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5일 새벽예배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히 13:17)
녹취자: 이한슬
이틀째 말씀드린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자신의 영혼을 인도하는 목자에게 순종하고 또 복종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드린바와 같이 순종과 복종은 기계적이고 노예적인 순종과 복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인격적이고 신앙적인 복종인 것입니다. 순종과 복종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마음속에 ‘내가 좋아하고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에 순종하고 복종한다. 내가 만약에 싫고 내가 원하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고 복종할 수 없다.’ 이런 것은 성경에서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그런 순종과 복종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제 말씀드린바와 같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자신들을 가르치고 그리고 자신들의 신앙을 인도하는 목회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자신이 잘 이해할 수 있을 때 물론 순종하고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리의 문제가 아닌 한 사람마다 판단이 다르니까 그런 점에 있어서도 순종할 수 있어야 된다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일들을 위해서는 누구의 독단적인 그런 것들에 의해서는 안되겠고 교회 안에 성경말씀 중에서 우리들이 합리적인 의사결정의 구조와 이런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 것들에 의해서 결정되고 나면 기뻐하는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므로 교회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목회하려는 목회자들과 거기에 기쁨으로 순종하려고 하는 양떼들이 어울러 지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교회로써 주님의 사람들을 세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에 아주 기초적이고 명백한 가르침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인들이 함부로 행동하고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신앙에도 파괴를 가져오고 또 교회에도 상처를 주는 그런 일들이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목회적인 가르침에 순종하고 그리고 그 가르치는 자들의 지도에 따라야 될 이유를 두 가지로 이야기 하는데 그중에 첫째를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첫째가 무엇이냐 하면은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마치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처럼 하느니라 그래서 목양을 하고 양떼를 돌보는 이 모든 것들을 마치 이렇게 사업을 하고 경영을 하는 사람이 마지막에 이익이 남았는지를 계산하고 헤아리는 것처럼 그렇게 양떼들을 돌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양떼들을 돌보다보면 그 사람들이 가르침을 잘 받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때도 있고, 뒤로 미끄러지는 때도 있고, 뭐 이렇게 마음 식어지는 때도 있고, 뜨거워지는 때도 있고 여러 가지로 변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많이 변하는데 결국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갔을 때 그 사람의 신앙 전체는 결국은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서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우리가 무엇을 행하든지 선악간에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된다. 그때 주님 앞에 우리 살아온 모든 신앙과 인생에 대해서 달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회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치 자기 영혼을 그렇게 회계하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너희 영혼을 위해 염려하는 사람이 목회자이다. 그러니까 순종해야 한다. 그걸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렇게 성경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그 눈부신 진리들이 목양의 현장에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양떼들을 사랑하는 목회자가 있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사람의 소리가 아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양떼들이 있고, 그리고 그 지도력에 순종하고 그리고 섬기며 살아가는 양떼들이 있고, 이렇게 됨으로써 교회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든든히 서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양떼들도 신앙의 터 위에 견고하게 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는데 그렇게 순종해야 될 이유가 바로 목회자들이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그 경성하듯이 그래서 너희들의 영혼을 위해서 그렇게 애쓰고 수고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염두 해 둔다면 너희들이 순종 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적으로 볼 때에 우리들이 목회자 그다음에 양떼들과의 관계를 특히 사도바울 서신에서 아비와 자식의 관계로 많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육신의 부모로서 우리가 육신의 자식들을 데리고 있습니다. 