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0일 새벽예배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히 12:10)
녹취자: 이한슬
어제 말씀드린바와 같이 인간에게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 있어서 징계가 주어지는데 그런데 그것이 항상 공평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교육할 때에 징계로서 모든 문제로 풀려고 하는 것은 마지막에 징계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만 다 깨뜨려 집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되고 우선 자식들을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그 대신 굽은 사랑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어떤 원칙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그냥 사랑받는 아이를 중심으로 하는 일방적인 쏟아 부음의 사랑 그것은 안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람을 더 굽게 만들고 위험을 가지고 옵니다. 그래서 집에서도 보면 아이가 그 집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집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 손가락 하나에 부모들이 움직이는 집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 아이에게 굉장히 불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엄마 아빠는 자기를 빗나가기는 했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손가락 하나에 움직여 주지만 세상은 절대 그게 안됩니다. 그러면은 세상을 살면서 인생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엄청난 희생이 따르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 아이들을 그렇게 교육시켜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라면서 뭔가 내 뜻대로 안 되는 것도 세상에는 많구나 그런 것을 살면서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대가족 시절에 아이들이 인간성 좋은 아이들이 많이 태어났던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형제와 함께 섞어 살면서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것이 많다는 것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꺾고 이기고 그럴 때도 있지만 그러면 대부분의 경우 이해하고 양보하고 다른 사람이 뜻을 이루려고 하는데 도와주고 나중에 자기 뜻을 이루려고 하는데 도움을 받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회성인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터득하고 배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이를 하나나 둘만 낳습니다. 교육학자들에 의하면 세 명은 되어야지 사회가 형성이 된답니다. 세 명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부모가 그런 사회가 되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 죄 가운데 있는 인간들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죄에 의해서 그의 영혼이 오염된 것 만큼 똑같은 정도로 사랑도 오염됩니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열정은 있지만 그것들이 하나님 중심적이 되어야지만 그것이 전체적인 균형을 갖게 되고 궁극적인 선이 되는데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자의적으로 사랑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결국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사랑에 있어서 균형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성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진실한 신자가 되고 성화가 되면 혜택을 받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가정을 허락하신 이유는 가정을 통해서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하고 부모를 통해서 참으로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할 까 하는 것을 보게 하시기 위해서 가정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아무렇게나 막 살면서 그 자식이 참 좋은 인생을 살아가기 원하는 것은 팥을 심고 콩이 나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히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돈을 들이고 고액과외를 시키고 아이를 쥐 잡듯이 잡고 뒤흔들어서 공부나 잘해서 좋은 대학이나 집어넣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어떤 고백이 들어 있냐면 ‘야 하늘의 자원은 필요도 없다. 땅의 자원이나 실컷 가지면서 사는거지’ 이런 고백이 그 속에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행복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니까 사실 부모가 자식을 향해 징계를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공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뭐냐하면 ‘자기 뜻대로 징계하였거니와’ 그게 훨씬 부모로부터 징계를 받는 자식이 보편적인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자식들이 부모에게서 징계를 받을 때 그 징계를 부모에게서 승복을 안합니다. 세가지 점에서 승복이 안되는데 첫째는 부모가 그렇게 징계할 자격이 있다는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막살면서 징계를 한다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말하자면 수용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하면 애정적으로 수용이 안되는 것입니다. 징계라고 하는 것은 깊이 사랑을 할 때 비로소 징계를 하면 그것이 감동이 되고 징계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충분히 사랑을 받고 있는 관계에서 어른이나 자기를 그렇게 책망할 수 있는 사람이 옳지 않다라고 책망할 때에는 그것이 수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변수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타락하고 죄에 오염이 됨으로써 사랑할 자격만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을 자격도 잃어버린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도 보면 좀 이렇게 따뜻하게 해주면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그렇게 사랑받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무슨 마음 품고 이 지체들이 이렇게 잘해주나 불안한 것입니다. 늘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 본능속에서 긴장하면서 살아가던 사람이 어느날 주위사람들이 너무 따뜻하게 해주니까 뭔가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사랑하는데도 결함이 있고 사랑받는데도 결함이 있고 하니까 인간은 예수님이 구원하지 않고 내버려두시면 인간은 저절로 불행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불행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인간은 망가진 존재로 그렇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안 믿는 불신자들이라도 공부 많이 하고 돈 많이 벌고 그리고 멋있는 남편 만나서 혹은 예쁜 아내 만나서 똑똑한 자식들 낳고 살아도 결국은 행복해질 수 없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모두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그것을 목표인것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것은 벌써 인류 역사에 의해서 다 증명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인간이 그렇게 해서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번에 나온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책에서도 썼습니다마는 주전 한 3-4세기경 혹은 그 이전에 보면 희랍에 철학자들이 많이 사는데 그 사람들은 인류 역사상 고도의 지성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은 당대에 거의 세계 최고의 개인도서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본받아서 이제 알렉산드리아에 폴네미 도서관이 세워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이 인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이제까지 있던 모든 철학을 집대성해서 정치, 경제, 역사, 문화, 사회, 미술 할 것 없이 모든 인류의 분야에 대해서 백과사전 적인 지식으로 체계화 한 사람입니다. 