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 나를 향하여 하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놀라게 하소서”(시 40:13-15).
이 부분에 나오는 내용도 역시 그 과거에 대한 회상이지요. 그래서 과거를 과거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드렸던 그 기도를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회상하는 거죠. 이게 뭐냐 하면 ‘내 영혼을 찾아서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 자기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 했었다는 거죠.
여기에서 ‘영혼을 멸하려 한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 이 영혼이라는 것이 네피쉬(Nephesh)라는 히브리어 단어인데 이게 영혼을 가리키는 말이기는 한데 때때로 목숨이라는 말로 사용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네피쉬라고 하는 단어에 그런 뜻이 있다는 것을 보면 그것은 그저 영혼이라기보다는 나의 목숨을 찾아서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해 주십시오 라는 그런 의미이죠. 그래서 네피쉬(Nephesh)라는 말이 혹은 사람이라는 말로도 쓰입니다. 영어에서 soul이라는 단어가 사람이라는 말로 쓰이잖아요. 그래서 뭐 그런 게 있어요. 쓰이잖아요. 그래서 히브리말에서도 똑같아요. 그래서 아마 그게 성경에서 영어의 영향을 받은 거겠죠. 그래서 ‘There is not the single soul’ 그러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라는 그런 뜻이거든요. 히브리어에서도 똑같이 ‘에인 넷피쉬’ 그러면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뜻도 되요.
근데 여기 그런 의미로 볼 때 이제 여기 나오는 ‘영혼을 찾아서 멸한다’는 목숨이죠, 목숨. 사실 이런 경우가, 이렇게 목숨을 영혼으로 번역한 경우가 특히 구약성경에 시편에 여러 번 나옵니다. 뭐 바로 잡는 것이 좋다 이렇게 생각됩니다. 어쨌든 나의 영혼, 나의 목숨을 찾아서 멸하려는 자들이 있었다. 뭐 다윗을 그렇게 해하려고 하는 많은 정치적인 대적 자들을 두고 가리키는 거겠죠. 그런 그 악한 사람들이 다윗을 노릴 때 뭐 영혼만 노렸겠어요? 원하는 것은 목숨이죠. 그죠? 육체는 펄펄 살아 있어도 네 영혼은 침체에 빠졌으면 좋겠다 뭐 그러고 원수들이 덤벼들었겠어요? 그게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 목숨을 그렇게 노렸던 것이에요. 그렇게 목숨을 노리고 그래서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사울이었던, 사울의 치하에서 기름부음을 받았던 때에는 사울이 정치적인 대적 자였죠. 그죠? 그 뭐 사실은 다윗이 사울에게 유감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사울이 다윗에 대해서 어떤 경쟁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고 적대적인 의식을 갖게 되니까 그러니까 이제 끊임없이 도망을 다녀야 되었습니다. 사울이 끊임없이 목숨을 노렸기 때문이죠. 그런 목숨을 노린 사람들은 결국은 모두 이 다윗을 미워하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고통을 받는 가운데 ‘그들이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해 주십시오’ 그것이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 빠졌을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었던 기도의 제목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적대자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그를 해꽂이 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고, 믿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요. 아니면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올바로 행하다 보면 자기 욕망의 질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자기 욕망의 질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이 거치는 돌같이 그렇게 될 수 있어요. 그런 거치는 돌같이 그렇게 될 수 있는데 바로 그런 때에 우리를 많이 미워하게 되죠.
그런데 결국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일어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계시를 통해서는 밝히 드러나지만 섭리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뜻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시간이 흐르고 살아봐야지만 내가 이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는가 하는 것이 결국은 밝혀지게 마련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마다 우리들이 고통 받고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거거든요. 이때에 성도의 기도는 결국은 어떠해야 하냐면 하나님께 피하는 기도를 드려야 되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래서 대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일들이 잘 풀리고 어려움이 없을 때에는 그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현저하게 나타나지 않아요. 마치 여름날에 녹음이 무성할 때에는 하루살이 식물인 한해살이 식물인지, 다년생 식물인지, 혹은 사시사철 푸른 상록수인지 아니면 여름 한철 푸른 잎사귀를 갖는 나무인지 잘 드러나지 않듯이 우리의 인생도 신앙도 그런 거예요. 그런데 이제 이렇게 자기가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서 고통을 당하게 될 때 그때에 신앙을 가진 사람과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사이에는 아주 현저한 차이가 나는 거예요. 그 현저한 차이가 뭐냐 하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피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자신을 많이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결국은 평소에 얼마나 하나님 의지하면서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과는 좀 달라요. 인간이 인간을 향해 갖는 사랑은 사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하고 다른데 그 가장 큰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의존하는 마음이에요. 인간의 사랑에도 어느 정도 의존하는 마음이 있어요. 근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는 온전한 의존, 자기의 인간이 한 사람을 아무리 사랑해도 그 사람이 자신의 생명까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죠?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의존은 절대자에 대한 의존을 포함한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모든 사랑, 경건, 그리고 주님의 섭리, 그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 이 모든 것들은 절대 의존의 마음에서 생겨나는 거죠.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으려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를 하나님 의존하면서 살게 하지 못합니다.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존하게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게 하시는 그런 분이세요. 그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은혜를 주시는 거죠.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기도를 잘하게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은혜를 받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이 많이 생겨나서 그래서 의존의 마음이 많이 생기면 하나님 앞에 기도가 잘 쏟아져 나와요. 이게 의존의 마음이 없고 독립의 마음이 충만하면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안나오게 되는 것이에요.
