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2. 중직자 재교육 4
영원히 남을 사랑 이곳에
녹취자: 이경순
오늘 나눌 내용은 성도의 공동생활입니다.
Q. 1) 안녕하십니까, 곽동찬 집사입니다. 오늘 목사님의 설교말씀 성도의 공동생활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는데 제가 주제별로 나눠봤습니다. 첫째로 예수께서 제자들을 모은 두 가지의 목적이 무엇인가 말씀하셨고, 그담에 기독교적인 성찰의 핵심적인 삶은 무엇인가, 교회와 공동생활의 정신은 무엇인가, 네 번째는 사랑과 정의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 그담에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는데, 제가 요약한 것을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모은 두 가지 목적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 예수께서는 첫 번째로 제자들을 함께 공동생활을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섭리를 하기 위해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제자들을 돌보기 위함이다, 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제가 요약을 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는 성령과 함께 공동생활을 이루게 되었고 신약시대에는 모이는 교회에서 흩어지는 교회로 위임명령을 이루게 하기 위한 삶이었다고 말씀하셨고 교회는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공동생활의 연습이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장소가 아니다 라는 말씀까지 해주셨습니다.
그담에 기독교적인 성찰의 핵심적인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인위적인 사랑이 아니라 까리따스 사랑이다 하는 말씀해 주셨습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에서 강화를 받은 사랑인데 지순의 사랑이고 온전한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은 창조목적에 살아가는 삶이고 공동체 생활 속에서 실행해야하는 씨앗이 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의와 공동생활의 정신은 무엇인가 말씀하셨는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지체의 삶이다. 그담에 사랑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인데 공동생활의 뿌리이라고 말씀하셨고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지만 사랑해야 할 사람은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인칭적으로는 악이나 비인칭적으로는 선이라는 말은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이 나의 선물이다 저는 이 내용에서 감화를 받았는데요. 왜냐하면 자기 사랑 모습을 알게 하여 성화의 삶으로 변화되게 하기 위하기 때문이다 자기 깨어짐 자기사랑이 있어서는 안 되고 자기 깨어짐으로서 사랑으로서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말씀이고요
네 번째 사랑과 정의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 정의는 판단하고 조치를 내려야 하지만 사랑은 무조건 사랑해야한다 말씀해주셨고, 그러므로 사랑과 정의를 조화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의는 사랑에 의해서 완성되어 가는 것이며,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사랑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세 가지가 있는데 간단하게 말해서 자기 본위 교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자기중심적인 자기 깨어짐이 없는 자가 자신의 최종적인 판단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성찰이 없는 생활 성찰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말씀하셨는데 제가 그것을 구체적으로 요약을 하지 않았고, 세 번째 이기적인 자기사랑을 버려라. 결론적으로는 신자는 예수희생을 본받아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자기 깨어짐의 정신이 있어야 되고 예수사랑의 정신을 본받아서 하나의 밀알이 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인칭적 악, 비인칭적 선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사랑과 정의가 조화로워야 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목사님 A) 이것은 사실은 제가 여태까지 설교했던 시리즈 중에서 모든 것을 폐기하고 20시리즈만 남겨야 된다면 남겨둘 시리즈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냥 제가 여러분들에게 설교한 게 아니라 제 인생의 커다란 방향의 전환을 이루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중의 한 발견은 우리는 흔히 교회하면 선교를 위한 공동체다, 혹은 지역사회를 섬기기 위한 공동체다, 심지어는 교회는 가정을 세우기 위한 곳이다, 라고 하면서 교회를 세우는데 (교회는) 그렇게 막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것을 하면 안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그 어느 것도 본질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냥 자기가 그쪽 방향으로 오리엔테이션이 정해졌으니까 하는 겁니다. 그럼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 할 겁니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사도행전을 딱 넘겨보면 교회는 미친 듯이 복음을 전하고 그 열정에 세상을 정복해 가는데 그것보다도 더 우월한 개념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서 다 복음화 했습니다. 더 이상 할 게 없습니다. 그런 세상이 실현 불가능하지만 상상은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엔 뭘 할 겁니까? 그 다음에 무엇을 할 것입니까? 무슨 뜻이냐면 선교를 하는 것은 마치 돌멩이를 던지면 파문을 그리면서 퍼져 나가는 것처럼 선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이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앞자리에 선교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듣지 않고는 절대로 사람들이 변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맨 앞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예수를 믿었다고 한다면 내 아내가 너무 가엾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그 사람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은 부부가 다시 보니ᄁᆞ 애들이 너무 불쌍해 애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뭐할 겁니까? 모여서 선교를 위한 모금을 하고 선교를 위한 계획을 짜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얼 하느냐 하면 그냥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신 목적이 마가복음 4장 15절에 보면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려고 부르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게 모든 것 보다 첫 번째입니다.