벌써 그때에도 그런 방대한 돈을 가지고 방대한 지식을 공급해주는 장서들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자기 학문을 체계화해서 인류 역사에 빛나는 업적을 이루어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도 글을 쓰는 사람으로써 그런 사람과 비교가 안되지만 굉장히 부럽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자기가 읽는 책들을 모아 놓는 그런 서재의 개념이 아니라 엄청난 도서관을 소유하고 그리고 거기서 자기가 필요한 지식을 방대하게 채집하면서 자기의 학문들을 감당해 나갔던 것입니다. 굉장히 부러웠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 사람들이 그렇게 고도의 정신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고도의 정신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정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 사람들이 사유하는 능력이 오늘날에 비해서 훨씬 떨어진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는 전혀 없고 오히려 지금도 무언가를 사유하려면 그 사람들이 세워놓은 철학 체계를 빌어서 말을 해야 될 정도니까 탁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게 지식이 많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인류 역사 최고의 자살률을 기록했던 시대입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빛이라는 것을 던져주고 자살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그렇게 현자라 불리우면서 똑똑하게 그렇게 철학적 사유의 능력을 가지고 만물의 이치와 우주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해부하고 그리고 지식적으로 그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들 속에 또 말도 안되게 황당무계한 미신이 유행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섬긴다든지 이런 미신이 또 유행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데네에 갔을 때에 아덴이라고 나오지만 아데네에 갔을 때에 그 아데네가 바로 그리스의 아테네인데 그 엄청난 지적 능력을 소유한 철학자들이 있었는데 그런 탁월한 지적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의 수많은 우상들이 발견되고 미신에 빠져있는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쓰여진 단도 발견하고 알지 못하는 신에게 경배하는 것도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인간이 행복해 진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에게 그런 것들을 자녀에게 물려주어서 그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14:14)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애정적으로 모자라기 때문에 징계를 받을 때 그런 부분에 대해서 동의가 안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계량적으로 동의가 안되는 것입니다. 계량적이라는 말은 자기가 잘못했으면 자기가 잘못한 만큼만 야단을 쳐야하는데 말하자면 너무 큰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이 잘못했어도 부모의 기분이 좋으면 훨씬 경감되고 조금 잘못했어도 그날 부모의 기분이 꽝이면 그러면 과중한 징계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은 어떻게 됩니까? 잘못하지 말아야 되겠다는 그런 도덕적인 생각을 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그 부모의 비유를 맞출까?' 어떤 상황에서 부모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낼까 하는 그런 눈치를 보는 사람으로 자꾸 바뀌어 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공정성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징계에 있어서 계량적으로 동의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 아이는 공정의 개념을 자꾸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런 문제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모가 하는 아이들의 징계에 대해서는 오늘 이 사도가 말하기를 ‘자기 뜻대로’ 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완전히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도덕적이고 애정적이고 그리고 계량적인 공의에 맞는 징계와 비교를 한다면 인간의 징계는 가히 자의적이라고 이야기해도 될 정도로 그렇게 제멋대로라는 것입니다. 그런 징계를 부모로부터 인간은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나와 있냐면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을 찬양케 하는도다. 그렇게 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이 땅에서 행복할 수 있을지 그리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 수 있을지 하나님이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일관된 뜻을 가지고 도덕적인 하나님이 도덕적인 방식으로 애정적인 방식으로 공정한 방식으로 우리를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냐면 우리를 거룩케 하심에 참예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심인데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다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참된 신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아들의 형상 안에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참된 인간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들의 인격 안에서 아들의 삶 안에서 그 아들의 존재 안에서 참으로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들을 고쳐서 되돌려 놓으시려고 하는 원래의 참된 모습이 그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나타나는데 그게 아들의 모습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끊임없이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우리가 성화의 (끊김) 참된 신자가 되어가지 않습니까? 그 참된 신자가 되어간다는 것은 참 인간이 되기 위한 목적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참 인간이 된 이상적인 모델이 어디 있느냐하면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아들의 형상입니다. 그 아들의 형상 자체를 닮아가는 것을 거룩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끊김) 애정적이고 공정하며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을(끊김) 향해서 우리를 데려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징계가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거룩해지겠는가 하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어차피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셔서 전혀 흠이 없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인생을 살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쓰지만 완벽하게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징계로 개입하심을 말미암아 점점 그런 사람이 되어가니까 징계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말할 수 없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예수를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의 삶이 아니었느냐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