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시리즈
(199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인격이신 성령님 (에베소서 4장 30절) 1995.4.23 주일오전 1
2. 책망하시는 성령님 (요한복음16장 8절) 1995.4.30 주일오전 15
3. 거듭나게 하는 성령 (디도서 3장 5절) 1995.5.7 주일오전 24
4. 우리의 영원한 만족 (요한복음 7장 38절) 1995.5.14 주일오전 36
5. 영원한 생수의 근원 (요한복음 7장 38절) 1995.5.21 주일오전 43
6. 성령을 근심케 말라 (에베소서 4장 30절) 1995.5.28 주일오전 51
7. 성령 충만을 받으려면 (사도행전 2장 38절) 1995.6.4 주일오전 60
1. 인격이신 성령님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에베소서 4장 30절)
지난주는 부활 주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의 고난에 대해서 쭉 설교를 했습니다. 이제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드디어 이제 성령이 강림하시게 되고 교회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체계적으로 성령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또 왜 우리의 신앙생활에 성령이 절대적으로 필요한가 또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령을 받는 삶을 살 것인가 이것을 체계적으로 계속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 씨리즈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모두 성령을 체험하시고 변화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20살에 회심을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예수를 믿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늘 교회에 다녔지만, 그저 왔다갔다하고 구원의 확신도 없이 중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저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동생이 지금은 집사가 되었습니다마는, 아주 학생 때부터 열심히 교회를 다녔습니다. 둘이서 같이 다락방을 썼습니다. 누워서 나는 교회를 다니지 못하게 핍박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사상적으로 사탄이 하는 짓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염세주의 철학자들 아니면 헤르만 헷세 이런 사람들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들을 많이 대하면서 신앙이 얼마나 허무 맹랑한가 하는 암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책도 잘 읽어야 됩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가 하는 것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다니던 아이가 제가 그렇게 한6개월을 밤새도록 토론을 했더니 토론을 당하겠습니까? 그래도 형인데. 책을 읽어도 더 읽고 살아도 더 살았는데 그러니까 결국은 형한테 동화되어서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버렸습니다. 나중에 회개 많이 하고 인도하느라고 혼났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정말 가난하고 억눌린 불쌍한 자들을 위해서 정말 자기의 몸을 버려서 희생한 그런 분이었다면은 내가 다 인정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오늘 나를 살리고 천국 가는 표를 주고 나는 이런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고 했습니다. 그 분이 돌아 가셔서 그 정신을 본받으면서 살라고 하면은 내 인정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만하게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듣는데 그 목사님이 그렇게 선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가 막히게 쪼개셔서 설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내 마음이 막 뜨거워지면서 그 말씀이 끝난 다음에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나도 모르게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막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사실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그렇게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 전까지 믿어지지 않았는데 바로 그 순간에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겁니다. 믿어질 뿐만 아니라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는데 그 다음에 깨닫게 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은 이전에는 생각도 안 나던 나의 그 죄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애매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생각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세례를 받았어요.
우리교회는 지금 너무 좋습니다. 호화스러운 교회입니다. 그냥 2층에 겨울이면 뚝뚝 부러지는 제일 싸구려 비닐 장판 깔고 난로도 없어서 톱밥하고 나무를 주워 다가 불을 때는 그런 난로였는데, 새벽 기도 때에 난로를 피면 펑펑하면서 나무 터지는 소리가 나서 불똥 주워 모으느라고 정신이 없는 그런 추억의 교회인데 거기서 세례를 받는데 물도 많이 부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을 한 방울 찍어서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그런데 목사님이 손을 얹고 내 머리에 무엇을 이렇게 꽉 누르고 믿습니다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편안히 손을 얹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는데 이 뜨거운 기운이 확 내려오더니 내 마음속에서 아! 내가 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나는 세례 받는데 그렇게 눈물을 한없이 쏟으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축복인가? 진짜 나는 그렇게 되어 본 적이 없지만, 왕의 아들로 입적이 되는 것 보다 더 감격적이고 영원히 잊을 수가 없는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놀랍게 그렇게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군대에서 세례를 주는 것을 보니까 세례를 받으러 나오라니까 껌 씹으면서 희죽희죽 거리면서 나와서 세례를 받아요. 그런 사람들 세례 주면 안 됩니다. 세례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들은 세례를 받을 때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그렇게 감격을 하면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제 내가 접붙임을 받았다 이런 것들을 느끼게 되는 것이 무엇 때문인가 하면 성령이 그것을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위 일체 하나님 중에서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그 구원의 계획에 따라서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 사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지만 믿고 구원을 얻는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큽니까? 여러분 한번 믿으면 아멘! 해보십시요. 하나님의 사랑이 크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이 아무리 사람들에게 “아, 그 하나님의사랑! 놀라워.”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그 말이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 사랑이 내 마음에 파도와 같이 한번 밀려와서 그 사랑을 내가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초등학교 가도 안 그럴 텐데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는 도시락을 못 싸오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오죽하면 학교에서 강냉이 빵을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는데 아주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강냉이 빵을 주었습니다. 학교가면 제일 신나는 게 강냉이 빵 당번 할 때 제일 좋습니다. 당번에게는 그 것을 하나 주기 때문입니다. 기름때가 새까맣게 쪄든 그 밀가루 푸대를 들고 창고 같은데 가서 반의 대표들이 쭉 서있으면은 거기에서 소사 아저씨가 넣어 줍니다. 밥을 못 싸온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은 옆에 있는 애들이 밥 먹는 애들한테 와서 ‘맛있니?’ 하고 물어 봅니다. ‘그럼 맛있지!’ ‘어떻게 맛있니?’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리 놀랍다고 하여도 사람들이 그것을 체험하지 못하니까 그 사랑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경험하고 체험할 때에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인지를 알고 그 나를 향한 사랑에 자신을 맡기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순종할 때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아는 사람이 순종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좋으신 하나님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지게 만들고 체험되도록 만들어 주시는 분이 바로 그 분입니다.
성령 받기 전에 제가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읽는데 신학교를 다니면서 성경을 읽어도 이것이 콘크리트 덩어리 같았습니다. 재미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섯 장만 읽으면은 졸립습니다. 열장만 읽으면은 아주 충분히 졸립니다. 열 다섯장 까지 갈 적도 별로 없지마는, 열 다섯장 읽으면은 어쨌던 졸립니다. 그래도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신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교수가 되었는데도 늘 마음에 남는 스트레스가 무엇인가 하면 나는 성경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시편에 보면은 성경 말씀이 송이 꿀처럼 달다고 그러는데 나는 한번도 그렇게 달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전에 처음 신앙 생활 할 때 몇 달은 예배드릴 때에 그 말씀을 듣고 눈물도 흘리고 기도도 했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설교 시간만 되면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러면서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시니까 성경을 읽느라고 성경을 펼쳐 놓으면 성경에서 금싸라기가 쏟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10시쯤 자다가 일어나서 성경을 보다가 그 성경 말씀이 너무나 감격적이어서 엎드려서 울다가는 또 읽고, 읽다가는 또 울고, 그러다가는 또 노트에다 쓰고, 노트에 쓰다가는 또 읽고, 또 울고 그러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초창기때 그런 것이 묵은 땅을 기여하라 그것입니다. 어떤 때는 밤 10시에 성경을 한 절을 보고 폈다 폈다 하면서 울고 웃다가 시간이 지나가서 보면은 아침 7시, 8시가 되어서 환하게 아침이 밝아 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번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고 가면은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에 그런 겁니까? 그러니까 그때는 어떤가 하면은 성경을 어디를 펴도 설교할 것이 없습니다. 어디를 펴도. 그러니까 설교 한번 하려면은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계속 넘기는 겁니다. 넘기고 나면 무엇이 나옵니까? 빨간 줄친 거 찾아도 보고 파란 줄친 것도 찾아보고 찾아봐도 넘기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함께 하셔서 성경을 읽을 때는 말입니다. 펼치기만 하면은, 야, 이거 왜 일주일에 설교를 세 번 밖에 안 시켜 줄까? 여기를 펼쳐도, 어머머, 세상에 여기를 설교해도 이거 언제 설교하나, 세상에 이런 진리를 사람들에게 알려 줘야 되는데 이런 생각이 수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합니까? 성령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면서 성경 안 읽을 때는 성경 읽는 게 요즘 유행하는 말이 우리 교회에서 숙제했느냐고 물어 보는데, 성경 읽는 것이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은 그것이 숙제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 성경 4장 읽는 것이 꿀 맛 같아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십니다. 성령이 하십니다.
그 다음에 마음이 딱 꼬부라져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은 어뗳게 합니까? 어느 날 성령이 오셔서 내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을 얼마나 슬퍼하시는지를 성령이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 성령의 마음으로 아픕니다. 뉘우치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 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살아갑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하느냐하면, 성령을 체험하지 못하면 신앙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열린 교회에 1년을 나오고 2년을 나오고 앞으로 3년을 나와도 성령을 체험하고 그 성령의 은혜가 여러분들과 함께 하지 아니하면은 여러분들은 열린 교회 예배 시간이 지겨울 것입니다. 어떤 때는 2시간까지 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지겹습니까? 수요예배에 8시에 왔는데 요즈음은 안그러지만은 어떤 때는 어느 날 끝나고 보니까 10시 40분이었습니다. 2시간 40분 동안이나 했습니다. 얼마나 지겹습니까?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시면은 30분이 지난 것 같고, 20분이 지난 것 같습니다.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고 체험하게 해주시니까 즐거운 것입니다.
모든 신앙 생활이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면 말씀을 깨달아도 뜻을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대부분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도 신앙의 성장이 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성령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한없이 많으니까 오늘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성령은 인격이시다. 그 이야기만 오늘하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을 신적인 영향력이나 능력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성령을 내가 준다, 아니면은 성령을 붙잡아라. 누구는 문닫아라 성령 나가신다 성령을 붙잡는다 이런 것들은 전부다 미신적인 신앙에서 신통력이나 아니면 신기한 염력이 함께 한다라고 하는 개념을 가지고 기독교 속에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청산 하십시요. 그런 식으로 접근을 하면 우리가 참다운 성령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그런 영향력이 아닙니다. 물론 성령은 놀랍게 역사합니다. 병든 자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들린 자를 내어쫓고 이런 일들을 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이 능력을 행하시는 것이지 그 능력이 성령은 아닙니다.
성령은 인격입니다. 오히려 성령을 붙잡고 성령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보다 참다운 태도는 그 인격이신 성령에 우리가 붙잡히고 그 인격이신 성령에 사로잡히려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인격이라고 그럴 때 인격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들을 그 다음에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는 것. 이런 것이 인격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인격이 깃드는 집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이런 모양은 사람마다 다 틀립니다.
중요한 것은 인격이 이렇게된 것만이 인격이 아니라 인격의 세 가지 요소는 알고 느끼고 행하는 것입니다. 지정의 의 요소가 있어야지만 인격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고린도전서 2장에 보니까 ‘사람의 사정을 사람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밖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성령은 우선 깊이 모든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사정을 잘 압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의 사정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우리 친구 선교사가 아프리카로 나갔는데 거기에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까 이 사람이 정말 회심했는가 하는 것이랍니다. 왜냐하면 목사가 되겠다는 사람이 많은데 믿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정말 회개해서 하나님을 사랑 때문에 목사가 되려고 하는지 아니면 목사가 되겠다고 하면 선교부에서 모든 것을 후원해 주니까 안락한 삶을 위해서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것인지가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왜 구분이 안 가느냐고 하니까 문화가 틀리니까 우리가 한국 사람끼리는 서로 숨소리만 들어도 압니다. 그런데 외국 사람은 틀립니다. 이리 오라는 손짓도 우리와는 반대로 표시해서 우리의 오라는 손짓이 외국사람들에게는 가라는 손짓이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다 문화가 틀리니까 사람들이 같은 사람이면서도 오랫동안 자라온 문화가 틀리면은 그 속사정을 우리가 잘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사정들을 누구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가 하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기 전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내가 가면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 줄텐데 그가 오면 너희에게 내가 가르쳐 준 것들을 생각나게 해주실 것이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면 읽어도 그냥 문자적인 뜻 밖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성경을 읽어 가는 동안에 성령이 함께 하시면 그 말씀이 우리에게 뜨거운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벤허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류 알레이스 라는 사람이 원본을 썼는데 그 사람의 평생 작업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를 믿는데 미쳐있는 사람들이 너무 꼴 보기 싫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결코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한번 반 기독교적인 말하자면 세계 역사에 남을 만한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예수가 누구인지 알려면 성경을 읽어야지 되겠다고 생각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한번을 다 읽지 못해서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시여! 당신은 나의 주시옵나이다. 고백을 하고 벤허라는 작품을 쓴 것입니다. 우리 집안에도 이 벤허라는 영화를 보고 예수 믿은 사람이 몇 사람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입니까? 왜 그럽니까?
합리주의 사상가였던 몽떼뉴라는 사람이 예언을 했습니다. 백년 뒤에는 성경이 온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게 큰 소리 쳤는데 역사가 얼마나 공교롭게 되었는가 하면 그 몽떼뉴가 살던 그 집이 불란서 성서협회 건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100년이라는 역사가 지나서 몽떼뉴라는 사람은 사람들이 많이 잊었어도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책이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감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고 하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라고 하는 사람이 범죄한 것입니다. 그렇지요? 땅을 팔아서 하나님께 바치려고 작정했습니다. 그러다가 아까워서 얼마쯤 떼어서 감췄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네가 어찌하여 성령을 속이려고 하느냐?
성령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속한 하나님의 사정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도 하고 또 우리 속에 있는 사정들을 성령께서 다 파악하고 판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렇게 모든 것을 아십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이 나와서 예배 드리는데 여러분들이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성령은 모두 환하게 아신다는 말입니다. 믿습니까? 그것을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됩니다.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로마서 15장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사랑으로 너희를 권하노라. 그러니까 성령은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보니까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근심하십니다, 그리고 슬퍼하십니다. 그리고 또 반대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성령은 느끼시는 것입니다. 모두.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는데 우리 안에 계신 이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은 성령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이 즐거워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아니하면 내 안에서 성령이 슬퍼하게 됩니다. 성령이 슬퍼하시고 근심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게 만드는 힘이 성령이 힘을 주셔서 우리가 예수 믿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내 안에서 슬퍼하시니까 그 성령이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안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신앙생활 하는 것이 너무 너무 힘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가 없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면 잘 쓰는 말이 아유 피곤해 왜 주일 못나오셨습니까? 아유 고단해서! 다 자기만큼 움직이면서 먹고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다. 그 만큼 힘 안들이고 사는 사람 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다 피곤하지. 그런데 어떻습니까?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렇게 피곤하고 힘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함께 하시면 피곤하지가 않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해도 눈이 초롱초롱하고 즐겁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 기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기도 하고 슬퍼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설교를 하고 심방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떤 형제 자매하고 마주 앉으면 마음이 막 슬퍼집니다. 마음이 너무너무 아프고 슬픕니다. 더구나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 줄 때는 너무너무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고 슬픕니다. 나는 왜 아프고 슬픈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 사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삶을 살면 한 성령이 교회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슬픔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날은 바쁘니까 그냥 대충대충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려고 하는데 어느 이름에 딱 가서 닿아서는 기도가 끝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슬픈 겁니다. 왜 그렇게 슬픈 마음이 내게 드는지 나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지금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지 못하다. 성령이 참 슬퍼하시는 것을 압니다. 본인도 그런 것을 느끼면서 같이 애통해 하면은 회복이 빠르게 될 것입니다.
어떤 때는 마주 앉으면은 눈물이 막 쏟아집니다. 그것은 감정이 풍부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만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그렇게 슬퍼할 만한 하나님을 슬프게 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은 그것을 느끼지만 성령 안에서 살지 않으면은 그런 민감함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보혜사 성령이 우리를 기뻐하시고 좋아하실 때는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신앙생활 하면서 슬픈 일을 안 당할 때가 언제 있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아주 옛날 오래 전 일입니다. 아주 굉장히 슬픈 일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 마음에 이런 슬픈 일을 당하면서 내가 이 세상에 살아야 되나?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느 집사님이 나를 위해서 굉장히 열심히 여러분들이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어느 날 기도를 하는데 내가 한없이 슬퍼하면서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열리더니 커다란 파이프가 내려오더랍니다. 그런데 이 파이프를 통해서 기름이 물같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거기 흠뻑 내가 젖더라고 합니다.
나는 그분이 그런 기도를 했는지, 그런 꿈을 꾸었는지 몰랐습니다. 아, 인생의 마지막이구나. 너무 비참하다. 그러면서 그날 저녁에도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었는데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이상하게 내 마음속에 이유도 없고 근거도 없는 그런 기쁜 마음이 절망 속에서 희망이 슬픔 속에서 소망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아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이 오셔서 위로를 해 주시고 성령이 오셔서 함께 해 주시니까 그런 놀라운 은혜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처럼 느낍니다.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또 느끼십니다. 그리고 성령이 사랑하십니다.
한번 집회를 갔는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기분이 어떠냐 그랬더니 그 형제 자매들 이야기가 따로 나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몇 사람이 똑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짜고 한 이야기도 아닌데 성령이 나를 끌어안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끌어안는데 느낌이 없을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포옹을 해주고 뺨을 부비는데 전봇대를 붙들고 있는 것처럼 이 뜨끈뜨끈한 고기가 왜 나를 붙들고 있나 그런 생각이 듭니까? 감격의 눈물이 흐르고 은혜가 막 밀려오는 것입니다.