그러면 이 자체가 사실은 어마어마한 내용들이 이안에 들어 있습니다. 요즘 저보고 설교 하라고 하면 이렇게 안합니다. 최소한 4번 정도 나누어서 합니다. 그 때는 아직 젊으니까 의욕이 넘쳐서 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20번을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한꺼번에 때려 넣은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예수님이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입니다. 그러니까 어디 가서 누가 ‘우리교회는 선교를 중심으로 한다’고 그럴 때 -사실은 어느 것도 본질이라고 할 수 없고 하나님이 선교하시는 이유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선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인하지 말고 속으로 새겨들으면서 이 생각도 하십시오. 사람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더 나아가서 사랑의 사회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잘 들어보세요. 제가 이 이야기를 하게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기를 보내셨나봅니다. 왜냐면 제가 너무 소진해서 설교가 엄청나게 밀립니다. 삼일동안 너무 기력이 없을 정도로 소진해서 오늘도 설교준비를 해가지고 왔는데 완성하는 데에 한 시 반부터 지금까지 해서 완성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이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는데 한 사람이 아니라 사회를 만드시려고 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인류를 창조하셨고 두 사람을 한 사람에게서 나오게 하신 것은 한 몸임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고, 죄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모든 사람이 서로를 뭐라고 불렀을 거라고 말했습니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류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인류에 대한 그 계획이 인간에 의해서 망가졌기 때문에 그것을 복원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인류가 그렇게 모여서 아들딸 낳고 계속 불어나면서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가 안 들어왔어도 애기를 낳습니다. 어떤 식으로 낳았을지 우리는 다 생각할 수 없지만 어쨌든 애를 낳으면서 배가 찢어지는 고통을 겪는다든지 아홉 달 반 동안 죽도록 토할 듯이 입덧을 한다든지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쨌든지 자손을 번성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왜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렇게 번성해서 그냥 당연히 먹고, 농사도 짓고, 도로도 만들었을 것이고, 물론 욕망으로 만들지는 않았겠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더 아름답게 이용하기 위해서 만들었을 것입니다. 예술도 발달했을 것이고 별의 별 문명이 다 발전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무 웃기는 것은 현대 교회가 이렇게 “사는 것”에 가장 약합니다. 뭘 자꾸 해야 합니다. 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집사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새벽 3시까지 일하고 살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세상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것입니다. 망가진 세상 안에 아담에서 시작하여 육신의 후손이 퍼진 것처럼 이번에는 예수님 한분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자손이 퍼지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셔서 당신이 제일먼저 하셔야 했던 일은 함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삽니다. 거기에는 목적이 있으면 안 됩니다. 권사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이용해서 전도를 하게 한다든지 아니면 내 사례금을 올려주도록 제직회에서 발언하게 한다든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냥 함께 있고, 함께 살아가는 것 자체가 사랑입니다. 아무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사이가 갈라지면 있기를 싫어합니다. 제일 힘들어 하는 게 같이 있는 것입니다. 집사님 그래요? 안 그래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우리가 무엇을 해야지, 뭘 해야지, 뭘 해야지 하는데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만 가장 훌륭한 것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면서 나 혼자 사는 것 보다 같이 사는 게 나의 인생을 더 잘 살게 만들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잘 살게 만듭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세상에 제일 어려운 것이 같이 있고 같이 사는 것입니다. 일 하는 것은 일하고 안보면 됩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만나고 그냥 웃고 해도 여기서 일이 모두 끝나면 스위치를 탁 꺼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있는 것은 항상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가 사랑의 사람이 된 것 만큼 남과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 나이 좀 든 자매들에게 그런 심리가 많은데 물론 형제들도 있습니다. 함께 사는 게 너무 힘든 겁니다. 집안도 희망이 없고, 자기 앞길도 좀 막막하고, 그럴듯한 직장에 다닌다 하더라도 사는 게 너무 힘들면 시집이라도 가서 한번 도피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죠? 제가 항상 하는 말이 혼자 잘 사는 사람은 둘이 살아도 잘 살고, 혼자 못사는 사람은 둘이 살아도 못 산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헤엄 못 치는 두 사람이 발목 묶고 물에 들어가는 것과 똑같습니다. 차라리 혼자 있는 게 헤엄치기 낫습니다. 결국은 함께 있는 것은 사람 된 만큼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으면 사람들이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 혹은 함께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그 모든 중심에 하나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칭적으로는 악이나 비인칭적으로는 선이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김남준이라는 사람이 악을 행합니다. 나쁜 일을 합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악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자유로운 의지로 그것을 결정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악이 없이는 안 됩니다. 역설입니다. 정말 역설입니다. 악이 없으면 안 됩니다. 모든 고통은 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고통은 자기 악이거나 남의 악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악의 원인이 없는데 고통이 그냥 생겨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몸이 완벽한 건강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통증이 있다는 말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고통은 통증이고 병의 원인은 질병은 그것이 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악입니다. 모든 게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통 없이는 안 다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기한 게 고통은 인간을 망가뜨리기도 하지만 고통은 인간을 매우 아름답게 만듭니다.
간수가 뭐인지 아십니까? 간수는 나트륨을 엄청 농축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고대에 사람이 살다가 너무 괴로우면 소금을 먹고 죽었습니다. 소금을 받쳐놓아 농축되면 액이 나오는데 먹고 죽는 것입니다. 신기한 게 두부는 간수 없으면 두부가 안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간수를 직접 먹으면 죽습니다. 우황 청심환에 주토라는 성분이 있는데 독약입니다. 그것은 티스푼에 살짝 걸쳐있을 정도의 양만 먹어도 즉사합니다. 그런데 그거 없이는 그 약이 성립이 안 됩니다. 그래서 동양의학에서는 악과 독은 두 개의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뒤가 붙어있는 하나의 것이라고 봅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약은 독이 되기도 하고 독이 약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을 깨달았을 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우리 몸이 독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 독 없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독이 지나치면 우리의 몸 자체를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은 우리가 죄를 지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완성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 고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간수가 농축되어 있어서 한 국자 떠먹으면 확실하게 죽습니다. 그것이 악이라면 그것을 일정량 넣어서 두부를 굳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두부는 콩이 좋고 간수를 만든 바닷물이 아주 완벽하게 좋은 것이어야 됩니다. 그래서 유명한 두부마을은 모두 바닷가에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강릉 학사평입니다. 거기서 나오는 간수가 아주 유명합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먹거리 x파일에서 나왔는데 (거기에서 장사하는 가게들이 직접 두부를) 만드는 곳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대부분 다른 곳에서 받아다가 판다고 해서 발칵 뒤집혔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사랑과 정의를 조화롭게 해야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타협을 해서 정의도 하지 말고, 사랑도 완전하게 하지말자는 그런 뜻이 아니라 우리가 볼 때에는 이 두 개가 완벽한 모순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모순이 아니라 이 세상을 움직이시는 하나님 안에서 이 두 개는 원래 완벽하게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완벽한 정의는 사랑을 구현하고 완벽한 사랑은 정의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가 왕이 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국가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정의를 추구하려면 사람들을 막 잘라내야 합니다. 