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5일 새벽예배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것이라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바울이 이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 된것을 고하니라 (행 21:20-26)
녹취자 : 윤은정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제 이방인가운데 하나님이 어떻게 복음으로 역사하셨는지를 거기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상세하고 고했더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겁니다. 거기에 유대인들이 수만 명이나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나머지 사도들이 그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선교를 했으니까,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거기에 돌고 있는 사도바울에 관한 소문이 매우 안 좋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금하고, 이제 할례도 못 받게 하고, 규모가 없이 그렇게 율법을 훼방하는 사람이다'라는 그런 나쁜 평판이 돌고 있었습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인데도 이렇게 서로 의사소통이 잘 안 되서 사도바울을 아주 나쁜 사람으로 이렇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사도바울이 적기에 올라갔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오묘하고 깊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거기에 있는 야고보와 장로들이 뭐라고 제안을 하냐면은, "이렇게 소문이 당신이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하고, 그 다음에 할례도 행하지 않고, 유대인으로서 규모를 잊어버린 채 그렇게 마치 아무렇게나 율법을 대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이야기를 해서,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려는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갖는다" 이런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여기 믿겠다는 사람 넷이 있는데, 서약하겠다는 사람 넷이 있는데, 그 사람을 데리고 결례를 행하고, 그리고, 머리를 깎고 서원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고 “율법을 읽고 행하라. 그러면 이 사람들이 당신을 보면서 ‘사실은 그런 사람이 아니구나!’ 이렇게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타이르는 것입니다.
모든 사실에 대한 비판과 그것에 대한 칭찬, 이런 모든 것들은 항상 그 당시로 돌아가서 판단을 해야 된다는 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성령님이 임하시고 역사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한동안은 이 사람들이, 유대인들로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었고 또 유대교에 속했던 사람들이니까 아마 믿었다고 해서 단번에 그것과 결별을 하고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면서 생활하기는 굉장히 힘들었을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면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대부분 유교문화권 속에서 삽니다. 불교를 믿었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실제 생활에서는 유교적인 생활을 합니다. 그것이 문화자체로 깊이 베어 있는데, 어느 한 순간에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해서 그 모든 것들을 다 떨쳐버리는 것은 사실 불가능 합니다.
(예화) 그래서 제가 전에 있던 교회도 보면은 아주 굉장히 불교를 열심히 믿는 사람이 있었는데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심방을 가면은 항상 문 앞에 나와서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불교에서 사람을 맞이하던 습관이 이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대상은 바꼈지만 형식은 남아있습니다. 몇 번을 타일렀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렇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어떻게 하든지 많은 유대인들이 있으니까 그들과 정면대결을 피하고, 사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율법에 대한 존중심이 있고 또 그렇게 규모가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이러한 계기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데, 근본적으로는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은 인정이 되지만, 왜냐하면 그 사도바울은 오히려 갈라디아서 같은데 와서는 그 할례를 행하는 것에 대해서 아주 심하게 질타합니다. 그리고 “우리 진짜 할례인은 심령에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진짜 그 마음의 할례를 받고 주님께 속한 사람들 그 사람들이 진짜 주님의 사람들이다.” 그것을 강력하게 개진하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랬던 것을 봐서 이제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항상 올바른 판단을 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사도바울도 아마 시간이 지나고 나서 자신의 이런 행동들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고 후회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결례를 하고 자기도 머리를 깎고 이렇게 하는 그것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것이었지만 아마 바울은 또 어떤 면에서는 그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면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의 모양으로 나타나서 어떻게 하든지 그들을 ‘걸림돌 없게 주님을 믿게 해야 되겠다’라는 사랑이 동기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서 절대적인 판단을 할 순 없지만은,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제 이것은 후에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는 정신과 복음의 정신에 보면은 잘못된 것이었다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 보면은 이제 이렇게 율법을 지키고 그 다음에 그 율법을 지키는 규모가 자신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사도바울이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유대인들에게는 호감을 샀을지는 모르지만은, 그러나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이것은 어떻게 보면은 자신의 그 복음의 충족성을 외치던 수많은 선포와 메시지와는 말하자면은 어긋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가 어떤 신앙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고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그대로 지키고 변함없이 그것을 붙들면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사도바울이 핍박이 무서워서 이 일을 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고난을 받을 뿐만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그러고 올라온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하게 어떻게 하든지 이 복음을 유대인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이 유대인들에게 사실은 복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그런 사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설득하고 싶어 했지만은 그러나 어쨌든 이렇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그것이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거기에 있었던 사도와 장로들과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터이니 초창기에 얼마나 그들이 이 율법과 복음의 사이에서 고심하고, 어떻게 하든지 이 복음을 유대인들에게 전할 때에 어떻게 하든지 이 유대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하는 그들의 안타까운 동족을 향한 사랑과 그리고 이 믿음의 원칙과 적용사이의 고민을 우리들이 읽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각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상황 속에서 우리도 이런 똑같은 고민을 하게 되는데, 어떻게든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믿음의 규칙과 삶의 교훈을 따라서, 어떻게 하든지 외곡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하든지 타협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하든지 복음의 진리를 굽게 하지 아니하고, 최선을 다해서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 길로 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뻐하시는 길이다! 그리고 그 길로 가게 될 때에 많은 고난과 어려움이 있을 텐데, 그래서라도 우리가 주님을 잘 믿어서 고난과 시련 속에서 오는 많은 고통과 아픔들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충분히 경험하고 거기에서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위로와 용기와 힘을 얻으며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