이 시인이 원수들이 목숨을 노리면서 그 안에서 깊이 고통을 받고 괴로워하게 될 때, 그때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피하며 주님 의지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거죠. 그러면서 그 원수들을 물리쳐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고 있습니다. 원수들이 시인을 해하기 위해서 승승장구할 때 그들은 스스로 영광을 한 몸에 받은 것처럼 생각해요. 이게 바로 악을 행하는 자들의 특징이에요. 그래서 악을 행하는 자들의 특징은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는 교만이에요. 그런 교만 속에서 수치와 낭패를 당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부끄러움을, 왜 여기에서 수치라는 이야기가 두 번씩 반복해서 나올까요? 그게 뭐냐 하면 원수에게 악재를 당하며 그렇게 깊은 고통을 당할 때 그때에 이 시인이 받았던 가장 큰 고통을 원수에게 물려주고 싶은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깊은 수치예요. 그리고 큰 고통이에요.
그러면 이제 가끔 이 시편을 읽는 사람이 마음에 걸려하는 것이 뭐냐 하면 왜 기도를 이렇게 하느냐 하는 거죠.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했는데 나는 나의 목숨을 찾아서 멸하려는 자들이 있는데 나는 죽어도 좋으니 저희를 용서해 주십시오 왜 그렇게 빌지 못하느냐 이제 그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이것은 제 생각에는 두 가지로 설명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요.
우선 첫째는 뭐냐 하면 하나의 계시의 점진성이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원수를 사랑하되 그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이 사랑의 찬란한 계명이 아직 여기에는 그렇게 찬란하도록 비취지 않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구약에 있어서의 계시의 점진성이 주는 한계예요. 물론 보다 깊은 율법의 의미를 터득하는 사람들은 깨달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 원수에게 고통을 당하면서 계시의 점진성의 한계를 딛고 거기까지 깨닫기를 요구한다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무엇인가를 비판할 때에는 항상 지금의 문맥을 가지고 거꾸로 가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판하기 보다는 바로 그 문맥에서 비판을 해야 하는 것이죠. 어떤 사람이 설교를 하면서 모세가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고 능력을 받으면 뭐하냐, 장가를 몇 번씩 가고 말이지 그런 것을 봤는데 사실은 그것도 말이 안되는 게 그 당시에는 일부다처제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섭리 속에서 용인을 하시던 때였어요.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사람들의 강퍅함과 또 뭔가 인구에 대한 배려 등등으로 하나님이 제한적으로 허락하시는 그런 문맥을 갖다 놓고 그대로 비판을 하는 것은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거죠.
어쨌든 그런 이유 때문이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이 시편같은데서는 이러한 계시의 점진성의 한계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을 본질적으로 그 원인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에 있다고 그렇게 본 거죠. 그래서 이 성경에서 나오는 악인들은 근본적으로 그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기 때문에 언약의 백성들에게 박해를 가하고 고통을 주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이 무리들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게 옳다고 생각을 했죠. 그러면서 역시 시인 자신의 영적인 미성숙도 포함되었다고 우리는 말할 수가 있는 것이에요.
어쨌든 우리들이 이것을 적용할 때에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하는데 우리를 끊임없이 도전해서 쓰러뜨리려고 하는 영적인 대적들이라고 적용을 하면 되겠어요. 그 속에서 이 수치를 당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빌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있는 거죠. 이것이 바로 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해 주옵소서, 여호와여 나를 속히 도우소서 하는 그 기도의 내용이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렇게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가서 고통을 당하게 될 때에는 하나님의 큰 섭리를 생각하고 어느 한 사람, 한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큰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내가 지금 왜 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을 생각해 보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면서 주님과 보다 더 깊은 사귐 속으로 들어가 자기를 성찰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일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들이 바뀌고 변화되고 나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우리에게 고통을 통하여 기쁨을 주었던 것처럼 또 원수들은 하나님이 그 기쁨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벌하셔서 모든 질서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로 돌려놓으시는 거죠. 그걸 믿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신자예요.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지켜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아버지 앞에 간구하게 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신실하신 주님 오늘 이 시간에도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주님을 많이 의존하며 아버지 앞에 살 수 있는 저희들이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