가진 심령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하셔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 때 끊임없이 고통 받게 하십니다. 이것을 통해서 그를 향해 오래 참을 수 없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자기 안에 있었던 사랑의 감정들이 사실은 정서의 파편들이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에게 부어주신 인격적인 사랑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로운 통제는 공동체의 지평에서도 여실히 나타납니다. 교회가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한편 교회 안에는 은혜 받지 못한 사람들, 자기를 사랑해주는 지체들을 향하여 마음을 열지 않거나,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남겨 놓으심으로 공동체가 그를 사랑하면서 자기 안에 참된 견딤이 있는지를 시험받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를 많이 받은 공동체에도 가시와 같은 사람들을 남겨 두어서 공동체가 어디까지 견디는지를 시험하십니다. 견딜 수 있는 한도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Ⅲ. 견딤의 대상
A. 사람들의 악
사랑의 마지막 특성이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이 사랑은 무엇을 견디는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견딤의 대상은 무엇일까요? 이 견딤의 대상은 사람들의 악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악을 행할 때 그것을 견디는 것, 이것이 사랑의 지울 수 없는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입히는 손해와 악을 견디지 못한다면 그가 경험하는 사랑의 감정들은 정서의 파편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견디는 것의 목표는 단지 인내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와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를 사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가 나에게 악을 행하여서 현저한 손해를 입히고 있지만 이것을 견딤으로써 궁극적으로 이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고 사랑으로 그를 정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통해 저 지체에게 흘러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를 굴복시켜서 그가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고통을 받을 때도 사랑으로 견딜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사랑이 공동체 속에서 회귀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휘포메네이’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하게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고대 법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탈리오의 법칙을 비롯해서 이집트와 로마와 중국과 모든 고대의 법들은 한 결 같이 하나의 원칙을 토대로 해서 법이 이루어졌습니다. 보복의 원리입니다. 여러분은 조선시대의 팔조법금을 읽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철저하게 보복의 원리에 의해서 법이 생성되는 것입니다. 근대 법의 표본이라고 하는 함무라비의 법전도 역시 철저한 보복법의 원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구약에서도 어느 정도 근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타락한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과 로마가 고조선과 헬라가 서로 의논을 해서 법을 만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철저하게 하나의 원리에 토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복의 원리입니다. 누가 누구를 상하게 하면 똑같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누가 누구를 죽이면 그것에 대한 대가로 그 사람을 죽이는 것, 이것이 바로 보복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은 이 보복의 원리를 뛰어넘습니다. 이것은 본성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웃에게 악을 입었을 때 그 손해는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외적인 손해이고 또 하나는 내적인 손해입니다. 외적인 손해는 물질의 손해나 신체의 손해를 가리킵니다. 이것들은 무엇인가 치료를 하거나 물질적인 배상을 받음으로써 어느 정도 보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남긴 상처와 손실은 물질에 의해서 배상되지 않습니다. 가족을 살해당하고 그 원수로부터 받은 배상금이 아버지를 잃은 딸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외적인 보상과는 상관이 없이 내적인 상처를 지니게 되는데 상처에 대한 적절한 치유책 중 하나가 복수심을 품는 것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치유의 효과를 가져다 줍니다.
요즘은 점점 신앙생활을 잘해야 할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우울증 환자가 너무 많습니다. 결혼하면 남편이 숟가락을 집어던질 때 밥상을 뒤엎을 수 있는 여자는 절대로 우울증이 안 걸립니다. 오히려 ‘내가 참아야지.’ 하는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립니다. 만약에 남편이 그런 식으로 행동을 하면 참지 말고 은혜를 많이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죄인의 마음을 달래주는 치유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또 다른 갈등을 낳습니다. 원한은 원한을, 미움은 미움을 끊임없이 불러와서 인간들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이 내게 행하는 악에는 악한 의지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을 능가하는 선한 의지와 사랑이 내게 있어서 내게 악을 행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그를 긍휼하게 생각하고 견디며 그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대안입니다. 이것을 실제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내 안에 다가오는 악과 고통들을 소화해서 그렇게 행할 수밖에 없는 그의 비참한 처지를 안타깝고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 마음의 전 기능에 관여합니다. 죄가 있을 때는 죄의 성향이 우리의 인식, 감정, 의지의 모든 해석에 영향을 미치듯이 마음에 사랑이 가득 있으면 사랑이 해석 작용에 영향을 미칩니다.
