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를 찾을 때
내가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시77:2)
녹취자:이경순
저는 77편이 무슨 상황에서 씌어졌는지는 잘 알수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확실한 것 하나는 무엇인가 환난을 만났고, 두 번째는 마음에 큰 고통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를 찾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이 시편 130편을 주해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깊음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짖을 때 그 깊음은 둘로 나눠진다.’ 하나는 환경의 깊음이고 하나는 내적인 심령의 깊음이다.’ 이것이 무슨뜻이냐면 깊은데서 부르짖나이다. 하는 것의 그 깊은 게 웅덩이 같은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계곡이나 웅덩이같이 깊이 파져서 구원의 여망이 보이지 않는 그런 상황을 가르키는것입니다.. 그런 것이 환경적으로 있을 수도 있고 또 우리의 심령적으로도 그런 깊음이 있을 수 있다 이겁니다. 이 두 개가 찾아오면 항상 짝으로 찾아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환경적으로 커다란 환난을 만나게 되면 마음도 깊이 침체가 되어서 그래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를 찾지못하며 방황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정결하게 하고 해서 거기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오늘 이 시편 77편이 아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77편 2절은 크게 세토 막으로 나눠지는데 환란을 당한 시인, 그다음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시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만 바라는 시인, 이 세 가지를 보여주고 잇습니다. 제일먼저 시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주님을 찾는 시인을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들이 항상 하나님을 찾고 갈망하며 그렇게 매달리며 사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진데 그렇게 못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부패와 죄라고 하는 것은 결국 궁극적으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우리를 지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은혜를 멀리 떠나면 이 세상에 대해서는 아주 약해지지만 하나님께 대해서는 마음이 아주 강퍅해집니다. 그래서 ‘리챠드 스윕스라고 하는 청교도가 인간의 마음을 논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세상을 향한 마음이 어떻게 대조되는지를 설명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무른 마음은 세상을 향해 딱딱하고 ,세상을 향해 무른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딱딱한 마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실망하고 그다음에 희망을 갖고 이 세상에 보이는 것들에 의해서 마음이 출렁거리면서 영향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마치 돌을 던지면 진흙속에 들어가면 푹 하고 박히지만, 그러나 딱딱한 콘크리트 위에 돌을 던지면 돌이 튀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박히지 않고 튀는 겁니다. 그럴 때에는 사람이 환란을 당해도 하나님을 찾지 않아요. 어떠한 과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 시인은 환란을 만났고 이 환란을 만난 날에 그는 누구를 찾아야 할지 잘 알았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 하나님 이었습니다.그래서 환란 날에 그는 주님을 찾았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환란 날에 누구를 찾으십니까? 이 시인이 언약백성인데 언제는 환란 날에 주님을 찾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을 인정하면 사는 언약백성인데 환란 날에 하나님을 찾지 않았겠느냐 이 얘기입니다
그런데 환란 날에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간절히 찾기를 환란 날에 더욱 그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길을 뛰어가거나 걸어가거나 혹은 너무 지쳐서 잠시 앉자서 쉴 때도 있지만 옳은 길을 걸어가고 있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길을 올바로 택하지 아니하였다면 그 길을 걸어가는 태도와는 상관없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이런 시련과 환란을 주셔서 그래서 당신을 간절히 찾지 않을 수 없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시기도 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밤에 내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구약에서 손을 들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과 간절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밤에 자신의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을 찾는 이것이 어느 한순간에 솟아나는 욕망이 아니라 오래도록 지속되는 쉽게 꺾이지 않는 지속성이 있는 열망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한 번에 기도에 듣지 아니하시고 오랜 시간동안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할 때 그때야 들어주시는 적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섭리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진정으로 우리자신에게 믿음이 있는가를 시험에 보시는 과정을 밟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지를 살펴보신 다기 보다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자신에게 우리자신의 한계가 어디에 와 있는지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자신의 손을 들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또 하나님께 경건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하였지만 그 기도는 상당히 지속성이 있는 기도였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찾는 마음만큼이나 쉽게 뒤로 물러서지 않는 기도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에는 많은 노폐물들이 있습니다.