죽이고 감옥에 집어넣고 해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국가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만 한다고 해서 완벽한 국가가 되지는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최고지도자는 이념을 가지고 있어야 되지만 이념을 신주처럼 삼으면서 칼을 가진 사람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몸 전체를 하나로 통합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너무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그와 비슷하게 어려운 사람은 교회목사입니다. 그래도 대통령은 해임의 권한이라도 있지만 목사는 그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좌우하는 것이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진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하나로 수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되는 나라는 불의를 용납하는 부패하는 나라이고, 안 되는 나라는 정의라는 미명 아래 끊임없이 찢어지는 나라이며, 안 되는 나라는 통합이라는 미명하에 끊임없는 불의를 묵인하면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나라가 만신창이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그렇게 심각하게 된 나라가 영국입니다. 카메룬이라는 어리석은 정치인이 브렉시트를 국민투표를 부쳤습니다. 그런데 그게 딱 반으로 쪼개진 것입니다. 국가지도자는 그런 것은 투표를 부치면 안 됩니다. 자기들이 신념을 가지고 밀고 나가면서 국가의 대계를 보면서 가야 됩니다. 투표로 던지면서 표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국은 찢어지고 갈라지고, 그것에 따라서 또 찢어지고 또 찢어져서 완전히 엉망이 되었습니다. 오죽했으면 EU의 집행위원장인가 하는 자가 지금 총리가 된 그 사람에게 자기 부인하고도 이혼 못하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영국을 EU로부터 브렉시트를 하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갈기갈기 찢어진 것입니다. 국민의 사기가 말도 안 됩니다. 수출액도 우리보다 떨어지고 사회가 전체적으로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국가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거스틴의 명언이 있습니다.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중심에 하나님 이외에 누가 있겠으며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형제 말고 그 안에 누가 있겠습니까?” 이해되십니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중심에 사람 말고 누가 있겠으며,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중심에 하나님 말고 누가 있겠느냐는 말은 결국은 두 사랑이 나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일 구역장 공부시간에 1과의 5번 문제 하나만 풉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되는지 설명을 할 테니까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결국은 서로 양보해서 중간을 취한다는 뜻이 아니라 완전한 정의를 추구하는 것과 완전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일치를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완벽한 일치를 우리는 예수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망가뜨렸습니다. 그 죄의 크기는 무한한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정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지불할 수 있는 최고의 한도는 죽음입니다. 그 이상은 인간이 지불할 능력이 없습니다. 더 이상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멸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묻지도 않고 완벽하게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죄를 그대로 묻되 그것을 내포적인 대신 구원받을 우리를 당신 안에 끌어안으시고 감싼 채 마치 지진을 만나서 아이를 끌어안고 자기는 깔려죽고 아이를 살린 엄마처럼 그렇게 당신은 죽음으로 정의를 완성하고, 그리고 사랑의 열매를 인간에게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는 악을 용납하지 않으면서도 내게 죄를 지은 악인을 끊임없이 용서해야 되는 모순처럼 보이는 현실 속에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에 의하면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끊임없이 영원히 남을 사랑이 이곳에, 곧 교회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에게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부인 교회에게 그리고 우리는 그 신부의 몸으로서 그 사랑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유혹에 물들지 않는 순수한 사랑으로 돌아갈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는 잘못된 사랑으로 사람들이 뭉치고, 잘못된 사랑으로 자기편이 아닌 사람들을 배척하는 것을 이 민족에게 가르쳐왔습니다. 그런 측면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중의 상당한 책임이 사실 교회에 있습니다. 물론 한 쪽에서는 정말 자기를 버리는 순수한 사랑을 가르쳐 왔지만 역시 그런 측면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아주 깊이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김정옥 권사님Q)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목사님 A) 제가 기가 막힌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지구가 뭐하는 곳인지 어떻게 생겼는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지구를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설명하라고 했더니 수천 장의 사진을 들고 와서 이게 지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뉴욕 맨해튼 시티 골목부터 시작해서 남산을 거쳐 청계천 뒷골목과 모스코바 뒷골목, 레닌그라드, 더블린에다가 스코틀랜드 산간지방, 런던 등 수천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으로 지구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것을 안 본거 보다는 낫겠죠. 그런데 지구를 알 수 있을까요? 모를 겁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요? 구굴 어스입니다. 구굴 어스보다 더 좋은 것은 위성사진인데, 약 1조 킬로미터 정도 혹은 10조 킬로미터 정도에서 비춰보면 은하자체가 점으로 보입니다.
2천억 개의 별이 모여 있는 우리 은하계 이쪽에서 이쪽 거리가 약 20만 광년정도 되고 두께가 700광년 정도 되는 원반형의 별들의 집단입니다. 이런 집단이 약 이천 억 개인데 이때에 별이라고 하는 것은 태양 같은 것만 말하는 것입니다. 태양하나를 모체로 약 206개의 항성이 돌고 있습니다. 전부다 따지면 4조개라고 부릅니다. 4조개의 별이 하나의 별처럼 보이는데 여러분들이 하늘을 쳐다보면서 때론 망원경으로 왕별을 보입니다. 그 왕별이 수천 억 개의 별이 모인 것이 하나의 은하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러면 그것을 먼저 한 10조 킬로미터에서 보여주고, 쫙 카메라로 빨아들이면서 태양을 비춰주고, 태양 주위를 도는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등을 보여주고, 지구에서 지구가 돌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구굴 어스에서 보이듯이 밑으로 내려와 대한민국 안양시 관양동 열린빌딩 어거스틴 파크를 비춰주고 거기에 내가 서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돌리면서 수천 장의 사진을 보여주면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 지구구나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여러분들을 지구에서 탈출시켜서 위성사진을 한번 비춰주는 것입니다. 거기서 쭉 들어가면서 하나씩 더듬으면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에 깊이 들어가는 비결은 단순히 지적인 호기심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말씀을 깨닫고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자기의 삶의 일부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매일 매일 살아가는 삶이 그 진리를 발견하는 행복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어차피 이 세상은 우리 맘대로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먼지처럼 흩어졌다 사라질 존재들입니다. 60년 후에 우리는 아무도 없습니다. 60년까지 안갈 거 같습니다. 넉넉잡고 100세 넘게 사는 분도 있을 테니까 50년만 잡으면 50년 후에는 제가 확실히 없을 것입니다.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사라져가는 존재라는 겸손한 사실을 인정하고, 그리고 그 진리를 알아가는 순간 지나는 찰라적인 존재가 영원을 알아간다는 기쁨 속에서 매일매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우리에게 죽음은 옛날에 아이들이 땅 따먹기 할 때 마당에 그어놓은 분필 자국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애들이 이럽니다. “너, 금 밟았어. 너 죽었어.”라고 난리를 치지만 그것은 게임일 뿐입니다. 진짜 죽고 사는 문제하고는 아무상관이 없는 게임입니다. 오늘이라도 평안히 죽음 속으로 걸어들어 갈 수 있는 그런 힘을 누가 준다고요? 진리가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 진리는 하나님이십니다.
김문일 집사님Q) <성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시리즈가 참으로 던지고 싶은 진리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것과 함께 들으면 좋을 교회론에 관한 시리즈가 있을까요?
