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기 교역자 수련회3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기 마소서”(시 119:18)
녹취자: 김명진
우리들이 성도를 사랑하는 것, 성도를 잘 섬기고, 교회에서 유능한 일꾼이 되는 것 등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중요한 목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사람들을 진리의 빛 가운데에서 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업입니다. 지금은 그런 것들이 다 사라졌지만 미국을 기준으로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목사’하면 진리의 사람이었습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스펄전이 목회하던 메트로폴리탄 교회에서 크게 생긴 체육관 같은 둥근 건물이 있었는데 당시에 유명한 교회였습니다. “이게 무슨 건물입니까?”하고 물으면 불신자들이 “저기는 진리가 울려 퍼지는 곳입니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을 잘 전하면 교회가 큰 교회는 되지 않아도 작은 교회라도 올바르게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요령이 있고 수완이 뛰어나도 진리가 없으면 교회가 커져도 진리의 교회가 될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진리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오늘 시편을 보니까 “나의 눈을 열어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예전에 “주의 법의 기이함을 보게 하소서” 그랬는데 놀라운 것들이라는 것이 인간 사회에서 살면서 어떤 놀라운 일들이 아니라 신적인 기이함입니다. 하나님에게 속한 초월적이고 신비한, 그래서 우리의 지성에 아주 놀라운 그런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율법은 넓은 의미의 율법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을 전달해주는 말씀의 모든 총체를 우리에게 가리키는 것이지 우리의 죄만을 깨닫게 해주는 그런 종류의 좁은 율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폴라누스라는 신학자에 의하면 신적인 지혜에 대한 학문이 신학입니다. 초월적이고 기이한 세계에 속한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 그것이 결국 지혜에 대한 앎이고 그것이 우리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일평생 목사의 소원은 사람들이 그 빛 아래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제도 이야기 했듯이 우리의 목회 사역의 목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들로 성도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가르침이 깊이 진심이 배어 있는 가르침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전방위적인 삶에 있어서 온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몸부림이 있을 때 그 가르침이 배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역을 하는 동안에 다음에 담임목회를 하고 죽는 날까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모든 것을 즐겁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설교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기도도 안하고, 봉사도 안하고, 전도도 안하고, 설교하나로만 돌진하려고 하는 것, 그것은 아닙니다. 자기는 교인들과 교제하는 것이 즐겁다고 그것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도를 열심히 한다고 소문난 교회가 있었는데 가보니까 절대로 건강한 교회가 아닙니다. 다른 것은 모르고 하나를 보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큰 감동이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보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과를 살 때 전체를 보고 사지 한쪽을 보고 “야, 이 부분은 진짜 빨갛구나. 여기만 티스푼으로 파먹으면 맛있겠다.”하면서 사과를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wholeness 그것은 holiness의 어원입니다. 거룩함과 온전함은 일치합니다. 모든 것을 균형 있게 다 잘 할 수 없습니다. 종종 그렇게 말합니다. “저는 행정은 잘 모릅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만……” 교회를 몇 번 쫓겨나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설교는 열 번 못하다가도 한 번 잘하면 사람들이 다 기대를 갖지만 행정이라는 리더십은 열 번 잘 하다가 한 번을 못하면 모든 교인들이 항상 불안해합니다. “저 목사가 우리교회를 어디에다가 꼬라박아 버릴까?” 도저히 그 사람을 따라갈 수 없는 답답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항상 훈련받는 시간에 모든 부분에 있어서 성실하고 온전해 져야합니다.