작년에 의사들 모임의 집회에 갔을 때도 그냥 쭉 앉아서 성경 강해를 듣고 있는데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서 설교를 듣고 있다가 자매하나가 뜨거운 눈물을 확 흘리는 겁니다. 울지도 않습니다. 워낙 지적이어서 그런지 울지도 않습니다. 소리도 안 냅니다. 그런데 눈물이 한없이 솟구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들으면서 조는데 자기는 마음에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한테 이 말하고 저 사람한테 저 말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성령이 그 말씀을 듣는 시간에 함께 하셔서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시니까 그러니까 마음속에 감격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막 눈물을 흘리면서 우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처럼 우리를 껴안아 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포근하게 감싸주시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성령이 우리들을 사로 잡으셔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지난 수요일 날 말씀 드린 것처럼 아시아로 전도하러 가고 싶어했는데 성령이 안 된다 하시 고 막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 복음 14장에 보니까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도록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행하시는 것입니다. 주권을 가지고 성령은 이 시간에도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책망할 자에게 책망을 하시고 도전 받을 자에게 도전 주시고 깨우칠 자에게 깨우쳐주시고 성령은 이렇게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깨달아야될 사실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성령의 체험이 얼마나 필수적인가 하는 것과 그 다음에 두 번째는 그런 성령이 인격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는 이야기는 성령을 체험하기를 원한다는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이 차가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오늘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다가오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에 깊이 잠겨있으면서 십자가를 묵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성령에 깊이 잠겨서 묵상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그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신 것은 2000년 전에 이루어졌지만 왜 많은 사람들이 2000년 전의 십자가의 사건인데 오늘 울고 있습니까? 울려면 2000년 전에 울지 왜 지금 웁니까? 그것이 2000년 전의 공간을 뛰어 넘어서 오늘 내 중심의 사건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같이 공부하던 목사 가운데 한 사람이 40일 금식 기도를 했답니다. 그러면서 40일 금식 기도할 때 막판에 어떻더냐? 그랬더니 40일 금식 기도를 하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무엇이 그렇게 합니까? 성령이 그것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받으면은 사람들이 그렇게 감격하고 기뻐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왜? 아니 금방 지금 내 앞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이다음에 언제 죽어서 갈 지 모르는 그 천국이 오늘 나에게 기쁨이 되고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주님이 죽으셨는데 그것이 2000년 전이 아니라 오늘 내 사건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일을 누가 합니까?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우리가 이 씨리즈의 설교를 들으면서 우리의 무기력하고 왜 우리가 이렇게 모든 사람들보다 다 뛰어난 열심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려고 하는데도 도무지 진전이 없는가 하는 것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렇게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주일이면 놀러도 못 가고 여기 성경 찬송 끼고 와서 헌금 몇 푼하고 그리고 매일 시간을 보내다가 여러분 성령 체험하고 성령 받지 못해서 아무 것도 믿어지지 않고 나중에 껍데기 신앙이 되어 가지고 심판 날에 여러분들이 만약에 천국에 못 가고 지옥 불에 떨어지면 여러분의 인생이 얼마나 불쌍한 인생이 되겠습니까? 차라리 신나게 세상에 가서 즐기다가 막판에 죽어 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치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성령이 얼마나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이고 이 성령이 얼마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 하는 것들을 갈급 할 정도로 간절하게 갖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은 3년 4년 5년을 다녀도 아무런 회심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신앙이 똑같습니다. 10년 전에 예수 믿기 시작한 사람이나, 오늘 예수 믿은 사람이나 다 똑 같아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령을 받기를 원하는데 그 접근이 올바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을 깊이 체험하고 받기를 원한다면은 인격적인 접근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는데 손을 높이 들고 벌벌 떨면 성령이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역사 하시면 벌벌 떨기만 하겠습니까? 깡충깡충 뛸 수도 있습니다. 데굴데굴 구를 수도 있고 땅을 치다치다 손에 피멍이 들도록 땅을 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자기는 손에 피멍이 드는 줄도 모르고 치는 것입니다. 왜?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자기가 너무 죄인이니까 치다치다 보니까 손에서 피가 날 정도로 내리치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땅 바닥을 피가 나게 두드리면 성령이 오신 다든지 소나무 사건 하면 또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예? 소나무를 뽑는 다는 것이지요. 소나무를 붙들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전에 있던 교회에서 사람들이 기도원에 가서 다들 기도를 하는데 어느 집사님이 묘목 심어 놓은지 얼마 안 되는 소나무를 붙들고 좌우로 아주 못살게 흔드는 것입니다. 왜 저러나? 소나무가 뽑혔다는 것은 소나무를 뽑으니까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 소나무를 붙들고 성령에 사로 잡혀서 자기도 모르게 흔들다 보니까 그 큰 소나무가 뽑혀 나갈 정도로 간절히 기도를 해서 은혜를 받은 것이지 아니 소나무를 뽑았다고 성령을 받으면 산에서 나무 캐는 사람들은 성령에 못 이겨서 펄펄 뛰겠네요?
왜 그렇게 사람들은 어디 가니까 방언 단기 강습, 랄랄라를 빨리 하면 성령이 오신다나? 이건 전부 다 사기입니다. 혹시 그러다가 성령이 오셨으면 그랬기 때문에 성령이 온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실 때가 되었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왜 애궃게 심어 놓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묘목은 흔듭니까?
여러분. 접근이 인격적인 접근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저와 여러분들이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저처럼 못생긴 사람하고 친해지고 싶습니다. 친해지고 싶을 때 그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가까이 다가와야지요? 그렇지요? 가까이 다가 와야지 나하고 친해지고 싶은데 온 동네 돌아다니면서 내 욕을 하고 다니면은 나와 친해질 수 있겠습니까? 안 되거든요. 가까이 다가와야지 됩니다. 다가 와야합니다. 그렇게 해 놓고 어느 날 시퍼렇게 간 부엌칼을 내 목에 대면서 나하고 사귈거야? 안 사귈거야? 그렇게 우격다짐을 하면은 제가 무서워서 여러분들과 사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령 달라고 하는 기도가 그런 경우 많습니다. 주여! 성령 주시옵소서. 안 주시면 죽어 버리겠나이다. 누구 협박하는 겁니까? 성령을 가까이 모실 만한 준비를 해 놓고 성령에게 인격적으로 접근을 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격적으로 접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서 말도 건네고 경계심도 풀고 가까이 다가가고 그러다가 차도 마시고 밥도 먹고 함께 산책도 하고 그리고 함께 대화도 나누고 배우기도 하고 그러면서 점점 인격적인 관계가 되어 지는 것이지 어느 날 칼을 들이대면서 불같은 사랑을 나에게 주시오! 그것이 되겠습니까? 성령을 주시옵소서! 그러는데 주님은 무어라 하시는가 하면 내가 어디로 가랴? 접근 자체가 인격적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령은 인격으로 오시기 때문에 외로운 사람들의 최고의 친구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외로운 사람의 최고의 친구가 됩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종종 사랑하는 부모을 잃어버리거나 또는 아주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리거나, 자식들을 잃어버리거나 남편을 잃어버리거나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하거나 하는 적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 속에서 그런 것들은 많이 일어 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아이가 있었는데 3살이니까 얼마나 귀엽겠습니까? 아주 귀여울 때인데 아파트 꼭대기에서 아이가 잘못 놀다가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그 슬픔을 누구에게 비할 때 있겠습니까? 너무 슬퍼서 할아버지, 엄마, 아빠 매일 그 아이를 생각하면서 슬퍼하면서 기도하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그 아이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천국에 들어갔는지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위로가 찾아온 것이지요. 위로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가슴에 한 맺히는 일이 없습니다. 한 맺히는 일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이 자기와 함께 하고 어두움 가운데서도 자기와 동행해 주시고 뿐 만 아니라 얼마나 자기를 사랑해 주시는지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남편은 자기 마음을 몰라 줄 때가 있고, 인간적인 아내는 자기 마음을 잘 알지 못 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부모도 자식의 마음을, 자식이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가장 사랑 받아야될 관계에서 가장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상처받았다고 하는 사람들 찾아가서 물어보면 지나가는 엿장수 아저씨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하는 사람 없습니다. 다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어야 할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사랑은 그 성령이 오시면 이 세상에서 받았던 많은 상처들을 씻어내 주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누구보다도 더 뜨겁게 사랑하시고 인격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축복하시고 사랑을 베풀어주시니까 외롭지 않은 것입니다. 고아도 이 성령이 함께 해 주시고 성령이 그들과 동행해주실 때 그들은 이세상의 부모는 나를 버렸어도 여호와께서는 이 시간에도 나를 영접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되어 준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을 잃어버린 사람, 아내를 잃어버린 사람, 자녀를 잃어버린 사람들도 성령이 함께 하시면은 그 성령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게 되면은 이 세상에서 자기는 외롭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발전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발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입니까? 사랑을 나누면 나눌수록 점점 깊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주님을 요만큼 사랑해서 주일을 지키는 정도였는데 더 많이 사랑하게 되니까 일주일에 한번 예배드리는 것으로는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더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니까 주님이 또 우리를 사랑하고 또 주님을 사랑하게 되니까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그를 즐겁게 할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시집 장가가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죠? 자기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지만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경향이 여자가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면은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게 할까? 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남자를 기쁘게 할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찬다는 것입니다. 물론 잠시동안 그렇겠지만 또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은 하나님을 즐겁게 할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던 사람이 어떻게 하면 이 여자를 기분 좋게 해 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한 가지 일에 매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과의 관계도 인격이시기 때문에 점점 깊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더 깊이 의지하고 사랑하게 되고 성령이 우리를 더 깊이 감싸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각양 좋은 선물을 주시고 그래서 그 관계가 더욱 공고해지고 굳게 연합되는 것 그것을 가리켜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믿음이 깊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성령이 우리들에게 오셔서 인격적으로 사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태도가 그 성령에 대해서 인격적이지 못하고 비인격적일 때가 많은 것입니다. 막 무시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성령이 무슨 일을 행한다. 무슨 결정을 한다. 그럴 때는 하나님. 성령님 이거 기뻐하십니까? 물어 봐야 되는데 내가 알아서 할께! 그리고 발로 툭 차놓고서는 자기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도 무엇이고 싶으냐 하면은, 콜 보이 정도 되는 좋은 것입니다. 필요할 때 벨을 누르면은 성령이 뿅-- 하고 나타나서 무엇을 도와 드릴깝쇼? 마치 알라딘의 마술 램프에 나오는 그 괴물처럼 말입니다. ‘주인님 부르셨사옵나이까?’ ‘아아. 그래. 나, 저 친구 보기 싫어서 이 갈리는데 손 좀 봐라’ 하면 ‘예’ 하고 가서 방망이로 한 대 때려주고 오는 이런 것을 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접근은 절대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성령 만나게 하지 못합니다.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성령에 대해서 그릇된 욕망을 버려야됩니다. 성령을 한 손에 넣고 살아야지 되겠다. 그래서 그 영권을 손에 넣고 그것으로 내 마음대로 죽은 자도 살리고 병든 자도 고치고 돈 없는 자 돈도 주고 이런 식의 삶을 사는 것이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분께 붙잡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우리를 마음대로 사용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나로 하여금 기도하기 원하시면은 내가 손에 붙잡혀 있으면 성령께 순종하면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전도하기 원하시면 전도하게 하시는 겁니다. 성령이 엎드려 있기 원하시면 엎드려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섬기기 원하시면 섬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붙잡혀서 사는 삶이 되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능력 있는 삶의 비밀입니다.
성령을 한 손안에 쥘 때 능력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성령의 손에 강하게 붙잡혀질 때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성령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격이신 성령에 붙잡히려고 노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품에 안기고 그 품에 끌어 안기려고 노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한 가지만 배웁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하면 오늘 이 성경이 말하기를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 너희가 그 안에서 구속의 날까지 인침을 얻었느니라. 성령은 근심하십니다.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형식적인 신앙 생활을 하면 성령은 슬퍼하십니다. 탄식하시고 막 우십니다. 아파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그렇게 성령을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슬프게 하면 우선 하나님의 자녀로써 누릴 수 있는 그 축복들을 하나님이 거두어 가십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일주일 동안 사는 것은 성령이 있는지 없는지 슬프든지 기쁘든지 내 마음대로 막 살아 놓고 와서는 주님 은혜를 주시옵소서. 은혜 안주십니다. 그것이 그렇게됩니다.
성령을 슬프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우선 첫 번째 책망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써 누릴 수 있는 좋은 신앙의 특권과 은혜를 다 빼앗아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전에는 성령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 갈 때는 모든 것이 감격입니다. 교회 나와서 예배를 드려도 감격. 엎드려서 기도해도 감격. 감격의 눈물이 있고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고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너무 감사하게 됩니다. 여기를 보아도 감사 저기를 보아도 감사 그런데 성령이 슬퍼하시게 되면은 이러한 것들이 모두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에 사랑하던 사람들도 미워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슬퍼하시니까 성령이, 요즘말로 우리를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팍팍 밀어 주시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능력 있게 이런 문제들을 헤치면서 나아갈 수 있는 이 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쉽게 환경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넘어지는 것입니다. 엎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낙심하는 것입니다. 원망합니다. 불평합니다. 그러면서 또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점점 인간의 꾀만 늘어가는 겁니다. 단수만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 생활에 있어서 모든 향기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황폐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이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근심합니까? 성령이 무엇을 가지고 근심합니까? 여러분들이 성령이 왜 근심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왜 자녀들 때문에 근심하는가를 생각해 보면은 압니다. 자녀가 부모의 기뻐하는 일을 하는데 근심할 부모가 있습니까? 부모가 기뻐하지 않는 일을 할 때, 아니면 부모가 기뻐하는 일을 행하지 않을 때 그때에 자식이 그렇게 할 때 부모가 슬퍼하는 것처럼 성령도 똑같이 우리 안에서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과 불화한 삶을 살면은 안됩니다. 성령과 불화한 삶을 살면은 안됩니다.
우선 기초적으로 여러분들이 기억해야될 것은 인정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오늘 인격이신 성령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 또 하나는 내가 잘못된 삶을 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 않으면 성령이 슬퍼하신다는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성령과 불화한 삶을 살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과 불화한 삶을 살게 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거기에는 감격도 없고, 감동도 없고, 신앙의 체험도 없습니다. 황량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성령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무엇이 성령이 슬퍼하시는가 하는 일은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일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계속 슬프시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과 우리사이에 골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골이 깊어진다는 것은 죄가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쉽게 돌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작은 것에서부터 점점 큰 것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끊임없이 버리고 돌이키면서 성령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검증이 없이 여러분들이 교회 생활을 하고 기도한다고 기도하고 형식적인 신앙 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부모를 속썩이고 요즘 재벌에서 하는 것처럼 뒤에 가서 부모 걸어서 고소해 가지고 유산이나 받아내려고 하면서 매일 아침마다 화장하고 가서 아버님 평안히 주무셨나이까? 이게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버지가 얼마나 이갈리겠습니까? 저 입으로 가서 법정에 가서 나를 고소하고, 재산 싸움하고 뒤에 가서 헐뜯고 흉보고 이런 것들이 정상적인 인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빨리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기뻐하실 때 우리 안에 있는 성령께서 영향을 발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우리 삶의 보좌에 앉으셔서 우리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당신과 화목한 관계가 될 때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비범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고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연약할 때 강하게 하시고 궁핍할 때 부요하게 하십니다. 낙심할 때 힘을 얻고 위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안 믿는 사람들하고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낙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될 때 믿음이 있기 때문에 노래할 수 있고 모두 좌절할 때 오히려 용기를 갖고 오히려 많은 사람에게 용기를 나눠주고 꿈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불꽃과 같이 사는 것 아닙니까?
모든 사람들이 이기주의에 빠져서 나, 내 가족 잘 먹고 잘 사는 것 이렇게 몸부림 칠 때 사람들이 선뜻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유익을 버리고 자기의 재물을 허비하고 자기의 건강을 허비하고 나아가서는 자기의 생명까지 허비할 수 있게 되는 것. 우리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서 힘을 주실 때에 그것이 가능합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기만 해도 이 세상에서는 그 사람 참 분별 있고 경우 바른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데 성경이 왜 우리에게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도 너희들은 사랑하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표준도 못사는 사람이.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이 이 세상 사람들하고 다르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예수 믿으면서 왜 저 모양으로 살까? 그럴 때는 대답해 줄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 안에서 안 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옛날에 더 나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의 부도덕한 행실이나 도덕적인 타락 때문에 시험에 드는 사람은 그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입니다. 왜? 예수를 믿고 교회에 등록이 되어 있어도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힘을 그 안에 계신 성령이 그 에게 공급하고 그 성령이 그로 하여금 모든 죄와 두려움들을 이기고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새 힘을 주지 않으면 그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과 똑같은 삶을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 법을 잘 알겠습니까? 교도소를 내 집 드나들 듯이 하는 사람이 법을 잘 알겠습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그렇게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데 더 범죄하고 더 나쁜 짓하고 더 감옥에 자주 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워낙 수준이 높고 차원이 놓습니다. 이 쪽 뺨을 치면 여기도 돌려 대면서 원수의 손을 어루만져 주면서 얼마나 아프니 내 살이 얼마 안되고 뼈 밖에 없는데 얼마나 네 손이 아프겠니? 이 쪽은 살이 많으니까 이 쪽을 때려라 돌려대라는 이야기입니다.
가능합니까? 그런데 거기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왜? 한번 괜히 기독교가 얼마나 고상한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시기 위해서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삶을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요? 그들 자신이 고상해서가 아니라 속에서 성령이 함께 하시니까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변화된 삶을 살고 넘을 수 없는 시련을 넘고 참을 수 없는 그 고통을 참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버릴 수 없는 것들을 기꺼이 버리고 내어 줄 수 없는 것들을 아낌없이 내어 주고 귀한 것을 모두 버리고 희생하면서 그렇게 불꽃처럼 하나님을 위해서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몇 주가 될는지 모르지만 우리 이번 이 성령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새로워지기로 다짐합시다. 정말 우리에게 있는 이 모든 무능함과 연약함과 그리고 우리를 얽매는 것들을 풀어 버리고 성령이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진실로 이 캄캄하고 어두운 세상을 믿음을 따라 살게 하시고 그래서 늘 찬송하면서 기쁘고 즐겁고 그리고 한없이 희락 속에서 살다가 이 세상에서 많이 살다가 성령이 충만해지면은 이 눈가에 주름이 많이 생깁니다. 너무 웃어서. 너무 좋아서. 그렇게 살다가 주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할렐루야! 하면서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믿습니까? 제발. 머리로만 재고재고 하다가 믿어볼까? 말까? 그러면서 형식적인 삶을 살다가 죽지 말고 성령을 받아서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하는 능력을 받아서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성령이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다음 주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2. 책망하시는 성령님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성령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난주에는 인격으로 오시는 성령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이나 신비한 힘이 아니라 성령은 그 분이 우리 가운데 계셨던 것처럼 우리가 보이지만 않을 뿐이지 인격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 자녀다운 삶을 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한 번 우리 물어 봅시다. 후- 하고 바람을 부니까 꽃잎이 흔들렸습니다. 바람이 부니까 꽃잎이 흔들린 것이지 꽃잎이 흔들리는 것이 바람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그 인격이신 성령이 우리를 찾아오실 때 우리에게는 병 고침의 역사도 일어 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격이신 성령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 말할 수 없이 고통가운데 슬퍼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기쁨이 팍 용솟음 치고 역사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인격으로 다가오시면 그 인격이신 성령님이 찾아오신 여러 가지 표징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그 성령에 접근하는 방법이 인격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삶을 고치면서 인격이신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도록 인격적인 방법으로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 오늘 이 시간에는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조금 있으면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로 올라간다고 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아아.. 우리가 굶주리고 고통 받을 때 광야에서 축복하셔서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우리들을 먹이시던 그 예수 그리스도 또 병들어 고통 할 때 그 병든 자에게 손을 얹어서 낫게 하시고 우리가 무언가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고통 당할 때에 오셔서 때로는 팔복산에서 때로는 회당에서 때로는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던 그 예수님. 또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을 때에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 눈물 흘리고 슬퍼하시는 그 예수님. 그 분이 가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제자들은 깊은 근심에 잠겼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고아와 같이 버려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 마음이 근심이 가득하구나.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는데 내가 가면은 너희에게는 더 좋다. 왜냐하면 내가 가면 보혜사 성령이 너희에게 오신다.
