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불을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두셨으며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 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시 66;11-12).
10절에서는 연단을 얘기했는데 제11절, 12절에서는 그 연단을 은의 연단하는 것과 같은 불의 방식으로 연단을 하는 그런 것들을 실제로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났던 정황들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풀어서 주님 앞에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물이라고 하는 것은 아는 바와 같이 커다란 망을 던져서 물고기를 잡거나 혹은 새를 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그 그물에 들어오게 되면 벗어날 수가 없는 거죠. 특히 이 사람들은 새 그물을 많이 사용을 해서 사냥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가느다란 실로 망을 짜서 새들이 다니는 길목에 나무 같은 데 걸어 놓으면 미처 새가 못 보고 그물망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들어갈 때는 날아간 속도가 있으니까 콱 하고 망에 꽂히는데 앞으로 빠져 나올 순 없고 천상 뒤로 빠져 나와야 하는데 뒤로 빠져 나오려면, 깃털이 문제가 돼요. 깃털이 쓰러진 방향하고 반대로 나와야 되니까...그래서 결국 새가 그물에 갇히는 것 같이 그렇게 그런 상황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묘사하는 것으로 사용하죠. 어쨌든 이것은 결국 뭘 가리키냐 하면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황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이스라엘도 언약 백성으로서 이런 한계들을 참 자주 경험했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도저히 이렇게도 벗어날 수가 없고 저렇게도 벗어날 수 없는 그런 깊은 고통스러운 한계에 직면할 때가 종종 있는 것이죠. 그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 내심으로 우리의 인생을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오직 당신에게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 홀로 당신 자신만의 능력으로 우리를 건져내실 수밖에 없다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갖는 의존의 마음은 순수해지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내 힘으로도 해결할 수 있고 누구든지 도울 수 있는 그 일인데 주님이 도우셨다...라고 말하는 것 보다는 주님 홀로 도우실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분을 전심으로 의존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 우리를 건져내 주시고 지켜주시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갖는 신앙생활의 모습이다...이런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어려운 짐을 우리에게 두셨습니다...이것은 뭐냐면, 노예들의 일상적인 생활을 염두에 두면서 그림을 그리듯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에요. 노예들이 등짐을 지잖아요? 그럼 그 짐이 워낙 크니까 이게 허리에까지 허리 아래에 까지 내려오는 거에요. 그래서 결국은 등짐을 진 이 모습을 그렇게 졌는데 왜 그걸 구지 허리에 두셨다...그런 표현은 무슨 뜻이냐...이 짐이 워낙 무거우면 허리를 못 펴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치 사람들 보기에 그 짐이 허리 위에 얹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고 또 이 허리라는 표현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우리 육체의 힘을 상징하는 하나의 상징어예요. 허리가.....그래서 그 허리에 그 짐을 얹었다라고 하는 것은 노예 생활의 문맥에서 굉장히 커다란 짐을 얹고 그리고 생활하며 살아가는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에요. 뿐만 아니죠. 그러면서 사람들로 우리의 머리 위를 타고 가게 하셨습니다...이 머리는 성경에서 뭐 성경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문맥에서도 이 머리는 굉장히 존귀한 인격의 상징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벗어놓은 양말이나 바지를 밟고 다니는 것도 그렇게 썩 좋은 건 아니지만, 남의 모자를 밟고 지나가는 것은 굉장히 커다란 실례로 생각을 하잖아요. 실례가 아니라 옛날 같으면 모자를 벗어놓은 걸 발로 밟든지 하면 그것은 고의적으로 밟든지 하면 그것은 뭐 죽기까지 싸우겠다는 그런 하나의 표시죠. 마치 그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검을 흉을 보는 것은 마치 그의 아버지를 욕보이는 것과 같다고 그래요. 그래서 남이 가지고 있는 칼을 욕하는 것은 한 번 죽도록 싸워보자...그 뜻이래요. 그러니까 머리라는게 그렇게 존귀하죠. 그래서 시인이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그런 고백을 하죠. 주는 내 방패 내 영광 내 머리를 드시는 자시니이다.....그래서 그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욕을 당할 때 나의 영광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입니다....고백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거든요. 이런 것들을 전부 다 욕보이면서 그러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머리를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이렇게 얘기한 건 뭐냐면 아주 사람들에게 짓밟혀서 비참해진 상태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싸잡아서 고백을 하기를 불과 물을 통과했습니다....불은 시련이죠. 시련...불을 통과했습니다....강한 시련에 불 가운데를 통과하는 거예요. 물을 통과했습니다. 그건 뭘까요...시인이 이걸 쓸 때 100퍼센트 마음 속에 있었던 그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것, 그것 아니겠어요? 홍해를 건넌 것.....어쩌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물과 불이라고 하는 것이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경험한 그 큰 구원을 염두해 두고 이것을 기록을 하였을 가능성도 많아요. 