제가 월요일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십년 정도 되어갑니다. 올해 십일 주년 했으니까 본격적으로 외부에 있는 학생들이 와서 가르친 것은 7년 된 것 같습니다. 수많은 학생들이 와서 공부를 하고 갑니다. 합신도 오고 총신도 옵니다. 그 스터디에 들어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시험까지 보고……. 시험을 보고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간사들이 항상 이야기 합니다. “전도사님 웬만하면 오지마세요. 굉장히 어렵습니다. 지루하고 힘듭니다. 웬만하면 오지 마세요.” 그래도 오겠다고 합니다. 열 명이 시험을 보면 세 명 정도가 붙습니다. 떨어진 사람에게는 얘기하지 않고 붙은 사람에게 얘기합니다. “그 대신 들어오시면 그만두시면 안돼요. 꾸준히 하셔야 합니다. 단박에 오셔서 빤짝 자료라도 얻으려고 그런 생각을 가지면 오시지 않는 게 좋습니다. 저희는 많은 전도사님들을 받기 때문에 웬만하면 오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도 사정해서 옵니다. 그런데 한 육 개월이나 버틸까 육 개월도 버티지 못합니다. 그게 보통 어려운 일입니까? 책을 읽고 와야지, 번역해야지, 설교 들어야지, 가끔 숙제도 내주지, 월요일마다 레포트도 쓰고 놀아야 되는데 그것도 포기하고 와야 하지, 선생님이라는 사람은 수시로 외국 나간다고 못한다고 하지, 그런데도 꾸준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해도 꾸준히 합니다.
캄보디아에 갔더니 캄보디아 선교의 역사를 책으로 썼습니다. 거기에 열린교회 세미나가 역사책에 올라갔습니다. 8년째 했는데 열린교회 세미나가 가장 인기 있는 세미나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와서 좋은 호텔에서 선물주고 그래봐야 50명에서 100명도 모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옛날하고 달라 선교사들이 거지 근성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얻어먹고 그러면서 선교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맨 처음에 할 때 등록된 프놈펜 선교사가 160명이었는데 그때 200명이 모여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원들이 저를 따라서 왔는데 황 선교사가 “죄송합니다. 목사님 최선을 다했는데 58명에서 60명 쯤 모입니다. 적게 모이더라도 이해를 하십시오.”하고 갔는데 200명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선배목사님이 밥값을 300만원을 챙겨줬습니다. 가난한 나라에 가니 필요 없다고 했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가져가라고 해서 가져갔는데 그 돈으로 모자랐습니다. 해마다 200명에서 230명씩 모입니다. 8년 쯤 되었습니다. 그 중에 한 선교사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희는 목사님이 두세 번쯤 하다가 발 뺄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오래 하셨습니까? 예상을 깼습니다. 설교하실 것도 많은데”이렇게 얘기 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십년을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중간 평가를 해서 하나님께서 계속 쓰시겠다고 하면 하고 아니면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십년을 해보아야겠다. 이런 세미나도 십년은 해봐야겠다. 십년을 해보고 아닌 것 같으면 접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무안 신학교를 세울 때도 정확하게 십년 연구하고 무안신학교를 세웠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두 가지를 같이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한 순간에 초월적인 은혜를 주셔서 불교에서 얘기하는 돈오의 순간입니다. 눈이 확 떠지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사랑과 놀라운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부흥을 경험해야합니다. 예전에도 제가 임신택 목사를 비롯해서 교역자들에게 “자네는 인품도 있고, 공부도 열심히 했고, 열린교회에 와서 장시간 동안 설교를 듣고, 신학적으로도 반듯하게 적립이 되어 있고 손색이 없다. 그런데 갈멜산에 쌓아 올려진 장작이다. 그 위에 한번 네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그 위에 불이 한 번 내려야 한다. 그것을 경험한 목회자와 그렇지 않은 목회자는 겉으로는 거의 표시가 나지 않는데 그 속에 배어 있는 것이 다르다. 주님을 깊이 만나라. 목숨을 걸어라.”고 말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젊은 날에도 부흥을 경험했지만 목회를 하면서 사십대에 들어서면서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평생 기도제목이 오십이 되었을 때 주님을 깊이 만나서 또 한 번의 부흥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자리에서 제가 보니까 오십 세 때 이 분이 주님을 다시 한 번 깊이 만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이것이 눈을 열어서 주님의 법의 기이함을 단박에 보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 부흥을 깊이 경험해야 합니다. 평신도 때 이런 부흥을 경험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목회자가 된 다음에 이런 일을 경험하기는 매우 힘듭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훨씬 더 루틴한 일에 꾸준히 종사를 하기 때문에 그 시간과 장소 속에 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초월적인 갈망이라든지 개인적인 깊은 부흥이라든지 죄의 문제에 대한 씨름이라든지 이런 점에 있어서 순수한 평신도다 더 불리한 입장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평신도 때는 예배가 끝나고 나면 하나님이 내게 깨닫게 해주신 것에 감사하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 할 수 있지만 교역자가 되면 빨리 안내 하러 나가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말씀은 사역하기 위한 도구가 되고, 기도는 내일의 성과를 내기 위한 수단이 되고, 예배는 다른 사람을 예배하도록 돕는 일이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경배해야하는 의무를 대체하게 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 말씀의 감동, 이런 것들이 수박을 물에 담근 것처럼 스며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돌고, 그러면서 하나의 종교적인 기능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많이 들어도 여기에서 들어와서 여기에서 정리하고 여기에서 뱉어버리는 것이지 이것이 들어와서 자기를 깨뜨리고 그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사역을 잘 했던 사람들은 평신도 때 교회에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교역자가 된 사람들이 오히려 훨씬 복음에 대해 깊은 통찰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있냐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초월적인 은혜의 세계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을 목회자들이 다룰 때 성도들은 본능적으로 알아봅니다. ‘저 분이 얼마나 주님을 깊이 만나신 분인가’ 하는지를 알아봅니다. 