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고백의 힘 2
주는 기사를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으시고 주의 팔고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구속하셨나이다(셀라)(시77:14~15)
녹취자 : 이경순
이미 11절부터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의심이 될 때 이 시인은 나름대로 거기에서 벗어나는 회복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회복의 기술이 무엇이냐면 바로 하나님이 이전에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14절 15절에서도 역시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기이하다 라고 하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에게만 고유한 일들을 자주 가르쳐요. 그래서 주의 법에 기이한 것을 내게 보여주시옵소서. 이런 것들입니다. 영어로 'wonder'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도 그 표적이나 기사 같은 것 이 목적은 이런 일들이 인간사회에서는 평생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하나님께만 고유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믿음을 갖게 되는 거죠.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이한 일을 보여주시는 신앙적인 의도예요. 그것을 이 시인은 생각하는 것이죠. 한 가지가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오는 많은 기이한 일 그 일이 행해졌을 때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니면 이 일을 행하실 이가 아무도 없다 라고 말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바로 그러한 일들을 하나님이 행하셨다는 거예요. 여기에서 우리들이 하나 생각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면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민족이라는 말과 나라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나라는 그야말로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민족은 나라와 일치되지 않고 나라 속에 있는 많은 백성들 혹은 민족이 같아도 나라가 다를 수 있구요 민족이 달라도 나라가 같을 수 있잖아요.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대게 꼭 그렇지는 않지만 그래도 비교적 단일민족이기 때문에 민족과 나라가 일치하는데 대부분의 나라는 일치하지 않는 나라가 많아요. 미국 같은 경우는 다종족 사회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한 나라안에 많은 민족이 있고 우리도 이젠 150만 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와서 이 땅에서 같이 살고 있으니까 또 많은 다문화 가정들이 생겨나고 있으니까 민족의 개념들이 국가와 일치하는 개념이 아닌 다른 개념들이 되는 거죠. 여기서 복수로 나오잖아요.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안에 있는 다양한 민족들을 함께 의미하기도 하고 이스라엘 지경 바깥에 있는 민족들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죠. 어쨌든 이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그 일이 그렇게 나 혼자 간직하고 있을 만한 일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 가운데 뛰어나게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독점적으로 사랑하시고 그리고 그 주님이 정말 기이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라고 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이 알리셨다는 거예요. 좀 더 설명을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12절에서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 하셨습니다 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주의 팔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특히 구약성경에서 팔이라고 하는 것은 손하고는 좀 달라요. 위에 있는 부분을 가르키는데 이 팔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대게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에 몇 가지 의미가 있는데 우선 첫째는 힘이 예요. 두 번째는 애정을 가진 친밀함 이예요. 그래서 아가서에 보면 그 팔로 나를 안고 신랑에 대한 신부의 노래에서 나오죠. 그담에 하나님이 그 팔로 자기의 백성들을 안으시고 그 팔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등등의 표현들이 많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그런 뜻도 있고요 그담에 세 번째는 보호예요. 그 팔로 하나님이 막아주시고 지켜주시고 팔 자체가 보호해주는 거예요 이런 정도의 의미를 성경 속에서 가지고 있어요. 여기서도 당신의 팔 하나님의 위대한 힘과 능력 그리고 친밀함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 이것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 팔로 주의 백성인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 요셉이라는 이야기는 자주 나오지 않는데 야곱의 자손 그러면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대명사였어요. 이것은 왕국이 나뉘어졌을 때 북왕국 이스라엘을 지칭하기도 하고 두 번째는 이스라엘 전체를 지칭할 때 야곱이라고 지칭하기도 해요. 