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이제 성경적으로 볼 때에 하나님이 인간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셨느냐? 에 따라서 이제 세 시대로 구분을 합니다. 그래서 뭐냐하면 구약의 시대가 있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계시던 그 시대가 있고 그 다음에 부활하고 승천하신 다음에 성령님이 오셔서 계시던 시대가 있고 이렇게 세 시대로 나누는데 첫 번째 시대에는 god upper us 우리 위에 하나님이 계시던 시대고 그 다음에 두 번째 시대는 god with us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던 시대고 그 다음에 세 번째 시대는 god in us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던 시대다 그러죠. 그래서 구약에 시대에는 하나님이 당신을 아버지로서 자기에 백성들에게 많이 계시해 주셨지만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느끼는 것은 참 보통 신앙이 아니면 힘들었을 것이에요. 그죠? 율법을 우리에게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여러모로 자기 백성들에게 은총과 긍률을 베푸시는 것은 틀림이 없었지만 무엇인가 하나님에 엄격하신 경륜 속에서 거기서 하나님에 엄격하심을 능가하는 아버지로서의 자비와 인자 그 은혜를 읽어내고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면서 사는 것은 보통신앙이 아니였다 이거죠. 그 이유 중에 하난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에는 하나님이 너무 높고 거룩하고 그리고 창조주로서의 위엄을 갖추신 분이시라고 하는 인식이 그 분을 아버지라고 느끼는 것을 참 쉽지 않게 했을 것이다 라는 거죠.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하나님이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심에 있어서 아주 파격적인 것이였죠. 그러나 근본적으로 신이 신이 인간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왔다 라고 하는 것은 파격적인 것이거든요. 그러니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인간을 신이라고 격상시키는 일들은 인간에 종교사 속에서 늘 있는 일이지만 하나님이라고 이름하고 있는 그 분이 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상 본체이신 그분이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라고 하는 것은 파격적인 것이였단 말이죠. 그렇게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는 그 파격적인 하나님에 역사는 인간들로 하여금 좀 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느끼게 하기 위함이였다. 라는 것이죠. 그게 무슨 얘기냐 하면 어차피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 말씀해 주신 바에 따르면 예수님 자신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는 아버지 하나님께 갈자가 없었잖아요. 그런데 그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들 저 높이 계신 분이기 때문에 그 분을 아버지라고 느끼는 것이 웬만한 사람으로는 쉽지가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는 예수님이 사람에 몸을 입고 오셔서 보이지 않는 그 아버지가 우리를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이 어떤 사랑인고 그리고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고 어던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고 어떻게 기도하기를 원하시고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생생하게 우리와 한 혈육을 가지신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죠. 그러니깐 이보다 더 친절할 수 없다는 것. 이보다 더 우리에게 생생하게 하나님에 사랑과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로서의 그 마음과 이런 것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들이 없었다 라는 것이죠. 그렇게 예수님이 이제 이 세상에 오신 거에요.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시대였죠. 그래서 예수님이 그렇게 혈육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에 자녀라고 하는 사실이 더 생생하게 나는 거죠. 왜 하나님과 본체이신 그분이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보면서 비로소 우리를 향한 그 막연하고 그리고 두렵던 하나님에 그 사랑이 이제는 굉장히 친근하게 다가오고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섬기시던 그 삶에 모습 속에서 그 분에 슬픔과 고통 기쁨과 환희 인간의 향한 애정과 눈물 기대 이런 모든 것 속에서 비로소 인간들은 생생하게 하나님이 단지 하늘에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 계셔서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인간에 삶 하나하나에 다 개입하시고 그리고 그 삶을 통해서 당신 자신이 우리들에 마음속에 기억되고 싶어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인간들과 예수님을 하나 되게 하심으로써 볼 수 없었던 아버지에 사랑을 생생하게 보게하고 그래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그리하신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깐 성탄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에 우리에게 믿음 주시기 위한 하나님에 아주 세심한 배려라고 우리가 그렇게 믿을 수 있는 것이죠. 두 번째는 그렇게 육신을 입고 오신 또 하나에 이유가 사망으로 말미암아 마귀를 멸하려 하심이니라 이거거든요. 그래서 히랍어 성경에 보면은 사망이 그를 죽음으로 죽음에 이르기 까지 파멸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돼있거든요. 그러니깐 첫 번째 나오는 이 사망은 예수님에 십자가에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두 번째 나오는 사망은 마귀에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거든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이제 이 마귀가 두 번 죽는 거에요. 죽는다는 의미가 이상하지만 골로셋에 보면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정사와 의문에 쓴 것들을 모두 무장 해제하셨다 라는 말씀이 나와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들을 위해서 구속주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마귀가 무장 해제 당하는 거에요. 누구에게? 믿는 사람들에게 무장 해제 당하는 거죠. 전에는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죄와 사망에 법이 사람들을 영혼을 지배하고 삶을 지배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이후로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기만 하면 자기 속에 있는 죄와 사망에 법이 깨트려 지는 거예요. 전에는 그 법이 자동적으로 순종하고 얽매여서 살았는데 이제는 생명과 성령에 법이 그들을 주관해서 더 이상 마귀가 자기 안에 역사 할수 없게 하는 그런 생명에 강력한 원리가 심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깐 실질적으로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은혜 안에서 살면 실질적으로 그들에게는 마귀가 말하자면 멸해진 것과 같다 이거죠. 그런 의미에서 첫 번째 죽은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결국은 마귀가 궁극적인 심판을 받을 날이 가까이 다가 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가 결국은 하나님을 거스리다 그 하나님께 대적하던 그 사탄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께 참소한다 하나님께 대든다 그 뜻이거든요. 그런 자신에 이름을 따라 살던 많은 일들을 이제 완전히 끝내고 그리고 영원히 마귀에 일과 그 다음에 그 마귀 자체를 멸하시는 심판에 이르시게 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거죠. 그래서 요한일서에도 보면 예수님이 오신 것은 마귀에 일을 멸하려 하심이다 라고 하죠.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십자가에 죽으심이 마귀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 삶을 끊임없이 예수님이 사람에 몸을 입고 오신 것을 묵상하면서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부지런히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 신자에 임무에요.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 깊이만큼 하나님을 알아 가는 거죠. 주님을 아는 것 만큼 하나님 아버지 성품을 배워가고 그만큼 신앙 안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에 생애를 통해 하나님에 성품을 배우면서 우리들이 좀 더 온전한 신자가 되어가고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는 역사하는 마귀에 모든 역사들도 종식시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