열린교회 평신도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20년 넘게 목회를 해도 한 번도 누가 와서 교역자에 대해서 험담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성격이 괄괄하고 등록한 지 2년 쯤 된 사람인데, 지금은 가고 없는 분인데 그 분이 약간 신비주의적인 가르침을 했었나 봅니다. 그 분이 저에게 와서 항의를 하는데 “목사님 저는 그런 것 때문에 집도 날리고, 가정도 다 어려움을 겪고, 그게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열린교회에 왔는데 어떻게 열린교회 교역자라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신비주의를 우리에게 가르칠 수 있습니까?” 열린 공간 앞에 앉아 있을 때 굉장히 강하게 어필을 했습니다. 나중에 정리를 했습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성도들은 그 교역자와 힘들면 조용히 사표를 내고 나갑니다. 교사든지 구역장이든지, 왜냐하면 교회의 질서에 대해서 계속 배워왔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 인식 속에 박혀 있습니다. 개중에 개념 없는 사람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겠지만 저한테 까지는 그랬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 되는 것은 모든 목회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됩니다. 거기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어떻게 할 수 없게 만드는 권위가 나옵니다. 주님의 심오한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고………. 그런 부흥의 흔적이 지나가야 합니다. 그런 부흥의 흔적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사역과 영적인 추구가 일치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시간의 대부분을 할애하면서 신경을 쓰면서 하는 일은 여러분의 기도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일치하지 않으면 빗나가는 삶이 됩니다. 가장 중요하고, 마음을 많이 쓰고, 머리가 아프도록 골몰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는 사람이 그 이하의 관심사에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향한 의존에서 이탈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경건으로부터의 이탈이 나오는 것이고 기도생활의 헤이가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사역을 하면서 우리는 그런 것을 많이 보지 않습니까? 다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보고를 쭉 하면 ‘저 것도 일처럼 축구공 돌리듯이 배구공 돌리듯이 계속일로 돌아가고 있구나.’ 그런데 아주 작은 일이라도 보고를 하거나 이야기를 들으면 ‘진행되는 이야기부터 지체들과 마음을 쏟으면서 기도하면서 저 일이 이루어지고 있구나.’ 그런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히 살아가는 삶과 기도가 일치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우리 오 목사님이 내수동교회에서 왔지만 제가 지금으로부터 23~25년 전이었으니까 그때 오 목사님 초등학생 이었습니까? 중학생이었습니까? 그때에는 내수동 교회에 없었지요? 저는 내수동교회를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성도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느냐? 그런 것 별로 없습니다. 얼마나 싸늘한 교회였는지 추석 때가 되어도 선물하나 주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아주 냉랭했습니다. 그런데 박 목사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거기에서 주님을 깊이 만난 것이 저에게 있어서는 저의 가는 길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제가 구약에 한 참 빠져있었을 때 세마이틱 전문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은근히 저에게 부추긴 분이 김의원 목사님이었습니다. 저에게 자꾸 유학을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를 막으셨습니다. 한참 공부하고 엄청나게 그쪽 방면에 아이디어를 하나님이 많이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내수동교회에 가서 거기에서 주님을 깊이 만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 인생이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사역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바뀌기도 합니다. 제가 거기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2년을 철야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부흥도 주셨고, 거기에서 목사도 많이 나왔습니다. 백주은이라는 목사님을 압니까? 그 사람이 고등부 때 내 속을 많이 썩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고등부 목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너무 힘들다고 해서 “네가 고등학교 때 나에게 했던 것을 기억해라”라고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예배시간에 벌떡 일어나서 발길로 문을 차면서 “에이~씨!”하고 나가고 골목에서 나를 빨간 벽돌로 찍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거기에서 부흥이 일어나면서 여러 명의 목사와 사모들이 나왔습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토요일마다 기도하면서, 기도의 제목은 딴것이 없었습니다. 영혼들이 회심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저에게 갑작스럽게 사역의 변화를 주신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누적되면서 어느 한 순간에 커다란 부흥이 일어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나니까 그때서야 기독교 강요가 무슨 의미인지 들어왔습니다. 인간의 손으로 쓰여진 신학 책들이, 비유를 하자면 제가 본 것은 총 천연색 정원이었고 신학자들이 그려 놓은 것은 3D도 아니고 빛바랜 흑백사진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 이게 이렇게 되는 것이었구나.’ 그것을 깊이 경험했습니다.
