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를 두려워서 일생에 메여 종노릇 하는 자들을 놔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육신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라는 거거든요. 죽기 두려운데 일생에 메여 종노릇한다 이 무슨 의미냐 하면은 죽는 것이 두려워서 일생에 메여서 사탄에게 종노릇하면서 죄에 지배 아래 살아가는 인간에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죽기를 두려워하는 것과 그렇게 사탄에 종노릇 하는것 죄에 노예가 되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거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오늘날 살아가는 이 현세와 현세가 이생이 전부가 아니고 이거는 하나에 거처 가는 과정일 뿐이고 궁극적으로 영원한 세계가 있다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할 때에 그때에 오늘 살아가는 이 현세가 미래를 위한 준비에 기간이 되는 거죠. 그래서 신앙 성립을 하는 거거든요. 그렇다면은 현세가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곳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이 현세는 영원한 내세를 준비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할 때에는 목표자체가 차이가 나니깐 똑같은 삶이 될 수가 없는 거죠. 현세를 살아가면서 가장 커다란 문제는 사실 죽는 거거든요 그죠. 그래서 죽는 것이 가장 큰 문제에요. 왜냐하면 현세로 끝나는 거니깐 인생은 이생으로 끝나는 거니깐 죽는게 제일 무서운거죠. 그런데 그 죽음이라는 카드를 누가 가지고 있냐 하면은 사탄이 가지고 있는 거거든요. 죽는 것이 가장 무서운데 그렇게 되면은 결국은 죽는 것이 가장 무섭기 때문이 인간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는 잊어버리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뭐냐 하면 둘 중에 하난데 죽음에 대해서 체념을 갖던지 체념하던지 죽어야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체념을 하고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 들이던지 아니면은 그 죽음에 공포를 잊기 위해서 뭔가 이 세상에 쾌락에 빠지는 거 그것이 말하자면 죽음에 공포를 잊어버리는 훌륭한 두 방법중 하나라 이거죠. 그렇게 되니깐 이제 사람들에 삶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그런 죽음에 직면하는 것을 무서우니깐 그러니깐 사람들이 현세에 삶에 더 열중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렇게 열중하는 동안에는 말하자면은 어떤 두려움과 공포를 잊어버리는 거거든요. 그렇게 살아가는 거에요. 그래서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들이 가까운 사람들이 죽으면 제일 먼저 가야 됩니다. 그리고 다른 일은 못해도 상이 났을 때에는 친소를 불문하고 친하고 거리가 멀고를 불문하고 관도할 정도로 예를 갖추고 잘 해줘야 합니다. 불쌍하니깐. 그리고 그게 일생동안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어려운 때에 자기를 위로해 준것에 대해서 잊혀지지 않는데 그러니깐 마땅히 찾아 봐야할 상가를 찾아 보지 않는 것은 인간의 도리를 저버리는 것이죠. 저도 사실 그런거 잘 못했는데 세월이 흐르고 보면은 그런게 얼마나 중요한가 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근데 연세가 많이 든 분들은 이 상가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결례가 아닙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됐을 때 약 칠십이 넘어야 겠지만은 그렇게 연로 하신 분들이 아무리 가까워도 상가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실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죽음에 직면하는 그 자체를 인간이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두려워 하니깐 서로 양해를 하면서 살아가는 거죠. 근데 그러니깐 인간들이 더 현세적인 일에 몰두 하는 거에요. 그러니깐 그걸 애써서 잊으려는 거죠.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이 결국은 종노릇 하면서 살아가는 거죠. 왜냐하면 자신이 아주 공정하게 판단한다면 하나님에 말씀에 입각해 공정하게 판단한다면 자기에 여기에서 좀 깊이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돌이키고 그리고 이 세상은 영원한 세상을 준비하는 준비 장소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인생이라는 기회를 영원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사용해야 되거든요. 근데 그렇게 안한다 이거죠. 그게 이유가 뭐 때문이냐? 죽음 때문이죠. 그러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이제 두렵지 않은거죠. 왜냐하면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다시 살것이다 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영원한 세상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에 또 부활 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죽음이 우리를 위협해서 그 죽음 때문에 쾌락에 몰두하고 죄에 몰두하고 이 죽음에 공포를 잊어버리기 위해서 매여서 종노릇 하듯이 그렇게 그 악에 빠지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거죠.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거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 세상에서 다시 살아나시고 이 세상에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증거를 보여주시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승천하심으로써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자면은 희망이 되어주신 것이죠. 아 이렇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면 죽음이 우리를 삼키지 못하는 구나. 죽어도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구나. 죽어도 죽음 이후에 영원한 세계가 있어서 그래서 이 땅에 슬픔과 괴로움을 잊고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할 수 있구나. 라고 하는 소망을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확실하게 넣어 주신 거에요. 그러니깐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렇게 하시는 그 일은 천사들을 붙들어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을 붙들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다. 바로 그 일을 이루시려면 예수님은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 했다 이 얘기죠. 그래서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천사보다도 못한 분인 것처럼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는데도 하나님이 자기 아들 성자를 그렇게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은 바로 구체적으로 이런 목적을 위해서 내려 보내신 거라 이거죠. 그래서 어떻게 그분이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지 않을 수 있겠으며 그분이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못하다 하는 오해를 사람들로부터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꼭 이루고 싶으셨던 일이 있으셨고 그 일은 바로 천사들을 위한 일이 아니라 인간인 우리 자신을 그 죄에서 건져 구속하시기 위함이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였다 라는 것을 여기에서 말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들이 이러한 성경에 진술 이러한 성경에 교리를 접하면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건 뭐냐하면 예수님이 사람에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온 사건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이였는가 얼마나 엄청난 사건이였는가. 더군다나 하나님이신 예수님 그분이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 일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였는가. 하나님에 아들이신 그분이 사람에 몸을 입으신 그 자체가 얼마나 경비하도록 낮아진 일이였는가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이신 그분을 천사와 비교할 수 있겠으면 어떻게 하나님이신 그 분을 천사와 대조하면서 천사보다는 좀 못하시네. 인간이 이런 평가를 할 수 있냐? 이럴수 있는 위험을 모두 알고 계시면서도 예수님은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실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왜? 바로 앞에서 열거한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예수님이 사람에 몸을 입을 수밖에 없으셨던 거죠. 이건 만약에 예수님이 천사들보다 잠시 못하게 여김을 받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이였다. 그러니깐 복음을 알고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단지 사람에 몸을 입으셔서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시구나 그리고 이 세상에 있으실 때는 천사들보다 힘이 약하셨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연약함을 죄는 없으셨지만 어쨌든 다 가지고 계셨구나. 이런 걸 보면서 평가하지 말고 왜? 왜? 그럴 이유가 없는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신 그 성자가 왜 그런 오해를 받으시면서 까지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는지 그걸 생각하라. 너희들 때문이다. 너희 인간들 때문이다. 그래서 성탄절을 이렇게 맞을 때마다 항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마냥 기뻐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거예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내벼려 두지 아니하고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구원에 새 길을 여셨다는 점에서는 한없이 기쁘지만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같이 천한 인간을 위해서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대목에서는 우리들이 깊이 마음아파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에 몸을 입고 오신 그 자체가 우리 때문이였다고 생각하고 그 속에서 무한한 우리에 구원을 위한 무한한 하나님에 사랑을 느끼면서 살아가야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