어떤 형제가 말을 너무 잘하는데 그를 미워합니다. 그러면 “말만 잘해. 말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으면 “말도 잘해.” 이렇게 바뀌게 됩니다. 만약에 그가 단호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결단을 잘 내린다면 사랑이 없을 때는 무모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지만 사랑이 있으면 용기가 있고 단호한 성격이라고 평가하게 됩니다. 사람이 나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도 어찌할 수 없는 필연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악한 본성에서 나온 필연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행할 수밖에 없는 그를 불쌍한 사람이라고 해석하게 만들어주는 것 자체가 내안에 있는 사랑이 시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악을 끊임없이 견디고 용서할 때 그의 미움은 종착역은 내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품으면 미움은 나에게서 끝이 납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밀칠 때 미움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그는 또 다른 피해자가 되어서 누군가에게 그 미움을 표출함으로 또 다른 미워하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연속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목적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악을 끊임없이 용서하고 내게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의 망가진 영혼을 불쌍히 여기면서 모든 것을 참아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자연적인 본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B. 주어진 십자가
우리는 여기에서 요한 칼빈 선생이 『기독교 강요』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준 ‘주어진 십자가’라는 개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모든 성도들에게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이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키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모든 고통과 시련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칼빈은 주권사상을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하며 삶의 모든 상황을 하나님을 더욱 닮아가는 기회로 활용하면서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살을 심히 죄악시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현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통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인지를 깨닫습니다. 견디지 못하는 우리의 조급함과 인내 없음을 통해서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정서의 파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사랑 없음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사랑을 구하게 만들어줍니다.
저는 이 십자가를 두 개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절대적인 십자가와 상대적인 십자가가 그것입니다. 절대적인 십자가는 어떤 자기의 과오나 오류, 죄와 상관이 없이 오직 예수님과 하나님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통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십자가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20세기에 삼천 명의 인구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때문에 순교했다면 여러분은 믿으시겠습니까? 지금도 많은 사람이 티끌만큼도 죄가 없지만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박해당하고 핍박을 받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바로 오늘날 발생하고 있는 일들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는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쓰라린 것이지만 이러한 고난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주님을 점점 더 닮아가고 부패한 본성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갑니다.
또 다른 십자가는 상대적 십자가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런 십자가를 진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 십자가는 명백하게 자신의 죄 때문에 받는 고통을 비롯해서 주님을 섬길 때 자신에게 있는 오류와 모든 것들이 함께 경합을 이루면서 고통을 가져오는 종류의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말년에 그가 당한 피비린내 나는 칼부림과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이 모든 것들은 절대적인 십자가가 아니라 상대적인 십자가였습니다. 가정사의 고통, 끊임없는 왕국의 반란, 이 모든 것들은 자기가 이전에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때문에 온 환란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에 반역을 일으키고 자기를 죽이고 왕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자기 뱃속으로 나은 자식이라는 소문이 들렸을 때 그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치를 떨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지은 죄를 가슴에 품고 있다가 그에게 보복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로 헤아릴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신비 속에서 다윗이 마지막 생애에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마음과 아름다운 영혼으로 훌륭한 예언을 남기도록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히스기야와 요시야, 웃시야를 비롯한 많은 임금들, 젊은 시절에 큰 은혜를 받았던 임금들이 마지막에 육체로 남긴 역사를 보십시오. 그러나 다윗은 그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서 말년에까지 신앙의 순수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한 나라의 제왕의 자리를 누리면서도 하나님의 고통의 연단을 통해서 지상의 왕국보다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의 통치를 갈망하는 임금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단순한 임금이 아니라 선지자요 시인이요 위대한 신앙가요 여호와 신앙을 가진 철학자로서 위대한 글들을 많이 남김으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감화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끊임없이 견디게 하시며 불완전한 사랑에서 완전한 사랑으로 옮아가게 하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께 있어서도 정확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사랑의 죄악을 벗어버리고 날마다 거룩해짐으로써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로 성화되어가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처음부터 그런 죄와 자기 사랑의 불결함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필요가 없는 순전한 사랑이었습니다. 처음에도 순전한 사랑이었지만 마지막 때가 올수록 그분의 순전한 사랑은 더욱 더 불타오르게 되었습니다. 그의 순종이 구속에 있어서 점진적인 순종이었던 것처럼, 사랑도 점진적인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바칠 때가 가까워 올수록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은 더욱 불타올랐고, 요한은 말하기를 자기의 때가 가까움을 볼수록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마지막 때가 가까이 올수록 우리가 더욱 뜨겁게 사랑하자고 강조합니다. 그것은 참된 사랑의 점진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나타날수록 자기 사랑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더욱 더 치열한 불꽃을 어둠 속에서 발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평화한 곳에서는 참다운 그리스도의 사랑이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미움이 있고 갈등이 있는 곳에서 사랑은 찬란한 불꽃처럼 빛을 발하게 됩니다. 오류와 의심이 있는 곳에서 믿음과 진리가 빛을 발하듯이 사랑하지 못하는 원망과 미움, 갈등이 있는 곳에서 사랑은 놀라운 빛을 발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그 사람의 결점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밝은 대낮에 등불을 치켜들면 어두울 때보다 더 밝게 빛날 것이라고 말하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은혜를 많이 주셔서 사랑의 사람으로 만드신 후에 그를 어둠속으로 인도하셔서 그의 사랑의 불꽃을 치켜들어 그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을 보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생활할 때 사랑할 수 없는 지체들을 만나거나 가시와 같은 이웃들을 만나게 될 때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많은 은혜를 부어주셨을 지도 모릅니다. 이미 여러분에게 마음에 있는 사랑을 하나님이 높이 평가하셔서 이 정도의 어둠은 이기고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정하고 계신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견딤으로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이 참으로 예수의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게 됩니다.
