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 18일 새벽설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히 11:1-2).
그러면서 이제 11장에서 그 위대한 믿음의 장이라고 하는 것이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11장 전체에서 그 믿음의 정의와 그것의 위대함과 그리고 특별히 역사적으로 그 믿음을 따라 살았던 사람의 이름이 거명되면서 그러면서 이제 사도가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믿음을 따라 살도록 강력하게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정말 강력한 그런 놀라움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시작하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이 말의 의미가 무슨 뜻이냐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허상과 반대잖아요. 허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뭐라고 그럴까, 상상 속에 존재하는 허구적인 것이예요. 그런데 실상은 진짜로 존재하는 거라는 거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가짜, 허구, 이런게 아니라 진짜다, 그리고 실제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증거는 우리에게 어떤 힘이 있냐면 믿어질 수 없는 것들을 믿게하는 힘이 있죠. 증거가 바로 그런 것이 그래서 어떤 일에 대해서 확신이 안 생기는데 증거를 딱 보면 아, 이 사람이 여기 왔다 갔구나 아니면 이런 저런 일이 일어났었구나, 그거를 알게되고 또 확인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잖아요. 그렇죠? 그게 바로 다름이 아닌 증거란 뜻이예요.
그러면 전체적으로 이제 생각을 하자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이게 무슨 뜻이냐면 믿음이 가져다 주는 효과같은걸 이야기하는 거죠. 믿음은 이렇게 바라는 것, 내가 그랬으면 좋겠다, 또 그러길 희망한다, 또 내가 그렇게 되길 믿는다라고 하는 것들을 아직 발생하지 않았고, 아직 내가 누릴 수 없는 것들을 미리 앞당겨서 경험하게 하는 선취적인 효과가 믿음 속에 있다는 이야기예요.
그게 무슨 뜻이냐면 이렇잖아요. 어떤 사람들이 생전 처음으로 비행기도 생전 처음 타보게 됐고 미국도 처음 가보게 되었어요. 비행기 표를 이제 다 사놨어요. 그러면 그 비행기 표를 보고 마음 속에 끊임없이 그 비행기를 타는 것을 그리고, 그 다음에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가면 어떤 나라가 있을까? 정보가 없는게 아니라 뉴욕의 사진도 봤고, 워싱턴의 그림도 보고 신문에서 소식도 들었어요. 그러면 거길로 가 있는 거 같은걸 비행기 표 속에는 사진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만, 텔레비전이 달린것도 아니지만, 비행기표를 보면서 그것을 끊임없이 연상해서 그것을 미리 선취적으로 앞당겨서 그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이 그런 효과가 있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는 말이예요.
예를 들자면, 우리가 일제시대때 그렇게 심한 박해를 받고, 그리고 공한 치하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길을 걸어갔어요.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더 꿋꿋하게 더 많은 사람들이 일사각오의 정신을 가지고 그렇게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그 놀라운 힘들이 어디에서 나왔냐면 바로 이 믿음에서 나온거예요. 무슨 믿음이냐? 믿음은 단순히 지금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하겠다라고 하는 인간적인 오기같은 것이 아니예요.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신자에게 약속한 것을 믿는 믿음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 믿음이 생기기가 굉장히 힘든거죠. 더우기 전 포괄적인 그래서 자신의 삶 전반에 걸쳐서 믿음으로 산다라고 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정한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해지는 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그 사랑 그걸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를 알 때 비로소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우리에게 주실 지를 굳게 믿는다. 근데 그 땅을 약속으로 주셨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그런 믿음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약속, 거기에 붙들린 신앙이 그 사람들로 하여금 이제 신앙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는데 그게 뭐냐? 그게 무엇이냐? 그게 다름이 아닌 그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으니 우리도 주를 위해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는 십자가 신앙과 또 하나는 우리가 그렇게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리라고하는 이 뭐라고 그럴까, 부활사상? 천국사상,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담대하게 박해와 순교의 위협을 이기게 만들었던 것이예요. 그렇게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고난을 받으면서도 선취적으로 천국을 누리는 거예요. 이런 사람들을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으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은 2000년 전에 끝났는데 그것을 지금 내가 시간을 초월해서 느끼는 거예요.
아주 더 생생한 이야기를 하나 해드려 볼께요.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때 회심을 경험하게 되면 십자가 사건이 200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인데 그게 오늘 바로 내앞에서 내 안에서 재연된다는 말이죠. 그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생각하고, 가슴 아파하고, 내 죄때문입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뉘우치게 될 때에 그것이 2000년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한 유감 표명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가슴아픔이란 말이죠.
