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나의 아버지시라
“내가 또 그의 손을 바다 위에 놓으며 오른손을 강들 위에 놓으리니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시 89:25-26)
녹취자: 장미연
이것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어떻게 복을 주실지를 예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시켜서 다윗의 “손을 바다에 놓으며” 라고 한 것은 바다를 통해서 많은 나라들을 정복하고 다스릴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바다는 매우 중요합니다. 더욱이 그때는 공군이 없던 시대니까 바다를 제압하는 사람이 천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중요한 무역이나 군사적인 작전들이 바다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또 그의 손을 바다 위에 놓으며”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바다를 제압해서 나라가 큰 권세를 가지고 주변의 나라를 다스릴 것을 예고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오른손을 강들 위에 놓으리니”구절에서 ‘강’은 복수로 나옵니다. ‘강’은 육지 속을 흘러 젖줄이 되어 농지를 비옥하게 하고 거기에서 많은 결실들을 맺어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강입니다. “오른손을 강들 위에 놓으리니” 라고 하는 것은 땅을 얻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확정을 통해서 땅을 얻을 뿐만 아니라 왕으로서 한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앞에 내용이 정복이라면 뒤에 내용은 통치를 가르치는 것인데 많은 나라들을 정복할 뿐 아니라 또한 그 나라를 효율적으로 통치해서 명실 공히 다윗의 왕국을 세워 가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여기에 나오는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예언은 다윗 시대에는 다윗과 맺은 언약 속에서 성취되었지만 그 다윗과 맺은 언약의 성취는 우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맺으실 영원한 새 언약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즉, 다윗을 향하여 “그 위가 영원하리라 내가 너의 손을 바다에 두리니 너의 오른손을 강들 위에 두리니” 하신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의 정복과 번영, 통치를 보여주었다면, 실제로 이 나라는 사실 역사 속에서 망하지 않습니까? 그 나라가 육적으로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고 3년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조차도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시는 바로 그 시점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고 나서 ‘아, 그 다윗의 나라가 결국은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끝나지만 다윗과 맺은 언약이 그리스도를 통해 맺어진 새 언약으로 이어져서 마지막에 영적인 나라로 마무리가 되는구나.’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25절을 해석한다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바다가 점령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왕권이 온 세계적으로 구현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세계 선교의 비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렇게 복음이 전파된 나라에서 일어나는 구원의 역사로 그 나라가 통치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을 다윗을 통해 예언하시고 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됨으로서 명실 공히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시는 보좌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고 끊어지지 않는 보좌가 되었습니다. 25절이 우리에게 의미하는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다윗의 왕국을 정복과 통치로 번영하게 하실 것을 25절에서 보여주신 이후에 26절에서는 그 결과를 보면서 시인이 어떻게 우리 하나님을 찬송할 것을 보여줍니다.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하나님이시요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첫째는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고 계시지요? 다윗은 아버지가 있었지만 사실 그 아버지에게 사랑받은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정신적으로는 그냥 아버지가 없는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결혼을 하고 또 다른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지만 그 아버지는 자신을 죽이면 자신의 딸이 과부가 되는데 그래도 그 사위를 죽이겠다고 자객을 풀어 그 긴 세월을 추격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솔직히 다윗의 마음속에는 아버지라고 해봐야 아무 그림도 다윗의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 아버지, 어머니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알지도 못하는 어린 시절에 하나님에 대해 배우는 것입니다. 아빠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배우고 엄마를 통해서 사람의 아버지와는 다른 엄마 같은 하나님을 배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게 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아버지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는 불행하게도 이 땅에 있는 아버지와의 인연은 없었으나 매 순간 자기를 붙들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아버지를 배웠습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사람 아버지를 통해 하늘 아버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경험인데 이 사람은 거꾸로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 사람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는 사랑은 이 땅에 아버지께로부터 받지 못하는 모든 결핍과 결함에 대한 최고의 해결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께로부터 아버지를 배우며 그 아버지 앞에 배운 대로 자신의 백성들을 돌보고 자신의 자녀들을 돌보았으니 그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모든 족속들을 당신의 자녀처럼 돌보실 예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땅의 만민에게 계시된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온 땅과 하늘위에 권능이 많으신 모든 신들을 신들이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권능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와의 언약을 통해서 이루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면서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지 아니하고 이 위대한 일을 행하신 것은 오직 우리 주님이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히브리말로 ‘추르’라고 되어있는 ‘바위’는 구원과 밀접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죽어가던 때에 바로 그 반석에서 샘물이 솟아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시편에서 그 수많은 탄원을 통하여 다윗을 비롯한 많은 시인은 환난의 날에 바로 그 바위에 숨어 그 환난을 피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구원의 개념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 바위는 곧 우리들이 피하여 보호를 받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의 보호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곧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며 전쟁 때, 그 바위에 피할 때 누구도 자신을 찾아내지 못하고 어떤 무기로도 헤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또 목이 갈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죽어갈 때 그 반석에서 샘물을 나게 하신 것처럼 그 반석에서 자신에게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을 공급해주신다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약하고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 티끌 같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인생을 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 주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온 마음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손을 바다위에 우리의 오른 손을 강에 두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티끌 같지만 지푸라기 같지만 당신의 통치를 이 세상에 구현하는 도구로 쓰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하나님에게서 배우고 그분이 정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찬송하고 그 분이 우리에게 생명과 보호를 주시는 구원의 바위이심을 노래할 때 우리는 티끌 같아도 그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