그래서 건강을 위해서 저녁때 좀 걷는데 매일 걷지는 못하지만 짧게 걸으면 한 6키로, 길게 걸으면 한 9키로, 아주 길게 걸으면 한 13키로 이렇게 걷습니다. 되게 피곤합니다. 들어와서 샤워하면 ‘탁’ 쓰러지면 너무 고단합니다. 한 9키로 정도 걷고나면,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아침에 일어날 때도 몸이 고단합니다. 그런데 운동을 한날은 아침에 고단하기는 한데 컨디션은 좋습니다. 그런데 하지 않은 날은 고단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어떻게 온 몸이 그 뭐라고 형언할 수 없이 힘이 듭니다. 그것들은 뭐냐면 몸속에 있는 어떤 안 좋은 것들이 운동을 하면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근육을 움직이고 했으니까 힘은 드는데 이런 것들이 빠져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격하게 운동을 하면서 흘리는 땀은 오줌과 거의 동일하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이제 조용히 사우나에서 흘리는 땀은 거의 맹물 이랍니다. 건강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처럼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있는 이런 찌끼들이 씻겨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늘 기도하는 모습을 갖추고 새벽기도에 늘 나오고 하는 것은 너무 훌륭한 생활습관이고 신앙생활의 좋은 하나의 실천이지만, 간절히 열렬히 기도하는 것, 이것은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기도에 있어서 우리들이 유익을 얻는 두 가지의 조건이 있는데 지속성과 간절함입니다. 아무리 간절해도 지속적이지 않으면 영혼의 유익이 많지 않고 아무리 지속적이어도 간절하지 않으면 우리의 죄를 죽일 수가 없는것입니다.그래서 간절하면서도 지속적인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지속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쉽게 물러설 수 없는 간절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네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집중 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간절함의 요체가 아닐까요. 햇빛을 돋보기로 모으면 그것이 큰 힘을 발휘해서 물건을 태우는 것처럼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처럼, 산에 작은 물들이 흘러내려오지만 그 물이 보여서 폭포가 되어서 떨어지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바위도 페이는 것처럼 그런 집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면서 우리를 방해하는 양극단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나는 이제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 하나님 앞에서도, 인간을 향해서도 아무 희망이 없다고 끊어져버리는 절망 키에로케로라고 하는 철학자가 그것을 죽음에 이른 병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사람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이랬을 때 인간에게 찾아오는 것은 큰 불안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천주의 철학자들은 긍정적으로 보았지만 사실은 그러한 불안이 밀려올 때 인간은 사실은 자신의 삶의 근거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기 나름대로 삶의 근거를 마련하는 것은 마치 집을 가출한 자녀들이 이제 그 집에 돌아가지 않고 자기 힘으로 집을 짓는 것과 유사한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속임이죠. 그렇게 해서 인간이 자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또 하나의 극단은 부요한 마음입니다. 하나는 절망하는 마음 이쪽 끝에는 부요한 마음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도 아, 이정도면 되지 않았을까? 그래도 많은 희망의 증거가 있어, 그렇게 발견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더 간절히 찾으면 이것은 오히려 우리의 기도에 도움을 주는데 그게 아니라 ‘뭐 이만큼이면 되지. 이 보다 더 좋은 환경이 어디에 있겠어? 그러니까 족하다 ,그러고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위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시인은 그런 종류의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는 모든 위로를 일체에 거절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목마른 마음이 되어서 아버지 앞에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탁월한 믿음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5편에서도 시인이 고백을 하죠.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하나님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찾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보였던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으로부터 오는 위로를 거절하였다 그 고백이 바로 그런 경험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정말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될 그런 상황 속에서 그뿐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상황에 있어서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위로가 되어주시고 그분께로부터 오는 위로가 없을 때에는 도대체 나의 무엇 때문에 그 뿐께로부터 오는 위로가 없을까? 생각하면서 자기를 고치며 그 위로를 바라는 것이 마땅한 것이지 다른 곳에서 위로를 구하는 것은 마치 멀리 떠난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가 다른 남자로부터 위로를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신앙의 외도입니다. 그래서 오웬 목사님의 자기의 기독문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말고 다른 것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너무 잘 못사는 일이고 신성모독에 죄를 짓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향한 전적인 의존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생활것 이것이 바로 시인이 경험한 바이고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경험해야할 바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