보혜사라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 낸 단어입니다. ‘보’라고 하는 단어는 ‘중보자’라는 단어입니다. 또 ‘혜’라고 하는 단어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단어입니다. 또 ‘사’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가르치신다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하시는 그 일을 이 단어 속에 압축해서 집어 넣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이일은 바로 누가 하던 일입니까?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 사이에 내려오셔서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이 도저히 만날래야 만날 수가 없습니다. 왜? 거룩한 하나님은 죄인들과 교제하기를 싫어하십니다. 그리고 죄인은 거룩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찾아도 알 수 없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오셔서 죄인과 거룩한 하나님 사이에 다리를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은혜를 주시고 또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이런 기능을 예수님이 가시고 나면 성령이 오셔서 대신 하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다음에 사도시대가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강림하자마자 즉시 일어난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똑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은 직접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던 것처럼 사도들도 그 성령을 힘입어 병을 고쳤습니다. 성령이 사도들의 마음 가운데 오시자 사도들의 마음이 다시금 놀랍게 새롭게 다가오고 이전에는 깨달아 알 수 없던 구약의 진리들이 깨달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쳤던 교훈들이 생각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진리의 말씀을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다 사람들이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신앙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뿐 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수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셨던 것처럼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이 세상에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사도들에게 ,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한없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가셨지만,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일이, 이 땅에 성령을 보내서 계속되기 때문에 너희는 슬퍼하지 말아라
그런데 그 성령이 오시면 무슨 일을 하시는가에 대해서 오늘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을 우선 3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합시다. 책망하시는 성령님! 성령은 먼저 우리를 예수 믿는 사람 만들기 전에 우리를 책망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책망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이 기분이 좋다가도 한 마디의 책망으로 마음에 먹구름이 끼는 것입니다. 책망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상을 싫어하는 사람은 또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다 상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죄에 대해서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책망 하신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성령이 책망하신다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오늘 말씀을 드려야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는 많은 일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모두 가르치시기에 앞서서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가고 나면 성령이 오시는데 그 성령이 오면은 이 세상을 책망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그리고 그 죄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일 들이 먼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이니 성화니 헌신이니 영광이니 정결함이니 경건이니 수많은 좋은 기독교에서만 사용되는 말들을 우리들이 하고 그런 것들을 연구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힘쓴다고 할 지라도 죄에 대해서 책망하시는 성령에 대해서 우리가 알지 못한다면 이 모든 것들은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성령은 오셔서 제일 먼저 죄를 책망하게 하십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충만하게 받고 그리고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설교한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하면은 구원을 얻으라는 설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가 못 박았다 라고 하는 죄였습니다. 너희들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메시야였다고 사도들이 설교했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가슴을 치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깊은 통회함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있는 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요? 간악한 로마병등들이 그들을 끌고 갔고 그리고 그들을 못 박았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그 십자가의 형별의 피가 묻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자기들의 죄 때문이다 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먼저 가슴을 치면서 크게 절망을 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심하게 책망을 받을 때 그 때에 낙담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친구나 아랫 사람이 아니라 아주 높은 어른. 자기가 존경하고 감히 가까이 대하기 힘든 그런 분이 자기에게 다가와서 너는 소망이 없는 놈이라고 심하게 책망할 때 그때에 사람들은 절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책망하시는 분이 성령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깊이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전에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자기의 죄로 여겼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죄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전에는 문제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자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가 생각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성령은 이처럼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예배가 끝난 다음에 한 자매가 나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성령을 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자매는 살아오면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지식이 모자라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또.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오래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많이 모르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저 사람들은 지식도 나만 못하고 교회도 나만 보다 오래 다니지 못했지만은 그러나 무엇인가 그 예수를 믿는 신앙 생활 속에 무엇인가 있는 것 같고 나는 겉으로는 무언가 갖은 것 같은데 속으로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이 목사님 하시는 말씀이 성령 받기를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오늘부터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내 모습을 보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한 한 달쯤 후에 다시 그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하는 말이 목사님 나는 너무 비참합니다. 왜냐하면 주님 앞에 내가 매일 하는 기도가, 주님. 내 모습을 보여 주시옵소서. 내 모습을 깨닫게 하여 주시 옵소서. 내 모습을 보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모습을 보여 주셨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비참하고 처참하더라는 것입니다.
밤에 잘 때는 커텐을 치고 잡니다. 그 때는 애들이 이불을 가지고 풀썩이고 베개를 집어던지고 그래도 모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을 갤 때 확- 커튼을 열어제치면 찬란한 아침 햇살이 들어옵니다. 우리는 그 때에 자기도 모르게 문을 엽니다. 왜? 온 방안이 그 들어 온 햇살에 먼지가 자욱하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성남에 집회에 갔을 때도 유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3일째 된 날이었습니다. 저는 돌아 왔습니다. 그 교회 교역자에게 어느 청년이 전화를 했습니다. ‘전도사님. 주무십니까?’ ‘나는 아직 안 잡니다.’ ‘말씀 좀 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아주 헌신되고 착실한 자매였습니다. 그런데 하는 말이 ‘전도사님. 말씀을 3일 동안 듣고 나니까 하나님의 은혜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내 자신이 그렇게 싫고 더러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만신창이가 된 창녀와 같은 자기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는 그 시간에 말씀을 듣기 위해서 거기에 나올 때에 자기의 모습을 그렇게 비참하게 생각하기 위해서 거기 나온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거기에 온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지만 그것은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에 은혜를 더하고 싶어서 나온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은혜를 더 하시기는커녕 자기가 누구인지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하시는 일입니다. 누구도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만약에 당신이 죄인이라고 집요하게 소리소리 지를 때 거기에 성령이 함께 하시면 그 지적을 통해서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더욱 더 뼈져리게 느끼지만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은 반발이 생겨납니다. 내가 무얼? 이만큼 살면은 됐지. 하는 반발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자매에게 자기의 모습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목사님. 내 자신이 이렇게 더러운 사람인 줄은 예전에는 미쳐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모습을 보여 주시니까 내 모습이 너무나 더럽고 너무나 커다란 죄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 앞에 소망이 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생각이 깊이 제 가슴에 사무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며 우니까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자매님. 이번에는 기도 제목을 바꾸십시오.‘ ’어떻게 기도할까요? 목사님.‘ ’주님을 보여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니까 ’주여. 나를 보여 주십옵소서.‘ 그 다음에 자신을 충분히 보게 되니까 그 다음에는 주님을 보여 주시옵소서 .왜? 자신의 크게 죄 된 모습을 깨닫고 나니까 주님을 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을 보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보여 주시옵소서. 그런데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커다란 은혜를 받았고 성령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성령이 오셔서 먼저 하시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회개의 참된 기쁨을 아는 사람들은 참 회개를 사모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앞에 죄 가운데 살아 가셔서 어느 날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큰 회개의 영을 불어넣어 주셔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일어났을 때 그 때에 회개만 한 것이 아니라, 회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이 따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반응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반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깊이 자기의 죄를 슬퍼하면서 깊이 회개하게 되니까 그러면은 반드시 그 회개에는 하나님의 응답이 따라야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때 그 회개가 진정한 의미의 회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울고 가슴 아파하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만 울고 가슴 아파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자신의 고통 때문에도 슬퍼해요 자기가 받는 시련 때문에도 사람은 신앙과 관계없이 가슴 아파하고 애통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응답이 있는 애통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응답이 있는 애통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깊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회개에 대해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회개에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때에 회개와 응답이 만나고 그 결과가 바로 우리의 죄 사함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응답이 있고 난 후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이어트 해 본 적은 없습니다만은 금식해 본 적은 있습니다. 금식을 한 일 주일 정도하고 나면은 그 다음에 돌아 와서 힘이 없을 때는 못 느끼지만, 돌아 와서 우선 보식을 하고 하룻밤 푹 자고 목욕을 하고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은 어떻습니까? 확실히 몸무게가 한 3kg 정도 빠졌을겁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몸이 개운합니다. 아주 심할 때는 저는 일주일 금식하고 났는데 10kg이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보통 몸무게에서 10kg정도 빠지니까 바지가 헐거우면서 몸이 날아 갈 것 같이 가볍습니다. 우선 살이 빠져서 물리적으로 가볍고 두 번째 가벼운 것은 영적으로 은혜를 받으니까 가볍고 세 번째 또 가벼운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에 짐지워져 있던 영혼의 무거운 죄짐들이 풀려지니까 완전히 자유롭게 말하자면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축구 선수한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합숙 훈련할 대에 시간 이외에는 이 다리에다가 모래주머니를 2개씩 4개를 달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래주머니를 달고 한 일주일 내지 이주일 합숙 훈련을 하다가 그것을 푸는 것이 언젠가 하면은 시합하기 직전에 딱 푸른다고 합니다.
그러면은 그 이 주일동안 모래주머니를 달고 돌아다니면서 그상태로 축구하고 그대로 밥 먹고 그것을 매달고 다니면서 세수하고 다 하다가 마지막에 시합하기 직전에 그것을 풀어놓고 잔디가 파랗게 깔려 있는 운동장으로 뛰어 나가면은 막 날아가는 것 같다는 겁니다. 왜? 오랫동안 무거운 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모르고 살다가 탁 푸니까 날라갈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야구를 할 때도 똑같습니다. 야구를 할 때 타자가 나와서 그 야구 방망이 하나로 공을 때리기 전에 뒤에서 꼭 2개나 3개를 가지고 흔드는 사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왜 타자로 나가기 직전에 야구 방망이를 2개 혹은 3개를 붙들고 흔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한 10분 정도 흔들다가 타석에 서서 딱 하나의 방망이를 들면은 날아갈 것 같이 가벼운 것입니다.
회개할 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완전히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요? 그때 우리가 완전한 가벼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몸과 영혼에 얼마나 무거운 짐들을 짊어지고 살아가는가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오랫동안 그 죄 짐을 지고 살면은 그렇게 지고 살아가는데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도 한번 해보십시오. 가서 모래주머니 달고 한 일주일은 죽어도 못살 것 같습니다. 한 열흘 살고 한 달 살아 보십시오. 그 다음엔 살만합니다. 그것이 죄인들이 회개를 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성경은 성령이 오셔서 제일 먼저 죄에 대하여 우리를 책망한다고 말합니다. 성령이 죄에 대하여 책망하실 때 우리들은 죄가 얼마나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지에 대해서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기도 제목을 하나 발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놀라운 성령! 그 은혜의 능력! 그 신비의 커다란 힘! 이런 것들을 탐하기에 앞서서 먼저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죄에 대해서 깊이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책망하시는 일들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서함을 받고 새사람이 되게 되는데 그렇게 죄에 대해서 책망하시는 성령이 오시기 전에 먼저 필요한 것은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자신이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깨닫지 않으면 성령이 역사 하실 수가 없습니다. 깨달을 때에 그 깨닫는 진리의 내용을 성령이 가지고 역사 하실 때에 사람들이 깊이 회개하고 영혼의 자유함을 얻게 되고 성령을 받게 되는 일들이 일어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예배 중에 늘 깨닫게 되어야 될 것은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지 않은 것인지에 대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것이 아니면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가 아니면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서 그 다음에 깨닫는 것입니다. 새롭게 깨닫고, 새롭게 깨닫고 그리고 새롭게 알게 되는 것. 그것을 통해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실 때에 죄가 책망되어지고 죄가 책망 받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아주 굉장히 어려움이 많은 교회에서 집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집회하는 집회가 하루 이틀 이렇게 시작이 되었는데 계속해서 집회가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회를 인도하는 제가 집회를 주최하고 있는 책임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끝나고 나서 한 자매에게 기도해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랬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온 몸을 떨면서 무서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은 사람으로써는 알 수 없는 모든 감추어진 죄까지라도 성령은 오셔서 그 죄를 지적하시고 책망하실 적에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격이신 성령을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격이신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그 거룩한 은혜로 우리를 감싸는 일이 있기 전에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된다는 사실을 신앙이 깊어질수록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이렇게 죄를 책망하는 일이 일어날 때 수많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통감하게 될 때 그때 비로소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해서 책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우리에게 성령의 책망하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교회에도 성령이 오셔서 사람으로써는 깨닫게 할 수 없는 죄에 대해서 성령 자신이 책망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리고 그를 지적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깊이 깨닫고 뉘우치고 삶을 돌이키고 인격적인 성령 앞에 인격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변화를 가져오는 성령의 책망케 하심이 어느 때 보다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의 위대한 역사는 바로 이렇게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중생하고 죄 인을 책망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그리하여 성령을 통해서 죄인들을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수많은 구원들을 이루어 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제일 먼저 주님의 성령이여! 우리를 보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속속들이 보게 하셔서 인간의 내면에 갈피갈피 감추어진 그러한 인간의 자기도 알지 못하는 그러한 잘못들을 깊이 보고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전폭적인 성령의 도우심을 우리가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성령이 오시면 또 하나 하는 일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한다는 것입니다. 이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지만 그러나 때가 차면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은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믿지 아니한 사람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요한 복음 3장에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 안에 평화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은혜와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 영혼에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보십시다. 죄를 짓고 아직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어도 죄를 지은 즉시 그 고통은 시작입니다. 그렇지요? 죄를 지은 즉시 그 사람의 마음이 고통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심판은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잠시 후면 주님이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고 그리고 모든 이 세상에 있는 이 세상의 나라를 주관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미혹케 하는 악한 사단을 지옥에 쳐 넣으시고 그리고 또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렇게 불신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심판하셔서 지옥의 불 가운데 집어넣으신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교리입니다.
오늘날은 지옥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옥이 없다 면은 천국도 없는 것입니다. 천국도 없다 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우리가 진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그 죽은 사람들이 지금 심판을 받고 있는 것처럼 마지막에는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심판이 이 땅에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궁극적으로 최종적인 심판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을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심판에 부활로 나아와서 그 지옥의 불같은 고통을 견디지 않을 수 없도록 그렇게 지옥의 최종적인 심판으로 몰아 넣는 일들이 일어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오셔서 그것을 깨닫게 하신 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는 곳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오는 곳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오시는 곳마다 사람들은 자기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자기의 죄악된 모습을 발견하자 거기에는 하나님의 진로 밖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자 자기의 죄로부터 자기를 구원하실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오셔서 우리를 절망하게 하시고 성령은 오셔서 우리에게 희망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끊임없이 세상의 최종적인 심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것이 깨달아 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타오르는 지옥의 불길 가운데 죽어 가는 그 고통스러운 미래의 그림이 오늘 우리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이전에 농담처럼 여기던 기독교의 진리를 오늘 깊이 깨닫게 만드십니다. 성령은 이 전에는 장난처럼 생각하던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서 그 교리가 얼마나 놀랍고 진실한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성령이 오셔서 참된 부흥을 교회 가운데 주실 때에는 사람들이 그 자신의 죄로 인하여서 깊이 애통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했던 것은 내가 하나님을 믿어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내가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를 영접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성령이 오셔서 그들로 하여금 심판을 보게 하시니까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를 원하는 사모함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또한 우리에게 말하기를 의에 대하여 책망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죄의 심각함에 대하여 깨닫고 그리고 자기의 죄 뿐만 아니라 결국엔 자기가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 사람들에게 눈을 떠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살았던 삶을 뒤돌아 보아도 자기로써는 구원을 얻을만한 선한 것이 자기 안에는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믿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그 의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 생겨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오셔서 죄를 책망하셔서 깊이 절망한 사람들을 동일한 말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우리가 어찌하여야 할꼬. 하면서 슬퍼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전도하는 일은 쉽고도 기쁜 일입니다. 너무나 쉽게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너무나 쉽게 그 하나님의 말씀과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그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시면 그 성령이 의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해서 이런 구원을 내가 예비해 놓고 너희를 위해서 이런 구원을 내가 준비해 놓았는데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냐고 책망하는 음성이 성령이 오실 때 우리는 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 신앙과 전심으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우리의 마음에 불순종! 이런 것들을 성령은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이 오시면 모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고통하며 괴로워하고 절망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 십자가로 마련된 부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그 놀랍고 커다란 의에 대하여 눈뜨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만이 나를 구원하신 참된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령이 우리가운데 오셔야지만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야지만 그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 성령이 우리에게 죄에 대해서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의 참모습을 보게 하여야지만 우리는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우리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한 신앙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요?