자식들이 장성하기 전까지는 그들이 진정으로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모릅니다. 그리고 무엇이 올바른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좋아하는 것도 있고 싫어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해할려고는 부모가 애를 쓰지만 그러나 사실은 옳지 않은 것도 있지 않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어느 목사님이 한분이 이야기 하시는데 뭐 이름만 대면 알만한 큰 교회입니다. 장로님이 계시는데 장로님이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그렇게 장로님 부부가 권사님하고 둘이 눈물로 기도하고 그러는데 신앙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머리 노랗게 물들이고 귀걸이 두 개씩 하고 머리 땅바닥에다가 쳐박고 헐렁한 바지 입고 거꾸로 돌고 그러는 레게라 그러나 힙합이라 그러나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만 하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너무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말귀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빠르게 하는 그런 노래 있지 않습니까? 노랜지 염불인지 그런거 있지 않습니까? 하도 답답하니까 그 목사님이 그 아이를 불러서 너 이번에 한번 밖에 돌아다니면서 머리 쳐박지 말고 교회에 와서 해봐라. 그리고 시편 23편을 한번 해봐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가 시편 23편을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이러면서 막 했습니다. 맨날 하던거니 얼마나 잘 하겠습니까? 그렇게라도 해서 예수 믿게 해보려고 말입니다. 사실 그러고 인생을 살아서 결국 나중에는 뭐가 남는 게 있겠습니까? 그 아이들은 그런 걸 모릅니다. 그리고 또 어렴풋이는 알고 있을 지라도 그게 좋은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무엇이 좋은지 또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부모가 어느 정도 권력을 가지고 내 자식을 올바르게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아닙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심방을 다녀보거나 그래도 이미 아이가 초등학생 밖에 안됐는데 부모 말을 전혀 안 듣습니다. 부모의 통제를 이미 떠났습니다. 오히려 아이가 부모 둘을 쥐고 자기 마음대로 뒤흔드는 것입니다. 옛날에 제가 다니던 총각 때 다니던 그 교회에 목사님 이제는 돌아가셨는데 아이가 중학교 다니는 아이 하나,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 하나 있었는데 제직 임명하는 것 까지 다 간섭을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누구를 지휘자를 임명을 하게하고 못하게 하고 좌지우지합니다. 심지어는 예배시간에 나오셔서 대예배시간에 아이들이 많이 반대했지만 내가 임명을 하겠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그 집안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모는 아이들을 인격으로 감화를 시켜서 하든지 부분적으로 아이들에게 권한을 가지고 하든지 뭘 하던지 간에 일단 그 아이들 물론 아이들을 매번 이거 너 하지마라 왜냐하면 청산유수입니다. 한 30분 이야기 듣고 나니까 ‘아 그 머리 쳐박는 댄스 그거 하지 말아야겠다’. 아니면 ‘아빠 몰래 엄마 몰래 가방 가운데다가 담배 넣고 다니면서 화장실에서 피우고 다녔는데 그거 하지 말아야 되겠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잘못했어요.’하면 좋죠. 그런데 어린 아이들이 아무리 달변으로 기가 막히게 하고 눈물로 호소하고 성령충만하고 호소를 해도 좋은걸 어떻게 하냐 하며 안할 수 있다 이거지요. 부분적으로는 무지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자기 안에 있는 자기 뜻대로 살고 싶은 욕심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겟습니까? 그럴 때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해하는건 나중에 하더라도 ‘안돼’하고 그건 막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게 교육이 되고 양육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예를 들어서 하나를 봅시다. 아이들이 학교 다닐 때 공부 안하려고 그러지요? 그렇지요? 공부 안하려고 그럽니다. 아주 특별히 안하려고 그러는 때가 있습니다. 어떤 애들은 초등학교 때 그러고, 어떤 아이는 중학교 때 그러고, 그래서 우리 교회학교에서도 보면은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까지 공부는 너무 잘하는 겁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쯤, 아니면 고등학교 2학년쯤 아주 중요한 시기에 와가지고 뜻을 세우고 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릇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웬만한 부모들은 뭐라 그러냐면 ‘지가 안하려고 그러면 할 수 없다.’ 그러면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자기들은 항상 하고 싶었냐는 말입니다. 공부가. 그러면 그거를 하기 싫어할 때가 그게 잠깐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때 그거를 잘 설득을 해야 합니다. 잘 알아듣게 이야기해서 그래서 눈물을 뚝뚝 흘리게 해서 ‘아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이거 제가 쓸데없는 짓 그만두고 공부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워낙 그렇게 그것보다 재밌는 게 워낙 많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안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혼을 내서라도 공부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억지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몇 년 지나고 보면은 몇 년도 아닙니다. 