목사님 A) 이 시리즈하고 짝을 이루고 떼어놓고는 따로 들을 수 없는 시리즈는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이 아주 튼튼한 건물이라면 이것은 인테리어입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것이 자신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향한 추상적으로 보이는 그 사랑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좀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성경 전체를 관통하며 흐르는 그 개념이 사실은 ‘사회’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사회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성부, 성자, 성령이시기 때문에 결코 한 인간을 두고 한 인간이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면서 그렇게 살게 하시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이루어지는 사회가 사실은 가정입니다. 그 가정이 실패했기 때문에 다시 이루어진 사회가 무엇일까요? 구약에서 가정이 실패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육의 가정이 실패했기 때문에 신약에서 새롭게 이루어지는 가정이 무엇입니까? ‘교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남편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너무 놀랍습니다.
육신의 가정은 실패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있는데 이 질서도 깨지고, 사랑도 깨지면서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었던 사람이 함께 있는 것 자체가 괴로운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함께 있게 하신 그 여자가 내게 줌으로 먹었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이 하나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제일 견디기 힘든 일은 이 지구상에 그 여자가 함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과 완전히 반대를 가져온 것입니다. 거기서 살인하고 근친상간하고 다툼이 가족들 안에 나타났고, 그것이 확장되어서 나라가 분열해서 싸우고 종족들이 싸우는 비참한 투쟁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결국은 그 씨앗이 가정의 실패를 통해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같은 엄마와 아빠 뱃속에서 형과 동생이 자랐는데 그 후손들은 원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보지 않고 서로 물고 뜯는 아주 흉악한 관계가 되는데 이는 하나님이 만드시려고 했던 인류사회와 완전히 반대된 모습입니다. 이 현상을 끝까지 추적해서 하나의 시발점으로 찾아가면 거기에는 깨어진 남편과 아내가 있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 의해서 오류를 저지를 수 있고 가정을 파괴할 수 있는 불완전한 남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족이 깨지면서 새 가족이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어느 책에서 읽을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설교들이 지금 말씀드리는 이 구도 속에서 그려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남편이 세워집니다. 이 남편에게는 아내가 있습니다. 이 아내가 완전한 아내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아내가 쓰러뜨릴 수 있는 그런 남편이 아닙니다. 아내에 의해 넘어지는 그런 남편이 아닙니다. 아내는 끊임없이 미끄러질 수도 있고 불완전하지만 불변하는 남편 때문에 아내가 온전해져가는 모습을 갖추어져가는 것입니다. 이 씨앗이 이미 구약에서부터 태동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인 여기서 꽃이 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바로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됩니다.
성경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봅니다. 몸과 지체의 비유를 들기도 하고 남편과 아내의 비유를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를 어떤 측면에서 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불완전한 아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점점 더 온전하게 되어가서 완전한 신부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결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처음 조상이 실패한 사회를 다시 만드는 것,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을 능가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인류의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면서 꽤 많이 믿었다고 자부하면서도, 굉장히 열심히 섬겼다고, 심지어는 자신의 전부를 바치면서 어마어마하게 교회를 위해 헌신하였다고 하는데도 어느 한 순간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빈털터리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고 마치 인생의 차를 몰고 가다가 시골길 진흙에 빠져서 되돌릴 수도 없고 앞으로도 못 나가는 상황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느끼는 이유는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식이 없거나 또 하나는 은혜가 없을 때입니다. 그런데 굉장히 큰 원인은 지식이 없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온 길이 어떻게 온 줄을 모르고,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내 인생에서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입니다. 이런 것에 아예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냥 그 수준에서 자기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헌신하고 열렬하게 살았지만 마치 지구 전체를 본 적 없이 살아온 것처럼 인생 전체를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냥 좋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앞서 말한 그런 상황에 빠졌을 때에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나마 기도하는 자라면, 또 은혜라도 남아 있다면 잠시 벗어나면서 살아보는데 그것도 없을 경우에는 불신자와 거의 흡사한 상태까지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저를 여러분과 함께 26년 동안 살게 하신 것은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지만 누구하고 몰려다니면서 밥 먹고 등산 다니고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을 내가 싫어하고 좋아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것 자체를 별로 안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말고도 내가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밥 먹고 놀러 다닐 사람도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단조롭고 재미없는 삶인데 저를 살게 만들었던 것은 너무 힘겨울 때가 되면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을 터뜨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제가 여러분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 찾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먼저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너무 괴로워서 목회의 고통을 느낄 때, 그래서 내가 뭘 더 참아야 되나 하는 순간에 하나님이 샘을 탁 터뜨려서 흠뻑 적셔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오는 즐거움은 교인들이 사주는 맛있는 밥이나 좋은 선물을 능가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다시 일어나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힘들다가도 하나님께서 또 터뜨려주시고 했기 때문에 이제껏 살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명심 하세요. 인생은 티끌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순간에 부스러져서 사라지는 먼지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을 향하지 않으면 인간은 그 허무함에 눈물을 앞을 가려서 맨 정신으로는 살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술에 취하고 향락에 취하여 삽니다. 대그룹의 회장의 후계자 정도 되면 뭘 못하겠습니까? 옛날에 어느 그룹을 저격한 변호사가 쓴 책에 보니까 회장의 집에서는 가족들이 모여서 파티 할 때에 손에 들려있는 포도주 병이 최소 2천만 원짜리였답니다. 뭐가 아깝겠습니까? 시쳇말로 얘기해서 먹을 것이 없겠어요? 아니면 향락이 없겠어요. 뭐가 없었겠어요? 그런데 왜 마약에 손을 댑니까? 그 먼지처럼 사라지는 인간의 허무함을 이길 수 있는 저항력이 1도 남아있지 않은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맨 정신으로는 못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임금들 가운데 굉장히 방탕한 임금이 많이 나오는데 인간적으로는 깊이 이해를 할 수밖에 없는 연민이 있습니다만 그들도 마찬가지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성계가 자신의 왕위를 차지하고 싶어서 칼을 든 이방원에게 극중에 한말이 있습니다. 그게 실제 역사에 나오는 대화인지는 모르지만 ‘이놈아,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아느냐? 불구덩이 지옥이다.’ 그랬더니 아들이 ‘저도 그 지옥에 한번 앉아보고 싶습니다.’ 했습니다. 임금들이 이 무게를 소화해 낼 능력이 없으니까 미치든지 아니면 정사를 팽개치고 주색잡기에 빠지든지 그러는 것입니다. 김정일 때부터 기쁨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펙트로 다 밝혀진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인륜적으로는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입니다. 여기서 차마 얘기 못하는데 그 실상을 알면 여러분들이 토할 정도로 무시무시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도 없고, 자기가 정신적으로 귀의할 곳도 없고, 그러니 방탕벽속에서 살아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죽음은 무서워합니다. 어떠하겠습니까? 순간순간 잊어볼 밖에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의 쾌락주의를 보면서 우리는 미친 것들, 토할 것들, 더러운 것들이라고 욕하는데 로이드 존스 목사님처럼 그렇게 보면 안 되고 문둥병과 같은 질병으로 봐야 됩니다. 그래서 체스터턴이라는 영국의 사상가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리고 있을 때 그 남자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아주 유명한 말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주 쇼킹했습니다. 한 남자가 몸을 파는 유곽에 가서 두드리는 것입니다. 두드릴 때 왜 그럴까? 그 사람 마음이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두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되는데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믿어야 되는데 믿고 싶지도 않고 제대로 알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데 영혼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잊어버리고 싶어서 사창가의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미쳐 날뛰는 쾌락의 광기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세계를 잘 모릅니다. 그 세계를 보면 여러분들은 이야기를 들으면 도저히 저녁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토가 나올 정도로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더러운 세계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 이것만 생각하게 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굶주린 존재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김희석 집사님 Q)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이 마귀 때문이 아니고 전적으로 우리 책임인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인간의 의지와 은혜와의 관계, 죄와의 관계를 설명해 주십시오. 그리고 행위가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없는 것입니까?
