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하다, 좋아하다, 바라보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페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히 11:24-26)
녹취자: 김경애
우리가 읽은 세 구절을 세 가지 동사로 요약한다면 ‘거절하다, 좋아하다, 바라보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입양되어서 아마 왕족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화를 누리면서 자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주 분명한 의식이 살아 있었습니다. 아마도 어머니와 누이를 통한 교육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선민됨에 대한 지식이었습니다.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고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가치와 충돌했을 때 기꺼이 버렸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가치를 따라 살려고 할 때 버리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대부분의 많은 갈등은 희생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데 있고, 희생이 없이 신앙생활을 잘하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피할 수 없는 희생은 우리가 감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의 정신이고 그 복음의 정신을 최초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먼저 명심해야할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반드시 희생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을 희생 없이 하려고 할 때 우리에게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주고 그리고 신앙에서도 우리가 물러나게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거절해야 되는 때가 있다.’ 희생해야 될 때가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소극적이 것이고 적극적으로 무엇인가 더 원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더 좋아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 공주의 아들로서 양육된 것 자체가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시키는 가치를 따라서 이스라엘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신앙의 희생을 거절했기 때문에 버렸어야 할 믿음의 정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누리는 모든 것들은 결국은 죄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잠시’라는 부사가 붙습니다. 세상의 쾌락과 세상에서의 안일은 정말 잠깐 있는 것이고, 끝나고 나면 그 다음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그 뒤에 응분의 하나님의 판단이 따르게 됩니다. 고난 받기를 좋아했다는 것은 고난 자체를 좋아했다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지양하고 있는 가치를 좋아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은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것을 피하고 잠시 불순종으로 악을 누리는 것은 죄악이고 그것은 잠시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과 고난을 받음으로 이루어지는 가치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면서 마음 깊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내가 희생해야 된다는 사실을 마음에 인식할 뿐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 맡겨주신 이 사명과 직분을 신실하게 감당함으로써 지금 이미 내가 누리고 있는 것과 앞으로도 누리게 될 것 이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축복인가 하는 것을 묵상해야 합니다.
한국의 어느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그 당시로써는 양반이 아니라 그냥 노예까지는 아니어도 그저 상민으로서 아주 낮은 신분으로 살아가던 어느 성도가 주님을 잘 믿고 이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 우리로 말하자면 관리집사 사찰을 시킨 것입니다. 그분이 그렇게 교회를 위해서 진짜 감동적으로 눈물겨운 섬김으로 그 교회를 일평생 섬겼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자손들이 얼마나 복을 받았는지를 그 후에 목사님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대개 ‘그냥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크니까 참는다. 견딘다.’ 이렇게만 생각하는데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증인들을 믿음의 삶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던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왜? 여기 기록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의 사람들이 아니라 그 이전의 구약의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분들이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서 알았다고 하더라고 그때는 너무 희미했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 사람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앞으로 이 믿음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 베푸실 축복 즉 하나님이 주실 나에 삶에 대한 정당한 평가 이것을 오히려 더 좋아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거절할 뿐만 아니라 또한 좋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6절에 마지막을 보면, 지금 이야기한 것처럼 궁극적인 좋아함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바라봄’이라 입니다.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이 세상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았는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수모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당신의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에 만약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인도하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의 나라도 설 수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구원도 없었을 것이니까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받았던 모세의 수모를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거절하는 것이 순종의 소극적인 면을 보여준다면 좋아하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에 의무만으로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기쁨, 그 속에서 나오는 마음속의 깊은 환희와 기쁨, 이런 것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주시는 이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은 잠시 잠깐 후에 끝나게 될 것이고 그때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상을 베푸실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그 소망을 가지고 오늘 현재에 기쁨을 누리면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있어서 모든 좋은 삶의 여건들이 그들의 고통을 경감시키고 많은 괴로움들을 덜어줄 수는 있지만 인생을 빛나게 할 수는 없는 것처럼 우리의 사역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사역의 환경은 우리를 덜 힘들게 하고 그리고 우리가 편안하게 일할 수 있기는 하지만 기쁨 자체는 거기서부터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앙의 힘을 입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