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도우소서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시 44:23-26).
양들이 도살을 당할 때에 양들이 반항을 하지 않고 죽임을 당하는 그 모습을 그리면서 아무런 항거도 하지 못한 채 고난을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투사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양을 죽이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만, 소를 잡는 것은 어려서 봤습니다. 죽이는 광경을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집 근처 도살장에서 보았습니다. 소가 얼마나 양순한 짐승인지 사람들이 아침이면 소를 잡기 위해서 아침 일찍 밤나무 골이라고 하는 곳으로 소를 끌고 도살장에 들어가기 직전에 소 고삐를 나무에 단단히 걸어놓고 양동이로 물을 먹이는 광경을 봅니다. 이것이 나중에 알고 보면 물 먹인 소인 것입니다. 이 소들이 여기저기 주인 손에 끌려 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소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곳인데 냄새로 아는 지 어떻게 아는지 도살장 가까이에 오면 안 갈려고 합니다. 그리고 울어요. 그래서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입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립니다. 어린 마음에 그것을 보면서 인간이 참 잔인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소고기를 먹으니 할말은 없습니다. 어쨌든 소들이 그렇게 알아보고 큰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이면서 주인이 잡아 끌면 어쨌든 끌려서 소들이 갑니다. 만약 다른 짐승이었다고 한다면, 혹은 그 덩치가 큰 소가 사납게 저항했다고 한다면, 아마 굉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고 도살장에 들어갑니다. 소가 양쪽에 말뚝이 서 있는 곳에 나란히 줄지어 서있게 되고 한 마리씩 휘장을 열고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소 잡는 사람이 있어서 기계로 안하고 곡괭이로 소를 정확하게 정수리를 칩니다. 그러면 죽게 됩니다. 거기에서 나는 냄새와 이런 것들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죽어갑니다.
양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양들도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그 양의 모습을 고난 당하기 위해서 자기를 버리신 저항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모습과 비교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고난을 받고 있는 시인과 시인이 속해있는 공동체의 모습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세상에 살아갈 때에 진리의 힘이 크고 위대하지만, 그것은 그 진리를 알고 진리에 복종하는 사람에게나 그 힘이 위대하고 큰 것이지, 진리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진리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한 자루의 칼이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칼은 없고 진리만 있는 사람들은 그 진리를 싫어해서 칼을 휘두르면 사람들은 그 위대한 진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면서 쓰러져 갔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도움은 없고 대적들은 그 진리를 이해하지 않은, 그래서 결국은 진리를 거스려 살고자 하는 자신에게 진리도 대적이 되고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도 대적이 되고, 그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하는 언약의 백성들도 대적이 되고, 그 때에 그 휘두르는 칼과 폭력, 이 모든 것에 힘없이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언약백성들의 유일한 손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히 빌면서 우리가 종인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고난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요령 피우다 살며 고생하는 것은 고생이지 고난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의 진리를 붙들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고난과 고통을 당하게 되면 이것은 그야말로 고난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말하기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좋은 도살하는 양같이 됨이니이다. 그렇게 하찮게 여기며 거침없이 자신들을 공격해오고 고난을 가하는 그 원수들의 무리 앞에서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께 자신들의 고난을 아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사랑은 한계가 있고,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들 사랑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들의 껍질을 버리지 않은 사랑이기 때문에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 입니다. 특히 당신의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 가까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뜻을 따라 살다가 고난을 당하면 호소할 데가 없습니다. 호소해도 그것은 유한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정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께 호소할 길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특권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께 고백하고 그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세상의 모든 것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잠시 그렇지 않은 줄로 여기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는 보이는 이 세상의 것들을 따라가고, 그리고 하나님과 맺어야 할 자기 자신의 깊은 영적 생활보다는 육체를 위한 일에 몰두하였지만, 이런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호소하게 될 때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는 명료하게 수면위로 떠오르게 되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가장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위하여 헌신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정수시키는 것입니다. 세탁하시는 것입니다. 깨끗게 하시는 것입니다.
서울시에서 수돗물을 만들어놓고 맛보게 하기도 하고 수돗물을 몇 만개씩 페티병에 담아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합니다. 저는 별로 신뢰가 안 갑니다. 물 자체는 좋습니다. 열심히 잘 만들었으니까 다른 나라 수돗물보다 훨씬 좋을 수도 있겠습니다. 건수에서 떠온 검증되지 않은 생수보다 위생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도관입니다. 언젠가 한 번 공사를 하면서 철거하는 수도관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수도관을 딱 잘랐는데 거의 대부분이 다 막혀있고 구멍은 조금 뚫려있습니다.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수 십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수도관에 녹이 슬어서 그것들이 전부 다 관을 거의 막아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작은 구멍으로 물이 흐른 것입니다. 그러니 수압이 그 녹을 통과하면서 녹을 흠뻑 머금고 수도꼭지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물 문제를 해결하려면 취수장을 훨씬 높고 훨씬 더 먼 곳으로, 팔당이나 이런 곳이 아니라 훨씬 더 먼 곳으로 취수장을 옮기고 서울시에 있는 모든 수도라인을 다시 뜯어서 갈아야 합니다. 우리는 서울이 아니지만 상관없지만, 경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갈아야 합니다. 그래서 녹슬지 않는 금속 혹은 비금속같은 재료로 만들어서, 그것도 언제든지 청소할 수 있도록 관을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분명히 짚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이러한 큰 고난 앞에서 주님을 진심으로 의지하려 할 때 평소에 받아먹던 그 수도물이 흐르는 수도관을 단면으로 잘라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기도를 하나님 앞에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시 44: 22-23). 사실 이것은 분명히 절규가 섞인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주무시고 계시다, 혹은 하나님이 졸고 계시다 생각하면 하나님께 대한 아주 방종한 표현입니다. 시인이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를 잊으시나이까. 사실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디서든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고난과 많은 시련을 당하면서 믿음으로 살아도 억압 받는 현실을 통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은 주무시고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셨습니까 하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표현입니다. 이 사람이 믿음을 통해 현실을 봐야 하는데 현실을 통해 하나님을 보니까 하나님은 주무시는 거 같고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신 거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마지막으로 “일어나서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를 구속하시옵소서”(시 44:26)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기 위해서 그런 묘사를 한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결론은 우리를 도우소서. 하나님이 쓰러지신 것도 아니고 누워있는 것도 아니고 일어나 우리를 도와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라고 하는 이 표현은 대부분의 경우 각성을 동반한 결단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성경이 아니기는 하지만 누가복음에 보면 탕자도 결심할 때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 요나서에도 보면 다시스로 가는 길에서 돌이켜서 다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 니느웨로 가는 요나의 결단 가운데에서도 이와 같은 것이 나타납니다.
어떤 결단을 동반한 일어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어나서 우리를 도우소서, 이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들의 고난 받는 상태 속에서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기 자신을 향한 외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고난을 당하고 어떤 어려움에 있을 때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하는 말이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난을 받고 시련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과의 언약을 굳게 믿고, 그래서 일어나서 자신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고난을 당할 때나 시련을 당할 때나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의 도움으로 일어서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