목사님 A) 확실하게 짧게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지금 집사님과 같은 의문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요렇게 담임목사가 오늘 주는 두 문장, 세 문장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들의 답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권하는 것은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8개로 된 시리즈가 있는데 그 시리즈는 반드시 숙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은 2006년판도 있고, <죄와 은혜의 지배> 시리즈는 2004년판인가 기억 하는데 우선 정리를 해드릴 테니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도덕행위를 결정할 때는 사탄에게 그 책임을 패스하면 안 됩니다. 내가 죄를 짓는 것은 사탄 때문이다라고 패스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말해도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이 나에게 역사하셨는데, 나는 죽어도 끝까지 하기 싫었는데도 그 가운데에 역사하셨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싫었을 수 있습니다. “너 가서 아무개 집사를 용서하고 관계를 풀어라.”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나는 죽어도 하기 싫은 겁니다. 그래서 ‘내가 왜 합니까? 그 사람이 나한테 잘못했는데, 그 사람이 내게 사과해야지 내가 왜 합니까?’라고 하며 하나님께 싫다고 했습니다. 막상 그를 만나보니까 그에게 화해할 의사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난 하기 싫어요.’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로) 그 화해가 이루어졌을 때에는 내가 기도를 하든지 기도를 안 하고 있든지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화해하라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령이 강권적으로 우리를 툭 쳐서 되었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강권적으로 하셨다고 말할 때에는 어떤 선한 일을 한 것에 대해서 영광을 자기가 취하지 않고 하나님 덕분이라는 말을 할 때에 사용하지 이 말도 함부로 쓰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이런 것을 너무 남발해서 자신은 영적으로 주님의 강권 속에서 사는 존재이고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모르는 세계에 본인은 있다고 자만할 때에 사용합니다. 이런 용도로 성도들이 많이 사용합니다. 게다가 직분을 가진 사람이나 신앙생활 오래한 사람이 그런 용어를 쓰면 그 아래까지 오염되면서 신앙 없는 사람들까지 그것을 흉내를 냅니다. 이게 바로 외식의 위험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이 오늘 제게 말씀하셨는데...” 설교 속에서 그런 말을 쓰지 말라고 해도 말 안 듣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우월감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와 똑같이 ‘사탄 때문에’라는 말도 사용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왜 둘 다 사용하면 안 되는 말입니까? 이는 우리의 정신구조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혼을 주셨습니다. 영혼을 주셨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온전한 정신 상태 속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하는 것에 대해서 기본적인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런 겁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러고 있다가 마귀가 확 들어오면 어떻게 하죠?” 그런 염려하지 마세요. 이유는 마귀도 성령님도 준비된 사람의 마음 구조를 사용하셔서 가십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감화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마음의 구조자체가 그것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구조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니, 그때에 성령이 역사하면서 내가 한 듯 성령이 하신 것이고 동시에 성령이 하신 듯 내가 한 것처럼 하나님이 다루어가십니다. 마찬가지로 마귀도 그런 식으로 우리 안에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관해서 말할 때는 “마귀 때문”이라는 말을 매우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우리의 도덕적 결정에는 사용하면 안 됩니다.
이것을 잘못 사용해서 이단으로 떨어진 종파가 대표적인 것이 김기동 마귀론 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칼빈이 아주 기가 막힌 그림을 우리에게 그려줬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우리 마음과 어떻게 일치를 이루는지를 설명한 것인데, 아주 숙련된 기수가 아주 숙련된 말을 타고 달리는 것에 비유를 했습니다. 경마장에 기수들이 있습니다. 많이 받는 사람의 연봉은 2억 가까이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사기를 칩니다. 기수가 될 사람들의 자격이 45kg 이하여야 됩니다. 이 사람들이 배우는 기술이 말과 혼신의 일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말이 누구를 실었다는 것이 거의 안 느껴지도록 말이 뛸 때 같이 뛰고 내려갈 때 같이 내려가서 한 몸처럼 붙어있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중국에 가서 보니까 보여주는데 깜짝 놀란 게 말 배 밑에 붙어서 전속력으로 달리는데 사람이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창을 들고 달리는데 말 배 밑에 숨어서 안 보이는 것입니다. 말 한 마리만 달려오는 것입니다. 배 밑에 딱 붙은 것입니다. 말 몸통 전체를 360도로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착 붙어있는 상태입니다. 거기서 물구나무까지 서면서 달립니다. 그러면서 한손으로 잡고 몸을 360도 돌리면서 창을 쓰고 심지어는 활까지 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완벽한 일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영혼과 의지의 문제를 그렇게 정리를 하셔야 합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는 그 문제를 말끔하게 정리를 합니다.
