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자랑하는 하나님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셀라)”(시 44:8).
성경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은 동격으로 쓰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게 이름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뜻이예요. 그래서 사물은 사물의 이름으로서 사물을 나타내죠. 사람 그러면 그 글은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다섯 개의 글자의 요소가 합쳐서 사람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내요. 그런데 누구도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과 상관없는 글자를 볼 때에 그 글자를 주시하면서 글자의 크기나 아니면 글자를 구성하고 있는 밪침 하나 하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건 마치 거울 같이 우리들이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거울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게 되듯이 언어는 그런 성격을 갖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성함은 바로 하나님 자신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태도와 똑같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대하는 태도가 경건하고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면 하나님 자신을 향해도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이게 구약에 나타난 이름 신앙이예요.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보이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태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완전히 일치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한다는 말과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한다는 말은 동의어이고 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라고 하는 뜻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라고 하는 뜻은 똑 같은 뜻이에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위로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으로부터 위로를 받아요. 조나단 에드워즈가 깊이 하나님을 만난 다음에 자기의 변화된 모습에 대해 쓰는 가운데 그런 이야기를 해요.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그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 그리스도, 우리 주님, 하나님의 성함을 들을 때 마다 새로운 느낌을 가져다준다는 거죠. 그렇지 않겠어요? 폭포를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폭포 폭포 그래도 가슴에 다가오는 게 없겠죠. 그러나 나이아가라 그 밑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아 보거나 혹은 파라과이인가 어딘가에 있는 이과수 폭포 같은 것들을 보면서 깊이 감동을 했다라고 하는 사람에게 폭포라고 하는 말은 새롭게 다가오지 않겠어요?
천에 고아에게는 어머니의 사랑. 가슴에 다가오는 게 별로 없겠죠.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한없는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에게는 가슴저미도록 그 말 자체가 다가오는 거쟎아요. 그러니까 사물에 대한 경험은 그 언어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가져오는 거죠. 이제 이해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고 깊이 사랑하지 아니하고는 그 이름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할 수 없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보시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교만한 삶은 하나님의 그 탁월하신 아름다움과 그 위대하심으로 말미암아 받는 감동이 현실 속에서 사라진 데서 비롯되는 거예요. 중생은 우리에게 존재론적으로 인식론적으로 변화를 가져와요. 무슨 뜻이냐 하면 중생을 하게 되면 우리 인간 자신의 존재가 변하게 되요. 어떻게 변하게 되냐 하면 예전에는 없었던 사랑이라는 겨향이 이 안에 생겨나게 돼요. 진정한 사랑은, 잘 들으세요. 진정한 사랑은 운명과 같은 거죠. 자기가 사랑 안할 수도 있고 사랑 할 수도 있고 그렇게 선택하는 것은 운명이 아니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운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거슬려서 행동할 때 그것은 중생과 함께 우리에게 주신 존재적인 성향을 아주 큰 힘으로 거스르는 거예요 그래서 중생의 존재론적인 변화는 사랑이라고 하는 경향이 우리 안에 생겨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중생한 신자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촉진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새로운 것을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성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부패에 흐르지 않으면 이 안에서 이 사랑은 계속 증진되는 거예요.
중생의 또 다른 인식론적인 변화는 뭐냐면 중생하기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중생과 함께 인식하게 된거예요 그게 뭐냐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에요. 그래서 예전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 거의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세상과 육체 안에서만 아름다움을 발견해요. 그런데 중생하고 나면 자신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보이는 거예요. 그걸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리스도의 그 탁월하심 이런 들을 발견하게 돼요. 이런 것들에 대한 그 경험들이 우리 안에서 충분한 정동으로 일어나게 되면 그것을 자랑하게 돼요. 사람이 무언가를 말할 때 그 말하고자 하는 표현의 우선순위는 가슴에서 충만하게 일어난 이러한 변화에 비례하게 되는 거예요. 이 순서를 바꾸어서 설명하려고 하면 말이 자꾸 헛나오고 더듬거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속에서 경험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가 우리의 언어생활을 지배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많이 경험하고 그 큰 사랑과 자비를 경험하게 되면 그러면 그렇게 자기 안에서 일어난 출렁거리는 정도이 크기 때문에 그것을 먼저 말하고 싶은 거에요. 그러니까 말해야 할 것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그 삶이 최상의 아름다운 신자의 내면생활이에요. 다시. 말해야 할 것을 가장 충만하게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신자의 아름다운 내면생활이에요. 그것이 균형을 잃게 될 때, 즉 말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큰 사랑, 십자가의 큰 사랑,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큰 섭리와 계획,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이걸 말해야 되는데 우리의 마음속에서 출렁대고 일어나는 것은 전혀 그게 아닐 때 우리는 할 말이 없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말을 하면 할수록 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닌 머릿속에서 오가는 개념들의 쏟아냄이에요. 그것은 상당한 부분 우리에게 위선을 가져오고 그리고 마음에도 없는 지어낸 말들로 허위를 도입하게 돼요. 이렇게 해서 내적인 생활과 외적인 삶이 온전한 일치를 이루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오늘 성경에 보면 시인이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할 것입니다’ 왜 그렇게 자랑하게 되었어요? 대적들로 에워싸여서 희망이 없는 것으로 보일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 대적들로부터 구원을 받고 그리고 그 대적들을 꺾고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게 된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신 그 놀라운 능력을, 대적을 밟고 이긴 경험을 통해서 나는 매우 약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붙드실 때에 하나님이 그처럼 위해한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이 시인이 뼈저리게 경험한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아주 힘겹게 느껴질 때가 어느 때인가 하면 이런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래서 기도생활이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예요.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 다음에 그 말씀의 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하는 이것이 그래서 내 안에서 말해야 할 것들이 끊임없이 출렁거리며 경험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거기 있는 거예요. 그것 없이는 우리의 모든 생각들이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 속에서 산산이 찢어지는 거예요. 그것들을 한 군데 모아야 돼요. 그 모으는 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진리를 향함으로서만 모아질 수 있는 거에요. 그 때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을 자랑하게 되고 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뭘 자꾸 하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이 흩어지고 찢어지려고 하는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서 모으고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그 안에서 감동을 받고 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 가운데 새로워지게 되는 거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