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9일 새벽예배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히 12:3)
녹취자: 윤은정
그러면서 이제 사도는 ‘예수님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이시다. 그래서 그런 분으로써 이제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그렇게 예수님에 관한 사실을 설명한 다음에 그걸 우리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그걸 우리에게 적용을 해서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뭐라고 하냐 면은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그 앞에 보면은 ‘예수를 바라보자’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면은 ‘생각하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바라보면서 사는 것은 믿음이 온전해지는 비결입니다. 그리고 11장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치열한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말할 수 없는 필수적인 비결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다는 겁니다. 말은 얼마나 쉽습니까? ‘예수를 끝까지 바라보고 삽시다.‘ 말은 쉽습니다. 그런데 실제에서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끝까지 바라보고 사느냐? 그건 아니다 이겁니다.
사실 말로만 하면은 얼마나 쉽습니까? 여러분 그 사람을, 누가 그럽니다. 사람이 죽는 것도 다 게을러서 죽는 거라고... 왜 그러느냐? 숨만 계속 쉬어도 살텐데... 그 말이 맞습니다. ‘물 위로 사람이 걸어가신다. 한발 빠지기 전에 그다음 한발을 딛고 또 빠지기 전에 또 딛고 하면은 예수님처럼 물위를 걸어갈 수 있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해보면은 안 그렇습니다. 죽는 사람이 어떻게 죽는지를 몰라서 그렇지... 마지막 죽을 때는요. 숨을 막 내몰아 쉽니다. 너무 너무 숨을 쉬고 싶은 겁니다. 여러분 누가 자살하는데, 똑바로 앉아서 그저 숨 딱 안 쉬고 자살하는 사람 봤어요? 살아있는 인간은 누구든지 호흡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말은 그렇지만 실제에서는 어렵다 이겁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살면 됩니다. 수요일날 은혜 받고 주일날까지 못 살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영혼의 피곤함’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은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이렇게 되어 있는데, 히랍어 성경에 보면은 ’너희의 혼들이‘ 혹은 ’영혼들이‘ 혹은 ’정신‘입니다. ’너희의 정신들이 싫증이 나서‘ 혹은 ’피곤해서‘ 마찬가지입니다. ’너희의 영혼이 피곤해서‘ 혹은 ’싫증이 나서‘ 그리고 낙심한다고 되어 있는데, 그 마음이 풀어진다는 겁니다. 너희의 정신들이 피곤하여, 그리고 풀어져서 밖으로 풀어헤쳐져서, 그래서 그렇게 풀어헤쳐져서, 그렇게 풀어헤쳐지지 않기 위해서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자를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를 바라보는데, 예수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십니다.
예수님을 간절히 바라보는데 예수님이 어디에 도망가셨어요? 예수님을 끊임없이 바라보지 못하면서 살게 하는 문제의 요인은 예수님이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아무리 믿음으로 살려고 해도 이 속에 죄가 있기 때문에 이 죄인의 심령으로는 예수를 고통 받는 순간의 예수님을 잠시 바라보고, 시련을 당할 때에 예수님을 잠시 쳐다보면서 도와달라고 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은, 그 믿음의 주요 그래서 그 믿음의 주님이 자신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기까지 그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이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으니까, 신자된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끊임없이 예수를 생각하면서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바라보는 것하고, 생각하는 것하고 뭐가 틀립니까? 바라보는 것은 일생의 목표로 삼고 그분을 계속 추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그야말로 마음을 그분에게, 마음으로 그분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계속 일생의 목표를 삼고, 그 예수님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려고 할 때에, 내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방해 작용을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뭘 생각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많은 죄인들을 향해서 오래 참으시면서 사는 생애였습니다. 죄인들을 향해서 오래 참으시면서 사신 생애, 그래서 오늘 뭐라고 하냐면은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죄인들이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죄인들이 끊임없이 예수님을 거스려서 말하고, 예수님을 거스려서 예수님을 비난하고, 예수님과 논쟁하고, 그리고 예수님을 핍박하고, 그러면서 예수님을 괴롭혀 드렸습니다. 그런 생애를 사셨는데도 예수님은 변함없이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려하고 자기 몸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처음 오셔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섬기려왔다.‘ 그런데 그런 길을 걸어가는 것이 너무너무 힘이 드십니다. 환란과 어려움이 오고, 그리고 유혹이 오고, 또 사람들이 너무나 싫다고 그러고, 핍박하고 심지어는 예수님의 생명을 노릴려고 하고, 예수님을 모함하고, 박해합니다. 그때에 ’아이구, 처음에는 내가 그랬었는데, 힘들어서 못해먹겠다. 그리고 옛날에는 내가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 위해서 왔지만, 그러나 요즘은 내가 그렇게 못하겠다.‘ 그리고 자기의 사명을 헌신짝처럼 벗어서 버리셨습니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예수님께서는 아기 예수이실 적부터 창칼로 이 세상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공생애 들어서자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하는 어둠의 세력들은 치열하게 몸부림쳤습니다. 