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 17일 새벽설교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9).
그래서 결국 이제 사도는 배교하는 문제를 믿음의 문제로 규정을 짓는거죠. 그래서 이 믿음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믿음은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믿음보다는 훨씬 더 포괄적이고 깊어요. 우리는 믿음 그 자체가 다분히 심리학적인 믿음이거든요. 그래서 어떤 사실을 내가 믿는다, 그렇게 하면 그것이 심리적으로 믿으면 믿음이다라고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죠.
이번에 제가 중국 갔을때도 봤는데, 그 어떻게 하는지 현지 사람들 얘길 들으니까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탑을 말이죠. 집회를 마치고 잠깐 하루인가 여유가 있어서 잠깐 나왔는데 탑을 한 20m 쯤 될래나 세워놓고, 거기다 쇠줄을 연결을 하고 위에 오토바이가 지나가요. 오토바이가 지나가는데 그 운전하는 사람이 누구냐면 곰이예요, 곰. 사람이라고 하면 안되는데 운전을 하는데 그 운전수가 곰이예요. 곰이 그 위에서 외줄로 오토바이를 타고 가요. 그리고 그 곰 머리에는 원숭이가 앉아서 가. 신기하잖아요. 내가 이 얘기를 왜 드리냐면 말이죠 그건 제가 직접 가보지는 않았어요. 저도 들은 이야기인데 미국은 아주 폭 넓게 인간들의 이 마술이나 실험, 이런 것들을 광범위하게 허가를 내줍니다. 그래서 나이아가라같은데서 실험을 하고 하는데 커다란 높은 계곡이 있는데, 거기다 이렇게 쇠줄을 달고 진짜 거기 사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간답니다, 외줄로. 그래서 이제 저쪽에서 건너오면 그럼 이쪽의 사람들이 그걸 보러왔다가 돌아오면 돈을 이렇게 걷어서 주고 그런다고 그래요. 그래서 이제 그 사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데, “나 여기 또한번 건너가려고 하는데 당신들 내가 저기 건너갔다올 수 있을거라고 믿느냐?” 하니까, 모두 “아, 물론 믿는다고” 오랫동안 거기에서 그 사람이 했으니까 아우 믿는다고 어떤 사람이 제일 큰소리로 “나도 믿는다”고 그러더래. 그래서 그 사람보고 “내 뒤에 타고 같이 갈래냐?” 그 사람이 탔을까요? 안탔을까요? 안탔지. 성경에서 보면 그건 믿음이 아니라 이거죠. 우리는 그걸 믿음이라고 그러는데 성경에서는 믿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죠. 믿음은 trust, 자기를 다 맡길 수 있을 때 그것이 성경에서 얘기하는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우리는 흔히 이야기하잖아요. 믿음은 좋은데 믿음만 좋아. 그런건 성경은 굉장히 낯선 거라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 축을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옮겼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가만 생각해보니까 나도 안탔을거 같애요. 그걸 왜 타요. 그냥 믿으면 되지. 갔다 돌아오면 구경하고 한 $5 모자에다 집어 넣어주면 행복한데 그걸 왜 타고, 그 오줌 마려운 것을 참고, 그 계곡을 내려다 보고, 가슴을 졸이면서 거기에 가냐 이거죠. 이건 trust가 없다는거죠. 내어맡기는 그 온전한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근데 이것을 가만히 보면 말이죠. 이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잃어버린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무슨뜻인지 들어보세요. 이런 이야기입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그래서 그들은 그 하나님을 온전히 그 절대적인 의존 속에서 살게 히셨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죠? 그 절대적인 의존 속에서 살게 했는데, 그게 절대적인 순종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절대적인 순종 속에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이 바로 의였어요. 근데 불순종함으로써 그 의를 잃어버린것입니다. 그게 불의예요. 그런데 그렇게 불순종하게 된 원인이 뭐냐면 절대 의존의 관계를 버린거예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독립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절대의존의 마음을 버리고 독립하고자 했던 것이죠. 그런데 독립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독립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속성이예요. 모든 것은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것이기 때문에 만들어만 놓으시고, 하나님이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놓은 모든 창조물들을 주님이 돌보시는거예요.
