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역자수련회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2~24)
녹취자 : 허혜숙
아마 우리 한국교회의 지난 10년 동안 만큼 리더십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나온 때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 교회적으로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모두 그랬고 특별히 미국에서 더더욱 그랬습니다. 이유는 최근 10년 동안 우리 앞에 펼쳐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상황들이 너무 심각하고 위기의식을 느끼게 하는 역사였기 때문에 더 절실하게 리더에 대한 갈망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1990년대에 모세 신드롬이 있었던 것처럼 책과 영화 이런 것들을 통해서 모세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고 이런 과정에서 한국교회들 역시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사실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들이 모두 있다고 생각합니다. 긍정적인 면은 지도자에 대한 중요성을 아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인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의 선을 그어보면 그 점들은 하나님이 쓰신 인물들로 이루어지고 교회 역사에도 역시 펼쳐져가는 이 모든 역사적인 전개의 과정은 어느 지도자가 나타났느냐에 따라서 역사의 전개는 훨씬 달라지고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도 그 지도자의 출현을 기다리고 계신다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역사와 인물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지도자에 대한 진지한 이해를 갖게 되었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입니다. 또 한편 부정적인 것으로서는 지도자에 대한 논의가 부정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그 교회에 대한 이해의 문제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장악하고 있고 어디가든지 진리에 대한 견해를 들을 수 있었을 때에는 사실은 사람보다는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성과 그리고 능력, 깊이에 대해서 관심을 더 많이 가졌는데 산업혁명 이후로 교회가 여성화되고 진리를 전하는 것이 교회의 본무가 아니라 이제는 하나의 커다란 행정조직, 경영조직처럼 교회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리더에 대한 요청이 더 절실해 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부정적인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런 현실 속에 있고 어떻게 하든지 이 현실을 끌어안고 주님의 교회를 이끌어 가야 합니다. 진리를 양보하지 않는 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오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다가가서라도 그들을 진리로 이끌 마음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상황을 외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예전과는 다른 자격조건을 목회자에게 부여하게 되는데 그것이 리더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서 리더십이라고 이야기할 때에는 진리의 요소를 배격하고 교회를 잘 경영하고 운영하기 위한 세속적인 방식에서의 리더를 이야기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런 현실들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이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성경이 그리고 있는 교회로 사람들을 이끌고 가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으로 우리 모두 가기를 원하 그런 일을 위한 리더십을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리더십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오늘부터 이제 마지막 내려가는 시간까지 한 시간에 몇 번이나 할 지 모르지만 한 가지씩 말씀을 드리자면 그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기본이 무엇이냐 하면 오늘 사도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바와 같이 ‘거룩한 목표에 메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래서 이 지도자는 자신이 이끄는 사람들에게는 아직 없는, 혹은 자신에게 이끎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능가하는 어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목표는 자기 암시적으로 세운 목표가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받은 목표이고 주님께로부터 받았다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분 때문에 그분의 인격 안에서 발견하게 된 목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오늘 ‘내가 심령에 매임을 받아’라고 했습니다. 매였다고 하는 뜻은 무슨 뜻입니까? 줄 같은 것들로 붙들어 맸다고 하는 것이죠? 묶인 사람은 묶여진 대상과 일체를 이루고 공동운명체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에 나오는 ‘베리트 사상’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베리트라는 히브리 단어가 ‘언약’인데 ‘아카드 바리투’에서 왔다고 보는데 ‘바리투’는 족쇄입니다. 두 사람을 족쇄로 한 발씩 묶어버리는 것입니다. 죄수를 도망치지 못하게 묶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언약관계라는 것이 생기는 것인데 여기에서 심령에 매임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도대체 무슨 심령에 매임을 어떻게 받았는지 사도바울의 일생을 돌아보면 이 표현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는바와 같이 유대인이 가르쳐준 거짓된 메시야 사상에 물들어 구약의 메시야를 볼 수 있는 시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리고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그 모든 구약의 역사의 중심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고 예수님이 특별히 이 사도 바울에게 부활하기기 전에 성육신하셔서 이 세상에 계실 때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를 않으셨습니다. 아마 그렇게 나타나셨더라면 사도바울은 쉽게 예수를 안 믿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 하신 후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아는 바와 같이 부활은 죽음 이후의 사건입니다.