Ⅳ. 사랑이 견디게 하는 방식
A. 은혜의 공급 : 사랑
사랑의 속성이 견디는 것이라면 이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견디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사랑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이런 이웃들의 악 속에서 견디게 만드는 것일까요? 제일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은혜의 공급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죄악 된 본성을 극복하고 생겨난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과 신자인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은 동질의 사랑이지만 기원에 있어서는 다른 사랑입니다. 그분 안에 있는 사랑은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원천적인 사랑이고,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은 주님이 부어주신 은혜 때문에 악한 본성이 죽고 우리 안에 꽃 피우게 된 파생적인 사랑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한 번 은혜를 받으면 상당한 사랑이 자기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고 계속 사랑하시게 하는 방법은 우리에게 물건을 주시는 방법과는 다릅니다.
미국에 피터 번스타인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십대에 미국 대 공황을 경험했고, 대학시절은 존 에프 케네디와 함께 하버드를 다녔던 사람입니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월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투자의 대가에게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변화무쌍한 금융적 상황에서 내 돈을 잃어버리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보 같은 질문에 이 대가가 어리석게 대답했습니다. “현찰을 손에 꼭 쥐고 계세요. 그러면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대신 이익도 없겠죠.” 누군가가 일단 물건을 받은 한 버리지 않고 움켜쥐고 있는 동안에는 잃어버릴 염려가 없습니다. 이것은 언제나 우리 수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간단한 질문을 두 번 할 테니까 소신껏 답변을 해보십시오. 누군가를 뼈에 사무치도록 원수로 알고 미워했는데 그를 마음 깊은 곳에서 완전히 용서해주는 일이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까? 은혜를 받으면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까? 그런데 세월이 많이 지난 후 다시 그를 사무치도록 미워하는 일은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까? 그러면 전자가 진실입니까? 후자가 진실입니까? 둘 다 진실입니다. 요즘 들어 치유집회를 많이 합니다. 90% 정도는 신뢰할 수 없는 집회들입니다. 가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답이 없습니다. 안 가도 될 정도로 제가 여러분에게 명백한 답을 드리겠습니다. 죄가 들어온 후 인간은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치유하는 것은 세상의 일이 아닙니다. 많은 상처를 입었어도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굴까요?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유케 하시는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치유이기 때문에 이것을 한 번 주고 영원한 효력을 발하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사랑하며 무한히 견딜 수 있는 자원이 우리 안에는 없습니다. 이 자원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사랑은 물건을 주는 것과 다릅니다. 사랑에 한 번 깊이 감화될 뿐 아니라 은혜가 끊임없이 주어져서 예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흘러들어 우리를 주장할 때 오래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의 속성을 드러내 보여줄 수가 있습니다.
B. 십자가의 현재적 경험
여기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현재적인 경험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웃이 나를 미워하고 악을 행할 때조차도 나를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영혼의 비참함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까지 그 영혼을 사랑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나에게 악을 행하고 내가 베푼 선의를 악의로 갚는 사람들에게 보복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때 우리는 보복하려는 자연스러운 본성과 마주하게 됩니다. 본성의 일깨움을 받아서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될 때 더 이상 저 인간을 향해 더 많이 참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렇게 사랑을 포기하려고 할 때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 저지르려고 하는 악, 사랑을 포기하고 저가 나에게 베푼 악을 복수로 갚으려는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묵상합니다. 이것은 심리적인 자기 투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자기에 대한 그리스도의 투사라고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자신의 경건의 기법으로 활용함으로써 우리에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라고 하는 아름다운 유산을 남겨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핍박한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이전에는 그가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 성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악을 행한 것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의 사건이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사도 바울의 생각에는 대대적인 변혁이 오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죄 때문에 저주받아 죽으신 것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적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그의 죄는 십자가 죽음 이후에 발생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 행하고 있는 사울의 죄악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천 년 전에 지은 죄, 앞으로 짓고자 하는 죄의 의도, 그것이 겨냥하는 죄의 실행, 이것이 바로 이천 년 전에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한 원인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사랑을 멈추거나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복수로 되갚으려는 욕망을 가질 때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과 지금 저지르려는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나 자신에게 일깨우는 것입니다. ‘네가 사랑한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금 네가 짓고자 하는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런데도 너는 이웃에게 악을 갚으려 하느냐?’ 그 순간 이천 년 전에 죽은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의 기운이 우리 속으로 스며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살아서는 안 될 내 안의 것들을 죽이는 강한 죽음의 작용을 하게 됩니다.