정말 자기 사역에 목숨을 걸라고 이야기 합니다. 물론 그때도 저는 학생들 중에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저보다 탁월한 학생도 꽤 있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독일어 원서를 삼일에 한 권씩 읽었습니다. 그것도 수업시간에. “아, 다 읽었다”하고 쿵 내려놓았습니다. ‘우리는 예수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책이었습니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학을 버리고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강남에서 무슨 힐링 치유센터를 합니다. 독일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왔고 라캉을 전공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어린아이처럼 전심으로 주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가 되기 전에 실질적으로는 세 개였지만 마지막에는 개척하기 위해 나와서 불과 일 년 반 정도 있었습니다. 두 교회에 있었습니다. 한 교회에서 8,년 다른 교회에서 7년 정도 있었습니다. 제가 그 교회에 다니는 동안에, 다른 교회에 굉장히 많이들 갔습니다. 그 때에 인기 있는 이동원 목사님 설교 들으러 가서 배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님이 허락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내수동교회에 갔을 때는 목사님이 수요예배에 나가지 않아도 말씀을 하지 않는 분이지만 내가 교역자의 양심으로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안양에서부터 버스타고 항상 수요예배에 꼬박꼬박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는 항상 제가 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변두리교회에서 몰두하다가 내 동료들은 저렇게 배우러 다니는데 곽선희 목사님한테 배우러 간다고 하고 이동원 목사님 설교 들으러 가고, 무슨 세미나 들으러 간다고 하는데 난 어떻게 하나?’ 항상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모든 사역과 자기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가정과 모든 뼈아픈 일들 얼마나 많겠습니까? 평신도들도 교회 사역 좀 열심히 해보려고 하면 가족들이 너무 싫어한다고 합니다. 평신도가 그러는데 교역자는 어떻겠습니까? 그런 아픔들을 누구나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짊어지고 아파하면서 주저앉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 것을 요셉스토리에 나오는 것처럼 경험하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역사하신다.’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때 저의 섬김을 기뻐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는 부흥을 경험하라. 하나님의 법에 놀라운 초월적인 것을 보기를 원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했으면 할 텐데’라는 것과 진짜 그것을 찾는 것은 다릅니다. 진짜 그것을 간절히 찾는 사람이 되어서 주님을 깊이 만나는 열정을 가져야 되는데 그 열정의 최후의 표현이 기도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앉을 때만 심오하게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로만 자기가 굉장히 많은 고민을 한다고 털어놓습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심리적으로 자격지심과 열등감의 산물입니다. 댓글 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순간에도 내가 얼마나 진지한 사람인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갈망하는지, 온전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언어 속에서 과장이 나옵니다. 방금 시작한 고민입니다. 그 고민이 진실하면 그것이 마음을 녹이는 기도로서 표현 됩니다. 그때 거기에서 움직입니다. 사역을 하다 보면 무슨 수를 써도 변화가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다 포기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었는데 마지막에 돌아오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를 들면 백 미터짜리 그물을 쳐서 배 두 개가 끌었는데 마지막에 보니까 요만한 생선 서너 마리 잡히고, 장화 쪼가리나 오물이 잡히면 그럴 때가 기도하라는 사인입니다. 기도자체가 사역이다, 사역을 위한 준비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보여주십니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놓고 설교를 하면 ‘저 분은 정말 주님을 깊이 만나신 분이구나. 정말 부럽다.’하는 사람은 한두 명밖에 없습니다. 물론 자잘한 대형들이 있겠지요?