사도바울의 가장 큰 궁금증은 만약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사실이라면 부활은 사실이 아니라고 믿었는데 죽은 것도 사실이고 부활도 사실로 입증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죽음의 의미였습니다.
그 죽음의 의미를 알고 보니까 예수님이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이것이 바로 그의 심령에 매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고 그 복음에 빚진 부채자로 자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일생을 꿰뚫어보는 핵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김세연 교수가 이야기하는 사도바울의 숙명입니다. 아남케입니다. 신적인 강제력의 기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령에 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것은 무슨 사역에 있어서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매인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개인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예수그리스도께 붙잡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들의 행복을 위하여, 이 복음이 전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복음을 모르고 멸망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비참함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것이 이 사람의 비전이 된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없이 여러분들이 지도자라면 그것은 일종의 기독교적인 사원이지 영적인 지도자는 아닙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이 일에 있어서 항상 그 일이 여러분들의 신앙이 토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인정하지 않은 지도자가 있다고 늘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배 자였던 적이 없는 설교자, 기도 자였던 적이 없는 기도 인도자, 구도자였던 적이 없는 진리를 가르치는 자, 전도자였던 적이 없는 전도 지휘자, 이런 사람들은 모두 신뢰할 수 없는 지도자입니다.
기독교의 지도력은 항상 이 한 신자로서의 신앙생활에서 지도자라는 것이 나오는 것이지 지도자용 지도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과대표 할 때만 학교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총학 할 때만 학생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끝나고 나면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튀르도라고 하는 캐나다 수상이 긴 수상직을 마친 이후에 마지막 위임사를 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여러분들은 나 튀르도라는 사람, 한 때 캐나다를 위하여 봉사하였던 수상 튀르도라는 사람이 얼마나 이 캐나다를 사랑하는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지를 보시게 될 것입니다.’그것이 일관되고 유지되어야 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위원장 시켜 놓는 동안에만 선교에 불이 붙고 끝나고 나면 개인적으로도 선교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는 이런 위원장은 진정한 의미에서 소명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리더로서의 여러분들의 각 부서를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셨으면 그러면 여러분들은 거기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개인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심령에 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역의 차원이 아니라 신앙의 차원입니다.
어린이를 돌본다, 영혼들에 대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마음, 심방해서 영혼들을 챙기고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심정, 그리고 무엇인가 그 영혼들에게 올바른 진리를 심어 회심에 이르게 하고 회심한 자들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이 평안을 찾을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심령에 매인 상태입니다.
일에 매여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매였기 때문에 그 일이 그에게 의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솟구치는 열정의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역자가 미지근한 것은 사역에 있어서 중대한 타락입니다. 청교도 시대 같았으면 사역자 자신이 회심 여부를 의심받을 만한 상황입니다.
항상 사역자는 자신의 일에 있어서 불타는 의욕을 느끼고 있어야 합니다. 심령에 매인 상태가 바로 그런 상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가 신령한 의미에서 매이는 적이 드물다면 세속적인 의미에서 매인 것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혹시 빚에 시달려 본 적이 있습니까? 빚을 져서 갚아야 되는데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매일 독촉이 옵니다. 그리고는 빚쟁이들이 집에 들이닥쳐서 소주를 나발을 불면서 돈을 달라고 보채고 심지어 돈이 없다고 하니까 너 감춰놓고 안 주는 것이 아니냐 하면서 소주병을 깨고 양복장을 부수고 아이들이 울고불고 집이 지옥같이 변합니다. 그 때 떠오르는 생각은 둘 밖에 없습니다. 죽어버리든지 빚을 갚든지. 그러면서 밤잠을 못 이룰 때 누군가 돈을 빌려줄만한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여러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진짜 빌려주겠어? 남들 이야기지 뭐 진짜 빌려줄라고? 빌려줄 가능성이 있을까? 부탁했다가 만약 안 된다고 하면 그것이 무슨 창피야?’ 그런 생각 들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어디 사냐고 물어 볼 것이고, 그가 누구냐고 물을 것이고, 얼마나 나에게 빌려 주냐고 물을 것이고 그 사람 앞에 가서 무릎이라도 꿇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매인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가 열정이 없다는 것은 그 조직에 재앙입니다. 처음부터 그 사람은 그 조직에 지도자 일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열정이 세속적으로 자기의 마음속에서 불러 일으켜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에게 붙잡히고 매여서 솟구치는 열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과 관련해서 그것에 성패를 좌우하는 작은 정보에도 마음이 뜨거워지고 아주 작은 계획에도 마음에 불이 붙는 것, 이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심령에 매임을 받았다라고 하는 의미 입니다.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강제력에 붙들린 운명과도 같은 그것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있는지를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이 머리가 숙연해 지는 때는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가 가야할 목표에 대해서 거룩하고 불타고 있는 열정이 보일 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머리가 숙여지는 것입니다.
