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받은 자의 마음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 12::18-21)
녹취자: 정윤미
이사야 선지서에 나오는 말씀인데, 오실 메시아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에게 어떻게 행하실지를 예고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택하신 종이 하나님과 어떤 사이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그는 하나님이 택하신 종이다”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서, 그래서 구속을 이루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셨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그 당신의 아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기뻐하는 사람이고, 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똑같은 이야기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에 의해서 재현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로다” 청교도들은 이것을 이중의 인침이라고 불렀고, 하나는 관계에 대한 인침이고,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인침이었습니다. 인침은 하나님이 그렇다고 보증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우선, 자신이 그 존재에 있어서 하나님의 마음에 사랑받는 분이셨고, 또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한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위대한 사역이 무엇으로 집중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심판은 커다란 파멸이나 파괴를 의미한 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공의, 말하자면 하나님의 공의라고 할까요? 미쉬파트,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이었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 죄짓고 불순종 할 때에는 하나님이 벌주시고, 착하고 순종 할 때에는 하나님이 복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이냐 하면 그런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심판의 이중적인 특징들이 이제 성육신 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실 위대한 일들을 심판으로 요약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심판은 복음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복음이 구원이지 어떻게 심판이 됩니까? 그러는데, 결국은 복음이 선포됨으로서, 그 하나님의 구원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과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구별되어지고,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심판도 복음을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기에 심판은 그리스도예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그 복음, 복음의 정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한사람이 얼마나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가 사람들의 정의의 기준이 되었지만, 이제는 구원의 시대에 와서는 그렇게 자신의 힘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초정을 믿고 받아들였느냐, 거부했느냐에 의해서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심판은 복음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 복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하나님의 구원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에 까지 알리게 되는 위대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사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신 적이 별로 없습니다. 뭐, 이방인들을 치료하고 고쳐주신 예는 있지만,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가? 그래서 그 앞에 나오는 단어 “내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으셔서 그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는 동안에 예수님 자신이 이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들을 펼치셨고, 주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는 당신 자신은 하늘에 계시지만, 그리스도의 교회의 몸을 이루어서, 사실상 당신자신이 여기에 계시면서 당신의 위대한 구원의 사역들을 계승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것이 이제 당신이 몸을 입고, 지상에 계셨을 때와 그런 방식으로 똑같이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에 가도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몸으로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고,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우리를 결속시켜 주시는 것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충만히 받으신 성자가 그 충만한 성령을 우리에게도 주셔서, 그래서 그 한 성령 안에서 거함으로서, 당신 자신이 우리와 함께 있는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자, 오늘 관심을 끄는 것은 20절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인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이 심판이 말하자면, 아주 잔혹한 죄에 대한 복수만을 의미한다면, 이방인은 심판을 바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까 말한바와 같이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그 소식, 이것과 함께 신학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심판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그 심판의 소식이 소망이 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영을 받으신 그 분이 그 성령의 그 충만함을 받으신 그 분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복음에 의한 이 심판을 수행하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상한 갈대, 원래 성경에는 “연기 나는 갈대”라고 되어있는데, “연기 나는 삼대 혹은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그랬습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 것이냐 하면, 성자의 자비로우신 성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타서 연기가 나는 삼대가 어디다 쓸모가 있겠습니까? 