성령이 오시지 않는 곳에 간절한 신앙 생활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는 곳에 열심있는 신앙 생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성령이 불러일으킨 열심히 아니면 그것은 참된 열심히 아닙니다.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게 하는 일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곳에만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추구하고 사모하고 그를 위해서 부르짖는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오실 때 우리들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실 때 마른땅과 같이 메말랐던 사람들의 심령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지하고 어둠 가운데 있어서 도무지 깨닫지 못하던 그런 어두운 심령에 진리의 빛이 비추이기 시작하면 교만하던 사람들이 겸손해집니다. 생명이 없던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됩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의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용기와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 하던 사람들이 다가 오셔서 용서하시고 죄인들을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과 그 가슴의 박동 소리를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와 인격적으로 교제하고, 사랑하고, 그와 함께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삶으로 우리를 데려 가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3. 거듭나게 하는 성령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디도서 3장 5절)
지난 주일에는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죄를 책망하시는 얘기를 하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성령이 그 죄를 책망하셔서 깨닫게 하지 않고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아 알지 못하다가도 성령이 오셔서 그에게 죄를 생각나게 하시면 그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체험하기 전에는 성경에 읽으면서 수많은 죄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지요? 살인하지말라. 내가 언제 뭐 사람 죽인 적이 있는가? 그러면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나는 법 없어도 살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그의 마음가운데 깨닫게 하시면 자기는 칼을 들고 사람을 죽인 적은 없었지만, 더 큰 율법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누구든지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곧 살인한 자니라’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하시니까 사람을 찔러서 피 흘리고 감옥에 갇혀있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 그것이 칼을 들고 사람을 죽인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 죄악 된 것이 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가서 당신 살인한 사람과 똑같아! 그러면서 흉악한 살인범을 데려다가 같이 세워놓고 너희 둘이 친구다! 라고 이야기하면 펄펄 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면은 사람을 찔러 죽이고 감옥에 갇혀 있는 그 사람보다 내가 훨씬 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결국은 우리의 삶 구석구석을 다 보게 되니까, 그러니까 깨달아 지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야, 정말 나와 같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칭찬을 받아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와 구원에 합당한 사람이 되겠는가?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깊은 죄인이고 자기 속에 얼마나 커다란 죄들이 살아서 숨쉬고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암을 수술하는 것을 한번 보셨습니까? 저는 수술하는 현장은 못 봤지만은 수술을 끝낸 그 결과는 여러 차례 보았습니다. 쪼개고 그 암 세포를 긁어모았는데 세수 대야로 하나 가득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많은 것이 사람 속에 들어가 있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깊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약에 겉으로 나와있었다면 우리는 깜짝 놀랄 것입니다. 그 사람하고 마주 앉아서 대화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 제가 국민학교 다닐때에 그 미아리 웃동네에 보면은 혹이 3개 달린 아줌마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래서 영화도 나왔습니다. 종양의 일종일 것입니다. 한 쪽에 주방에서 빻는 방망이 절구만 한 것이 3개나 달려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흉악한 몰골은 말할 수도 없지요. 그런 것이 겉으로만 안 달려 있지 암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나 속에 종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그 흉악한 것이 속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겉모습을 보고 모르지만 이 속에는 그런 것들이 달려 있다는 사실을 성령이 오시는 순간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아, 내가 정말 이렇게 끔찍한 죄인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너무나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이런 죄, 마음속에 있는 이 더러움으로부터 벗어 날 수 없다는 깊은 인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제 이렇게 우리를 이런 소망이 없는 죄 가운데서 구원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예수 그리스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필요를 느껴야지 구원을 받으려고 애를 쓸 것 아닙니까? 오늘 거듭남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왜 교회에 나와서 1년 2년 3년이 지나가도록 거듭나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했으면서도 아무런 구원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성령이 오셔서 그의 마음속에 자기가 얼마나 소망이 없는 인간인가 하는 것을 보일 때 사람들은 거기에서 머물러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여기에다 방망이 만한 혹 3개 달아 준다고 하면은 정말 아마 못 견딜 것입니다. 옛날에 어느 대학생 하나가 등 있는 데에 혹이 하나 났습니다. 대추만한 혹이 달렸으니까 잘라 버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잘랐습니다. 자르고 나니까 그 다음엔 계란만 해 졌습니다. 그래서 또 자르고 나니까 그 다음에 사과 만 해졌습니다. 그래서 또 자르고 나니까 한 6개월 지나니까 그 다음에 베개만 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와서 한 번만 더 잘라 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것들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중생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중생이라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거리에 나가보면은 사람들이 열심히 움직이고 돌아다닙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지 모릅니다. 봄이니까 옷차림도 가볍고 놀러 가는 사람, 물건 사는 사람, 바겐 세일에 쇼핑하러 가는 사람 등 많습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싱싱하게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는 죽은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전에 제가 직장 다닐 때 같은 직원 한 사람이 근무 중에 뇌졸중 비슷한 것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있다가 집으로 옮겨져서 집에서 누워있는데 식물 인간입니다. 링겔을 맞고 계속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말을 못합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저희가 문병 왔습니다. 하고 이야기를 해도 눈을 지그시 감고 또 어떤 때는 눈을 이렇게 뜨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흰자위만 허옇게 있고 그 다음엔 보지를 못합니다. 누가가도, 누가와도 무슨 기쁜 일이 일어나도 슬픈 일이 일어나도 죽은 자와 같이 고요히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고 우리는 살아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태어날 때 이미 영적으로는 죽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할 수도 없고 또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님이 누구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일들이 무엇인지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모두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그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 틀린 이야기입니다. 이미 죽었던 우리들입니다. 완료형입니다. 이미 죽어서 반응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또 하나님이 이렇게 살아야한다고 가르쳐 주어도 그것이 가슴에 다가와서 아멘! 그렇게 살아야지 이렇게 할 수 없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년에 한번 무려 6년 동안 남편이 식물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대개 포기하게 됩니다. 6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에서 의식도 없고 보지도 못하고 링겔만 맞으면서 살던 사람이 6년만에 그 부인의 간절한 기도 끝에 다시 깨어난 기사를 읽어보았습니다. 성모병원에서. 남자가 다시 일어났습니다.
눈을 뜨니까 이제는, 전에도 눈을 떴었지만은 그러나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말하기 시작하고 감정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새롭게 얻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먼저 성경이 이렇게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몸은 살아 있었지만 영혼은 죽어 있었는데 그렇게 죽어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켜서 중생이라 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은 사람을 살리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기를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것으로 거듭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 곧 항상 있고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살아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의 중간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생명을 잃어버리고 참 죽어서 태어난 하나님을 모르는 그 형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어뗳게 해야 되는가? 그것은 간단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해지는 거기에 와야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오지 않으면 그런 말씀을 들고 우리가 가서 말을 해주어야 합니다. 언제 성령이 그것을 씨앗으로 사용해서 그 사람의 마음에 참된 거듭남의 생명을 줄 지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에게 중생을 주실 때에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뿐만이 아니라 또 하나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자 보십시오. 가끔 보면 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화내야될 자리에 가서 낄낄거리고 웃고 울어야 될 자리에 가서 비웃고 슬퍼해야 될 자리에 가서 슬퍼할 줄 모르는 상식이 안 통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컴퓨터로 말하면 소프트웨어가 빠진 것입니다. 컴퓨터는 사다 놓았는데 그 다음에 그 속에서 컴퓨터가 작동할 수 있는 그런 프로그램들이 다 죽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런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죽었던 사람을 살려서 느끼고 보게 하고 알게 하고 냄새 맡게 하는 것만으로는 완전한 중생이라고 할 수 없고 참다운 중생이 되기 위해서는 그 속에 하나님의 성품을 넣어 주셔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성품을 넣어 주셔서 베드로후서 1장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너희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였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주입시켜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성품을 갖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바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우리가 왜 거듭나야되겠느냐? 거듭나야될 필요가 도대체 무엇이냐? 우선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격을 갖은 사람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난번에 제가 시편 23편을 겨울에 강해하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다루시되 인격적으로 다루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인격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격이 감화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는다 라고 하는 이야기는 바로 그것입니다.
인격이신 하나님을 우리들이 만나고 그 하나님 앞에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그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바람이 보이지는 않지만은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듯이 하나님을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격을 느끼면서 우리의 삶과 인생을 이제는 그 하나님께 맡기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라고 하는 이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출발입니다.
그런데 그 인격의 세 가지 요소가 지식, 감정, 의지 이렇게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고린도서는 말하기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을 수 없다. 미련하고 깨닫지 못하고 이런 모든 것들은 영적으로라야 분별을 하느니라. 아무리 똑똑하고 지혜로와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계산을 하고 추론을 해서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우리보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봤느냐 하고 물을 때에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을 해야합니까? 왜 말이 없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봤느냐 물을 때에 우리는 뭐라고 말해야 됩니까? 보았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보았느냐고 물었을 때의 그 보는 것과 우리가 보았다고 말했을 때 그 보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까? 아닙니까? 똑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보는 것을 보는 것이지만,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시지 아니 하시면 우리들은 세상에 있는 지식과 사람들 사이에 통행하는 상식과 이런 것들은 우리들이 잘 헤아려서 알고 파악할 수 있지만, 영에 속한 것은 우리들이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신앙의 중요한 요소들은 영적으로 알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습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 세상의 모든 역사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이 내게 오셔서 나를 거듭나게 하시면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내 앞에서 내 죄를 위해서 한없는 고통을 받으며 죽어 가시는 것과 같은 그 느낌을 내가 그대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서 직접 예수 그리스도의 공중에 매달리는 것과 그 십자가에 서 떨어지는 핏방울을 온 몸에 맞은 사람과 조금도 다름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위해서 죽으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일생에 어떤 어려움이 오고 우리의 신앙으로 향해서 핍박이 와도 이것을 부인하지 않을 수 있는 깊은 확신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하시는 일입니까?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해 주시지 아니하시면 육신에 속한 생각을 가지고는 영에 속한 신앙의 일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밤에 쉬시는데 니고데모라고하는 공회원이니까 오늘 우리로 말하자면 종교의회의 대의원쯤 되는 신앙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와서 문을 두드리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네가 거듭나야하겠다. 네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가 없다.
그랬더니 이 당대의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이 사람이 즉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한 것은 어머니의 조그만 배와 이렇게 키가 큰 자기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니 키가 1미터 80이나되는 내가 어떻게 수박만한 어머니 뱃속에 내가 다시 들어 갈 수 있겠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니까 자기도 말이 않되는 줄 알면서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나같이 이렇게 큰 사람이 어떻게 수박만한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물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만화로 그려도 사람들이 뱃살을 잡고 웃을 일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셔서 그의 지식을 새롭게 해주시지 아니하면 말하자면 신앙의 영역으로 들어와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가장 바보같은 이야기만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것이 바로 신앙의 세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이 지식을 새롭게 해주셔야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누구이고 하나님이 누구이고, 깨달아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만들어 놓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 갈 수가 있기 때문에 중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사랑의 왜곡으로 나타납니다. 사랑해서는 안될 것을 뜨겁게 사랑하는가 하면 진짜 사랑해야 될 것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잘못된 애정으로 말미암아서 가정이 깨지고 사회에 상처를 주고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이런 고통스러운 일들을 사람들이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결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왜곡된 사랑으로 사람들은 어느 하나에 미친 듯이 빠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다른 것들을 마구 버리고 파괴할 수 있는 이러한 담력까지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나 하나의 잠시의 즐거움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기꺼이 그런 길을 택합니다. 그리고 자기 한 사람이 기쁨을 얻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불행에 떨어지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는 이러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속에 있는 왜곡된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직장에 다닐 때 보니까 우표를 수집하는 광입니다. 어느 정도 광인가 하면은, 그 전날 와서 텐트를 치고 우체국 앞에 서서 우표를 살 정도로 광입니다. 그렇게 우표를 샀는데 꽤 많이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부자인가 했더니 그렇게 부자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표를 한번 살 때 한 장씩 사는 것이 아니라 아주 여러 장씩 삽니다. 그리고 모아 놓았는데 캐비넷으로 두 캐비넷이랍니다. 그 우표만 해도 아마 값이 몇 천 만원 나가는 큰돈입니다.
그런데 방을 두 개를 쓰고 살았는데 애들 둘이서 한 방 쓰고 자기와 부인이 방 하나를 쓰고 이렇게 두 개는 갖어야 살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우표가 어느 날 보니까 캐비넷에서 서서히 끝이 색이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방 하나를 전세를 놔서 애들을 자기네 방으로 몰고 그 방 값을 빼서 일본에다가 금고를 주문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방에다 갖다놓고 그 금고에다가 우표를 잔뜩 쌓아 놓고는 말할 수 없이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방에서 넷이 자게 된 것은 개의치도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으로 말하자면 얘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옛날에 전에 있던 교회에서 전도사님이 이야기를 하는데 신학생이 예수를 믿고 다 끊었는데 끝까지 못 끊는 것이 프로 야구, 그 때는 프로야구가 없었으니까 고등학교 야구였습니다. 그래서 이 신학생이 전도사 생활을 하는데 무엇을 시키려고 하는데 오전 예배 끝나고 없어졌습니다. 어디 갔나 그랬더니 사람들이 쉬는 시간에 사택에 가서 텔레비젼을 보고 있는데 그 텔레비젼에 나오더랍니다. 막 손을 흔들면서 . 저녁 예배 그 사이를 못 참아서 서울 운동장 야구장에 뛰어 간 것입니다. 이런 사랑( ? )들을 세상에서는 그냥 웃으면서 넘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런 사랑( ? )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기를 기쁘게 하고 자기를 좋아하게 하는 사랑은 왜곡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러면은 그것은 무엇입니까? 자식도 사랑하지 말고 부모도 사랑하지 말고 예수 믿는 사람은 취미도 없으라는 말입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전에는 그 야구가 좋고 그 우표가 좋고 그 책이 좋고 그 음악이 좋았었는데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그런 것들이 좋아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있으니까 자녀들을 사랑하고 부모들을 사랑하는 이런 사랑이 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령께서 오시면은 우리의 왜곡된 사랑을 정리해 주십니다. 그래서 이전에 한없이 사랑하던 것을 버릴 수 있는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중에도 누가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세상에서 제일 하기 힘든 것 하나가 술 끊고 담배 끊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노름하는 것들을 끊지 못해서 불행해 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엊그제도 텔레비젼에서 보니까 울면서 자기 부인한테 매달리는 것입니다. ‘여보. 제발 이 도끼로 내 손을 짤라줘요.’ 자기도 그것을 끊어야 되는 줄 아는데 도저히 끊지를 못하니까( ? ) 이 도끼로 차라리 내 손을 끊어달라고..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화투를 오른 손으로 하니까 다시는 않한다고 하고 오른 손을 끊으니까 그 다음엔 의수를 달고 다시 하더라는 것입니다. 의수를 달고.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손을 끊어도 그래도 그 속에 있는 그 그릇된 사랑의 경향을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술은 많이 안 먹어봤어도 담배는 많이 피워 보았는데 하루에 한 갑 반씩 담배를 예수 믿기 전에 피웠는데 예수 믿고 나서 그것을 끊는데 4년이 걸렸습니다. 얼마나 힘든지 담배를 끊고 한 한달 동안은 정신병자 같아요. 금단 현상이 일어나서 막 불안하고 가슴이 쿵쿵 뛰고 누가 쫒아 오는 것 같고 그랬는데 놀라지 마십시오. 담배를 끊고 3년 반이 지났는데도 옆에서 담배를 피면 그 담배 연기를 흠-- 마십니다. 하루에 꼭 서 너 대씩 피웁니다. 5년 지나고 나서야 머리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지금은 아주 옆에서 누가 담배를 피면은 너무너무 머리가 아프고 괴롭습니다. 토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5년이 걸립니다. 이런 왜곡된 사랑이 우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왜곡된 사랑을 하나님이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때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예수 믿기 전에 사람들 관심이 손톱을 길게 하고 좋은 옷, 화장품 이야기 멋있는 옷 이야기 교회 와서도 맨 그런 것 자랑하고 모여 앉았다 하면 그 얘기, 성경책만 옆에 들고 왔지 앉아서는 집사서 뻥튀기해서 불려간 이야기, 사업해서 돈 많이 번 이야기 등 그런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왜곡된 사랑이 우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그러니까 세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계속해서 고기만 먹으면은 생목이 오르니까 가끔 교회 나와서 고요히 무릎도 꿇고 눈도 감아 보지만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신앙이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하시면 사람들이 순수해 집니다. ( ? )옷, 추위를 피하고 더위를 피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불쾌감만 안 주면 되지 이런 차원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차, 그저 불편하지 않게 여기 저기 다닐 수 있으면 되지, 집, 더위를 피하고 추위를 피하고 가족들이 모여 앉아서 즐거울 수 있으면 되지 이렇게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청교도들이 성령을 깊이 체험하고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검소하고 경건한 생활을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은 오셔서 이렇게 왜곡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거듭나게 해 주심으로 주님이 우리가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우리도 싫어하게 하시고 주님이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사랑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이 우리에게 하는 일입니다.
전에 내가 직장 다닐 때 전도했던 그 부인 이야기를 나는 늘 기억합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를 믿고 거듭나서 아주 훌륭한 신앙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여서 자매님, 당신이 거듭나고 난 다음에 제일 변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은 거창하게 이야기 할 줄 알았습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고 은혜를 받으니까 저에게 변화가 하나 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전에는 만원이 큰돈이었는데, 만원 한 장이 주머니에 없으면 불안하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라서 꿔서라고 주머니에 넣어 놨어야 되는데 은혜를 받고 나니까 토큰 하나밖에 없어도 마음이 부요하고 편안하다고 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이 우리 속에 왜곡된 사랑을 변화 시켜 주시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거듭나게 되어서 참다운 애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입니까? 로마서는 말하기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에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이렇게 해야겠다하고 마음먹고 있는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원수가 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해야지 하고 마음을 먹어도 도저히 굴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 받은 것만큼만 은혜를 갚을 줄 알면은 그 사람은 어디 가든지 환영받으면서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은혜를 잊어버리거나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그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은혜 베푸는 사람에게 은혜로 갚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만 미워하라. 이렇게 말하지 않고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것 없고 너희에게 무관심한 사람들도 사랑하고 심지어는 이쪽 뺨을 때리면서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따귀 맞아 보셨습니까? 쫘악- 하고 맞았습니다. 불이 번쩍나는데 이 사람 생각에 내 아픈 생각이 나는 게 아니라 아유, 저 사람이 아무리 손가죽이 두껍다고 하지만 나같이 광대뼈가 튀어나온 사람을 때리느라고 얼마나 손이 아팠을까? 그러면서 이쪽에 살이 넉넉히 붙었으니 이번에는 이쪽을 때리라고 내미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신 윤리입니다.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살려고 애를 쓰고 다 자기를 위해서 재물을 모으기를 원하는데 어떻게 그 재물을 자기를 위해서 모으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그것을 사용하고 하늘 나라를 위해서 그것을 쌓아 둘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돈을 주고 명예를 주어도 다른 사람을 섬기기 싫어하는데 어떻게 아무 것도 받는 것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형제 자매들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이런 모든 일들은 육신의 생각과 육신의 의지 가지고는 않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진정 거듭나서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은 그 농도 가 진하면 진할수록 섬기되 말이 없습니다. 왜? 이 섬기는 것 자체가 동기가 내 마음속에 있는 주님의 사랑 때문에 주님을 섬기게 되니까. 그러니까 늘 섬기면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없고 성령이 거듭나게 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려고 할 때에는 언제나 자신을 하나님의 생각에 굴복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요만한 일을 하고 이만한 문제를 일으키고, 작은 일을 하고 큰 말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 주는가 하면 육에 속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려고 애를 써도 굴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어떻게 인간으로써 그렇게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삶을 살까? 어떤 사람이 밤새도록 기도하는 광경을 보면서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졸립지도 않고 저렇게 오래도록 간절히 기도할 수 있을까? 성령이 오시면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이런 일들이 불가능 해 지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해 주셔야지만 정상적인 신앙 생활이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듭나게 해 주실 때 전에 보지 못하던 눈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뜨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 나가도 아무 재미도 없고 읽다가는 잠들고 또 잠들었다가는 그냥( ? ) 자야 되는데 잠이 안 오고 말똥말똥하면 얘야! 성경 가져와라. 성경 읽으면은 성경에서 수면제가 솔솔, 성경 전서가 아니라 수면제전서입니다. 펴기만 하면은 잠이 솔솔 오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꿀같이 달고 그 말씀에 은혜가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전에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 여 집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생활을 막 시작해서 나중에 집사가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막 시작을 했는데 하루는 상담을 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믿어지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믿고 싶어 죽겠다는 것입니다. 나도 저 사람들처럼 저렇게 정말 뜨겁고 열렬한 신자가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믿어지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하나님이 안 믿어지느냐고 그랬더니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은 믿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럼 무엇이 안 믿어집니까? 했더니 예수님이 살아 계셨다는 것도 믿어집니다.