그거 몇 달 만 지나다 보면은 ‘아 내가 그때 잘못 생각했구나’ 다시 왜 이길밖에 없는가 하는 것을 알고 공부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그 자녀들을 엄마 아빠가 자녀들을 일단 자기 손안에 넣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폭력으로 발길을 차고 두들겨 패라는게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그 아이들을 하고 싶은 것을 막을 수 있고, 하기 싫은 것을 설득을 하던지 가르치든지 하게해서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부모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언변으로 하든지 탁월한 신앙의 감화로 하든지 아니면 그 위에 지도력이 보태어지고 그 위에 목회적인 기술이 보태어지고, 인격적인 감화가 보태어지고 어떻게 하든지 교인들이 목회자의 품안에서 목회자가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그렇게 하지마라’ 그러면 최소한 움찔하고 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하고, 해야한다 그러면 하기 싫어도 눈치를 보면서도 하는 그런 교회가 되지 않으면 불구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시고 우리 모두 그 몸에 붙어있는 지체입니다. 몸은 머리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즘 우리에게 이렇게 살기 원하신다. 그걸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움직입니다. 그게 뭡니까? 뇌성마비입니다. 뇌에서는 생각을 하는데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편하게 생활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것들이 아주 너무나 단순한 원리이면서도 우리 속에서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이제 뭘 이야기 하냐 하면은 만약에 그렇게 순종하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다. 그러면서 이야기 하는 게 무엇이냐 하면은 목회자들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하되, 영원을 위해 경성하는 일을 하게 하되, 그 뭐라고 표현하냐면 근심으로 하게하지 마라 그리고 즐거움으로 하게하라. 그래서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렇게 즐겁고 기쁠 수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신앙생활이 아름답고, 3년 4년 지나도 같이 앉아서 밥 한끼 같이 먹은 적이 없지만, 신앙의 열매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고 주님을 닮아 가고자 하는 열심. 이런 것들이 그렇게 가슴에 감사함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 이름을 부를 순 없지만, 그렇게 괴로워하고 명백하게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길을 가고, 그리고 완고합니다. 교회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계속 곤고한 인생을 삽니다. 그러면서도 그 곤고함의 이유를 가르쳐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할라치면 자기 안에 있는 편견과 자기 중심적인 생각 때문에 그렇게 안하려고 합니다. 그런거를 모두 보면서 그러면서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그 근심하는 마음이 바로 그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너희 영혼에 유익이 없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너희를 위해 기도할 때 마다 내가 감사하다. 너무 기쁘고 감사하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는데 그들 가운데서 사랑과, 지식과, 인내가 풍성하게 열매를 맺어서 빌립보 교회 교인들로 말미암아 우리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이 온 땅에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들 속에 있는 사랑과 믿음과, 신앙의 정절과 이런 것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마치 백합화가 향기를 멀리 퍼뜨리는 것처럼 그렇게 그 아름다운 그 향기로운 소실들이 전해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쁜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목회자의 마음속에는 양떼들에게 가져다주는 선물이나 모슨 그런 건 마음에 없습니다. 그 사람 자신이 좋은 주님의 사람으로 자라고 그리고 성도를 사랑하고 하나님 사랑하고, 그리고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게 살아가고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주님의 은혜가 있어서 그가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고 그러면 참 족하고 좋은 것입니다. 추석 때가 되었는데 교회는 출석하지 않는 교인이 선물을 하나 보냈습니다. 그래서 내가 저는 뭐 직접 전화하지는 않습니다만 집사람을 시켜서 전화했습니다. ‘목회자의 가장 큰 선물은 이런게 아니라 너 자신이다. 너 자신. 너 자신이 와서 목회자한테서 좋은 신앙생활을 하고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는 것이 선물이지 교회는 못나오고 그래서 명절이 됐다 그래서 선물을 보내고 그게 목으로 넘어가겠느냐. 그게 고문이지 선물이냐?’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목양을 받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좋은 신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그런 목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좋은 주님의 사람이 되어 가는데 그때 자신의 목회자를 괴로움으로 그 일을 하게하지 말고 기쁨으로 그 일을 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그 사람의 영혼에도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런 삶을 살아가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날마다 날마다 목양의 관계 속에서 순종하고, 사랑하고 그러면서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 모두를 빚어져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