잘해서 실을 뽑고 이렇게 해서 사용하는 건데, 어디에 쓸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을음을 계속내면서 고통을 주면서 그 심지가 타들어갈 때 어떻게 되겠어요? 여러분은 등잔불을 써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옛날에 우리는 호롱불, 그 다음에 호야라고 그러는데, 석유를 이용해서 사용하는데, 뭔가 이렇게 램프에 문제가 생기면, 막 시커먼 그을음을 내면서 램프가 타오르게 됩니다. 그 램프를 감싸고 있는 유리항아리도 금방 시커매 집니다. 그 닦는 것은 보통 고역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즉시 불을 꺼버립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그렇게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신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그 구원의 사역이 한없는 사랑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의 마음을 교회가 품고,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긍휼이 여긴다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이냐 하면, 사람이 저마다 이렇게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 원인이 없지는 않습니다. 다 원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의 가장 큰 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트라우마다 상처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것은 전혀 없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 아들러의 이야기에 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런 것은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이 엄청난 힘을 우리 인간에게 휘두른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러면서도 이제 아들러의 이야기에 대해서 일부분 동의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휘둘리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의지를 거슬러서 휘둘러지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은 자신이 그런 트라우마나 상처나 이런 것을 받았어도, 모든 사람이 그 상처에 굴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상처나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신앙인에게는 신앙적으로,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인생을 사유하는 면에 있어서, 깊이가 더해지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오늘날 사람들이 아주 약합니다. 그리고 이제 분노를 참지 못한다고 하는 거 그런 것들도 결국은 약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강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약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강함과 약함이 무엇이냐 하면, 강함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야 하면 어떻게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욕망과 열정들 그것은 아주 파괴적인 열정부터 시작해서 건설적인 열정까지 다양한 종류의 것들이 있습니다. 뭐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부터 시작해서, 오늘 아침에 보니까 한국의 18살 먹은 소년이 IS 거기에서 훈련받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하는데, 얼마나 여기에서 사는 것이 시시하고 재미없으면 그런 길을 택하겠습니까? 훈련을 5월말에 통과하면 테러에 투입이 되고, 훈련을 통과를 못하면 포로 신세가 된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얼마나 답답하고 그러겠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뭐 폭탄에 온몸에 두르고 총을 들고 복면을 쓰고 나타나서 그 미국과 싸우는 모습을 보면 대단하다고 이야기 할지 모르지만 사실 약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얼마나 다양한 감정들이 우리 안에 일어나는데, 그런 것들이 외부의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막 발생을 하게 됩니다. 누구나 다 그런 것은 바보라도 다 발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얼마나 잘 억누르면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언제 한번 기사를 보니까 SNS. 블로그 뭐 그런 것 있지 않나요? 그런 것들이 자살의 원인이 된다고 이야기를 심각하게 다루었습니다. 요새 나는 그 정말 그 이해할 수 없는 게 자기가 가서 밥을 먹었으면 먹었지, 밥 먹은 것을 다 사진을 찍어서 그런 것을 옛날의 관점으로 보면 굉장히 상스러운 짓입니다. 먹었으면 먹었지, 마지막에 음식점에 들어가는 사진을 찍고, 에피타이져부터 시작해서 스프까지 다 찍고, 마지막에 자기 돈 낸 계산서까지 찍어서 블로그에 다 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니까, 자기 친구 네 명이 와서 127만 원짜리 밥을 먹고, 그것을 본 친구는 너무 낙심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알바를 해도 127만원을 한 달에 못 버는데,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 무엇이냐 하면,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이라는 것은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만나고 만나면 느낌이 정동이 오게 되어있습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차피 인생이고 그것이 살기 싫으면 우주 공간에 혼자 가서 살아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오게 되어 있는 건데, 그것들을 강한 사람이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들을 바람직하게 딱 누르고 통제할 수 있고, 그것을 말하자면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느 순간에 분노나 이런 것을 못 이겨서 확하고 어떤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절대 용감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가치가 배재되어있습니다. 