당신의 생애의 말기가 다가오자 이 악한 영들의 이 세력들의 준공은 더 치열해졌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시종일관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시면서 그 아버지를 의지하면서 당신에게 맡겨주신 그 하나의 사명, 죄인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 그들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대속물로 주시려고 하는 그 사명을 결국은 성취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분을 가장 괴롭혀드린 것이 누구였냐는 것입니다. 그분을 가장 괴롭혀 드린 것이 하늘의 별 이였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환경이었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토록 사랑하신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장 괴롭혔습니다.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신 그분, 그분이 당신의 생명을 버리셔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사랑하고, 그러기 위해서 오신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스리고, 거역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바로 우리다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고 순결하신 분으로서도 우리가 그렇게 예수님을 거스리고, 예수님을 욕하고, 예수님을 박해하고,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기까지 내어주는 그런 일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오래도록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참으신 절정이 가상 칠언에 나타납니다. 악한무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도 그 십자가에 매달려 운명하시면서 까지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영혼의 어떤 싫증을 느낄 수 있습니까? 선한 일을 하다가 지치고 낙심한 예수님의 그런 표정을 읽을 수 있습니까? 처음에는 선한 일에 몰두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과 정신이 풀어져버린 헤이해진 예수그리스도의 권태감을 읽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예수님의 은혜를 입어서 궁극적으로 구원의 완성을 보게 된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지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주실 때에 ’믿음으로 살리라. 이제 모든 어두음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길은 100m달리기가 아닙니다. 100m 달리기 같으면 한 번에 코피가 나도록 달려서 1등을 하겠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일생을 달려가야 하는 신앙의 길입니다. 처음부터 되지 못한 신자가 되어서 마지막까지 되지 못한 신자로 인생을 끝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마 그 사람들은 신자이었던 적이 없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날 동안에 열심히 주님을 믿은 적도 있고, 나태하게 주님을 믿은 적도 있고, 이런 모든 것을 동시에 가지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마지막입니다. 마지막이 중요한 것입니다. 일생을 계속 믿음으로 살다가 마지막 주님 앞에 갈 때에는 잠들어있는 상태에서 간다고 할 것 같으면은 그 얼마나 불행한 것이겠습니까? 일생을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살다가 마지막 날에만 깨어있어서 주님께 간다면 그건 또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어요. 수없이 많은 날들을 한번 하나님을 섬긴 적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계속 깨어있어서 주님을 바라보다가 마지막에 주님이 부르시는 날 주님을 우리 생애에 있어서 가장 사랑하는 때, 우리 생애에 있어서 가장 성공한 때, 우리 생애에 있어서 가장 순결해지는 때에 주님께로 갈 때에 우리 인생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그날이 언제일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향해 오래 참으신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끊임없이 참아야 합니다. 이 참는 다는 것이 소극적으로는 그냥 견디는 것을 의미하지만은 적극적으로는 어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달려가는 데에 있어서 맞이하게 되는 많은 괴로움들을 소화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을 계속 참으면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과 끊임없이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백한 바와 같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로서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는 사람들로서 날마다 그리스도 앞에 죽는 사람들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계속 독려하고 자기 자신 안에 일어나는 십자가를 향한 싫증,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싫증, 육체의 게으름, 많이 풀어 질려고 하는 이 정신의 상실, 이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방지하고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독려하면서 예수를 바라봐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 가장 훌륭한 방법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신 적이 없다. 우리가 그렇게 예수님을 박해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도 주님은 오래 참으셨기 때문에 지금 내가 오래 참는 것, 이 고통에 비하면 예수님이 참으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될 때에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 되는 비결들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고 자신이 부지런히 예수를 바라보지 않기 위해서 택하는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 그것을 통해 얻는 유익이 아무것도 아니고 그것이 몰고 올 마지막의 그 비참함이 얼마나 큰 것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끊임없이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끊임없이 예수를 바라보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11장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믿음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