그런데 무엇이 안 믿어지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그래서 내가 구원은 받는 다는 것이 안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은 사람들이 흉볼까봐 그냥 아멘! 이라고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교회에 다닌지 1년이 되었는데 안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 좀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게 좀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믿음을 갖기에 제일 좋은 성경은 요한 복음입니다. 요한 복음에 보면은 그리스도가 너희의 구주이심을 믿게 하려고 이 글을 썼다 그랬으니까 요한 복음을 읽어보십시오. 그랬더니 많이 읽었다고 했습니다. 여태까지 읽은 것은 무효로 치고 다시 읽는데 제가 말하는 것처럼 생각을 하면서 읽으십시오. 그럼 어떻게 읽습니까? 해서 새롭게 성경을 읽는데 어떻게 하는가 하면 속으로 그렇습니다. 아멘! 이옵나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성경을 읽어라. 그리고 성경을 읽기 전에 늘 기도할 때. 주님!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깨닫게만 해주시면 내가 아멘 하겠사옵나이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는 그대로 살겠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많이 읽지 말고 하루에 그저 몇 절씩이라도 좋으니까 간절히 읽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양반이 읽어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와서 이야기를 합니다. 믿어집니다! 할렐루야! 아니 어떻게 믿어집니까? 몇 번이나 읽었습니까? 그랬더니 반 밖에 못 읽었는데 하여튼 안 읽은 것까지다 믿어진다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왜 그럴까요? 전에 그렇게 수 없이 읽었는데 안 믿어졌었는데 반 밖에 안 읽었는데 아직 안 읽은 것까지 뭐가 나올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것도 믿어진답니다. 누가 하셨습니까? 성령이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오셔서 마음속에 진리를 깨달아 알게 하시는 그러한 중생의 역사를 주실 때 우리는 성경을 향해서 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한참 전개가 되는데 머리를 박박 깎은 것을 보니까 키가 조그만 것을 보니까 중학교 1학년 학생이나 될까 말까 합니다. 그런데 그냥 은혜를 받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그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초점하나 안 흐트리고 한 한시간 가까이 말씀을 전하는데 그것을 아멘! 아멘! 하고 받아 이는 것입니다.
저 뒤에서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시골 동네인데도 불구하고 꽤 인탤리인 모양입니다. 맨 뒤에 앉아서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합니다. 그 많이 배운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국민하교 못나온 아이는 아멘 아멘 하고 다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이 아이가 어리석어서 그것이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도리를 말하는데 성령이 오셔서 그 마음에 거듭남을 주셔서 깨달아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공부하고 배웠다고 하더라도 성령이 오셔서 거듭나게 해 주셔서 이 지성을 깨우쳐 주실 때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진리를 보고 성경을 보고 은혜를 받고 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거듭나게 하실 때에 이때 사람들 속에는 새로운 정서가 생겨납니다. 전에 왜곡되었던 사랑이 변해서 참다운 사랑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이전에 예수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 믿어도 똑바로 안 믿으면 그런 일이 생깁니다. 가슴속에 한이 맺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서리서리 한이 맺혀있습니다. 어디론가는 그것이 뻗쳐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옛날에 많이 죽는 병 가운데 하나가 화병입니다. 화가 났는데 왜 죽어요? 화가 나니까 죽는 것입니다. 울화가 쌓여서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왜곡된 것입니다.
( ? ) 할 수 없는 사람. 다시는 안 보았으면 좋은 사람, 심지어는 죽어 버렸으면 좋은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마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전혀 그런 것들 사랑하지 않았는데 전혀 사랑하지 않던 것들을 ( ? )사랑하게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다 죽어 가다가도 누가 죽었다 소리만 들으면은 열심히 쫓아갑니다. 왜 거기 그렇게 열심히 갑니까? 장사 집에 가서 화투 치려는 겁니다. 막 가는 것입니다. 직장 다닐 때도 보면은 누가 죽었다 그러면은 별 상관도 없는 사람, 별로 안 와도 충분할 것 같은 사람들까지 와 가지고 상 차려 놓고 그 사람은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냥 화투까지 주머니에 넣고 와서는 한밑천 긁어 가려고 사람들이 그런 왜곡된 정서가 예수를 믿고 나니까 그런 것들이 싫어지는 것입니다.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 믿고 나면은, 그렇게 세속적이고 타락한 생활 좋아하던 사람이 그런 것들을 다 싫어하는 것입니다.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들을 거듭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세상 살면서 한탄하고 원망하면서 살던 사람들이 거듭나고 성령의 은혜를 받으니까 이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구원받지 못한 세상을 위해서 울고,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 울면서 기도할 수 있는 변화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전에 내가 도저히 할 수 없었던 것들을 내 안에 성령이 오셔서 나를 거듭나게 하실 때 내가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성령이 나로 하여금 할 수 있게끔 힘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 못하던 것들을 하는 것입니다. 전에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행하고 전에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오늘 행하게 하고 전에 할 수밖에 없었던 일들을 오늘 버릴 수 있는 이런 힘과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중요한 것은 오늘 여러분들이 모태신앙이 되었는지, 몇 년 동안 교회를 다녔는지, 성경을 매일 읽는지, 안 읽는지 그런 것들이 본질적인 질문이 아니라 그 보다도 더 급한 질문은 성경이 오늘 묻고 있는 바는 여러분들이 거듭났습니까? 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나지 않으면은 마치 죽어 있는 씨에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햇빛을 주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거듭나는 어떤 때는 파도와 같이 성령이 밀려와서 우리의 마음에 충격을 줍니다. 말씀을 듣는 순간에 아니! 그러고 큰 충격을 받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회개함으로 거듭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슬비와 같이 고요합니다. 그래서 서서히 안개비가 내릴 때에는 그것이 비인가 이슬인가 할 정도입니다. 그러다가 몇 시간 뒤에 나가 보면은 나뭇잎에서 물이 굴러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지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느낄 수 없게 오셔서 우리에게 거듭나게 해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럼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느냐? 중요한 것은 그 거듭나는 것을 내가 느끼느냐, 못 느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보면은 알아요. 오늘 보면은. 무엇을 압니까? 땅에다 나무를 깊이 심어 놓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4월 5일 식목일이 되면 사람들이 새까맣게 산에 가서 요만한 묘목들을 잔뜩 심습니다. 심고 물을 주고 내려올 때 어느 나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일 주일만 지나가고 나면은 그 중에 듬성듬성, 다른 것들은 새파란데 빨갛게 변하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볼 필요도 없이 죽은 것입니다. 뿌리를 검사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잎이 없고 열매를 맺지 않고 꽃이 시들어 가는 것을 보아서 그 나무에 생명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거듭난 증거를 우리의 삶 속에서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의 삶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진리를 사모하고 그리고 육신의 인간으로써 알 수 없는 영의 일을 이해하고 그리고 그 말씀들을 사모하고 그리고 왜곡된 사랑으로 넘쳐서 잘못된 인생을 살던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깨닫고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고 보이는 인생보다 보이지 않는 인생 넘어 더 큰 세상을 사모하고 그런 세상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이런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었으나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오셔서 내게 은혜를 주시고 내게 힘을 주시므로 내가 전에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합니다. 내가 끊어 버릴 수 없던 일들을 끊어 버립니다. 내가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하고 내가하지 않아서는 않될 모든 일들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이런 마음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에 육신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 말씀이 도저히 가까이 다가가고 실행할 수 없는 어려운 일처럼 느껴지지만은 은혜를 받고 성령이 함께 하실 때에 우리는 이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지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이런 마음들이 이 속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성령만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셔야 되는데 이일을 위해서는 주님, 나를 거듭나게 해주시옵소서. 무엇이든지 말씀하시옵소서. 내가 믿겠사옵나이다. 하며 성령이 내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도록 기다려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믿음은 자꾸 식어집니다. 우리의 믿음이 식어지고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 해 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또 옛날처럼 눈이 어두워져서 잘 보지 못하고 또 왜곡된 옛날 사랑이 더 좋은 것 같아서 거기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 전에 성령이 충만할 때 능히 할 수 있었던 많은 일들을 믿음이 식어지고 신앙이 떨어지면 또 못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난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죄인을 거듭나게 하신 그 성령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가 이미 거듭났지만, 우리의 죄를 책망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리하여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어두운 눈을 밝혀서 참된 진리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주시고 그 깨닫는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 가운데 느껴지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속에 왜곡된 사랑을 변화 시켜서 진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이런 신앙이 우리 속에 살아 역사 하도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을 능히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역사하고 일하심으로 그리스도인 다운 삶, 성경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그 사람은 성령의 요람에서 태어나고 또 성령을 의지하고 살며 마지막에 성령에 이끌려 죽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을 필요로 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4. 우리의 영원한 만족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저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르켜 말씀하신 것이라.(요한복음 7장 37절)
지난 시간에는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우리 한번 따라합시다. 우리의 영원한 만족,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나리라.” 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날은 유월절 끝날 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유월절 끝 날은 가장 끝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외쳐서 '목마르거든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 이렇게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명절은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가나안을 향해 가기 위하여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인방에 바르고 허리를 동이고 지팡이를 붙들고 쓴 나물과 양고기를 급히 먹던 그 마지막 재앙을 기념하는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10번째 재앙이 애굽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들을 치는 재앙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모든 처음 난 새끼들이 죽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안은 보호하셨습니다.
그들이 보호받기 위해서는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을 그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피를 보고 넘어갔다고 그래서 유월이라고 그럽니다. 그것을 기념하는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셔라. 생수의 강이 넘쳐나리라. 이런 고백을, 초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의심할 여지없이 요한 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의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로에 곤하셨습니다. 수가라고 하는 성에 가서 잠깐 우물가 곁에 앉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했더니 사마리아 여인이 아니꼽다는 듯이 당신이 유대인인데 어떻게 나 같은 사람한테 물을 달라고 합니까?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겠지마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시는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가지도 하나 갖고 계시지 아니하시고 물통도 갖고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너희에게 줄 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물이 오늘 여기에서 내게로 와서 마시라 말씀하시는 이 물과 같은 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명백하게 말합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성령을 가르켜 말씀하신 것이라. 물이 바로 오늘 성령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으로 표현되고 있는 이 물을 마시라고 하는 성령을 받으라는 이 초청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명절의 끝 날에 모든 사람들 유대인들에게 초청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과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사건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건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성령이 오셔서 그에게 오늘 말씀 드리는 거듭나게 하고 영원한 만족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이전에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로 오늘 유월절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예표하고 있었던 구약의 유월절 사건 그것을 기념하는 이 절기 마지막 끝나는 그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성령을 받으라는 초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믿는 자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그를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 세상에 목마르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나오너라. 이 이야기는 바로 사람들이 목마르지 않은데 어쩌다가 목마르게되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그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참된 만족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샘물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로 하루 먹을 물을 긷기 위해서 동이를 메고 물을 길러 왔던 것처럼 오늘 날 있는 물도 각기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이 세상의 샘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러한 세상의 물들이 너희들을 진정으로 만족 시켜 줄 수 없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물, 그리고 야곱의 우물에서 나오는 그 물은 마시는 자마다 잠시는 목마름을 잊으려니와 다시 시간이 지나면은 목마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재물의 샘물을 수 없이 퍼마셔도 잠시 마실 때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시원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가난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부자가 되어서 돈을 한없이 벌어들이는 장면들을 여러분은 흔하지 않지만, 가끔 주위에서, 혹은 텔레비젼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재물의 샘물을 마시는 모든 사람들마다 스스로 이 세상에서 돈 때문에 자기가 행복해 졌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잠시 마실 때에는 세상의 즐거운 것들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예화) 어느 날 주유소에 기름을 넣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주유소가 그 때는 11시까지만 영업을 하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12시가 다 되었는데 계속 기름을 팔고 있었 습니다. 그래서 다 닫았는데 이 집은 기름을 파니 다행이다 하면서 내가 물어 보 았습니다. 기름을 넣는데 마침 그 사람이 주인이었습니다. 아저씨. 이렇게 일하고 아저씨 몇 시에 문 엽니까? 5시에 연답니다. 12시에 일하고 어떻게 5시에 일어나 서 문열고 또 장사를 합니까? 손님. 말도 마십시오. 요새 기름이 얼마나 잘 팔리 는지 한 시간에 백 만원 이상 오릅니다. 그러는 겁니다. 돈이 막 벌리니까 힘 든 줄을 모르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잠시 그렇게 재물의 샘물을 마시면 우리는 잠시 피로도 잊고, 고통도 잊어버립니다. 그렇지요? 세상의 명예나 권세의 샘물은 또 어떻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돈 많은 사람들이 없으니까 이 이야기가 실감이 잘 안 날것입니다. 그러나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요. 직장 생활을 하면서 맨 날 이놈의 직장 그만 두어야지. 그만 두어야지! 맨날 노래를 부르면서 정년 퇴직 할 때까지 다니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 아닙니까?
그렇게 이놈의 직장 그만 두어야 되겠다고 맨날 사표를 써 가지고 다니던 사람이 어느 날 만면의 희색이 돌고 그리고 직장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 그럽니까? 그랬더니 얼마 전에 승진을 했답니다. 그래서 이 전에는 동료처럼 지내던 사람이 이제는 깍듯이 경례를 하고 서류를 갖고서 펼쳐놓고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결재를 기다리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잠시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아픔과 고민과 슬픔을 잠시 잊어버리고 명예의 샘물 혹은 권세의 샘물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또 향락의 샘물은 어떠합니까? 향락의 샘물을 마시면은 우리는 잠시 세상의 모든 근심과 염려로부터 벗어납니다. 점점 마약의 사용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약을 먹어 보지도 않고 맞아 보지도 않았으니까 그 효과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튼 사람들 하는 이야기는 그 것을 다섯 번만 맞으면은 그 다음에는 중독이 되어서 뗄 수가 없다고 합니다.
담배가 깊이 인이 박힌 사람들이 담배를 끊으면은 살인도 한다고 하지요? 마약 중독은 거기에 200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끊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늘 이렇게 비싼 돈을 주고도 아편을 맞고, 그것을 맞고 누워있는 시간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행복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향락의 샘물도 우리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고통을 잊게 만들어 주고 잠시 목마른 것들을 가시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다시 깨고 나면 이번에는 더 깊은 목마름으로 인간이 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마약을 맞는 횟수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이것이 바로 이세상의 향락의 샘물을 마시고 그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가장 고상하다고 하는 인간들과의 사랑의 샘물도 우리를 영원히 만족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만족이 없는 세상의 샘물과는 다른 딱 하나의 샘물이 있는데 그것만이 우리를 영원히 만족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다른 세상의 샘은 고갈되는 것이 있습니다. 재물이 주는 샘물도 잠시는 맑은 물과( ? ) 같아서 우리의 목을 시원하게 하지만 세상의 권세와 향락의 샘물도 그렇고 인간의 샘물도 그렇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들이 고갈될 때가 있고, 그리고 먹어도 먹어도 우리의 마른 목이 축여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물을 아주 많이 먹는 편입니다. 그래서 이제 제가 물 마시기 좋은 계절이 왔습니다. 보통 1.8리터를 하루에 물만 한통이상 먹어야지 이 체력을 유지하는데 너무 목이 마를 때, 그 때에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목이 말라서 물을 먹어야 되는데 물은 없습니다. 그러면은 이제 쥬-스, 북한 말로 단물, 그것을 슈퍼에서 제일 차거운 것으로 하나 집습니다. 얼음같이 찹니다. 쭉- 마실 때는 아주 시원합니다. 시원하게 내려갑니다. 그런데 먹고 나면 그 다음에는 입 속에 단 맛이 돌면서 더 목마른 것입니다. 몇 통을 먹어도 갈증이 해소가 되지 않습니다.
그때 제일 좋은 것은 생수. 생수입니다. 이 생수를 시원한 냉장고에서 한 대접 따라서 쭉-마실 때 그때 목마름이 해갈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는 이 세상에서의 만족은 마치 여름날의 갈증으로 목이 타는 사람에게 내미는 차디찬 설탕물과 같은 것입니다. 먹을 때는 시원하지만은 먹고 나면 즉시 더 깊은 갈증을 느끼게 되는데 이런 것이 세상이 주는 만족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이런 것들로는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그러한 고갈들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목마르고 그 다음에 이 속에서 한없이 갈증이 일어나는 이러한 영혼의 목마름은 이런 것들로 잠시 잊을 수는 있지마는 완전한 해갈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유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 이러한 것들로 만족하며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거듭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영원에 대한 갈망을 주시고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주셔서 그 하나님이 아니면은 완전한 인생의 만족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너희들의 뱃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그러한 샘물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 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샘입니다. 너도 먹고 나도 마시고 너도 퍼가고 나도 퍼가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 퍼가고 마시고 즐겨해도 고갈되진 않는 마르지 않는 샘이 바로 이 성령의 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샘이 바로 이런 샘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만족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을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충만하고 완전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는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고 완전한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가끔 상가 집에 가는데 안 믿는 사람들은 초상이라고 말합니다마는, 인생을 살면서 수를 다했기 때문에 연로 하셔서 그것도 오랜 병으로가 아니라 평안하게 주위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주고 돌아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가르켜서 우리는 호상이라고 그럽니다. 사람이 죽는 일이 뭐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마는 그러나 어쨌든 우리들은 그것을 호상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자식이 부모 앞에서 죽는 것들은 악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런 호상에 갔을 때야 우리는 할 말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의사가 이야기를 합니다. 요즈음 들은 음식도 하도 좋고 약이 하도 좋아서 골골 거려도 제때 제때 치료만 하면은 120살까지 살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환경이 120살까지 살 수 있는 환경이 안되는데 약으로 120세까지 살려니까 인간이 사는 것이 말년에 얼마나 고통스럽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의사가 하는 말이 병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무슨 소리입니까? 그랬더니 죽을 이유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아닙니까? . 그래서 사람들이 편안하게 죽도록 데려 가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새로운 해석이긴 합니다마는, 가끔 우리는 아주 끔찍하고 비참하게 죽은 그런 자리에 가게 됩니다.