두 번째 논점은 죄가 지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뒤에 있는 힘이 마귀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성령이 이미 임한 사람, 그것을 왕국의 언어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에 이루어진 사람에게는 사단은 (움직일 수 없이 만신창이가 된 공룡과 같습니다). 사단을 공룡에 비교하자면 어마어마한 고질라 같은 공룡입니다. 그것이 모든 인간을 발톱 하나로 다 쓸어버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앞에서 사단은 머리가 박살이 나고 등뼈가 산산이 부서지고 두 팔과 두 다리는 으스러져서 곤죽처럼 누워있는 상태, 겨우 움직이는 상태의 공룡입니다. 그래서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두려움을 확 줘도 짧은 시간에 기도하면 이길 수 있고 죽음의 위협이 몰려와도 천국을 잠깐만 묵상하면 그 모든 두려움들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죄는 불신자에게는 절대적인 힘으로 지배하고 신자에게는 상대적인 힘으로 지배합니다. 상대적이라는 것은 내가 어떻게 은혜의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서 그 죄의 무게를 느끼는 정도가 달라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죄가 나를 거의 주관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은 상태 속에서 사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죄가 없느냐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이 거의 대부분 암세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10만개가 뭉치지만 않으면 10만개까지는 괜찮고, 그것이 뭉치지 않으면 상관없답니다. 그리고 그 암세포가 우리가 먹고 달리고 놀러 다니고 하는 동안에 죽기도하고 다시 살아나기도 한답니다. 제가 엑스레이를 한번 찍어 보았는데 폐에 죽은 흔적이 있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젊었을 때의 일인데 의사가 보더니 폐결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큰일 났다고 생각했는데 놀라지 말라고, 그냥 몸이 이겨서 이런 흔적만 남겼다고 합니다. 나도 전혀 몰랐습니다. 폐결핵이 있었던 것입니다. 젊었을 때였으니 건강이 어느 정도 받쳐 주니까 한쪽에서는 살아나는데 한쪽에서는 죽은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살고 또 죽고 이러다가 결국은 몸이 이겨서 암세포가 꽤 큰 무리가 형성했었는데도 스스로 다 괴멸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죄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하루 동안 인간의 생각이 10만 번이 스쳐 지나간다는데 그중에 1퍼센트만 나쁜 생각을 해도 천 번입니다. 그리고 천 번 중에서 1퍼센트만 실행에 옮겨도 열 번인데, 죄 없이 사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냥 호흡하면서 수많은 병균들이 들어와도 면역력이 좋으면 우리가 비교적 잘 살아가는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길 몸에 저항력이 없으면 아주 작은 죄에 심각한 괴멸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제가 농담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사건입니다. 교수한사람이 세미나 가서 코털을 세 개인가 네 개를 뽑았는데 그걸로 죽었습니다. 왜냐면 탁 뽑힐 때 피부가 없이 노출되었는데 그 혈관으로 염증이 생기는 겁니다. 몸이 전혀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병균이 들어와서 피가 곪기 시작합니다. 그게 패혈증이라는 것입니다. 그 병은 48시간 안에 죽습니다. 그 패혈증이 들어와서 제일 먼저 말랑말랑 하고 몸에 맛있는 부분부터 균이 번식합니다. 균이 얼마나 번식이 빠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멀쩡한 음식 하루 지나면 다 썩습니다. 들어와서 파먹습니다. 골수 그 다음에는 관절, 그 다음에는 눈동자 등 이런 것을 파먹어 버립니다. 순식간에 파먹습니다. 그래서 48시간 안에 죽습니다. 만약에 그런 이상이 있는데 시간 보내면 바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코털 세 개 뽑았다고 48시간 안에 절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주 극소수의 사람입니다. 몸의 저항력이 완전히 다운된 사람, 쉽게 이야기하면 온몸에 대상포진이 퍼질 정도 된 사람은 코털 3개 뽑아도 심각한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죄는 우리에게 들락날락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열렬한 은혜생활을 하면서 그것을 이겨나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면서도 의식 하지 못할 정도의 죄는 그 사람이 성경에 대한 곡해된 견해나 신학적으로 완전히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죄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 한 우리를 치명적으로 거꾸러뜨릴 정도의 타격은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빛으로 그 죄들을 발견하며 온전해져 가는 것입니다.
최근 나노 테크놀리지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데, 나노가 10억분에 1밀리미터입니다. 우리 눈에는 안보입니다. 전자현미경으로 봐야 보입니다. 그런데 나노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나노 기술로 개발된 물질로 인해) 우리 몸에 무슨 영향을 미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나노테크놀리지가 어마어마하게 발전해서 10억분의 1센티의 두께를 가진 물건을 10미터 짜리도 만들 수도 있고 10억분의 1의 10억분의 1을 만들 수도 있고 그것보다 더 작게 만들 수 있습니다. 무슨 문제냐 하면, 그것이 분자 속으로 뚫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들락날락합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작용을 일으키는지는 대부분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노 화장품은 - 난 안 써봤는데- 두드리면 놀랍게 흡수가 됩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 세포 속에 들어가서 무슨 일을 일으키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마리 퀴리부인이 우라늄을 발견하고 얼마 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방사선으로 온갖 건강 제품이 나왔습니다. 심지어 방사선 크림이 나왔습니다. 엄청 비쌉니다. 방사선 파이프, 먹는 방사선 물질도 나오고 그랬습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방사선에 오염되어서 암으로 죽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개가 연관관계가 있는 것은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엄청 무서운 것입니다.
주부들이 의외로 폐암환자가 많습니다. 그 이유인즉 생선구울 때 거기서 나오는 연기, 촛불에서 나오는 연기, 음식이 탈 때 나오는 연기가 나노 입자입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피부에 붙으면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분자 속으로 들어가서 핵까지 진입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의 분자구조를 망가뜨립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직 모르는데 상당히 유의미한 결과들이 흰쥐의 실험을 통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린 이유는 미세한 죄니까 별로 그렇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미세한 것으로부터 시작되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교만하지도 마십시오. ‘나는 완벽하게 그것들을 제거하고 죄에 대한 완벽한 청정인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고, 그분도 남의 죄를 짊어지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지식의 세계는 결국은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하나도 따로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서 아주 거대한 그물망처럼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새로운 사실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죄에 대한 확고한 이론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나눠지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것과 죄를 아는 것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인간을 안다는 것은 죄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선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져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만약에 공부해야 할 숙제로 생각하면 머리가 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다가 탁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덮는지 아세요? 몰라서 덮는 게 아니고 알기 싫어서 덮는 게 아닙니다. 왜냐면 하다가 많이 알았는데 조금이라도 자신이 변화되어 가고 조금이라도 그 말씀 때문에 내가 거룩해져가는 기쁨이 유지가 되면 힘들어도 계속하는데 그 힘든 것 보다는 사실은 내게 주는 기쁨이 훨씬 큰 것입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요즘은 보기 힘든데 –물론 그런 것 저는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여자들이 옛날에 뜨개질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저것을 왜 하는지, 저 시간에 기도를 하지, 라고 생각합니다. 사위, 아들, 딸의 조끼부터 시작해서 수없이 짭니다. 예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수없이 짭니다. 그것을 노동으로 생각한다면 그냥 시장에 가서 사면 더 좋을 것입니다. 시장에 가면 아주 싼 가격에 중국제, 베트남제 편물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들은 뜨개질을 합니다. 그 일 자체가 재미있는 것입니다. 뜨시던 분이 하는 말인데 그 재미는 아무도 모를 거랍니다. 이렇게 해서 한줄 완성되어서 오늘도 이만큼 짰다는 그 보람을 모를 거랍니다. 모르니까 우리는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데 그 사람은 그 재미를 알기에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 공부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공부하면서 뭔가를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권사님의 말씀처럼 그 만큼이라도 살아냈습니다. 아니 더 쉬운 말로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배우는 게 힘들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그렇게 공부하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그렇게 살기 싫은 것입니다.