야곱보다는 이삭이 더 온유하고 훨씬 사기꾼 기질이 없는 그런 일관되고 신실한 삶을 이삭이 살았는데 왜 그러면 이삭의 자손이라고 이야기 안하고 야곱의 자손이라고 자주 이야기 할까 물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도 이야기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이야기 할 때와 야곱의 자손 혹은 야곱 이라고도 그냥 부르기도 하거든요 이스라엘 백성을, 약간 의미의 차이가 있어요. 아브라함의 자손 이렇게 이야기할때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을 택하셨고 그들에게 복주시고 은총을 주시기로 약속을하셨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언약의 일방성과 주권성을 강조할 때에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해요. 예수님께서도 특별히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는 그 자체를 자랑스러워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을 덜 믿고 하나님 앞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이 선택하신 책임을 깊이 인식하며 사는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언약의 충실한 삶을 보여야 되는 것이죠. 그거에 비해서 야곱 혹은 야곱의 자손 이라고 할 때에는 어떤 그림들을 보여 주냐면요 한번 여러분 야곱을 생각해보세요. 그는 간사한 사람이었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바로를 축복할 정도로 하나님 백성다운 사람으로 다듬어 거룩하게 만드신 일에 있어서 표본이된 사람이예요. 그러면 여러분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과 아브라함을 향한 경륜을 비교해보면 아브라함의 경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과 호의가 강조가 많이 되요. 내가 너를 택하고 너를 모든 민족의 아비로 삼고 그리고 너를 축복의 근원으로 삼고 이렇게 들어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 속에 아브라함 언약의 전통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그 언약 때문에 우리를 언제나 호의롭게 지켜주실 것이다 라고 하는 그 신앙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면면히 흘러요. 그래서 외적들이 쳐들어오고 나라에 위기가 일어나고 그래도 절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실 것이라고 하는 그런 낙관주의가 들어오게 되는 것이죠. 그런 관점에 강하게 사로잡혀있던 사람들은 선지자들의 경고와 심판 이런 것들에 대한 메시지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이라는 것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죠. 그에 비해서 이 야곱의 경우에는 역시 이 사람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사기꾼 같은 사람이 아주 성결하고 거룩한 언약의 족장으로서 다듬어지는 것은 사실인데 아브라함에 비해서 혹독한 연단을 겪게됩니다. 결국은 뭘 보여 주냐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당신의 주권을 따라 자기의 언약백성들의 족장들을 향해 당신의 일방적인 언약을 베풀어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사람 되게 하시는 것은 틀림없는데 야곱의 경우에는 더 혹독한 하나님이 추호의 양보도 없이 그 언약을 굳게 붙드시면서도 끊임없이 그를 연단하여 주님앞에 세워서 그래서 사기꾼과 같은 야곱이 이스라엘 같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놀라운 은총의 또 다른 경륜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야곱이라고 부르실 때에는 바로 그런 그림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야곱과 요셉의 자손 이 사람들을 반복을 하는 것이죠. 요셉의 자손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량하셨느니라. 속량한다는 말은 구원한다 그런 뜻이거든요 당신이 값 주고 그리고 그 백성들을 사는 것처럼 그렇게 당신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당해야 하는 시련과 환란들을 당신이 감당하고 막으시면서 그래서 이 백성들을 건져주셨나이다. 라고 노래를 하는 거예요. 11절과 12절 13절 14절 15절 여기에서 무엇인가 느껴지는 것이 없습니까. 시편 77편 맨 처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실 것입니다. 이 교훈은 지극히 개인적인 무슨 사건인지는 모르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이렇게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내게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믿는 거예요. 그리고 오랫동안 다른 사람에게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는데 그런데 일말의 커다란 회의가 밀려오는 거죠. 그렇게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나아 가야되겠다고 매달리는데 일말의 회의가 혹은 의심이 밀려오는 거예요. 그것은 주께서 나를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 베풀지 않으실까? 어쩌면 그분의 인자하심은 나에 대해서 영원히 끝났는지 몰라 그분의 약속도 이제 폐하였는지도 몰라, 내게 베푸실 은혜를 하나님이 잊어버리셨나봐, 이젠 더 이상 나를 긍휼이 여기시지 않을 거야 ,이런 것들이 막 밀려오는 거죠 무엇 때문일까요? 양심의 작용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가 올바로 살지 못했던 수많은 기억들이 밀려오면서 이 양심들이 하나님 앞에 아주 명민해지는 거예요 .