지난번에 대구에서 폭발 사건이 있을 때도 아이 쌍둥이 둘을 낳아서 학교를 보내는데 둘 다 죽었습니다. 12대 종손인데 그 아이가 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그러고서 나갔다가 죽어서 시체로 돌아 왔습니다. 그 부모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완전히 실신한 사람들처럼 완전히 뒤로 나자빠지면서 자세를 모두 흩으러 버리고 통곡하는 그러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누가 그들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한번 나이트 클럽에 가서 춤을 추자고 그러면은 그 사람들이 우리를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그 사람들을 데리고 영화관이나 세상의 즐거운 놀이가 있는 곳에 가서 그러한 놀이와 유희를 즐기면 그 고통을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고통이 웬만할 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 극도의 심한 고통 속에서 좌절하고 오열하며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무엇으로 위로하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의 극단적인 고통가운데 인생의 벼랑에서 몸부림치면서 오열하는 이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단 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위로입니다.
뭐라고 밝힐 수는 없지마는, 제가 살아오면서 언젠가 큰 슬픈 일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너무너무 슬프고 고통스러워서 아침에 눈뜨기가 싫을 정도로 그렇게 고통스러운 일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꿈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커다란 파이프 같이 생긴 것을 내려보내셨는데 그 파이프에서 조금 있으니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파이프에서 기름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그런 꿈이 있고 나서 잠시 밖에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내가 내 마음속에 있었던 근심과 고통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고 딱 집어서 왜 어저께 하던 아픔과 어저께 겪던 고통이 사라졌는지는 말 할 수 없는데 한 순간에 그러한 것들을 가져가시면서 마음속에 놀라운 평강과 그리고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위로입니다.
하나님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만이 이렇게 고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되고 완전한 위로와 만족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하는 이웃을 위한 최대의 위로는 우리의 위로가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위로해 주지만은 그러나 참되고 완전한 위로와 만족은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우리들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사람들이 사람을 향하여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그리고 감싸고 용납하고 참아주는 일을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사람들을 넓은 가슴으로 끌어안고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고 그리고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도와주는 일을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고 내 속에 죄인을 용서하시고 그리고 이 죄인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내 마음속에 느끼고 그리고 내 속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경험되는 완전한 만족이 있을 때 우리들은 사람들을 관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고 감싸 안을 수 있는 이런 용기와 은혜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모든 관용과 이런 모든 은혜 베푸는 것 들은 모두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으로써 충만한 만족을 누릴 때 그때에 사랑도 생겨나는 것이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도 생겨나는 것이고 그를 위해서 우리 자신을 헌신하고 희생하고 싶은 마음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나 하나가 이 모든 만족이 없이 갈증 속에서 한 모금 마시면 다시 목마른 이런 물들로 살아 갈 때에 우리가 어떻게 목마른 자들에게 완전한 만족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완전한 희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의 관용은 자기의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러나 인격 그 깊은 곳에는 자기를 만족케 하시는 성령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진정으로 그 만족에서 우러나오는 관용으로 죄인을 용납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끝없이 말하지만은, 그러나 좋은 걸 어떻게 합니까? 그렇지요? 세상을 좋아하지 말라고 말하는데 좋은 걸 어떻게 합니까? 남녀가 서로 사랑에 빠지면은 좋은 걸 어떻게 합니까? 집안에서의 반대를 무릅쓰고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끊으면서까지, 집을 나가면서 까지 사랑을 실현하고야 맙니다. 좋은 걸 어떻게 합니까? 그렇지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또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끊임없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도 좋은 걸 어떻게 합니까? 이 모든 일에 피할 수 있는 길은 세상의 좋은 것들이 좋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더 좋은 것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있을 때 그 때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게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목이 타는 것 같이 목말라서 집에 들어와서 냉장고를 열어보니까 물이 없습니다. 매일 한 두통씩 있던 쥬스도 없습니다. 그리고 보리차 끓여 놓은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저는 수돗물 틀어서 컵에 담아서 먹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목마른 것보다는 낫지, 발암 물질이 있네 없네 해도 한 컵이야 암에 걸리는 것은 아니니까 우선 먹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맑은 물이 우리 교회처럼 정수기에서 나온 물이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을 때 누가 수돗물을 틀어서 깨끗지도 않다는 소문 좋지 않은 그 물을 먹느라고 수도꼭지에다 입을 대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그 물 밖에 없을 때는 그 물이라도 먹어야지만 사니까 인간의 그 허무를 메울 길이 없으니까 그 물이라도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혜를 한번 체험하고 그 성령의 샘물이 주는 완전한 만족을 체험해 본 사람은 더 이상 다른 물을 먹으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아, 맞다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나는 그물이 무슨 물인지 모르겠다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곧 그런 샘물을 충족히 마셔서 예수 믿는 참 맛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주는 그 샘물을 기꺼이 버리고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참된 샘물만이 우리에게 완전하고도 충분한 만족을 준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그 예수그리스도가 주시는 성령의 샘물로 말미암아서만 완전한 만족을 누리기를 사모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만이 우리를 ( ? ) 누리기를 사모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 만이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합니다. 그리고 그 물이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극히 목마르면 이 대뇌의 작용이 제대로 돌아가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인간이 육체적으로 그 물을 마시지 못하면 정신 작용이 혼미해지는 것처럼 우리 안에 성령의 샘물이 충만하게 있어서 우리 배속에서 솟아 나올 때 그 때에 우리는 비로소 정상적인 사고, 성령 안에서의 사고를 가지고 믿음 안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목마르면 헛소리를 하듯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 은혜를 힘입어서 살지 못하면, 우리는 마땅히 해야할 말 대신 못할 말들을 하고, 해야할 생각 대신 해서는 안될 생각들을 쉽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이러한 샘물만이 모든 인간들에게 영원하고 완전한 만족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영원한 만족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받기를 원하고 또 마시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초청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리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와서 믿고 마시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 오는 것 이외에는 이 세상에서는 이런 성령의 샘물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애쓰고 노력하고 힘쓰고 몸부림쳐도 어디까지나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물은 잠시 목마름을 잊어버리고 다시 더 목마르게 되는 그러한 샘물 밖에는 세상에는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그리스도만이 나로 하여금 참된 만족을 얻게 하시고 그리고 내 안에 영원히 목마르기 않는 영원한 생수를 내 영혼 속에 부어 달라고 매달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렇게될 때에 그 배에서 이 물이 샘물과 같이 생수와 같이 솟아나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 물이 솟아납니다.
내 안에 충만하게 차고 넘쳐서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고 다른 사람에게 넘쳐서 교회에 가득 차고 교회에 가득찬 물이 동네로 흘러들어 가고 동네와 교회에 가득찬 물이 세상에 흘러들어 가서 모든 사람들이 마르지 아니하고 갈함이 없는 이 물을 먹고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모습입니다. 이 같은 구원의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5. 영원한 생수의 근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7:38)
지난 시간에는 우리의 영원한 만족이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그 성령이 함께 해 우리에게 축복하시는 것 말고는 완전한 만족이 없다는 말씀을 지난 시간에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러면 왜 이렇게 우리의 참되고 영원한 만족이 성령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오실 때 그때에 우리가 비로소 참되고 완전한 만족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써 확증을 가지고 충만한 삶을 살게 되는데, 왜 이런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가? 이 문제를 오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저희가 어렸을 적에는 이런 상수도 시설이 잘 안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어렸을 적에 동네에는 리어카에다가 커다란 통에 물을 가득 담아서 그것을 끌고 다니면서 물을 파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수돗물입니다. 그 수돗물을 한 통 사오면 그물이 아까워서 무엇에 쓸지 몰라하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펌프를 박아서 손으로 퍼서 하는데 돈이 좀 있는 집은 밀 펌프를 했습니다. 그래서 당길 때에 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누를 때에 물이 쏟아져 나오니까 계속 물을 푸기만 하면 짧게 쭉쭉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주-욱하고 계속 물이 나오는 그것이 좀 비싼 펌프이고 그 다음에 싼 펌프는 그냥 물을 당길 때만 나오는 빨 펌프였습니다.
그런데 무대가 어디인지는 제가 기억이 안 나는데 어린 나이에 보았는데 그 펌프를 하고 이사갈 때 그 펌프를 빼가지고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다가 그 집이 아마 헐렸는지 어쨌는지 펌프 대가리만 뽑아서 가지고 가고 그 펌프를 놓아두었습니다. 아이들이 거기에다가 헝겊 쪼가리도 집어넣고 아이스케끼 먹다가 빨대도 갖다가 집어넣었습니다. 결국은 위에 모래가 다 덮히고 물이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그 터를 새로 사가지고 온 주인이 가만히 보니까 펌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업자를 불러다가 펌프를 다시 박지 말고 이것으로 어떻게 다시 물을 하니까 그 사람이 그것을 쑤시는 기계를 가져 왔습니다. 위에서 돌려서 그 찌꺼기들을 빼낸 다음에 거기에다가 펌프를 다시 박고 물을 집어넣고 푸기 시작을 하니까 처음에는 새까만 시뻘건 흙탕물이 다시 옛날처럼 쏟아져 나오더니 잠시 한 30분내지 40분 푸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아주 맑고 깨끗한 물이 나오는데 여름에 지하수 펌프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은 수돗물하고는 비교가 안됩니다. 왜냐하면 아주 깊으니까 30자 아니면 50자 그렇게 박으니까 그러니까 10미터 이하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니까 시원합니다. 겨울에는 또 미지근합니다. 그래서 아주 좋습니다. 싱싱하게 물이 막 쏟아져 나옵니다. 요즈음 같아서는 안 먹었을지 모르지만 그때는 다 그거 먹고살았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생명의 근원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생기 있고 충만하게 만들어 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근원이 마르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부요하신 분이고 완전히 충만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의 근원이 마르는 법은 없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누구에게 있는가 하면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어제 밤에도 책을 잠깐 읽다가 보니까 어떤 고장에서 전도를 하는데 전도지를 복잡하게 많이 쓰지를 않고 그냥 간단하게 빨간 색으로 전도지를 만들었는데 그 전도지에 무엇이 쓰여있는가 하면 큰 글씨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십시오.' 그 전도지를 수십만 장을 인쇄해 가지고 그 도시 전체를 돌렸습니다.
우리는 지금 부흥회 하면은 3일 4일 합니다마는 옛날에는 미국 같은데서는 부흥회 하면은 6개월, 1년 6개월 이렇게 합니다. 그러면 1년6개월 동안 어떻게 하느냐 하면 매일 모이는겁니다. 그리고 주일을 제외하고는 온 교회가 문을 닫고 한 곳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연합이 잘되면은 그 도시에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단점은 모든 신앙 생활에 있어서 단 기간에 모든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하는 이런 조급함들이 우리의 신앙 생활을 어렵게 합니다. 끈기있게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트여지고 날 때 그때에 하나님의 참된 성령의 은혜가 우리에게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아니하면 이런 영적인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영적인 축복을 받지를 못하니까 사람들이 점점 무지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점점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자기의 상식과 그 다음에 자기의 결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결심대로 살아가니까 죄가 자꾸 싸이고 허물이 자꾸 사이면서 그 관계가 점점 더 막히는 것입니다. 점점 더 막히니까 더 뜻을 분별할 수 없고 더 분별할 수 없으니까 더 막히고 하면서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계속됩니까? 마지막으로 내 힘으로 내 인생을 지탱해 나갈 수 없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내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회개할 때가지 이 악순환은 계속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모든 사람들이 사모합니다. 그렇지만은 그 모든 것들을 실제로 소유하는 사람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얻지 못하니까 나중에는 그런 것들이 가치가 있는 것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솝우화에 보면은 여우가 너무나 배가 고파서 지나가는데 포도가 먹음직스럽게 익었습니다. 그래서 그 포도를 따먹으려고 아무리 앞발을 높이 들고 매달려고 바로 위에서 포도가 대롱대롱 달려있고 닿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몇 번을 깡총거리고 뛰어도 닿지가 않습니다. 그러자 여우가 뭐라고 그러면서 돌아갔습니까? 잘 익은 포도를 보고 기껏 한다는 이야기가 그까짓 신포도 먹으면 무얼 하느냐 면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이러한 오류를 범하는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그리고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 안에 계셔서 그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있어서 그 사랑이 우리를 지배하는 그것을 누가 하신다고 했습니까? 성령이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성령이 그렇게 우리를 지배하셔서 우리를 충만케 해 주시는 것 이외에는 우리의 인생에 참된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살아가다 보면은 정신이 번쩍 날 정도로 기쁜 소식이 들려 올 때가 있습니다. 이런 소식이 여러분 인생가운데 자주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피로를 잊게 만들어 줍니다. 아주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그렇습니다. 누가 승진했다는 소식 병이 나았다는 소식 사업에 고통을 받고 있다가 그 길이 열렸다는 소식 또 나이 많이 들어서 과년한 처녀가 혼처가 생겼다는 소식 노총각이 면하게 되었다는 소식등 이런 소식들이 우리들에게 기쁜 마음을 안겨 줍니다.
이런 즐거움들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활력소가 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육신적인 생활에 있어서 활력소가 됩니다. 그렇지요? 또 우리 이 명옥 성도님처럼 아들을 기다렸는데 아들이 태어났다든지 그럴 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인생에 있어서 기쁠 것입니다. 아빠가 지금 여기에 오셨는데 ‘기쁘시지요?’ ‘예.‘ 기쁘시다고 확증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기쁩니까?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모든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의 모든 삶을 그 놀라운 사랑으로 감싸실 때 그때 우리가 느끼게되는 그 기쁨과 즐거움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이 주는 기쁨과 세상의 환경이 주는 만족은 잠시 마시면 다시 목 마르는 설탕 탄 차가운 음료수와 같습니다. 그렇치만 하나님 자신은 마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물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수의 근원에 우리의 신앙의 뿌리를 박고 그 근원으로부터 따라 올려지는 그 생명의 물을 먹고살아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똑같이 악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가 한 뺨을 때리면 다른 뺨을 돌려 대고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주는 이러한 사랑을 기꺼이 실천할 수 있는 이러한 힘이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남이 모르는 생수의 근원에 우리의 신앙의 뿌리를 대고 있기 때문에 여기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그 놀라운 기쁨,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참된 만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불만족스러운 삶을 견딜 수 있습니다. 속에서 솟아 나오는 생수와 같은 놀라운 기쁨이 있기 때문에 갈증에 목마른 고통을 이기며 남들이 모두 슬퍼할 때 우리는 노래하며 이 길을 걸어가면서 살아 갈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만족은 바로 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신은 언제나 이런 생수의 근원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모든 사람들이 이 생수의 근원에 뿌리를 대고 이 속에서 생수의 물을 먹고 이 속에서 은혜를 받고 이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힘입어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하나님은 간절히 원하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이런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리고 부활로서 승리하신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가져다주는 가장 커다란 것이 무엇인가 하면은 이러한 성령을 한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 주실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관계를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늘 우리들이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이 처음에 이런 파이프를 말입니다. 버렸을 때 가만히 보면 너무 신비합니다. 우리 나라는 참 복 받은 나라다 하는 생각을 나중에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생수를 박는 사람들이 요즈음엔 탐구를 한다고 그러는데 그 때는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어떤 사람들이 와서 버드나무 껍데기를 벗겨 가지고 이렇게 갖고 다닙니다. 나는 그것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지금도 모르겠는데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서 이렇게 지나가면 물이 흐르고 있으면 껍질 벗겨진 버드나무 가지가 이렇게 휜답니다. 그런데 손으로 장난을 하는 것인지 휘는 건지 지금도 모르겠는데 하여튼 그 사람들은 이것보세요. 이것보세요. 이렇게 휩니다. 하면서 원시적인 방법으로 아무데다가나 갖다 놓고 그냥 쿵쿵 손으로 쇳덩어리를 들었다 놓았다하면서 박으면은 들어가기도 어쩌면 그렇게 잘들어 가는지 쑥쑥 잘 들어갑니다. 한번 내리칠 때마다 20cm씩 30cm씩 들어갑니다.
쑥쑥 들어가면은 들어가 놓고 나면은 그 다음에는 시뻘건 물이 쏟아지지만 한 한시간 퍼 올리고 나면은 그 다음엔 그냥 하얀 물이 한없이 쏟다 집니다. 얼마큼 쏟아집니까? 그 집이 거기에 펌프를 박고 몇 년 살다가 애를 낳고 그 애가 고등학교를 갔는데도 계속 나옵니다. 대학을 갔는데도 이 물이 계속 나옵니다. 펌프가 다 삭아서 망가질지언정 그 속에 있는 생수의 근원은 마르지 않습니다. 계속 쏟아져 나옵니다. 가물어서 밭에 모든 작물이 말라죽어 갈 때도 그 생수는 한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런 것들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런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뿌리를 생수를 파이프로 박고 퍼올리는데 그것을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헝겊이나 이런 것들로 막아버립니다. 그 밑에까지는 물이 꽉 차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도 그런 것입니다.
때로는 펌프가 낡으면 쫙- 하고 물이 빠져 들어갑니다. 그래서 물을 다시 붓고 푸면 물이 다시 쏟아져 나옵니다. 마찬가지고 우리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막힌 것들을 여는 일이 있어야지만 기도도 의미가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 주십사 하고 매달리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 훌륭한 생수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나오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지를 우리는 대부분 알고있습니다. 하나님도 알고 계시고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특별한 경우에는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히 물을 푸면은 안올라오는데 자신은 무엇이 막혔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무엇이 막혔는지 모를 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때에 가장 좋은 비결은 더 열심히 푸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진심으,로 그 막힌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은 깨닫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합니다. 깨닫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그러면은 하나님이 여러분 자신에게 생각나게 하거나 아니면은 생각나게 하지 않으면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설교를 통해서든 성경 말씀을 통해서든 무엇을 통해서든 우리에게 깨닫게 하십니다.