나아가 좀 전에 우리 집사님이 하신 말씀 중에 많은 사람들이 하는 아주 공통적인 언급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행위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제가 정리해 드릴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어떤 신자에게 말씀에 따른 행위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럼 내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것인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위가 없기에 나는 불신자와 완전히 똑같구나.’라고 말하는 것은 또 아니잖아요?그래서 또 다시 ‘내게 그 사랑이 있나?’라고 보니 행위가 있는 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은 이렇게도 말을 못하겠고 저렇게도 말을 못하겠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행위가 있느냐”와 “내 마음에 사랑이 있느냐”를 이런 식으로 딱 갈라서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아주 일찍 남편을 여의셨습니다. 제가 7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가 47살이었고 할머니가 45살 때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저희 아버지입니다. 외아들입니다. 그렇게 살가운 분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는 굉장히 효성스러워지셔서 어머님을 너무너무 눈물겨울 정도로 끔찍이 모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다 망한 다음이었습니다. 아무튼 그 어르신이 매우 외로우셨다고 합니다. (첫 손자인 제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분과 함께 있었습니다). 저를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제 가정에 무슨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할머니 계신 서울에 남겨진 게 아니라, 엄마 아빠의 교육열 남달라서 그렇게 보내졌던 것이 아니라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있고 싶은 욕심이 있으셔서 일부러 서울에 주저앉히신 것입니다. 100퍼센트 맞습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분은 항상 저를 끌어안고 사셨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일이 생겼냐면 사위를 얻으셨습니다. 딸이 셋이 있었거든요. 첫 번째 사위를 얻으셨습니다. 남편하고 사랑에 빠져보지 못한 여인들은 사위하고 사랑에 빠집니다. 그래서 연애하는 것 같은 심정으로 돌아갑니다. 진짜 좋아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주위의 증언에 의하면 할머니가 큰 사위만 오면 소녀처럼 들뜨고 설레서 부끄러워서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첫째 사위가 진짜 영화배우처럼 생겼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서글서글하고 신앙도 있었습니다. 신앙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 열성파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추구하는 그런 신앙은 아니었습니다. 너무 웃기는 게 그 당시 가난하니까 콩엿 같은 것을 빚어가지고 식구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장독대 어디에 겨울에 숨겨놓습니다. 내가 너무 궁금해 할 때 가끔씩 두 개씩 갖다 주시는데, 죽도록 찾아도 어디에 감추셨는지 못 찾았습니다. 아무 가족들한테도 안주고 사위가 오면 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감정 중에 마음에 있는데 절대로 못 숨기는 게 두 개가 있습니다. 사랑과 미움입니다. 좋아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 이 두 개를 숨길 수 있는 사람은 연기자이거나 성인 군자 단계에 거의 올라간 사람입니다. 저도 못 숨깁니다. 제가 압니다. 제 약점을 압니다. 못 숨깁니다. 저는 싫으면 우리 집사람이 얼굴이 싸해진답니다. 저는 그런 표시를 안 내고 싶은데 그렇습니다. 아내도 표시를 냅니다. 자기도 못 내지 못합니다. 모두 그럽니다.
그러니까 그런 맥락에서 한번 사랑을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그 구조 속에는 사랑이나, 행위냐 하는 것이 절대로 나눠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통으로 보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해하라는 겁니까? 사랑이 없는데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행위를 보고 검증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행위를 하라는 게 아닙니다. 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과 행위를 하는 것이 하나가 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을 우리가 부인하게 되면 율법주의, 행위주의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장로님께서는 부부싸움을 절대 안하시는 모범적인 가정의 가장이시고 가정예배도 너무 잘 드리시지만 예를 들자면 부부가 다퉜다고 칩시다. “당신 요새 나를 사랑하기는 해?” “아니 그럼 내가 당신 사랑하지.” “사랑하긴 뭘 개코나 사랑해. 저녁때 설거지도 안 해놓고, 아침에는 쓰레기도 안 버리고 늦었다고 뛰어나가고, 그리고 퇴근할 때는 치킨 한번 사온 적이 있어?” 아내가 그렇게 이야기 할 때는 ‘설거지를 해 놔라, 치킨을 사와라, 쓰레기를 버려라, 그리하면 내가 만족하리라.’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우리는 늘 그렇게 하나로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신앙을 생각할 때만 이것을 딱 찢습니다. 그리고 자기모순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실례에서 이렇게 생각한 적은 없을 겁니다. 좀 전에 아내가 그렇게 얘기한 것에 대해 어떤 어리석은 남자가 “알았어.”하고 그날 저녁부터 그 모든 행위를 고칩니다. 치킨을 사가지고 가고, 설거지도 일찍 가서 해놓고, 아침에 쓰레기도 버립니다. (그러고는 “이제 됐어?” 합니다). 그러면 아내가 “정말 당신이 나를 너무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그렇게 말할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런 것을 안 해줘도 느껴집니다. 사랑이 멀어지고 있다는 것도 모든 것을 다 해줘도 마음속에서 찢어지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행위 하나 하나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인 자신과의 관계 전체를 한번 돌아보자는 이야기입니다).