이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이기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하고 나면 상당히 신뢰할 수 있는 인간 안에 있는 마지막 율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죠.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삶을 살 때에 이 올바른 양심이 마음속에서 계속 작동되게 하는 것 이것이 없으면 아예 회개도 불가능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고치는 일도 불가능 합니다. 히스베르투스 피추스라는 화란의 신학자가 자기의 책속에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엄정하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주장해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거죠. 누구나 다 하는 이야기지만 이분의 이야기는 좀 달라요. 뭐냐면 할 수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그것을 향해서 엄격하게 그것을 지키면서 살아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엄정한 양심의 칼날 앞에 자기를 세우는 것이라고 말해요. 그러니까 결국 오늘날과 같이 윤리가 실종된 시대에 살아가는 것은 양심의 기능 자체를 무력화 시키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 자체가 근거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계속해서 폭로하는 것이지요. 잘못된거지만 그렇게 하는거죠. 그래서 결국 인간에게서 양심에 대한 인식 그 자체를 허물어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함으로서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라고 보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자유가 아니라 속박이거든요. 예를 들어볼까요. 애들이 어렸을 때는 공부를 해야 되요. 그런데 공부가 전부는 아니지만 하여튼 성실하게 공부를 해야지 되는데 안합니다. 공부를 해라 아니면 행동을 올바로 해라 하는 것들이 다 속박처럼 보이죠. 그런데 자유가 주어져요 그러면 마음대로 하죠. 게임도 하죠 뭐 술도 먹겠죠. 아니면 음란물도 보겠죠. 뭐 도덕적으로 비난받지 않을 다른 행동들도 하겠죠. 시간이 지나가보면 어떻게 될까요. 그게 자기 속에 빠져드는 거죠. 그래서 어느 게임업체 사장이 하도 학부형들이 자기한테 편지를 보내서 그 게임 때문에 우리아이들 다 망가진다고 그러니까 그럴 리가 있나 그리고 자기가 진짜 게임에 몰두해본거예요. 사장이 한 달 만에 중독이 되더랍니다. 자기가 만들었어도 자기가 그렇게 몰입하지 않았는데 구속받지 않고 몰입하니까 한 달 지나고 나니까 자기가 자기회사에서 나오는 게임을 안하고는 못 베 기게 되는 거죠. 이사람이 깊이 결단하고 사업을 접고 교육 컨텐츠 쪽으로 자기 사업의 방향 전환 했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읽어봤는데 그렇게 되는 것이죠. 결국은 그게 뭐예요 그게 구속인거예요. 그 자체가 속박인거예요. 여러분 예수 믿고 나서 신앙생활잘 하려고 그럴 때 자기 안에 있는 예전에 내 마음대로 하려고 했던 그 기질 습관 이런 것들 때문에 계속해서 얽매이는게 느껴지잖아요. 개 줄에 묶여서 그냥 가만히 얌전히 엎드려 있을 때에는 속박이 안느껴지지만 그것을 박차고 나가려고 하면 목이 잡아 채이면서 고통이 느껴지는 거죠. 바로 그런 시기가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죄 가운데 있을 때 그것을 뿌리치고 은혜가운데 못나오는 이유가 바로 그런 자체가 속박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모든 것에서 건져주시는데 어디서 놀라운 위로를 얻느냐면 자기 개인적으로 생각할때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끝났는가 난 버림받았는가 이런 고민이 계속되는데 역사를 회상하는 거예요. 회상하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 주실 것이라는 사실이 의심되지 않는 거예요.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사랑과 은혜 보호 이런 것을 받는 것을 개인적으로 내게 주어진다라고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사실은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게 부어주신 사랑을 그 분과 혼연 관계에 있는 교회에 전달하시고 우리는 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곧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몸에 접붙여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받는 것예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받은 모든 좋은 것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주신 것이고 교회에 주신 모든 좋은 것들은 아버지께서 자기의아들 그리스도께 부어주신 거지요.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게 되면 교회의 지체들에게 행하고 베푸신 놀라운 일들을 생각하면서 우리자신이 위로와 힘을 얻고 도움을 얻으면서 아버지앞에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신앙생활이고 믿음생활이고 그런 것이예요 그러면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것 같은 낙망하는 느낌이 들 때 그때마다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면서 그러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공동체에게 베푸신 놀라운 사랑 당신의 몸을 사랑하시되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시되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우리는 바로 그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그 무한하고 끝이 없는 언약의 사랑을 대면하면서 그러면서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 이제 나는 버림을 받은 것 같다 라는 이런 모든 자기연민과 비참함 버림받은 느낌 여기에서 벗어나는 이게 바로 하나님이 백성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인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