기발한 재능이나 탁월한 수단을 발견할 때에는 박수를 치고 싶지만 자기에게 없는 거룩한 꺼지지 않는 거룩한 불이 지도자의 마음속에서 타고 있을 때에는 박수를 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지도자에게는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매였기 때문에 많은 수고를, 그리고 많은 희생을 치뤄도 그 희생보다 여전히 그 목표의 성취가 가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가치 있고 뜻있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법이 없고 항상 한계와 장애에 부딪치게 마련입니다.
그것을 넘어가게 만드는 것은 심령에 얼마나 매여 있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지도력의 첫 번째 요소입니다. 이런 것이 없으면 지도자가 되어야 할 이유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고자 할 때 항상 지도자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만 가슴이 불타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지도자에게는 좋은 권한이 따릅니다. 그리고 지도자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영광도 있고 또 지도자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물리적인 환경도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이 잘났기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가 가지고 있는 역할과 목표는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훨씬 더 중요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합당한 존경과 영광,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누림들을 그에게 수단으로서 제공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지도자들은 바로 이렇게 심령에 매인 것이 없고 자기가 지도자가 되어야 할 특별한 정신적인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로서 받는 대접이나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자신의 질서를 세우는 영광을 염두에 두면서 지도자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닙니다. 기독교 지도자도 중요하고 높은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존경과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편의상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이고 본질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 사람들은 모두 다름이 없이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종일 뿐입니다. 그러한 매임이 절실하게 있을 때, 그 매임이 있다고 해서 모두 지도자가 될 기회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매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무엇을 맡겨 주시든지 그것이 지도자가 될 과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음 나의 가는 길은 모르지만 여기가 내 인생에 있어서 최종적인 사역 지, 내가 어린이들을 사역하고 있다면 일평생 나는 이 어린이 사역을 하다가 죽어도 좋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거기에 올인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온전히 매달려서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깊이 매여야 합니다.
마치 이 세상에서는 나를 위해서는 이 사역밖에는 없는 것처럼 거기에 깊이 매여서 눈물이 나야 합니다.
그것이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거기에 대한 가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큰 희생이라는 단어는 사라집니다.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라고 하는 것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온 마음을 다해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아는 것, 매인 것, 그것이 바로 지도자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표의식이 분명하지 않는 것은 소명이 불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심령에 매임을 받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의 삶의 방식이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 하는 것이죠? 사도바울이 이런 태도를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환란을 만나고 결박당하여 투옥 당하게 된다, 죽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너의 생각이고, 사실은 안 그럴 수도 있다’라고 반박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령이 친히 증거를 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데 환란과 결박이 사도바울을 기다리고 있다고 성령이 증거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이루어질 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서 순풍에 돛단 듯이 가게끔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항상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순적하게 이루어진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까? 그것도 소극적인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허용적인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이 언약을 맺으시고 친히 성령으로 잉태되게 하셔서 사람의 몸을 입혀서 이 세상에 보내셨잖아요?