흔히 아내들은 (사랑이 없다는 이야기보다는) 뭐를 안 해준 것을 가지고 증거를 댈 것입니다. 왜냐면 아내는 그런 식으로 밖에는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 나에 대한 사랑이 식었어.” 왜요? “설거지도 안 해 주고 그래서 그런 거야?” 그러면 아내는 그런 것만이 아니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말해봐.” 그런다고 아내는 그것을 말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경험 속에서 두 개가 절대로 찢어지지 않게 행동하고 살면서도 이상하게 신앙에 있어서 사랑과 행위가 나올 때는 자기도 평소에 그런 적이 없는데 공상 속에서 두 개를 찢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로도 못가고 저기로도 못가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미움도 그렇습니다. “당신. 요새 나 왜 미워해?” “내가 언제 미워했어?” 그러니까 “아니, 출근할 때 인사도 안하잖아. 그리고 어쩜 그렇게 부부가 되가지고 하루에 문자 한통도 안 보내. 내가 점심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퇴근하고 왜 늦게 들어왔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그리고 당신 요새 진짜 나만 미워하는 거야?” “내가 언제 미워했어?” “아니, 내가 늦게 들어왔는데 텔레비전 보면서 쳐다도 안 보고 인사도 제대로 안하잖아.” 남편이 그렇게 이야기 할 때는 그 세 가지 행동을 고치라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그걸 고쳐서 남편은 절대로 만족을 안 합니다.
한국말에 ‘미워한다’는 용례가 성경과 똑같습니다. 동양사고입니다. 미워한다는 이 말이 진짜 미워한다는 게 아니라 이런 겁니다. 아이가 둘 있습니다. 똑같이 예뻐하는데 한 아이에게 과자 하나를 줍니다. 그러면 나머지 한 아이는 “목사님은 나만 미워해.” 그러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미움의 개념입니다. 폭이 그렇게 넓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왜 나만 미워해?”라는 말은 사랑하지 않는 상태 전부가 미움입니다.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는 상태 모두가 미움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왜 나를 미워해?” “내가 언제 미워했어?” 그렇게 묻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벌써 논리가 다릅니다. “내가 언제 미워했어?”라고 하나 이는 마음에 있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미움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것(to be)을 말합니다.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언제 미워했어?”라고 하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이거 저거 요거를 고치면 이제 나를 미워하지 않겠구나.”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전달이 될까요? 절대 아닙니다.
그러면 종합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너의 처음 행위를 가져라” 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너희 행위를 감찰하라 살펴보라 소위를 살펴보라 샅샅이 조사하라” 하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불법한 행동들을 막 강타하십니다.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사람을 속이고, 거짓말하는 것을 강타하십니다. 그 얘기는 절대로 거짓말하지 말라, 이런 저런 짓 하지 말라,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봐라.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 쉽게 이야기하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사는 특별한 인간이라고 말을 하는데 너의 행위에서 나타난 것을 봐라. 도둑질하고, 거짓말 하고, 이런 죄를 짓고, 저런 행위를 하지. 그러면 결국은 네가 스스로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팩트가 아니지 않냐?” 사실은 그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유도하고 싶은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그 근원을 고민하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마당에 상추를 쭉 심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이상한 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근원을 묻게 됩니다. 그래서 그 가지들을 잘라버렸습니다. 그런데 또 나옵니다. 그러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땅 속 깊이 들어가서 뿌리를 아예 뽑아버리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네가 하나님과 특별한 사랑의 관계에 있고, 그래서 선택된 백성이라고 생각하는데 너의 행위를 조사해봐라. 그러면 이러 이런 것이 나오지 않느냐?” 그러면 그 말씀은 드러난 행동 하나 하나를 보면서 이것들을 고쳐야 되겠다고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외면으로 솟아오게 만들었던 내 마음 속에 있는 그 무엇, 다시 말해서 이 마음 안에서 나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고민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던 행위 하나, 두 개, 세 개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의 뿌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산에 나무가 자랍니다. 그런데 이것을 옛날에는 함부로 벨 수가 없었습니다. 뭘 심으려고 하는데 그곳에 나무가 자라는 것입니다. 벨 수가 없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어떻게 했냐면 드릴을 가지고 가서 구멍을 냅니다. 뿌리 쪽에 구멍을 열 댓 개 낸 다음 거기에 후추 알갱이를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그 나무가 한 번에 죽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고사 하면서 죽어버립니다. 뿌리가 죽으면 그 담에 그 위에 무성하던 나무 가지와 줄기와 모든 것들이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말씀의 빛을 내게 비추니까 내가 거짓말도 하고, 미워하기도 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없애려고 하니까 될 때도 있었는데 완벽하게 안 되고, 될 때도 있는 것 같았지만 결국 궁극적으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듬어 가보면 도저히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뿌리가 내안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게 하나님에 대한 미움입니다. 이 미움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사랑은 마치 우리 할머니가 사위에게 했던 것처럼 아무에게도 안 주던 콩엿을 주고 싶고, 물 한 그릇도 쟁반에 받쳐서 주고 싶고, 맛있는 것을 해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뭘 해주고 싶은 것이 노력에 의해서 나온다기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그 자체가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할머니께서 저도 사랑하셨는데 사위에 대한 사랑은 아들과 딸에는 비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잘 몰랐는데 고모들의 증언에 의하면 거의 연애하는 분 같을 정도로 그렇게 폭 빠져서 물불을 안 가릴 정도로 희생적이고 헌신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분에게 아마 재산이 있었으면 아마 사위에게 물려주셨을 것입니다. 그럴 정도였습니다.
정리하자면 이 모든 것들은 결국은 모두 도구에 불과하고 내가 이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근원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아가는 사람들은 “난 고쳤는데, 넌 고쳤어?” 이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를 볼뿐입니다. 남의 악에 거품을 물고 마치 원수진 것처럼 덤벼드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그 사람을 움직이는 원리가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의 죄에 대해서 관용하라는 뜻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기를 돌아보라는 뜻입니다.
오늘 너무 이상한 날이었습니다. 엄청나게 일이 많아서 오늘은 제가 일부러 이렇게 세 번 건너 띄었습니다. 아침부터 마음이 여기를 와야 된다는 생각에 어제부터 마음이 뛰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여기 오기 위해서 여섯 시 삼분에 모든 일을 끝내고 목욕재계 하고 올라온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를 여기를 가라고 그러셨을까 생각했는데 결정적으로 너무 중요한 것들을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수 있게 하시려고 저를 보내신 것 같습니다. 사랑은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손녀 사랑할 때하고 똑 같은 것 같습니다. 집에서 나오면 잘 안 들어갔는데 손녀가 있으면 너무 집에 가고 싶고 뭐든지 다 주고 싶고 한번 살짝 웃어주는 그것을 위해서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봉사를 기꺼이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참고해야 될 것은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빠질 정도로 사랑할만한 관계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언젠가 아주 굉장히 빠른 시간 내로, 생각보다 빨리 승리를 하게 해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께 드릴 선물이자 이것에 대한 가장 좋은 답으로 찬양 한 소절만 하겠습니다.
(찬양)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음이 유혹 흔들어도 무너지질 않네.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