왜 그런가하면 그것을 깨닫게 하셔야지만 비로소 하나님이 그 물을 솟아오르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백의 요소입니다. 그러니까 일단 자기가 깊이 이런 하나님이 언제나 이런 생수 속에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셨는데 내가 이것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이다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정확하게 그것을 하나님 앞에 죄이고 하나님 과의 관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라고 하는 확신을 갖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것이 만약에 좋지 않은 거라고 생각해 주신다면은 제가 봐 드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확신을 갖어야 됩니다. 무슨 확신입니까? 죄라고 하는 확신.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확신. 이것을 갖어야 합니다.
그 중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것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그런 죄가 깃드는 곳이 다분히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어떤 심리가 있느냐 하면은 이것이 죄다라고 하는 생각이 거의 뚜렷하게 윤곽이 잡혔는데도 그것을 확신을 갖기 싫은 것입니다. 확신을 갖지 않으면은 그것을 피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확신을 갖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회개에 대한 확신이 없고 그 다음에 회개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응답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용서의 확신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막힌 것 같은 상태가 개선 될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품어 오르는 헝겊을 보면서 찌꺼기를 보면서 그것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아무리 위에서 물을 퍼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러니까 우선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주고 있는 사건을 죄라고 하는 깊은 확신을 달라고 기도를 해야됩니다. 죄하고 하는 확신을, 잘못 되었다고 하는 확신을 갖도록. 그리고 확신을 갖게되면 그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합니다. 자백해야됩니다. 그것이 만약에 자기 개인 혼자서 지은 죄라면 자신에게 속한 문제니까 하나님 앞에 갖고 가서 하나님 앞에만 용서를 구하면 됩니다.
그러나 누구에게 관계된 문제일 때, 그때는 혼자서 하나님 앞에 자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됩니까? 그러면 그 사람에게 보상을 해주거나 고백을 해야됩니다. 즉 무슨 뜻입니까? 내가 만약에 저 사람 모르게 저 사람에게 큰 손해를 입혔는데 이건 순전히 둘 만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면 저 사람에게 찾아가서 저 사람에게 입힌 손해와 불명예를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보상하고 그리고 잘못됐다는 고백을 해서 용서를 구해야 됩니다. 그 사람이 용서를 하고 안하고는 본인에 속한 문제지만 용서를 구해야됩니다.
좀더 깊은 관계에서 이런 것이 수 있지요. 만약에 그러한 잘못이 개인에게 가 아니라 교회 앞에 지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목회자 앞에 고백을 하거나 모든 교인들 앞에 고백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용서를 받아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완전한 하나님과의 막힌 것이 열리게 됩니다.
옛날에 어느 교회에 청년 하나가 있었는데 그 청년이 점점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해서 그 교회에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맡아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니까 막 살아가다가 사업을 하고 그러다가 너무 어려우니까 교회 돈에다가 손을 대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교회 돈 일부를 유용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장부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교회가 꽤 큰 교회였었나 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흥회가 있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이 잘못한 것을 하나님 앞에 한없이 회개하고 눈물로 기도를 했는데 마음속에 자유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가서 더 기도를 하리라 하고서 나가다가 성령님이 문 앞에서 꽉 붙드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돌아서면서 모든 교인들이 아직 어떤 사람은 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가는데 큰 소리로 진짜 성령에 붙잡혀서 외쳤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했습니다. 교회가 그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벌어서 갚으라고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려 5년에 걸쳐서 꾸준히 돈을 벌어서 그 교회에 진 빚을 모두 청산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자백을 하고 나니까 하나님의 참된 자유와 기쁨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죄들이 계속 되풀이되고 되풀이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생수의 근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리지 못합니다. 무엇때문입니까? 죄를 공개적으로 짓고 은밀한 곳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고보서를 보십시오. 너희가 죄가 있으면 서로 고하라고 말합니다. 만약에 순수하게 우리 개인의 죄이고 하나님과의 관계 이외에는 관계된 것이 없다면은 하나님 앞에 깊이 자백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명백하게 손해를 입히거나 다른 사람을 깊이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있거나 혹은 험한 말로 그 사람의 명예를 실추 시켰거나 사랑의 원리를 지키지 못했을 때 먼저 너희들이 이 땅에서 맺혀 있는 것들을 풀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제사를 드리라고 마태복음 5장은 우리에게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삶들이 너무나 어렵고 실천하는 것 자체가 용이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가 진실로 이러한 마르지 아니하는 생수의 근원 곧 그리스도 자신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그런 충만한 은혜를 향한, 성령을 향한 갈망이 정말 진실한 갈망인지 아니면은 생각 속의 갈망인지를 이런 회개의 실천을 보면서 그 사람의 갈망의 진위가 가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에 진정한 사모함이 참된 사모함과 참된 갈망은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있는데 이 여자도 좋고 저 여자도 데리고 살고 싶고 저 여자하고도 결혼하고 싶고 이 여자하고도 신혼여행 가고 싶다고 그러면은 정신병자란 말입니다. 마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진정한 사모함은 우선 순위가 없습니다.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충만한 우리의 완전한 만족이 되시는 유일한 성령에 의한 만족과 더불어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그러한 갈망이 참되고 진실된 갈망이라면 그러면 그렇게 자기의 죄를 사람들에게 고백을 하고 용서를 비는 것 같은 일들이 조금도 그러한 완전한 만족을 누리기 위한 것으로서는 너무 값비싼 대가라고는 생각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은 거기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와 기쁨이 항상 즉시로 예비 되어 있습니다.
이 아브라함이 이전에 가뭄이 드니까 가나안에서 계속 내려갔습니다. 나중에는 애굽까지 내려갑니다. 이 오늘 나오는 그랄 이라고 하는 곳은 블레셋 땅이었습니다. 거기에 우거하고 샘을 판 적이 있습니다. 이 땅에는 샘이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심지어 어떤 때는 정말 펌프 박으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짜 수 십 미터를 파들어 가야지만 겨우 물이 나오는 그러한 곳이 바로 이곳이고 또 그렇게 물이 나와도 그 중에 대부분은 쓴 물이 나오기 때문에 음료수로 쓸 수가 없는 물입니다. 그러니까 이 우물을 놓고 사람들은 생명을 건 쟁탈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랬는데 아브라함이 거기에 살아 있을 때까지만 해도 우물을 굳게 지켰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살아있고,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을 때 우리는 이런 생수의 근원을 지키면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죽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블렛셋 사람들이 와서 이 우물을 메워 버렸습니다. 자기네도 쓰지 않고 다른 사람도 못 쓰게 메워 버린 것입니다.
이삭이 돌아와서 다시 그 우물을 소유라고 싶어했습니다. 그때 이삭은 다른 곳에서 우물을 파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다른 곳은 우물을 파 보아야 물이 나온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그 우물의 흔적을 찾아서 팠습니다. 거기에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우물을 막고 있는 잡동사니들과 쓸데없는 돌멩이들과 쓰레기들을 거둬 내면 그 밑에는 이 메마른 당에서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있는 샘이 그러한 샘이 그 안에 있다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잡동사니들을 제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속에서 샘물이 그대로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영원한 만족이신 성령도 바로 이와 동일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샘을 모든 사람들이 누리며 그 충만한 기쁨 안에서 살아 갈 때에 그가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을 살수 있습니다. 그가 그러한 생명의 놀라운 근원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가면서 보람을 느끼고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힘과 은혜를 매일 체험하고 하나님을 믿는 참되 은혜의 감격의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소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서는 이런 것들을 감당해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생명의 근원이신 생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속하실 때에 우리가( ? ) 우리의 힘으로 단지 용서를 받으므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만 용서를 받으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 예수님이 그렇게 기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참된 구원은 죄를 용서받는 것 그것뿐이 아닙니다.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죄를 용서받고 나서 그 다음에는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그 힘을 그 죄 용서함 안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죄를 용서함 받는 것, 그것으로 끝나고 한 번 죄 용서를 받으면 그것으로서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사도는 결코 우리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이렇게 말하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런 놀라운 생수를 준비하셨습니다. 그 생수는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생명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막는 최악의 장애물은 이세사의 높음이나 깊음이나 사망이나 다른 피조물이나 권세자들이나 이런 환경이 아닙니다. 심지어 지옥이라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이런 생명적인 관계를 끊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쉽게 귾어 놓을 수 있는 것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죄짓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생수의 근원을 가로막고 있을 때 여러분들의 기도생활과 말씀생활 속에서 뚜렷하게 그 막힌 증거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자백하고 이웃에게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도록 진실로 고백을 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주님께서는 다시 우리들에게 그 충만한 생수와 같은 은혜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자녀 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 생수의 강이 넘쳐흐를 때 여기에서 넘쳐 날 때 그때 우리의 삶이 이러한 하나님의 성령의 생수를 드러내 보여 주는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충만할 때 메마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이야기할 때 그 충만한 생수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도 영원한 만족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간절한 갈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에게 주시고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사명인 복음 전파의 사명도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참된 기쁨과 생명의 만족이 주어질 때 그때 우리가 기쁨으로 나아가 영원한 만족이 오직 그리스도예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깊이 회개하고 이러한 충만한 만족을 누리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6. 성령을 근심케 말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 30)
지난 시간에는 창세기를 예로 들면서 우리의 영원한 만족이 오직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충만히 있을 때 그때 우리가 비로소 완전한 만족을 누릴 수 있는데 왜 그런 완전한 만족을 우리가 온전히 누리면서 살지 못하는지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잠깐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우물을 파 놓았던 것을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그 샘구멍을 막아 버렸습니다. 그 막은 것을 다시 뚫으면 샘이 솟아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솟아나는 그런 참된 성령의 은혜를 우리의 죄와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악한 것들이 가로막는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아서 오늘 한번 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도는 오늘 이 에베소서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 사실을 보고 우리는 지난 주에 단순히 죄가 하나님께로부터 솟아나는 참된 신앙의 기쁨을 구멍을 틀어막아서 우리로 하여금 그런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한다는 그 사실을 좀 더 뛰어 넘어서 우리를 그렇게 만족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상적인 삶을 살아 갈 수 있게 만드는 참된 힘이 되신 그 성령이 인격이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원리나 영향력이나 단순한 힘이 아니라 성령은 인격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그 성령이 근심하시기도 하신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들 안에 계시는 성령은 신자의 인격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 안에 거하시는 그 성령님은 그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떤 인격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지만 그러나 그 성령이 우리 안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두 인격이 말하자면은 함께 관계를 가지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인격이 사이가 화목할 때가 있고 불화 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들은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게 된다고 할 때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관계는 어디를 통해서 나타나는가 하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보이지 않지만 또 성령과의 관계도 물론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가 하는 것에 따라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과 우리와의 관계가 좌우됩니다. 성령과 우리와의 관계가 죄우되면 그것에 따라서 그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삶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무너지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근심하십니다. 성령이 우리를 근심하시게 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살게 하는 그 모든 원동력들을 충분하게 공급을 받는 일이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이름은 가졌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과연 많은 것을 안다고 해서 그대로 살아 집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얼마 전에 그래도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교수가 아버지를 죽인 기사를 오래 전에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마음이 있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식이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하는 결정적인 힘이 됩니다. 내 마음속에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가르쳐만 주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갈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식이 있고 없음이 엄청나게 커다란 삶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고 알아도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신앙의 원동력이 없는 사람들은 단지 지식을 쌓아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지식이 없는 사람보다 더 뛰어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수없이 많이 책을 끼고 다니면서 공부를 한다고 교회를 다녀도 사람들의 삶이 변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 때문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셔서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참다운 힘과 그 은혜와 능력을 공급해 주시고 그는 또 그것을 받지 아니하면 그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러한 성령이 인격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기뻐하시기도 하고 슬퍼하시기도 하고 고통스러워하시기도 하고 좋아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다양하게끔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를 근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을 근심시킨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성령을 근심시키고 있다면 그러면 우리가 아무리 많이 기도하고 아무리 많이 애를 써도 그 성령으로 우리 자신이 충만해지는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자기가 기도를 해 놓고 그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강요에 의해서 당신이 성령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갖고 먼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시키게 하는 일들을 제해버리고 났을 때 그 대 그가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의미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성령을 근심시키는 삶을 계속 살면서 그러면서 뭐 철야를 하고 기도원에를 가고 금식기도를 하고 하나님께서 그런다고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성령이 어떤 때에 근심하는가?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 성령을 근심케 하면 성령이 소멸됩니다. 충만하게 성령이 오셔서 내 안에서 나로 하여금 기쁨과 사랑과 감격과 은혜 속에 신앙 생활하게 하시는데 내가 그런 충만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입고 살아가면서 내가 성령을 근심하게 해 드리면 그런 충만함이 내게서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갑자기 신앙 생활을 하던 기쁨과 능력과 힘이 마르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차가 좋아서 그런 차가 없습니다마는 옛날에 우리 어렸을 때는 가금 고물 차들을 보게됩니다. 차가 언덕으로 올라가려고 하면은 그냥 숨이 넘어 갈 듯이 껄껄걸걸 그랬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도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때는 웬만한 언덕 같은 것은 한번 붕하고 밟으면은 휙휙 넘어 갑니다.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어려운 일이 오고 시련이 와도 그저 충만할 때는 주여! 그러고 기도하면은 그 산을 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충만한 성령 속에 살지 못할 때는 조그만 어려움이 와도 넘어 가지를 못하고 그냥 숨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시켜 드릴 때 우리는 성령이 소멸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오늘 살아가는 나의 삶, 나의 생각에 대해서 어떤 느낌을 갖고 계신지에 대해서 깊이 귀를 기울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쳐서 성경은 근신하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근신하는 삶입니다.
내 안에 있는 성령이 만약에 내가 그 성령을 근심케 해드리면 성령이 소멸되고 그리고 성령이 우리를 위해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빼짝 메마른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성령이 충만하게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근심시켜 드리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 성령이 근심하시는가 하면 우선 죄가 들어올 때 성령은 근심하십니다. 그리고 그 죄는 순식간에 성령을 슬프시게 하고 슬프시게 하면 갑자기 우리의 신앙적인 삶, 영적인 삶 속에서 말하자면은 능력이 마르는 것을 경험합니다. 겉으로 볼 때는 똑같은 것 같지만그 능력이 마르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 올 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죄인이 교통하고자 하는 그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거룩한 생각과 삶 속에서 살아 갈 때 성령은 우리의 인격을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게 되면은 이런 하나님과의 교통에 결정적인 장애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근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소멸케 하는 데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성경은 죄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자녀답게 살게 하는 원동력이 그런 죄에 의해서 메마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격하게 말하면은 환경이나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의 신앙의 능력이 마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통과 교제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을 슬프게 했기 때문에 결국은 그 죄로 말미암아서 슬퍼하시는 성령이 우리 가운데서 자꾸 소멸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이 점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모든 죄가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제를 느끼는 데서 실패하도록 만들어 주는 요인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자들에게 상을 약속하셨기 때문에도 우리들이 죄를 짓지 말아야 하지만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죄에 대한 형벌은 제일 먼저 자신의 심령 속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범죄하게 되면 성령이 즉시 근심하십니다. 아주 민감합니다. 그리고 즉시 자기 속에 성령의 은혜가 마르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감격으로 충만하던 신앙 생활이 갑자기 싸늘하게 식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뜨겁게 감격적으로 반응하던 사람들이 그 말씀을 향해서 그렇게 반응할 수 없게끔 무감각한 시체같이 이런 마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겉모양이 계속해서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해도 옛날과 같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성령 충만에 미치는 것입니다. 그런 적극적인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충만함을 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적극적인 죄 뿐만 아니라 불순종도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은혜를 마르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불순종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 그 길을 가는 적극적인 불순종이 있고 또 하나는 모르고 걸어가는 불순종이 있습니다. 그런데 둘 다 성령을 근심케합니다.
불순종이 성령을 근심케하면 똑같이 그 불순종으로 말미암아서 성령을 근심케 할 때 우리의 성령이 오셔서 성령으로 행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어려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됩니까?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충만한 기도의 영 속에서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약에 불순종의 길을 계속 걸어가는데 그가 계속 충만하게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기이한 일입니다.
성령은 이 순종에 대해서 매우 예민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5장에서 말하기를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신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순종과 성령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정말 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대부분의 경우에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도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안 가고 있는지를 모를 적도 많다는 것입니다. 명백하게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는 그것은 자신의 양심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불순종의 길을 걸어 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영적인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충만하게 마음을 다 쏟아 부으면서 간절히 기도하던 그런 기도의 영들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메마르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지만 자신의 신앙 생활을 제대로 관리 해 나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그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은 훨씬 오래 전서부터 그의 마음속에는 벌써 잘못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잘못을 점검하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언제나 회복할 수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신앙 생활에서 적게 실패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우리의 영적인 삶이 고도로 민감해 지게 되면 우리가 성령이 충만해지고 고도로 민감해 지게 되면 우리는 순간순간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어떤 순간에 무슨 이유 때문에 우리를 슬퍼하신다는 사실을 즉시 즉시 감지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역설적으로 말해서 성령 충만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성령에 민감한 삶을 살아야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고 우리의 심령이 무감각해지게 되면은 그런 성령의 예민한 인도에 대해서 아주 둔감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곁에서 소리치며 외쳐도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서 성령이 근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으로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는지를 최선을 다해서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질문이 없이는 그가 부르짖는 기도도 금식하는 것도 철야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내 기뻐하는 종에게 성령을 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하나님이 누구에게 주시느냐 그럴 때 어떤 어떤 일을 하면 성령을 받는다는 공식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누구에게 주시는가?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기뻐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왜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지 않는가 그렇게 살펴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여튼 정확한 대답은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주시는가? 기도를 많이 하면 받을 수 있습니까? 기도를 많이 해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사람이 있고 못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받았다고 할지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누구에게 주시는가? 자기 마음입니다. 정확한 대답은 내가 내 기뻐하는 종, 하나님이 기뻐하는 종에게 주는 것입니다.