그러면 순풍에 돛 단 것처럼 부활에 이르셔야 되잖아요? 오실 때부터 예수님 때문에 수많은 아기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기 전까지 살아가신 생애 전체가 순풍에 돛단 것 같은 때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순풍에 돛 단 것 같아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길을 걸어가는 경우가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택했기 때문에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이 나타나고 협착하고 마치 사망에 이를 것 같은 위기를 만나는 때가 더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신다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성령이 고생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인간들의 의지를 사용하셔서 그렇게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반역하고 예수님 전하는 사도바울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을 성령은 미리 말씀하셨을 뿐이지 그 저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렇게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어려움과 역경이 있는 것은 언제나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순풍에 돛 단 듯이 갈 때에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고 또 어떻게 뒤집어서 말하면 우리가 자만에 빠질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사람들이 사역을 하면서 가끔 가슴속에서 억눌린 것을 가집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내가 내 사역을 행하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독특한 어려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별로 배려하지 않고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데서 오는 억눌림과 억울함, 그리고 많이 헌신하는데도 별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하는 소외감, 또는 사역을 하는데 이런 저런 어려움들이 많이 있는데 그 어려움들이 이상하게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어려움에 대해서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하는 억눌림 같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있으면 우리는 흔히 동정적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정말 그리스도예수께 매이고 매이게 되면 그런 것들은 기억에 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섭섭함, 억울함, 나만 손해보고 있다는 것 같은고 박탈의식, 이런 것들은 예수께 덜 매여서 그것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님, 그 때 고생 참 많이 하셨죠?’ 그것이 고생이었나? ‘그 때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참 많이 줬는데?’ ‘그랬나?’ 생각나지 않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면 사역에 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 보라고 이 길에 들어 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이 길에 들어 선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익한 생각입니다.
저는 전도사로 사역을 하면서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역자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사석에서 만나면 늘 교역자끼리 비교를 합니다. ‘OO는 그렇게 대접도 그렇게 많이 받고 인정도 받는데 나는 이렇게 고생도 하고 내 돈도 쓰고 억울한 일도 당하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이 상처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 마음에 병든 것에 관심을 가질지 모르지만 사실은 마음에 병든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하는 일에는 사실은 사역에 병이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고 하는데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굴복할 수 없는 목표가 사도바울의 가슴속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예수께 받은 사명이었고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 복음사역을 하지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마치려 함이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기에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이 언제 끝나겠습니까? 영원히 계속 되고 예수 오셔서 더 이상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될 필요가 없을 때까지 계속 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이 마치는 것은 사실은 우주적인 끝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죽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의미는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위해 죽으려 함에는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마치는 것은 더 이상 전할 것이 없어서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뒤에 보면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랬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항상 정의에 불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쉽게 ‘안 됩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만 합시다 ’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눅2장에 보면 중풍병자의 이야기가 나오고 친구가 넷이서 줄을 달아서 지붕을 뚫고 침상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당시에는 가옥을 어떻게 짓지었냐면 벽돌을 쌓아서 집을 만들고 지붕을 슬라브 처리를 했습니다. 슬라브 처리를 어떻게 하냐면 나무로 얼개를 놓고 그 위에 나뭇가지를 놓고 그 위에 이파리 달린 나무를 놓고 반대로 어긋맞게 놓고 그 위에 흙을 뿌렸습니다.
그러면 비가 많이 오지 않아 건조하니까 물을 발라서 놓으면 진흙처럼 굳습니다. 거기에 다시 나뭇가지를 놓고 흙을 덮고 또 흙을 덮고 하면 바람이 많이 불면 그 위에 쌓입니다. 그래가지고 흙은 더위를 막아주고 사이사이의 나무들은 흙을 결합시켜서 꽤 쓸 만한 지붕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올라가서 뜯은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그 지붕을 뜯었을 때 거기에서 먼지가 일어나고 흙이나 이런 것들이 떨어졌을 것입니다. 아래 사람이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으려고 나왔으니까 조용했을지 모르지만 자기네들은 계속 줄 서서 순서를 기다리는데 천정이 뜯어지고 거기에서 흙이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 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아, 정말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저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서 저러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개념 없이 놈이 올라가서 미친 짓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창조적인 사람들이냐 하면 머리 좋은 사람들이 사역에 있어서 창조적인 것이 아니라 심령에 매인 사람들이 창조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역에 있어서 창의성이 없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열렬하게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매임이 있고 불타게 되면 가능하지 않는 것도 없고 동원되지 않는 아이디어도 없습니다. 그것이 모든 창의력의 기본입니다.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 셋째 동생이 한 때 음식점을 했는데 하루는 그 음식점에 갔더니 자기네 집에서 새로 개발한 메뉴가 있는데 한 번 먹어보겠냐고 해서 그것이 뭐냐고 가져와 보라고 했더니 해물 떡볶이였습니다.