그래서 믿음은 이처럼 아직 오지 않은 것들에 대한 선취적인 효과도 있고, 또한 믿음은 이미 일어난 것에 대한 후취적인 효과도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라고 하는 이 사건,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라고 하는 사건에 대한 후취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또한 그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지금 죽으면 내가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하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선취적인 효과를 그 믿음속에서 보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예전에 믿었던 앙상한 추억만 남고, 믿음이 없으면 미래의 일어날 일들에 대한 담대한 확신도 사라지게 되고, 그러면서 어두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사도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믿음은 자기 암시가 아니예요. 나 성공할거야 이러는 자기 암시가 아니고, 그런 적극적 사고방식과는 다르고,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믿음이예요. 예를 들자면, 요셉이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절하는 것을 꿈꿨어요. 그리고 그 꿈을 가슴에 간직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예요. 자기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엄마,아빠까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어서 절하게 하고 싶은 그런 사회적인 지위를 꿈꾸는 것이 아니었죠. 약속이었단 말이죠. 그 당시에는 성경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람들이 살았어요. 그 약속의 말씀을 받았어요. 그것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알 리가 없었지만, 그러나 마음 속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잘 몰랐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자기를 지극히 높이셔서 형제와 그리고 내 부모들이 나에게 경배하지 않으면 안되는 뭔가 그런 일들을 나에게 주실 것이고, 그리고 그것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 관계 있다라고 하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갖게되니까 삶을 전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내동댕이 쳐지면서 살아갈 때, 항상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약속의 비전을 붙들게 되고, 그러니까 섭리 속에서 지금은 이렇게 고난을 당하고 있고, 이 고난이 어떻게 주님이 내게 주신 그 최종적인 꿈과 연결되는지는 모르지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 섭리를 따라서 내가 살다가 보면 반드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신앙이 고난도 이기게 만들고, 모함도 이기게 만들고, 음모도 이기게 만들고, 그래서 결국은 신앙을 따라서 살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는 의미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보지못하는 것들의 증거요 이로써 선진들이 증거를 입었으니라”. 그러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이야기해요. 그래서 알았기 때문에 믿게되는 것을 말하고, 또 믿게 되었기 때문에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알게 되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있고, 그 다음에 믿었기 때문에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있어요. 그래서 두 가지가 다 필요해요. 이성을 통해서 믿음으로 가기도 하고 믿음을 통해서 비로소 이성으로 오기도 해요. 그런데 이성을 통해서 믿음으로 가는 것들은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것들이예요. 그래서 믿음을 가지려면 이성을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부지런히 사용함으로써 믿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결코 이성을 통해서 믿음을 얻게 되지만, 그러나 그 이성을 신앙보다 훨씬 더 중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니까 이성의 활동을 통해서 지식을 얻고, 그 지식이 참된 것이라는 사실을 자기가 받아들일 때 그때에 그 논리적 추론을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그것이 우리 속에 믿음이 되어서 계속 쌓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믿어야지만 비로소 알게된다는 이야기도 나와요. 어떤 것들이 있냐면, 논리적으로 추론될 수 없는 것들, 예를 들자면 천지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 어떻게 논리적으로 추론하겠어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것, 그리스도 예수께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셔서 이 세상에 오신것, 이런 것들은 인과관계로 얽혀있는 이 세상의 사물로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든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안에 역사하지 않으면 믿어 질 수 없는 거라는 거죠. 그래서 이것을 가르켜서 성령의 내증이라고 부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믿어지게 하셔서 바깥에서 믿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믿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때에 믿고자 하는 사람은 내가 믿기를 원하는데 믿어지지 않습니다, 내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말하지만, 안믿으려는 사람들은 회의와 불신앙은 달라요. 회의는 잘 믿지 못하고, 불신앙은 그걸 안 믿으려고 하는 고집이고. 회의는 믿으려고 하는데 잘 안되는 거예요. 그런데 불신앙은 고집이예요. 그래서 그것을 안 믿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 우리는 보지 못해요. 천지가 창조된 것 다시 경험할 수도 없고, 주님이 처녀의 몸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도 우리들이 입증할 수도 없는 그런 거예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입증할 수 없으나 입증하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 토대 위에서 믿음의 선진들이 증거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내가 믿는 그 믿음이 오히려 증거가 되어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왜? 내가 그렇게 믿게 됨으로, 믿음으로 그 믿음이 나에게 증거하였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는다, 그리고 나는 성경의 진리를 믿는다, 이 고백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 위에 믿음을 더해주셔서 그 다음서부터 우리들이 논리적으로 추론이 가능한 많은 축복들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일단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말씀들을 진리로 믿으며 받아들일 때 우리의 이성이 열리며 이성으로 입증할 수 없으나, 이성으로 입증된 지식을 믿는 것보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확고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토대위에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기도 하고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싸우기도 했던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지켜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이처럼 간구하고 기도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에도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고 저희들 한사람, 한사람 아버지 앞에 새롭게 해 주옵소서. 믿음을 통해 우리들이 알게 하시고 안 것을 통해 우리들이 주님의 뜻대로 살도록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