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요구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 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 지니라 하시는 도다“(시 82:3-4)
녹취자:문미경
1절과 2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의와 악에 대해 책망하시고 3절부터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그들이 잘못하고 있고 그들의 영적상태가 어떠하고 그들이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것과는 어떻게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지를 계속 진술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해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자에게 공의를 베풀 지며..라고 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가난한 자는 문자 그대로 재산이 없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그들이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재산의 많고 적음은 지배 구조를 만들게 됩니다. 재산이 없으면 결국은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고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서 재산이 있는 사람들에게 복종하고 거기서 물질적인 소득을 얻기 위해서 지배하고 복종하는 관계가 생겨나는 겁니다.
고아의 경우에는 부모가 없으니까 더욱 심각해집니다. 그러니까 고아들은 무엇인가 남이 도와주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빌미 삼아서 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더 심하면 아이들을 학대하거나 하는 일들이 인류사회에 늘 있는 일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신 사랑과 자비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그들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대해주셨을 것 같은 그런 태도를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혜택이 인간의 탐욕과 지배욕에 의해서 단절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스며들게 하라는 것이 이 세계의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류는 어차피 그렇게 행할 가능성이 현저히 사라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한 이스라엘만이라도 그 이상적인 사회를 먼저 실현해가도록 하나님이 그들을 불러주신 겁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행하라고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행하여야 할 충분한 도덕적 이유를 가질 수 있도록 두 가지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는 그들을 구원해주신 것이고,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해주시고, 가나안을 주신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의존하여 그렇게 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 수 있는 은혜의 힘을 주셨던 겁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해 판단하거라...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판단은 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너는 가난한사람이라고 해서 재판할 때 그들을 일방적으로 그를 두둔하지 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가난하고 고아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에게 불법하게 그들을 비호하고 옹호하고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평등성에 맞추어서 가난한 자와 고아가 차별받지 않도록 그들을 올바르게 재판하라..라는 뜻입니다.
기계적인 평등은 평등이 아닙니다.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들어가는 신입생들을 조사해보면 55%정도가 강남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랍니다. 나머지는 여기저기서 올라온 학생들일 겁니다. 아예 어렸을 때부터 충분한 경제적인 여건, 우수한 정보력, 그리고 사회적인 권력, 이런 것을 사용해서 아이들이 부모의 도움을 받으면서 우수한 교육을 받고 그리고 아주 우수한 정보에 입각해서 자신의 미래를 잘 준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돈 없고 가난한 아이들은 이런 정보를 접할 수도 없고 사교육을 그렇게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공부를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이러면서 가난이 되 물림 되는 겁니다 .
작년 10월 달에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에서 ‘부자와 나머지 사람들’이라는 아티클이 실렸습니다. 그걸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미국에서 부가 되물림 되는가..가난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가난할 수밖에 없는 아주 철저한 지배구조를 갖습니다. 말하자면 뭐하고 똑같냐 하면 백 미터 달리기를 하는데 한 사람은 0미터에서 달려라고 하고 한사람은 50미터 앞에 세워놓고 달려라 그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백 미터의 줄이 똑같이 그어져있고 누구든지 먼저 들어오면 일등이라고 외면적으로 보면 공정한 게임 같지만 이미 출발의 지점 자체가 다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떤 사람은 지적인 능력이 뛰어나게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게 태어납니다. 이건 본인들이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본인들이 선택하지 않은 것조차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불평등입니다. 어떡하든지 그 차이를 완전히 없앤다고 하는 것은 자본주의사회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새로운 삶으로 상승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고 그래서 그들도 부모의 부나 자신의 신분 고아냐 아니냐는 이런 처지 때문에 미래의 희망이 박탈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평등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런 것들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만 안 지켜진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에서도 안 지켜졌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은혜 많이 받고 복음의 정신으로 무장했을 때는 지켜졌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안 지켜졌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도 보면 부자가 오면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그냥 고개 숙이고 이쪽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고 가난한자가 오면 서있든지 앉아있든지 네 마음대로 해라..라며 무시했습니다. 물질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구박을 한 겁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일꾼들의 품삯을 제대로 주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결국 어디에서부터 왔냐면 인간에 대한 무시입니다. 인간은 외적으로 그가 어떤 지위에 있고 자연적인 어떤 능력이나 재능이 있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안주고, 지위 고아, 얼굴의 외모, 이런 것을 막론하고 그 사람을 비록 지금 감옥소에 갇혀서 사형을 기다리는 아주 악한 죄수라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그가 인간이라고 하는 현실 앞에서 그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로 대해주는 것..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깊이입니다.