두 번째는 성실한 탐구생활입니다. 끊임없는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한 학문에 대한 탐구입니다. “사역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결국은 밀려나서 그러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반드시 하지 않습니까? 걱정도 많고 많은 일이 있어도 책을 펴면 스위치가 되어서 탐구모드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교회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총신에 다니면서 “목사님 이번에는 등록금을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까? 몇 년 전에 곽상근이라고 절반 장학금 받았다고 보고받은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면서 학교에서는 “열린교회는 하도 일을 열심히 시켜서 공부를 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누가 했는지 모르겠지만 사역도 별로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그런 예기를 합니다. 진짜 열심히 하는 사람은 그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강요셉 목사 있을 때 제가 혼을 냈습니다. “열린교회 애들은 쉬는 시간에 책상에 엎드려 잔다고 하는데 그렇게 공부해서 뭐하니 공부시간에도 엎드려있다고 하는데 말이 되느냐?” 치열하게 탐구해야 합니다. 절대 공부의 끈을 놓으면 안 됩니다. 지식이 없으면서 진실해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힘듭니다. 진실해지려면 매일 나는 아는 것이 없다고 해야 하는데 그것도 잘 알면서 가끔 얘기해야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지 온 교인이 무식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맨날 올라갈 때마다 저는 아는 것이 없다고 하면 “목사님 당신 무식한 것 다 알아요. 공개하지 않아도 이미 당신의 설교가 충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그러는데 그것을 어느 교인이 “목사님 설교 듣고 주일에 한 잠도 못 잤습니다.” 본인이 엄청 은혜를 끼친 줄 알고 회개에 대한 설교를 했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알면서도 물어봤습니다. “왜 잠을 못 주무셨습니까?”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런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설교시간에 너무 자서 집에 가서 뜬 눈으로 밤을 샜다고 합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깊이 공부하고 마지막에는 그 모든 공부의 결과를 들고 올라갈 때에 여러분이 플라톤을 들고 올라가겠습니까? 플라톤 읽어야 합니다. 꼭 공부해야 합니다. 그 플라톤 갖고 올라가서 설교 할 것입니까? 플로티누스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 영향을 많이 준 책 이기 때문입니다. 플로티누스 들고 올라갈 것입니까? 그런데 안셀무스 읽어야하지만 안셀무스 펼쳐놓고 설교할 것입니까? 그 모든 용의에서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설교를 통해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학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지런히 탐구해서 적어도 그런 얘기는 나오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목사님들이랑 강도사님들 새벽에 올라와서 설교할 때 “제발 주석이라도 읽고 올라왔으면 좋겠다” 이런 이야기는 듣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력도 없으면서 이만한 메모지 하나 가져와서 설교하는 것, 어린 시절에 그렇게 하는 것은 교만이고 태만입니다. 말씀에 깊이 참착하면서 원고를 쓰고 말씀 한 편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교회학교 교역자들이 요즘에는 설교 원고도 내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것입니다. 한 번 지시했으면 끝까지 해야 합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휘관이 앞으로 갓! 했더니 우리나라 군인들은 앞에 절벽이 나오니까 다 멈췄는데 독일 군인은 모두 떨어져 죽었다고 합니다. 앞으로 가!하고 지휘관이 딴 사람하고 이야기를 해서 차례대로 떨어져 죽었다고 합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라”라고 지시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내고 어떤 사람은 내지 않고,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치밀하게 설교하고 탐구해야합니다. 그렇게 해서 말씀에 깊이 은혜를 끼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시간 없다고 핑계대지 말고, 있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매달려서 열렬하게 책을 읽고 탐구하면서 주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함양해서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깊이 명심하고 사역과 신앙의 일치를 이루고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깊이 반성을 하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면서 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