그래서 시켰는데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떡볶이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내 떡볶이의 수준에 대해서 설교보다 더 높은 자긍심을 갖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먹여 보았는데 내 떡볶이를 먹고 나면 떡볶이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바뀐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떡볶이를 만드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랴기를 했습니다. ‘형, 이 떡볶이를 만들기 위해서 매주 두 말 반의 쌀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떡볶이를 해서 만들어서 먹어보고 아니면 버리고 또 만들고 또 먹어보고 수없이 되풀이 해서 한 가마 이상 떡을 해서 쌀을 없애고 나온 파이널버전이었습니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했을 때 필라멘트를 만들었잖아요? 텅스텐으로 만드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전기를 통과만 시키면 필라멘트가 녹아서 끊어져버리는 것이었습니다. 1900번을 실패했습니다.
그 때 조수가 ‘사장님, 아무리 해도 안 됩니다. 1900번 째 입니다.’ 그럴 때 에디슨이 뭐라고 했냐면 ‘얼마나 놀라운 성과이냐?
우리는 1900개의 방법과 소재를 가지고 씨름 한 결과 그것으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것이 바로 굽힐 줄 모르는 목표에 대한 의식입니다. 타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주님의 마음이 이 땅에 당신의 나라를 이미 오게 하셨는데 이 나라는 반드시 올라가거든요.
우리는 모두 그 나라가 오게 하는 한 도구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아주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을 감당하면서 사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 일을 위해서 막 사역을 하고 우리들이 이 일을 감당해 나가고 있는데 예수님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종종 우리는 우리가 지도자로서 교회를 이끌고 여러분 부서를 이끌 때 열정에 불타는 우리의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랫사람들을 그런 사람들을 만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마음이 진정되고 열정이 식어질 수 있으면 그것은 충분한 열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만약에 열정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반대의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자, 내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분명히 해야 될 일이고 꼭 해야 되는 일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마음에 불타는 확신이 있습니다.
나의 경우 장로 한 사람이 그것을 반대합니다. 그러면 거기에서는 평안하게 웃으면서 회의를 처리합니다. 돌아 나오면서는 회의를 들어갈 때에는 꼭 하고 싶다, 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는데 반대에 부딪히게 될 때 나올 때에는 반드시 꼭 하고야 말리라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불은 잘 타고 있는 것을 만날 때 타는 것이 아니라 안타려고 하는 물질을 만날 때 불이 타는 것입니다. 불이 계속 타오르고 있는 것을 만날 때 타는 것이 아니라 안타려고 하는 장작이 툭 떨어질 때 그것을 삼키면서 불꽃을 더 내는 것입니다.
‘저 장로가 안 된다고 했지? 어떻게 되는지 반드시 된다는 것을 내가 보여줘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열정입니다. 그것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작년에 연변에 갔을 때 지도자들이 10여명이 아주 멀리서부터 모였습니다. 이번에 2월 달에 들어옵니다. 모일 때 느낌이 있는데 어떤 느낌을 받았냐면 나를 부른 이 경호 이 양반이 연변에서 목회를 하는데 약 600명 정도 모이는 삼자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목회를 하는데 무슨 동기였는지는 모르지만 열린 교회 이름을 듣고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책을 읽고 은혜를 받고 일부러 한국을 방문했답니다. 오면서 그 유명한 교회 목사님이 자기 같은 사람을 만나줄까? 이러고 왔답니다.
진짜 와서 보니까 정신없이 교회가 돌아가서 감히 자기가 연변에서 왔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예배당에 들어갔답니다.
그 분 표현에 의하면 자기가 회심한 이후로 주일날 그렇게 울어본 것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서부터 이 사람의 마음에 꽂힌 것입니다. 책을 읽고 테잎을 듣고 하면서 열렬하게 열린 교회 방문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오기도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탈북자를 도와주는 일이 금하고 있습니다.
탈북자가 교회에 오면 밥값도 좀 주고 옷도 주고 했답니다.