그래서 물을 통과한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단지 환란을 통과한 그 사건이 아니라 사도바울에 의하면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게 결국은 세례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언약 백성들로 물 가운데를 통과하게 하심으로 그 모든 말하자면, 출애굽의 마지막 홍해를 건너는 과정을 통해서 그 백성들을 하나의 세례로 묶으실 것을 예표할 수 있는 장면이다...이런 이야기에요. 그래서 이런 물과 불을 통과하였습니다...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는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주님이 우리를 홀로 버려두신 것처럼 큰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지만 마지막으로 시인은 주께서 우리를 끌어 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그래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그런 모든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어려운 짐을 지게 하신 거기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물과 불의 시련,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는 머리가 짓밟히는 그런 모든 수치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우리를 풍부한 곳에 들이셨습니다.....그리고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시는 것이에요. 이걸 통해서 시인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뭐냐면 이 세상에 있는 백성들도 고통을 당하고 또 때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홀로 버려두신 것 같이 이렇게 큰 고통과 괴로움을 당할 때가 있다는 거예요. 이런 커다란 고통과 괴로움을 한 몸에 당하면서 하나님은 오히려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홀로 건져내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줌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을 갖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훈련시키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탄하고 좋은 길을 주시지만 때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그 평탄하고 좋은 길 속에서 전심으로 의존하면서 살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 평탄한 길 속에서 충분히 우리를 도우시지만 때로는 우리를 더 하나님의 계획대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로 이런 시련을 당하게 하시면서까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기를 원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아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에서 이 시련이라고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구나....평탄한 길을 주었는데 누가 마음에 깊은 절망과 고통을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릴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반문하게 되잖아요? 근데 그렇진 않아요. 왜냐면 우리들의 마음이 많이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를 누리면서 살지 않을 때는 시련이 일어나고 물질이 빼앗이고 건강이 상하고 가족들이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고 하는 이런 고통 속에 있을 때 겨우 하나님께로 돌아올 마음을 갖게 되지만 우리가 은혜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영으로 기도할 때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제목들이 그렇게 우리의 육체의 행복을 중심으로 편성이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먹을 것 넉넉하고 모든 게 평화롭고 모든 게 모자라는게 없어도 그 속에서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보게 되면 먹을 것 있고 입을 옷이 있고 좋은 집이 있다고 해서 자기가 만족하는 것이 아니죠. 하나님 앞에 나의 모습이 왜 이것 밖에 안 될까...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 오늘 오셔서 나의 내면의 세계를 보시면 얼마나 실망하실까...그리고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에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것일까....이런 고민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죠. 이 때 우리들은 오히려 시련과 환란을 만나서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보다 더 절실한 마음으로 하나님만이 나의 이런 내면의 세계를 고칠 수 있고 은혜를 부어주실 수 있다는 마음 때문에 더 많이 매달리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환란을 당했다고 해서 모두 주님을 의지하며 매달리는 것 아니고, 평안하다고 해서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에요. 가장 성숙한 신앙은 물질적으로 환경적으로 전혀 동요함이 없는 평안한 속에서 그 속에서 자신의 영혼과 그리고 영적인 문제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며 혹은 다른 사람들의 상황을 보면서 그렇게 마음을 찢듯 하나님을 의존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하나님을 충분히 의존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다루어 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이런 신앙의 경지를 터득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고 또 터득하였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올바로 마음을 지키면서 선한 의지로 살지 아니하면 부패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실 우리의 약함은 하나님의 약함이 아니라 그 약한 것을 통해서 주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가짐으로 주님의 강함을 보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허락하시는 것이죠. 그래서 날마다 주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사는 신앙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