자기 절제나 자기 지배력 같은 것들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깊이 캐어 들어가 보면 그런 트라우마나 상처라는 것이 없다고 하는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있는데, 그것을 위해서 자기 자신이 인생 전체가 파괴되듯이 휘몰 리고 하는 그런 모든 것들은 사실은 자신이 그런 삶을 변명하기 위한 것이고, 자신이 의도하는 것이지, 얼마든지 그런 것들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고 원숙한 신앙으로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실은 문학가나 사상가들에게 있어서 그런 경험은 필수적입니다. 마치 예수님 못 만나고, 자기가 깨뜨려져 본적이 없는 사람이 설교하는 것이 그저 그렇듯이 문학이나 철학을 하는 사람도 자기가 그렇게 삶의 실전에 맞닥트려서 자기 자신이 말하자면 고통을 겪어보지 않고는 살아있는 글이 나올 수 없고, 살아있는 사상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남의 것을 잘 정리해서 밥을 벌어먹을 수 모르지만, 자기의 독창적인 사상이 , 자신의 혼신의 살과 피를 섞어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각도에서 우리 인생을 본다고 한다면, 결국은 다 자기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책임이 있는 것이고,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과거의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이 자기를 부정적으로 속박하기도 하고, 긍정적으로 기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냐하면, 긍휼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원인을 따지지 않고, 그가 비참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아픔을 공감하는 것, 그것이 긍휼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한 마음으로 충만한 가운데에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감화를 끼칠 수가 있었던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하는 통로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의사는 가족보다 정확하게 병을 진단해서 이 병이 왜 생겼는지를 이해할 수 있지만, 가족은 그가 왜 그 병이 생겼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그 아픔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 가족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들이 영혼을 섬겨야 합니다. 어차피 그가 놓여있는 삶의 상황이 이미 발생한 것이고, 그리고, 원인을 따져볼 수 있겠지만, 그렇지만 원인보다 원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어쨌든 그렇게 고통 받는 상태에 있다는 것, 거기로부터 그를 구출해 내야한다는 그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예수님이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대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사역이 긍휼이 넘치는 사역 이었고, 그것이 초대교회의 중요한 케리그마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정말 긍휼에 넘치는 사역으로 우리를 섬기셨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아주 중요한 케리그마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을 해봅시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 모두 무가치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까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불타는 상태, 그리고, 상한 갈대, 무가치 할 뿐만 아니라,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 고통을 주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버리지 아니하고, 그리고, 그것에도 여전히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으시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그것들을 온전한 상태로 되돌려놓기 위해서 상한 갈대를 치료하시며,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는 다시 돋우시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이 나는데 호야라고 하는데, 이렇게 밑에다가 석유를 놓고 이렇게 올립니다. 그러면, 불꽃이 켜집니다. 돈이 있으면, 석유를 좀 좋은 것을 사면 괜찮은데 돈이 없으면, 싼 것을 사게 되는데, 불을 한참을 켜면 심지가 천으로 실로 탄탄하게 짜져있는 것인데, 올려가지고, 1주나 2주 정도 태우게 되면, 석유는 석유대로 올라가고, 불이 밝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불을 키우면 불꽃이 커지는 데에도 밝지가 않고, 그을음이 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냐 하면, 불을 끄고, 이제 호야를 열어서 심지를 꺼냅니다. 이렇게 빠지게 되어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가서 잘 올린다음에 가위로 그 까맣게 탄 그 부분을 잘라냅니다. 솔로 닦아낸 다음에 다시 집어넣어서 불을 피우면, 불꽃이 조금 올라가도 아주 밝은 빛이 납니다. 그렇게 해서 고쳐서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그렇게 잘라내면 자꾸 심지가 작아지는데, 금방 돈 주고 바꾸어야 되니까, 잔소리를 하시지만, 그렇게 잘라 내면, 불꽃이 훨씬 환하고 밝아지고 그을음도 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고쳐 쓰듯이 그렇게 하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보기에는 망가져서 아주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사랑은 희망입니다.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입니다. 그것이 힘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하신 일이 바로 그렇게 희망이 없는 죄인들에게 희망을 발견하시고 사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영혼들을 섬기고 돌보면서 그런 마음을 가질 때에, 그때에 그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섬김을 받는 사람들에게도 전달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새해 사역을 할 때에 정말, 전형적인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일수록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 들어낼 영광의 가능성이 크다고 말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마음으로 사역을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