탈북자가 돌아다니다가 잡혔는데 어디에서 이 옷을 입고 돈은 어디서 났고 어떻게 했냐? 하니까 애들이 똑같이 그 교회에서 베풀어 줘서 이렇게 해줬다고 합니다. 공안에서는 잡힌 사람이 한 사람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잡히는 사람마다 한 교회 이름만 댔습니다. 그
래서 괘씸하게 생각을 하고 목사님을 불러다가 취조를 했습니다. ‘당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공안에서는 ‘제가 잘못 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뭘 잘못했느냐? 목사가, 교회가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라고 하는데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서 도와줘야 하는 것이 교회 사명인데 데 먹을 것 없다고 하고 잘 곳이 없다고 하는데 왔길래 옷 한 벌 주고 밥 사먹으라고 돈 좀 줬는데 그것이 그렇게 죄를 진 것이냐?’ 했더니 ‘그런 것 못하게 되어있다, 당신 교회 문 닫고 싶냐?’ 하면서 공안하고 양회에서 난리를 치니까 ‘그러면 나 처분해라, 그러면 나는 유엔에 가겠다. 나 유엔에 가서 중국에는 절대로 종교의 자유가 없다고 하겠다, 내가 뭘 잘못했느냐? 생각을 해 봐라 내가 뭘 잘못했느냐?
나한테 고마워해라, 뭘 너한테 고마워 하느냐 하니까 걔네들이 우리 교회에서 옷을 주고 밥값을 주니까 가만히 있었지 안 그랬으면 거기 사는 인민 중 누군가를 해치고 강도짓을 했을 것이다, 내가 뭘 잘못 했느냐?
그래도 나를 처벌하겠으면 처벌해라, 나는 유엔에 가겠다, 안 되면 국가 연합에 가겠다, 가서 다 까발리겠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하도 골머리가 아프니까 이 사람들이 양보를 해서 3개월 징계를 내렸는데 그 동안 너무 고생을 했으니까 3개월 휴가를 가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교회가 너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달 만에 설교를 했더니 공안 감시원으로 온 사람이 설교가 끝나고 나오니까 목사님을 붙잡고 당신 석 달 만에 와야지 어떻게 두 달 만에 왔느냐? 고 하니까 ‘당신들은 어떻게 그렇게 국사를 돌보고 할 일이 많은데 어떻게 그렇게 쪼잔 하냐? 그것을 여덟 주냐 12주냐 세고 있었느냐?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잔잔하냐?’ 하고 핀잔을 줬더니 가더랍니다.
그것이 열정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 분을 빼놓고는 제가 보기에 모두 착하고 목회상황에 순종적인 목회자들처럼 보였습니다. 삼자 교회가 핍박도 안 받습니다.
그래서 내가 언제 거기 다시 가리라고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래서 되는대로 속사포를 날렸습니다. 내가 마지막 비유를 들면서 ‘열정이 있느냐? 주님을 위해서 죽고 살 열정이 있느냐?’ 바둑을 두다가도 지니까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데 열정이 있느냐고 하니까 그 다음에 이경호 목사님을 만났는데 몇 명의 목사들이 그 날 밤 밤새도록 잠을 못 잤다고 합니다.
그 분들은 밥벌이 하려고 목사가 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옛날에 나름대로 주님을 만난 체험이 있어서 대접도 못 받고 그 혹독한 박해의 시절을 거쳐서 목사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핍박도 없고 고난도 없어요.
다만 좀 가난하다 뿐이지 그런 시절을 거치면서 정말 자신 속에 사라져가는 열정을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불타는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목회자가 차가운 것은 그 자체가 죄악입니다. 불타올라야 합니다. 이것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바깥에서 태워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자신 안에서 복음의 가치를 느끼면서 불타올라야 됩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이 경건한 불길을 유지하는 가장 훌륭한 비결은 복음의 가치, 내가 증거 해야 할 복음의 가치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하고 마음이 불타야 합니다.
그것이 열정을 유지하면서 사는 비결입니다. 그것이 아주 쉬운 말로 이야기하면 복음의 은혜를 매일매일 받아야 됩니다. 거기에서 타오르는 불길 같은 마음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거룩한 목표에 불타는 마음과 눈물이 있을 때 그대로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목회자의 그 모습을 보면서 깊은 찔림을 얻게 되고, 그렇게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격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작은 시냇물이 합쳐져서 강을 이루듯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