성령은 여러 곳에서 선물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지요? 여러분. 선물을 누구에게 줍니까? 여러분의 주위에서 어떤 사람에게 주어도 주어도 계속 주어도 더 주고 싶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코가 어떻게 생긴 사람을 여러분 좋아하십니까? 키가 얼마나 큰 사람들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주어도 주어도 계속 주고 싶은 사람이 됩니까? 나이가 몇 살 먹은 사람이 되면은 여러분들이 주어도 주어도 계속 주고 싶은 사람이 됩니까? 그런 공식은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정답이 무엇입니까? 내 기뻐하는 사람에게는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는 것 같고, 자꾸 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면은 그것을 행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존재 자체가 기쁘면 그가 행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적극적인 순종의 삶을 사는 것과 성령을 충만하게 받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깊은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떠나서는 사실은 성령의 충만함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결국은 그 성령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D. L. Moody가 설교를 하고 들어 왔는데 그때는 아주 유명하던 때는 아니었는데 자매 둘이 설교를 다 듣고 나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형제님 다음에는 더 충만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깨닫고 그가 6개월 동안 성령 충만을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깨닫고 기도 제목을 바꿨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을 만한 그런 삶과 마음으로 나를 변화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충만한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요약해서 말하자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이 불순종의 길로 가고 있거나 죄 가운데를 가고 있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어떻게 당신과 교통하게 하시는 거룩한 성령을 부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그렇게 하신다면은 티끌과 같은 자신의 죄악을 들여다보면서 그 아주 지극히 적은 죄를 가지고도 하나님 앞에 화로다 나로 망하게 되었도다 하면서 자신을 돌이켜 하나님 앞에 정결케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고 오늘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불순종 뿐 만 아니라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으시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면서 살아야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악 가운데만 안 빠지고 타락하지 않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되실 그러한 회복을 갈망하는 것이 바로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않는 다는 말의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바꿔놓고 이야기 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못 살게만 굴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 가지고 여러분 만족할 수 있습니까? 물론 그렇게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참견하지 않고 우리가 그냥 살아가게끔 내버려두시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당신을 화나게만 하지 않고 큰 죄를 짓고 타락하지만 않는 것으로는 우리를 만족하게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기쁨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시인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두시는 기쁨은 포도주 보다 그리고 들의 모든 곡식보다 더 귀하옵나이다. 하고 시인이 말했습니다.
그런 것이 있을 때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의식을 갖을 수 있고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단지 우리의 삶에 간섭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간섭하셔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시고 고통을 놀라운 기쁨으로 변화시키시고 그리고 어려움을 형통함으로 바꿔 놓으시고 모든 사람가운데 우리를 유별나게 사랑하시는 것들을 보여 주심으로서 우리가 비로소 참된 신앙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타락하지 않고 큰 죄를 짓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뻐하시게 하는 삶을 살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에 근심하시던 하나님이 열린 교회에 있는 여러분 각자를 보실 때 마음이 시원해지시는 이러한 사람이 될 때에 그 때에 그것이 곧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않는 다는 말의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이 그를 기뻐하시는 놀라운 증거를 보여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당신이 기뻐하는 종이 깊은 실망과 낙담 속에 있을 때 그 때에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는 증거를 어느 때 어떻게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통해서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인데 사랑하는 아내가 혹은 자녀들이 혹은 부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깊은 슬픔가운데 잠겨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셔서 좋은 승용차를 주시거나 집을 주시면은 그 슬픔이 사라질 수 있습니까? 돈을 뭉텅이로 갖다 주면 그 슬픔이 사라질 수 있습니까? 치유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성령을 주실 때 그 때 슬픔이 변해서 기쁨으로 바뀌고 그리고 앞길을 헤아릴 수 없었던 우리의 어두운 삶이 빛을 얻게 되어서 소망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이 인생을 살아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이일을 하십니까? 당신이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성령을 달라고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가 하는 것들을 오늘 여러분들이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삶의 번화가 일어나서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간절한 사모함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을 때에 그 때에 우리의 기도도 성령을 우리에게 오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참된 기쁨과 만족은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나는 솔찍히 말해서 고백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떤 때는 아, 이렇게 살아서 어떻하나 하는 깊은 근심과 그런 것들이 몰려 올 때가 있습니다. 교회를 향해서도 그렇고 학교 사역도 그렇고 어떤 때는 글을 쓸 때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코가 석자쯤 빠져서 완전히 힘을 잃어버리고 낙담할 때쯤 되면 하나님이 오셔서 한 번쯤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이제 아, 나는 희망이 없다. 이렇게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없어서 내가 무엇을 가지고 목회를 하고 살아갈 것인가 하는 깊은 절망감에 있을 때, 때론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 어떤 때는 야코가 죽어서 준비할 기운도 더 이상 나지 않을 때 오히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말씀에 함께 하셔서 저의 마음을 녹이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시고. 그 때 다시 그럼 한 번 또 해볼까?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글을 쓰다가도 그렇습니다. 글이 안나옵니다. 그러면 너무 고툥스러워서 이게 도대체 무엇을 하는 건가? 매일 한 이야기나 또 하고 또 하고 그러고 있구나. 그럴 때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시면서 내가 상상도 못했던 그런 말씀들을 막 쏟아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다시 한번 성령이 그렇게 만지고 지나가시니까 인생 다산 것 같이 주저앉던 사람이 그래도 한번 어떻게 해 볼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놀랍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성령을 근심시켜드리는 삶을 계속 살면서 성령 충만 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 )로 부터 먼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슬퍼하시는가? 때로는 사람들을 향한 독한 미움이 성령을 근심케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없음이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근심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미래의 염려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하는 것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슬프게 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집요하게 찾아 내야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찾아내고 우리가 귀를 기울이며 말씀을 듣고 그 속에서 우리의 죄를 발견하고 우리의 불순종이 우리도 알지 못하는 편견 때문에 우리에게 경험되는 많은 불순종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세밀하게 다 속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않는 다는 말의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다는 말의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충만함이 있을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모든 말씀을 진리로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주장하는 충만한 삶을 살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고 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니까 하나님이 우리 안에 참된 소망과 놀라운 은혜를 주시고 그랬기 때문에 슬퍼할 때도 우리가 하나님을 인해서 기뻐하게 되고 그리고 난관과 어려움이 올 때도 나는 무지 하지만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그 지혜로 어려움과 난관을 헤치며 지나 갈 수 있는 이런 일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죄와 불순종 가운데 우리를 가두어 둠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불화하게 만들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계속 근심하게 함으로 그 능력을 누리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씁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어떤 요인들 때문에 주께 우리의 삶이 기쁨을 드리지 못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은밀한 죄들로 성령을 슬프게 하는지를 깊이 깨달으면서 자신을 고쳐나가는 이런 삶을 살아야되는 것입니다.
7. 성령 충만을 받으려면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오늘은 강단의 꽃꽂이가 좀 틀리지요? 왜 이렇게 새빨간 색으로 치장을 했을까요? 여러분은 이 빨간 색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까? 불, 불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성령. 오늘이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 참되고 영원한 만족이 오직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충만히 계시는 것 밖에는 없는데 왜 우리가 그런 것들을 누리지 못하며 사는지에 대해서 지난 두 주간 동안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그 비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고 나서 사도는 설교자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외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전에는 용기가 없었던 사람이 용기가 생기게 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에 알지 못했던 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와 어떻게 하나님께서 오늘날까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역사를 움직이시고 지켜 오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서 그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전에 예수님이 끌려가시는 것도 보았고 예수님이 죽은 그 사실도 다 목격했고, 심지어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사건까지도 다 목격했습니다마는 그렇게 다시 죽고 살아나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 사도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다 진실이었지만 진실들은 파편이 되어서 한 조각 한 조각 의식의 세계를 떠돌아 다니고있기 때문에 그것이 전체적으로 묶어져서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런 것들을 이해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셨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자기를 꺠닫게 하시자 그 성령을 통해서 모든 이전에 경험하고 보았던 사건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면서 결국 하나님이 그토록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기를 원하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에게 구원이 임했고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구원을 얻기를 사모하며 믿는 사람들 마다 하나님께서 가문과 문벌과 지식과 그리고 혈통과 민족과 나라에 관계없이 구원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오늘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 때에 3,000명이나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그 베드로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였다 라고 선포하자 사람들은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라고 하는 이 사실에 대해서 가슴에 찔려하면서 통탄하며 우리가 어찌해야 될꼬 하고 몸부림치며 그 사도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이렇게 오늘 가슴을 치며 마음에 찔려하는 이 많은 사람들이 사실 멀리 내다보면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빌라도의 뜰에서 소리치고 고함쳤던 그 우매한 군중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가 그렇게 마음에 찔려하는 사람들에게 이제 어떻게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겠다고 말했습니다.
우선 이 베드로의 설교는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첫 번째 비결이 회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회개는 가장 간단하게 말로 표현하면 제일 먼저는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이 사람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이나 마음의 거리낌이나 가책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자신들의 죄가 생각이 났습니다. 자신들이 행한 바로 그것이 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질렸습니다. 그 때에 그들은 베드로로부터 설교를 들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라. 그것은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미 회개하라고 베드로의 외침을 듣기 전에 이 사람들은 이미 회개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마음은 이미 찔리고 있었고 그들의 마음은 이미 바뀌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바뀌고 있었습니까? 죄에 대해서 마음이 바뀌고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죄로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오 당연히 우리가 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그들의 마음속에 죄라는 생각이 자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나사렛의 이단자를 처단하는 일에 우리가 거들었다고 생각했던 이 어리석은 생각들이 변하여 자기들의 죄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당연하다고 믿었던 그 모든 행동들이 사실은 죄였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회개는 이처럼 죄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전에 조금도 죄라고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물먹고 그리고 먹고 마시듯이 자연스럽게 살아오고 그리고 자신들의 삶의 일부가 되었던 그것들이 죄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던 것들을 죄라고 생각하게 되게끔 마음과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에 옆에 달렸던 두 강도를 기억할 것입니다. 두 강도가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맨 처음에 욕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좌우에 있는 강도 중 한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고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자기들이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바대로 마땅한 보응을 받는 것이라고 죄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소리지르고 오랜 세월을 성령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해도 죄에 대한 참다운 자각이 일어나지 아니하면은 그 기도는 응답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충만하게 받고 그 우리의 만족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먼저 성령을 탐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속의 죄를 자각케 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적인 각성이 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치 아침에 이불을 개면 온 방안에 먼지가 가득해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커텐을 열고 창을 통해 밝은 동녘의 햇빛이 들어 올 그때에 수많은 먼지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급히 손으로 입을 막고 혹은 마스크를 쓰고 혹은 창문을 열고 방문을 열어 놓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전에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자각이 생겨나야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바로 이렇게 죄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과 부활하신 것과 승천하신 것과 성령을 주신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나뉘어 질 수 없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면서 부활을 예언하셨고,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실 것을 말씀 하셨으며 승천하시면서 내가 가야지만 보혜사 성령이 너희에게 오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토막내거나 잘라서 생각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그리고 성령이 오시는 것과 이것이 나뉘어 질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면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 그 모든 근거는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사건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성령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에게 오실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은 우리가 무엇인가 의로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사실을 굳게 믿고 그 죽으신 사실을 내가 깊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성령이 오시기만을 기다리며 아무 일도 행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성령이 오시기를 기도하며 자신의 의를 의지하지 않는다는 미명하에 태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령 주시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열심히 살고 성경에 약속된 그 모든 계명들을 지켜 행하면서도 내가 의뢰하는 것은 내가 이런 일을 행하기 때문에 내게 성령을 주실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내게 성령을 주시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내가 그를 믿는 것이 성령 주심의 보증이라는 사실을 믿는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요약해서 말하면 이런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성경에 기록된 그 모든 계명들을 열심히 지켜 행하면서도 그것 때문에 자기 의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내가 성령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내가 말씀을 지키면 그 말씀을 지킨 댓가 때문에 하나님이 성령을 내게 주실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성령이 주어진다면 성경은 성령을 선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상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성경은 말하기를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선물은 받아야할 아무런 이유와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도록 주어지는 것이 선물입니다. 당연히 한 달을 일하고 월급을 받는 것을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 공로 없는데 자격이 없는데 그것이 자기에게 주어질 때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도 베드로가 각각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말하고있습니다. 이 베드로가 이렇게 회개하라고 말할 때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평범한 한 사람의 죽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성자의 한 죽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깨닫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깊이 깨닫게 될 때에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고 그리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에서 그 일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바로 이렇게 자신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바뀔 때 그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성령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와의 관계에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선물이지만 그 선물은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와의 관계에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회개해야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구원을 받아야지만 성령은 선물로 받게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서는 오늘 말하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아야되겠다’ 에서 이 세례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마는 여기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은 자신의 믿음을 모든 사람 앞에 공공연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신앙 생활한다는 것을 감추거나 은밀하게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인임을,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는 이 세례를 받는 것이 그렇게 큰일로 생각이 안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도 유교의 전통이 아주 뿌리 깊거나 우상 숭배가 깊이 박혀 있는 고을과 씨족에서는 세례를 받는 것은 실로 두려운 일입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세례를 받으면, 그리스도인이었다고 고백을 하면 법적으로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자격까지도 박탈당하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이런 나라와 형편에서 예수를 믿는 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리새인이 이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그리고 세례를 받았다고 봅시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리새인으로서 그 사람의 종교적인 운명은 이제 끝난 것입니다.
서기관의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 만약에 이렇게 회개를 하고 모든 사람에게 믿음을 고백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렸다고 합시다. 그는 서기관의 집안으로서는 축출을 당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우리들이 세상에서 살 때에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임을 예수 믿는 사람임을 고백할 때 명백한 손해가 올 조짐이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리우지 아니하고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일이 쉽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일제 시대 때에는 그렇게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순교를 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세례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 곁에 병정들이 와서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면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끌려가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습니다. 가문을 잃어버리고 집안에서 쫓겨 나고 멸시와 천대를 당하고 명예와 재산을 잃어버리고 상속의 권한을 박탈당하고 내게 있는 모든 좋은 것과 (지위 ? )를 잃어버린다고 할 찌라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임을 세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 공적으로 고백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자기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을 위해서 버리신 희생과 고난에 비교하면 자기들이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불이익과 박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모든 사람들 앞에 자기가 그리스도인임을 입으로 삶으로 고백하고 시인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용서함을 주시고 성령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좀 모자라는 삶이라고 할 찌라도 어디에 가든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모자라는 삶을 언제나 스스로 자각하고 자신이 믿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고백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삶으로도 자기가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며 살 수 있게 되도록 우리는 삶과 고백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백을 감추는 사람은 삶을 인해서 고민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불신자들 가운데 가서는 슬며시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감추고 또 신자들 속에 가서는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임을 드러내고 이런 기회주의적인 신앙의 고백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받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어디서든지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해야됩니다. 그리고 그 합당한 삶을 살도록 또 합당한 삶을 살아야할 그 짐을 스스로 짊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디서든지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지켜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성령을 받는 조건으로서 죄 사함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 번 죄지은 것을 어떻게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길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죄 사함을 얻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로막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당신과 교통하는 당신이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그 교통의 통로를 통해서 부어주시는 것이 성령입니다. 죄는 그것을 막히게 합니다.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죄 사함을 받는 길입니다.
여러분. 백화점에 가서 가끔 보면은 5만원 이렇게 써 있고 작대기를 죽 그어놓고 4만원하고 받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은 옛날에 5만원이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의 죄 사함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참 회개하고 예수로부터 죄 사함을 받으면 주님은 우리를 전과 있는 죄인으로 치시는 것이 아니라 죄가 없는 사람처럼 대우해주시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으로 대접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은 감옥을 삽니다. 옥살이를 하고 나온 사람들은 바르게 살려고 해도 바르게 하는 자신들의 마음을 믿어주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또 다시 범죄를 합니다. 어디가도 취업의 불이익을 당합니다. 잘 다니다가도 그가 전과자인 것이 확인이 되면은 쫓겨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에서는 그런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에서는 이전에 지은 죄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사함을 받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진정한 죄 사함이 주어질 때 그때에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성경에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 사람을 받고 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은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순종의 반대는 불순종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큰 불순종이나 작은 불순종이 없다는 것입니다. 불순종에는 큰 불순종이나 작은 불순종이라는 그런 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 모든 불순종은 아버지를 향한 반항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딸이 다 커서 이제는 시집갈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 믿는 남자에게 굳이 시집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가지 말아라. 그랬는데도 꼭 가야되겠다고 우깁니다. 이것은 불순종이지요?
그 아이가 어렸을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땅에 아버지의 성경책을 던져 버렸습니다. 성경책은 너무 큰것이니 다른 예를 들면은 땅에 무슨 물건을 떨어 뜨렸습니다. 깨졌습니다. 그 물건은 단 돈 500원의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네가 잘못했다고 말해라. 싫다고 우깁니다. 잘못했다고 말만하면 내가 너를 용서 해 줄테니 말해라. 그런데 잘못했다는 말을 죽어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건에 있어서는 앞에 사건이 더 큰 사건일는지 모르지만 작은 사건이나 큰 사건이나 그 사건을 움직이고 있는 불순종은 질적으로 똑 같은 동기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버지의 아버지 되심에 대해서 항거하는 것입니다. 불순종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커다란 불순종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불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즉시 압니다. 그러나 작은 불순종은 자기가 불순종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거니와 이런 것 때문에 성령을 내게 안 주실 리가 있는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작은 불순종이라고 하는 이유 때문에 자신들이 열심히 기도하는 것으로써 웬만한 불순종 정도는 상쇄시킬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전적인 오해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주시는 은혜의 물은 가장 작은 장애물에도 걸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또 하나의 메세지입니다.
완전한 순종. 그러니까 순종하기 위해서 깨어 있고, 깨어 있기 위해서 또 순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순종은 우리의 영적인 감각을 무디게 만듭니다. 감각이 무디어 지면 우리가 무엇을 내가 불순종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사소한 것들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갑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성령 주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깊이 깨닫게 하실 때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죄를 지적 받으면서, 아! 하나님이 그 죄를 지적하실 줄 알았다. 이러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것 때문에 그렇게 오래도록 성령 받기를 기도했는데 못 받다니! 충격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들이 사소하다고 생각하고 혹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큰 것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불순종은 큰불순종과 작은 불순종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있습니다. 내가 불순종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 알고 있으면서도 불순종을 돌이키지 못 할 때는 커다란 양심의 고통이 자신을 눌러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지요? ( ? ) 그러나, 내가 그 불순종을 의식하지 못하고 죄의식을 느끼지도 못하면은 기도하면서 그런 자책감을 갖지 않기 때문에 겉으로 볼 때는 씩씩하게 기도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영적으로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 큰 벽이 있다는 사실을 점점 더 확실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느낍니까? 성령( ? )을 통해서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 속에 가득 찼을지도 모르는 불순종을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 그리고 성경의 증거를 통해서 깨달으면서 그것들을 끊임없이 버리고 순종으로 고쳐 갈 때 그때에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 시리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