하나님께 이런 마음이 있으셨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실 수가 있게 하셨던 겁니다. 우리가 정말 꿈꾸고 있는 것은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 없을 수 없고 세상나라의 구조 속에서 살면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 구별이 없을 수 없고 태어날 때도 어떤 사람은 예쁘게 어떤 사람은 덜 예쁘게 태어나니까 차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예화) 어제 신방에 갔더니 아파트에 내려서 복도를 지나가려는데 자매가 나이는 거의 스물 대살 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복도통행에 지장이 될 정도로 배가 나와 있었습니다. ‘저렇게 하고 어떻게 살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눈은 언제나 그런 사람들보다는 야리야리하고 얼굴 예쁜 사람 서 있으면 느낌 자체가 다르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보기 힘들 정도로 비만인 사람과 날씬한 사람을 대할 때 똑같은 감정의 상태로 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약점인겁니다.
신앙은 그걸 끊임없이 교정을 해서 정말 인간의 외모에 의하지 않고 그가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모든 지위나 외모, 그의 습성, 심지어 그의 도덕적인 행동들까지도 우연적이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다 사산하고 인간이라는 자체 때문에 그를 존귀하고 소중하게 볼 수 있는 그런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같은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자비를 베풀 때에 지위의 고하나 우리의 재능 유무나 외모의 미추를 보시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고 사랑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제가 아는 교수님 한분이 있었는데 이분이 음악 교수님이셨습니다. 이분이 독일로 유학을 갔는데 한밤중에 기숙사에 있다가 기도를 하고 싶어서 예배실로 올라갔답니다. 불도 꺼진 컴컴한 복도를 지나가는데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괴기스런 소리가 예배당에 들리는 겁니다. 비명소리도 아니고 신음소리도 아니고 무서울 정도로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기도하러 왔으니까 예배당에 올라와서 문을 열고 보니까 한 학생이 피아노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이 사람이 뇌성소아마비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으니까 사람이 있는 낮에 못 오고 아무도 없는 밤중에 와서 치지도 못하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겁니다. 가까이 가보니까 피아노 온 군데에 침이 다 튄 겁니다. 이 사람은 눈물을 흘리면서 찬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성악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음에 대한 감각이 얼마나 더 뛰어났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소리가 더 흉측하게 들렸을 겁니다. 그 교수는 ‘내가 저런 심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해 본 적이 있었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인간을 보는 것 그 자체가 신앙이라는 이야깁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끊임없이 가슴에 새기면서 실제적인 우리의 삶속에서 그것들을 자신이 그렇게 생각되어지도록 그렇게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확실히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러면서 곤란한 자와 빈궁한자에게 공의를 베풀어라. 그를 편벽되이 일방적으로 두둔하고 옹호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기준으로 공정하도록 그렇게 처신해야 된다는 겁니다. 가난하다 할지라도 고아라 할지라도 책임질 일은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모든 기회와 자원들이 박탈된 채 산 사람들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혹은 그들에게 잘못된 습관이나 덕스럽지 못한 어떤 성향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은 상당부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책임이고 공통적으로 짊어져야 할 짐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난한 자와 궁핍판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언제든지 이용해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 들어 자주 나오는 얘기지만 범죄자들이 노숙자들에게 접근해서 백만 원을 줄게 이백 만원을 줄게 하면서 주민등록증 하고 도장만 잠깐 빌려가고 그걸로 대포차를 만들고 대포통장을 만들곤 합니다. 이렇게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은 무지하기까지 해서 악한 자들의 손에서 늘 갈취당하고 이용당하기 때문에 사회의 법이 이것들을 막고 이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이 사실은 추상같은 아버지처럼 작용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눈물 흘리는 어머니처럼 작용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기회가 주어지고 그리고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 위치 때문에 지속적으로 나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억압당하고 착취당하고 이용당하는 그런 구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행하게 하는 원동력이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랑은 정의를 완성합니다.”라고 말했고 심지어는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당신의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그 후에는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렇게 전심으로 사랑한다면 정의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정의를 완성하기 때문입니다. 정의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돌아가는 거고 어떤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그 진심의 사랑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런 원리에서 놓고 본다면 이런 책망을 오늘날 우리들이 받아야 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주님의 사랑과 공의가 이 세상에 펼쳐지도록 티끌만큼이라도 이바지 하는 삶을 살아야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이런 악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