암 치료에 있어서 과학이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가 바로 세포를 죽이는 것입니다. 암 세포는 죽기를 거부하는 세포의 덩어리입니다. 그래서 균형이 깨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치료책은 그 세포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방사선을 쬐거나 약물을 투입합니다. 문제는 방사선이나 약물이 곁에 있는 정상세포까지 함께 죽이는 것입니다. 마치 적지에 아군과 적군이 있는데 피아를 구별하지 않고 폭탄을 퍼부어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적군도 죽겠지만 거기에서 전쟁을 수행할 아군까지 함께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암 세포가 완전히 죽으면 다행인데 죽지 않고 살아남았을 때는 정상 세포들이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암 세포에게 훨씬 더 유리한 환경이 될 수도 있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의 기운은 무차별적으로 우리 영혼에 침투해서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죽이는 방사선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본성 속에 깃들어서는 안 되는 예수를 죽게 만들었던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 복수를 갚고자 하는 욕망, 자기의 유익을 위해 남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려고 하는 죄 된 욕망만을 골라서 고사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살아있는 것이 경험하는 모든 죽음은 끔찍한 고통입니다. 그 고통은 인간의 영혼 안에서 더욱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자기 깨어짐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자각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동반하는지를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런 자기 깨어짐을 더 많이 경험해서 온전한 신자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유는 그 다음에 예수 부활의 실제화라는 효과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고통을 치른 즉시 그곳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영혼의 소생의 기쁨이 지극히 크기 때문에 영혼의 소생의 기쁨에 도달하기 직전에 경험했던 자기 죽음의 끔찍한 고통을 하찮게 여기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산모가 온 몸을 찢는 고통으로 아이를 낳을 때는 아이를 다시는 잉태할 생각을 갖지 못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후에 생명의 기쁨을 경험하면서 해산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죽는 것은 살아서는 안 될 생명이고, 부활하는 것은 반드시 살아나야할 생명이니, 반드시 살아나야할 부활의 생명은 죽어야할 생명을 딛고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그 사람 안에서 이러한 과정이 끊임없이 일어나면서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은 사랑할 가치가 없는 존재이고 주장할 권리가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토록 내세우기를 좋아하고 주관하기를 좋아하는 자기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없어져야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현재적인 경험은 성도의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경험됩니다. 이 때 성도는 자기에 대해서 공정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자신은 아무 가치가 없는 그리스도 예수의 덕을 입은 존재일 뿐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자신은 또 다른 한 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하나님 한 분 만이 존재하실 뿐이고,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어 그리스도를 거쳐 나에게 미쳤고, 그 사랑에 의해 감읍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뵈올 때 내가 사라진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그에게 내포된 대신적 존재로서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처럼, 이번에는 그 품에 안겨서 내포적인 대신적 존재로 속죄함을 입고, 나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이웃에게 흘러들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을 다해 지체와 그의 영혼을 사랑하지만 사랑의 목표는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관통하여 또 다른 사람에게로 사랑이 흘러들어가 우주를 휘도는 하나님의 자기회귀적인 사랑 안에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그 사랑이 하나님께로 나와 마지막에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우주적인 사랑의 회귀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행복은 참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대치하는 또 다른 존재, 사랑의 질서를 결정하는 주체적인 존재로서의 행복이 아닙니다. 사랑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자신을 잊게 됩니다. 자신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이 다시 하나님께로 흘러들어가는 회귀적 순환 속에 최대의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견디고 이기게 만들어줍니다. 어떠한 악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이 세상 누구도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Ⅴ. 결론 : 사랑 안에서 사랑받음
결론적으로 성도는 그런 사랑을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충만히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 안에서 지체들을 사랑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랑이 어려울 때마다 이 사랑은 내가 하는 사랑이 아니라 위로부터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는 사랑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무한한 사랑 때문에 지체를 사랑하되 그가 나의 사랑을 원수로 갚아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지체의 사랑 때문에 견뎠던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사랑, 나 같은 죄인에게 베풀어 주신 무한한 사랑 때문에 견뎠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온 세계와 우주 속에 가득 펼치는 도구로서 살게 해주신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하며, 그분께 받은 사랑 때문에 지체들을 사랑하고, 끊임없는 견디는 사랑의 고통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지위가 높지 않고 가진 재물이 많지 않아도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사람은 어두운 세상의 찬란한 불꽃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통해 당신이 누구인지 알리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은사를 능가합니다. 모든 능력에 뛰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은사, 세상에서 줄 수 있는 모든 자원보다 더 뛰어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통이 있는 곳에 위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간직하며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사랑 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