여러분 인제 연세드시면서 언제 섭섭해지시냐면 말이죠. 자녀들이 다 커서 이제 시집 장가 가고, 부모인 우리의 도움을 별로 필요하지 않고 귀찮게 여길때 그때에 외로워지게 되는거예요. 그래서 부부가 사이가 좋아야 해요. 그러면 아이들이 그래도 부부가 서로 기대고 살면 괜찮은데 부부 사이도 찬바람이 부는데 아이들까지 그러면 인제 인생의 살맛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기댐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고, 부모는 기댐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데 아이들이 독립을 하게 되는거죠.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 할머니하고 늘 가깝게 그렇게 몇 십년을 살았는데 부모님 지방에 계시니까 그런데 부모님 올라오셨어요. 그때는 사업도 잘 되시고 해서 집을 두 채나 가지고 계셨어요. 그러니까 “할머니 힘들게 하지 말고 와라.” 내 생각에 단순하게 할머니하고 있는 집은 좀 누추하고 거기로 가면 내 공부방이라도 하나 주니까 “그럼 그렇게 하겠다”고 보따리를 싸가지고 가는데, 할머니가 어떻게 슬퍼하시는지 그 며칠 밤잠을 못 주무시고, 그렇게 눈물을 흘리시는거야. 당신이 가라고 그래놓고, 그러시는거죠.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예요.
인간은 그렇게 독립할 수가 없거든요. 사람은 가서 독립해서 진짜로 살수 있지만, 인간은 그렇게 안되는거죠. 그런데 그걸 잃어버린거예요. 그게 불의예요. 그게 죄예요.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결국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거스리는 동기가 되는 거예요. 그런식으로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관계를 회복하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거죠? 다시 절대적인 순종이 필요한데, 그런 절대적인 순종을 이루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이 필요한거죠.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이 들게끔 만드는 것이 뭐냐면 믿음이라는 거죠. 그 믿음을 통해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으로 인간이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 심심한데 오후서부터 믿음을 가져봐? 그게 낫겠네. 그런다고 해서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예요. 영혼의 변화없이는 그런 믿음이 생겨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우리들이 생각을 해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 공식을 여기에다가 대입하면 지금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 것인가요? 배교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다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의존의 마음이 있을 때, 그때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했을때 인간은 배교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물러가 침륜에 빠질자가 아니다. 침륜이란 것은 파멸과 특별히 도덕적인 파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러가서 뒤로 물러가는것, 우리가 물러가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파멸에 빠질자들이 아니요, 영혼을 구원하는 그 믿음을 가진 자니라.
그래서 이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이 도대체 뭐냐? 이건 뭐냐면 믿음은 한편으로는 현재적으로 그 사람이 그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안가졌는가라고 하는 것이 과거적으로 확인이 되고 한편으로는, 또 하나는 현재적으로 확인이 필요한것이죠. 무슨 뜻이냐면 우리 흔히 그런 생각을 하잖하요. 아, 내가 옛날에 주님을 영접했는데 신앙생활에서 실패할리가 없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구원을 확신한다는 면에서는 바람직한 것이죠. 그러나 동시에 그것때문에 오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 안일해지거나 마음을 턱 놓는 그런 것이 되는 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바는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진정으로 확신하게 될 때에 아직 구원을 이루지 못한 사람처럼 몸부림치게 된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세요? 그게 무슨뜻이냐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깊이 확신하게 될 때 그것 때문에 또 다른 구원인 즉각적인 구원을 우리가 받아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오늘 우리가 또 다른 점진적인 구원 즉, 우리의 성화를 저절로 완성되는 것처럼 마음을 놓고 안일해 지는 것은 진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즉각적인 구원이 확실하게 자신에게 임한 사람, 즉각적인 확실한 구원을 자신이 받게 된 사람이, 그 사람은 자신이 분투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이 성화의 구원을 이룰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헌신하게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걸 통해서 구원을 얻어보겠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즉각적으로 구원을 얻었다면 내가 이 성화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라고 생각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두 가지 구원이 모두 성취 되었을때 그때 그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구원을 과거 시제로 말하고, 즉각적인 구원을, 현재시제로 또 말하고, 구원을 이루어 가는 거죠. 이게 성화예요. 미래의 시제로 말해요. 영화예요. 그래서 그 과거에 내가 즉각적으로 구원받은 것이 정말 분명한 사람들은 미래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구원받은 자로서 이루어갈 또다른 점진적인 구원인 성화와 그리고 구원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를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그런 소망이 있다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되냐? 그러면 결코 뒤로 물러가지 않는다는 것이죠. 왜? 지금 내가 이루어가야 할 구원이 있고 과거에는 내가 분명하게 구원의 확신이 있고, 지금 이뤄가야 될 구원이 있고 내가 만약 배교하게 된다면 결국은 과거의 그 믿음도 내가 믿었다고 생각할 뿐이지 진실한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믿음의 파산한 자가 되는데 미래의 구원도 없는데 그런데 내가 어떻게 배교할 수 있겠는가하며 그러면서 온전한 믿음을 추구하고 결국은 승리하게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11장에 가서 그 위대한 믿음의 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예요. 그래서 매일매일 어제는 어제 믿음으로 살았어요. 오늘은 오늘의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지켜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아버지 앞에 간구하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래서 저희들이 더 온전하게 주님을 믿고 의뢰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구원을 헛되이 여기지 아니하고 더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도록 힘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