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성격
언약을 돌아보소서. 대저 땅 흑암한 곳에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시:74:20)
녹취자: 이경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탄원을 올린 이 시인은 마치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의 기도에 묶으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언약을 제시합니다. 이 언약은 일방적인 면과 쌍방적인 면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 주권에 관한한 이 언약은 일방적입니다. 그러나 의무와 순종 이것과 관련해서는 쌍방적이죠. 그래서 이 언약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을 향해 베푸시는 무제한적인 사랑 은혜 자비 긍휼 주권 이런 것을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이 되었고 또 성경에서 다른 곳에서는 이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신 것이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과하는 의무 책임 순종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행하는지에 대해서 그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정당성 이런 것들을 제시하는데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재밌는 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 긍휼 이런 것들을 호소할 때에도 하나님께 언약을 제시했고 또 하나님이 언약백성들에게 너희는 좀 올바르게 살아라. 라고 할 때에도 하나님이 언약을 제시했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실 때에도 언약을 제시하셨지만 언약백성들을 심판하실 때도 언약을 제시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언약은 우리말로는 언약이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사실은 적당한 말이 없어요.
사실은 이 언약은 언약 하고 번역하면 일방적으로 약속을 하는 것이 되어 버리고 계약 하면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쌍방적으로 약속을 맺는다는 개념은 전달은 되는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 그 자체가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와서 그 주권 안에서 맺어지는 언약이라는 일방성우위에 쌍방성 개념은 전달이 안 돼요. 매우 어렵죠. 우리나라말의 한계니까요 그래서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이 언약개념들이 상당히 많이 잘못 전달이 되었어요. 왜냐하면 언어라고 하는 것 안에서 의미가 규정이 되기 때문에 언어가 그렇게 되니까 그래도 우리는 계약이라고는 잘 안 부르고 언약이라고 부르거든요. 그러니까 일방성만 아주 지나치게 언약관계에 있어서 일방성만 지나치게 강조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들이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에 와서도 이 개신교 안에서도 이 언약개념을 가지고 이제 언약의 일방성을 강조하는 해석 가들과 쌍방 성을 강조하는 해석 가들이 같이 나오게 되요. 그런 해석들이 영국에 들어가서 청교도들에 의해서 이 두 가지가 아주 절묘한 조화를 이룬 형태로 설명이 됩니다. 그런 설명의 아주 탁월한 이해중 하나가 존 오웬 목사님의 업적중의 하나예요 그런데 여기에서 이 시인이 언약을 돌아보소서. 언약을 기억해 주십시오. 혹은 회상하십시오. 그러면 당연히 무엇을 이야기 하는 것이겠어요. 자신들의 죄 그리고 비참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것이에요. 한 번도 이 시인은 하나님이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역사적으로 징계하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의 정당성에 도전하거나 그러지 않아요. 오히려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인식하면서 언약백성들의 죄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을 대비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 시인은 자신들의 편에서 죄를 짓고 악을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무슨 문제가 남느냐면 우리만이 언약의 당사자가 아니라 하나님도 언약의 당사자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을 행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원수들에게 짓밟히고 성소가 유린되는 것은 이 것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만약에 그것으로 끝난다고 할 것 같으면 쌍방관계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순종을 따라서 응보하시는 하나님은 성취되었지만 그러나 일방성을 따르자면 자기의 백성들을 버리지 않고 언약관계를 도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은 설자리가 없는 거예요. 이것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데 이것을 성경에서는 믿음이라고 보는 거죠. 이 언약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베리트 이거든요 학자들은 이 베리트라는 말이 어디서 왔겠느냐 여러분들이 아는 바벨론어 바리투에서 오지 않았을까 이렇게 추측을 해요 그런데 상당히 많이 동의하는 견해예요 바리투 바리투가 무엇이냐면 족쇄예요 그래서 죄수들을 옥에 가두고 도망을 할 수 없겠금 이 사람의 발하나와 저 사람의 발하나를 묶어놓는 족쇄예요. 그러니까 족쇄로 묶인 사람들은 운명공동체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하시는 선포가 무엇이냐면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서로가 서로의 소유가 된다는 말이 운명공동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이지요. 어찌하여 우리를 영영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 이렇게 호소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시는 모든 섭리적인 심판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에요 절대로 그렇게 해석하면 안 돼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의 뜻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원수들이 한 짓입니다. 그 뜻이 아녜요. 시인들은 그런 식의 역사관을 갖고 있지 않아요. 확고하게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리고 그것은 아주 도덕적으로 정당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저버리고 하나님 앞에 죄짓고 불순종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정당하신 것이죠. 그렇지만 여전히 일방성의 문제는 남는것이예요. 원래의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이고 그 언약의 당사자인 인간은 불완전한 사람이니까 그런 것을 다 알고 하나님이 선택하셨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고 살아도 상관없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산다고 하는 사도바울의 지적으로 떨어지는 것이죠. 바로 그런 아주 커다란 뿌리 깊은 언약사상을 배경으로 언약을 돌아보소서.