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깨신 후에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시73:20~21)
녹취자: 김경애
시인이 악인이 형통하는 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어서 괴로워했습니다. 무지는 두 가지를 낳는데 어떤 때는 무지하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막 살게 만들거나 두 번째는 올바로 살려고 할 때에는 그 무지가 인간을 침체에 빠지게 만듭니다. 특히 이 무지로 말미암아 침체에 빠지게 될 때에는 마치 진흙탕 속에 들어간 차가 아무리 엔진을 힘차게 돌려도 헛바퀴가 도는 것처럼 그렇게 거기서 바퀴가 겉도는 것처럼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기도를 해도 안 됩니다. 노력을 해도 쉽지 않습니다. 그 해결책은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시인이 그런 사람입니다. 기도를 안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께 책망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무지에서 벗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큰 깨달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자신이 깨닫기도 하지만 청교도들이 믿었던 바와 같이 자신보다 월등히 우월한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이런 종류의 질병들을 치유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땅에 목회자를 두신 이유입니다. 이 목회자의 가장 커다란 의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높은 수준에서 성도들이 자신이 탐구해서는 알 수 없는 은혜의 세계의 진리들을 혹은 인간 심령에 있는 깊은 상태들을 가르쳐줄 수 있는 그것이 하나님이 목회자를 두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장 기도해야할 것이 그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말씀에 대한 어느 정도의 관념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전부가 아니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자기 자신이 그 말씀을 따라 살고 추구하고 하는 가운데 총체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자라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계적인 지식과 교리에 대한 이해, 역사에 대한 지식, 일반학문에 대한 이해, 하나님과의 만남의 진수인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함께 질서지어지면서 베드로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사람은 경건했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지식으로써는 악인의 형통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 무지는 이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불행한 상태와 악인의 형통한 상태를 상정하고 둘을 비교하면서 공평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사상에 감염되는 그 순간 하나님을 향한 친밀함, 하나님께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확신, 성도로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기쁨, 이 모든 것들이 한 번에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소에 들어갈 그때에 비로소 누가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도 그는 한줄기 섬광과 같이 자신의 마음에 비치는 진리의 조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영혼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성소는 원래 하나님께 바쳐진 곳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성소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지성 속에 한줄기 섬광과 같은 빛이 번쩍였는데 그 빛을 통해 알게 된 진리가 바로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하나님 이외의 모든 사물들은 한시적인 존재라는 것이 이 시인의 마음속에 번개처럼 스쳐지나갔던 것입니다. 잠시 머무는 이 세상 속에서는 비록 그것이 영원한 것처럼 보여도 언젠가 끝나는 때가 있으며 그리고 그 끝난 후에는 영원이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그 영원이 하나님이고 시간을 넘어 영원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면전 앞에 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깊이 경험하면서 이 시인은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꿈을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꿈을 꿉니다.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얼마나 생생한 현실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꿈속에서 울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기뻐서 웃다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깨어나면 꿈입니다. 때로는 종종 꿈속에서 꿈을 꾸기도 합니다. 저는 언젠가 꿈속에서 두 번의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꿈속에서 꿈을 꾸었는데 그 꿈속에서 다시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을 깼는데 꿈이었습니다. 세 번째 깨니까 진짜 깬 것입니다. 특이한 체험을 했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꿈속에서 꿈을 꾼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꿈속에서 꿈을 꾸었는데 깼습니다.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꿈이었구나하면서 깼는데 진짜 꿈에서 완전히 깨어난 것입니다. 이런 경험들은 결국 우리가 유일한 현실이라고 믿는 그것이 얼마나 덧없는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꿈을 꾸고 난 후에는 그 꿈에 자기를 통곡하게 만들었던 이유, 그렇게 행복하게 웃게 만들었던 이유, 분노하고 좌절하게 만들었던 그 이유를 꿈속에서처럼 계속해서 고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냥 꿈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토록 생생하게 알았던 것이 비현실이라고, 꿈이라고 누가 생각했겠으며 꿈을 깨고 난 후에 현실을 경험하고 난 후에는 그 현실이 잠잘 때 꿈속에서 만났던 현실의 실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시인이 오늘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잠을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하는 것처럼 주께서 깨신 후에는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이 언제 주무셨다는 말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계시고 우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시인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우리들이 현실로 여기는 이 현실 속에서는 마치 하나님이 주무시는 것처럼 혹은 잠시 잠이 드신 것처럼 우리에게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많은 시인들이 ‘주여 언제까지 주무시나이까? 일어나 깨소서.’ 이런 탄원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인식론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무신다는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느낄 수가 없는 현실이 된 처지에서 하나님께 깨어나라고 호소하시는 것이니까 이것은 실제로 잠들고 있는 하나님을 깨운 다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것을 우리들이 생생히 보고 느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탄원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현실에서는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경우가 있지만 시인이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대면하게 된 것처럼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휘장을 걷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 서게 될 때에 그때에 그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위엄 앞에서는 하나님이 주무시는 것 같은 현실을 겪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깰 때에’ 라는 이 대목은 바로 이 모든 악인과 선인들이, 악한 자들과 선 한자들이 삶과 죽음 사이의 휘장을 걷고 주님의 임재 앞에 서게 되는 죽음 이후의 상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문제를 하나님이 주무시는 것처럼 상황을 내버려두시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이 깨어나신 것처럼 모든 일들을 제대로 돌려놓으시는 때가 있는데 그때를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저는 그 해석도 반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성소에 들어간 때에 이 시인이 종말론적인 개념을 가지고 이 세상의 문제들을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보면 후자가 해석도 틀렸다고 할 수 없지만 전자의 해석이 훨씬 어울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실 것입니다.’ 저희 형상이 무엇입니까? 악인들의 형상입니다. ‘악인들이 살아가는 하나님 없이 성공하고, 하나님 없이 평안한 그 형상을 하나님이 멸시하실 것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내 마음이 산란하여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이것은 앞에서 느꼈던 혼란과는 다른 것입니다. 앞에서 느낀 혼란은 이런 혼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는 벌을 내리시고 선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신다는 권선징악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에 악인들이 형통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찔렸으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람에게 혼란이 일어났다면 이 두 번째는 하나님의 공정하심과 정의로우심을 의심하고 있는 마음에 그것들에 대한 올바른 설명을 찾게 되니까 하나님을 향한 불신과 혼란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신뢰했던 마음에 금이 가는 것이 첫 번째 혼란이라면 두 번째는 하나님을 향한 의심, 자기의 판단을 신뢰하는 마음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에서는 지성적인 커다란 말하자면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린 기억이 납니다. 기독교 신앙은 지성의 벼락을 맞기 전에는 불가능한 신앙이라고 말입니다. 그 지성의 벼락을 이 시인이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인생이 여기에서 토막처럼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 이것이 뻗어 그래서 영원을 향하여 치달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시인이 ‘심장이 찔렸나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고통이었는지를 보여주고 두 번째는 그런 잘못된 이해가 얼마나 자기 신앙에 치명적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데는 찔려도 살 수 있지만 심장은 곧바로 죽습니다. 큰 고통과 치명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이 시인에게 혼란을 느끼는 상황에서 충고한다면 그리고 그를 진짜 위로하고 싶다면 무엇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좋은 밥, 예쁜 옷, 훌륭한 선물, 그 어떤 것도 이 사람을 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는 것 그 자체가 광대하신 하나님을 매일 매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