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만약에 이 백성이 저지른 악과 죄를 본다면 하나님 이렇게 내버려두시고 끝내셔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이 당시의 언약을 돌아보신다면 이 백성들을 이렇게 내버려 두셔서는 안 됩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그 때리시는 것은 언약의 쌍방성이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당신자신을 배반한 자식을 어루만지시고 위로하시는 것은 일방성의 소산이란 말이죠. 일방성의 소산이예요. 그래서 이 시인이 어떻게 보면 좀 인간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약점을 찌르는 거예요. 하나님 당신 자신이 약해서 약점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자신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하신 그 말씀 토대로 당신의 언약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죄짓고 악하여 범죄했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 붙이사 악인들에게 짓밟히게 하셨습니다.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전히 당신은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분이시고 그 언약을 우리와 맺으신 당신은 한번 선택한 당신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영원하신 사랑과 은총의 주님 이십니다. 그것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언약백성의 믿음 이라고 할 때 이 믿음은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하는 심리학적인 확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 이예요. 그러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가 이루어지는 그 신앙의 방식이 무엇이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방식이 언약을 기초로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 다 삭제하고 무한이 높으신 하나님을 명상하면서 그분 때문에 모든 일이 다 잘될 것이다 그분이 다 도와줄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엄격한 의미에서 진실한 신앙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언약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하니까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십시다. 아주 옛날부터 이 성경을 구속사의 시절을 나누는 일들이 있었어요. 존 오웬 목사님이 쓰신 성경적 신학이라고 하는 한 800페이지 가량 되는 두꺼운 책인데 거기서 보면 시대를 나누어요. 그래서 아담의 시대 노아의 시대 그다음에 아브라함의 시대 모세의 시대 이런 식으로 나누죠. 그러면 그 시대의 구분의 근거가 무엇이냐 단순히 사람 이름이 아니에요. 사람이름이면 어디 아담만 있겠어요. 아브라함 있겠어요. 모세만 있겠어요. 노아만 있겠어요. 그 중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름따라 다 나누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 시대를 나누는 핵심이 있어요. 그 핵심적인 열쇠가 뭐냐면 언약 이예요. 아담 시대 그러면 아담시대의 언약이 있는 거예요. 노아시대 그러면 노아와의 언약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노아가 죽었어도 노아의 언약이 시대마다 언약이 바로 그 시대를 구분하는 키예요. 다른 언약이냐 다른 언약이 아니라 일관성을 가진 언약인데 그 언약이 시행되는 방식이 시대마다 구별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노아가 죽었어도 노아에게 주신 언약을 따라서 그 방식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가 경륜될 때에는 노아가 죽었어도 노아시대예요. 그리고 아브라함이 죽었어도
여전히 아브라함의 시대라고 보는 거죠. 신약시대 그러면 그 언약이 일관성인 면에서는 같은 언약인데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로운 언약으로 주어져서 언약이 작동하는 방식이 구약에 작동하는 방식과 신약에 작동하는 방식이 다른 거죠. 그래서 너희를 위하여 세우는 새언약이니 그럽니다. 디아 데케 카이네 라는 희랍어를 써요 그래서 새 라는 말이 똑같은 제품인데 새로 나와요 그때는 네오스라는 말을 써요. 예를 들자면 똑같은 옷인데 작년에 만든것인데 형태가 하나도 안 바뀌고 올해 나왔어요. 새거 예요 네오스예요 .그런데 작년에 만들었는데 작년에 이런 것을 만들었던데 올해 새로 나왔는데 이게 수동식에서 전자식으로 바뀌거나 아니면 성질자체가 아주 달라지게 나온 거죠. 예를 들자면 옛날에 가지고 있었던 이런 핸드폰이었는데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나왔다던 지 이런 것은 네오스가 아니라 카이네 예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 된 것이죠. 그렇게 신약이 바로 그런 시기적으로만 새것이 아니라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경륜으로서 하나님이 역사를 움직이시는데 그 하나님의 언약의 경륜이 각각 다른 것들이 칼라플하게 나타나는 거죠 그것이언약이예요 그 언약을 돌아봐 주십시오. 그것이 무슨뜻이예요? 당신은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우리가 죄짓고 불순종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 당신은 비난 받으실 수 없으십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은 언약을 맺으신 당신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이게 하나님의 명예와 관련되는 거죠. 어떻게 관련이 되요? 자기 백성들을 도울 힘이 없다 그래서 모세가 내가 이제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없애버리리라 그리고 너를 시조 삼아서 다시 새로운 민족을 만들겠다. 그랬더니 모세가 그러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잖아요. 그게 뭐냐면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만약에 주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이방의 백성들이 여호와라는 한 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끌어 냈지만 일을 그러나 일을 진행하고 보니까 힘이 능력이 모자라서 끝까지 인도할 수 없으니까 죽여 버리심으로서 자신의 무능함을 정당화 시켰다 이런 비난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호소하는 장면 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 영광 이 모든 것이 언약과 관련 된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그러니까 이 언약을 돌아보소서. 라고 하나님의 백성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마음은 가장 약해지십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약점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 약점이 하나님의 불완전성 때문에 오는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 때문에 언약백성들에게 느껴지는 소망의 근거로서의 약점이라 그렇게 보면 이것은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라는 강점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